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께서 35세에 성불(成佛)하시고 맨 먼저 녹야원에서 수행하던 다섯 비구니를 찾아가 처음 말씀이 ‘내가 중도(中道)를 깨우쳤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색(色)/공(空), 생(生)/멸(滅), 이승/저승(현세/내세), 나/부처(佛) 등 모든 이항쌍에서 이항 간의 관계가 불일불이(不一不二)적임을 — 유학으로 말하면 음양대대(陰陽對待)적임을 — 깨달으신 것이다.
불교에 의하면, 오온(五蘊) 즉 수(受), 상(想), 행(行), 식(識), 색(色) 외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을 포함한 만물은 어떤 한 순간도 고정된 실체일 수 없다. 자아(自我)라는 것도 오온의 일시적 결합물에 불과하다.
온(蘊)은 모으다, 결합하다, 쌓다는 뜻으로 연기(緣起)존재론과 적선공덕(積善功德)방법론이 통합적으로 함의 되어있는 개념이다. 반야경 이래 대승불교에 의하면, 오온은 카르마(karma) 즉 [생명체]유정(有情)의 업력(業力) — 적선공덕의 힘 — 에 의해 존재한다. 오온 자체는 비어 있는 공(空)이다. 이 공이 존재론적 실재(ontological reality)이다. 오온의 일시적 조합체인 일체의 현상적 존재(actual existence) 곧 색(色)은 그러므로 본디 공이다(一切皆空). 원효(元曉)의 설법에 의하면, 항아리건 개와장이건 모두가 진흙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것들은 다시 진흙으로 돌아온다. 무엇을 말해 주는가? 진흙은 그것들의 통상(通相, totality)이라는 것이다. 항아리나 개와장과 같은 색(色)은 appearance에 불과하고, 진흙에 비유된 총체성으로서의 공(空)이 진정 reality라는 것이다.
이에 반야경은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즉 보이는 색계(色界)와 보이지 않는 공계(空界)가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닌 불일불이(不一不二)적 관계임을; 또한 색과 공을 불일불이적으로 통합하는 문 역시 일심이문(一心二門)으로서의 마음임을 역점적으로 설하고 있다. 색의 생멸문(生滅門)과 공의 진여문(眞如門)이 통합된 마음에는 색과 공이 둘이 아니라는 것(不二)이다. 사찰마다 대문에 ‘不二門’이라고 쓴 현판을 크게 걸어 놓은 이유이다. 불이의 도, 즉 중도(中道)를 깨우친 마음 곧 해탈심(解脫心)에는 일체의 경계가 없어지고 따라서 일체의 집착이 없어진다.
이에 불교는 실체론(substantialism)을 부정하는 아나타(anatta)사상이다. 특히 자아와 불멸의 영혼에 대한 실체론적 믿음이야 말로 인류가 품어온 뿌리깊은 망상 곧 무명(無明)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에 있어 가장 근본적 과업이 바로 무명을 깨우치는 일이다. 이와 관련해서 부처님은 무기(無記)를 설하신다. ‘현상세계 내의 존재인 인간’의 감각-지각에 의한 인식은 현상세계라는 한계를 넘을 수 없다. 그러므로 설령 현상세계 너머에 본체라는 것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인간이 있다느니 없다느니, 혹은 유물적이라느니 유심적이라느니 하면서 판단하고 기술하지 말라는 것이다[無記: 형이상학 금지]. 인간을 행복한 삶으로 실질적으로 인도해야 하는 종교가 문제로 삼아야 할 것은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고 있는 이 현상세계 뿐이라는 것이 부처님의 입장이다(공자님의 입장도 무기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당시의 다양한 현상론마저 모두 논파하고 독자적인 연기설(緣起說)을 설파하셨다. 현상계의 그 어떤 현실도 일련의 인과적 연기고리에 의한 것임을 밝힌 것이다. 이것은 고(苦)의 원인을 밝혀 해탈에 이를 수 있는 방법론을 명확히 제시하는 부처님의 독창적 불법이다.
인과적 연기고리를 간략하게 말하면 이렇다. 자아와 불멸의 영혼에 대한 실체론적 믿음 곧 무명은 몸(身)과 말(口)과 마음(意)의 죄로부터 자라난다[과연 그렇지 않은가. 몸과 말과 마음의 죄가 없다면 불멸의 영혼이 극락에 간다, 지옥에 간다는 그런 믿음체계를 구태여 갖게 되었을까]. 죄로부터 자라난 무명이 행(行)을 낳는다. 행은 미래의 존재를 결정하게 되는 마음의 성향(혹은 조작)이다. 무명과 행은 과거세에 속한다. 무명에 의한 행으로부터 식(識)이 일어난다. 식의 일어남은 현세 삶의 시작이다. 식은 아기를 임신하는 첫 순간에 일어난다. 식이 일어남과 동시에 [정신+몸]명색(名色)이 생긴다. 이 명색에서 육처(六處) —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 — 가 생겨나고 이것들이 기능해서 촉(觸), 수(受), 애(愛), 취(取), 유(有), 생(生)이 일어나며 이로 인해 결국 노사(老死)가 일어난다(K. Ch’en, 1968: 길희성·윤영혜 옮김, 1994, 佛敎의 理解, 분도출판사, 69~70쪽). 모두 12개의 고리이다. 해탈의 방법은 고(苦)의 가장 근원인 첫 번째 고리를 끊는 것이다. 그것이 끊어지면, 즉 무명을 깨우치면 모든 고리가 무너지게 되기 때문이다. 이에 그 방대한 불교 경전의 핵심은, 상기 어께글에서도 보듯이, 무명을 깨우치는데 즉 무아(無我)를 깨닫는데 집중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연기설은 상견(常見) 즉 영혼불멸설인가? 아니라면, 단견(斷見) 즉 육체의 죽음과 더불어 영혼도 사멸한다고 보는 유물론적 영혼관인가? 불교는 상견도, 단견도 부정하는 양비론兩非論이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서양의 이분법적 사고에 젖은 사람은 그런 기본적인 것도 확실하지 않다면 불교를 믿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독화살 비유로써 그 물음에 대해 분명하게 설하신다: 알 수 없는 독화살을 맞은 자가 해야 할 일은, 알 수 없는 것을 알려고 할 것이 아니라 독화살을 뽑고 살아나는 일이다.
이와 관련해서 부처님이 촛불 비유로 설하신 바에 의하면, 매 순간의 촛불은 이전의 촛불 바로 그것은 않지만 그것과 다르지도 않다. 즉, 두 촛불 간에 동일성은 없지만 연속성은 있다. 오온의 매 순간 조합으로 이루어진 존재가 매 순간의 현존재이다. 매 순간의 현존재와 이전 존재 간에, 촛불의 경우처럼, 동일성은 없지만 연속성이 있다. 즉, 모든 현 존재는 이전 존재에서 지은 업에 따른 인과적 연기에 의한 존재라는 것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알 수 없는 그러한 형이상학적 물음에 골몰하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의 삶을 잘 사는 것, 즉 지금 이 현재에서 좋은 업을 지어 공(空)인 오온을 채우라는 것이다. 공은 내용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없음(無)이 아니라] [비어 있음(空)이므로]무엇이든지 내용으로 채울 수 있다는 것이다. 유정이 어떤 업을 지어 공을 채우느냐에 따라 어떤 색이 되느냐가 결정된다.
이에 불교는 인과업보론과 관련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불교의 해탈 방법론이 당시의 숙작인(宿作因)설과 같은 기계론적 인과업보론에 기반해 있다면 불교는 세속적 수준이 되고 만다. 인과론적 업보를 염두에 두고 하는 실천은 결과를 예상하고 그 결과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실리주의, 기껏해야 공리주의이기 때문에 불교가 자칫 사도邪道로 빠질 수 있다. 부처님이 설한 방법론, 즉 매 순간 현재에서 좋은 업을 지어 오온을 채우는 유일최선의 방법은 한마디로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즉 상(相)에 머무름 없이 베푸는 것이다.
특히 금강경은 무주상보시를 역점적으로 설하고 있다. 무아(無我) 즉 ‘나’라는 생각 없이 그러므로 나의 대상인 ‘너’라는 생각도 없이, 따라서 결국 ‘보시한다’는 생각도 없이 보시 혹은 선행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주상적으로 하지 않으면, 자기 기분으로 술 한잔 산 것을 가지고도, 또는 버리기 아까워 쓰레기 치우듯이 남에게 준 것을 가지고도 어떤 기대하는 생각이 들고 이에 따른 섭섭해 하는 마음이 생겨 결국 비판과 미움의 싹을 틔우게 된다는 것이다[그렇다. “준 것 없이 밉다”는 말이 왜 생겼겠는가]. 불교에서 말하는 선(禪)생활이라는 것도, 별다른 것이 아니라, 무아적 실천이면 일상의 생활 자체가 바로 선의 삶이라는 것이다.
서양에서는, 전에 우리가 논의했던 것처럼, 칸트철학이 제시하는 정언명령으로서의 이성도덕을 최고 윤리로 받든다. 하지만 이성도덕을 실천하는 삶에는 어디까지나 아我가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아의 상대 곧 남을 재는 잣대가 있고, 이분법적 경계가 있고, 보답(give-and-take)이라는 심리적 원리가 있다. 이러한 삶으로 이루지는 세상은 결국 희비쌍곡선적 사바세상 이상일 수 없다. 그 이상의 세상은 신의 존재, 영혼의 불멸을 믿음으로써 내세에서나 가능하다.
반면에 무아적인 선(禪)의 삶으로 이룩되는 세상은 그와 질적으로 다른 차원의 세상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의 세상, 인식론적으로 말하면, 불일불이(不一不二)의 세상이다. 크고 밝은 지혜를 설하는 반야경에 의하면, 견성(見性) 즉 무명을 깨우쳐서 무아를 성취한 사람에게는 너와 내가, 나와 부처가, 열반과 이 세상이 불일불이적 일자(oneness)임으로 끝까지 부처님을 붙들고 있을 이유가 없고, 극락세상 가기 위해 이 세상을 버릴 이유도 없다. 생과 사가 일어나는 현상세계가 열반이고 열반이 현상세계이다.
그렇다면, 끝으로 어떻게 무아(無我)를 성취할 수가 있는가? 간단하다. 부처님에게 귀의(歸依)하는 것이다. 이 ‘귀의’라는 말에 보통은 그만 아득함을 느낀다. 오해 마시라, 귀의는 결코 세속적인 삶을 떠나는 것 혹은 가치 없는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불교는 결코 허무주의 혹은 현실도피주의가 아니다). 또 귀의의 결과로 자신의 존재가 특별한 무엇으로 바뀌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 결과는 오직 나 자신의 눈이 바뀌어지는 인식의 전환인 것이다(見性). 자아에서 무아에로의 인식전환이 이루어진 사람이 바로 깨달은 사람(覺者), 해탈한 사람이다.
“깨우쳐서 보면 전체가 다 부처이고 전체가 다 불국토이지만 깨우치지
못하면 전체가 다 중생이고 전체가 다 사바세계, 지옥인 것입니다 (…)
천당에 가니 극락세계에 가니 하는 것은 모두 헛된 소리입니다.
(性澈, 2010, 영원한 자유의 길, 96쪽)
우리 모두에게 매일매일이 극락세상이기를 기도합니다.
불기 2568년, 부처님 오신 날
학수이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