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 고등학교♡
1963년 전북 정읍 출생. 전기가 들어오지않는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정읍여자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구로 공단에서 여공으로 노동을 하며 영등포여고 야간부 산업체특별학급에서 고등학교
과정을 이수한 사람. 누구? 신경숙.
그가 쓴 소설 ‘엄마를 부탁해’는 지금까지 200만부가 훨씬 넘게 팔렸고, 세계 28개 국가에서 15개 언어로 번역되어 세계인의 심금을 울렸다. 그래서 외국에서 그녀를 소개할 때는 이렇게 소개한다.
‘한국의 살아있는 국보, 신경숙’
신경숙이 작가로서 갓 주목받던 1990년대 초였다. 문인들 자리에서 동갑내기 작가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영등포여고 나왔다며? 내 친구도 거길 나왔거든.”
신경숙은 그 질문에 대답을 얼버무리다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그녀가 다닌 여고는 주간이 아니라 야간고등학교에다가 여공을 위한 특별학급이었기 때문이다.
주경야독. 그는 그런 내력을 굳이 밝히지 않았다.
10대 후반의 소녀. 낮에는 봉제공장에서 미싱을 돌리고 밤에는 배움을 이어가야 했던 어린 학생. 이후,
작가로 등단한 어느 날, 옛 야간반 친구가 그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네가 우리 얘기는 전혀 쓰지 않더구나. 그때가 부끄러운 건 아니지?”
신경숙은 94년 ‘외딴 방’을 썼다. 공장과 야간고등학교 시절을 솔직하게 털어놓은 자전소설이다.
그의 청소년기에는 놀 틈이 없었다. 그의 삶에는 봉제·전자·의류 공장의 생산 라인만 존재했다.
주간반 아이들이 깔보는 것도 싫었고 적성과 전혀 맞지 않는 주산·부기도 재미없었다.
그는 학교를 자주 빼먹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를 몹시도 아끼던 선생님에게 혼이 난 이후 반성문을
써야 했다.
정식으로 글 쓰는 법을 배운 적도 없었던 그녀. 그녀가 쓴 반성문은 놀라웠다.
그 글재주에 놀란 담임선생님이 “소설을 한 번 써보라”며 그에게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을
건네주었다. 신경숙. 그녀는 그 소설을 베껴 쓰며 작가의 길에 눈을 떴다.
열다섯 살 김원중. 그는 1·4 후퇴 때 대구로 피난을 와 홀어머니와 동생을 부양해야 했다.
그는 낮에 시장에서 미제 물건을 팔았고 밤에는 오성중·고등학교 야간부에서 공부를 했다. 대학도
영남대 야간을 나왔다.
그는 2001년 포항공대 교수로 명예로운 은퇴를 하고 ‘이력서’라는 시를 썼다.
서울대를 안 나왔습니다/ 먹고살기도 힘든 세상에서 살았으니까요/
기독교 장로도 못 됐습니다/ 일요일도 하루 종일 일했으니까요/ 중·고등학교 대학
대학원/ 12년 꼬박 야간에만 다녔습니다….
야간고등학교와 야간대학교는 가난에 무릎 꿇지 않고 악착같이 일어서던 젊은이들의 돌파구였다.
배고픔을 다시는 겪지 않겠다는 마음 하나로 낮엔 일하고 밤엔 졸린 눈 부릅떴다. 야간고나 야간대 나와
입신한 인사는 얼핏 꼽아도 손가락이 부족하다.
이명박 전대통령, 박병대 대법관, 박준영 전남지사, 김동연 재정경제부 2차관, 반장식 전 기획예산처
차관…. 얼마 전에는 대한변협 61년 사상 처음으로 야간고·야간대 출신의 위철환 변호사가
회장에 당선됐다.
잠시 위철환 변호사 얘기. 그는 전남 장흥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배가 고팠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돈을 벌기 위해 서울로 갔다. 그래서 시작한 일이 신문 배달.
매일 새벽 4시가 되면 찬바람을 맞아가며 신문을 돌리고, 저녁엔 공부를 하기 위해 야간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중동고 야간반.
“어느 추운 겨울 날 새벽에 한창 신문배달을 하고 있는데, 한 가정집에 불이 켜져 있고, 창문너머로 내 또래 학생이 공부를 하고 있는 게 보였어요. 그때 난 지금 뭐하고 있나 하는 의구심이 들었죠. 그래서 ‘나도 한번 해보자’는 결심을 하고 물불을
가리지 않고 공부에 매진했죠.”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 끝에 초등학교 선생님이 된 그는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더 큰 뜻을 품고
변호사가 됐다. 그리고 20년이 흘러 어엿한 중년이 된 그는 전국의 변호사를 대표하는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에 당선되기에 이른다.
어제 야간고등학교를 같이 졸업한 친구들 몇 명이 술 한 잔 하자며 찾아왔다.
이 친구들 중에는 잘난 놈도 있고 못난 놈도 있다. 그렇지만 나에게는 똑같이 소중한 친구들이다.
왜냐면, 깨물면 아픈 손가락 같은 존재들이기 때문에. 크다고 소중하고 작다고 무시할 수 없는
그런 존재들이기 때문에. 내가 아프면 가장 먼저 뛰어오는 놈들이기 때문에.
야간고등학교.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싶은데 집에 돈이 없었다.
“엄마! 입학금만 대 주세요. 그러면 학비는 제가 벌어서 갈께요.”하면서 겨우 들어간 학교. 어디 나만
그랬을까. 야간고등학교에 입학한 내 친구들 모두가 그랬는데.
조국 근대화의 기수. 그때는 그렇게 불렀지. 용접을 하고, 선반을 돌리고, 제도를 하고.
그때 나의 유일한 욕심은 하루 빨리 졸업해서 돈을 버는 게 목적이었지. 고생하는 우리 어머니 고생 좀
그만하게 해 드리려고.
그 당시 대기업은 언감생심. 철공소라도 좋았다.
날마다 학교를 가기 위해서는 철공소 앞을 지났기 때문에. 매큼한 용접 연기 냄새. 쇠를 깎는 날카로운
소리들. 내가 날마다 맡아야 하는 냄새와 소리였다.
그랬지. 그때는. 낮에 철공소에서 일하고 밤에 야간고등학교에 다니는 친구들도 많았다.
나는 그래도 그 친구들에 비하면 양반이었다. 기름을 만지는 대신에 서류 심부름을 하는 사환이었기
때문에.
오후 5시까지 기계를 돌리고, 기름을 만지다가,
손도 제대로 씻지 못하고 허겁지겁 책가방을 들고 학교에 등교했던 친구들. 그래서 그 친구들의
손톱 밑에는 늘 시커먼 기름때가 네일아트처럼 슬프게 그려져 있었다.
그 친구들의 손을 잡으면 그 손바닥은 흡사 알갱이 거친 '뻬빠'같았다.
뻬빠라면 잘 모를까. 표준어로 사포라 한다. 거친 손. 어린 나이에. 그때 남들은 우리들을
이렇게 불렀지. 공돌이. 여자애들은 공순이.
그런데 공돌이와 공순이 중에 사연 없는 애들이 없고 효자 아닌 애들이 없었다. 왜냐면, 가족 돌보느라
어쩔 수 없이 택해야 했던 직업이기 때문에. 동생들 학비에 오빠들 학비까지.
누구라고 인문계 고등학교에 가고 싶지 않았을까. ‘야간’고등학교. 그 단어 안에는 이렇게 배우겠다는
열망이 눈물과 콧물로 배어있다. 그 야간고등학교마저 못나왔으면 어쩔 뻔 했나. 그래도 그때는 못 배운
한(恨)이 전혀 부끄럽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참으로 치열하게 살았던 시절. 나는 이 신새벽에, 오늘을 얼마나 치열하게 살고 있는지 돌아보게 된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참 호시절인데. 이 호시절을 그냥 누리고만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너무 점잖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