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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 흘러간 그 옛날에 내님을 싣고 떠나던 그 배는 어디로 갔소 그리운 내님이여 그리운 내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문창학의 고향 함경북도 온성군 미포면은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 접해 있는 국경 지역이다. 우리가 지금은 소위 ‘연변조선족자치주(延邊朝鮮族自治州)’라고 부르는 중국 길림성(吉林省)일대와 혼춘시(琿春市), 도문시(圖們市) 지역과 마주 대하고 있는 곳이 바로 함경북도 온성군이다. 남쪽은 종성군과 경원군에 접하고 있는데 이는 문창학이 1922년 1월 5일, 경원군 신건동에 있는 신건원 주재소를 습격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왜냐하면, 문창학의 고향 온성군과 신건원 주재소가 있는 경원군은 서로 이웃하는 지역으로 지리적으로 매우 가깝게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창학은 훗날 우리나라를 빼앗고 우리 백성들을 탄압하는 일본 순사를 죽이는 거사를 치를 때 먼저 도착하여 불빛으로 신호하는 임무를 맡을 수 있었던 것이다.
오직 피 끓는 조국애로 우리나라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목숨도 아깝지 않다는 절연한 각오로 일본 경찰지소를 습격했던 문창학은 청년 시절에 꿈도 많았고 하고 싶은 일도 많았다고 한다.
함경산맥(咸鏡山脈)은 문창학이 살던 온성군 미포면까지 뻗어내려 낮은 구릉지를 만들어 주었기 때문에 문창학의 고향은 추운 다른 지역에 비해 농업이 발달할 수 있었다. 특히, 중국과 국경을 이루는 두만강은 이 지역에 넓은 범람원을 발달시켜 논농사를 비롯하여 콩·보리·밀·조·수수·옥수수·감자·쌀 등을 재배할 수 있는 좋은 여건을 만들어 주었다.
‘두만강(豆滿江)’이라는 ‘두만(豆滿)’은 말 그대로 해석하면 ‘콩이 가득하다’라는 뜻이다. 물론, 두만강1)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지만, 글자 그대로를 해석하면 두만강 지역이 콩을 비롯한 밭농사가 아주 잘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두만강이라는 맑은 물과 농사짓기 좋은 평야지대를 형성하고 있는 천혜의 자연 조건을 가진 함경북도 온성군 미포면에서 태어난 문창학은 어렸을 때부터 풍요로운 환경에서 자랄 수 있었다고 한다.
문창학이 살던 집이 바로 여관을 하던 집을 샀기 때문에 방이 22칸이나 되었다고 한다.2) 농사지을 땅이 많아 부농이었던 문창학은 부러울 것이 없이 다복하게 자랄 수 있었기 때문에 꿈도 많았다. 튼튼한 조선이라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인재 양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청년 문창학은 선생님이 되어야겠다는 꿈도 꾸었고, 아버지처럼 고향을 지키며 지역 발전에 이바지 하는 훌륭한 마을 지도자가 되어야겠다는 꿈도 꾸었으며, 멋진 제복을 입고 나라를 지키는 씩씩한 군인이나 경찰관이 되어야겠다는 꿈도 꾸었다. 그러나 문창학의 밝은 미래를 설계하는 아름다운 꿈은 1910년, 한일합방이라는 나라를 잃는 치욕적인 사건으로 말미암아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문창학은 방황하기 시작했다. 나라 잃은 깊은 슬픔에 빠져 도무지 헤어 나오기가 어려웠다. 나라가 일본에 빼앗겨도 두만강 푸른 물은 잘도 흘러갔다. 아무리 눈물을 흘리고 또, 흘려도 조국을 잃은 현실은 바뀌지 않고 일본인들의 극악무도한 횡포는 날로 더 심해져만 갔다. 이제 29세의 문창학이 나라를 위해서 밝은 미래를 꿈꿀 수 있는 것은 그 어느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오직 어둠 뿐이었고 조국 광복의 찬란한 빛은 문창학에게는 더 이상 꿈도 꾸지 못할 현실이 되어버린 것이다.
문창학의 좌절의 시간은 지루했다. 어떤 삶의 목표를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야 할지 막막해서 도무지 잠을 청할 수 없는 많은 밤들을 보내고 있었다. 이렇게 문창학이 방황하고 있을 때 이웃한 함경북도 경원군에서 태어나 일찍이 러시아로 망명한, 평소 존경해오고 있었던 10년 연배의 사촌형 문창범이 구세주처럼 그를 찾아왔다.
문창범은 경원군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신건동 일대에 대해선 훤하게 꿰고 있었다. 문창범이 다녀 간 뒤로 문창학은 신건원 주재소의 일본 헌병보조원으로 들어간다. 문창범은 이미 이때 이상설·이동휘 등과 함께 러시아를 중심으로 전방위적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였다. 그러니까 문창학이 독립운동을 시작한 것은 바로 사촌 형이었던 문창범의 영향이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혹자는 문창학이 신건원 주재소에서 헌병보조원으로 일했던 경력을 가지고 여러 가지 추측을 내놓는다. 그러나 1922년 1월 4일 오후 8시, 중국 화룡현(和龍縣)을 떠나 1월 5일 오전 12시 40분까지 잠복하여 자신이 근무하던 함경북도 경원군 신건원 주재소를 목숨 걸고 습격한 것을 보면 문창학이 신건원 주재소에 헌병보조원으로 일한 것이 혹시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닐지 한번쯤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사촌형 문창범과의 돈독한 친분 관계로 볼 때 문창학이 주도하여 일본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신건원 주재소 습격 사건은 어쩌면 미리 철저히 준비하고 계획된 일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해볼 수 있다.
문창학은 어떻게 하면 조국이 나라를 되찾을 수 있을지 곰곰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신건원 주재소에서 직접 목격한 조선인들에 대한 일본 헌병들의 잔악한 횡포가 이가 갈렸다. 죄도 없이 끌려와 일본 헌병들의 군화 발에 무참히 짓밟히고 피를 흘리는 불쌍한 동포들을 보면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온 몸을 몸서리쳤다. 문창학은 신중하게 생각한 끝에 이런 결론을 내린다.
“미래에 대한 밝은 꿈을 꿀 수 없는 암흑의 시대에서 더 이상 비굴하게 사느니 차라리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겠어!!! 대한의 동포들을 위해- 조국을 위해-. 만세! 만만세!!!”
그리고 1919년 기미년 3월 1일, 문창학은 죽기 살기로 “대한독립만세”을 외치며 태극기를 번쩍번쩍 들어 올린다. 문창학은 태극기를 힘차게 들어 올리며 고향 함경북도 온성의 두만강 푸른 물에서 멱 감고 고기 잡던 행복했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죽기를 각오했지만, 3·1 운동에서 살아 돌아 온 문창학은 다시 조국의 광복을 위해 골똘히 궁리했다. 그리고 4년 선배이자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 김학섭 동지의 의견에 따라 1922년 1월 2일, 웅기항(雄基港)을 습격하기로 결정한다.
“이번엔 김학섭 동지의 의견에 따라 웅기항(雄基港)을 습격해야겠어. 일본 놈들이 우리 땅에다 자신들의 해군기지를 건설해 놓고 우리 조선 백성들의 생산품들을 마구 착취해 가는 꼴을 더 이상은 두고 보지 않겠어. 내 몸이 부서지는 그날까지 난, 조국과 민족을 위해 싸우고 또, 싸우다가 죽겠어.”
문창학은 웅기항을 습격하기 위해 한 치의 주저도 없이 웅진항으로 숨어 들어갔다. 그러나 연말연시를 맞아 일군경이 합동으로 특별 경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거사를 치루기도 전에 붙잡힐 상황이었다. 문창학을 비롯한 다른 동지들은 일단 웅기항 습격 계획을 철회하고 문창학이 근무하여 모든 정보를 입수한 신건원 주재소를 습격하기로 결의했다.
신건원 주재소 습격을 계획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문창학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신건원 주재소 헌병보조원으로 일한 경험을 가지고 있던 문창학은 신건원 주재소 안에 일본 순사들이 어디에 배치되어 있으며 어떤 쪽으로 들어가야 들키지 않을 수 있으며 어느 순간에 거사를 치뤄야 그 일이 성공할 수 있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선봉주자로 제일 먼저 신건원 주재소로 향했다. 문창학은 모두가 고요히 잠든 1922년 1월 5일 새벽 12시 30분경3) 신건원 주재소에 도착했다. 온통 세상이 어둠으로 깜깜한 이 시각, 문창학은 불빛으로 동지들에게 자신의 위치를 알렸다. 그 신호를 본 김학섭을 비롯한 모든 동지들은 10분 뒤 일제히 빗발 같은 사격을 시작했다. 급기야 숙사에 머무르고 있었던 일본 순사 송기안태랑(松岐安太郞)이 사살되었다. 그리고 숙사도 파괴되었다. 정말 순간순간 숨이 멈출 것 같은 긴장의 시간들이 연속되었다.
조용했던 신건원 주재소는 일순간에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일군경이 반격을 가해 오고, 이에 우리 독립투사들은 굴하지 않고 폭탄 2개를 투척하며 끝까지 일군경과 교전하다가 좋은 기회를 틈 타 신건원 주재소를 빠져 나왔다. 이로써 신건원 주재소 습격 사건은 완전한 성공으로 마무리 짓게 된다. 이는 이곳 지리를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문창학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신건원 주재소 습격 사건은 일본군경들에게 조선인들의 무서운 독립 의지를 보여 준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일본인들의 자존심을 몹시 상하게 했을 뿐 아니라 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해 준 우리들의 자랑스런 독립 투쟁의 역사 중 하나이다. 왜냐하면 일본군경들에게 제일 안전해야 할 자신들의 안방인 주재소에서 두 눈 부릅뜨고 소중한 식구가 죽어나가고 주재소 건물이 파괴되는 어이없는 꼴을 목격하게 해 준 셈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것은 이렇게 오직 조국 광복을 위한 한마음으로 자신의 목숨까지 서슴없이 내놓았던 독립투사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신건원 주재소에서 좋은 성과를 거둔 독립투사들은 더욱 의기투합하여 조국 광복을 위해 온힘을 쏟아 부었다. 만주 혼춘에서 일경 습격과 밀정처단을 실행하는 등 그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은 그 누구나 말리지 못할 정도로 맹렬했다.
그렇지만 일본 경찰의 추적도 만만치 않았다. 1922년 12월 어느 날, 문창학은 김학섭(金學燮) 등 독립투사 동지들과 일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청진으로 압송되었다. 문창학과 김학섭 등 13명은 1923년 5월 26일 함흥지방법원 청진지청에서 사형, 무기징역, 10년 징역형 등 중형을 선고받는다. 1923년 9월 28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문창학과 김학섭은 공소가 기각되어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1923년 11월 8일, 역시 기각되어 사형이 확정됨에 따라 1923년 12월 20일 사형 순국하였다.
온갖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고 각양각색의 새들이 아름답게 노래하는 2016년의 화창한 오월의 봄날, 두만강을 바라보며 한 여인의 애달픈 사연을 생각하며 목청껏 노래한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 / 흘러간 그 옛날에 내님을 싣고 / 떠나던 그 배는 어디로 갔소 / 그리운 내님이여 그리운 내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오히려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봄날이라 더욱 구슬프게 다가오는 “두만강 푸른 물에”라는 노래에 얽힌 사연은 이렇다.4)
우리나라가 일제의 탄압에 못 이겨 독립무장투쟁을 국내외에서 굳세게 이어나가고 있을 무렵에 두만강이 흐르는 중국 도문지방에서 있었던 일이다. 경남 거제 출신의 이시우라는 작곡가는 《예원좌》라는 극단에 소속되어 중국 동북부 일대를 돌면서 순회공연을 하는 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시우는 잠이 오지 않아 자신이 머물던 여관 뒷마당을 서성이고 있었다. 그때 마침 같은 동포인 여관 주인이 나와서 나무 두 그루를 가리키며 두만강을 건너 이곳 중국 도문으로 이사 올 때 조국에서 가지고 온 나무들이라 설명한다. 그 말을 듣고 늦은 밤, 방에 돌아 온 이시우는 빼앗긴 조국에 대한 서러운 마음을 노래로 표현해야겠다고 생각을 하며 오선 줄 위에 악보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생각보다 작업이 잘 되질 않아 끙끙거리고 있을 때이다. 갑자기 여인의 비통하고 애절한 통곡 소리가 들렸다. 이에 이시우가 깜짝 놀라 서둘러 사람들에게 사연을 물으니 그 여인은 조국 광복을 위해 독립무장투쟁을 하다가 서대문형무소에서 총살당한 문창학의 부인 김증손녀라는 여인이라는 것이다. 꼭 일본의 손아귀에서 조국을 광복시키겠다고 굳은 결심을 하고 나간 남편이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자 이곳저곳으로 남편을 찾아 헤맸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남편이 일본인들에게 총살당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정말 기가 막힐 일을 당한 것이다. 그런 그녀가 간신히 정신을 가다듬고 오늘 이곳 여관에 머무르게 된 것은 죽은 남편 문창학의 생일이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녀는 조국을 위해 목숨을 과감히 내놓고 비명으로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 남편 문창학을 위해 오늘밤 혼자 조용히 술이나 한 잔 부어주려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미 친분이 있던 여관 주인이 제물을 차려서 내오니 복받치는 설움에 그동안 참고 참았던 슬픔을 진한 눈물로 토해내고야 말았다는 것이다.
이 사연을 듣고 이시우는 큰 충격을 받았다. 다음날 아침, 두만강에 다다른 이시우는 나라 잃고 헤매는 우리 민족의 설움을 다시금 가슴 찡하게 된다. 갑자기 이시우는 두만강 푸른 물이 나라 없는 우리나라 백성들이 소리 없이 흘리는 눈물처럼 보였다. 그때부터 이시우는 마구 악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 / 흘러간 그 옛날에 내님을 싣고 / 떠나던 그 배는 어디로 갔소 / 그리운 내님이여 그리운 내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두만강 푸른 물에”에 얽힌 사연은 이런 피눈물 나는 배경이 있었다. 이렇게 조국을 위해 과감히 목숨을 바친 독립무장투사 문창학 같은 훌륭한 분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자랑스런 대한민국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젠, “두만강 푸른 물에”라는 노래는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호국영령들을 생각하며 불러 볼 수 있을 것이다. 조국 광복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일본 적지에 뛰어 든 용감한 독립무장투사 문창학! 비록 몸은 먼저 저 세상으로 가셨어도 그 정신만은 우리 곁에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
독립무장투사 문창학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알고 싶어 백방으로 수소문하여 경북 영주에 살고 있는 증손자 문영화를 2016년 1월 21일(목요일) 오전 8시 30분에 자택으로 방문하여 만났다. 문영화는 서울과 대구에서 은행과 공기업 등 직장 생활을 하다가 영주에서 축산업에 최근까지 종사했는데 독립유공자의 후손답게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각별했다.
할머니 김증손녀가 문창학 할아버지에 대해 자주 말씀해 주시곤 하셨다고 했다.
“문창학 할아버지는 아주 용감한 분이셨다. 일본 순사들이 일하고 자고 먹고 하는 주재소를 공격해서 우리 백성들을 마구 짓밟고 못살게 구는 일본 순사를 죽였지. 그리고 끝까지 독립무장투사로 활동하다 일본 놈들에게 잡혀서 죽임을 당했지. 할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실 때 밑에 부하로 있던 사람의 밀고로 결국 잡히게 되었다고 한다.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이니? 그 당시에 신건원 주재소 습격사건을 주동한 사람이 문창학 할아버지랑 김학섭 할아버지였기 때문에 사형을 당할 수밖에 없었지. 그때 11명이 잡혀서 4명이 사형을 당하시고 7명이 무기징역을 당하셨는데 무기징역을 당한 7분이 살아남아서 이 일을 증언해 너의 문창학 할아버지 일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거야. 너도 장차 나라를 위해 살다가 가야 한다.”
문영화의 증언에 따르면 증조부 문창학은 독립운동가로 유명했던 사촌 형님 문창범5)의 말씀을 듣고 그의 권유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서 신건원 헌병보조원으로 일했던 경력에 대해서도 섣부른 해석보다는 철저한 검증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근무 기간이 두 달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혹여 동향 파악을 위해 투입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증조부 문창학은 함경북도 온성에서는 아주 부자였다고 한다. 1년 농사를 지으면 문창학은 소 리어카 수십 개를 가지고 가서 군자금으로 쓰라고 내놓으셨다고 한다. 그 당시 겨울에는 두만강 물이 얼어서 강 위로 곡물을 날랐다고 한다. 문창학은 문창범 사촌 형님의 뜻에 따라 군자금 조달도 꽤나 했다고 한다. 물론, 부유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지만 모든 가족들의 동의가 있었기에 실천할 수 있는 일이었다. 특히 증조모 김증손녀는 군자미를 가지고 가시는 것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던 여성 애국자였다. 사던 집만 해도 방이 22칸이나 되었다고 하니 그 규모를 가히 짐작할 수 있겠는데, 이 집이 방이 유달리 많았던 것은 옛날 여관 하던 집을 사서 그렇다고 한다.
증조부 문창학은 신건원 습격사건의 주동자로 사형을 당했는데 증조모 김증손녀는 그 사실도 모르고 백방으로 수소문하며 남편을 찾아 다녔다고 한다. 결국 서울에 가서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백두산 용정 근처 그러니까 두만강이 보이는 도문까지 와서 여관에 들어가서 통곡하며 남편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문영화의 증언에 따르면 증조부 문창학의 집은 온성에서 두만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이라고 한다. 그리고 두만강 주변에 증조할아버지 땅이 많았다고 한다. 아버지 문병호의 말씀에 따르면 젊은 나이에 남편과 추억이 많았던 두만강을 보기 위해 일부러 증조할머니 김증손녀가 도문으로 갔다는 것이다.
문영화는 매년 12월 20일에 증조부 문창학의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문영화의 증언에 따르면 할아버지 문치홍이 증조할아버지 문창학의 시체는 찾아왔다고 했다. 그 당시 사형 판결문은 부산 기록원에 있다고 하는데, 사형 당하기 직전 증조할아버지 문창학은 매우 심한 고문을 당해 무척 힘들었다고 했다. 일본 순사들은 심하게 고문을 해서 정보를 캐내야 다른 사람들을 잡아들일 수 있기 때문에 밤낮으로 고문을 했다는 것이다.
증조할아버지 문창학이 그래도 빨리 잡히지 않은 것은 증조할머니 김증손녀가 아주 영리하셔서 일본 순사들이 아무리 연극을 하고 회유를 해도 안 넘어갔기 때문이라고 한다.
문영화에게 증조할아버지 문창학에 대해 물었는데, 그는 서슴없이 “굉장한 긍지와 자랑스러움을 느낀다.”라고 말했다. “이북에서도 제사를 지내리라고 생각하지만, 비명에 가신 분이니까 제가 그 날만 되면 마음이 아리고 아파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습니다. 사형 당하신 날, 눈도 오고 날씨도 매우 추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안 그래도 서대문형무소를 한번 가보니까 차마 눈뜨고 못 보겠더라고요. 가슴이 무척 아픕니다.”
문영화는 독립유공자로 증조부 문창학이 선정될 때 아버지 문병호가 한 말씀이 아직도 머릿속에 또렷이 남아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