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통에서 벗어나기
1988년 4월 15일
미국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에서
신의 메신저 마샬 비안 서머즈에게
계시되다
고통을 종식하기 위한 세 가지 다른 교육과정, 세 가지 다른 해결책이 있다. 약간의 고통을 포기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해결책이 있고, 많은 고통을 포기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해결책이 있으며, 마지막으로 모든 고통을 포기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해결책이 있다. 이것들은 서로 매우 다른 해결책, 다른 처방이다. 나는 많은 고통을 포기하는 처방을 말하고자 한다.
약간의 고통을 포기하는 처방들은 당신이 이미 꽤 잘 알고 있다. 이 처방들은 대단히 간단하며, 대부분 단순히 당신의 문제를 감춘다. 그중 일부는 아주 짧은 기간 동안 당신에게 일시적인 안도감을 주며, 삶을 조금 더 견딜 수 있게 해준다. 이 첫째 처방이 단연 가장 인기가 있다.
사람들은 매우 경이롭거나 신비로운 일이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는 한 자신이 얼마나 불행한지 알지 못한다. 행복을 깊이 경험했을 때만, 자신에게 진정으로 가능하고 계획된 것을 아는 데 필요한 차이를 볼 수 있다. 당신이 이곳에 온 것은 더 큰 해결책, 더 큰 행복, 더 큰 삶의 성취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고통을 말해야 한다.
고통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나는 이 둘의 차이를 알려주고자 한다. 첫째 유형은 사람들 대부분이 고통을 생각할 때 떠올리는 고통이며, 간단하게 정의하자면, ‘고통은 당신이 일시적으로 소중히 여기는 어떤 것을 상실한 것을 알았거나 상실할 것으로 예상될 때 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거의 숙고하지 않는 또 다른 고통이 있으며, 이 고통은 여기서 행복을 어떻게 성취할 수 있는지에 대해 당신이 이해하는 것과 깊이 관련되어 있으므로 나는 이 고통을 집중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이 둘째 유형의 고통은 영적 가족에 대한 당신의 갈망, 신에 대한 당신의 갈망이다. 이것은 일시적인 것을 상실하여 겪는 고통과는 사뭇 다른 유형의 고통이다.
첫째 유형의 고통은 주로 당신 마음을 상대한다. 이 고통은 아픔이 아니다. 우리는 이 둘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육체적 아픔이 이 고통에서 비롯될 수도 있지만, 이 고통은 육체적 아픔이 아니다. 첫째 유형의 고통은 이미 “고통의 심리학”이라는 것에서 너무 많이 다루고 있으므로 나는 그 고통을 분석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나는 삶에서 무엇이 사람들에게 정말로 동기를 부여하는지 말하고자 한다.
첫째 유형의 고통은 당신이 매일, 심지어 매시간 경험하는 것, 즉 어떤 것의 상실이나 예상되는 상실이다. 경험의 상실, 물건의 상실, 친구 상실, 능력 상실, 기회 상실, 안전 보장의 상실, 쾌락의 상실 등 계속되는 상실이다. 이것은 매우 지배적이고, “상실” 현상이다. 이것은 행복의 부정적인 면이고, 당신을 따라다니는 거대한 그림자와 같다. 당신이 오늘 소중히 여기는 것은 무엇이든, 내일 잃을 수 있고, 사라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너무 무섭고 고통스러울 것이므로 당신이 잃는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 많다.
그래서 고통이라는 문제가 있다. 고통은 끊임없이 따라다니는 것이므로 피할 수 없다. 생각을 관찰하기 시작하면, 당신은 마음이 이 상실에서 저 상실로 어떻게 이어져 가는지 깨달을 것이며, 마음이 여기에 중점을 두지 않도록 감추는 유일한 방법은 새롭고 흥미로운 것을 바라는 것임을 깨달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이 붙잡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 계속 잃을 것이고, 이것은 매우 피곤하게 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축적하고 전부 포기하며 평생을 보낸다. 이렇게 사는 것은 매우 보잘것없는 상태지만, 이것이 세상 상태이다.
매우 순수한 형태의 전통 종교는 “상실이 예상되는 것은 모두 지금 포기하라. 그러면 고통의 근원을 도려낼 것이다.”라고 말했다. 물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잃기도 전에 모두 포기해야 하므로 당장 자신의 고통이 커지는 사람들 대부분에게는, 이것은 끔찍한 처방처럼 보인다. 이 접근법에 열광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여기에는 열의가 별로 없다. “좋아, 지금 당장 모든 것을 포기하겠다. 그러면 나는 이제 더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 처방은 당신을 딜레마의 핵심으로 몰아넣지만, 이것은 그림의 반쪽에 불과하며, 그림의 두 쪽 중에서 덜 중요한 쪽이다.
당신의 행복과 치유, 당신의 안녕은 부정적인 영향을 받거나 부정적인 것에 중점을 두는 것에서 생길 수 없다. 무엇이 자신의 아픔 너머를 보도록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가? 무엇이 사람들을 갈등에서 벗어나게 하는가? 무엇이 삶에서 사람들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가? 어떤 큰 기회가 아무리 불확실해 보이더라도 그 기회를 얻기 위해 고통스러운 상황을 포기하도록 사람들을 격려하는 것은 무엇인가? 당신을 부르는 이 힘은 무엇이며 당신은 왜 이 힘에 응답하는가?
당신들 대부분은 삶에서 상황을 더 좋게 만드는 법을 구체적으로 묻지만, 나는 그것보다 더 많은 것을 당신에게 주겠다. 왜냐하면 당신에게는 일시적인 안도감보다 더 많은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문제가 있다. 만약 내가 당신에게 무엇이 진실인지 말해주어도 당신이 그 진실에 준비되지 않았다면, 나와 논쟁할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진실을 아는 것은 항상 당신이 진실을 얼마나 알고 싶어 하는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진실은 당신 내면에서 때때로 확인하기가 어려울 수 있는데, 그 까닭은 당신이 고통을 간절히 포기하고 싶을 수는 있으나, 필요한 변화를 받아들이는 데 항상 간절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삶에서 당신을 불러 앞으로 나아가도록 계속 움직이게 하고 침체에서 벗어나게 하는 이 힘, 당신이 단순히 고통받기보다는 삶에서 해야 할 더 큰 일이 있다는 것을 당신에게 계속 상기시켜 주는 이 힘은 무엇인가? 당신 내면에 있는 이 힘, 이 큰 끌림, 이 큰 반응은 무엇인가? 사람들이 상실을 인지했든 예상했든, 상실로 고통받는 것은 물론 사실이지만, 모든 사람의 가슴 깊은 곳에는 더 큰 갈망이 있다. 이 갈망은 그들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이 거의 발견하지 못할 만큼 은밀한 곳에 있다. 이곳에는 가장 큰 눈물, 가장 큰 웃음, 가장 큰 행복이 있다. 여기서의 고통은 껍질이나 아주 얇은 벽과 같은 것이지, 깊은 동굴 같은 것이 아니다.
이 힘은 당신이 삶에서 포기해야 할 모든 것을 조목조목 나열하지 않는다. 이 힘은 삶이 당신에게 무엇을 주는지를 말한다. 이 힘이 중점을 두는 것은 베풂이지 상실이 아니다. 이 힘은 그 자체로 끌림이다. 이 힘을 인지하면, 당신은 단순히 다른 것들을 내려놓고 이 힘을 받아들인다. 어떤 것을 잃는다고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이 힘을 찾으려면 모든 것을 가져갈 수 없으므로 당신은 그것들이 자연스럽게 도중에 떨어져 나가게 놓아둔다. 그것들은 당신에게 그저 부담이 된다. 그것들이 당신 삶을 복잡하게 하고, 당신을 제지하고, 불행하게 만든다는 것을 인식할 때, 당신은 그것들을 그냥 내려놓는다.
이 큰 끌림, 당신의 이 열망은 신을 향한 것이다. 신이 없다면, 당신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열망은 로맨스이다. 로맨스는 당신이 자신을 내맡기는 유일한 다른 것이다. 사랑에 빠져 정신을 못 차리는 사람에게 세상에서의 안전이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당신에게 일어나는 일이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오, 나는 관심 없다! 나는 오직 사랑만 원해!” 당신은 하루 종일, 밤낮으로 자신의 사랑만 생각하며, 심지어 당신이 모든 것을 관리하지 않아도 놀랍게도 자신의 삶이 계속 잘 돌아간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하지만 로맨스는 삶에서 실제로 당신을 움직이게 하는 것에 비하면 아주 작은 일시적인 경험일 뿐이다. 이것이 무엇인지 당신이 알아낼 때까지는, 당신은 계속해서 열망하면서 자신의 열망을 사람, 물건, 새로운 경험, 새로운 자극, 새로운 감각 등 끊임없이 새로운 것들로 채우려고 할 것이다. 어쨌든 당신은 그것들 대부분을 꼭 원하는 것은 아니므로, 결국 다른 새로운 것들을 위해 그것들을 포기하게 된다.
당신이 자극적인 것을 더는 찾지 않으면, 당신은 이 큰 열망을 느끼기 시작하며, 이것이 참 자아 발견의 시작이다. 이 열망은 끔찍하지 않으며, 단지 매우 깊다. 이 열망은 일어난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부모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기억하는 것과 같다. 이 열망은 슬픔도 가져오지만 감사함도 가져온다. 이 열망은 감상적이 되기에는 너무 깊다.
당신은 행복의 원천을 지니고 태어났으며, 이 원천은 매일 이용되기를 바라며, 결국 이 원천에 의지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에게 그들 마음의 더 큰 능력인 앎을 이용해 그들이 아는 것을 알고 따르기 시작하도록 가르친다. 고통을 조금만 완화하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한계가 있다. 아마도 그들은 매우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결정에 직면했을 때 직관을 이용하려고 할 것이고, 나머지 시간에는 앎을 이용하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고통을 포기하고 싶은 사람들은 새로운 기회를 보기 시작하며, 그리하여 앎을 이용하고, 앎을 받아들이는 역량을 개발하고, 자신의 능력을 섬세하게 조정하고, 자신을 개발한다. 마지막으로 모든 고통을 포기하는 데 준비된 매우 드문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는 아주 특별한 교육과정이 있지만 우리는 그 부분을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 교육과정은 당신에게 필요한 것과 관련이 없다. 모든 고통을 포기하는 데 준비된 이들이 선택한 길은 매우 효율적이지만, 쉽지 않다. 왜냐하면 직접적인 방법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더 느린 방법은 당장은 더 쉽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더 어렵다.
만약 당신이 어떤 문제를 해결할 생각을 하면, 다음 중 하나로 생각할 수 있다. “자, 오늘 이것을 해결하자!”, “조만간 이것을 해결하자”, “어쩌면 나중에 이것을 해결할 수도 있을 거야.” 이 세 가지가 대표적인 접근 방식이다. 하지만 신은 매우 영리하므로, 이 모든 것에는 작은 비책이 있다. 만약 당신이 대부분의 고통을 포기하려고 한다면, 이것은 매우 큰 진보이며, 당신은 매우 깊은 행복을 경험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것은 당신 삶에서 매우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당신은 앎을 이용할수록 행복에 더 가까워지고, 앎을 무시하거나 피할수록 행복에서 멀어진다는 것을 알기 시작한다. 그래서 당신은 앎을 향해 가면 더 행복해지고, 앎에서 멀어지면 혼란, 불안, 분노, 슬픔 등 온갖 불행으로 돌아간다는 단순한 교훈을 얻게 된다. 그리고 당신이 앎과 함께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앎을 따르면, 일이 더 잘 풀린다는 것을 결국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점점 더 앎을 따르기 시작하면, 당연히 당신은 앎과 모든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을 것이다. 당신에게 확실성, 힘, 관계를 주는 것인데 무슨 까닭으로 그것과 당신 시간의 일부만 보내겠는가? 이 결정에 도달하는 데 수년이 걸릴 수 있지만, 사람들은 결국 그렇게 한다. 그러므로 당신이 대부분의 고통을 포기하는 과정을 밟는다면 당신은 언젠가 모든 고통을 포기하고 싶을 것이 분명하다.
나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을 당신에게 말해야 한다. 나는 당신이 당신 생각 말고 내 말에 부디 귀 기울이기를 바란다. 내가 “고통을 포기하자.”라고 말할 때, 사람들은 삶에서 매우 불행한 처지, 실제로 그들이 어떤 것이든 고려해 볼 만큼 불행한 처지에 있지 않는 한 흥미를 갖지 않는다. 이처럼 불행한 처지에 있어야, 사람들은 벗어나고 싶어 한다. 그들이 그렇게 불편하지 않다면, 고통을 포기하는 것이 그저 좋은 생각으로만 들릴 것이다. “나는 올해, 이번 달에 해야 할 목록에 고통을 포기하는 것을 추가할 것이다. 나는 일일 목표 목록에 이것을 넣겠다!” 상황이 몹시 나쁘지 않다면, 고통을 포기하는 것에 누가 신경을 쓰겠는가? 하지만 상황이 정말 나빠지면, 오 세상에! “이제 관심이 생겼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고통을 포기한다는 생각만으로는 사람들의 열정을 불러일으키거나 용기를 북돋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내가 고통을 포기하려면,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가?”라며 알아보기 때문이다. 그들은 거래에 신경이 매우 과민해진다. “지금 내가 무엇을 포기해야 하지? 어쩌면 나는 어떤 것들을 포기하고 싶지 않을지도 모른다. 내가 고통을 포기하려면 그것들을 포기해야 하는가?” 그리고 사람들은 아무것도 지니지 않은 온갖 금욕주의자나 종교인을 생각하며 “오, 그것은 나에게 맞지 않아!”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실제로 의미하는 것은 행복과 확실성을 당신 삶에 받아들이는 것이고, 이것이 고통을 원상태로 되돌리는 것이다.
나는 당신들 모두가 고통을 포기하기를 바란다. 당신들 모두가 이렇게 불행할 필요가 없으므로 당신들이 고통을 포기하는 것이 내가 당신들에게 바라는 소망이다. 당신 삶에서 불행을 어찌해야 할 필요성을 인식하려면, 자신이 불행하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자신이 불행하다는 것을 인식하려면, 더 불행해져서 마침내 자신이 불행하다는 것을 깨닫거나, 아니면 행복을 깊이 경험해서 그 차이를 깨달아야 한다.
당신이 매우 행복해지기 위해 해야 하는 변화는 많지 않다. 세상이 멋진 곳이 될 필요는 없다. 당신이 행복하기 위해 세상에 전쟁이 없어야 할 필요는 없다. 당신이 행복하기 위해 모든 문제가 해결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당신이 행복하기 위해 자신의 큰 목표를 모두 충족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요건이 아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을 더 많이 갖는다고 해서 더 행복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당신은 어제보다, 또 오래전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지금 더 많이 가지고 있다고 더 행복한 것은 아니다. 조금 더 나아졌지만, 당신은 여전히 어떤 것들을 얻어 그것들을 지키려 하고, 삶이 당신에게서 어떤 것도 빼앗아 가지 못하도록 막으려는 일에 몰두한다. 이것은 매우 절망적이다. 거기에는 행복이 없다. 다른 접근법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마치 모두 자신의 감방 안에 있는 사람들로 가득 찬 감옥 같지만, 모든 문은 열려 있으며, 그들은 그 안에 너무 오래 있었으므로 여전히 그 안에 있다. 거기에 다른 무엇이 있는가? 문이 열려 있다는 사실이 그들에게 떠오르지 않는다. 그들은 여전히 현재 상황에 만족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앎을 경험하기 시작하면, 당신은 삶에서 몇 가지 중요한 차이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당신은 세상에서 진정한 확실성을 경험하기 시작하는데 처음에는 사소한 상황에서 점차 경험하고, 신비롭기는 하지만 당신이 앎을 따르기 시작하면서 점점 더 규칙적으로 경험한다. 앎을 따르는 법을 배우고 다른 사람에게 매우 직접적으로 공헌하는 법을 배우면, 고통받을 시간이 없을 것이다.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 매우 많은데 상실을 예상하면서 앉아 있을 시간이 있겠는가?
당신은 일이 진행되는 방향을 결정하는 데 거의 아무 힘도 쓰지 못한다. 이것이 모욕처럼 들린다는 것을 나는 안다. 인간은 매우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말 대단한 사람들, 그들은 많은 것을 할 수 있고, 많은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하지만 만약 현재 자기 마음 상태를 관찰한다면, 당신은 자신이 세상에서 얼마나 무력함을 느끼는지 깨달을 것이다. 당신은 가정에 기반을 두고 삶을 살며, 그 가정들이 어긋났을 때, 삶은 엄청난 타격을 받는다. 당신 행복은 삶의 어떤 작은 변화에도 얼마나 쉽게 날아가는가! 당신 행복이 확고한 기반 위에 세워져야 한다. 세상이 당신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세상에 가지고 온 것 위에 세워져야 한다.
당신이 자주 두려워하고 아주 많은 불안을 견디고 있으니, 이것은 당신이 정말로 위험을 느끼고 취약함을 느낀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당신은 용기를 내서 “나는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어! 내 운명은 내가 결정할 거야! 그래, 나는 앞으로 나아갈 거야!”라고 말할 수 있다. 순전히 의지력만으로, 당신은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실제로 더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지만,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고, 내가 말하는 진정한 행복이 바로 거기에 있다 하더라도 여전히 당신을 피해 갈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맨 먼저 해야 하는 것은 자신의 고통을 직접 마주하는 것이며, 이 말은 당신이 판단 없이 고통에 직면해야 한다는 뜻이다. 만약 당신이 고통에 현존한다면, 고통은 당신에게 영향을 미칠 수 없다. 하지만 당신이 고통에 반응하거나 고통을 바꾸려고 한다면, 고통은 언제든지 당신을 압도할 수 있다. 고통과 싸우는 사람들은 고통에 반응하므로 노예가 될 것이다. 고통은 습관이고 중독이므로 그들을 사로잡고 있다. 고통은 사람들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사로잡는 것이다.
이제 나는 모든 사람과 관련된 몇 가지 사항을 말하고자 한다. 먼저, 해야 할 일 중 하나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를 멈추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지금부터 당신의 문제나 다른 모든 사람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을 포기하기 시작하라. 항상 일을 해결하려고 하면, 당신은 앎을 경험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 당신은 그 상황에 대해 긴장을 풀어야 한다. 즉각적인 조치가 필요한 경우에만 행동해야 한다. 이런 경우가 아니라면, 또 당장 필요한 것도 아니고 무엇이 필요한지 당신에게 명백하지도 않다면, 그때는 마음을 진정하고 그 상황에 대한 확실성이 어디에 있는지를 실제로 느끼기 시작하는 것이 현명하다. 이것은 필사적인 몸부림이 아니라, 신뢰를 보여주는 것이다.
당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이것은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이 아니다. 왜냐하면 더 많은 문제가 새로 생길 것이며, 당신이 기존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만큼 빠르게 더 많은 문제가 계속해서 들어설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문제가 없는 삶을 살지 않을 것이다. 만약 문제가 없는 삶을 산다면, 그것은 당신에게 끔찍한 문제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항상 주변에 있을 것이다. 이것은 다음 끼니에 다시 식사하고, 다음날 밤 다시 잠자고, 다음날 다시 출근해야 하는 것과 같다. 세상에서 사는 것이 문제이므로, 문제는 이곳 삶의 일부이다.
그다음으로 해야 할 일은 당신을 정말로 불행하게 한다고 느끼는 것들의 목록을 작성하여 그것들에 대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당신이 굶어 죽을 지경에 처하거나, 당신의 건강과 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당장 있어야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이상적인 상황은 행복을 제공하지 못한다. 사람들이 삶에서 매우 중요한 발견을 하는 것은 상황이 좋아 보이지 않을 때이다. 사실상, 대부분의 중요한 발견은 이 시기에 일어난다. 모든 것이 잘 돌아가면, 사람들은 잠을 잔다. 그때는 주의력이 떨어지고 관찰력도 떨어진다. 그들은 일종의 낮잠 상태에 빠진다. 그래서 만약 당신의 상황이 이상적이지 않으면, 그것은 당신에게 매우 좋을 수도 있다.
그다음으로, 평상시 마음 상태에 만족하지 말라. 이 상태는 애처로울 정도로 제한적이다. 당신에게는 훨씬 더 많은 것이 있다. 당신이 자신의 안녕에 대해 더 진지할수록, 이것은 더 분명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규칙적으로 자신을 점검하는 것은 매우 좋다. 평범한 학생들은 적어도 하루에 한 번, 진지한 학생들은 그보다 더 자주 자신을 점검하라. 당신은 실제로 어떻게 지내는가? 우리는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사는 삶의 방식을 벗어나 자신의 삶을 어떻게 살 수 있는지를 대조해 보여준다. 이 대조는 아주 매우 중요하다.
그다음으로 알아야 할 것은, 당신의 상황을 개선하면 당신이 진정으로 찾는 것을 보장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매우 호화로운 삶을 사는 사람들이 당신보다 더 큰 행복을 누리지는 않는다는 것이 좋은 예이다. 그렇지 않은가? 혹시라도 다르게 생각한다면, 당신은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그들 삶이 얼마나 실망스러운지 알아보아야 한다. 그들은 어떤 것을 잃는 것에 대해 당신보다 더 불안해한다. 그들은 잃을 것이 더 많으며, 삶에서 자기 행복의 근원이나 삶의 기반을 찾지 못했다.
그다음으로 일하지 않는 것은 삶의 목적이 아니다. 세상에서의 진짜 일을 찾는 것이 삶의 목적이다. 결여되어 있는 것은 바로 의미 있는 것이며, 그래서 사람들이 고통받는다. 의미가 당신의 기반이 될 때, 진정한 의미가 당신의 기반이 될 때, 그 의미가 당신 행복의 근원이 될 것이고, 당신은 상황에 상관없이 어디를 가든 그 의미를 가져갈 수 있을 것이다.
영감을 받은 사람들은 주변의 불행한 모습에 좌절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적절한 도움을 받고, 앎을 알아차리고 경험하는 것을 계속 키워 나갈 수 있다면, 어느 곳에서나 어느 정도 일해 나갈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이 더 강해질수록, 그들은 앎을 잃은 것으로 보이는 곳에 앎을 가져갈 수 있고, 앎과 함께 있지 않아 앎을 잃은 사람들에게 공헌할 수 있다.
당신이 앎에 더 가까이 다가갈수록 고통의 먹구름은 당신에게서 점점 더 떨어져 나간다. 삶에서 사람들은 괴로움에 휩싸여 있다. 이것은 매우 부정적으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당신 본연의 상태에 비하면, 꽤 정확한 표현이다. 당신이 깨어나기 시작하면, 자신이 매우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다. 세상이 이런 잠에 빠지게 한다. 세상은 끊임없이 잠을 재우고 다시 잠에 빠지게 하므로, 하루를 시작할 때마다 당신은 세상에서 조금 물러나서 약간의 위안을 찾아야 하고, 당신 마음이 짜증나 있으면 마음이 안정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해당한다.
그래서 우리는 앎의 학생들이 신문이나 잡지를 많이 읽거나, 텔레비전을 많이 보는 것을 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것은 단순히 그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그들 마음의 개인적 측면을 괴롭히기 때문이다. 만약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진지하게 찾고자 한다면, 당신은 상처에 자꾸 손을 대 덧나게 하여 자신의 문제를 계속 키워서는 안 된다. 당신은 자신의 마음에 시간을 주어 마음이 가라앉게 해야 한다. 당신의 생각은 매우 빠르게 움직인다. 당신 생각이 당신을 사로잡고, 당신은 그 생각을 따른다. 그 생각들은 매우 불행한 생각들이며, 만약 당신이 그 자리에 행복한 생각을 두려고 하더라도, 그 생각들 또한 움직인다.
행복은 고요한 상태이며, 불안하지 않다. 행복은 어딘가로 가려 하거나, 무언가를 얻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행복은 매우 고요하므로, 당신이 행복에 가까이 다가가려면 고요해야 한다. 이것은 마치 행복이 시속 5킬로로 가고 있는데, 당신은 시속 100킬로로 가고 있는 것과 같다. 당신은 행복을 스쳐 지나쳤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이 모든 괴로움과 고통을 만들어 냈다고 생각하며 매우 비판적이다. 물론 그들이 만들었지만, 그들은 단지 더 나은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당신은 그저 다른 모든 사람이 하는 것을 할 뿐이다. 당신은 아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아이를 나무라는가? 또 철없이 행동하거나 잘 잊어버리거나 서툴다는 이유로 아이를 벌하는가?
만약 당신이 아는 길, 따라야 하는 길이 오직 둘뿐인데, 둘 다 불행한 길이라면, 그중 하나를 선택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만약 당신이 불행의 길과 앎의 길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면, 물론 선택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중점을 두는 것은 당신을 앎에 데려가는 것이다. 그러면 문제는 바로 해결된다.
첫댓글 그래서 고통이라는 문제가 있다. 고통은 끊임없이 따라다니는 것이므로 피할 수 없다. 생각을 관찰하기 시작하면, 당신은 마음이 이 상실에서 저 상실로 어떻게 이어져 가는지 깨달을 것이며, 마음이 여기에 중점을 두지 않도록 감추는 유일한 방법은 새롭고 흥미로운 것을 바라는 것임을 깨달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이 붙잡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 계속 잃을 것이고, 이것은 매우 피곤하게 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축적하고 전부 포기하며 평생을 보낸다. 이렇게 사는 것은 매우 보잘것없는 상태지만, 이것이 세상 상태이다.-본문 중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