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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녹번동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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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론과묵상 스크랩 2011년 4월 24일 예수 부활 대축일
이안드레아 추천 0 조회 7 11.04.24 00:2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2011 4 24일 예수 부활 대축일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요한 20,1-9)

 

On the first day of the week,
Mary of Magdala came to the tomb early in the morning,
while it was still dark,
and saw the stone removed from the tomb.

 

 

 

말씀의 초대

 베드로가 예수님의 부활을 선포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지만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 부활하시어 우리와 함께 계심을 사람들에게 전한다(1독서). 바오로 사도는 콜로새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로 하느님 안에 우리가 살 수 있게 되었으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새 생명을 추구하며 살도록 격려한다(2독서). 마리아 막달레나도,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묻히신 장소에서 빈 무덤을 발견한다. 빈 무덤은 부활의 표징이다. 충만한 주님의 사랑이 텅 빈 무덤에서 부활로 체험된다(복음).

☆☆☆

오늘의 묵상

 다 이루어졌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실 때 하신 말씀입니다. 이 한마디 말씀 안에 예수님의 생애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한꺼번에 다가옵니다. 한 인간으로서 겪어야 했던 온갖 유혹, 사람들의 비웃음과 조롱, 십자가의 수모와 고통, 이 모든 것을 견디며 마지막까지 아버지의 뜻을 놓을 수 없었던 예수님. 이제 그 살얼음판 위를 걷는 듯한 생애를 마감하며, “이제 다 이루었다.”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입니다.
그런데모든 것을 다 이루셨다.’고 하셨지만 그분께서 떠난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골고타 언덕 위에는 또 다른 누군가의 죽음을 기다리는 십자가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을 뿐, 그분께서 묻히신 자리마저도 텅 비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리아 막달레나도,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도, 그들이 다다른 곳은 텅 빈 무덤이었습니다. 스승 예수님을 따르고 남은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
그런데 무엇을 다 이루셨을까요? 사랑은 모습도 색깔도 없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텅 빈 무덤처럼 자신을 온전히 내어 준 텅 빈 흔적만이 남는 것이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삶에서 온전한 사랑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래서 텅 빈 무덤은 사랑을 완성한 흔적이면서 부활의 표징이 됩니다. 텅 빈 무덤 안에서 부활과 사랑은 하나가 되었습니다
.
우리 인생 여정도 텅 빈 무덤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세상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출세하고 자식 잘 키우고 호위호식하며 사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자신을 비우고 내어 주는 사랑을 목표로 삼습니다. 세상 것은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허무하게 끝나지만, 주님의 것은 빈 무덤과 함께 영원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구원이라고 부릅니다.

☆☆☆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마리아 막달레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무덤을 막고 있던 돌이 치워졌기 때문입니다. 한달음에 그녀는 베드로에게 달려갔습니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놀란 베드로와 요한은 달음질쳐 갑니다. 그들은 스승의 수의만을 발견합니다. ‘이럴 수가? 시신이 없어지다니.’ 그들은 아직도 예수님의 부활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사도단의 대표인 베드로도 스승의 부활을 몰랐습니다. 그도 처음에는 이랬는데 어찌 우리가 부활을 한순간에 알 수 있겠습니까? 모르는 것이 정상입니다. 별다른 느낌 없이 부활 대축일을 맞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부활은 신비입니다. 이론과 지식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부활은 교과서의 한 내용이 아닌 것입니다. 은총 없이는 깨달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부활의 깨달음에 닿을 수 있겠습니까?
마리아 막달레나의 행동 속에 가르침이 숨어 있습니다. 그녀는 이른 새벽 예수님을 만나러 무덤으로 갑니다. 돌아가셨다고 믿어지지 않는 스승입니다. 마음속에는 여전히 살아 계시는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러기에 무덤으로 가는 길에는 걱정이 없습니다. 스승에 대한 지극한 애정이 그녀를 움직였고, 마침내 부활 사건과 부딪히게 한 것입니다.

 

예수부활이 기쁜 다선가지 이유

-최인각신부-

 

예수 부활하셨도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사랑이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알렐루야!

예수님의 부활을 온 세상 피조물이 다 기뻐하는 듯합니다. 연푸른 새싹들과 아름다운 꽃들이 봄기운에 흥겨워 기뻐 춤추고 있습니다. 아지랑이 저편에서, 어미 닭의 온기와 정성으로 부화한 노란 병아리들이 엄마 닭과 함께 봄날(예수님의 부활)을 즐기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생각만 해도 기분 좋습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왜 기뻐하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

제가 예수님의 부활을 기뻐하는 이유는 먼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말씀의 승리이며, 이 승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모두 이루어질 것이라는 징표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며 걸었던 기대와 희망이 모두 이루어지리라 확신하고 있으며,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가운데, 부활과 영원한 생명은 그 핵심입니다
.

제가 예수님의 부활을 기뻐하는 두 번째 이유는, 예수님의 자비하심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배반하고 모욕하며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이들을 아주 없애버릴 수도 있으셨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있어서는 안 될 죽음의 사건을 인류에게 더없이 귀한 구원의 사건(희생 제사)으로 바꿔 하느님께 봉헌하셨습니다. 정말 놀라운 자비이며 사랑이기에, 이를 생각만 해도 기쁩니다
.

제가 예수님의 부활을 기뻐하는 세 번째 이유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상처와 죽음에 개의치 않으시고, 우리의 상처와 아픔에만 초점을 맞추신다는 사실입니다. 제자들에게너는 왜 나를 배반하였느냐? 왜 비겁했느냐? 왜 나를 죽이는데 동참하였느냐?’라고 묻지 않으시고, 오히려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이라고 인사하시는 모습에 저는 그분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동안의 나의 잘못에 대하여 단죄하러 오시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주고 살리러 오셨음을 고백하며, 제 영혼 깊은 곳에서 기쁨과 감사의 마음이 솟아 나옴을 느낍니다
.

제가 예수님의 부활을 기뻐하는 네 번째 이유는, 예수님께서 무덤에 묻혀 사흘 동안 저승에 가신 이유를 알기 때문입니다. 죽어 있는 인간들, 특히 하느님께 부활의 희망과 믿음을 두었던 이들(아담, 아브라함, 이사악, 야고보 등)을 찾아가시어, 그들에게 위로와 생명을 불어넣으시고, 그들을 다시 살려 하느님 아버지께 데려가시기 위해 죽음의 세계에까지 내려가신 것을 묵상하는 순간, 숨이 멈출 것만 같았습니다. 그 기쁨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가 죽은 후에도 저를 찾아오시어 위로와 생명을 불어넣으시어 생명의 나라로 데리고 갈 것을 생각하니, 기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

제가 예수님의 부활을 기뻐하는 다섯 번째 이유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면 우리도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기쁨 때문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이미 죽었던 이들을 모두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보고 싶었던 성인들과 나의 수호천사, 모든 것을 내어주며 지극 정성으로 나를 사랑해 주었던 이들, 은인과 친구들을 다시 살아 만날 수 있으니 얼마나 큰 기쁨입니까? 벌써 가슴이 울렁거립니다. 무엇보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내치지 않고 사랑하신 주님, 사제로서 미사성제를 드릴 때마다 당신의 살과 피로서 힘과 용기와 사랑을 주셨던 예수님을 꼭 만나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

저의 어머니도 아주 기뻐하실 것입니다. 17년 전 오늘(부활 대축일) 돌아가신 아버지를 참으로 많이 그리워하시는데, 다시 만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로, 저희 어머니는 요즘 아버지를 다시 살아 만나리라는 희망으로 아버지에 대한 신뢰와 사랑을 더하고 계십니다. 어머니의 모습에 고맙기도 하고, 감동하기도 합니다
.

어머니를 보며, 누군가를 다시 살아 만나기 위한 방법을 배웁니다. 내가 정말 아름답고 거룩하며 신실하게 살다가 죽으면, 많은 사람은 내가 다시 살아날 것을 손꼽아 기다릴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내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바라기는커녕 기억하고 싶지도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

예수님의 부활을 묵상하며, 참으로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닫게 됩니다. 전에는 부활 신앙이 이렇게 기쁨을 주는지 몰랐습니다. 이제는 부족하지만, 이 기쁨을 많은 사람과 나누고 싶습니다. 우리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하기 위해 함께 떠날까요?

 

 

부활의 진정한 의미

-허영엽신부-

 

내가 대신학교 4학년 아버지는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학기말 시험기간 어느 아침식사 당시 1학년이던 동생과 함께 학장 신부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아버님이 그동안 편찮으셨나? 조금 전에 선종하셨네. 순간 나의 발이 땅으로 꺼지는 같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태연한 척하며 동생을 바라보았습니다. 짧은 순간에도 아버지가 무척 아끼셨던 동생이 너무 충격을 받으면 된다고 걱정을 했습니다.

 

나는 갑자기 맞이한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일 없었습니다. 그래서 장례식을 마치고도 한동안 아버지와 자주 함께 갔던 장소를 찾곤 했었습니다. 대축일이면 고해성사를 보러 갔던 명동성당과 재미있는 영화를 보았던 극장들, 처음으로 소설책을 사주셨던 청계천의 헌책방,자주 들렀던 빵집, 볼거리가 많았던 충무로 골목을 갔습니다. 하루는 아버지와 함께 앉았던 장충단 공원의 수표교 근처의 벤치에서 종일 앉아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산소보다 추억이 서려 있는 장소에 가면 아버지를 가까이 느낄 있을 같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집에 돌아오던 길에 신당동성당 입구에 새겨진 성경 말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한 11,25). 말씀을 보는 순간 나는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치 아버지가 나에게 말씀하시는 같았습니다. “어디를 그렇게 헤매고 다니니? 곁에 있는데. 나는 그날 성당에 앉아 한참 동안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날 이후부터 마음은 평화로워졌습니다. 아버지는 부활하셔서 살아계심을 느낍니다. 나의 슬픔과 고통을 극복하게 것은 바로 부활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부활의 믿음을 나에게 유산으로 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기쁜 소식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부활이신 주님을 믿고 살면 부활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부활을 마치 죽었던 사람이 다시 소생하여 세상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됩니다. 부활은 영원한 생명으로 세상과는 전혀 다른 차원인 하느님의 영광 속에 들어 높여짐을 의미합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시작이며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길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입니다. 매일의 삶을 죽음을 대하듯 성실하게 살아간다면 우리도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게될 것입니다. 제자들은 부활의 체험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당신에게 충실한 사람을 절대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한 인간의 눈에는 비록 실패로 보일지라도 결국에는 불의와 악을 진리와 선이 승리한다는 것을 부활을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가장 희망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 주님의 부활을 한껏 기뻐하면서 영원한 생명을 향해 희망을 갖고 새롭게 출발해야 하겠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주님은 우리와 함께 계실 것입니다. 우리를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 임숙희-

 

시작기도
오소서 성령님, 우리 마음 안에 주님 부활에 대한 신앙을 불어넣으소서.

세밀한 독서
?(Lectio)
요한의 부활 이야기는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1
), 예수님의빈 무덤
?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요한이 부활절을세 번째 날?이 아니라주간 첫날?로 지칭하는 것은 부활절을 새로운 계약의 날로 소개하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어두울 때에?(1)라는 시간 배경은 독자로 하여금 요한복음 전체에 걸쳐서 나오는밤과 어둠?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합니다.?(1,?5; 3,?2; 6,?17; 8,?12; 9,?4; 11,?10; 12,?35.?46; 13,?30; 19,?39 참조) 어둠?은 또한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후 그분의 본성과 운명에 대해 미궁에 빠진 제자들의 혼란 상태를 상징합니다.
이런 배경에서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등장합니다. 그녀는 예수님 생애 마지막 시간의 절정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사랑받는 제자와 나란히 십자가 근처에서 있었습니다.”
?(19,?25) 여기서서 있다?라는 말은 단순히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유혹의 순간에 도피하지 않고 그 자리에 현존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20 1절 이하의 이야기는 이 장면과 연결됩니다. 십자가 밑에 있던 그녀는 혼자서 무덤, 정확하게 말하면 예수님이 묻힌 곳으로 갑니다. 이 걸음은 예수님을 향한 것이고 또한 신앙을 향한 걸음이기도 합니다. 요한의 본문에서예수님에게 온다는 것?은 그분과 관계를 맺고 그분을 믿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2
절은 첫 번째 단락
?(2???9)?의 입문에 해당하는데, 무덤에서 일어난 일과 그녀가 사도들한테 가게 된 이유를 보여줍니다. 어둠 속에서 돌이 치워진 것을 보고 마리아 막달레나는 시몬 베드로와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한테 달려갑니다. 요한복음의 문맥으로 봐서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의 죽음 후 서로 떨어져 있었던 두 인물을 각자 방문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을 안다는 것을 이미 거부했고?(18,?15???18.?25???27), 사랑받는 제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입니다.?(19,?26???27.?35)
이름이 없지만사랑하다
?라는 동사는 이 제자가 예수님과 맺고 있던 특별한 관계를 설명해 줍니다.?(19,?25???27; 20,?2???10; 21,?1???15 참조) 나아가 사랑받는 제자와 베드로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나오는 복음서 여러 대목을 보면 요한복음서 저자가 이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독자들이 특별하게 이해하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입니다.?(13,?6???10.?23???25.?36???38; 18,?15???16; 19,?26???27.?35; 20,?2???10; 21,?7???24 참조)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제자가 먼저 무덤에 도착했지만 베드로한테 무덤에 먼저 들어가도록 허락합니다. 이 동작은 베드로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면서 또한 사랑받는 제자가 예수님 가슴에 기대어 배운, 자신을 잊는 사랑에 대한 스승의 가르침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계시해 줍니다.?(13,?23)
저자는 사랑받는 제자의 체험을 통해 초대교회 공동체에 부활신앙이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지 소개합니다.
?(20,?3???9) 8절에 사용된믿는다?라는 동사는 사랑받는 제자의 실질적인 신앙을 가리키는데본다?라는 다른 동사와 관련됩니다. 요한한테본다?는 것은 단지 자신의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신앙에서 오는 빛으로 보는 것입니다. ‘본다는 것?믿는다는 것?은 동의어입니다.?(6,?40.?62; 12,?44???45 참조) 보는 것과 믿는 것은 모두 필요합니다. 믿는다는 것은 더욱 깊게 보는 것, 곧 사실을 보고 신앙의 실제와 동일시하는 것, 더 높은 빛에 비추어 그 증언들을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믿는 것은 체험 또는 체험에 대한 추구에서 비롯됩니다. 그리고 계속되는 믿음은 활동적인 체험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에 우리는 믿음을 지탱해 주는 방식으로 우리의 체험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보지 않고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어둠 속에서 살고 있는 인류에게 생명과 희망을 주기 위해 성경 말씀에 기록된 대로 다시 살아나셔야 합니다.?(9)

묵상
?(Meditatio)
오늘 복음은 부활 후 제자들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사랑에 바탕을 둔 새로운 공동체를 낳았습니다. 그분의 부활로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항상 존재하던 그 친교, 그 사랑의 관계, 새로운 계약의 내면화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보기 위해 어둔 아침에 인류를 대표하는 세 사람이 무덤에 서둘러 달려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면 두 제자는 각자 떨어져서 어둠 속에 머물러 있었을 것입니다.

기도
?(Oratio)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콜로 3,?1)

 

 


깨달음의 행복      

-조성풍 신부-


 여행을 하다 보면 긴 터널을 지나야 할 때가 있습니다. 터널의 다른 한 끝이
새로운 지역과 사람들을 만나게 해준다는 믿음이 없다면 아마도 그 긴 터널을
지나가는데 주저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우리 인생도 긴 터널을 지나는 것과
같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죽음이라고 하는 터널을 남겨 놓은 채 많은
사람들은 고민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과연 저 죽음의 터널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 것일까?’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우리들에게는 아무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저 믿고 희망을 가지면 됩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고 주님 안에서의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 그것으로 족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믿기 위해서 알아야겠다고 말하지만, 알기 위해서
믿어야한다’고 믿음을 강조했습니다. 죽음의 터널 너머는 어떠한지, 도대체 부활의
삶은 어떠한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믿음으로써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에 기초한 부활에 대한 체험이야말로 우리의 믿음을
더해줍니다.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은 가까운 곳에서 이루어집니다.
나 자신의 믿음 안에서, 가족을 통해, 본당 공동체와의 일치 안에서,
이웃과 지역 사회에 대한 봉사를 통해, 지구를 넘어 우주를 바라보며
체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빈 무덤

-이동훈 신부-


 빈 무덤은 예수님 부활의 상징이다. 빈 무덤은 죽음에 대한 승리를 보여주는 표징이다. 그리스도인은 빈 무덤을 바라보고 허탈감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무덤에서 사라진 예수님을 선포하는 사람들이다.
성금요일에 우리는 성난 군중이 되어 예수님을 배반하였고 그로 인해 예수님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묻히신 무덤은 바로 예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이 묻힌 곳이기도 하다. 빈 무덤은 죄 사함과 새 출발의 상징이다. 부활절 첫날에 여인들처럼 우리 믿음이 묻혀 있는 무덤을 찾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는 믿음직한 목소리를 듣는다. “왜 너희는 죽은 것에서 생명을 찾고 있느냐? 너희를 향한 나의 사랑이 살아났다. 알렐루야!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
부활절은 단순히 2천 년 전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거룩한 사건이 아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필요함을 발견한 날이면 언제나 작은 부활절이다. 우리의 믿음과 희망을 새롭게 하고, 내적 평화를 감지할 때,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묻어두었던 무덤이 비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빈 무덤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확인하듯이 우리의 부활도 그곳에서 확인한다. 하느님 없이 살아가는 우리 인생의 성금요일은 빈 무덤을 통해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는 것이다.
우리의 배반과 죄악에도 끊임없이 사랑을 베푸시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죽음으로 우리에게 참다운 생명, 부활의 삶을 주셨다. 알렐루야!

 

 부활의 증인

-오상선신부-


 알렐루야!
드디어 부활이다!
모든 형제자매들에게 부활의 잔잔한 기쁨과 감동이
오래동안 함께 하시길 기원한다.

우리 크리스천 삶은 본질적으로 부활을 살고 선포하는 삶이다.
그렇다면 이 부활 신앙의 본질, 즉 내용은 무엇인가?
아주 단순한 것이다.
즉, 빈 무덤을 보았다는 것,
더 정확히는 그래서 예수께서는 살아계시다는 것이다.
따라서 부활신앙은 우리의 삶을 통해서 살아계신 그분을
증거할 때만 의미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부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는 부활의 목격자들은
어떤 자세와 태도의 사람이어야 하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예수 부활의 목격증인 제1그룹은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베드로 그리고 요한 사도이다.
이 세분은 예수님의 제자 중에서도 각별한 애제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의 수제자로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계속 언급되고 있는데
예수님의 수난 여정과 부활 사건을 통해서는
야고보가 빠지고 주로 베드로와 요한 사도가 그 중심에 등장한다.
그러면서 막달라 여자 마리아의 부각은 눈여겨 볼 만하다.

어쨌든 이 세분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이 세분은 누구보다 예수의 사랑을 받은 제자들이고
그래서 누구보다 예수를 사랑했던 제자들이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일곱마귀가 들었다가 예수님으로부터 치유를 받고 나서부터
줄곧 예수를 따라다니며 시중을 든 여성 제자 그룹의 대표였다.
값비싼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붓고 머리카락으로 닦을 정도로
예수를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다바칠 정도로
예수를 사랑했던 여인이었다.
어디 그 뿐이랴.
예수의 십자가 상에서도
그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했던 여인이었고,
마침내 오늘 안식일 다음날, 이른 새벽에
사랑하는 예수가 보고파서
여자의 몸으로 홀로 예수의 무덤을 찾을 정도로
정말 예수를 사랑했던 여인이었다.

요한은 또 누구인가?
자기 스스로 예수의 사랑을 받던 제자라고 하지 않았던가!
늘 예수의 행적을 마음에 새기고 그것을 복음으로 기록할 정도였고
십자가상에서 예수를 동반하였고,
그 어머니 마리아의 아들 역할을 대신할 정도로
예수의 친 동생이나 다름이 없을 정도로
예수의 사랑을 받고 사랑을 한 제자였다.

베드로 사도는 죄많은 약한 위인인 듯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누구보다도 예수를 사랑했던 제자였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한 수제자였고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적은 있지만
대사제 안나스의 집까지 들어갔던 유일한 제자였다!
그리고 부활하신 후 예수께서 세 번에 걸쳐
<너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을 받고 당당하게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고 고백할 정도로
정말 예수를 누구보다도 사랑했던 제자였다.

이렇게 세분의 공통점은 예수의 사랑을 받았음과
그로 인해 예수를 누구보다도 사랑했던 분들이라는 것이다.
예수 부활의 목격 증인이 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이 바로 이것이다.
능력있고 열심한 것이 아니라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두 번째로 볼 수 있는 예수 부활의 목격 증인들의 내면적인 자세는
특별히 <겸손>이라 이름할 수 있는 자세이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예수 부활의 첫 번째 증인이면서도
역사 안에서는 뒤에 숨어있는 조력자로서
자신을 감추고 있는 분이시다.
요한 사도는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 사도와 함께 무덤으로 달려가지만
젊어서인지 먼저 도달했음에도 불구하고
형님이요 으뜸 사도인 베드로에게
두 번째 목격 증인이 될 기회를 넘겨주고
자신은 세 번째 목격 증인으로 남는다.
이것이 예수 부활의 목격 증인들이 갖고 있는 기본적인 자세이다.

우리는 부활의 삶을 살아야 할 뿐만 아니라
예수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예수 믿으시오!> 하고 떠벌리며 증거해야 하는가?
<알렐루야!>를 고함만 친다고 증거가 되는 것일까?
아니다!
무엇보다도 예수께서 살아계시다는 것을 증거하는 최상의 방법은
<겸손>이다.
우리의 겸손을 보고 세상 사람들은
예수가 참으로 살아계시다는 것을 믿게 된다.

이렇게 예수 부활은
우리에게 사랑과 겸손을 요청하는 사건이다.
우리가 더욱더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과
더욱 겸손하게 작은자가 되는 길이
곧 예수 부활의 증인으로서 사는 길이 된다.
사순절 동안 희생 극기하면서 열심히 살았으니까
이젠 좀 즐기자가 아니라,
이제부터 제대로 주님과 더불어 살아가자.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살아계신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그래야 진정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것이 된다.
우리 안에서 말이다.

아멘. 알렐루야!

* 부활 축하합니다.

 

   ?啄同時(줄탁동시)의 부활

-김찬선신부-


 형제들과 함께 이번 부활 전례를 준비하면서
요즘 흔히 하는 말로 어떤 Concept로 할 것인지 의논하였습니다.
그 결과, 올해는 부활달걀을 주 주체로 삼기로 하였습니다.
강론을 준비하다 보니 아마 6-7년 전
이 주제로 강론을 하였던 기억이 나고
그 때 강론이 너무 길어서 1부만 하고
2부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마저 하기로 했던 기억이 났습니다.

그 때 1부에서 했던 강론을 요약하면
새나 닭이 알을 아무리 품고 있어도
수정란이 아니면 생명이 부화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의 영적인 생명도 하느님과의 거룩한 교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시는 성령을 받지 않지 않으면 안 되고,
Spiritual intercourse없이는 부화하지 못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2부에서 하려고 했던 내용이 그 유명한 ?啄同時입니다.
줄탁동시란 본래 선불교의 대표적 선문답서 벽암록(碧巖錄)에 나오는
“?啄同機(줄탁동기)”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인데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기 위해서는
안에서 병아리가 껍질을 쪼는 것과
밖에서 어미 닭이 껍질을 쪼는 것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안에서 병아리가 쪼는 줄(?)과
밖에서 어미 닭이 쪼는 탁(啄)이 동시에 함께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병아리는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제자가 깨달음을 얻으려면 제자 혼자서 발버둥 쳐서는 안 되고
적절한 때에 스승이 도와줘야 한다는 것이고,
스승은 그 때를 잘 알아 적절하게 깨우침을 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깨치려는 제자의 구도열망과 노력이 부족하고
적절한 때,
적절한 스승의 도움이 없으면 깨달음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우리의 영적인 부활,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남에 적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병아리가 껍질을 깨고 나온다고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먼저 보겠습니다.
껍질을 깬다는 것은
지금까지 병아리를 가두고 억압했던 단단한 껍데기를 깬다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병아리가 새로운 세계,
새로운 생명을 만나게 하는 것입니다.
껍질을 깨는 것의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측면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껍질을 깬다는 것은
단지 껍질을 깨는 것이 아니라 알을 깨는 것이고
그래서 존재의 파괴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알은 병아리가 살아온 전부였습니다.
알이 병아리였고,
병아리가 알이었습니다.
그러니 알을 깬다는 것은
자기가 살아온 세계를 전면 부정하는 것이고
완전한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익숙한 세계와 거기에 길들여진 나를 동시에 깨는 것입니다.
오늘의 내가 있도록 지금까지
나를 낳아주고 입혀주고 먹여주고 사랑해준 모든 사람을 부정하고
당신의 사랑이 없어도 된다고 하는 것이며,
마마보이의 근성을 깨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나를 지탱해준
모든 사상 체계와 가치 체계와 믿음을 부정하고
거기에 기초한 나의 주장과 아집과 고집을 깨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토록 나에게 만족을 주던 좋은 것들을
좋지 않다고 부정하고
거기에 길들여진 맛과 멋과 기쁨과 즐거움을 깨는 것입니다.

새로운 세계를 맞이한다는 것은
이렇게 자기를 깨는 작업이기에
무수히 시도하지만 실패하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거듭 실패를 하면서 우리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내가 나를 깬다는 것은 가능키나 한 일인가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그럼에도 다 자란 병아리는 더 이상 알에 머물 수 없고
알을 깨지 않으면 질식사할 것이기에 알을 깨야만 합니다.

그래서 병아리는 알을 깨 달라는 신호를 어미 닭에게 보냅니다.
이대로는 도저히 살 수 없으니 살려달라고 하는 것이고
그러나 내가 나를 깰 수 없으니
밖에서 깨 달라고 신호를 보내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으니
도와달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지금의 내가 죽는 것에 대한 수용이 있고,
현실을 초월하려는 초월의지와
새로운 생명에 대한 갈망이 있으며,
자기의 한계를 인정하고 은총을 청하는 겸손함이 있습니다.

자기 죽음의 수용,
현실 초월 의지,
새 생명에 대한 갈망,
겸손,
이 네 가지 중 어느 하나가 없어도
우리는 은총을 받을 수 없고
그래서 우리는 알을 깨고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자기의 한계를 인정하고 은총을 청하는 겸손함입니다.
병아리가 안에서 껍질을 쪼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겸손의 몸짓입니다.

당신의 은총이 없이는
저는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고
당신의 은총이 없이는
저는 현실에 안주하여 초월할 수 없으며
당신의 은총이 없이는
저는 새 생명의 환희가 어떤 것인지 모르기에
새 생명을 갈망할 수도 없을 것이라고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며
하느님의 은총을 청하는 것입니다.
이런 겸손한 구도자에게 하느님께서는 새 생명의 은총을 내립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리스도의 힘이 우리 안에 머물도록
우리의 약함을 자랑해야 하고
하느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머물도록
우리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제가 관구 봉사자였을 때의 일입니다.
성대 종신서원을 한 형제들이 거의 매 년 한 명씩
수도원을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떠나는 형제들을 잡기 위해 무진 애를 썼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아니 역부족이 아니라 아예 아무런 힘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형제들이 떠나는데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저를 괴롭혔고
관구장인 제가 잘못 해서 다 그런 것 같은 죄책감도 저를 괴롭혔습니다.
다른 한 편 하느님과 형제들에 대한 원망도 저를 괴롭혔습니다.
저도 다른 형제들과 같은 형제일 뿐인데 왜 나한테, 이런 원망이지요.

어느 날 패배감, 무력감, 죄책감을 가운데 성체조배를 하는데
“주님 도저히 못하겠습니다.
힘이 다 빠졌습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하는 소리가 마음을 넘어
입술까지 흘러나왔습니다.
그 마음이 너무 가득하니까 도저히 가두어 둘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다 그 푸념에 놀라 저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느꼈습니다.
주님께 기도하지 않았다고.
물론 그때마다 그 형제를 위해 엄청 기도를 많이 하였지만
나의 노력에 대한 성공을 위해 기도를 하였던 것이지
그 형제를 위해서 기도를 한 것이 아니고
무엇보다도 하느님께 맡기며 기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능력을 믿고
그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능력에 맡기며
기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 힘으로 해결하려 그렇게 애를 쓴 것입니다.
그리고 내 힘으로 해결하려 하는 동안,
거기에 하느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깨닫는 순간,
그리고 나의 무력함과 한계를 인정하는 순간
저는 그때 비로소 병아리가 껍질을 쪼듯
하느님께 똑똑똑 문을 두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제 안에서 죽어계시던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나의 함이 죽을 때 하느님의 하심이 부활하고
나의 힘을 뺄 때 하느님의 능력이 내 안에서 살아 움직이고
내가 죽을 때 하느님의 생명이 차 오르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도 한 때 지독한 하느님 부재를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형제회가 이상에서 빗나갈 때,
그리고 자기 힘으로 도저히 어찌 할 수 없을 때
프란치스코는 형제회의 미래를 놓고 큰 근심걱정에 쌓였습니다.
그때 하느님께서 프란치스코의 마음속에서 속삭이셨습니다.
이 수도회를 누가 세웠는지,
이 수도회가 누구의 것인지 대답해 보라고 말입니다.
하느님은 아니 계신 곳이 없이 어디든지 계시기에
언제 어디서나 계시지만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근심 걱정할 때 거기에서 하느님은 죽어 계신 것입니다.
하느님께 형제회를 맡기고 나자
하느님은 프란치스코 안에서 다시 살아났고
프란치스코도 다시 평화와 광명을 찾았으며
이때부터 프란치스코는 다른 걱정하지 않고
처음에 자신이 받은
복음 선포의 소명을 단순하게 살아갑니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양승국신부-


<사랑에 눈을 뜨게 되는 순간>


흘러간 우리 옛 가요들에 단골손님처럼 자주 등장하던 단어들이 있습니다.


‘일편단심(一片丹心)’-그 어떤 일이 있어도 변치 않는 한결같은 마음을 말합니다.


‘오매불망(寤寐不忘)’-자나 깨나 잊지 못함을 의미합니다.


‘망부석(望夫石)’-신라시대 박제상은 일본에 볼모로 가있던 왕자를 구출하고 자신은 체포되어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그가 떠난 후 아내는 매일같이 높은 바위 위에 올라 임이 가신 남쪽을 바라보곤 했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그 자리에 돌부처로 남게 되었답니다.


이런 단어들 바라보시면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인물이 없으십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마리아 막달레나가 떠올랐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 그녀는 참으로 특별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녀의 삶은 그야말로 예수님을 향한 일편단심 민들레였습니다. 그녀는 꿈에도 예수님을 잊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잠시나마 예수님이 떠나가신 후 마치 망부석처럼 그렇게 예수님 무덤가에 서있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 그녀는 누구였습니까?


복음서에 따르면 그녀는 한때 일곱 마귀가 들렸던 여인이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일곱 마귀입니다. 한두 마리도 아니고, 서너 마리도 아니고 일곱 마귀입니다. 발악을 해대는 일곱 마귀로 인해 그녀가 겪었던 고통은 끔찍한 것이었습니다. 하루하루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삶 그 자체가 생지옥이었습니다.


이런 그녀에게 예수님께서 다가가셨습니다. 따뜻한 위로의 손길을 건네셨습니다. 죽음을 향해 걸어가던 그녀의 발걸음을 돌려세우셨습니다. 새 삶으로 건너오게 도와주셨습니다.


그 처참한 인생길을 걸어가면서도 언젠가 반드시 하느님께서 손을 내밀어주실 것임을 굳게 믿었던 마리아 막달레나, 그녀는 참으로 대단했습니다.


자신에게 다가온 역경이 그토록 암담했지만, ‘숨이 붙어있는 한 희망이 있습니다(Dum Spiro, Spero)’는 말을 끝까지 믿었던 마리아 막달레나, 끝까지 잘 견뎌낸 마리아 막달레나였기에 예수님과 옷깃을 스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처지가 아무리 서글퍼도, 아무리 절망에 빠져있더라도 절대 포기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바로 마리아 막달레나의 모습에 담겨져 있습니다. 살아있어야 치유가 가능합니다. 살아있어야 회심이 가능합니다. 살아있어야 부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살아있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배은망덕한 사람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생명의 은인이신 예수님께 모든 것을 다 바칩니다. 그녀에게 있어 예수님은 ‘내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조금도 아깝지 않은 ‘님’이 되었습니다.


이런 특별하고도 열렬한 마리아 막달레나의 사랑이었기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사랑과 교차되는 은총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의 ‘참사랑’은 부활 예수님을 향한 눈을 열게 만들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의 완전한 사랑은 부활 예수님을 최초로 목격하는 은총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겠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일편단심으로 가득 차 있다면 부활 체험은 그리 요원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자나 깨나 예수님만 생각한다면, 그분의 사랑을 이웃들에게 실천한다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당신 모습을 드러내 보이실 것입니다. 망부석처럼 예수님만을 향해 서있다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며 우리에게 다가오실 것입니다.


사랑은 눈을 멀게도 하지만 눈을 뜨게도 해줍니다. 사랑으로만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부활 신앙! 우리 그리스도교의 가장 기본적인 신앙이자 궁극적인 신앙입니다. 그러나 정말 이해하기 어렵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신앙입니다.


그러나 방법이 있습니다. 사랑을 통해서입니다. 예수님 사랑에 ‘퐁당’ 빠지게 되면 가능합니다. 적극적으로 이웃사랑을 실천하면 가능합니다. 

 

죽음을 넘어선 희망 "

-이기양 신부-


 알렐루야!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맨 처음 누구에게 나타나셨습니까? 그렇지요! 마리아 막달레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동고동락하시던 제자들에게 제일 먼저 나타나시지 않고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셨을까요? 이유는 남자들은 과묵하기 때문이랍니다. 여인들한테 나타나야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동네방네 퍼질 수 있다는 것이지요. 물론 웃자고 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광경 중에 가장 아름다운 장면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티베리아스 호숫가를 떠올립니다. 아무 것도 잡지 못한 제자들에게 다가와 다정하게 말을 걸던 예수님은 이른 아침이었는데도 벌써 숯불을 피우고 따뜻하게 먹을 것을 마련해 놓으셨지요. 게다가 식사가 끝나자 베드로를 데리고 산책하시며 은밀히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천벌을 받아도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도리질을 했던 베드로의 두렵고 아픈 마음을 부활하신 주님께서 가만 가만 어루만져주십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얼마 지나지 않아 뜨겁게 주님을 증거하여 한꺼번에 삼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줍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했던 제자들이 제일 처음 했던 일은 부활을 알리는 일이었습니다. 죽은 지 사흘이나 지난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그분이 구원자라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 제자들의 가장 큰 사명이었고, 이천 년 그리스도교 역사 또한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부활 증언의 역사입니다. 부활 대축일 미사를 장엄하게 봉헌한 신자들에게 사제는 마지막으로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하고 복음 선포의 사명을 주어 파견합니다. 이에 신자들은 "하느님 감사합니다"하며 열심히 실천할 것을 결심하며 응답합니다.
 또한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미국에 방송 진행자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레스 브라운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고등학교 2학년 때 특수반에서 교육을 받고 있었습니다. 잠시 친구를 만나기 위해 다른 반 교실로 들어갔는데, 그 반 담임인 워싱턴 선생님이 나타나서는 칠판에 문제를 쓰더니 브라운을 지목하여 풀어보라고 했습니다. 브라운이 풀 수 없다고 하자 선생님은 "왜 풀 수 없지?"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브라운은 "저는 이 반 학생이 아니거든요"하고 대답했고, 선생님은 "그건 상관없어. 어서 칠판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브라운은 당황해서 더듬거리며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말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정신 지체 아동이거든요."
 브라운의 말에 선생님은 그에게 다가와서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마라. 너는 네 안에 위대함을 가지고 있다. 너는 특별한 존재야. 너는 가족과 학교, 그리고 나를 자랑스러운 존재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이다."
 이 말에 브라운이 대답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모든 과목에서 다른 아이들에게 뒤쳐지고, 영어와 역사 과목에서 낙제한 것은 무슨 뜻이죠?"
 "그것은 네가 좀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선생님의 말에 브라운은 순간적으로 자신의 소원을 이야기했습니다.
 "전 어머니께 집을 사드리고 싶어요. 제가 그것을 할 수 있을까요?"
 "물론, 그건 언제나 가능하다. 넌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라."
 몇 년이 흐른 후 브라운은 유명 방송사의 제작자가 됐으며 곧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습니다. 성공한 작가가 된 후, 그는 자신의 마음에 가장 깊이 인식된 워싱턴 선생님께 전화를 걸었습니다. "워싱턴 선생님이신가요?"라는 첫마디를 듣고 선생님은 "네가 연락할 줄 알았다. 나는 너를 가장 자랑스러운 제자로 생각하고 있단다"하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희망을 잃지 않으며, 어떤 사람에게서도 가능성을 찾아냅니다. 그리고 그 누구에게라도 주님을 전하고 싶어 합니다. 이것이 부활을 사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다시 한 번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알렐루야!
 

 

   다시 살리라 믿습니다
-배광하 신부-


죽어야 살리라

‘알렐루야’를 노래하는 기쁜 부활입니다. 부활이 그토록 기쁜 까닭은 다시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다시 살아난다 함은, 이미 죽었던 경험이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육신으로 죽었든 영혼으로 죽었든, 죽었던 영육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다시 살아났기 때문에 기쁨이며 환희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두 살아있는 가운데 부활을 기뻐합니다. 아직 육신이 죽음을 경험하지 않았음에도 부활을 기뻐하는 까닭은 훗날 영원한 부활을 믿기 때문이지만 무엇보다도 사순의 긴 시간 동안 죽음을 연습해 보았기 때문입니다. 내 자신을 죽여야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예수님 진리를 온 몸으로 살아보았기 때문에 부활이 기쁨인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 24). 내 자신의 고집을 죽이고, 이기심을 죽이고, 교만함을 죽이고, 욕망을 죽이고, 결국은 나를 위한 삶이 아니라 타인과 공동체의 평화를 위하여 내 자신을 죽이는 희생의 삶을 살았기 때문에 부활이 기쁨인 것입니다.

윤동주 시인은 그의 대표적 시인 ‘서시’에서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하며 노래하였습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것을 사랑한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진정 자신의 모든 것을 죽이며 아름다운 희생과 투신의 삶을 살아가는 고귀한 이들에게 바치는 찬사일 것입니다. 부활이 내게 그리 큰 기쁨으로 다가오지 않는다면, 나는 이 세상에서 아직도 희생의 참된 가치를, 죽음을 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나의 희생으로 함께 사는 삶이며, 동시에 여러 아픔과 분노와 좌절에서 일어섬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함께 모든 희망을 잃어버리고 침통한 표정으로 절망에 쌓인 채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는 죽었던 삶이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또다시 소생된 마음으로 벌떡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향했던 벅찬 발걸음은 부활의 삶인 것입니다(루카 24, 13~35 참조).

우리의 삶은 자주 엠마오로 곤두박질치는 나락의 희망 없는 삶이었습니다. 그 같은 어둠의 삶에서 빛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삶이 진정 부활의 삶입니다.

사랑으로 살리라

신학자 ‘요하네스 브란첸’은 말합니다.

“인류의 고통은 너무나 큰 데 비해 우리의 노력이나 대답들은 아주 옹색하여 채울 수 없는 빈자리가 많다. 그러나 이 빈 자리는 하느님만이 대답을 주시고 채울 수 있는 것으로, 하느님께서는 그 대답을 주셨다. 즉 부활사건이다. 부활이야말로 우리의 모든 의문에 대한 하느님의 대답이시다. 저 모욕적인 십자가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다. 새 출발이 있고, 고통과 죽음 그리고 불신을 관통하는 찬연한 새 창조가 있는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신뢰와 사랑과 믿음을 배반한 제자들을 끝까지 “내 형제들”(마태 28, 10; 요한 20, 17 참조)이라고 하십니다. 인간의 배반과 불신에도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사랑, 그 끝없는 사랑이 예수님을 죽음의 벼랑 끝에 내버려 두지 않고 부활케 하신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에 죽음에 눌려 있을 수 없었던 하느님의 사랑이 부활하신 것입니다. 부활은 희망이며 기쁨인 동시에 사랑의 완성입니다. 때문에 부활을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 놀라운 사랑가운데 살도록 초대를 받은 것입니다. 그래야 예수님처럼 끝날에 부활하리라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다시 ‘요하네스 브란첸’은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아도취에 빠져 있거나 자기 자신만을 위해 희망을 품고 사는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희망에 찬 시선을, 난경에 처한 형제와 슬픔을 겪는 자매와 나누고자 한다. 부활축일은 우리에게 ‘신체장애자들, 수명을 다 살지 못한 이들, 불의의 사고로 육체적, 정신적으로 불구가 된 이들, 비명에 간 어린이들, 외면당하고 인생을 속아 사는 이들, 박약아들’과 희망을 나눌 권리와 의무를 부여하고 있다.”

부활축제는 결코 그리스도인들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그들만이 축하하고 즐기라고 예수님께서 모진 고통의 십자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부활은 소외와 눈물로 암흑의 어둔 동굴에 있는 형제들의 손을 붙잡아 함께 걸어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과 함께 진정한 부활의 알렐루야를 기쁘게 노래해야 합니다. 자신의 이기심과 욕망을 버리는 삶, 희생과 사랑의 삶이 함께 할 때 우리는 세상 질곡의 눈물을 이기고 함께 부활하는 것입니다.

“눈물로 씨 뿌리던 이들 / 환호하며 거두리라”(시편 126, 5). 알렐루야!


 새롭게 다시 시작할 때입니다

-안병철 신부-


 "예수님께서 다시 사셨습니다. 알렐루야.”
   기쁨의 환호성이 온 누리에 퍼져 나갑니다. 아니 그 기쁨을 선포해야 합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체험해 보지 못한 예수님 부활의 위대한 사건을 어느 누가 인간의 지성이나 학문적인 논리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사도들조차도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에도 그분을 주님으로 받아들이고 믿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르 8,27)라는 예수님의 질문을 받은 베드로는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르 8,29)라고 응답한 바 있습니다. 그런 베드로였건만 지금 그는 빈 무덤이 주는 표징의 의미를 올바로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믿음이란 살아 계신 예수님을 육안으로 보는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질서에서 오는 것임을 지적해 줍니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요한 20,2)라는 말은 무덤을 막았던 돌이 굴려져 있었던 사실을 전해 줌과 동시에 제자들이 얼마나 심각한 혼돈상태에 빠져 있었는지를 잘 지적해 줍니다. 그런 가운데에서 오늘의 복음은 “보고 믿었다”(요한 20,8)라는 말을 덧붙임으로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어떤 태도를 맞아들여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지적해 줍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사셨습니다’라는 표현은 그분께서 생물학적인 생명을 다시 얻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분께 전혀 다른, 말하자면 새로운 형태로 실존하실 수 있는 새로운 생명을 주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부활이란 그저 멋진 하나의 추억에 불과한 사건이 결코 아닙니다. 부활이란 깨닫고 받아들이고 믿음 안에서 살아야 할 현재적인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모든 고통과 암흑의 실체를 체험하시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나아가 부활을 통해 승리에 동참할 수 있는 은총까지 우리에게 내려 주셨습니다.

   지나온 시간 속에서 번민하며 괴로워했던 아픔의 시간들을 떠올려 봅니다. 한 치 앞도 장담할 수 없는 불안했던 순간들도 되짚어 봅니다. 시기와 질투로 범벅된 자기 우월주의에 빠져 아집과 욕심으로 살아왔던 떠올리기조차 싫은 지난 시간들을 회상해 봅니다.

   먹구름이 뒤덮어 태양 빛을 전혀 쪼일 수 없는 순간조차도 실상 구름 위에서는 강렬한 태양 빛이 비추고 있다는 사실을 어찌 모르겠습니까마는 한 치 앞도 보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어리석음입니다.

   더 이상 과거에 머물지 아니하고 미래를 향해 용기 있게 나아갈 수 있도록 주님은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보이지 않으나 우리 곁에 함께 계시고, 만질 수 없으나 우리와 함께하심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게 해 준 사건이 주님의 부활입니다.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새생명을 주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더 이상 방황과 두려움도, 의구심과 좌절도, 실망도 용납지 않으십니다. 오늘 다시 사심으로 우리 모두에게 찬란한 생명의 빛을 던져 주신 예수님을 믿고 어둠의 터널을 빠져 나와 용기 있게 그분을 따름으로 새로운 희망 속에서 당당하게 삶을 펼쳐가는 것이 부활의 기쁨을 선포하는 삶이 아닐까요?

 

생명을 향한 길

 -황철수  주교-

 

‘어두운 죽음이 아니라 빛나는 생명이 우리 삶의 종착점’임을 고백하는 부활주일, 모든 교우님들께 ‘부활의 은총’을 기원합니다. 먼저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상기하고 싶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코린1 15, 14) 바오로 사도의 이 고백에 의하면, 우리 신앙의 근거가 되고, 그 신앙이 지향하는 것은 다름 아닌 부활의 삶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신앙의 핵심인 부활의 삶이 손에 잡히지 않는 먼 곳의 일로만 느껴지는 것 또한 현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부활의 삶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다시 한 번 묵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부활과 관련한 요한복음 말씀을 결론짓는 중요한 말은 다음의 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요한 20, 9) ‘부활, 다시 살아난다’는 말은 ‘깨달음에 이르러야 할 말’이지 무엇을 확인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육안으로 신기한 현상을 보기만 하면 저절로 부활의 심오한 의미가 깨달아지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삶’이 카메라로 찍히는 일이기 보다 감동하고 깨닫는 일인 것처럼, 부활의 삶도 깨닫는 삶이지 사진으로 찍히는 단순한 현상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활의 삶은 무엇의 깨달음인가? 그것은 ‘진정으로 살아있다는 것’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세상에는 ‘살아 있다고 하지만 죽은 사람’(묵시 3,1)도 많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죽었다’고 하더라도 '하느님 앞에서' 살아 있다면 ‘진정으로 살아 있는 자’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살아있는 삶은 예수님께서 모범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런 의미로 예수님께서는 ‘나는 내 뜻대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뜻대로 살 뿐이다’ 라고 늘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부활사건은 예수님의 이러한 삶이 생명의 길이었음을 하느님께서 확증하신 것이었습니다.

오늘 독서의 바오로 사도께서는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천상의 것들을 추구하십시오(골로사이 3, 1)’ 라고 권고합니다. 천상의 것을 추구한다는 것은 ‘지상의 삶’과 단절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현장에서 ‘하느님 앞에서 죽지 않는 삶’을 추구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고자 했던 예수님의 정신을 새기고, 생활속에서 예수님의 정신을 구현하려고 노력하는 일속에 부활의 삶에 대한 깨달음이 자리하고 있다고 봅니다. 유혹이 많은 세상살이에서, 그리스도교적 가치와 삶을 통하여 부활을 향한 생명의 삶이 모든 교우님들께 매일 매일 열려지기를 기원합니다.


-서공석신부-

 

예수 부활 대축일입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이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다고 제자들이 믿기 시작한 사실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자, 절망하여 각자 자기의 고향으로 돌아간 제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으면, 제자들이 다시 모여서 부활하여 살아 계신 예수님을 선포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며, 인류 역사 안에 나타났다 사라진 그 많은 인물들과 같이 예수님도 죽음으로 역사에서 영원히 사라졌을 것입니다.


오늘의 복음은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갔다고 말합니다. 요한복음서가 어둡다고 말할 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물지 않게 하려고 나는 빛으로서 세상에 왔습니다.”(12,46). 요한복음서는 이렇게 빛이라는 주제를 사용합니다.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입니다. 그것이 초기 신앙인들의 믿음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의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이 부활하여 사람들의 빛으로 살아 계신다는 사실을 아직 모를 때에 무덤에 갔습니다.


이 여인은 무덤의 돌이 이미 치워진 것을 보고 예수님이 무덤 안에 계시지 않는다고 직감하였습니다. 그는 이 사실을 제자들에게 알렸고, 사도들을 대표하는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가’ 함께 무덤으로 달음질쳐 갑니다. 무덤을 향한 달음질에는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가 더 빠릅니다. 그는 베드로보다 먼저 도착하였지만, 베드로를 기다려 주는 여유를 보입니다. 베드로가 무덤에 들어가고 뒤따라 들어간 그 제자는 보고 즉시 믿었습니다.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의 부활을 말하기 위해 예수님이 아끼셨던 마리아 막달레나가 빈 무덤을 발견한 것으로 꾸몄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가 베드로와 함께 무덤에 가서 그 사실을 확인한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두 제자가 함께 가서 빈 무덤을 확인하였지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먼저 믿은 사람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였다고 복음서는 말합니다. 빈 무덤이 의미하는 바는 예수님에 대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분의 죽음 전까지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분 죽음의 자리는 비어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신앙은 그분의 죽음에서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이 살아 계실 때, 그분과 접촉하고 그분을 사랑했던 사람들에게서 신앙이 발생하였습니다.


부활은 예수님이 지상의 삶으로 환생하신 기적이 아닙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그분을 죽였습니다. 그들은 시편이 말하는 대로, 그분을 “죽음의 그늘진 골짜기”(23,4)로 보내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분을 당신 안에 살려 놓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제1독서로 들은 사도행전은 베드로 사도가 이방인들에게 설교한 내용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나무에 매달아 죽였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사흘 만에 일으키시어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그 시대 유대인들이 사흘이라고 말할 때는 72시간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결정적인 날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이 당신이 원하실 때 예수님의 생명을 결정적으로 살리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하느님이 그분을 살려 놓으셨으면, 그분 안에 있었던 그 생명이 하느님의 것이었습니다. 오늘 베드로의 설교는 그 사실을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자렛 출신 예수님께 성령과 힘을 부어 주셨고...이 예수님께서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하시고, 악마에게 짓눌린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분과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에게 성령을 주셔서 좋은 일, 고치는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숨결로 모험을 감행하신 분이었습니다. 권위주의로 경직된 유대교 사회에서 예수님은 그 조직의 가르침에 순응하지 않으셨습니다. 율법과 성전을 절대시 하는 사회였지만, 예수님에게 절대적인 것은 하느님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선하고, 고치고 살리시는 분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생명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신 이유였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생명을 사셨습니다. 그래서 아들이십니다. 오늘 베드로의 말씀과 같이 그분은 두루 다니며 선한 일, 고치고 살리는 당신 아버지의 일을 하셨습니다.


부활 신앙은 예수님이 살아서 행하신 하느님의 선한 일을 실천하는 데에 있습니다. 하느님은 사람이 자유롭게 당신의 일을 실천하며 살 것을 원하십니다. 하느님이 주신 자유로운 생명입니다. 율법에 짓눌리고 성전의 권위에 순종하며 살라는 우리의 생명이 아닙니다. 우리는 돈에 짓눌리고, 우리의 욕심과 허례허식에 짓눌려 삽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으로부터 성령과 능력을 받아 악마에게 짓눌린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는, 오늘 베드로의 말씀은 사람을 짓누르는 것에서 사람들을 해방하셨다는 뜻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빈 무덤을 발견하고, 베드로가 그 사실을 확인하였으며,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는 보고 믿었습니다. 그분의 삶을 우리 삶을 위한 빛으로 삼고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확인된 사실이지만, 그 죽음에서 믿음이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무덤은 비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을 아끼고 사랑하며 배우는 데에 그리스도 신앙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부활은 예수님을 믿고 배우는 사람들이 많이 발생하였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앞으로도 많이 발생할 것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율법과 성전이 요약하는 그 시대의 관행에 얽매이지 않으시고 권위에 순종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선하심을 실천하고 악마에게 짓눌린 사람을 해방시키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부활은 예수님을 믿고 배워서 하느님의 선하심과 하느님이 주시는 해방을 자유롭게 실천하라고 말하는 축일입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선하신 하느님의 일을 예수님에게서 배웁니다. 그분이 자유롭게 행하신 실천을 배웁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자기에게 주어진 생명이 해야 할 바를 합니다. 자기 한 사람을 높여서 허세를 부리거나, 남을 짓누르거나, 죽음을 발생시키지 않습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의 선하신 실천, 고치고 살리신 실천, 인간을 자유롭게 하시는 실천 안에 자기 생명이 해야 할 바를 봅니다. 그런 실천안에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살아 계십니다. 신앙인은 그런 실천으로 하느님이 선하고 살리신다는 사실을 증언합니다. 주님이신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우리의 실천 안에 그분이 살아 계신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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