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산책
한양도성길, 낙산구간 걸어보세 걸어보세
주경림
1. 들어가며
오늘은 찬 서리가 내린다는 절기인 상강, 어느덧 가을의 끝자락이다. 구름 한 점 없는 10월의 맑은 가을날, 바람이 조금 쌀쌀해도 걷기에 더없이 좋은 계절이다. 한양 도성길 중에 가장 짧고 완만한 낙산 구간을 걷는다. 혜화문에서 흥인지문까지 2.1km로 약 1시간 정도면 충분히 완주할 수 있는 가벼운 산책길이다. 먼저 혜화문 근처의 혜화동 전시 안내센터에 들러 미리 한양도성에 관한 정보와 지도를 얻으면 훨씬 도움이 된다. 1940년에 지어진 목조건물로 역대 대법원장공관이었다 서울시장공관으로 18대 박영수 시장에서 35대 박원순 시장까지 거주했다. 2015년부터 2년간의 리모델링 공사를 거쳐 한양도성과 역대 거주자 관련 전시관, 순성 안내 및 주민 쉼터로 재탄생 되었다. 한양도성의 성벽을 담장의 일부로 사용하고 있어 여러 차례 철거 논란이 있었으나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보존하기로 결정되었다.
전시 안내센터에서 백악산, 낙산, 목멱(남산), 인왕산의 지형을 따라 아름답게 굽이치는 한양도성은 600여 년의 세월 동안 서울 시민의 삶과 맞닿아 있다는 해설이 깃들인 도성과 주변 지역의 발전상에 관한 영상을 보았다. 태조 3년(1394년 11월 3일) 『태조실록』에는 나라를 가진 사람들이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일로 종묘, 궁월, 성곽의 축성이라고 명시되어있다. 한양도성은 전쟁을 목적으로 산 위에 쌓은 요새가 아니라 조선왕조를 상징하고 수도 한성부의 도시 공간을 관리하기 위하여 쌓은 도시 성곽이라는 점으로 다른 성곽과 차별화된다. 왕조의 중심인 궁궐과 종묘를 보호하고 도시의 안과 밖을 엄격히 구별하면서 사산四山의 능선 따라 축조되었다.
2. 혜화문에서 시작하며
돌들의 시간을 걸어보세
혜화문에서 흥인지문까지 한성도성길 걸어보세
기와고르기 공사 중인 혜화문에서
지붕 위의 잡상, 손오공이 불러준
근두운觔斗雲을 잡아타고
팥배나무숲 나무 계단을 훌쩍 올라 도성 길에 오르네
자연석 그대로 쌓은 메주만 한 돌
가지런하게 다듬은 옥수수 알 모양의 돌
규격화해서 쌓은 정방형 돌,
최근에 다시 쌓은 낯빛 하얀 돌,
각기 돌들이 머금은 시간을 따라 걸어보세.
전시안내센터에서 한양도성지도를 얻어 혜화문에 이르는 계단을 올랐다. 시끄럽던 자동차 소음이 ‘혜화문’에 오르니 한결 덜해졌다. 혜화문은 조선왕조가 건국되어 도성을 에워싸는 성곽을 축조하면서 1397년(태조 5년)에 세워졌다. 도성에는 4개의 대문과 4개의 소문이 설치되었는데 소문 가운데 동문과 북문 사이에 위치해 ‘동소문’이라고도 부른다. 북대문이 일반인의 통행이 금지되어 양주, 포천 방면의 중요한 출입구가 되었다. 처음에는 ‘홍화문弘化門’이었다 창경궁의 동문을 ‘홍화문’으로 부르게 되어 1511년(중종 6)에 ‘혜화문’으로 고쳤다. 겸재 정선의 「동소문도」에는 문루가 없는 무지개문으로 그려졌다. 영조 때 문루가 다시 지어졌는데 1928년 일제가 길을 낸다는 명목으로 혜화문을 철거함으로 한양성곽을 훼손했다. 지금의 혜화문은 1994년 서울 도성복원사업으로 혜화문의 본래 자리보다 북쪽으로 옮겨지어졌다. 필자가 보기에는 도로가 절단된 성벽 위에 섬처럼 고립되어있는 혜화문의 모습이다. 이미 큰 길이 생겨나 낙산 줄기를 복원하고 그 위에 짓기는 불가했으리라. 일반적으로 홍예 안쪽 천장에 그려지는 용 대신에 혜화문에는 봉황이 그려져 있다. 혜화문 주변에 새가 많아 봉황을 이용하여 새들을 쫓고 악한 기운을 막으려고 한 것이라고 한다.
혜화문에서 다시 계단으로 내려와 큰길을 건너 성곽길에 오른다. 내사산內四山인 백악, 낙산, 목멱(남산), 인왕 중에서 낙산은 높이 124m로 가장 낮은 산이다. 조선 왕궁의 좌청룡에 해당하는 산으로 낙타 등을 닮았다 하여 ‘낙타산’ 혹은 ‘타락산’이라 불렀다. 가톨릭대학을 따라 이어진 성곽길을 걸으며 장수마을 이화마을 등 옛 마을의 정겨운 살림살이도 엿 볼 수 있다. 필자는 이곳에서 역사문화해설사와 마을 갤러리 도슨트로 활동하면서 성곽 해설을 담당하기도 했었다. (2017년~2019년).
웅장하고 견고한 한양도성을 거닐며 시대별로 다른 축성 기법을 확인할 수 있다. 태조 때는 메주만 한 자연석으로 성을 쌓았고 세종 때는 개축하면서 바닥에 큰 돌을 반듯하게 다듬어 올려 기초공사를 튼튼히 했다. 그 위로 태조 때 사용했던 성 돌의 재활용으로 둥글둥글한 작은 돌을 켜켜이 쌓아 올렸다. 임진왜란 이후인 숙종 30년(1704년)에 재정비한 성 돌은 정사각형이다. 성인 4명이 들어야 할 정도로 무거운 돌을 아귀가 잘 맞도록 다듬어 가지런히 쌓아 올렸다. 마을재생사업의 일환으로 오래된 집을 리모델링하여 갤러리로 개관한 ‘369마을예술터’에서는 「삼선교프로젝트-흐르는 시간전」이 진행 중이어서 잠시 들러 관람했다.
도성 길 길목에 서 있는 은행나무가 노란 은행잎 비를 쏟아냈다. 은행잎들이 떨어지면서 켜켜이 쌓아진 돌들의 시간도 빛 부시게 출렁였다. 은행나무 빈 가지 사이로 파란 하늘의 꼭지가 보였다.
본래면목
가을에 녹색 옷을 벗고 나면
화살나무, 옻나무, 단풍은 붉은색
느릅나무, 은행, 고로쇠는 노란색
느티나무, 칠엽수는 갈색 잎
저마다 본래 색대로 돌아가는데
나는 치장과 생각을 벗은 적이 없어
나의 색을 모르겠네
그냥, 햇빛도 바람도 지나가게
투명이면 좋겠는데.
3. 장수마을, 이화마을, 낙산공원까지
1396년 조선은 농한기인 1월 9일부터 49일, 8월 6일부터 49일간의 98일간 전국의 백성 약 20만 명을 동원하여 18.6km의 한양도성을 건설하였다. 각자 식량을 지고 와서 바깥 잠을 자며 밤낮으로 노동에 시달려 부상자, 동상자, 사망자가 많이 나왔다고 한다. 성곽을 개축할 때 이를 안타깝게 여긴 세종은 성문을 여는 시간인 파루(오전 5시)에서 성문을 닫는 인정(오후 10시)까지만 작업하라고 지시했다. 그래도 하루 17시간 중노동이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고역으로 한양도성은 우리 선조들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건축물이며 문화유산이다.
옛 얼굴들을 떠올리며
태조 5년 음력 정월, 장정들이 전국에서 식량을 지고 와
바깥 잠자며 파루(오전 5시)에서 인정(밤 10시)까지 성을 쌓았네
다치고 얼어 죽기도 했던 옛 얼굴이 돌들로 모여 앉았네
남장한 효녀 도리장이 전라도 장성에서 올라와
해바라기꽃으로 빙그르르 고개를 돌려가며
병든 아버지를 찾네
피와 땀방울 묻은 돌 구슬로 꿰어 엮어진 성곽,
나라님이시여, 어찌 도성을 버리고 피난길에---
와르르! 백성들의 마음이 무너져 내렸네
무너진 마음을 안고 걸어보세 걸어보세.
도성길을 걷다 보면 글자가 새겨진 돌들을 발견할 수 있다. ‘각자성석刻字城石’이라 하는데 축성 담당 감독관, 책임기술자 이름 등이 새겨져 있다. 총 97구간으로 나뉘어 진행되었는데 무너지면 담당했던 지역에서 와서 다시 쌓아야 했다. 공사실명제가 그 당시에도 시행되었다는 점이 놀라웠다. 그런데 선조와 인조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도성을 버리고 피난을 갔으니 백성들은 억장이 무너졌으리라.
성곽 아래 화단에 잎사귀까지 자주보랏빛으로 질린 맨드라미가 닭벼슬 같은 꽃에 씨앗을 가득 품고 시들었다. 절정은 지났지만, 연륜의 깊이가 느껴지는 노년의 인생과 닮아있다. 조롱조롱 붉은 열매를 달고 서 있는 남천의 무리들이 가을의 정취를 더해주었다. 흰말채나무, 돌단풍, 눈향나무 이파리에는 아직은 푸른 생명의 기운이 남아있다. ‘장수마을’ 표지석이 서 있는 근처에서 길고양이 새끼를 만났다. 까망이, 누렁이, 줄무늬 고양이 세 마리가 쪼르르 나와 앉아 가을볕을 쬐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도 도망가지도 않는 순진무구한 모습이었다. 그때 줄사철 이파리들 사이로 고양이 두 마리가 나타났다가 금방 사라졌다. 아마 새끼 어미 아비인데 해칠 것 가지 않으니 둘이 줄사철 나무숲으로 사랑을 나누려고 다시 들어간 것 같다. 잠시 줄사철 이파리들이 들썩거렸다.
4. 낙산공원에서 이화 벽화마을로 내려오며
장수마을과 낙산공원 갈림길에서 성벽의 비탈길을 따라 낙산공원 쪽으로 올랐다. 아마 낙산구간 중에서는 이 오름길이 가장 가파를 것이다. 암문을 통해 낙산공원으로 들어왔다. 암문暗門은 성곽에 문루를 일부러 세우지 않고 뚫은 문으로 전시에 물자를 이송할 수 있는 비밀스러운 문을 말한다. 낙산에는 60년대 근대화 과정에서 아파트와 주택이 난립했었는데 서울시에서 공원녹지확충 5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낙산을 근린공원으로 지정했다. 낙산공원에서 내려다보면 서울 전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전망이 좋아 서울의 ‘몽마르뜨 언덕’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작은 공연장과 체육 시설이 설치된 놀이광장이 있고 쉼터 정자를 갖추고 있다.
낙산정에 오르면 쉬어가세
북한산 백운봉이 혜화문 뒤에 우뚝 빛나고
성벽 아래로는 골목마다 동네 집들이 빼곡하네
은행나무 큰 그늘, 369마실카페 지나
장수마을 표지석 위쪽으로 성벽 따라 낙산으로 올라가세
암문으로 성 안쪽으로 들어서면 낙산공원,
서울 시내가 훤히 내려다보이네
마을버스가 124m 낙산 정상까지 오르락내리락,
낙산정에 잠시 앉아 산줄기를 바라보네
인왕산, 북악산, 도봉산 줄기가 끝없이 이어져 흘러가네
나를 업고 하늘바다로 흘러가네.
팔각정인 낙산정에 걸터앉으니 창경궁, 연건동, 동숭동, 혜화동 일대가 다 내려다보였다. 올려다본 하늘에는 인왕산 북악산, 도봉산 일부까지 물결처럼 산줄기가 끝없이 이어져 흘러가고 있었다. 낙산정에서 쉬었다 내려오는데 ‘홍덕이 밭’이라는 팻말이 세워진 텃밭을 보았다. 병자호란 때 볼모로 청나라에 잡혀갔던 봉림대군이 나인 홍덕이 담가준 김치 맛을 잊지 못해 한양에 돌아온 뒤에도 홍덕이에게 낙산에 밭을 주어 김치를 담그게 했다는 역사적인 텃밭이다. 현재는 관광자원이 되었다.
이화 벽화마을로 내려오는데 가파른 골목마다 꽃 그림이 피어났다. 이화동 생활사 박물관을 비롯해 고만고만한 공방과 갤러리들이 많아 안복眼福을 누렸다. 옥상을 이용한 루프톱 카페로 유명한 ‘개뿔’에서 오늘은 운 좋게 커피 한 잔을 마실 수 있었다. 개뿔이라도 잡아보려는 사람들로 늘 만석이었다. 루프톱에 올랐는데 전망이 좋은 곳은 이미 다 차서 한쪽 귀퉁이로 가서 앉았는데 바로 그 앞이 성곽길이었다.
성곽 너머로 창신동 마을이 보였다. 조선 시대에는 퇴직한 궁녀들이 주로 모여 살았었는데 1960년대 이후에는 동대문 시장에 의류를 납품하는 하청업체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한국 봉제산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마을 한가운데 덕수궁 석조전 건설에 필요한 돌을 캐던 거대한 채석장이 절벽의 형태로 남아있다.
내려가세 내려가세
낙산, 좌청룡 등에서 그만 내려가세
가파른 골목마다 꽃 그림이 피어나는 이화 벽화마을에는
고만고만한 공방과 갤러리 대장간들로 분주하네
카페 ‘개뿔’에는 개뿔이라도 잡으려는 사람들로 만석,
내 자리는 없네
창신동 봉제마을 뒤로 채석장 절벽 위까지
집들이 빈틈없이 들어찼네
노을 지니 남산 타워가 그림자로 다가오네
아! 겹처마 우진각 지붕의 흥인지문이 보이네
골목길 따라 한양도성박물관과 공원으로 내려가세.
5. 한양도성박물관과 흥인지문
서울 역사박물관 분관인 한양도성박물관은 이화여자대학교 부속 동대문병원을 철거하고 세운 서울디자인지원센터 건물 1~3층에 위치해 있다. 큰길에서 보면 흥인지문공원 언덕에 자리 잡아 선뜻 찾아가기가 망설여졌는데 성곽길에서는 내려오는 길목이라 오늘은 방문하기가 편했다. 한양도성박물관은 조선 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양도성의 역사와 문화를 담은 상설전시실, 기획전시실, 도서정보센터와 학습실을 두루 갖추어져 있다. 들어서자마자 전시된 조선 시대 한양 지도인 ‘수선전도首善全圖’ 모형이 눈길을 끌었다. 1824년~1834년 사이에 김정호가 제작한 것으로 전하는 목판 인쇄본의 한양 지도이다 ‘수선首善’은 가장 좋은 것, 최고의 선善이라는 뜻으로 한양을 일컫는 말이다. 화재를 막고 잡귀로부터 건물을 보호한다는 주술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흥인지문 지붕 잡상들의 모형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성을 쌓았다 허물며 다시 쌓고
공원에서 수크렁 꽃대와 너울너울 춤추며
맥문동, 금계국과 놀다 보니
바로 앞에 가 흥인지문이네
고층빌딩 사이에 옹성을 두르고 외롭게 서 있네
한성대역에서 동대문역까지,
지하철 두 정류장을 산길로 돌았네
큰 돌 사이에 끼어 있는 작은 돌인 나를 보며
성을 쌓았다 허물었네
와르르! 마음 무너지는 소리를 들으며
오르막 내리막 이어지는 도성길 따라 걸어왔네
한양도성의 동문으로 유교의 오상(의 다섯 덕목)에서 동방은 인仁에 해당하므로 흥인문興仁門이라 이름 붙였다. 숭례문과 마찬가지로 최고의 격식을 갖추기 위해 2층 문루를 세웠으며 왕이 도성을 출입할 때 자주 이용했고 흔히 동대문으로 불렀다. 바깥에 옹성을 쌓아 적의 공격에 대비했고 평탄한 지형상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고 쓴 현판을 걸었다. 보물 제 1호로 현재의 흥인지문은 고종 6년(1869)에 다시 지은 것이다.
1시간 남짓 걸리는 낙산구간은 조망이 좋고 도성 옆 아기자기한 성곽 마을도 엿보며 걸을 수 있는 한양도성 길 중에서 가장 쉽게 도전할 수 있는 구간이다. 연인 혹은 친구와 걸어도 좋고 혼자 걸으면 더욱 좋은 산책길이다. 애완견과 함께 걷는 사람들도 있었다. 노을과 야경도 빼어나니 밤에 걸어도 좋은 길이다.
서울시는 2016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예비 심사에서 떨어진 한양도성의 등재를 위한 절차를 본격적으로 재추진한다. 한양도성이 600년 넘게 서울을 지킨 방어벽이라는 점에 맞추어 북한산성, 탕춘대성과 묶어 세계유산 등재(2027년)에 재도전한다니 좋은 결과가 있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