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21세기. 깊이읽기]로봇화된 일상…탈출구를 찾아라 - 경향신문 (khan.co.kr)
책@21세기. 깊이읽기
로봇화된 일상…탈출구를 찾아라
▲현대세계의 일상성…앙리 르페브르/기파랑에크리
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 앞에서 느끼는 당혹스러움을 이렇게 묘사한 바 있다. “도대체 시간이란 무엇인가? 아무도 묻는 이가 없으면 알 듯하다. 하지만 막상 묻는 이에게 설명하려 들면 말문이 막히고 만다.” ‘일상’도 마찬가지다. 일상이란 너무 자명해서 굳이 장황한 설명이 필요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작 일상이 무엇인지 말해보라고 하면 어떨까. 너나 없이 손사래치며 뒤로 물러날 것이다.
성긴 언어의 올로 일상을 붙잡으려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거칠게나마 윤곽마저 그려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일상은 철로 만든 새장 같다. 새장 안은 온갖 자질구레한 물품들로 꽉 차 있다. 옷장, 냉장고, 침대, 주방기구, 장난감 따위의 물품 목록은 끝이 없다. 거기에서 줄거리 없는 인생들이 하품나는 나날을 견디고 있다. 일상은 지루하고 공허하며, 일상의 삶은 초라하고 지리멸렬하다. 권태와 환멸은 일상에 딸린 부록이다.
일상이 오랫동안 방치되어 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일상은 내동댕이쳐진 채 부패해왔다. 일상이 비로소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후반부터였다. 보들레르는 현대 도시의 세속적 일상을 생생한 감각으로 묘파해냄으로써 최초의 모더니스트로 불렸다.
발터 베냐민은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19세기 파리의 일상을 거대한 몽타주로 재현하려 했다. 비록 미완으로 그치고 말았지만, 현대적 이미지들의 백과사전이라 할 만했다.
현대의 일상에 대한 가장 방대하고 체계적인 분석과 성찰은 앙리 르페브르의 ‘현대세계의 일상성’을 기다려야 했다. 이 책은 현대의 일상을 치장하고 있는 가면을 벗겨내고, 그 밑에 감춰져 있는 현대 세계의 내면을 폭로한다. 장 보드리야르의 ‘소비의 사회’나 기 드보르의 ‘스펙터클의 사회’는 르페브르의 저작에서 풍부한 영감을 얻었다. 1960년대 유럽 사회가 분석 대상이지만, 르페브르의 문제 의식은 시간의 풍화를 견뎌내며 여전히 유효하다.
르페브르는 왜 하필이면 일상을 문제 삼았을까. 그가 보기에 일상의 견고성은 혁명의 가능성을 봉쇄해버렸다. 더구나 일상을 문제 삼지 않는 태도 자체가 문제였다. 일상을 변혁시키기 위해서는 일상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게 르페브르의 문제 설정이었다. 그는 현대인을 ‘호모 코티디아누스’(Homo Quotidianus, 일상인)로 명명한다. 일상인은 로봇을 닮았다. 특정한 행위만을 반복하도록 프로그램화된 로봇 말이다.
로봇화된 현대 일상인의 행태를 잘 관찰할 수 있는 곳은 소비의 영역이다. 르페브르는 현대 세계를 ‘소비 조작의 관료 사회’로 이름 붙인다. 현대인들은 주체적이고 자율적으로 상품을 소비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실은 바깥의 힘과 의지에 종속된다. 그 ‘바깥’은 자본가나 기술관료, 정치권력이나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등이다. 소비 조작 사회에서는 교환가치가 사용가치보다 우월하고, 이미지나 기호가 상품의 본질을 집어삼킨다.
르페브르는 소비사회의 전형적 표본으로 자동차를 꼽는다. 자동차의 쓸모는 이동수단이다. 현대인은 이동 목적으로만 자동차를 구입하지 않는다. 자동차에는 여러 겹의 이미지와 기호가 포개져 있다. 그것은 신분과 위엄, 안락과 힘, 모험과 속도의 상징이다. 소비자들은 자동차에 덧씌워진 상상의 이미지를 소비하는 것이다.
또한 자동차는 도로교통법으로 자신의 법을 일상에 강제한다. 이처럼 자동차는 현대인의 욕망을 비틀고 일상을 정복한다.
상품의 이미지를 조작하는 것은 광고의 마법이다. 르페브르에 따르면 광고는 정교하게 다듬어진 상품의 언어다.
그것은 소비자를 유혹한다. 블루진은 영원한 젊음으로, 고급 주택은 부와 성공으로, 다이아몬드는 변하지 않는 사랑으로, 첨단 가전제품은 가정의 행복으로 변주되어 일상을 포위한다. 광고 이미지의 후광을 빌리지 않으면 상품은 빛을 잃는다. 오늘날 광고는 이미지의 독재자로 군림하며 지배 이데올로기를 설파한다.
소비 조작 사회에서 벗어날 탈출구는 과연 있는가. 르페브르는 마르크스의 정신적 후예답게 유토피아주의자다. 그람시의 어법을 빌리면 ‘지성의 비관주의자, 의지의 낙관주의자’다.
르페브르의 기획은 영구 문화혁명이다. 문화혁명의 강령은 간결하다. “일상이 작품이 되게 하라!” 자신의 육체와 욕망, 시간을 타인에게 저당 잡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것으로 되찾자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기 소외를 넘어 인간의 총체성을 회복하자는 선언이다.
르페브르의 어떤 명제들은 이미 진부해져버렸다. 상품의 이미지와 기호가 소비세계를 지배한다는 주장은 오늘날 문화분석의 상투어로 통한다.
장 보드리야르 같은 포스트모더니즘 이론가들은 르페브르의 통찰을 넘어섰다. 그것은 선구자의 운명이기도 하다. 일상의 냉혹성과 가능성을 발견한 것은 르페브르의 탁월한 안목이었다.
오늘날 일상의 성채는 더욱 견고해지고 아무도 혁명을 꿈꾸지 않는다. 그럼에도 인간의 총체성을 향한 열망은 결코 훼손되지 않는 가치로 남아 있다. 우리가 르페브르를 다시 읽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백태현의 `문화 터치`] 14 일상의 재발견 - 부산일보 (busan.com)
반복되는 익숙함에서 반복되는 낯섦으로
르페브르가 〈현대 세계의 일상성〉에서 말한 소비사회의 일상성, 즉 미덕이 되어버린 소비가 인간의 자유를 대신해 일상을 지배하는 현상에 대한 경계와 비판입니다. 일생을 반복되는 소비 행위 속에서 보내면서도 스스로 자유로운 선택을 한다고 착각하는 현대인들은, 에셔의 그림 ‘뫼비우스의 띠 2’에서 한쪽 면만 갖는 곡면인 뫼비우스의 띠를 한없이 돌고 있는 개미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소비와 자본이 지배하는 일상의 익숙한 울타리 안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낯섦의 경계를 넘나드는 노마드적 탈주를 얘기하기 위해서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안내하는 〈천 개의 고원〉(1980)으로 달려가야겠습니다. 이들은 리좀형 사유방식을 말합니다. 줄기가 마치 뿌리처럼 땅속으로 파고들어 수평으로 뻗어 나가는 땅속 줄기를 뜻하는 ‘리좀’에서 연유한 개념입니다. 이 사유방식은 중심이나 통일성, 어떤 서열적인 질서도 없이 한없이 뻗어 나가는 특징을 갖습니다.
이 사유방식은 코드화되어 있지 않으므로 내재적이면서 다른 것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사유의 영토를 지었다가 허물면서 탈주를 계속할 뿐입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자본이라는 슈퍼코드에 의해 왜곡되고 폐기되고 억압되고 소멸해버린 다양한 욕망이 리좀형 사유를 통해 상실된 에너지를 찾고 탈주를 계속하기를 희망했다”는 분석을 낳습니다.(이순성 〈오늘을 읽는 철학〉)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현실의 제도와 시스템을 아주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기존의 사고와 방식에만 얽매여 일상성의 노예가 될 필요도 없습니다. 당연하게만 여겨왔던 일상을 비틀어 보기도 하고, 낯설게 마주하기도 하면서 일상이 품고 있는 천의 얼굴들을 만나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상품화된 여성의 일상성 - 인천in 시민의 손으로 만드는 인터넷신문 (incheonin.com)
상품화된 여성의 일상성
세 사람이 빈부격차, 가부장제, 제국주의와 식민지를 비롯한 사회적 억압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을 때, 체제에 잘 적응하는 방식으로 독립이 주어지는 것은 아님을 깨닫는다. “누구에게도 소유되지 않고 누구에게도 통치받아서는 안 된다.” 이 당연한 명제를 위해 세 여성은 체제에 반하는 테러리스트가 되었다. 물론 여성 상품화에 맞서 테러리스트가 되라는 건 아니지만, 그런 결의를 가지고 저항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정신력과 에너지는 한낱 상품에 비할 바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