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할아버지 산소가 멀리 보이는 무너져내린 언덕에
어머니는 몇천 년 눈물로 헹구어 온 보리씨를
조선의 한 뼘 가슴을
파고
그 기인 어둠 홀로 찍어 삼키며
박속 같은 얼굴로 뿌리시었다.
시인은 읊조렸다. 기자의
부탁에 쑥스러운 표정은 뒤로하고 198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됐던 작품 ‘어머니의 겨울’의 도입부를 나지막한 목소리로 들려주기 시작했다.
1월을 보내는 마지막 날 오후 5시, 시인의 등 뒤로 유리창 너머에는 노을이 지기 시작했고 그의 오른손에는 담배가 하염없이 타들어 갔다.
그 시절 정성스럽게 동봉한 3편의 시는 열아홉 청년(원광대 문예창작과 1학년 재학) 유강희에게 시인이라는 명함을 건넨 일생일대의
사건이 됐다. 사실 이 작품들은 고3때의 작품이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 등으로 어려웠던 집안사정을 모른 체 할 수 없었던 청년이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절박하게 써내려간 시는 심사위원의 마음을 움직였다. 시인은 지금도 후배들에게 말한다. “절박하게 써라. 그리고 절실해져라.”
당시 ‘어머니의 겨울’은 어머니로 표상되는 한국의 정서를 순정하게 드러낸 작품으로 장식적 수사도 어느 정도 적절하게 규제돼 있다는
평을 받았다. 소재면에서나 시어 선택이나 족히 마흔은 넘은 사람이 썼을 것으로 보이는 작품 속의 시인은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린 애늙은이가
맞다.
그렇게 최연소로 신춘문예에 등단해 시작(詩作)을 이어간 유강희 시인이 벌써 20여 년을 넘게 시인이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다.
사실 시인은 “일찍 등단하고 그런 것들이 호기심이 되고, 기록으로서 나름의 의미는 될 수 있지만 문학의 본질은 아니기에
치우치면 안 된다”면서 인터뷰를 부담스러워 했다. 등단의 나이가 중요한 것도 아니고, 정말 묵묵하게 글을 쓰고 있는 사람들에게 누가 되지 않을까
염려되는 마음인 것. 그러면서 그는 “문학은 끝까지 가는 것이지 처음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문학의 힘은 상시 진행형에 있고,
문학을 향한 꿈은 언제나 커간다는 이야기다.
어린 시절, 키가 유난히 작았던 소년 유강희는 둘째 형의 책을 종종 훔쳐보면서 작가의
꿈을 키웠다. 시인이 기억하는 형은 학창시절부터 소설을 쓰면서 문학적인 남다른 자질을 보였던 인물이란다. 가난했지만 책을 포기하지 않았던 형이
모아놓은 소설과 시집을 탐독하면서 자신의 현실상황과는 다른 또 다른 세계에 눈을 떴던 그다. 엄밀히 말하자면 형 없이는 지금의 시인은 없다.
지금도 서로의 글을 냉철하게 평가해주는 든든한 지원군이다.
데뷔작의 영향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는 어머니를 소재로 시를 자주 쓴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하지만, 실제 어머니를 그린 시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정도다. 2005년 내놓은 두 번째 시집 ‘오리막’에서
농촌풍경에 얽힌 슬픔과 죽음의 세계를 표현하고, 시골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잦은 등장에서 그런 오해를 받았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그의 시는
‘슬픔’으로 대변됐다. 세상을 염세적으로 바라 본 그였다.
시간이 흐르고, 시인은 이제 달라졌다. 마치 어린왕자로 다시 태어난
모습이다. 동시와 동화를 접하면서 비관적인 생각은 걸러져 새로운 힘이 되고, 시인의 창작에 바탕이 되고 있다. 삶 속에 여러 가지 관계 속에서
지쳐가고 있던 그 시점에 만난 어린아이의 시선은 앞으로도 문학을 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기 충분했다.
“수년 전 밤골(김제)에
거주하던 시절 김제 금남초등학교에 강연을 간 적이 있어요. 전교생이 20여 명 정도 되는 작은 학교였는데 아이들이 낭송하는 동시를 듣고,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잊을 수가 없더라고요.”
어린이를 좋아하고 또 어린이와 늘 함께하고 싶어 어린이를 위한
글쓰기를 즐겁게 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첫 동시집인 ‘오리발에 불났다’를 통해 순수한 눈으로 관찰한 사물과 세상의 모습을 재치있게 표현했다.
시인이 동시에 천착하는 이유는 그렇다. 자본주의 사회, 세상 모진 풍파를 경험한 사람일지라도 마음에는 동심이 살아 있으니 그것을 찾아주고
싶었다고 한다.
“동시라는 것이 누구나 쓸 수 있지만 좋은 동시가 되긴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최근에 동시와 동화를 쓰면서
지난 20여 년간의 나의 시, 나의 삶, 나의 문학에 대한 생각을 다시 갖게 됐죠. 이전에는 겁도 없이 시를 썼다고 하면 이제는 한 자 한 자
적어 내려가는데도 고민에 고민을 더 하게 됐습니다.”
시인 유강희는 시와 동시는 분리될 수 없다고 말한다. 동시는 시인의 마음의
징검다리요, 시는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길어올린 한 모금의 물이다. 문학이란 흔들림 없이 밀고 나가야 맛이 있다. 특히 올해에는 두 배, 세 배의
왕성한 작품활동을 기대해도 좋단다. 6년여 만에 반가운 세 번째 시집도 상재할 생각이고 물론 동시집도 꾸준히 발표할 테니 말이다. 메마른 가슴을
적셔줄 행복한 책읽기가 벌써부터 기대된다.
<유강희 시인 프로필>
-1968년 전북 완주
출생
-198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 ‘어머니의 겨울’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 시작
-시집 ‘불태운 시집’,
‘오리막’
-동화집 ‘도깨비도 이긴 딱뜨그르르’
-동시집 ‘오리발에 불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