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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5. 묵상글 ( 사순 제1주간 토요일. - 완전한 사랑에 초대 받은 복된 우리. 등 )
^ 호명환 신부님. 일부 : 아직 / 06:04 추가
^ 조명연 신부님 : 아직 / 05:58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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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5. 사순 제1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3.15 04:51
- 완전한 사랑에 초대 받은 복된 우리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은
너무도 엄청난 도전이고 불가능한 도전인 것 같습니다.
사실입니다.
그것이 무결점 완벽주의 차원에서 완전성의 문제라면
그것은 너무도 엄청난 도전이고 불가능한 도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버지처럼 완전해야 하는 것은 사랑에 있어서 완전함이고,
그것은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이라고 오늘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더 엄청나고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요?
이 또한 사실입니다.
하느님이나 하실 수 있는 원수 사랑을 우리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원수 사랑은 하느님 사랑이나 할 수 있는 것이기에
역설적으로 하느님 사랑을 우리가 지니면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원수 사랑에 도전할 때 제일 먼저 지녀야 할 것이 겸손입니다.
그리고 그 겸손은 내 사랑으로는 할 수 없다고,
우리 사랑 능력의 가난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애를 써 1억은 벌 수 있어도 100억은 벌 수 없는 경우,
그것을 도둑질하거나 사기 쳐서 벌려고 할 것이 아니라
가난하니 도와주십사고 하느님께 손을 내미는 것과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 다 하고 하느님 도움 청하는 것인데
그것은 원수를 사랑하려는 의지는 우리가 포기하지 말고
원수를 사랑할 힘 곧 애덕은 주십사고 청하는 겁니다.
애덕(Caritas/Charity)은 말 그대로 덕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사랑(Amor/Love)과 다른 것으로
사랑을 할 수 있는 힘 또는 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쨌거나 우리는 사랑을 할 수 있는 힘인 애덕이 없는데,
애덕이 내게 없음을 우리가 겸손히 인정하면,
그리고 애덕을 지니고자 하는 열망을 포기하지 않고 갖고 있다면
그것을 주실 수 있는 분 곧 만덕의 근원이신 분에게 그것을 청할 겁니다.
이것이 프란치스코가 ‘덕들에게 바치는 인사’에게 노래하는 것입니다.
“지극히 거룩한 덕들이여,
주님께서 당신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여러분 모두를 지켜주시기를!
온 세상 사람 그 누구도 정녕 먼저 자신이 죽지 않으면
여러분 가운데 어느 하나도 가질 수 없습니다.”
여기서 모든 덕은 원천이신 하느님에게서 흘러나오는 것이라고
프란치스코는 얘기하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겸손하게 청해야 하는 겁니다.
겸손하지 않으면 안 되고,
희망을 버려서도 안 되며,
열망을 가지고 주님께 청하면 됩니다.
할 수 없는 사랑을 하라고 억지 부리며 부담을 주신다고 원망할 것이 아니라
당신의 완전한 사랑으로 우리를 초대하신 그 사랑에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그 완전한 원수 사랑으로 우리를 초대하지 않으시고
‘그래, 너는 원수를 죽을 때까지 미워하며 살거라.’
또는 ‘너는 자기나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밖에 사랑할 줄 모르는
그 찌질한 사랑이나 하다 죽거라.’ 하신다면 우리는 얼마나 초라하고 비참합니까?
그러므로 이 고귀하고 완전한 원수 사랑으로 우리를 초대하신
주님 사랑에 감사하고 또 감사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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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5. 사순 제1주간 토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하느님의 신성한 사랑의 지극한 단순성!
하느님의 숨
2025.03.14. 16:37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3월 14일 금요일 (호명환 번역) 열한 번째 주간: 지극한 은총
우리는 급진적인 은총과 무조건적인 사랑이라는 더 깊은 복음을 아는가요?
리처드 신부는 하느님의 신성한 은총에 신뢰심을 두는 것이 얼마나 명료한 것이고 단순한 것인지에 대해 강조하여 말합니다:
초기의 영국 프란치스칸 수도자였던 윌리엄 오캄(William Ockham: 1285-1349)은 (그의 라틴어 이름 스펠링을 이용하여) "오캄의 면도날"(어떤 현상을 설명할 때 불필요한 가정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 '같은 주장을 하는 두 개의 설명이 있다면 한 개의 주장을 선택하는 것: 역자 주)이라 하는 지극히 중요한 원리를 주장했습니다. 그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장 적은 수의 가정이 요구되는 답이 정확한 한 가지 답일 것이다." 만일 그의 학생들이 무언가에 대한 진리를 찾기를 원했을 경우, 그는 학생들에게 가능한 한 많은 가정과 믿음, 혹은 복잡한 설명을 잘라내라고 했답니다. 위대한 진리는 신비로운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절대 복잡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오캄은 믿었습니다. 더 나은 답은 거의 언제나 더 단순한 것이라는 것이 그의 결론이었습니다.
저는 성숙한 예언자들이 정의와 보상, 징벌에 대한 모든 질문을 단순히 신성한 사랑에 호소함으로써 단순화했던 사람들이라고 믿습니다. 하느님의 무한하고 자기-희생적인 보살핌은 창조라는 극적인 사건 안에서 유일하게 필요한 가정이요 원인이자 요인 또는 가능한 변수입니다. 이외의 다른 모든 것은 - 오직 우리 영혼과 정신을 혼란하게 하는 - 불필요하고 유익하지 않은 복잡함을 야기시키는 것으로서 버려야 하는 것들입니다.
이것이 성숙하고 신비스러우면서도 - 동시에 단순하고 명료한 - 종교의 본질입니다. 우리는 가능한 한 많은 종교적 가정을 잘라내고, 한 가지의 유일한 확신 - 즉 이성적 논리에 의해서 증명되지는 않지만, 경험될 수는 있는 신성한 사랑 - 에만 오로지 종교의 토대를 두어야 합니다. 예언자들은 자기 자신들을 위해서도 그러한 신적 경험을 주장하면서 동시에 우리에게도 그런 경험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일들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들의 나머지 메시지 전체의 토대가 되는 한 가지 절대적인 토대요 급진적인 중심점입니다. 이로 인해 이들은 전혀 다른 종류의 선생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 신성하고 절대적인 사랑에 방해되는 것은 무엇이든 제거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아모스와 예레미야, 에제키엘, 그리고 이사야와 같은 예언자들이 외쳤던 신성한 비판의 목적입니다.
예언자들은 - 그리고 예수님은 - 하느님의 사랑 가득한 행동 방식을 인간 윤리와 행위를 위한 원천이요 목적이며 규준이고 기준이라고 주장할 용기를 지녔던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결국 다음의 질문만 남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은 무엇을 하시는가? 그리고 하느님이 어떻게 행하시는가?
만일 우리가 위협과 약속을, 그리스도교든 다른 어떤 종교나 세상의 신조든, 그것의 주된 틀로 삼는다면, 우리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폭력을 절대 넘어설 수 없습니다. 이원주의 - 무한하신 하느님이 순진한 보상/징벌의 세계관에 갇혀 계신 분이라는 생각 - 는 급진적인 은총과 무조건적인 사랑, 그리고 참된 존경심이라는 더 심오한 복음에 의해 대치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온 세상을 다니며 제가 만났던 사랑 가득한 사람들은, 만일 사랑이 모든 것의 모든 것이라면 그것은 모든 이를 위한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사랑을 빼 내어 버린다면 우리는 위대한 사랑의 영역(하느님 나라)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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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들은 우리가 다른 모든 것 위에 하느님을 사랑하고,
다른 모든 동반자보다 하느님께 사랑받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온 우주의 사랑으로 이끌 것이고 또한 반드시 그리 할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그토록 단죄하고자 하는 이들마저도 구원하는 사랑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언자들이 어렵사리 얻은 결론이요,
눈물로 이루어진 승리입니다.
이외에 다른 어떤 종류의 승리가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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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From Our Community
저는 96세인데 아직도 성장하고 있습니다. 저는 제 삶의 매일과 매순간, 매초를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의 경이로움을 느끼는 데 할애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저는 다음의 시를 지었습니다:
나의 모든 일이 끝날 무렵 / 나는 캠프 바깥, 움직이는 모래 위에 서 있다 / 여전히 놀라워하고, 여전히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을 생각하며 / 그리고 저 별들처럼 내 사슬에 묶여 노래한다 / 지구의 중력과 / 하늘의 은총 사이에 균형을 잡고 나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린다 / 지상의 힘들이 닿지 않는 곳에서도 / 여전히 저 별들처럼 내 사슬에 묶여 노래 부른다.
—Tim C.
Adapted from Richard Rohr, The Tears of Things: Prophetic Wisdom for an Age of Outrage (Convergent, 2025), 142–143, 151, 157, 159.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Geentanjal Khanna, Untitled (detail), 2016,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우리의 노력으로나 공로가 아닌 거저 주어지는 자비는 우리 삶에서 그저 손을 벌리기만 하면 되는 얻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경험하면서 알게 되는 하느님의 계시입니다. - 사실 우리는 물 한 방울처럼 별것 아닌 것 같고 때로는 계획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그리고 심지어는 극히 혼란한 상황에서도 이런 경험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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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하느님처럼" 살라고 창조해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숨
2025.03.15. 05:40
대개 사람들은 '황금률'(남이 나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라는 것 혹은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을 복음의 본질이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어떤 측면에서는 이 계명에는 빈틈이 있어 보입니다. 누군가가 '내'가 바라는 대로가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대로 '나'를 사랑해 준다면 여러분은 그것을 참된 사랑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아마도 "아니오!"라고 모두들 답할 것입니다.
레위기에 나오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라는 계명을 예수님도 잘 알고 계셨기에, 율법에서 무엇이 가장큰 계명이냐는 질문을 받으셨을 때 이 레위기의 계명을 하느님을 오롯이 사랑하라는 신명기의 계명(6,5)과 함께 말씀해 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당신 사랑을 온전히 보여 주실 십자가상의 죽음 직전에 제자들에게 주신 계명은 이를 훌쩍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해야 한다."(요한 13,34).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극심한 고통 중에 돌아가시면서 당신을 죽인 이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저들은 예수님을 원수로 여겼지만, 예수님은 저들을 끝까지 사랑해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아버지의 뜻이었으니까요! 이렇게 반역하는 자들의 마음을 사랑과 자비이신 아버지께로 돌리시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기꺼이 십자가를 받아들이셨습니다. 이 완전한 사랑 이외에는 이미 극도로 왜곡되어 있는 인간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신약성서의 저자들은 그리스교의 사랑을 이야기할 때 그리스어 단어 아가페(agape)를 사용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서 영감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에 완전히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에 대한 이해에 있어 완전히 새로운 토대를 놓아주는 개념입니다. 이 사랑은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에게 해를 입힌 이들에게 복수하고자 하고, 그들이 벌받는 것을 고소해하지 않습니까?! 자업자득이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 중 누구도 당신 사랑에서 배제되지 않기를 바라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사순시기에 깊이 묵상하고 의식해야 할 내용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고 말씀하시는데, 실제로 우리가 하느님처럼 완전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물론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이렇게 하느님처럼 완전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아셨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잊고 있는 아주 중요한 우리의 본질, 하느님으로부터 기원한 우리 존재의 본질을 말씀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완전한 사랑이신 하느님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그런 완전한 사랑이 본능으로 존재합니다. 실제로 인류 역사 안에서 많은 이가 이런 아가페 사랑을 증명해 주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하느님의 이 완전한 사랑,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절대 배제하지 않으시려는 이 완전한 사랑을 깊이 의식하고 인식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우리 안에 하느님께서 주신 하느님의 모상, 즉 하느님과 같은 사랑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알아차리기 시작할 것이고, 또 그 사랑을 발휘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일상 안에서 무의식적으로 가짜 현실인 우리 에고의 생각에 빠져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인 양 무의식적으로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원수를 미워하고 원수가 고통 중에 있을 때 고소해하는 것이 우리의 자연스러운 본능인 것처럼 여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존재 가장 깊은 곳에는 하느님과 같은 사랑을 할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에고의 경향에 따라 살아가면서 이 능력을 의식하지 못할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이라는 전제를 두시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누구도, 철천지 원수일지라도 당신 사랑에서 배제되기를 바라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의식하고 인식할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본능도 의식하고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완전한 사랑의 첫 번째 걸음은 하느님의 이 무한한 사랑을 의식하는 일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 들어있는 하느님 이미지가 이런 사랑이라면 우리는 이런 사랑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전에도 한 번 말씀드렸듯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하느님처럼" 살라고 창조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우리 인간을 당신의 모상대로 당신과 유사하게 창조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 마음 속에 들어있는 하느님 이미지가 심판하고 단죄하고 냉소적인 하느님이라면 우리는 그런 식으로 내 주변 사람들을 대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하느님 이미지는 우리가 의식할 때 갖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런 이미지는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살아갈 때, 즉 우리가 부지불식간에 우리 에고의 경향에 따라 살아갈 때 갖게 되는 하느님 이미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깨어 있어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깨어 의식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진정한 본질인 하느님 사랑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그들을 바라보는 눈을 하느님의 눈으로 바꾸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박해하는 사람들이 바뀌게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시선을 하느님의 시선으로 바꿀 수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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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5. 사순 제1주간 토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25.03.15 05:43
어렸을 때 타고 놀았던 시소가 생각납니다. 이 시소는 혼자 탈 수 없습니다. 아니 혼자 탈 수는 있지만 재미가 없습니다. 꼭 상대방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서로 가만히만 앉아 있으면 재미없어집니다. 내가 내려가면서 상대를 올리고, 또 상대가 내려가면서 나를 올려야 놀이가 됩니다.
이 세상 삶도 시소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서로 가만히만 있으면 재미가 없어지면서 시소 놀이가 되지 않는 것처럼, 서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삶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서로 올라가고 내려가고를 반복하는 시소 놀이처럼,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삶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문제는 나만 높이 올라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상대는 무조건 힘을 줘서 아래에서 자기를 받쳐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높이 올라가려는 마음을 버리려고 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더 편하고 쉬운 삶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려가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더 큰 기쁨 속에서 살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자기를 낮추라고 그래야 힘센 하느님께서 높여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따라서 남을 낮추어 내가 올라가는 삶이 아니라, 나를 낮추어 주님께서 나를 올리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보여 주신 모범인 자기를 낮추는 겸손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 삶은 사랑 안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사랑을 주는 사람만을 사랑한다면 하느님으로부터 상을 받을 수 없다고 하시지요. 또 자기 형제에게만 사랑을 주는 것 역시 남들과 다를 바 없다고 하십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은 세상의 기준과는 너무나 다릅니다. 즉, 자기를 낮추는 겸손이 담긴 사랑을 통해서만 그 사랑을 따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에 맞는 사랑의 실천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기준에 맞는 사랑의 실천, 자기를 낮추는 사랑의 실천, 이를 통해서만 하느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우리 역시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의 커다란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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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일하라! 하지만 비참하게 일하지 말고, 칭송받거나 연민 받기 위해 일하지 말라. 공동체에 최선인 것을 따라 행하거나, 아니면 잠잠히 있으라(아울렐리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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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5. 사순 제1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도 어제 <복음>에 이어, ‘의로움’에 대한 말씀을 들려줍니다. 오늘은 마지막 여섯 번째의 ‘의로움’인, ‘완전한 사랑’에 대한 말씀입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44)
참으로 혁명적인 선언이요 명령입니다. 이웃과 원수를 구분해서 처우를 달리 해온 이스라엘인들의 관행을 완전히 뒤엎는 일입니다. 이웃이나 원수를 가리지 않고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원수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며, 우리 자신에게서 미움을 없애기 위한 것만도 아니며, 사랑에 한계를 두지 말라는 것만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있는 그대로를 호의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그가 잘 되기를, 그가 구원되기를 바라며, 부족한 이를 부족한 채로, 원수를 원수인 채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곧 그가 나를 미워하지 않게 되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미워하는 채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그가 부족하기에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한층 더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그가 사랑이 더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죄인이기에 처벌받아야 하기보다, 죄인이기에 용서받아야 할 대상이듯이 말입니다. 동시에, 이는 나 자신만 구원받아야 할 존재요 사랑받아야 하는 존재인 것만이 아니라, 타인도 구원받아야 할 존재요 사랑받아야 할 존재임을 깨우쳐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 다음에, 한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만 하지 않으시고, 나아가 그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마치, 스테파노가 돌을 맞아 죽어가면서도 돌을 던지는 이들을 위해 기도한 것처럼(사도 7,60), 사도 바오로가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당하면서도 그들을 위해 기도한 것처럼(1코린 4,12), 훗날 당신께서 십자가에서 당신을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시게 될 것처럼, 말입니다. 사실, 원수를 미워하는 것을 넘어 사랑할 때라야, 또 악을 피하는 것을 넘어 선을 행할 때라야, 비로소 의로움을 행하게 되고 완전해 질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태 5,48)
참으로 놀라운 소명입니다. ‘하느님처럼 되라’고 소명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대체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것은 묘하게도, 자신의 결핍을 메울 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비울 때 일어납니다. 자신의 결핍과 한계를 극복하고 채울 때 생기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을 수락할 때 생겨납니다.
그러기에, ‘완전함’이란 그 어떤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있는 채로 완전하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자기의 결핍을 오히려 타자를 받아들이는 통로로 삼는 일이요, 그리하여 부족과 한계를 받아들일수록 온전해지게 되는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부족과 한계는 스스로 채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분의 선물을 끌어들이는 통로가 되고, 우리의 불완전함은 완전함이 들어오는 통로가 됩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한계와 결함은 우리의 완전함을 가져오는 선물입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2코린 12,9).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주님!
되갚지 않을 뿐 아니라 억울한 고통도 기꺼이 지게 하소서.
미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받아들여 사랑하고
사랑할 뿐 아니라 기도하게 하소서.
죄짓지 않을 뿐 아니라 죄인을 용서하고
용서할 뿐 아니라 선을 베풀게 하소서.
개방할 뿐 아니라 받아들여 수용하고
수용할 뿐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변형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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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5. 사순 제1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원숭이, 바나나, 판다 곰’을 보여 주면서 서로 관련이 있는 것을 짝지어 보라고 할 때, 동양인과 서양인의 판단이 다른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동양인 대부분은 ‘원숭이와 바나나’를 묶어서 생각한다고 합니다. 원숭이가 바나나를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양인은 관계를 중심으로 사고하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서양인은 ‘원숭이와 판다 곰’을 묶어서 생각한다고 합니다. 원숭이와 판다 곰은 같은 동물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양인은 종류를 중심으로 사고하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저도 원숭이와 바나나를 묶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했습니다. 원숭이가 바나나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동양인과 서양인은 큰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양인과 서양인은 각기 다른 문화와 역사를 만들어왔습니다. 동양인은 순환적인 생각을 많이 한다고 합니다. 계절이 가고 오듯이, 윤회와 업보를 생각하며 운명을 받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서양인은 직선적인 생각을 많이 한다고 합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듯이, 최후의 심판을 생각하며 깨어 있으라고 말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빵’에 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줄 내 몸이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곁을 떠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도 나를 떠나겠느냐?” 그러자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이는 꼴찌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기가 더 쉽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야 한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 중에는 ‘예포자’ 들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을 포기한 사람들입니다.
저는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는 신앙인들을 보았습니다. 저는 아름다운 신앙을 보여주는 분들을 보았습니다. 비가 많이 오는 여름날, 성당 창문을 닫고, 하수구의 오물을 걷어내고, 성모상 앞에서 기도하고 가시는 분을 보았습니다.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명절이 되면 어르신들에게 떡을 나누어주시는 분도 보았습니다. 본당 신부가 피정을 가면 매일 성당에 나오셔서 마당을 치우고, 수녀님을 도와주시는 분도 있었습니다. 화가 치밀어 싸움에 이르려는 순간에 본당 신부의 말을 생각하며 용서했다는 분도 있었습니다. 교회가 아름다운 것은 성직자, 수도자들이 있어서만은 아닐 것입니다. 교회가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마음을 삶으로 드러내는 신앙인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사랑은 우리가 살아야 하는 이유이고, 우리가 살기 위한 길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주 너희 하느님께서 이 규정과 법규들을 실천하라고 너희에게 명령하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것들을 명심하여 실천해야 한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님의 규정과 법규를 지키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야 할 길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살면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모든 민족 위에 높이 세우시고, 찬양과 명성과 영화를 받게 하신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신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백성’이 가야 할 길을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 박해하는 이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신앙인이 가야 할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하느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온전한 길을 걷는 이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 행복하여라, 그분의 법을 따르는 이들, 마음을 다하여 그분을 찾는 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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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5. 사순 제1주간 토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어릴때 책상에 금긋기 해 보셨을까요? 그 시절에는 왜 그리 짝꿍과 싸웠을까요? 지금 만약 제게 짝꿍이 있다면 진짜 잘해줄 텐데 말입니다. 책상 중간에 줄을 그으면서 그것 가지고도 싸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제 쪽을 조금더 넓게 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공평함과 거리가 멀었던 것이죠. 지금은 어떨까요? 사람들은 어른이 되어가면서 점점 더 공평함을 추구하며 살아갈까요? 아니면 점점 자신의 것만을 생각하며 살아갈까요? 전자도 있겠지만 후자가 더 일반적인 모습이리라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냐? 그것은 세리들도 다른 민족들도 하는 것 아니냐.’라고….
그러시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 완전함은 ‘완전무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여기에서 완전함은 보편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의인도 사랑하지만, 죄인도 사랑하시는 하느님처럼. 모든 만물을 같은 마음으로 사랑하시는 하느님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이는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나에게 죄를 지은 사람을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똑같이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나를 무시했던 사람과 나를 존중해주는 사람을 똑같이 대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세상은 말합니다. 그것이 오히려 정의롭지 못한 모습이라고 말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우리에게 완전함을 요구하십니다. 하느님처럼 보편적 사랑, 즉 누구에게나 똑같은 사랑을 보여 주는 우리가 되기를 바라시는 마음입니다.
⭐죽음의 리허설
자신과 싸우며 욕구와 감정을 억제하는 것.
이는 자신에게 죽음과도 같은 경험일 것입니다.
자신을 죽이고 또 죽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는 괴롭지만 결국 풍성한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우리는 사순을 지내고 있습니다.
욕구와 감정의 억제로 우리는 주님 수난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기억하세요.
수난은 부활로 연결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짙은 새벽의 어둠이 떠오르는 태양과 이어지듯 말입니다.
‘작은 죽음’으로
부활의 열매를 맛보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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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5. 사순 제1주간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명품인생(2)
“원수를 사랑하여라”
“행복하여라, 온전한 길을 걷는 이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시편119,1)
어제 복음이 예수님의 독특한 “제1 대당명제:성내지 마라”가 주제였다면 오늘 복음은 훌쩍 뛰어넘어 “제6 대당명제:원수를 사랑하라”를 다룹니다. 참고로 “제2 대당명제;남의 아내를 탐내지 마라, 제3 대당명제:아내를 소박하지 마라, 제4대당 명제: 맹세하지 마라, 제5 대당명제: 보복하지 마라”입니다. 모두가 “하지 마라”는 부정명령인데 오늘 복음의 대당명제만은 긍정형으로 “원수를 사랑하라”입니다.
명품인생의 절정이 원수사랑입니다. 오늘 강론제목은 어제에 이어 명품인생 시리즈 2번째에 해당됩니다. 어제 강론은 참 많은 분들이 공감하며 좋아했습니다. 어제는 미사가 끝난후 미사도구를 치우는 젊은 수도형제 셋과 악수하며, “수사님, 명품수도자가 되십시오.” 격려하니 수줍은 듯 웃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수도형제 한분한분이 다 명품수도자로 보였습니다. 수도자뿐 아니라 평소 예사롭게 대하던 형제자매들 역시 명품인생으로 보였으니 놀라운 발견이요 깨달음이었습니다.
새삼 깨닫는바 마음 깊이에는 누구나 명품인생이 되고 싶다는 갈망이, 소망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매님의 명품인생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주님의 축복을 빕니다.” 많은 분들에게 보낸 격려의 메시지였습니다. 자기 삶의 자리에서 맡은 바 책임을 다하며 존엄한 품위의 삶을 사는 분들입니다. 명품인생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인간의 본질은 사랑임을 뜻합니다. 사랑해서 사람이고 하느님을 닮아 본연의 품위있는 명품인생으로 만드는 사랑입니다. 무엇보다 하느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닮은 사랑이 어머니의 사랑일 것입니다. 온 인류의 어머니 같은 사랑이 바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은 연인간의 에로스 사랑이, 친구간의 필리아 사랑이 아니라 무조건적 일방적 사랑인 아가페 사랑입니다.
어제는 강론과 더불어 “사랑을 노래하라”는 시계 그림을 나눴고, 이어 작가의 같은 제목(sing of love 6)의 그림 하나를 다음과 같은 해설과 곁들여 선물 받았습니다. 70이 넘은 작가가 지금도 그리는바 어렸을적 바다같은 어머니의 사랑이었습니다.
“저는 어릴적 어머니가 불러주시던 섬집아기 노래말이, ‘엄마가 섬그늘에 굴따러가면 아기는 혼자남아...’라는 노래 생각이 납니다. 어머니도 그리워지고, 바다의 파도소리는 사랑으로 아기를 재워주지요. 또 바다밑 고래와 물고기 등 많은 생물을 품어주지요. 그 모든 것을 사랑으로 노래하며 안아준답니다.”
이에 대한 제 답글입니다.
“섬집아기 동요는 제가 2절까지 산책시 자주 부르는 애창곡이지요. 80에 접어드는 나이에도 동요를 부릅니다. 어머님이 참 자상한 분이 셨네요! 신림때 뵈었던 어머니는 사려깊고 어질고 지혜로운 모습이셨지요.”
바다같은 어머니의 사랑은 그대로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닮았습니다. ‘바다’라는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바다가
바다에 가다니요
그냥 있으세요
당신은
늘 깊고 넓은 바다예요.”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말씀은 이런 바다같은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지니라는 것입니다. 원수를 좋아하라는 것이 아니라, 최종 심판은 하느님께 맡기고 한없이 인내하며 그냥 인간에 대한 기본적 존중과 배려, 측은지심의 사랑을 지니고 품위있게 살라는 것입니다. 이래야 우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하십니다. 내눈에 원수지 하느님 눈에는 다를 수 있습니다. 악이 사랑의 결핍이듯, 원수라하지만 뭔가 모르는 까닭이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원수라 해도 그 어머니에게는 우주같은 자식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모두를 품에 안고 키우는 바다를,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시는 대자대비하신 하느님 아버지를 닮으라는 것입니다. 이래야 진정 명품인생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우리 인간에 대한 기대수준은 이토록 높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신망애를 말하지만 역으로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신망애도 상상을 초월합니다. 우리를 한없이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하느님 아버지입니다. 오늘 복음의 후반부 말씀이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들에게도 큰 울림을 줍니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이런 유유상종의 끼리끼리 사랑은, 동호회의 동아리들이 주고받는 그런 사랑은 누구나 합니다. 이런 유유상종의 사랑을 넘어 하느님 아버지의 차별없는 공평무사, 대자대비하신 사랑을 닮으라는, 다음 결론같은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믿는 이들 누구나에게 주어진 평생 숙제입니다. 하늘을 향해 끝없이 열려 있는 사랑의 완전함입니다. 이래서 우리 삶은 하느님 사랑을 닮아가는 하닮의 여정, 사랑의 여정이라 하는 것이요, 삶의 과정과 더불어 점차 완성되어가는 명품인생입니다.
거룩한 사람이,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바로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완전함(perfection)은 온전함(wholness)입니다. 거룩함(holiness)과 온전함(wholness)이 영어 발음도 똑같습니다. “둥근 삶, 둥근 마음”이란 제 저서의 말마디처럼 온전함은 둥근 사랑을 뜻합니다. 성인이라 일컫든 옛 유엔 사무총장 함마슐드의 언급도 신선한 충격의 감동이요 우리의 책임감을 고무합니다.
“여러분의 책임은 실로 놀랍습니다...여러분은 하느님께 책임이 있음을 명심하십시오. 과연 여러분은 하느님을 위한 책임을 수행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을 닮아 거룩한 사람이 되라는,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는, 온전한 사람이 되라는 평생 과제의 책임을 끝까지 이행할 수 있는가 묻습니다. 삶은 은총의 선물이자 평생과제입니다. 하느님의 모상으로 태어났다는 선물인생은 평생과제의 사랑 책임을 다하면서 비로소 하느님의 자녀가, 명품인생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육신의 성장은 멈추고 노쇠해가도 하느님 향한 신망애는 끊임없이 성장, 성숙해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집중적 영성수련으로 욕심을 비우고 몸은 가볍고 맘은 즐겁게 눈길은 주님께 두고 초연히 영적으로 살아야 할 은총의 사순시기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은 새 모세인 예수님이 신명기의 모세가 명령한 말씀을 구체화 한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 신명기 말씀중 오늘이란 말마디가 무려 3회 나옵니다. 하느님께는 언제나 영원한 오늘입니다.
“오늘 주 너희 하느님께서 이 규정과 법규들을 실천하라고 너희에게 명령하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것들을 명심하여 실천해야 한다.”
바로 이 규정과 법규가 새 모세 예수님의 산상설교(마태5-7장)를 통해 구체화됩니다. 산상설교의 절정인 원수 사랑의 경지에 이를 때 모세를 통한 주님의 약속대로 주님은 우리를 모든 민족들 위에 높이 세우시고, 우리가 찬양과 명성과 영화를 받게 하시며, 주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신다 합니다. 이 거룩한 명품종교 가톨릭교회의 거룩한 명품 미사 전례 은총이 우리 모두 '하닮의 여정'중 명품인생이 되는데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행복하여라, 그분의 법을 따르는 이들,
마음을 다하여 그분을 찾는 이들!”(시편119,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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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5. 사순 제1주간 토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리 가는 사랑>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하고프니
하는 사랑에서
하고프지 않아도
하는 사랑으로
할 수 있으니
하는 사랑에서
할 수 없어도
하는 사랑으로
할 만큼
하는 사랑에서
할 만큼 너머
하는 사랑으로
사랑받으러
하는 사랑에서
사랑하러
하는 사랑으로
그러므로
하는 사랑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는 사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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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5. 사순 제1주간 토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3-44)
미움으로 자신을 고립시킨다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서 분노에서 살인이 태어나고 욕정에서 간음이 태어나는지 보았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원수에 대한 미움은 친구 사이의 사랑으로 사라집니다. 여러분이 어떤 사람을 원수로 생각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여러분의 자비심에 그가 흔들렸다고 합시다. 그러면 여러분은 그를 친구로 사랑할 것입니다. 저는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명령하신 것은 우리 원수보다 우리를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원수가 남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자라서가 아니라, 우리는 아무도 미워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지요. 미움은 어두운 곳에서 태어난 괴물입니다. 그것은 가는 곳마다 건전한 생각의 아름다움을 더럽힙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원수를 소중히 여기도록 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서 나쁜 것을 없애 버리기 위해 원수를 사랑하라고 이르십니다. 모세 율법은 원수에게 신체적 해를 입히는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원수를 미워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단지 그를 미워하기만 해도 여러분은 그의 육체에 대해서보다 여러분의 영에 더 큰 혜를 입힙니다. 여러분이 원수를 미워하더라도 그에게 아무런 해를 입히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이 여러분 자신을 휘저어 놓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러니 원수에게 자비를 베푼다면, 그자보다 여러분 자신을 살린 것입니다. 그에게 친절을 베푼다면, 그자보다 여러분 자신에게 더 이로운 일을 하는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 미완성 작품-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6
의지를 버려라
모세는 그의 하느님 야훼께 애원했다(탈출 32,11).
내가 다른 이의 마음을 상하게 한다면, 그것은 구채적인 개인의 마음을 상하게 한 것만이 아니라 인성을 상하게 한 것이다. 인성을 상하게 하는 것은, 한 개인일 뿐만 아니라 인류의 대표인 그리스도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과 같다. 신비스런 공동체는 한 개인이 기뻐 뛸 때 함께 기뻐 뛰고, 한 개인이 괴로워할 때 함께 괴로워한다.
아집을 버리는 것이야말로 모든 사람의 기쁨과 고통 속에서 하나 됨을 깨달을 수 있는 비결이다. 모세는 기꺼이 그렇게 하려고 했다. 즉. 그는 자기 백성의 영광을 위하여 자기의 의지를 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먼저 하느님 앞에서 자기 의지를 버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처럼 인성 자체는 대단히 고귀하다. 왜냐하면 최고의 인성은 천사들과 동격이고 신성과 친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이런저런 개인의 특징을 버리고,우리 자신을 ‘인성’으로 여길 수만 있다면, 그리스도가 하느님과 이루었던 최고의 일치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인성 그 자체는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는다. 가장 가난하고 가장 천대받는 사람 속에 있는 ‘인성’ 이나 교황과 황제 속에 있는 인성이나 똑같이 완전하다. 인성이야 말로 개인으로서의 우리보다 더 사랑할 만한 대상이다. 내 안에 들어 있는 인격보다 ‘인성’이 더 귀중하다. 그렇다면 엑카르트라면 우리의 휘황찬란한 고립주의와 무뚝뚝한 개인주의를 버리라고 주장했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라는 게 있게 하기 위해 나라는 것을 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주/객 관계를 버리고 만유내재신론의 관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나의 것을 버리고 우리의 것으로 나아가는 것이다.(350)
✝️ 토요일 이웃 종교(생태)의 날✝️
이름 없는 하느님, 김경재
하느님 신앙과 동학의 시천주
한울님을 몸으로 모신다는 것은 생물학적인 육체 안에 한울님을 가둔다는 것이 이니다. 한울님은 특정 시공간에 갇힐 분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이 구체적으로 한울님을 모시는 길은 몸, 곧 나의 전체 생명 , 지정의 총체적 생명을드러내 생명의 지성소에 모시는 것이다. 그때엔 내가 모시는 것이지만 어느덧 한울님이 , 신령하신 영으로서 모시는 자의 생명 안에 내주(內住)하시며 , 나를 둘러싼 일체의 생명 현상 및 우주와 역동적 관계로 유기체적 동체(同體) 의식을 갖도록 우주 의식으로 충만하게 한다. 그때는 한울님은 우리 안과 밖과 위와 주위에 야스퍼스가 말하는 ‘무제약적 포괄자’ 로서 느껴지지 때문에, 온 세상 사람들은 한울님과 떨어져서 살아 갈 수 없다는 존재론적 사실을 경험하게 된다. 동학과 그리스도교의 종교 체험이 유형론적으로 통하는 점이 아주 많기에 다시 한 번 그리스도교의 신 체험과 비교한다면, 이는 ‘하나님은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안에 계신 이" (에베소서 4: 6)로 체험하는 경지와 통한다.
마지막으로 동학의 ‘강령 주문’ 미지막 구절을 음미해 보자.
“조회정 영세불망 민시지"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라는 열 자는 앞선 열한 자 주문의 후반부를 이루면서, 한울님을 모신 자의 결과론적 존재 상태와 축복을 언급한 것이다. ‘한울님' 을 지극한 태도로서 온 생명을다하여 모시면 어떻게 되는가? ‘조화’란 요술을 부리는 신선의 술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힘이 없이 되는 이치와 생명 현상이다. 자동 기계적인 인과율의 법칙성도 아니고, 초능력과 초자연이 개입히여 이루어지는 타율적인 신기함도 아니다. ‘조화’ 라는 말은 창조성과 자연 발생성이라는 두 측면이 갈등 없이 통전되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내가 하는 일이면서도 나를 넘어선 우주적인 힘을 타고서 이뤄지는 일이다.(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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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5. 사순 제1주간 토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기본도 못하는데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세상 사람이 더 잘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합니다.
강만연 [fisherpeter] 250315. 03:38 ㅣNo.180748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말씀을 하십니다. 실제 보면 원수를 사랑한 사례를 본 적이 있긴 합니다. 개신교 목사의 사례이지만 익히 잘 알려진 사례입니다. 자신의 아들을 죽인 사람을 양자로 받아들인 사례입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결론은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의 내용을 바탕으로 해서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의 절차적인 단계를 보면 첫째가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만 하는 것으론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건 다른 민족들도 한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이 사례를 언급하시면서 결론을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를 사용하셨습니다. 철저히 완전하다라는 말의 기준을 복음만을 놓고 묵상해봤습니다. 잠에서 깨 다시 자려고 하다가 그냥 복음을 읽고 묵상글을 남깁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에는 완전한 게 이것밖에 없겠습니까? 그건 아닐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큰 이 세 가지 사례 속에서 이걸 완전의 기준으로 말씀하셨다면 그 사이 틈새의 행간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묵상해보는 게 좋을 듯합니다.
원수에 대한 내용이 첫 번째로 나오긴 했지만 이건 거의 몇몇 사람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거의 성인 수준에 이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경지입니다. 인간으로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이 내용은 잠시 접고 그 다음을 유심히 봐야 할 것입니다. 왜 제가 그다음을 언급하느냐 하면 너무 고차원적인 ‘원수 사랑’은 사실 언급하는 게 무용지물과도 같은 것이고 우린 그 단계 이하도 실천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만이라도 실천할 수 있는 방안을 생각해보는 게 더 합리적일 것입니다. 기지도 못하는 사람이 나는 것을 생각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나는 것을 기대하고 희망해야 날 수도 있지 않겠느냐 하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일면 그럴 듯하지만 말장난입니다. 그게 맞는 말인 경우도 있긴 하지만 오늘과 같은 상황에서는 전혀 맞지 않습니다. 사실은 오늘 복음의 핵심은 제가 판단했을 땐 두 번째와 세 번째에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 세 번째 이 사례도 우리는 실천이 불가능한 것은 아닌데 사실 실천을 하기 힘들다고 생각하는 사례입니다. 불가능은 아닌데 어렵습니다. 사실 냉정하게 말하면 이건 기본입니다. 그나마 두 번째 사례는 그렇다쳐도 세 번째인 인사는 가장 기본적인 사례입니다. 이것조차도 안 된다면 그건 참 뭐라 이야기할 수 없을 것입니다.
2000년 전에도 오죽했으면 예수님께서 인사까지도 완전한 사람이 되는 조건에 그걸 넣으셨겠습니까? 제가 개종 후 본 사례를 보면 가장 기본적인 예의인 이것도 안 되는 사람 정말 많습니다. 인사를 해도 어떤 특정한 사람은 인사 자체도 안 하지만 또 인사를 해도 무덤덤한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인간의 도리로 아랫사람이 안 할 수도 없고 이런 무례한 사람이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성당을 다닌다는 사실을 보면 완전을 기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입니다. 이건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다른 글에서도 언급을 한 적이 있지만 바로 기본입니다. 기본이 안 되면 완전은 그냥 이상입니다.
저는 다른 종교에서도 20대부터 항상 주장한 게 있습니다. 어린 나이였지만 “기지도 못하면서 날 것부터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성경에 나오는 것부터 실천할 게 아니라 인간 세상 법도부터 실천해야 한다”는 이 사실을 제 주위 사람들에게 공손하게 말했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인사만 가지고 이야기하신 게 아닐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당을 다녀도 거창한 것부터 할 게 아니라 사람 사는 세상에서 사람의 기본 도리라도 지킬 수 있는 신자가 되는 게 최소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으로서 예수님의 얼굴에 먹칠이라도 하지 않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은 편의상 3월 매일미사를 구입하지 못해 물론 전례독서집 평신도용 다섯 권짜리가 있지만 복음을 굿뉴스를 통해 보려고 하다가 폰에서 김혜수 탤런트 기사 하나가 있어 봤는데 이 기사를 보고 순간 떠오른 생활묵상이 있었는데 한번 올리고 싶습니다. 사실 이 내용도 오늘 복음과 매치를 할 수도 있었는데 너무 길 것 같아 생략한 것입니다. 그리고 어제는 일 년에 두 번하는 가스점검을 했습니다. 이걸 사순 판공성사와 관련한 생활묵상 글 하나를 남기고 싶었습니다. 또 어제 낮에 폰에서 잠시 굿뉴스에 들어오니 자유게시판에 주목을 끄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냉담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하는 내용이라 눈에 끌려 클릭을 해보니 글이 없었습니다. 스스로 내린 글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이 제목을 보면서 저는 어제 많은 묵상을 했습니다. 이 세 가지 내용을 가지고 시간을 내 묵상글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지금 세 가지 다 작성을 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하면 진이 다 빠질 것 같아 천천히 하나씩 공개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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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5. 사순 제1주간 토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살다 보면 미운 그이가 곁에 설수도 /
박윤식 [big-llight] 250314. 20:23 ㅣNo.180742
우리는 사랑하는 법 잊었을까? 자연, 나, 너, 그리고 하느님으로 묶인 체계가 하나임을 몰랐기에. 하느님 유전자를 지닌 존재는 모두 한 덩치인 공동체다. 우리는 이 공동체의 틈새에 산다. 평생 쌀 한 톨 수확해 본적 없지만 굶지 않는 게 그 증거일 게다. 여기엔 완전하신 분과 그분 사랑이 있고, 완전하게 되는 길은 그 속에 있는 것이며, 그를 위해 내 안의 작은 사랑 늘 실천하는 거다. 그게 삶이다. 이 사랑 가로막는 것이 미움이요 시기로, 어쩌면 그것은 단절이다.
예수님께서는 용서와 사랑으로 소통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공동체로 살고자 하는 이유는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기 위해서이며, 그것이 하느님 아버지께 다가가는 길이다. 하느님의 유전자이다. 사람이 하느님을 가장 닮는 순간은 누군가를 사랑할 때이다. 그분께서는 모두에게 땅과 하늘, 빛, 공기와 물을 주시면서, ‘사랑하라!’ 라고 하셨다. 원수마저 사랑하라 하신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지? 좋은 방법은 원수 안 만드는 거다. 허나 살면서 원수 아닌 미운이 분명 생긴다. 그가 미운 짓 했기에 미운 그 감정 쌓인 것일까? 아니 내가 미움을 줬기에 되받은 건가?
그러면 이왕 미운 이 있다면 어떻게 풀어야지? 무작정 잊고는 처음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우리네 감정은 그렇게 이론적이지만은 않다. 무엇보다 먼저 시간이 요구된다. 미움이 쌓인 세월만큼은 아니더라도 분명 필요하다. 그걸 무시하고 곧바로 그 자리서 털어 버리려다가 생각지도 않던 더 큰 문제 생기더라나. 감정은 스스로 녹는 거지, 단방에 털어지는 게 분명 아님은.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이렇게 영원한 원수마저 사랑하라는 그분 가르침은, 알아듣기가 참으로 어렵다.
먼저 우리에게 원수란 과연 있는가가 의문이다. 원수는 없는 것 같은데 미운 이가 가슴에 남아 있다. 사람들은 그들을 ‘웬쑤’라 한다. 그 웬쑤!라면서 이까지 갈더라. 제게도 몇 놈 있다. 멀리도 아닌 아주 가까이에. 그 원수와의 미움은 항상 부메랑이 되어 자신에게 돌아온다. 내가 아무리 그를 미워한다 해서 그가 벼락 맞거나 사고를 당 할리 없다. 미워하는 만큼 나 자신만 되레 불편해질게다. 미움은 또 다른 미움 낳는다. 미움은 친구조차 하루아침에 원수로 만든다.
반대로 사랑은 예수님이 그토록 강조하신 그 원수조차 친구로 만든다.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면 그이 떠나면 이내 좌절할 수밖에. 사랑은 내가 먼저 감동 주는 거다. 예수님은 누구누구 절대 가리지 말라면서 그 웬쑤까지 사랑하시란다. 나를 위해 희생하는 이를 무관심하게 두고 그 원수 사랑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게 될 리가 없다. 누가 들으면 웃을 일이다.
그러니 먼저 나를 사랑한 이에게 더 다가가자. 그게 순서다. 그렇게 살다 보면 언젠가 미운 그이가 곁에 서리라. 은총이 끌어 준 걸까? 미움이 지나면서 그 웬수 그렇게 드러난다. 하느님께서는 악인도 선인에게도 당신 해 떠오르게 하시고, 비도 내려 주신다. 그러니 오늘도 나를 그토록 성가시게 군 그를 위해 기도하자. 찐한 사랑은 가슴으로 하는 거란다. 자신의 마음이 움직였을 때, 미움마저 사랑이 될 게다. 한평생 살다 보면 언젠가 미운 그이가 곁에 서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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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5. 사순 제1주간 토요일. 한창현 모세 신부님.
예수님께서 전하신 율법 해석의 핵심은 바로 원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마음속으로 형제를 미워해서는 안 된다.”(레위 19,17)라는 율법의 말씀을 넘어,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그리고 하느님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때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완전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그동안 용서할 수 없었던 원수들을 무조건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당장은 불가능해 보이지만 원수를 사랑하려고 노력하고, 그 과정에서 우리의 시선을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을 향하여 돌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떻게 노력해야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지 막막하게만 느껴진다면, 자신을 괴롭혔던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부터 시작해 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이때 ‘잠심’이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잠심이란 화의 감정을 알되, 그 감정이 나에게 영향을 주지 않게 객관화하여 내면의 감정 문제를 제대로 보고 정화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훈련으로 우리는 감정에 휩싸이지 않고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있으며, 그 안에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저는 잠심을 훈련하며 기도 안에서 저를 힘들게 하였던 사람을 바라보았고, 그 사람이 쏟아 내었던 말들이 지난날과는 다르게 들렸던 체험이 있습니다.
그때 그 사람이 저에게 쏟아 내었던 폭력적인 말들이 사실은 그 사람이 무서워서 어찌할 바를 몰라서 질렀던 비명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원망과 미움이 연민으로 바뀌는 체험이었습니다.
그때의 경험으로 저는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만은 않다고 생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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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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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5. 사순 제1주간 토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원수를 사랑해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는
주님의 기도에 나오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와
같은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신 배경을 보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계시기에
빈말을 되풀이하지 말고
당신께서 가르쳐 주신 것처럼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필요를 알고 채워주시는 하느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는
악인이나 선인이나 모두를 사랑하시는 분으로
묘사됩니다.
모두가 다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의로운 이나 불의한 이라는 구분이 없습니다.
여기에서의 어려움은
내가 생각했을 때 악인 또는 불의한 사람인데
그도 하느님의 자녀라고 한다면
나는 오히려
하느님의 자녀로 남고 싶지 않을 수 있습니다.
형제들 사이에 다툼이 있는 경우
부모님을 만나러 갔다가
그 형제를 만날 수 있어서
부모님과도 거리를 두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또한 루카복음에 나오는 첫째 아들처럼
둘째 아들에게 너그러운 아버지가
마음에 들지 않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면
결국 나에게 손해입니다.
하느님 없이는 살 수 없는 것이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함께 있으면
그 공동체 안에 머무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공동체를 떠나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공동체를 떠나면서
하느님과도 멀어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 공동체 안에서 살면서
하느님과의 관계가 거의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우리가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면서
내가 싫어하는 그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께 초점을 맞출 때
그가 우리 공동체 안에 있어도
그와 함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하느님과의 관계에 집중할수록
그것은 가능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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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5. 사순 제1주간 토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 44)
우리는
원수를 선택한
사람들이 아니라
사랑이신
하느님을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그 어느
순간에도
평화를 위한
우리의 사랑은
어떠하신지요.
평화를
깨뜨리는 것은
우리가 증오하는
증오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도사리고 있는
우리자신의
증오심입니다.
원수를
받아들이는 것이
십자가의
진정한
사랑입니다.
언제나
삶의
변함없는
해결책은
사랑입니다.
미움에서
빠져나오는
길 또한
오직
사랑뿐입니다.
고정된
미움의 껍질을
벗는 우리의
진실한
사랑입니다.
미움의 악순환은
모든 관계를
파괴하고
영혼을
좀먹습니다.
하느님을
모신다는 것은
박해자들을 위해
우리가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그 길이
곧 우리자신을
진정 살리고
우리자신을
진정 사랑하는
길입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사랑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우리의 증오심을
내려놓습니다.
진심으로
기도하는
우리 영혼의
사순입니다.
평화로운
사랑의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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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5. 사순 제1주간 토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가짜 사랑에서 진짜 사랑, 작은 사랑에서 큰 사랑으로 넘어갑시다!
유다인들의 생활 준거는 너무나 간단했습니다.
그저 법대로입니다. 특히 동태복수법이 강조됩니다.
누군가가 내게 잘못해서 내게 피해를 끼쳤다면 더 이상도 더 이하도 아니고 꼭 그만큼을 요구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실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혈육들, 가족, 친척, 친구들, 다시 말해서 이웃들은 당연히 사랑을 실천하고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그러나 원수들, 이방인들, 큰 피해와 상처를 준 사람들, 우호적이지 않은 다른 민족들은 늘 경계의 대상입니다.
그들은 사랑의 실천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과 제자들이 사마리아 지방에 이르렀을 때 안 그래도 노는 물이 다른 종족,
더럽혀진 사람들로 여겼는데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내자 제자들도 즉시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렇습니다.
“스승님 저들을 그냥 둬서 되겠습니까?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저들을 불살라버릴까요?”
제자들은 아직도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는 전통적인 가르침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사랑에 대한 이해’는 아직도 구약시대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가족이나 동족들에게는 뜨거운 사랑을 베풀지만 나를 냉대하고 피가 다른 이민족들은 사람 취급도 안했습니다.
그저 그들은 물리치고 이겨내야 할 대상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도래로 인해 이제 새로운 시대, 새로운 세상이 열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종래 인간이 지니고 있었던 사랑의 개념을 더 크게 확장시킵니다.
나를 사랑하는 이웃들에게만 한정시켰던 사랑의 실천을 나와 무관한 사람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을 넘어 나를 박해하고 나를 위협하는 원수들에게까지 확장시킵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내 사랑이 이만하면 충분하겠지, 생각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갈 것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사랑이 보다 큰 사랑, 보다 이타적인 사랑, 보다 신적인 사랑으로 넓혀나갈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주님 정신, 주님 마음이 우리 영혼 안에 깃들게 될 때, 그분의 정신과 마음이 우리 안에서 자라게 될때, 우리는 인간 현실의 옹색함에서 벗어나 광활한 지평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 특유의 비루함에서 위대함으로 건너갈 수 있을 것입니다.
가짜 사랑에서 진짜 사랑, 작은 사랑에서 큰 사랑으로 넘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 원수 사랑이라는 불가능한 일이 가능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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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5. 사순 제1주간 토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5,43-48: 하느님 완전하심 같이 완전하게 되어라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44절) 주님께서는 원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다. 원수들이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는 아무도 미워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원수를 미워하는 것은, 우리가 단지 그를 미워하기만 해도, 우리는 우리의 영에 더 큰 해를 입힌다. 우리가 원수를 미워해도 그에게는 아무런 해를 입히지 않는다. 미움이 우리를 더 휘저어 놓게 된다. 그러기에 우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다면, 그 사람보다 우리 자신에게 더 이로운 일을 하는 것이다. 즉 우리 자신을 위해 원수를 사랑하고 자비를 베푸는 것이다. 주님의 법은 모든 법을 뛰어넘는다. 주님께서는 사랑하라고만 이르시지 않고 기도하라고도 하신다.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며 그런 사람에게 선을 베풀라고 하신다. 마지막으로 그를 위해 하느님께 기도해 주라고 하신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를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45절).
주님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신다.”(45절) 아드님을 통해 자녀로 부르시는 것은 우리가 당신과 닮은 모습이 되도록 하시려는 것이다. 해와 비는 바로 당신의 가르침이다. 이 가르침은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분명히 드러나 있다. 이 가르침을 따라 당신의 자녀가 되고 공동 상속자가 되게 하신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46절) 친구를 사랑하는 삶은 하느님 때문이 아니라, 자기 때문에 친구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자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 때문에 사랑한다. 이때 그는 큰 보물을 지닌 사람이 된다. 자기 본능을 거슬러 행동하기 때문이다.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48절). 하느님의 상속자는 행실로 하느님을 닮아야 한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는 이들만 아니라, 원수까지도 사랑함으로써 복음적 사랑의 법으로 인간적 사랑을 넘어서길 바라신다. 이렇게 아버지의 선하심을 본받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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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5. 사순 제1주간 토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사랑도 믿음이고 미움도 믿음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어제 복음과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이 세상에서 감정의 통제가 가능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새로 태어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고 하십니다.
새로 태어난다는 말은 ‘다른 세상에 산다’는 말과 같습니다.
부모는 자신이 사는 세상입니다.
고정원 씨는 세례를 통해 새로 태어남으로써 자신의 가족을 죽인 원수를 용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가 부모의 사랑을 못 받아 이 세상이 두려운 세상이 되어버렸다면 당연히 화가 나고 짜증이 나고 미워지기도 합니다.
이 상태에서 누군가를 용서하고 사랑하려고 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감옥에 갇혀서 행복할 수는 없습니다.
거기에서는 쳐다보기만 해도 화가 날 수 있습니다.
에스키모인들이 화가 나면 무작정 걸어서 화가 발생한 곳에서 멀어지는 전통이 있는 것처럼
우리도 미움의 세상에서 벗어나야만 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우리가 이 세상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지금 복음은 ‘산상설교’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시어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는 내용입니다.
마치 이 지상에서 떠나 산에 오르는 것처럼 우리가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도 누구는 하느님 나라에 살고 누구는 지옥에 삽니다.
그리고 자신이 사는 대로 감정을 발산하게 됩니다.
우리는 어떻게 사랑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어제 묵상 내용처럼 삼위일체 하느님의 도움이 있어야 합니다.
아이는 거울과 오은영쌤, 그리고 그들이 자신을 위해 하는 노력, 이 세 가지의 도움으로 자세를 바로잡을 수 있었습니다.
자신은 그렇게 말썽부리며 살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믿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사는 세상을 바꾸는 방법은 믿음밖에 없습니다.
『다정함의 과학』, 켈리 하딩 박사는 의사로서 사람을 물질적인 것으로 보도록 훈련된 사람입니다.
그가 의대에 입학해 해부학 교수에게 처음 받았던 것은 한 인물의 간단한 소개였습니다.
“9번 테이블: 폴, 공장 노동자, 사망 원인: 폐 암종.”
처음엔 그래도 자신의 테이블에 누워있는 시체가 한 인간의 존엄한 존재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자르고 쪼개고 분해하고 하다 보니 점점 폴이라는 한 인물의 시신이 아닌 하나의 교육
보조재정도로 보였습니다.
그리고 영혼의 존재에 대해 점점 잊어가고 환자를 약물과 수술로 치료해야 한다는 물질적 세계관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의사인 그녀가 『다정함의 과학』이란 책을 쓰게 된 것일까요?
이 책은 수술과 약물보다 사랑이 인간의 몸까지 더 완벽하게 치료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의사로서 많은 비판을 받을만한 내용입니다.
그녀가 영혼의 존재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은 자신 어머니의 죽음을 통해서였습니다.
켈리 박사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2주 전 침대에 누워 영화를 보다가 어머니에게 문법이 전혀 맞지 않는 문자를 받았습니다.
어머니는 선생님이었기 때문에 문자를 보낼 때 문법을 꼼꼼히 따지던 사람이었습니다.
의사인 딸은 이 문자를 받고 곧바로 엄마에게 뇌졸중이 왔음을 깨닫고 곧바로 병원에 도착하였습니다.
병원에 도착한 지 몇 시간 만에 어머니는 오른 손을 쥐었다 펴는 것 외에는 움직일 수도, 볼 수도, 말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와 켈리는 손으로 ‘사랑해’라고 말하는 신호를 만들었습니다.
“I(꼭 쥐기) LOVE(꼭 쥐기) YOU(꼭 쥐기).”
그날 켈리와 어머니는 수도 없이 서로의 손을 세 번씩 꽉 쥐었습니다.
말을 할 수 없는 어머니는 걱정하는 딸에게 괜찮다는 엄마만의 리듬으로 신호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2주 동안 어머니 옆에서 서로의 손을 잡아주다가 더는 어머니가 손을 쥘 힘이 없음을 알았을 때
어머니는 돌아가셨습니다.
‘의사 수업을 할 때 그렇게도 세세하게 해부하던 인간의 육체만 남은 어머니.
어머니의 영혼은 어디 간 걸까? 영혼이 있는 것일까?’를 생각했습니다.
어머니는 켈리의 거의 두 살이 다 된 사랑스러운 아들 제이를 자주 돌봐 주었습니다.
제이는 자신과 놀아주던 할머니의 부재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듯하였습니다.
더 자주 할머니를 찾았습니다.
켈리가 할머니가 매우 아프다고 말할 때마다
제이는 “할머니는 내 마음 안에 있어”라고 말했습니다.
어머니를 화장하던 날 밤, 제이는 울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이 제이를 켈리에게 안겨주었습니다.
말을 갓 시작한 제이는 켈리의 품에서 “사랑해!”라는 말을 했습니다.
누가 시키지도, 예상하지도 못한 말이었습니다.
켈리는 어둠 속에서 활짝 웃으며 아들을 더 꽉 안아주었습니다.
그러자 제이가 갑자기 켈리의 손을 잡고 세 번을 꽉 쥐었다 폈다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이 처음 엄마 손을 꽉 쥘 때 엄마는 놀랐습니다.
두 번째는 이상하다는 점을 느꼈으며, 세 번째 잡아줄 때는 그만 울고 말았습니다.
제이는 엄마의 품에서 잠이 들었고, 엄마는 완전히 잠이 달아났습니다.
“사랑해”라고 말할 때 손을 세 번 꽉 쥐었다 펴는 것은 켈리와 엄마만의 비밀이었기 때문입니다.
아이에게도 남편에게도 말한 적이 없고 제이는 정말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엄마의 손을 잡는 적도 없었습니다.
증거 중심으로 일하는 의사로서의 켈리는 그건 그냥 우연의 일치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한 인간으로서 그리고 엄마의 딸로서의 켈리는
“얘야, 엄마는 걱정하지 마. 엄마는 괜찮아. 나는 여전히 네 곁에 있어” 라고 말하는 사랑의 메시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소위 ‘토끼 효과’를 발견합니다.
한 사랑 가득한 여성이 준 음식을 먹은 토끼들만 특별히 더 건강하다는 실험을 접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은 그 사람을 사랑의 환경 안에 살게 하여 인간의 감정으로 일어나는 병까지 고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화병이 있는데, 이것은 약물이 아닌 새로운 환경에서만 치유됩니다.
다시 말해 사랑이 가득한 세상으로 자리를 옮겨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아웅다웅하고 미워하며 살았던 것들이 의미가 없어집니다.
이것이 용서고 원수까지 사랑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미국 드라마 중 ‘로스트’는 매우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여객기가 무인도에 불시착하며 벌어지는 내용입니다.
괴물도 나타나고 이상한 생명체도 나타나지만, 또 그 사람들 안에서 불목과 의심과 미움과 살인까지 일어납니다.
가끔 죽었던 사람들도 등장하고 이전에 지었던 잘못과도 연결되며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참 궁금하기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이 깨닫게 되는 것은 그들은 다 죽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들은 무인도에 불시착한 것이 아니라 바다에 빠져 다 익사한 상태였습니다.
그들이 살고 있었던 곳은 천국과 지옥의 ‘중간계’였고 여기에서 진짜 선인과 악인이 갈라졌습니다.
그리고 연옥의 역할도 하는데 이 지상에서의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한 이들은 천국으로 올라갑니다.
황당하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줍니다. 그들은 생존하려고 서로를 죽이기까지 하면서
본인들이 이미 죽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믿기를 거부합니다.
하지만 용기 있게 자신들이 죽었음을 인정한 이들은 이 세상에서의 모든 감정을 털고 천국으로 올라갑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죽었음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이들은 이 세상의 미움 속에 남겨집니다. 지옥으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우리 감정을 규정합니다.
지옥에 머물며 천국의 감정을 느낄 수 없고 천국에 살며 화를 내거나 음탕한 마음을 품거나
남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사는 곳을 바꾸는 것은 ‘믿음’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증거가 아니라 결단의 문제입니다.
무엇을 믿고 살 것인가에 대한 용기 있는 결단이
내가 지금 사는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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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5. 사순 제1주간 토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얼마나 큰 사랑을 받고 있는지부터 깨달아야 합니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3-48).”
1)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계명을 들을 때마다, ‘원수와도 같은 그 사람’부터 떠올리고, 그 사람을 ‘사랑해야 하는’ 일만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경우에,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은 너무나도 지키기 어렵다는 고정관념에 빠지게 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주님의 사랑을, 또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왜 생각하지 않을까?
“나는 사랑받은 적이 없다.” 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제대로 사랑하지 못합니다.
<아예 사랑하기를 거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정말로 사랑받은 적 없는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사람이 하나도 없는 외딴섬 같은 곳에서 혼자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곳에서도 주님의 사랑은 늘 있습니다.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든지 간에 그 사랑을 믿고, 깨닫고, 고백할 때, 그때 비로소 사랑 실천이 시작됩니다.
2) “나는 한 번도 누군가에게 원수가 된 적이 없다.” 라고 생각하거나 주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원수에 대한 사랑 실천’을 ‘하는 일’로만 생각하고, ‘받는 일’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죄를 지으면, 물론 정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그 순간부터 주님에게도, 또 이웃에게도
원수가 되어버린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누군가에게 원수가 된 적이 없다는 말은, 죄를 지은 적이 없다는 말이기도 하고, 그것은 대단히 교만한 말입니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바로 위선자입니다.
정말로 한 번도 죄를 지은 적이 없다면, 회개할 필요가 없는 것이고, 그러면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4,17) 라는 예수님의 복음 선포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되고, 즉 예수님의 구원이 필요 없는 사람이 되고, 그 사람은 예수님(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갑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계명을 실천하는 일은, 원수 같은 나를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과 이웃들의 사랑을 깨닫고, 고백함으로써 시작할 수 있습니다.
사랑받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한다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은 실천하기가 너무나도 힘들고 어려운 계명으로만 남아 있게 될 것입니다.
3)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라는 말씀에서,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시편 8,5)” 라는 시편이 연상됩니다.
우리는 이 시편을 “제가 무엇이기에 이토록 저를 기억해 주시고 돌보아 주십니까?”로 바꿔서 생각해야 합니다.
한낱 죄인일 뿐인 나를,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 나를, 하느님께서 극진히 사랑하신다는 믿음은 신앙의 출발점이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해 주고, 원수 같은 사람도 사랑할 수 있게 해 주는 힘입니다.
하느님은 살인자 카인도 보호해 주신 분입니다(창세 4,15).
우리는, ‘보잘것없는 나’를 주님께서, 또 이웃들이 변함없이 사랑해 주고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보면, 작은아들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그를 꾸짖지 않고 잔치를 벌입니다(루카 15.24).
말하자면 ‘밥부터 먹인’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사랑입니다.
<우선 먼저 아들을 사랑으로 품어 준 것입니다.>
자기가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지를 깨닫는다면 그때부터 진짜 회개를 시작하게 되고, 사랑 실천을 하게 됩니다.
반면에, 큰아들은 자기가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살고 있음을 모르고 있었거나 부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생이 돌아온 것을 기뻐하지 않고 화만 내고 있습니다(루카 15,28-30).
사랑받고 있음을 모르거나 부정하면, 용서를 실천하지도 않고, 사랑을 실천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큰아들의 모습에서 잘 볼 수 있습니다.
4)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너희는 하느님의 사랑처럼 완전한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입니다.
‘원수 같은 사람’도 사랑하는 것은, 완전한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고,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하는 것은 ‘불완전한 사랑’이고,
그것은 사실상 사랑이 아닙니다.
“무슨 상을 받겠느냐?” 라는 말씀과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라는 말씀은,
“하느님으로부터 사랑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라는 뜻이고,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라는 말씀과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라는 말씀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는 것은 죄인들이나 하는 짓이다.”, 즉 “죄를 짓는 일이다.” 라는 뜻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죄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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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5. 사순 제1주간 토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태 5,43-48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돌아보면 그들에게는 ‘원수’가 많았습니다. 주변의 강대국들에게 침략을 받는 일이 잦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들은 자신들이 하느님께 선택받은 특별한 민족이라는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기에, 자기들을 공격하는 것은 곧 하느님을 공격하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에 하느님 뜻을 거스르는 그런 ‘악한’ 이들은 미워하고 복수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웃’과 ‘원수’의 차별을 없애고자 하십니다. 내가 좋아하는 혹은 나에게 호의적인 사람만 사랑하는 반쪽짜리 사랑은 하느님의 뜻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우리 마음이 미움과 분노라는 감정에 사로잡혀 현재의 기쁨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모습을 안타깝게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강조하시는 것이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차라리 원수에게 복수하지 말고 참으라고 한다면, 굳이 악에 악으로 맞서지 말고 그냥 원수를 무시하거나 피해 다니라고 한다면 그 정도는 해보려고 노력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원수를 사랑하라니요? 우리가 성인군자도 아닌데 그런 일을 대체 어떻게 하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또한 나를 힘들게 만드는 원수를 사랑하느라 지치고 힘이 빠져서, 정작 내가 사랑하는 이들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게 되는 아쉬움과 속상함은 어떻게 감당하라고 하시는 걸까요? 하지만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시는 것은 사랑의 무게중심을 그들 쪽으로 기울어지게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사실 ‘팔이 안으로 굽는’ 우리 마음은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지요. 다만 ‘원수’와 ‘이웃’을 철저히 구분하고 분리하여 차별대우했던 그동안의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으라는 겁니다. 즉 내 마음이 내가 ‘이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 즉 나에게 잘 해주고 내가 사랑하는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일방적으로 기울어지지 않도록, 그렇게 내 사랑이 불완전한 반쪽짜리가 되지 않도록 항상 조심하고 신경쓰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시는 것은 이웃과 원수를 차별하지 말고 공평하게 사랑하도록 노력하라는 뜻입니다. 원수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서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혹은 내 마음 수양을 위해 즉 내 마음에서 미움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없애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 그대로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부족하다면 부족한 채로, 불편하고 싫다면 그런 채로 사랑하는 겁니다. 더 나아가 그가 부족하기 때문에 더 애정을 가지고, 그가 불편하고 싫기 때문에 더 신경써서 사랑하는 겁니다. 그가 다른 이보다 더 많은 사랑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심판 받아야 할 ‘죄인’이 아니라 치유받아야 할 병자로 보시는 것처럼, 그가 원수이기 때문에, 죄인이기 때문에 처벌이나 단죄를 하지 않고 오히려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하늘의 우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함입니다. 하느님의 선함을 닮은 그분 자녀가 되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변화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향해야 할 ‘완전함’은 그 어떤 흠결도 단점도 없는 ‘완벽함’과는 다릅니다. 어느 쪽으로도 모나지 않은 둥글둥글한 사람이 되어, 땅을 가리지 않고 상황을 탓하지 않고 하느님 나라를 향해 잘 굴러갈 수 있어야 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 빠진 동그라미’들이 서로 상대방의 빠진 이를 사랑과 이해로 채워줌으로써 온전한 동그라미가 되라는 뜻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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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5. 사순 제1주간 토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모세는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법규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것들을 명심하여
실천해야 한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모세는 “그분께서는 너희를 당신께서 만드신 모든 민족들 위에 높이 세우시어,
너희가 찬양과 명성과 영화를 받게 하시고,
너희가 주 너희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분의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이다.”(신명 26,19)라는
말씀도 아울러 전하고 있습니다.
마태오는 구약에서 동포는 사랑하지만 원수인 이방인에 대해서 배타적인 법을 대시며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마태 5,44-45)라는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햇볕과 비를
주시듯이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도 온전히 이웃을 위해서 전적인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병에 걸리는 이유 중에 하나가 면역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하느님을 닮은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것은 구약에서는
율법을 지킴으로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내세우시고 그 바탕 위에 온전한
사랑의 삶을 살기를 주문하시는 것입니다.
신앙인에게 건강하고 면역성이 있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인간은 하느님과 달리 배타적이고 또 편을 갈라서는 일이 많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의 면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마태 5,46-47)
사람은 당연히 자기에게 잘 해주는 사람에게 잘 대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이익이 되고 힘이 되는 사람에게 쏠리게 되어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해가 되거나 못 되게 구는 사람을 피하거나 아니면 그런 사람을 공격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에게 주님게[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48절)
하느님께서 완전하신 것은 선하심과 완전한 사랑이시기 때문이시지요.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하느님을 닮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완전한 것은 사랑의 모습에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인간이 부족하고 한계가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완전하신 하느님’을 본받으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완전은 완벽이나 어떤 흠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지요. 사랑의 삶을 살면
서로 편을 가를 일도 그리고 서로 경계하거나 불목할 일도 없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 모든 것을 품어 줄 수 있고 하나가 되게 하고 상대를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의 가르침대로 우리가 내게 돌을 던지는 사람, 상처를 또 주는 사람, 나에게 성가시고
도움이 되지 않은 사람까지도 지치지 않고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주시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자비하심으로 우리도 넉넉한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 수 있고 행복의 삶을
꾸려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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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5. 사순 제1주간 토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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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5. 사순 제1주간 토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라반의 말씀사랑
오늘 독서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계명판을 넘겨주면서 주님께서 어떤 뜻을 가지고 계신지 이렇게 설명합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너희를 두고 이렇게 선언하셨다... 너희가 그분 소유의 백성이 되고... 그분의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이다.”(신명 26,18-19)
또 레위기에서 하느님께서는 직접 이렇게 요청하십니다.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9,2) 오늘 예수님도 복음에서 이런 말씀을 하시네요.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처음 들을 때 이 말씀은 엄청난 축복의 말씀으로 다가오는데,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엄청난 부담으로 이 말씀이 다시 돌아 들어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하고, 예수님도 우리가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시네요. 말도 안되는 이야기 아닌가요? 우리를 몰라도 너무도 모르시는 말씀 아닌가요?
그럴 리는 없을텐데... 이 말씀이 맞는 말씀이라면, 아마도 거룩함과 완전함의 개념에 대한 우리와 하느님의 인식차이에서 비롯되는 문제일 겁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을 거룩한 사람(聖人)이라고 보는가요?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은 사람? 영적으로 충만한 사람? 글쎄요. 하느님은 그저 '자기 동포와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라 하시네요. 그렇다면 우리도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예수님은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보고 '완전한 사람'이 되라네요. 우리는 보통 완전한 사람을 완벽한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에게 잘하는 사람이나 못하는 사람이나 다같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네요. 사실 크게보면 다 한 하느님의 자녀들이니까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예수님의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또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적잖은 도전이 됩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이에게 사랑으로 응하는 건 인지상정이지요. 굳이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실천할 수 있는 당연한 도리인데, 거기에 더하여 원수와 박해자까지 사랑의 대상 영역을 확장하라 하시는 겁니다.
왜 이런 요구를 하시는 걸까요? 그렇게 요구하시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기"(마태 5,45) 때문입니다. 자녀는 부모를 닮기 마련이지요. 원래 인간은 하느님 모습으로 창조되었기에 안 그래도 닮은 꼴입니다만, "자녀"라는 표현은 그런 보편성을 넘어서서, 우리 안에 뿌려진 '하느님 모상성'의 씨앗이 어떻게 성장해 열매 맺어야 하는지를 제시합니다.
독서인 신명기에서는 시나이 계약을 통해 성립된 이스라엘의 신원과 정체성을 명료하게 표현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하느님이 되시고..."(신명 26,17) "우리가 그분 소유의 백성이 되고 ..."(신명 26,18).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계약에는 서로가 이러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지켜야 할 조건들이 존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소유하심으로써 그들을 높이시고 찬양과 명성과 영화를 받게 하시고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신명 26,19 참조)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은 "그분의 길을 따라 걷고 그분의 규정과 계명과 법규를 지키고 그분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신명 26,17 참조)
이 관계는 신약 시대로 오면서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라는 더 강한 결속력과 친밀감으로 심화됩니다. 구약 시대에 예언자의 입을 통해 드러났던 하느님의 부성(모성)이 예수님이라는 존재를 통해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성, 즉 부모-자식이라는 관계성이 확정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모-자식 관계는 어떤 특성이 있을까요? 계약으로 맺어지기보다, 혈연 또는 입양이라는 절차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인의 경우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실행함으로써"(마르 3,35 참조) 성부의 친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가 되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지요.
대개 우리는 사람을 대할 때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자기 형제에게만"(마태 5,46-47) 좋게 대하려 합니다. 하느님 모상이라는 본성보다 죄의 본성이 더 활성화되어, 하느님의 자녀라는 신분에 무색하게 속 좁고 나약하고 두려움 가득한 모습이지요. 예수님의 이 가르침을 듣기 전까지는 그래도 되었습니다.
이에 비해 하늘의 아버지께서는 사람을 대하실 때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마태 5,45) 차별을 두지 않으시고 구분하지 않으십니다. 어느 쪽은 취하고 다른 쪽은 내치시거나, 누구는 포용하고 누구는 제외하시지도 않으십니다. 모두를 당신 팔 안으로 모아들여 당신 가슴 안에 전부 품으시는 이 모습이 곧 하느님의 완전성입니다.
세속의 군주와 백성의 계약 관계 정도라면 굳이 지배자인 임금을 닮으라고 요구하지 않겠지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자녀는 부모를 닮게 되어 있고 닮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태 5,48)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요구라기보다 초대입니다. 부담을 주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완전성에 도달할 충분한 자질과 역량이 자녀인 우리에게 있다고 인정해 주시는 기대의 표현이기도 하고요.
"완전한 사람"은 완벽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완전한 사람일까요? 내 사랑과 관심에서 제외되는 이가 더 이상 없을 때, 나는 아버지처럼 완전합니다. 내 마음의 저장공간에 미움과 무관심의 폴더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 나는 아버지처럼 완전합니다.
혹시 원수가 회개하고 용서를 빌면, 박해자가 뉘우치고 사과하면 그때부터 어떻게 해보겠다고 생각한다면 순서가 틀렸습니다. 그런 세월은 영영 오지 않을 수도 있고, 그러다가는 하느님의 자녀가 될 기회를 영영 놓쳐버릴 수도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의 통회와 회개는 내 조건 없는 기도, 바보같은 사랑의 결실이 될 확률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녀인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오늘 우리 아버지를 닮은 거룩한 사람이 됩시다. 우리 동포들, 이웃들을 그저 사랑하면 됩니다. 오늘 우리 아버지처럼 완전한 사람이 됩시다. 내 맘에 드는 사람만이 아니라 내 맘에 안드는 사람도 다 내 형제라고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때 우리는 하느님 모습을 꼭 빼닮은 참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너무 쉽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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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5. 사순 제1주간 토요일.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는 삶
<2025.3.15> 아침을 여는 묵상 (눅 11:37~54절)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는 삶❞
❚ 날마다 말씀 앞에 바로 서 있는 삶을 통해서 속사람이 거룩하고 정결케 되도록 해야 합니다.
✔ 속사람을 강건케 하는 삶은 무엇입니까?
➲ 세상과 물질의 사랑을 내려놓아야 합니다(37~41절).
예수님은 계속해서 자신을 대적하는 무리였던 바리새인의 식사 요청을 거절하지 않으시고, 기꺼이 초청에 응하셔서 함께 식사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그 바리새인은 예수님이 식사 하시기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신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겼습니다(37~38절). 그들에게는 손을 씻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정결케 하는 의식이겠지만, 예수님에게는 오히려 불필요한 검림돌 이었습니다. 이어서 식탁 위에 놓인 잔과 대접을 가리키시면서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하게 씻지만,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돌이 가득하다고 말씀하십니다(39절). ‘탐욕’은 다른 사람의 것을 탐내고 빼앗는 물질적 욕심을 가리키고, ‘악독’은 일반적인 사악함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겉과 속을 만드셨기에 그 둘은 언제나 서로 일치해야 합니다(40절). 모든 것이 깨끗해 지도록 하기 위해서 ‘구제’를 예수님을 말씀하십니다(41절). 진실한 마음으로 구제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거룩한 마음을 닮은 증표가 됩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실체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스스로 경건하다고 여겼습니다. 아무리 깨끗하고 값비싼 그릇이라고 할지라도 그 안에 더러운 내용물이 담겨 있으면 그 그릇의 가치를 다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 역시도 겉으로는 경건한 척하면서도 마음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 차 있지 않은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겉만 깨끗하다고 해서 결코 경건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감찰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자신의 행위뿐만 아니라 심령을 감찰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있는 탐욕과 악독을 제하는 방법은 세상과 물질에 대한 의지와 사랑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여전히 우리 삶의 관심사는 먹고 사는 문제일 수 있습니다. 사람들부터 칭찬과 인정을 받는 그리고 화려하게 목회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면, 겉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척하지만, 속은 우리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는 탐욕으로 가득 차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과 물질의 사랑을 내려놓음으로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공의와 사랑이 일상이 되게하여야 합니다(42~44절).
42~45절에는 모두 여섯 개의 ‘화’ 선언이 나옵니다. 첫 번째 화 선언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이기적 행동들에 대해 지적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이 십일조라고 해서 드렸던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42절)는 율법에서 정하는 십일조 항목에 들어가지 않는 풀 과에 속한 것들입니다. 그들은 이러한 것을 십일조로 드리면서 철저하게 하나님의 율법을 지켰고, 스스로 의롭고 경건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화 있을 진저’라고 책망하십니다.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보다 더 중요한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무시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어느 한 가지만 하지 말고 이 모두를 함께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시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는 것에 대해 책망하십니다(43절).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44절)은 땅을 파고 매장한 무덤을 말합니다. 율법에 따르면 무덤에 접촉하면 일주일 동안 부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해야 할 일은 사람들이 실수로라도 무덤을 밟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 사람들을 부정하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잘못된 행위를 통해 다른 이들을 은연중에 부정하게 만든 것에 대해 책망(44절)하십니다.
예배 출석 잘하고, 십일조 생활 잘하고, 교회 봉사 많이 하면 훌륭한 성도라고 사람들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신앙의 일면일 뿐, 겉으로 보여지는 것들로 신앙의 좋고, 나쁨이 평가되어서는 안 됩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에서 정하지도 않은 품목을 십일조로 드리면서 정작 중요한 예수님의 가르침과 말씀에 대하여 올바르게 반응하지 않고 외면해 버렸습니다. 진정한 신앙은 두 가지 다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즉, 공의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일상의 삶에서 행위로 드러내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살지 못하기 때문에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약 2:17,20)이라고 야고보는 말했습니다. 겸손하게 우리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짊어지고, 세상의 빛 되신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는 사람답게 어둠을 사랑하는 세상에 빛을 비추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속사람을 만들어야 하는데, 공의와 사랑이 일상이 되게 할 때 가능케 됩니다.
➲ 희생과 헌신이 삶으로 실천되어야 합니다(45~54절).
이때 그 자리에 있던 율법 교사가 예수님께 항의하고 나서자 예수님은 더욱 강력하게 책망하십니다. “...어려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우면서 너희 자신은 손가락 하나도 그 짐을 대려고 하지 않는다... 너희는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세운다...”(46~47절)... 결국 율법 교사들은 온갖 지식으로 율법의 세세한 규정들을 제정해 성경을 사람들이 지기 어려운 짐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예수님은 창세 이후로 핍박으로 죽게 된 선지자들의 피에 대한 책임을 그리고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수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에 이르기까지 이 세대에게 물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49~51절). ‘지식의 열쇠’(52절)는 성경을 올바로 해석하여 하나님 나라의 권세를 여는 것인데, 그들은 성경을 잘못 해석해서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오셨음에도 그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책망들은 바리새인들과 율법교사들이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는 기회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존심이 상하고 분노가 치밀어 결국 그 기회를 날려 버렸습니다(53~54절).
목회자의 자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강요하기에 쉬운 자리입니다. 정작 내 자신은 말씀대로 살아가지 않는 오류를 범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 내 중심을 변화시키기고, 깨끗하게 하고, 진정 변화되어 가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완악하고, 편협한 기형적인 종교인으로 살아가지 않도록 아버지의 성품을 더욱더 닮아 가고,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누군가를 가르치기에 앞서 우리 자신을 먼저 살피고, 누군가에게 짐을 지우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을 짐을 져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 자신이 서 있는 위치의 책임이 얼마나 크고, 막중한 것인지를 깊이 깨달아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에게로 나아가는 길을 막지 않도록 속 사람을 강건하게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주님과 이웃을 위해 희생과 헌신을 삶으로 실천해 갈 수 있도록 속 사람을 강건케 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중심을 보시는 주님 앞에서 바르고 정직한 삶이 되기 위해 주의 보혈로 깨끗하게 하여 인정받는 삶을 살아갈 뿐 아니라 바른 진리위에 서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아가도록 그들을 돕고 섬기며, 희생까지 감내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눅 11:37~54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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