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권사님을 심방하며....
살아간다는 것은“어쩌면 조금씩 시나브로 하는 것”이지 않을까 싶어집니다.
국어 사전은 시나브로의 뜻을“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이라 정의합니다.
인생이란 결국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 익어 가는 것은 아닐까요?
물론 익어가는 방향은 개인의 노력과 의지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겠지요.
제가 섬기고 있는 교회는 올해 71주년이 되는 장년의 역사가 되었습니다.
짧지 않는 역사 속에서, 본 교회의 살아있는 역사라고 할 수 있는 할머니 권사님이 계셨습니다.
국토정중앙면의 두무리 넘어 가는 고개마루 초입에서부터 장사를 하셨고, 일정시대부터 곡식 낱알을 헤아리며 징수를 거두어갔던 북한군 치하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숭악한 젊은 시절을 헤치며 살아왔던 분입니다.
전쟁 직후 군인 목사님이 세우신 교회로 시작된 도촌교회에 발을 들여놓으신 이후
몇해 전까지 읍내에서 할아버지와 두 분이 기거하실 때까지 본 교회의 주일예배를 지켜오신 어르신은 더 이상 두 분이 생활하실 수 없어서 서울 아드님 댁으로 거처를 옮기셨습니다.
그로부터 몇해 정도 후 할아버지께서 먼저 귀천을 하신 이후부터 급격히 건강이 여의치 않으신 것 같습니다.
그래도 그 전까지는 제게 폰으로 간혹 안부를 전해 오시던 어른이셨는데, 어느 날부터 안부가 궁금하여 연락을 드려도 통화가 되지 않았습니다.
몇해 전 지나온 교회 발자취를 사진으로 모아 두고픈 마음으로 교우분들께 교회와 관련된 사진을 갖다 주시길 광고했더니, 초기 교회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그동안 보관하고 계시다가 교회에 기증을 해 주신분이기도 합니다.
아드님께 연락을 드려 권사님의 안부를 묻자 노인정에 가셨다가 넘어지셔서 하남시에 있는 모 병원에 입원중이시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도 본 교회의 산 역사나 다름없는 어르신이시기에, 의식이 또렷할 때 한번이라도 찾아뵙는 것이 신앙 후배의 도리이자 목회자가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8월 첫날인 지난 1일(목), 권사님께서 입원하신 병원을 찾았습니다.
지금까지는 수도권에 소재한 병원이나 장례식장을 혼자 가는 경우는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런데 하남시라는 곳을 처음 가보기도 하고, 대중교통으로는 좀 번거러울 것 같아서 교회 차로 약 두어 시간 이상 달려서 도착했습니다.
사전에 병원측에 문의했더니, 짧은 면회는 가능할 것 같다는 정보를 얻었기에 권사님이 입원하신 호실을 확인하고 마스크를 착용하고 조심스럽게 병실을 방문했습니다.
점심 식사 후 주무시던 권사님을 깨우며,“저를 알아 보시겠느냐”며 도촌교회 목사라자 감사하게도 단번에 저를 알아봐 주셨습니다.
올해 94세이신 어르신은 몇해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야리야리하지 않는 분이셨는데 몇해 만에 뵈었더니 너무나 수척해지신 모습에 마음이 아리웠습니다.
흐르는 세월 앞에 장사 없다지요. 마치 온 몸에 진이 다 빠져가는 듯한 모습의 권사님을 뵈니 먹먹해질 뿐입니다.
할머니 권사님이 제게는 특별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약 6-7여년 전 주일예배를 인도하다가 갑자기 속이 부대끼면서 어지러움을 느꼈던 적이 있습니다.
급하게 예배를 마무리한 후 읍내의 병원에서 영양제를 맞고 있는데, 할아버지와 함께 병원을 찾아오셨습니다.
병실에서 제 손을 꼭 잡으시더니“목사님! 아프지 마세요. 건강하셔야 해요.”라시며 눈물을 흘리시는데, 아마도 침상에 누워 있는 저를 보며 먼저 간 막내아들이 오버랩 되신 것 같습니다.
그후에도 때때로 막내 아들에게 미처 주지 못한 사랑을 베풀 듯이 저와 저희 가족에게 모친같은 사랑을 주신 분이십니다.
할머니 권사님을 위해서 잠깐 기도를 하고서 작별을 고하려는데, 처음뵐 때부터 만감이 교차하신 표정으로 눈물을 보이시던 어르신이 “이 먼데까지 어떻게 오셨느냐며”우시는데 달리 할말이 없었습니다.
동시에 들었던 생각이 심방 오길 참 잘했다 싶었습니다.
이땅에서의 소풍이 언제 끝날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권사님께서 저를 알아보실 때 찾아 뵐 수 있어서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마치 꺼져가는 등불처럼 병원 침상에서 누워 지내시는 할머니 권사님께 인사를 드리고 병원을 나서는데, 인생살이가 일장춘몽(一場春夢)이라는 옛 어르신들의 말씀이 실감나게 다가왔습니다.
8. 바로가 야곱에게 묻되 네 나이가 얼마냐
9.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창세기 47:8-9)
여러분 한명 한명을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