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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6. 묵상글 ( 사순 제2주일. -참회와 회개의 계절. 등 )
^ 김찬선 신부님 : 아직 / 05:52 추가
^ 호명환 신부님. 일부 : 아직 / 05:56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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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6. 사순 제2주일. 키엣 대주교님.
https://cafe.daum.net/bbadaking/LLVy/550
참회와 회개의 계절
사순절은 참회와 회개의 계절입니다.
회개는 영혼을 새롭게 합니다. 영혼을 새롭게 하려면 자신과 타인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꿔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육체와 정신 그리고 상황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일반적인 사건에 대해서 종종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빌라도가 신전에서 유대사람들을 죽인 것에 대해 군중들은 그것을 정치적인 문제라고 생각하고 예수님께서 그를 정치적으로 벌을 주기를 바랬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빌라도를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비록 당신이 부당한 정치적인 죄명으로 판결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정치적으로 비난하지 않으셨고 빌라도 총독을 판결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을 정치적인 관점이 아닌 종교적인 관점으로 해결할 것을 제시하셨습니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 전에, 사건을 여론화하기 전에 먼저 참회와 회개를 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너희는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러한 변을 당하였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성공은 도덕적인 사람에게 주시는 은총이고, 재난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받는 형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재난의 피해자들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죄가 있기 때문에 참변을 당했다고 생각하고 그 참변을 면한 사람들은 죄가 없다는 증거라고도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경고하셨습니다.
“여러분 또한 죄인이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들보다 더 참혹하게 멸망할 것이다. 만일 다른 사람을 심판해야 한다면 다른 사람을 심판하기 전에 자신을 먼저 심판해야 한다. 판결을 내려야 한다면 다른 사람에게 판결을 내리기 전에 자신에게 먼저 판결을 내려야 한다.”
이처럼 먼저 회개하며 자신을 판결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환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나의 행동이, 나의 말이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환상이 아닌 현실적인 눈으로 세상을 보아야합니다. 하늘과 바다를 막는 거대한 계획을 세우지 말아야 합니다. 사회를 변화시킨다는 환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것부터 시작하십시오. 우선 나 자신을 변화시키고 개조하여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중국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 집에 꽃을 가꾼다면 세계는 아름다운 정원이 될 것입니다” 자신을 바꾸는 것이 바로 세계를 바꾸는 것입니다. 타인이나 사건을 판단하기 전에 자신을 먼저 판단하여 자신의 실체를 알고 부족한 자신부터 새롭게 거듭나야 합니다. 이것이 세상을 바꾸는 시작입니다.
주님, 저희 영혼을 새롭게 하도록 도와 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나와 가족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습니까?
2. 나의 삶에서 행운과 불행 어떤 것이 더 많았습니까? 왜 나에게 불행이 닥쳤다고 생각합니까?
3. 사회와 가정을 바꾸기 전에 나 자신부터 바꿔야 합니다. 이번 사순절에 내가 바꿔야 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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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6. 사순 제2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3.16 05:42
- 희망을 보는 사람, 희망을 주는 사람.
지난주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서 가셔서 악령의 유혹을 받으신 주님께서
오늘 사순 제2주일에는 산으로 가시어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시고,
그 모습을 뽑힌 제자들에게만 보여주십니다.
왜 이러신 것일까?
이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사순시기 전례적인 의미로 볼 때 이 사건은
광야에서 유혹받으신 것과 해골산에서 돌아가신 것 사이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광야에서 산으로 오르셨다가 다시 내려오신 다음
다시 골고타로 오르시어 돌아가실 것입니다.
이것은 뽑힌 제자들 뿐 아니라 우리도 따라야 할 주님의 발자취이고,
그래서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봉헌 생활>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크게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여정은 <A Patre, ad Patrem>
곧 성부께로부터 오셔서 성부께로 돌아가시는 여정입니다.
그런데 작게 보면 그 중간에 광야-타볼산-해골산의 여정이 있고
그래서 우리도 이 세상에서는 이 여정을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도 성부께 갈 수 있고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키실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산 위에서 제자들에게 보이신 모습은
해골산에 오를 제자들을 위해 미리 일부러 보여주신 것이고,
장차 하느님 나라에서 우리가 어떻게 변모될지 보여주신 것입니다.
장차 이렇게 될 희망을 가지고 당신의 십자가 길을 따르라는 뜻으로
주님께서는 뽑힌 제자들에게 이 모습을 보여주시고,
바오로 사도는 하늘 시민인 우리에게도 권고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 필리피서에서
십자가를 원수로 살아가는 사람들과 하늘 시민을 대비시키며
자신과 필리피 신자들은 하늘 시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우리에게도 십자가의 원수들이 될 것인가?
아니면 하늘 시민이 될 것인가? 자문케 하고 선택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대답과 어떤 선택을 해야 합니까?
우리의 대답과 선택은 너무도 자명하지요.
우리가 십자가의 원수들이 되는 일은 절대로 없어야겠고 상상할 수도 없겠지요.
그런데도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십자가의 원수들이 될 수 있고,
반대로 하늘 시민이 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우선 고통을 거부하는 것이 십자가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통과 십자가의 의미를 모르면 생래적으로 고통을 거부합니다.
인간이란 아니 모든 피조물은 고통을 거부하게끔 태어났다는 말입니다.
꽃길을 가면서 고통스럽다고 할 사람은 없습니다.
산을 오르는 사람이 고통스러운 것이고
그것도 십자가를 지고 오르는 사람이 고통스러운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산을 오릅니까?
산꼭대기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며 아, 좋다! 하기 위해서입니까?
우리는 그런 산을 오르지 않고 하느님의 산을, 하늘 시민이 되기 위해 오르며,
그래서 고통을 감수하고 더욱이 주님께서 주신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오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원수가 되는 것은 간단합니다.
이런 목적이 없으면 곧 하늘 시민이 되려는 목적이 없으면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목적은 있는데 희망이 없어도 결과적으로 십자가의 원수가 됩니다.
십자가만 보고 주님을 보지 못하면 결과적으로 그렇게 됩니다.
주님은 목적지시고 길잡이시고 동반자이시기에 희망을 주십니다.
오늘 주님께서 산 위에서 변모하신 것은 이런 희망을 주시기 위함이고,
뽑힌 제자들에게 그 모습을 보여주신 것도 그들이 희망을 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희망을 보는 사람입니까?
우리는 그 희망을 주는 사람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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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6. 사순 제2주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나이를 먹어감에서 오는 은총! - 열한 번째 주간 실천
하느님의 숨
2025.03.15. 16:22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3월 15일 토요일 (호명환 번역) 열한 번째 주간: 지극한 은총
우리가 나이를 먹어가는 것을 다정하게 받아들이려는 부드러운 마음을 지닌다면 나이를 먹는 것이 은총이 됩니다.
언론인인 크리스타 티펫(Krista Tippett)은 나이를 먹어가는 것의 놀라운 은총을 참으로 구체적인 형태의 은총으로 묘사합니다. 우리의 정신과 육신이 쇠해지면 우리는 단순한 만족을 위한 공간을 만들게 됩니다:
모든 은총과 결함을 지닌 몸을 지니고 살아간다는 것이 중년에 접어든 저에게는 늘 평범했던 제 몸에 새로움을 가져다 주는 선물처럼 느껴집니다. 나이를 먹는 것은 아무도 피할 수 없는 어떤 것이고, 또 매우 느리게 우리의 젊음을 앗아가는 것이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저와 제가 아는 모든 사람에게는 이것이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우리의 몸이 늙어 가는 모습을 은폐할 수 없는 때에 이르게 됩니다. 그때부터는 질서와 혼돈 사이의 원초적인 춤이 우리의 몸 안팎을 다 장악해 버립니다. 요가를 많이 한다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제 아이들이 청년기를 거치면서 겪는 변화를 죽 지켜 보면서 저는 그것을 무서워하기보다는 신기하고 경이롭게 바라보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저 또한 나이를 먹어가면서 이루어지는 제 몸의 변화에 대해서도 같은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물론 슬픔도 있고, 두려움도 있으며, 당황스러움도 많이 느낄 것입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이런 상황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 저는 전혀 예상치 못한 만족의 선물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만족은 제가 인생을 살면서 많이 알았던 어떤 것도 아니고 제가 정말로 원했던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 또한 육신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은총입니다. 제 머리가 희어지고 피부가 노화하면서 오는 어떤 선물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더 젊었을 때는 우리 뇌가 새로운 것을 배우도록 조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년을 넘어 노년의 단계에 이르게 되면 우리 뇌는 일상적인 것에 더 큰 만족을 느끼는 데 더 민감해집니다. 우리 몸이 속도를 늦추게 되면 참으로 중요한 것을 알아차리게 해 주는 공간이 생겨납니다. 제 피부가 지금보다 훨씬 더 탱탱하고 윤기가 흘렀을 때는 제가 알 수 없었던 어떤 인식이 중년을 넘어 노년에 이르른 저에게 생겨났습니다. 저는 제 삶의 일상 안에 있는 아름다움에 더 주의를 기울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차 한 잔을 마시는 것보다 더 기분 좋은 것이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저보다 훨씬 더 큰 제 아들이 저를 안아주는 것보다 더 행복하고 즐거운 것이 없습니다; 언제 보아도 제 집 뒤뜰에 밤낮으로 서 있는 잣나무보다 더 숨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것이 없습니다.
Krista Tippett, Becoming Wise: An Inquiry into the Mystery and Art of Living (Penguin, 2016), 72–73.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Geentanjal Khanna, Untitled (detail), 2016,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우리의 노력으로나 공로가 아닌 거저 주어지는 자비는 우리 삶에서 그저 손을 벌리기만 하면 얻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경험하면서 알게 되는 하느님의 계시입니다. - 사실 우리는 물 한 방울처럼 별것 아닌 것 같고 때로는 계획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그리고 심지어는 극히 혼란한 상황에서도 이런 경험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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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우리에게 중요한 소리가 우리 귀에 들리게 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의 숨
2025.03.16. 05:51
오래 전 미국 생활 처음에 제 귀를 늘 거슬리게 했던 소리들이 있습니다. 밤낮으로 계속해서 들리는 사이렌 소리였습니다. 저는 속으로 "여기는 무슨 사고가 이리도 많이 나나?..." 하고 생각하곤 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한국을 떠나올 때 저에게 누가 선물로 준 카세트 테잎에서 나오는 아름다운 음악을 때면 그 소리들이 그렇게 신경 쓰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그 소리가 전혀 들리지도 않았습니다. 참 묘하지요?!
1998년도에 피정처럼 진행된 프란치스칸 국제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파푸아뉴기니에서 온 한 형제(사제)가 미사를 주례하면서 강론 중에 이렇게 말하더군요. "피정은 일상을 떠나 전혀 새로운 분위기 속에 젖어드는 것이 아닙니다. 피정은 내가 서 있던 곳에서 한 발짝 뒤로나 옆으로 물러나 내가 서 있던 곳을 바라보며 나 자신의 삶과 그 삶 안에서 함께해 주셨던 하느님을 새롭게 인식하는 것입니다."
좋은 여운이 많이 남는 말입니다. 그래서 저도 가끔은 이곳에 피정하러 오는 분들에게 이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가 사는 이 현실에서 우리는 하느님 현존과 그분의 목소리보다는 다른 많은 소리에 신경을 쓰며 살아가지 않습니까?! 무의식적으로 우리의 뇌와 귀는 물리적인 소리나 우리가 늘 생각해오던 소리에 채널을 맞추어 놓고 있는지 모릅니다.
예전에 어느 글에서 읽었던 이야기 하나를 나누고 싶습니다. 어떤 남아시아(아마도 파푸아뉴기니?)의 어느 부족 사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한 무리의 사람들과 함께 큰 도시로 관광을 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루는 사람들이 정오 무렵에 그 도시의 어느 거리를 걷고 있었습니다. 거리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고, 차들이 '빵빵' 거리며 경적 소리를 내고 있었고, 택시들이 여기저기서 끽끽 소리를 내며 부산하게 지나가고 있었고, 또 사이렌 소리가 연신 울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사람이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귀뚜라미 소리가 들리네!..." 사실 귀뚜라미 소리는 새벽이나 저녁 시간, 즉 조용한 시간에 시끄럽게 들리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대낮에, 그것도 복잡한 도시의 소음 속에서 귀뚜라미 소리가 들린다고 하니, 사람들이 다들 "뭐라고? 정신 나간 거 아냐? 이런 시끄러운 소리 속에서 귀뚜라미 소리가 들린다고? 아닐 거야...."
그러나 그 사람은 다시 "아니야, 분명히 들려. 귀뚜라미 소리가...."
다른 이들은 또 "정말 이상하네... 허허~"
그런데 그 사람이 잠깐 동안 귀를 기울이더니.... 거리 저 쪽에 있는 시멘트로 만들어진 큰 화분 쪽으로 걸어갔습니다. 그 화분에 큰 관목 하나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는 관목의 가지들과 이파리들 사이를 들여다 보았습니다. 그러고는 어느 가지 밑에 앉아 있는 작은 귀뚜라미 하나를 가리켰습니다. "여기 있잖아!..."
함께 있던 관광객들은 모두 기겁을 하였습니다. "아니, 어떻게 그 소리를 들을 수가 있어? 당신 수퍼맨 귀를 가지고 있는 거 아니야?"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아니야. 내 귀도 당신들 귀와 별반 다르지 않아. 우리가 무엇을 듣느냐가 중요한 거야! 잘 들리고 잘 들리지 않는 것은 다 여기에 달려 있어." 하고 말했습니다.
관광객 중 한 친구가 그에게 "정말 믿을 수 없군.... 나는 이 시끄러운 소리 속에서 귀뚜라미 소리를 전혀 듣지 못했는데..." 하고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내 말이 맞아.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다 달려 있는 거야. 자, 봐봐. 내가 알려 줄게." 하고 그 사람이 말하고는 자기 호주머니에서 동전 몇 개를 꺼내 조심스럽게 길바닥에 떨어뜨렸습니다.
여전히 거리의 소음과 차들 소리, 그리고 사이렌 소리가 시끄럽게 들리는데도 그 사람들에게서 한 6-7미터 정도 떨어져 걷고 있던 사람들이 시선을 그 동전 떨어지는 쪽으로 돌리더랍니다. 혹시나 자기 지갑이나 호주머니에서 동전이 떨어졌나 보려고요.... ㅎㅎ
그러고는 그 사람이 "맞지?! 우리가 듣는 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무언지에 달려 있는 거야."
....
오늘 우리는 사순 제2주일에 늘 듣는 주님의 변모 이야기를 루카 복음을 통해 듣습니다. 오늘 우리는 특별히 구름 너머로부터 나오는 우리 아버지 하느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일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예수님의 변모 때 예수님과 함께 서 있었던 두 예언자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정반대의 상황에서 들은 두 사람의 예언자입니다. 모세와 엘리야.
모세는 불기둥과 구름 기둥, 그리고 천둥 소리와 같은 시끄러운 소리 가운데서 들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던 예언자고, 엘리야는 크고 강한 바람이나 강한 지진 혹은 불길 속이 아니라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던 예언자입니다.
이 사실이 시사하는 바가 우리에게는 참으로 큽니다.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큰 소리든, 작은 소리든 우리는 거기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중요하게 여긴다면 그 말씀이 큰 소리로 나든 작은 소리로 나든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우리 삶의 막막한 사막 한가운데 있을 때도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을 건네 오십니다. 분명히! 그러니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온전히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선은 그 말씀이 우리를 살려 주는 말씀, 우리를 참된 삶으로 이끌어 주어 결국에는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해 주는 말씀이라는 것을 확신하면서 말입니다!
주님은 분명히 모든 위기 속에서도, 막막하게 느껴지는 모든 시견 한가운데서도, 앞이 전혀 보이지 않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우리 바로 곁에서, 그리고 우리 안에서 우리에게 생명의 말씀을 건네 오시는 분이십니다!
자, 우리도 사도 바오로처럼 이렇게 고백합시다.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주님의 목소리(말씀)이 우리에게 참으로 중요한 것이 될 때.... 우리는 분명히 그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에 순명하려는 자세를 갖출 것입니다!
"들리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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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6. 사순 제2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신부님! 이런 책도 읽으세요?”
가톨릭 신부이니 종교 서적만 읽는 줄 아셨나 봅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다양한 책을 읽습니다. 시, 소설, 에세이, 철학, 정치사회, 종교, 예술, 과학, 역사 등 조금이라도 관심이 가면 책을 사서 읽습니다. 요즘에는 아이들을 더 많이 알고 싶어서 어린이, 청소년 책도 읽고 있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장르의 책을 읽는 이유는 그만큼 저의 시야를 넓혀준다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책을 읽으면서 이 세상이 너무나 궁금해집니다.
전에는 저와 맞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면, 읽으면서 불편한 마음이 들기도 하고 또 화가 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양한 장르의 책을 읽으면서 세상의 변화를 볼 수 있었고,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아는 지인이 중병에 걸려 오랜 시간 병상에 있었습니다. 사실 이분은 열려 있는 분이었습니다. 비난보다는 새로운 생각으로 받아들이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병에 걸려 병상에 누워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점점 변하셨습니다. 뉴스를 보면서 계속해서 부정적인 말을 쏟아내셨고, 사람들에게 화를 낼 때가 많아졌습니다. 세상을 보는 시야가 좁아지면서 마음이 닫힌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이 세상에 대해 궁금함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열린 마음속에서 하느님의 다양한 활동을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 활동에 감사와 찬미의 기도를 바치게 될 것입니다. 그 안에서 넘쳐나는 하느님의 사랑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장면입니다. 여기에서 닫힌 마음을 가진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베드로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입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하는 예수님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모든 모습이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초막 셋을 지을 테니 여기에서 지내자고 말합니다. 워낙 힘든 전교 여행 중이었으니 이런 제안을 할 만도 합니다. 하지만 이는 닫힌 마음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지 못하게 하는 마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의 구름 속에서 이런 소리가 났습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35)
하느님의 일은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을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역사하시는 이 세상에 대한 궁금함을 가질 수 있는 열린 마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세상 안에 갇혀 사는 닫힌 마음으로는 도저히 얻을 수 없는 기쁨과 행복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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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내 뒤틀리고 초라한 손은 축복이었다(모데카이 브라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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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6. 사순 제2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사순 제2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믿음’에 대한 말씀입니다.
<제1독서>는 하느님께서 아브람과 계약을 맺으시는 장면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많은 후손을 약속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창세 15,6)
이처럼, 아브람의 믿음 위에 계약을 맺으시고 그의 후손에게 줄 땅을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화답송>에서는 주님을 믿음으로 영접하는 시편을 노래합니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 ~주님의 어지심을 보리라 믿나이다.”(시 27,7-8.13.)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멸망이 오고, 믿는 이들에게는 “당신의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화시켜주실 것”(필리 3,21)이라고 하면서, “주님 안에 굳건히 서 있으십시오.”(필리 4,1)라고 말합니다.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수난을 앞두고, ‘예수님의 영광스런 모습’을 미리 보여주면서 제자들의 ‘믿음’을 굳세게 합니다.
복음사가는 먼저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다.”(루카 9,28)고 전합니다. 이는 마치 예수님께서 겟세마니 산에서 십자가를 받아들이셨듯이, 중대한 순간이 임박했음을 알려줍니다. 곧 죽임을 당하시기로 예루살렘으로 오르는 시간이 임박한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하시던 중에 변모를 이루시는데, “두 사람이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루카 9,30). 이 표현은 ‘이 두 사람’에 대한 표현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 곧 <루카> 24장 4절의 “눈부시게 차려입은 남자 둘이 그들에게 나타났다.”에 나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모세와 엘리야는 율법과 예언자들을 대표하며,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에게 출애굽을 통해 약속된 땅으로 인도했듯이, 엘리야가 불붙는 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듯이, 그들이 예표한 바가 그리스도에게서 실현될 것을 미리 알려줍니다. 동시에, 예수님은 예언자 중의 한 사람이 아니며 예언을 이루시는 분이요, 예언된 분이심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엘리야가 아니라 엘리야 다음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임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그들은 “영광에 싸여 나타난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고 있었습니다.”(루카 9,31). 이는 예수님께서 이루실 구원과 그를 위한 수난과 죽음을 알려주심과 동시에, 제자들의 믿음을 굳게 하시기 위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나중에 빈 무덤 안에 나타난 “두 남자”의 말에서도 드러납니다. 그들은 당황하는 여자들에게 말합니다.
“그분께서 갈릴래아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 기억해 보아라.
사람의 아들은 죄인들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박히셨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루카 24,6-7)
결국, 이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1코린 15,3.4) 이루어지게 될 것이며,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구름이 일더니 그들을 덮었다.”(루카 9,34). 그리고 그 속에서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35).
우리는 이와 유사한 말씀을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시는 장면에서도 들었습니다. 곧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 3,22;마르 1,12;마태3,17)라는 말씀입니다. 이 둘은 예수님의 신원을 아버지께서 직접 밝혀주시는 장면입니다.
전자는 그 신원을 제자들에게 밝혀주시는 장면이고, 후자는 예수님께 밝혀주시는 장면입니다. 후자는 <2사무엘>(7,14)에 나오는 나탄의 예언을 이어받은 <시편>에 나오는 “너는 내 아들”(2,4)이라는 표현과 <이사야>에 나오는 “내 마음에 드는 이”(42,1)라는 표현이 합쳐진 것입니다. 이는 메시아 “왕”과 “주님의 종”이라는 두 예언적 인물을 합쳐줍니다.
그리고 전자는 <이사야서>의 “내가 선택한 아들”(42,1)이라는 표현은 “고통 받는 주님의 종”(53장)과 연결됩니다. 그리고 이 표현은 뒤에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께 대한 유혹의 말, 곧 “이자가 다른 이들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지.”(루카 23,35)라는 말로 다시 반복됩니다. 따라서 이는 예수님을 인류구속을 위해 죽게 될 “종”임을 알려줍니다.
이처럼,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신원을 밝혀주시며, 동시에 우리가 해야 할 바를 가르쳐주십니다. 곧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35) 하시며, 그들이 아드님처럼 영광된 모습으로 ‘변화할 수 있는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우리는 지금 사순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이 시기를 흔히 말하기를 ‘은혜로운 회개의 때’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지금 나에게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무슨 일이 일어나야 하는 걸까? 지금, 나에게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가? 아니라면, 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가? 혹 예수님의 영광스런 모습을 보지 못해서 일까? 아니면, 그분의 가르침과 말씀을 듣지 못해서 일까?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이 모든 선물을 받고 또 받았습니다. 우리는 진정 그분의 아름다움을 보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들은 말씀에 ‘응답’하지 않는 까닭에 말씀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을 뿐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내가 있어야 할 곳은 말씀 아래에 머무는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들려오는 말씀이 내 안에서 성취도록 말씀께 ‘승복’하는 일입니다. 말씀께서 나를 맘껏 쪼물딱거릴 수 있도록 말씀께 자신을 ‘허용’하는 일입니다. 말씀의 힘을 ‘수락’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변화의 힘이신 말씀께 자신을 건네 드리는 일입니다. 내 자신이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초막이 되어 드리는 일입니다. 내 자신을 그야말로 말씀이 이루어져야 할 공간이요 장소로 내어드리는 일입니다. 그것은 내 자신이 아니라, 말씀을 주인 되시게 해 드리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35)
주님!
말씀 아래 있게 하소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말씀이 제게서 실현되게 하소서!
말씀에 응답하는 일, 바로 그 일을 제가 하게 하소서!
말씀의 권능으로 저를 덮으소서. 변모되게 하소서.
제 자신이 말씀이 이루어지는 공간이요 장소가 되게 하소서.
오늘 말씀의 그늘 아래에서 비천한 제 몸이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화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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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6. 사순 제2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미국에는 없는데, 한국에 있는 주거 방식이 있습니다. ‘전세(傳貰)’ 제도입니다. 임대인은 일정 금액을 지급하고 임차인의 주택을 계약기간 동안 사용하는 제도입니다. 계약기간이 끝나면 임대인은 임차인의 결정에 따라서 다른 곳으로 옮겨가야 합니다. 계약기간이 끝났을 때 임차인이 전세 금액을 올리면 임대인은 올린 금액을 더 지급하고 재계약을 하든지, 아니면 다른 곳으로 옮겨가야 합니다. 제가 어릴 때는 ‘내 집 마련’은 서민들에게는 ‘꿈’과 같았습니다. 제 기억에 어린 날 이사를 자주 가야 했습니다. ‘쌀가게, 미진이네, 담배 가게, 재웅이네, 쌍둥이네, 할머니 집’까지 6번을 이사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6학년이 될 무렵 비로소 더 이상 이사 가지 않아도 되는 집이 생겼습니다. 어머니는 무척 기뻐하였습니다. 알게 모르게 주인집 아이들의 눈치를 보았던 저도 기분이 좋았습니다. 어릴 때, 매주 ‘주택복권 추첨’이 있었습니다. 1등에 당첨되면 주택을 살 수 있을 만큼의 당첨금이 지급되었습니다.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은 2년 후면 설립 50주년이 됩니다. 지금 성당이 3번째 성당입니다. 첫 번째 성당은 ‘다운타운’에 있었다고 해서 다운타운 성당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독일인 이민 공동체가 세운 성당인데 독일인 이민이 줄면서 한인 공동체가 다운타운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했다고 합니다. 다운타운 성당이 좁고, 주차장이 협소하여서 교우들은 더 넓고 큰 성당을 원했습니다. 다운타운 성당에서 지내면서 교우들은 지금의 자리에 성전 대지를 마련했습니다. 새로운 성전을 세우기 전에 임시로 옮겨간 성당이 있었습니다. 창고 건물이었기에 교우들은 그 성전을 ‘창고 성전’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새로 마련한 땅에 성전을 세우자는 의견이 있었고, 지금의 성전 위치가 달라스 중심에서 서쪽으로 치우쳐 있기에, 이민 오는 분들이 북쪽에 세워지는 새로운 도시로 오기에, 북쪽에 성전을 세우자는 의견이 있었다고 합니다. 몇 번의 진통 끝에 지금, 우리가 있는 이 자리에 아름다운 성전이 세워졌습니다. 교우들의 땀과 눈물로 세워진 성전입니다. 2017년 3월에 새 성전이 완공되었고, 축성식이 있었습니다. 어느덧 8년이 지났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아브람은 하느님께 2가지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는 땅의 축복입니다. 다른 하나는 자식의 축복입니다. 어렵게 자기 집을 마련하는 것도 큰 기쁨이고 축복입니다. 40년 만에 아름다운 성전을 세우고 축성하는 것도 큰 기쁨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 집에서 사는 가족들의 삶입니다. 넓고 큰 집에 살면서도 사랑이 없으면, 믿음이 없으면, 희망이 없으면 그 집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행복한 집이 될 수 없습니다. 6번이나 옮겨 다니면서 이사를 할지라도 그 집에서 사랑이 꽃이 피면, 믿음이 자라나면, 희망이 열매 맺으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행복한 집이 될 수 있습니다. 새로 신축된 아름다운 성당에 있으면서도 공동체에 사랑이 없으면, 믿음이 없으면, 희망이 없으면 그 성당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행복한 성당이 될 수 없습니다. 다운타운에서 힘들게 미사를 봉헌했어도, 창고에서 공동체를 이루었어도 그 성당에서 사랑이 꽃이 피면, 믿음이 자라나면, 희망이 열매 맺으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행복한 성당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변모하셨습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대화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천막 3개를 만들어서 함께 지내자고 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해석을 잘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변모한 것은 구약의 율법과 예언서에 기록된 대로 수난을 통해서만 영광스러운 부활이 있음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난과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였고, 그런 일은 없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베드로를 꾸짖으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 종교는 삶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종교는 삶의 길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삶을 해석하고, 삶의 길을 충실하게 따라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왔으니, 하느님께로 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하느님께 가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오늘 제2독서는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다 함께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여러분이 우리를 본보기로 삼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다른 이들도 눈여겨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키실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아름다운 성전과 공동체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성전과 공동체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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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6. 사순 제2주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우리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데 가장 큰 힘이 되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어서 우리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열심히 일하면, 내 가족이 행복하겠지? 내가 열심히 기도하면 하느님께서 나와 우리 가족을 돌보아 주시겠지? 내 가족이 나를 사랑하니까! 나는 그것을 믿으니까, 나도 최선을 다해 살아갑니다.
저는 이곳 갑곶 성지에서 살아갑니다. 저는 제가 이 성당에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가 믿지 못한다면 누가 그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해 살겠습니까? 남편이, 아내가, 자식이 서로 믿지 못한다면 한집에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것이 가족이겠습니까?
‘믿음’은 단순한 마음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허황된 단어도 아닙니다. ‘믿음’ 그것은 힘입니다. 나를 살게 하는 힘입니다.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게 하는 힘입니다. 다시 일어나게 하는 힘이고, 다시 웃게 하는 힘입니다.
왜 복음에서 하느님께서는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라고 하셨을까요? 이 말이 우리에게 그리고 주님께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주님은 힘들 때마다 무엇으로 일어서셨을까요? 십자가의 길을 가시며 3번 넘어지셨다고 하는데 그때마다 무슨 힘으로 다시 걸으셨겠습니까? 믿음입니다. ‘내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믿음, 그분이 나를 믿고 있다는 믿음.’ 그 믿음이 주님을 십자가에 오를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주님께서 평생을 사시며 말씀하신 것은 이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우리가 다 아는 단순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믿고, 그렇게 살아라.’ 하는 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내가 하늘나라에서 환영받으리라는 것을 믿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십시오. 하루에 열 번, 아니 단 한 번이라도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십시오. 그러면 알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얼마나 행복한 마음인 것인지,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보다 더 행복하고, 나도 모르게 내 얼굴에 미소가 생긴다는 것을 말입니다.
⭐바지락 국수
겨울철에는 늘 뜨끈한 국물이 생각납니다.
특히 시원한 국물의 국수는 제가 좋아하는 메뉴입니다.
칼국수도 좋지만, 오늘은 집에 늘 구비하고 있는 소면과 바지락으로 시원한 ‘바지락 국수’를 만들어봅니다.
바지락은 반나절 이상 해감합니다. 다른 재료들…. 그러니까 양파와 애호박, 당근, 청양고추 정도를, 채를 썰어 준비해 주세요.
육수를 만들어야겠지요. 다시마, 북어 머리, 다시 멸치, 새우 가루나 새우젓. 물이 끓고 5분 후 다시마는 건져주시고요. 20분 후 다른 것들도 건져내 주세요. 10분 후쯤 바지락을 함께 넣어 끓여주세요.
그래야…. 국물이 끝내줍니다.
육수에 국간장으로 간을 해 주시고요. 국수를 삶습니다. 잘 익혀진 국수는 물에 씻어주세요. 녹말가루가 씻기도록….
끓고 있는 육수에 면을 넣고 채 썰어놓은 각종 채소를 넣어 한소끔 끓여주세요.
이제 즐겨보세요. 후후 불며 후루룩후루룩….
참~ 양념장을 만드셔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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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6. 사순 제2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변모의 여정
“파스카의 주님과 늘 함께 하는 삶”
"주님, 제가 당신 얼굴을 찾고 있나이다.
당신 얼굴 제게서 감추지 마소서."(시편27,9ㄱㄴ)
사순시기 제1주일은 언제나 주님께서 광야에서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신 일화가 나오고, 제2주일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신비 사건이 소개됩니다. 수평의 광야에서 악마의 유혹에 이어 수직의 산상에서 주님의 거룩한 변모 신비 체험입니다. 산은 언제나 주님을 만나는 거룩한 곳이었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변모 사건에 앞서 바로 당신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 번째 예고와 더불어 당신을 어떻게 따를 것인가에 대한 답을 주시고, 주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최측근 제자들에게 당신의 거룩한 변모를 체험토록 하시니 참 놀랍고 고마운 선물입니다.
주님의 첫 번째 수난과 부활 예고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 나야 한다.”
이어 당신을 어떻게 따를 것인지 확실한 지침을 주십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주님을 따르는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타당한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나를 따라야 한다.”
바로 이런 경직된 상황에 이어 주님은 다소 긴장되었을 제자들에게 당신의 거룩한 변모 사건을 체험토록 하십니다. 이 말씀이 있은 후 여드레쯤 되어 일어난 주님의 거룩한 변모 신비 사건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사순시기는 물론 삶의 여정에 참 좋은 세가지 가르침을 배웁니다.
첫째, “기도하라!”
기도가 답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기도입니다. 오늘의 주님의 변모사건을 가능하게 한 것도 기도였습니다. 사순시기 어느때 보다도 기도와 회개의 시기입니다. 역사는 반복됩니다. 바오로가 개탄하는 세인들의 타락한 삶이 더욱 우리의 기도를 부추깁니다.
“내가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데,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끝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 자기네 수치를 영광으로 삼으며 자기네 수치를 영광으로 삼으며 세상 것만 생각합니다.”
기도하지 않을 때 이런 세속적 육적 삶이 뒤따르기 마련입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함께 가는 끊임없는 회개의 삶입니다. 복음 첫 대목부터 ‘기도’란 말마디가 나오고 기도의 결과 주님의 변모 신비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다.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
바로 기도와 더불어 발생한 주님의 변모 사건이요 여기서 등장한 구약을 대표하는 모세와 엘리야의 등장입니다. 영광에 싸여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해줍니다. 깊은 기도중에 시공을 초월하여 두분의 자문을 받으며 친교를 나누니 예수님의 기도가 얼마나 깊은 지 깨닫습니다. 예수님뿐 아니라 오늘 제1독서 창세기의 아브람 역시 주님을 만나 축복말씀을 들었으니 이 또한 깊은 기도중에 일어난 신비한 사건입니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너의 후손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기도중 이런 신비축복체험은 아브람의 ‘믿음의 여정’에 샘솟는 활력의 원천이 되었을 것입니다.
둘째, “집착하지 말라!”
주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중 베드로와 그 동료들은 잠에 빠졌다가 깨어나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그분과 함께 서 있는 모세와 엘리야를 보는 순간 베드로는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베드로의 호의였을 수도 있지만 이는 분명 성급한 이기적 집착이었습니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릅니다. 은연중 본색이 드러난 것입니다. 이런 신비체험은 독점하여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잠정적 삶의 여정에 도움이 될 뿐입니다. 또 여기는 궁극의 머물 안식처나 정주처도 아니고 삶의 제자리도 아닙니다. 베드로가 정말 제정신이 아닐 정도로 흥분했음이 분명합니다. 십자가의 도상중에 있는 순례자의 삶임을 잊은 것입니다.
셋째, “말씀에 순종하라!”
바로 이때 베드로의 집착을 교정하는 하느님의 기민한 개입이 뒤따릅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는중 구름이 일어 그들을 덮을 때, 구름 속에서 들려오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이 또한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이제 그만 제자리로 내려 가 다시 십자가의 길을, 파스카의 삶을 시작하라는 말씀입니다. 말씀은 내 발의 등불이요 나를 비추는 빛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주님의 현존이요 빛이자 생명이요 영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습니다. 사순시기 광야여정 우리가 믿고 순종하며 따를 것은 주님의 말씀뿐입니다.
주님의 세 제자들은 이 주님의 거룩한 변모체험은 물론 주님의 이 말씀을 평생 잊지 못했을 것이며 파스카의 여정중에 지칠줄 모르는 삶의 원동력이 됐을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의 영광을 앞당겨 체험한 복된 제자들이요 이제 예전의 세 제자들이 아닙니다. 다음 시편 화답송은 그대로 세 제자는 물론 우리의 고백처럼 생각됩니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
주님의 거룩한 신비스러운 변모를 체험한 이 세 제자들 바오로의 다음 고백에 이심전심 공감했을 것입니다. 바오로의 고백이 신선한 감동과 더불어 주님께 궁극의 희망을 두고 용기백배하여 우리 모두 주님과 함께 ‘늘 새로운 시작’의 파스카의 삶을 살게 합니다.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구세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키실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흡사 오늘 주일이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처럼 생각됩니다. 매일이 주님의 변모축일입니다. 주님의 변모는 우리의 변모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를 통해 끊임없이 주님의 변모를 체험하면서, 주님의 성체를 모시면서, 주님의 몸으로 변모되어가는 ‘변모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들입니다. 바오로의 말씀을 제 말씀으로 삼아 여러분 모두를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제가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형제 여러분,
나의 기쁨이며 화관인 여러분,
이렇게 주님 안에 굳건히 서 있으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필리4,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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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6. 사순 제2주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과 함께>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35)
살리시는 당신을 따라
살고파 나선 길 위에서
살리시기 위해서
반드시 죽으셔야 한다는
받아들일 수 없고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당신의 말씀에
코앞에 닥친
당신의 죽음보다
당신과 함께 한다면
반드시 맞닥뜨려야하는
아직은 뿌연 나의 죽음이
오히려 더욱 쓰라리게
가슴을 파고들어
살려면 떠나야 하고
따르면 죽어야 하는
참담한 갈림길에서
느닷없이 곁에 계신
빛나는 당신을
살아있는 당신을
영광스러운 당신을
어느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고
악착같이 움켜쥐어
당신과 더불어
빛나는 나를
살아있는 나를
영광스러운 나를
그려보는 꿈은 이내
온데간데없이 부서지고
끝내 길을 가시려는 당신과
갈지 말지 두려움에 머뭇거리는 내가
날것 그대로 마주한 순간에
생생하게 듣습니다
무른 믿음을 다지는 하느님의 소리를
바랜 희망을 돋우는 하느님의 소리를
식은 사랑을 지피는 하느님의 소리를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당신의 말씀을 듣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듣고 싶지 않아도
당신의 말씀을 듣겠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따를 수 없어도
따르고 싶지 않아도
당신을 오롯이 따르겠습니다
“당신과 함께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당신을 배척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처럼 배척을 받아 죽음을 당하였다가
당신과 함께 사흘 만에 되살아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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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6. 사순 제2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을 사순 제2주일입니다.
오늘 루카 복음은 주님께서 기도를 통하여 영광스럽게 변모하시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주님께서 기도를 통하여 변모된 모습은 사람은 기도하는 데로 변모 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뇌신경계와 면역계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보는 정신신경면역학 분야의 전문가인 캔더스 퍼트는 ‘생각이 사람을 만든다’는 이론을 주장합니다. 이 이론은 신앙의 차원에서 기도 또한 마찬가지로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뒷받침 해줍니다.
우리 몸의 면역계는 뇌신경계와는 관계 없이 방어 역할만 한다는 이론이 과학자들의 세계에서 지배해온 이론이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최근 과학계에서는 뇌에서 분비되는 감정에 관여하는 펩타이드라는 물질의 수용체가 뇌세포뿐 아니라 면역계와 온몸의 장기에도 있을 뿐 아니라 면역계는 펩타이드를 만들며 뇌는 이를 받아들인는 사실을 증명해 냈다고 합니다.
이는 뇌와 몸에서 분비되는 펩타이드의 총합이 우리의 감정을 이루고, 몸과 마음이 물리적으로 분리되지 않음을 뜻합니다. 감정은 1차 느낌이 아니라 신체 작용에 따른 간접적인 2차 느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몸이 사건을 지각하고 그 지각이 우리의 기억과 상상을 거친 후에야 감정이 발생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생각은 그 사람을 만들뿐 아니라 그 사람의 인생 자체를 전반적으로 지배합니다. 그 생각은 그 자체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생각에 따른 어떤 물질을 만들어 냅니다. 예를 들어 희망을 생각하면 뇌에서 희망에 해당하는 신경전달 물질을 만들고, 슬품을 생각하면 뇌에서 슬픔에 해당하는 신경 전달물질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이 지속적으로 원한을 품고 거기에 몰입하면 서서히 몸이 원한으로 물들기 시작합니다. 결국 뇌에서 만들어진 원한의 신경물질은 온몸으로 퍼져 전신을 지배합니다. 하루종일 돈만 생각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돈과 연관하여 생각하는 이치와도 같습니다. 의도적으로 그러는 것이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의 습관으로 물들게 됩니다. 그렇기에 생각에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사람의 모습은 변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기도는 생각의 원천일 뿐만 아니라 잘못 왜곡되고 편협하고 완고한 생각을 정화시키고 올바른 생각으로 인도해 줍니다. 따라서 기도할 때 무슨 기도를 어떻게 하느나에 따라 그 사람의 모습이 됩니다. 루카복음서는 흔히 소외된 이들의 복음서’, ‘성령의 복음서’,‘기도의 복음서’라고 불립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자렛 회당에서 설교하실 때부터 가난한 이’ ,잡혀 간 이들’,눈먼 이’,‘억압받는 이’에게 많은 관심을 보이셨습니다. 이는 주님의 궁극적으로 어떤 모습으로 변모되는지를 보여주는 표지입니다. 바로 하느님의 사랑으로 온전히 변모됨을 의미합니다.
기도가 그렇합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하느님 사랑에 대한 생각이 우리를 지배하게 해야 합니다. 이 사랑이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불의로 인해 억압받고 육체적으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관심을 갖고 다가가는 행동하는 신앙인으로 변모케 합니다. 이렇게 될 때 주님이 하느님께로부터 들은 ‘내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마태 17,5)’로 인정받는 참된 변모체험을 우리 또한 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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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조롱하도록 놓아 두시지 않는다
러시아 점령 전에는 신부였던 나 노르베르트 (Norbert)는 사람들이 나를 박해했었던 곳에서 은거하는 중에 한번은 희귀한 일이 일어났다. 나는 이에 대해 세상에 알리고 싶지는 않다. 왜냐하면 지식인들은 분명 나를 미쳤다고 여길 것이기 때문이다.
이 일은 약 천 오백 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작은 마을에서 일어났다. 이곳 국민학교의 여선생은 철저한 무신론자였다. 그녀의 모든 강의는 “신(神)을 멀리하라”는 기본강령의 축을 맴돌았다. 그녀는 기회있을 때마다 우리의 종교를 멸시하고 우스개거리를 만들며 공공연하게 무시했다. 그녀의 강의계획은 간단했다. 어린 무신론자의 양성에 관한 것이 그것이다. 서른 두 명의 소심한 아이들은 감히 이에 맞서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의 가족들은 믿음이 두터웠고 종교적 의무를 성실하게 이행하고 있었다. 이 곳의 주임신부인 나는 종교 강의를 위해 아이들을 성당으로 모았다. 철의 장막 뒤에서는 어디나 그렇듯이, 헝가리에서도 이러한 강의는 순탄치 못했다. 이런 실정이니 이 불쌍한 어린 양들이 옳은 길을 걷겠는가? 그러나 아이들에게 주의를 기울이자 ! 종종 기이한 카리스마를 통해 뒷받침된 은총이 관여하는 것이다. 기사가 일어날 때도 있는 법이다.
대개는 여선생인 게르트루트(Gertrud) 양이 계속해서 환멸스럽게 주입시키는 말은 이 어린아이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다.
나는 이 아이들이 영성체를 자주 하는데 익숙하게 함으로써, 그들을 정신적으로 무장시키기에 온 힘을 다해 노력했다. 그러나 게르트루트 여선생은 신기하게도 믿기지 않는 예민한 육감을 지니고 있는 듯 했다. 그녀는 항상 누가 영성채에 참여했는지를 찾아내어, 그녀의 표현대로 말하면 이 검은 양들을 본능적인 분노로써 특히 엄하고 표독하게 다루었다. 그녀가 한 두 명의 밀탐꾼으로부터 이를 알아냈을 가능성도 있다.(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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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6. 사순 제2주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예수님과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루카 9,29)
신학생 시절 감명 깊게 읽은 어른 동화책이 있습니다. ‘트리나 포올러스’가 쓴 「꽃들에게 희망을」이란 동화입니다. 그 내용은 애벌레가 나비로 변모하는 과정을 아름답게 표현한 작품입니다. 책의 제목에서 느끼는 것처럼 한 애벌레의 변모로 이 세상의 많은 꽃들에게 희망을 주기 때문입니다. 한 존재의 변모가 다른 모든 존재에게 희망이 된다는 게 놀랍기만 합니다. 그런데 애벌레가 나비로 변모하기 위해서는 애벌레의 상태를 기꺼이 포기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는 게 더 놀랍습니다. 자기의 겉모습이 죽어 없어질 때만이 자기의 참모습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예전 베트남에 살 때 시청한 드라마 「내 딸 서영이」란 드라마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그때부터 ‘이보영’이란 배우를 좋아했습니다. 서영이는 물론 서영이 아버지 그리고 서영이 남편 ‘우재’, 시아버지인 ‘강기범’ 등 여러 사람의 변화에 초점이 있습니다. 변하고 싶어도 변할 수 없는 자기 자신 하지만 변화를 사랑으로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결국 자신의 상처를 치유할 때 변화는 일어난다는 메시지를 표현한 드라마였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아브라함도 하느님과 계약을 맺음으로써 모든 신앙인의 선조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후손과 땅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너의 후손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창15,5), “나는 이집트 강에서 큰 강 곧 유프라테스 강까지 이르는 이 땅을 너의 후손들에게 준다.”(15,18) 그런데 많은 후손을 얻기 위해선 자기의 외아들을 하느님께 바쳐야 했고, 약속한 땅을 얻기 위해서는 고향 칼데아의 우르를 떠나 나그네 삶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더 나아가 아브라함의 생전에는 많은 후손도 없었고, 많은 땅도 없었다는 게 더 놀랍습니다. 눈에 보이는 축복이 없어도 끝까지 믿은 신앙이 모두에게 희망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산에 오르시어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습니다. 거룩한 변모를 하신 것입니다. 아울러 그분은 영광에 싸여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구름이 일더니 그들을 덮었고,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9,35) 하지만 하느님께서 선택한 아들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 자기 목숨마저 바쳤다는 게 놀랍기만 합니다. 더 나아가 제자들이 본 영광된 모습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한 게 더 놀랍습니다. 수난과 죽음을 거쳐야 부활의 희망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변화하려고 할 때는 아픔이 따릅니다. 애벌레의 상태를 기꺼이 포기해야 하는 아픔, 자기의 가장 소중한 아들을 바치고 고향 땅을 떠나야 하는 아픔, 자기의 가장 소중한 목숨마저 바쳐야 하는 아픔이 따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아픔을 싫어하고 베드로처럼 주어진 현실에 안주해 버리고자 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9,33) 이 말은 이곳에 초막 셋을 짓고 그냥 머물러 살자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축복에 머물면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외면하고 영광에 싸여 살자는 겁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는 게 놀랍기만 합니다. 더 나아가 제자들은 “모세와 엘리야가 구름 속으로 들어가자 그만 겁이 났다는 게” 더 놀랍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의 진정한 의미는 수난을 겪은 뒤에야 비로소 그 뜻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룩하게 변화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자기를 포기하는 아픔을 받아들이십시오. 자신의 상처를 놓아버리십시오. 우리도 사도 바오로처럼 십자가의 원수가 아니라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선택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원수로 살면 그 끝이 멸망이지만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선택하면 그 끝이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사랑하는 필리피 교우들에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구세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형제 여러분, 주님 안에 굳건히 서 있으십시오.”(3,20.21)
불가능함이 없으면서도 늘 자기의 능력과 힘을 발휘하지 않으셨던 주님께서 왜 이렇게 느닷없이 영광스러운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 주셨을까요?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을 내다보셨습니다. 제자들의 절망과 방황도 내다보셨습니다. 그때를 대비해서 당신의 천상 모습을 미리 제자들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후에 당신이 수난당하고 십자가에서 죽더라도 좌절하지 말고 일어서라는 것입니다. 오늘의 체험을 떠올리며 의심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당신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모세와 엘리야처럼 생명의 나라에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변모 사건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보여 주시고자 했던 위안과 격려의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변모의 순간은 한순간이었지만, 제자들은 영원을 목격하고 체험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그들은 스승에 대한 믿음이 더 굳건해졌고, 예수님에 대한 신뢰가 더 깊어졌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체험이 없었을까요. 우리에게는 그분의 변모 사건이 없었을까요. 신앙 안에서 낙심하지 말라고 그분께서 개입해 오신 사건은 없었을까요. 이것을 찾아내어 묵상하라는 것이 오늘 복음의 교훈입니다. 사람들은 쉽게 잊어버립니다. 고통과 역경 속에 놓이게 되면 좋았던 순간, 행복했던 것을 쉽게 잊어버립니다.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면서 기적을 체험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수난의 순간이 오자 스승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절망에 빠져버렸습니다. 변모 사건의 기억도 소용없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다시 찾지 않았다면 그들은 어떻게 되었겠는가. 주님께서 다시 찾아가셨기에 제자들은 사도로 바뀔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영세 후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신자가 되기 전에도 그분의 도우심을 받으며 살아왔습니다. 진정한 신자는 이러한 은혜를 잊어버리지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 잊어버리면 감사할 수 없습니다. 잊지 않기에 감사할 수 있고 그래야 신앙은 힘이 됩니다. 누구에게나 주님께서 개입하신 사건은 있기 마련입니다.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십시오. 얼마나 위험하고 힘들었던 순간들이 많았던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사건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마무리되었습니까. 우연인 듯 느껴져도 누군가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역경을 만나 기도했는데 역경이 끝난 뒤에는 우연으로 여긴다면 얼마나 어이없는 생각입니까. 너무 쉽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게 바로 현실적인 유혹입니다. 신앙인에게는 반드시 은혜로운 기억이 있습니다. 고통으로 힘들었지만, 지난 다음 은혜와 감사로 충만하고 마감된 사건들 말입니다. 주님의 개입 없이 가능했었을까요. 신앙 안에서 힘을 내라고, 희망으로 견디어 내라고 주님은 변모하셨고, 이 놀라운 체험으로 그분께서 가신 십자가를 통해서 부활의 영광으로 나아오도록 베푸신 은총이 예수님의 변모 사건입니다. 은총은 예고 없이 찾아옵니다.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옵니다. 평소의 작은 기도가, 작은 선행이 결정적 순간에 은총이 다가오게 하는 겁니다. 그분께서 눈길 한 번만 주셔도 우리의 삶은 놀랍게도 은총으로 넘쳐납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변모 사건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미리 앞당겨 보여 준 사랑의 계시이며 은총의 사건이었습니다. 사순절을 지내면서 가끔씩 부활을 생각해야 합니다. 무작정 참고 인내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을 위해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어떤 부분이 부활해야 할지 생각하며 사순절을 보내도록 합시다. “주님, 우리의 마음을 바꿔주시어 현재에 만족하여 안주하지 않,고 당신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를 수 있도록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과정처럼 저희 또한 기꺼이 변화의 고통을 받아들여 당신 모습 닮게 하여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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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6. 사순 제2주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흉물 같은 모습으로 하느님을 뵐 수야 없지 않겠는가?
강만연 [fisherpeter] 2025-03-15 ㅣNo.180769
오늘 주일 복음을 묵상하면서 원래는 그렇게 하지 않았는데 언제부터 복음을 묵상하면서 한 부분만 집중해서 묵상해 그게 전체적으로 묵상이 될 수 있는 포인트를 찾겠다는 방식으로 묵상하는 방법을 변경했습니다. 이런 관점을 이해하시면 좀 더 이해가 잘 되실 것 같습니다. 오늘 주일복음 서두에 보면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얼굴과 의복의 모습에 변화가 있다고 루카복음사가는 전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두 가지의 경우로 나누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예수님은 기도하셨기 때문에 변화가 있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실제는 아닐 것입니다. 다만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에게 보여주시는 방식을 통해 우리에게 시사하시는 내용이 있을 것입니다.
원론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의 모습은 기도 이전과 이후로 서로 비교를 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입니다. 하느님의 속성 자체가 영원에서 영원까지 변화가 없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근본은 변화가 없겠지만 하느님의 신적인 권능으로 일시적이나마 잠시 변화가 있도록 그 모습을 보여주신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기도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잠시 불교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불교에서 흔히 말하는 고승 이것도 기도쪽으로 고승을 말합니다. 이런 고승은 그 제자들이 기도 수행 정진을 잘 하는지 못 하는지 뭘 보고 알 수 있을까요? 선방에 틀어박혀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시간에 비례해서 기도를 열심히 하는 승려인지 알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그런 걸로 판단한다면 그 사람은 고승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승이라는 말은 없지만 언어유희를 하자면 하승입니다. 모름지기 고승이라면 그 행자나 수행자의 얼굴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얼굴을 보고도 얼마나 기도 수행을 정진했는가 하는 걸 판단할 수 있을 정도이면 고승이라고 말해도 가히 지나친 판단은 아닐 것입니다. 궁금하시죠? 이건 말로 참 표현하기 힘든 부분이긴 합니다.
단적인 표현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표현처럼 내공이라는 게 있습니다. 바로 이런 게 나옵니다. 이걸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보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원리는 마치 유유상종과 같은 것입니다. 공학적인 설명으로는 주파수 이론과 같습니다. 라디오 방송국을 예를 들어 쉽게 전해드리겠습니다. 수행자의 주파수가 방송국에서 송출하는 주파수입니다. 고승은 그 주파수가 어디인지 라디오로 튜닝(주파수를 맞추는 것)을 합니다. 딱 맞아떨어진 곳에서 소리가 선명하게 들리게 돼 있습니다. 그 지점이 바로 수행자의 주파수입니다. 공학적인 설명으로는 이곳에서 공명이 최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가장 선명한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주파수라는 것은 물리학적으로 말하면 에너지와 같은 것입니다. 원래 전자렌지를 발명한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전자공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수강하는 전자기학이라든지 아니면 마이크로파 공학 수업을 듣게 되면 듣는 소리입니다. 저는 우연히 안테나 관련 자료를 언젠가 번역하다가 우연히 알게 됐습니다. 위성 안테나를 파라볼라 안테나라고 합니다. 이 안테나는 마이크로파 주파수 영역의 주파수 대역을 사용합니다. 그 안테나 근처를 지나가다가 마치 인간구이가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연히 전자렌지를 발명하게 됐다는 이야기입니다. 지나친 이야기이지만 내용은 사실입니다. 저는 주파수라는 게 에너지를 포함하고 있다는 걸 이해시켜드리는 의미에서 이 예를 든 것입니다. 이젠 다시 원위치로 돌아가겠습니다.
선방에서 수행하는 사람들처럼 그럼 어떻게 해서 기도를 하면 그런 에너지 같은 게 나올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불교도 우리와는 교리상 근본적인 면에서 상이해서 그렇지 실제로 보면 공통적인 면이 많이 있습니다. 제가 깊은 지식이 없지만 제가 아는 선에서만 이야기 드리겠습니다. 스님들이 기도를 한다고 했을 때 그 기도는 다양한 것이지만 그래도 핵심은 부처를 보며 내 안에 다른 부처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때 부처는 실제 우리가 절에 가면 있는 불상 그 부처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부처라는 어떤 형상을 보는 게 아니라 그 부처 속에 있는 불성을 보는 것입니다. 그 불성을 보며 그 불성을 내 마음에 담는 것이 하나의 수행인 것입니다. 그게 다 담겨졌을 때 오로지 자신이 작은 또 하나의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로 말할 것 같으면 하느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우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말씀처럼 그와 같은 원리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불성이 우리로 말할 것 같으면 마치 하느님의 자비와 같은 속성이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게 이해가 된 상태에서 오늘 복음으로 다시 돌아가보겠습니다. 이런 원리로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 정말 다양한 내용을 묵상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기도하면 얼굴에 변화가 옵니다. 미추의 그런 개념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기도는 형식적인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는 기도손을 하고 촛불을 켜고 한다든지 아니면 성당에서 한다든지 하는 그런 장소도 중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의 마음이 하느님을 향하고 있는지 그게 중요한 것입니다. 성당에 있어도 마음은 콩밭에 있으면 말짱 도루묵입니다.
마음이 하느님을 향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 것 같은지 궁금하시죠. 우리가 생각하긴 하느님이라는 어떤 보이지 않는 실체를 의식적으로 생각을 해야만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부족하지만 하느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떠올리지 않아도 하느님을 의식하며 사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일단 그런 사람은 자세히 보면 얼굴에 악한 기운이 없습니다. 예전에는 설령 악한 기운이 흘렀던 얼굴이라고 해도 그렇게 살면 얼굴이 변화가 됩니다. 저는 과학적으로는 설명을 할 수는 없지만 이런 걸 실제 눈으로 많이 확인을 했습니다. 종교를 불문하고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은 일단 눈이 다릅니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하긴 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눈은 절대 못 속입니다.
설령 성형수술로 눈매를 수정한다고 해도 눈에서 나오는 영혼의 기는 절대 못 속입니다. 대표적인 게 눈이지만 눈뿐만 아니라 얼굴은 정말 관상이라고 해도 절대 지나친 말은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관상은 미추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쉽게 표현해서 생긴 것은 못생겼는데 부티가 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얼굴은 미인 미남 같은데 표독한 얼굴이 있습니다. 이건 자기의 삶이 얼굴에 그대로 반영된 것입니다. 이제 마무리하겠습니다.
원론적인 이야기로 환원하겠습니다. 성당에만 간다고 신자가 아닙니다. 하느님을 믿으면 처음부터는 안 되겠지만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시나브로 변화가 되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어떻게 했으면 어떻게 신앙인의 모습의 얼굴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표독한 얼굴로 변화가 된 사람은 뭔가 문제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성당에는 아기처럼 얼굴이 순수하게 변화를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렇게 변한 얼굴이 있습니다. 문제는 딱 하나입니다. 하느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한 사람과 그냥 지멋대로 산 사람과의 차이입니다. 마지막에 하느님을 만났을 때 이런 사람은 되지 않아야 하지 않을까요? 하느님도 쳐다보고 싶지 않은 흉물 같은 모습의 얼굴은 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그 흉물은 달리 흉물이 아니라 인간 본성대로만 산 사람에게만 있는 전형적인 모습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지금부터서라도 항상 하느님을 의식하며 살려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말이 필요없을 것 같습니다. 하느님은 나중에 저희 영혼의 얼굴을 보게 되면 단번에 한눈에 파악이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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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강만연 (fisherpeter) 대댓글2025-03-15
찬미예수님! 참고로 전자렌지의 원리는 고주파를 이용해 물체 속에 있는 물분자를 진동해 그때 진동으로 생긴 열이 음식물을 데우는 역할을 합니다.
Mark Choi (mychoi1960) 대댓글2025-03-15
찬미예수님!강만연님을 위해 기도 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질문이 있어서 답글로 문의드립니다. 내용을보고 궁금중이 있어서요 저는 정치가는 전혀 아닌데 한국에 관심이 있어서, 요즘 사태를 유튜브로 보면서...
질문1. 현재 윤xx 대통령은 얼굴을 보면 내가보는 관점은 "살기"가 있어요?! 왜 내가 그렇게보는지 모르겠어요. 글구, 성경을 감옥소에 읽고 나왔다는데 무순 구절을 일고 나왔는지 얼굴이 똑같아요?! 질문2 근데 이×× 지도자도 거의 비슷해요. 너무 궁금해서 드렸는데요 제가 보는눈이 삐엇나요? 다른 정치가도 많은데, 일단2명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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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형제님, 난감한 질문이라 자려고 할 때 보고 고민하다가 글을 작성합니다.
강만연 [fisherpeter] 250316. 01:28 ㅣNo.180773
먼저 질문 순서에 따라 답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닉네임이 눈에 익은 닉네임입니다. 아무튼 어려운 질문이고 또 난감하긴 하지만 성의껏 제 개인적인 소신을 전해드리겠습니다. 성경을 언급하셨는데요 그 성경을 조금 읽었다고 한다고 해서 얼굴이 변할 수 있을 것 같은가요? 만약 그렇게 따진다면 성당 10년 정도 다닌 사람이면 거의 완전 천사 수준의 얼굴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 좋은 성경 말씀과 함께 복음뿐만 아니라 강론도 얼마나 들었겠습니까? 그래도 어떤 경우는 신앙생활을 했는데도 더 악한 얼굴로 변한 사람도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참 불행합니다. 제가 아는 어떤 자매님입니다. 물론 연세가 많기 때문에 인간적인 노화로 인해 얼굴이 좀 표현이 민망하지만 쭈굴쭈굴한 얼굴입니다. 이건 사람이 나이가 들면 누구나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얼굴 모습은 그렇게 변했지만 그분의 영혼을 보면 아주 맑습니다. 사람 얼굴이 하루아침에 그렇게 변할 수가 없습니다. 그다음으로는 두 정치인을 언급했습니다. 한 사람은 현직 대통령이고요 한 사람은 야당 대표입니다. 저는 이 질문에 대해 중립적인 자세에서 원론적인 답변을 드리는 걸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정치적인 노선을 띄고 싶지 않습니다. 사람은 다 자기만의 정치적인 색깔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건 서로 존중해줘야 합니다. 존중하고 싶지 않은 것도 있지만 그래야 민주주의가 유지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이와 관련해서 지금 시국과 연관된 질문이라 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질문을 받기 전에 물음이 끊겼더라구요. 그래서 작성 중인 줄 알고 잠시 폰을 보다가 황창연 신부님의 시국 강연 유튜브 기사를 봤습니다. 짧게만 보고 다시 굿뉴스 들어와 형제님 질문이 완성된 것을 보고 올리는 것입니다. 16편 정도 했다고 하셨는데 저는 아직 한 편도 보질 못했습니다. 요즘 보면 우리나라 일반시민도 그렇고 정치인 특히 법조인 출신이라는 사람들도 한심한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단적인 예 하나만 들겠습니다. 명색이 판사 출신이라고 하는 법조인들조차도 요즘 대통령 탄핵 사건과 관련해서 기각과 인용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건 좌파 우파를 떠나서 무식한 소리입니다. 소위 말해서 지식인이라는 사람들도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요 깊이 들어가면 정말 무식한 행동입니다. 찬반 시위처럼 어떤 집단의 의사표시는 할 수 있다고 해도 그 의사표시대로 관철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명명백백한 월권행위입니다. 만약에 이렇게 해서 판결이 된다면 법이라는 사법기관이 존재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정상적인 민주주의라면 사법기관의 판결에 어떠한 결과가 나온다고 해도 양쪽 어떤 진영이든지 그 결과에 깨끗하게 승복해야 합니다.
물론 이번에 어떤 판사의 판결로 윤 대통령의 구속이 취소된 것은 이미 검찰 내부에서도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법 관련 공부를 한 사람이라면 형사소송법이라는 과목을 시험봅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이 법에서는 소송법의 구속기간이라든지 산입문제 아니면 형기만료 계산하는 문제가 나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과거 사법시험에서 이 문제가 나와 이 한 문제로 인해 떨어져 자기 인생을 다른 길로 전향을 했다고 한다면 이 사람이 국가를 상대로 해서 행정소송을 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하는 그런 생각도 저는 해봤습니다. 이 문제는 법리적인 문제라기보다는 검찰과 법원의 미묘한 갈등이 빚어낸 사각지대 때문에 생긴 결론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세월이 지나면 분명히 비판을 받을 소지가 있는 대목입니다.
왜 이런 내용을 언급하느냐 하면 이런 난감한 질문에 대해 어떤 답변을 드리는가 하는 것도 민감하기 때문에 이런 점을 인용하면서 최대한 중립적인 위치에서 언급한다는 걸 이해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질문에 보면 살기라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이건 관상가들이 봐서 아는 게 아니고요 일반 사람들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관상가들처럼 그런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고 알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살기라는 것은 눈에서 나옵니다. 눈에서 살기가 나온다고 할 때 그때 얼굴은 독기를 띄게 됩니다. 이 살기는 순간적일 수도 있고요 아니면 계속 살기를 띄는 사람이 있습니다. 순간적인 살기는 범죄를 저질러도 우발적인 사건으로 일어나는 것처럼 그런 경우일 때입니다. 그렇지 않고서 살기를 띄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건 백발백중 평소에 계속 살기를 품어왔기 때문에 생기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정도의 차이이지만 다 살기를 어느 정도는 가지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한데요 그건 지면에 설명하긴 좀 무리가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윤 대통령에 대해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비교를 한번 해보실 수 있을 겁니다. 검사를 오랜 세월 동안 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그런 정도는 어느 정도 직업적인 것과도 연관이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예전에 박 대통령 관련 특검 검사로 발탁됐을 때랑 또 검찰총장 임명된 후에 청와대에 김건희 여사(공적인 자리인 만큼 예우 차원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랑 함께 청와대에 초청됐을 때 그때 모습과 지금의 모습을 비교하면 굳이 관상을 따지지 않는다고 해도 완전 딴판의 얼굴입니다. 일단 인상에서부터 확연한 차이가 있습니다. 굳이 살기가 있다고 하는 표현을 사용하셔서 말씀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살기라는 것은 순한 사람은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일반적으로 오판입니다. 이런 것은 범죄심리학 관련 책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젠 야당 대표로 넘어가 이야기하겠습니다. 사실 저는 관상 전문가는 아니지만 이 대표는 눈이 상대적으로 일반적인 보통의 사람과 비교를 해도 작습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눈 크기가 그래서 그런 게 아니고 얼굴 자체에 살기를 느낄 수 있는 그런 얼굴은 아닙니다. 다만 이건 있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순한 사람이라고 해도 이건 이 대표를 말하는 게 아니고 권력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남녀 불문입니다. 순한 사람도 악한 성향으로 몰고 갈 수 있는 게 권력입니다. 이건 역사가 증명합니다. 역사에서 보면 문정왕후와 선덕여왕, 그리고 민비에 관한 역사적인 자료를 보면 이런 게 실제 가능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질문하신 형제님도 이런 관점으로 이해를 하시는 게 더 좋을 듯합니다. 그렇다고 모든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다 이렇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제가 두 가지 사례만 언급하고 답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노무현 대통령 유고시에 제가 봉화에서 처음부터 봉사를 했습니다. 발인까지 그곳에서 있었지만 어떻게 공교롭게도 정치인 한 사람만 우연히 마을회관 옆에서 봤습니다. 그분은 어려서부터 자주 방송에서 봤지만 실제로 본 느낌은 좀 무서워보였습니다. 또 하나는 세월호 사건 때 해양수산부 장관을 마산에 그린웨이 산책길이 있는데 우연히 세월호 사건이 수습되고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에 산책길에서 마주쳐 실제 한 번 뵌 적이 있었습니다. 아! 한 번 더 뵌 적이 있습니다. 선거를 앞두고 본당에 인사를 하러 오신 적이 있어서 미사 때 한 번 뵌 적이 있는데 아무튼 그분은 정치인치고는 순한 편에 속한 얼굴에 해당되는 것 같습니다.
사람은 그런 것 같습니다. 제가 보면 정치 세계로 들어가면 사람이 이상한 얼굴로 바뀌는 사람을 여럿 봤습니다. m 방송사에 과거 앵커와 아나운서를 했던 사람인데 개인적으로 좋아했던 두 분인데 한 분은 남자 한 분은 여자분입니다. 참고로 요즘 언급되는 방송인 앵커 여자분은 아닙니다. 정치에 몸을 담고 나서는 완전 예전의 그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사람은 그런 것 같습니다. 환경적인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는 게 바로 이런 사실이 증명합니다. 형제님이 마지막에 언급하신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은 이 내용을 잘 이해하시면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맨투맨으로 만나게 된다면 확실하게 이해가 될 수 있게 설명을 드릴 수 있지만 이런 공적인 자리에서는 원론적인 답변을 통해 드릴 수 있는 한계가 있다는 걸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언급을 해드리자면 얼굴은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았는가 하는 최종적인 성적표라는 사실은 확실한 진리입니다. 사실 속세에 '생긴대로 노네'라는 말이 있지만 이 말은 진리입니다. 실제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노는대로 생긴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한 말이 될 수 있습니다. 잘 묵상해보면 진리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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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Re: 형제님, 난감한 질문이라 자려고 할 때 보고 고민하다가 글을 작성합니다.
Mark Choi [mychoi1960] 250316. 01:49 ㅣNo.180775
죄송합니다. 여긴 주말 아침이라서 답글올렸습니다 나중에 주셔서도 좋은데 감사합니다 전 여기살아서 한국을 사실 잘모릅니다. 어쨋든 감사합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유튜브로 가끔 잠깐 잠깐 봅니다
Comments
강만연 (fisherpeter) 대댓글01:55
찬미예수님! Mark Choi님을 위해 기도 드립니다. 아, 아닙니다. 형제님. 외국에 계시는 모양이네요. 괜찮습니다. 그래도 흥미로운 질문 감사합니다. 다른 건 몰라도 성경 관련 그 내용은 재미 있는 질문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잠자는 게 뭐 대수겠습니까? 몇 시간 뒤에 새벽미사나 갈까 생각합니다. 아무튼 감사합니다. 여기 한국은 주일 새벽 1시 55분입니다. 감사합니다. 마르코 형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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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6. 사순 제2주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이 사순에 우리의 영광된 변모도 일어나길 /
박윤식 [big-llight] 2025-03-15 ㅣNo.180768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 그리고는 모세와 엘리야두 사람이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영광에 싸여 나타난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들을 나누고 계셨다. 그러자 구름이 일더니 그들을 덮었다. 그들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자 제자들은 그만 겁이 났다. 이어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울렸다. 이 소리가 울린 뒤에는 예수님만 보였다.’
수난과 부활에 관한 첫 번째 예고 후,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 형제만 데리고 산에 오르시어 변화하신다. 그분 모습은 부활 이후 영광스러움 그 자체였다. 이때 구름 속에서 예수님이 바로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하느님 말씀을 들음으로써, 그들은 예수님 신분을 확인한다. 그렇지만 그들은 겁에 막 질려 있었다. 그분 변모가 분명 두렵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었는데도.
사실 예수님의 이 변모는 당신의 부활과 승천을 통한 영광의 순간을 미리 보여 주는 사건이다. 그렇지만 이 깜찍한 쇼는 진정한 부활은 어쩌면 십자가 수난과 죽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가르치고자 한 것일 수도. 이제 얼마 뒤 그들은 십자가 위에서의 스승의 끔찍한 고통에 슬픔을 느낄 게다. 스승님께서 가신 그 십자가 길을 걸어야 할 자신의 운명에 고민하리라.
그리하여 분명 그때에 나약한 그들은 스승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 그 십자가의 길에서 좌절감을 느끼고, 중도에 포기할 유혹에도 빠질 게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이 변모를 미리 보임으로써, 그들이 믿음과 희망으로 자신들의 십자가를 끝까지 지도록 힘을 주시려는 것이었다. 예수님의 눈부신 영광스러운 참모습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울 때, 그 너머 부활의 영광이 있음을 잠시 보여 주신 거다. 이는 당신 사랑이 얼마나 지극한지를 느낄 수 있다.
우리에게도 그러한 체험은 지나온 길 곳곳에 수도 없이 널려있다. 세례 후에도 우리에게 포기하지 말라고, 그분께서 개입하신 영광의 사건들이 무수히 깔렸다. 그렇게 기억하라는 것이 그분께서 세 제자에게 보여준 변모일 게다. 우리들도 돌아보면 얼마나 아슬아슬한 게 많았는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게 분명히 있다. 지나온 자취에 스민 게 우연히 마무리된 게 아니다. 다 은총의 개입이 있었다. 예수님의 이 거룩한 변모는 우리에게 기다림의 삶을 안겨다 주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에게만 보인 거룩한 변모는 제자들이 믿음을 잃지 않게 하시려고 미래의 영광을 잠시 보이신 거다. 이런 그분의 은총은 예고 없이 왔고 또 올 게다. 필요하다 여기시면 언제든지 오셔서 주시리라. 이렇게 세 제자는 엄청난 체험을 한다. 이는 그분께서 율법과 예언서에 약속된 바로 그 메시아이심을 증명하는 것일 게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조상들과 맺으신 하느님 뜻을 거스르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의심과 불안은 이제 사라졌다.
그들에게는 다른 더 이상의 증거와 표징은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처럼 올 사순 시기에 우리에게도 이런 은총의 개입은 분명 있을 게다. 그리하여 우리도 언젠가 그 모습 뵈올 때까지 제자들이 본 그 빛나는 그분 참모습을 그리워하며 회개해야만 하리라.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예수님의 그 뜻을 먼저 헤아려야만, 그분의 영광된 변모의 그 은총이 우리에게 꼭 일어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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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6. 사순 제2주일. 한창현 모세 신부님.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시어 기도하시는데,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루카 9,31)을 말합니다.
이 떠나심은 ‘영광’을 위한 ‘넘어가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고난을 겪고, 예루살렘의 최고 법정 산헤드린의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예고하셨습니다(9,22 참조).
영광 가운데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십자가 죽음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실 것임을 분명히 합니다.
잠에서 깨어난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 모세와 엘리야가 영광에 싸여 있는 것을 보고는 초막 셋을 지어 드리겠다고 합니다.
베드로는 그들이 영광 가운데에 있는 것을 보았지만,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다만 자신이 본 그 영광이 계속되기만을 바랐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 사명의 깊이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함께 있었던 요한과 야고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 제자들을 끝까지 포기하시지 않고, 그들을 위하여 수난하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제자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두고 떠났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포기하시지 않은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 사명의 신비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포기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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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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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6. 사순 제2주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오늘의 이야기는
공관복음서 세 권이 모두 전합니다.
그리고 세 복음서에는
첫 번째 수난 예고에 이어
오늘의 이야기가 나타납니다.
며칠 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당신을 따라오려면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라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을 따르는 방법을 말씀하시면서도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올 것,
즉 부활의 영광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실제로 그 부활의 영광을
제자들 앞에서 보여주십니다.
그 장면에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모세와 엘리야입니다.
예수님께서 화려하게 변하셨을 때
모세와 엘리야도 영광에 싸여 나타납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했다고
복음은 전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신다는 것은
물론 수난과 죽음을 이야기하겠지만
부활하시어 아버지 오른편으로 떠나시는 승천도
함께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공관복음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함께 나올 때
모세는 모세5경, 그리고 엘리야는 예언서를
대표하는 사람으로 보아
구약 성경 전체를 가리킨다고 해석합니다.
즉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은
단순히 예수님 혼자 생각하시고
혼자 예고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 예고는 구약 성경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며칠 전 예수님께서 예고하신 내용이
사실임을 확인해 주기 위해서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난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의 수난은 세상의 죄를 없애기 위한 희생이며
세상의 구원을 위해 구세주를 보내주시겠다는
약속이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아들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구원하십니다.
그 시간이 이제 다가왔음을
모세와 엘리야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구원을 약속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신 것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는
이 두 가지가 정말 이루어질 것이라고
이제 곧 이루어질 것이라고 보증합니다.
예수님의 변모를 보면서
하느님의 약속을 다시 떠올려 봅니다.
나약한 우리가 저지르는 잘못에도
우리를 위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겠다는
하느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용서에 대한 희망을 갖고
죄가 주는 어두움보다는
사랑이 주는 기쁨으로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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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6. 사순 제2주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 35)
잃어버린
하느님의
얼굴을 다시
만나는 은총의
주일입니다.
짐승의 얼굴이
아니라
사람의 얼굴로
살아야 하는
우리들
시간입니다.
하느님께서
빚으신
얼굴을
우리의
교만과 욕심으로
우리는
못 지키며
살고 있습니다.
삶이 빛나야
우리의
얼굴 또한
빛날 수 있음을
절실히
깨닫습니다.
우리를
따뜻하게
바라보시는
하느님의
마음이
사랑으로
느껴집니다.
얼굴이
도달하고자
하는 것은
진실한 사랑이며
마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진실로
사랑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
당신의 얼굴을
보여주십니다.
이 사순시기는
우리가
사람의 얼굴을
다시 찾고
사람의 얼굴로
살아야 할
시간입니다.
하느님의
선택하심을
믿습니다.
생각과
마음이 달라져야
얼굴도 달라집니다.
기도 없이
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버려야 할
교만이며
거짓입니다.
하느님과
함께할 때
더욱 빛납니다.
우리의 얼굴이
달라져야
우리의 길도
달라집니다.
우리의 마음을
바꾸는
변모의 주일
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하느님을
닮은 모습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아야 할
우리들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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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6. 사순 제2주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귀찮더라도 또다시 산 밑으로 내려가야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단 가운데 핵심급이라고 할수 있는 제자 세명, 베드로, 야고보, 요한만을 데리고 타볼산으로 올라가십니다.
정상에 도달한 제자들은 잠시후 기상천외한 광경을 목격하게 됩니다.
스승님의 얼굴과 분위기가 평소와는 완전 다른 모습, 거룩하고 태양처럼 빛나는 모습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놀라움의 시작일뿐이었습니다.
잠시 후 전설로만 여겨왔던 신앙의 선조 아브라함 할아버지와 대 예언자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은 장차 이루어질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영광스러운 부활을
핵심 제자들에게 살짝 미리 보여준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 제자에게만 살짝 천국 문을 열어 보여준 사건이라고나 할까요.
그야말로 황홀경에 도취된 베드로 사도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마음과 더불어, 이 좋은 곳에서 저 위대하신 인물들과 함께 영원히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 일었습니다.
시끄럽고 복잡하고 아귀다툼의 산밑의 세상으로 내려가고 싶지 않은 마음에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루카 9,33)
베드로의 제안에 예수님께서 어떻게 반응하셨는지에 대해서 복음사가들은 구체적으로 기술하지 않습니다.
존경하는 김승훈 마티아 신부님께서는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각은 베드로 사도의 생각과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무 놀라서 반쯤 얼이 빠진 제자들을 어루만지시며,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어서들 일어나거라. 우리는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황홀한 산 위 풍경을 뒤로한 채, 다시금 인간 세상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질 수난을 향한 여행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어리석은 베드로 사도의 표현을 통해 어찌 그리도 우리들의 생각과 흡사한지 놀랄 지경입니다.
우리 역시 얼마나 부족한 존재입니까?
주님의 뜻을 따르는 데는 너무나 게으르고, 잠시 편안하기만 하면 그냥 그곳에서 주저앉고 맙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아직 멀고도 멉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한 우리는 주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계속 가야만 합니다.
중간에 힘들다고 주저앉아 버리면 우리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편하고 안락한 길을 찾는다면 우리는 주님 십자가의 신비를 깨닫지 못한 사람이 될 것이고,
주님 십자가와 원수로 살게 될 것 입니다.(김승훈 신부, 당신께서 다 아십니다, 빛두레 참조)
형제들과 공동체 식사 중에 있었던 일입니다.
식사가 거의 다 끝나갈 무렵, 원장 신부님께서는 식사 후 기도를 하려고, 계속 분위기를 살피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한 식탁에서는 한 형제의 주도로 나라와 민족, 인류와 지구 온난화 등을 주제로 한 범국가적, 범세계적 대화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인내심의 한계를 느낀 원장 신부님은 이런 말로 대화를 종료시켰습니다.
“자, 그럼 나라는 나중에 구하고, 우선 마침 기도부터 바칩시다.”
그렇습니다.
이상은 원대하게, 뜻은 크게 품어야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선은 늘 우리의 발밑을 향해야겠습니다.
매일의 귀찮고 짜증 나는 일상사 안에 하느님께서 굳게 현존하고 계십니다.
부족하고 죄투성이인 우리 공동체 안에 하느님께서 활동하고 계십니다.
거룩한 산 위에만 계속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귀찮더라도 또다시 산 밑으로 내려가야겠습니다.
형편이 좋든지 나쁘든지, 내려가서 주님의 말씀을 선포해야겠습니다.
조금 전에 맛본 감미로운 천상 체험을 이웃들에게 나눠야겠습니다.
저 아래로 내려가서, 복음 때문에 고생하고 박해받으며, 멸시당하고 배척당하면서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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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6. 사순 제2주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 조용히 참회와 보속을 하는 시기에 영광스러운 모습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오늘의 루카 복음은 사순시기의 의미를 더욱 깊이 있게 파악하도록 해주고 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계약이 먼 훗날에 이루어지리라는 그 말씀을 믿었다.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믿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자기 자신을 변모시켰던 믿음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자기의 후손들까지 변모시키는 믿음이었다. 아브라함도 그렇지만 우리도 사순절의 기다림과 앞당겨진 파스카의 빛으로 신비스럽게 변모한다는 것이다. 우리도 매 순간 이 변모의 체험을 하기 때문이다.
복음: 루카 9,28-36: 예수께서 기도하시는 동안에 그 모습이 변하였다.
오늘 복음은 사순절의 분위기로 이끄는 두 가지 특성이 있다. 첫째는 산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모습이 ‘기도’로써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28-29절). 여기에 예수께서 기도하신다는 것이 반복적으로 강조되고 있고, 그 기도가 그 영광스러운 변모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 같다. 그래서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의 생활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하느님께 맡길 수 있다. 루카 복음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기도의 주제가 바로 이 사순시기에 언급되고 있는 것은 사순절의 의미가 기도의 표지 아래서 더 잘 드러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기에 우리가 참으로 변화되기 위해서는 열렬히 타오르는 기도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둘째는 다른 복음에서는 단순하게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이야기하고 있었다(30절)는 사실만 전해주고 있는데 반해, 루카 복음은 두 인물과 예수님과의 대화 내용에 대해서도 전해주고 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고 있었다.”(31절). 여기서 ‘세상을 떠나실 일’이라고 한 말은 원문으로 ‘exodos: 출애굽, 대탈출이다. 즉 결정적인 해방과 약속의 땅을 향한 출애굽의 모든 주제가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예수님의 죽음은 출애굽 사건과 같이 결정적인 구원을 가져다주시는 사건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약속의 땅으로 가고 있는 고달픈 여정이나,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그 여정을 반복적으로 이해시키고 있는 사순절의 분위기로 우리를 이끌어주고 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세 사도의 졸린 눈에 그리스도의 얼굴에 빛나는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났다는 내용이다.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은 잠에 빠졌다가 깨어나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그분과 함께 서 있는 두 사람도 보았다.”(32절). 그리고 구름이 그들을 뒤덮었다(34절)고 한다. 이 구름은 특별한 신적 현존을 나타내는 것으로 예수께서는 사도들에게 당신을 둘러싸고 있는 하느님의 영광과 권능을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게 해 주셨다는 것이다. 이제 예루살렘, 즉 십자가의 길을 향해 가시는 예수님은 수난과 수모를 당하시겠지만, 한결같이 하느님 아버지께서 ‘선택한 아들’(35절)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아무 힘없이 십자가 위에 죽임을 당하시지만, 그분은 산에서 보여주신 영광을 받으실 분이라는 것을 알아 그 고통과 괴로움의 의미를 알아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의 ‘변모’는 부활의 영광에 대한 ‘예표’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죽음은 부활의 빛을 위한 것으로써, 우리가 지내는 사순절의 의미는 다른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택하신 아들’ 예수의 영광스러운 부활에 참여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포기하고 십자가에 못 박는 길을 가는 것이다. 이러한 삶을 살아갈 때 예수께 일어났던 그 사건이 우리에게도 일어나게 된다. 우리 자신이 신앙을 통해 아브라함이 변화되고 그의 자손들이 은총을 입었듯이 그처럼 변모되어갈 것이다. 하느님의 아들딸로, ‘그분과 같이’(1요한 3,2) 될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35절)는 말씀을 잘 따라야 한다. 우리는 신앙으로 약속된 땅을 향해 걸어가고 있지만, 이미 그 영광을 미리 내다보고 있고 알고 있다. 내가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달린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결코 우리를 속이거나 실망하게 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의 말을 들으며’(35절) 즉 그분의 말씀을 따르며 살아가려고 노력할 때 그 영광을 체험할 수 있음도 알고 있다. 그러기에 광야와 같은 이 사순절은 어떤 두려운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목적지에 미리 도착할 수 있게 해준다고 할 수 있다. 순간순간의 삶을 통하여 우리는 이미 부활의 신비를, 영광의 신비를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삶이 이렇게 될 때, 진정 파스카 신비의 완성인 하느님 나라는 지금 여기에서의 삶에서부터 이루어지는 것이다.
필리피서에서 바오로 사도께서도 십자가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는 자신들의 생활에서 고달픈 십자가를 회피함으로써 사순절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는 말씀이다(필립 3,18-19). 갈바리오를 향한 여정이 없다면 파스카의 기쁨은 없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하늘의 시민으로서(필립 3,20) 그리스도인들은 마지막 변모의 기다림 속에서 자신의 생활을 매일매일 변화시켜 가는 삶을 통하여 하늘나라의 시민이 될 자격을 갖춤으로써 신앙 안에서 그와 같은 생활을 하는 것이다. 이 사순절이 우리 자신의 변모를 이룰 수 있는, 그래서 합당하게 파스카의 신비에 참여할 수 있는 은총의 시기가 되어야 한다. 우선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그리고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함으로써 그 변모를 이룰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갈 때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키실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주실 것입니다.”(필립 3,20-21). 나 자신의 참된 변화를 위하여 기도하는 시간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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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6. 사순 제2주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타볼산에 오르는 법
우리는 모두 하느님 자비의 얼굴을 뵈옵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이 계신지, 안 계신지 고민할
필요도 없고 딱 맡기고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먼저 ‘표징’을 바라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먼저 하느님 얼굴을 뵈옵자고 하는 사람들을 악하다고 하십니다.
저도 사제가 되라고 불러주실 때, “그럼 먼저 당신 얼굴을 보여주세요~!”라고 청했습니다.
그게 정말 성모님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분께서 성모상에서 당신을 나타내 보이셔도
저는 “내가 술을 마셔서 헛것을 봤지!”라고 생각해버렸습니다.
표징을 요구하는 것은 마음은 순종하고 싶지 않은데 그 핑계를 하느님께 대는 것입니다.
자기가 먼저 해야 할 일은 하나도 하지 않고 하느님 탓만 하는 것입니다.
복권은 사지 않고 복권에 당첨되면 믿겠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나를 타볼산 꼭대기까지 데려다줄 이를 만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변모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으로 변모하시며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하늘에서는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라는 소리가 들립니다.
제자들은 먼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기에 산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김흥순 자매는 불교 신자였습니다.
장이 유착된 상태여서 음식을 넘기지도 못하고
다 게워내며 걷지도 못하는 극단적 상황이었습니다.
유명한 병원엔 다 다녀봤지만 수술해봐야 소용이 없다는 진단도 받았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 호스피스 병동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 병원에서는 수술하면 2~3년, 길면 5년은 더 살 수도 있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자매는 수술이 두려워서인지 이미 자포자기 상태였습니다.
이영숙 베드로 수녀님이 설득하자 자매는 자신들을 위해 고생하는 수녀들 인생이 참
딱하다고 말했습니다.
수녀님은 딱한 수녀 말 한 번만 들어보라고 설득했습니다.
그래서 일단 대세를 받고 수술도 받아보겠다고 했습니다.
데레사라는 세례명으로 대세를 받고는 “나는 무조건 하느님을 믿습니다.”라고 선포하고 다녔습니다.
수술실에 들어설 때 흰 가운을 입은 의사가 인자한 모습으로 다른 의사들과 간호사들 사이에서 자신을 바라보며 마치 “걱정하지 마세요. 잘 될 겁니다.”라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 의사가 자신을 분명히 고쳐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고 그렇게 수술을 잘 받았습니다.
그리고 깨어나서는 수술받을 때 자기 발 쪽에 서 계셨던 흰 가운을 입은 의사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수술실에는 모두 청색 가운을 입게 되어 있어서 흰색 가운 입은 의사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자매는 빠른 속도로 회복하였습니다.
두 달 후 교리를 받고 정식 세례를 받았습니다.
병자성사를 받을 때는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짐을 느꼈고 걷지도 못했던 그 자매는
기쁨에 취해 병실을 두 바퀴나 돌았습니다. 그리고 기도실에 들어선 자매는 감실 쪽을 보더니
“선생님, 여기 계셨군요! 얼마나 찾았는데요. 저를 치료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라고 큰절을 올리는 것이었습니다.
자매는 기적적으로 일어서서 걸을 수 있게 되었고 모든 사람이 기적이라는 소리를 하는 것을 들으며
퇴원하였습니다.
지금까지도 수녀님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잘 사신다고 합니다.
[출처: 『내 가슴에 살아있는 선물』, 이영숙 베드로 수녀, 비움]
이영숙 베드로 수녀는 예수님과 같이 말을 듣기만 하면 타볼산에 오를 수 있게 하는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자였습니다.
파견된 자의 특징은 사랑을 위해 고생한다는 것입니다.
파견된 자는 마치 아이에게 엄마와 같습니다. 엄마를 믿지 못하면 아빠는 자동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엄마를 파견한 아빠의 사랑은 더더욱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그의 말을 들었기 때문”에 하느님 신성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사랑 때문에 괜한 고생을 하는 분”이십니다. 그런 고생은 스스로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사명과 힘을 받았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고 그런 사람들의 말을 듣는 이들은 반드시 주님의 얼굴을 뵐 수밖에 없습니다.
별을 따라오다 보면 구유의 메시아를 볼 수밖에 없는 것과 같습니다.
저도 ‘하.사.시.’를 읽게 된 것이, 그 책을 쓴 ‘마리아 발토르타’란 분을 보면서였습니다.
‘왜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하시는 분이 살아생전에 영광도 보지 못했는데 수만 페이지에
해당하는 광대한 예수님의 생애를 썼을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들었습니다.
이 책을 읽고 사도들의 삶에 저도 순종하였고 그렇게 “다 주시는 분”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의 예수님은 교회입니다.
교회는 사랑으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고생하는 새로운 예수님입니다.
교회의 말을 듣고 순종한다면 우리는 분명 타볼산에 있게 될 것이고 그 가운데서 모세의 말씀도 듣고 엘리야의 은총도 받으며 밝게 빛나는 하느님으로서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별을 존중하고 공경하지 않는다면 구유의 아기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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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6. 사순 제2주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십자가의 길을 생략하고 부활로 직행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
그리고 두 사람이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모세와 엘리야였다. 영광에 싸여 나타난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고 있었다.
베드로와 그 동료들은 잠에 빠졌다가 깨어나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그분과 함께 서 있는
두 사람도 보았다.
그 두 사람이 예수님에게서 떠나려고 할 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는데 구름이 일더니 그들을 덮었다.
그들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자 제자들은 그만 겁이 났다.
이어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이러한 소리가 울린 뒤에는 예수님만 보였다. 제자들은 침묵을 지켜, 자기들이 본 것을 그때에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루카 9,28ㄴ-36).”
1)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신성’과 ‘하느님 나라’를 사도들이 직접 목격하고 체험했다는 증언입니다.
그 일에 대해서 베드로 사도는 서간문에서
다시 이렇게 증언합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재림을 알려 줄 때, 교묘하게 꾸며 낸 신화를 따라 한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위대함을 목격한 자로서 그리한 것입니다.
그분은 정녕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영예와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존귀한 영광의 하느님에게서, ‘이는 내 아들,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하는 소리가 그분께 들려왔을 때의 일입니다.
우리도 그 거룩한 산에 그분과 함께 있으면서,
하늘에서 들려온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2베드 1,16-18).”
베드로 사도는, 사도들이 직접 보았고, 직접 들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교묘하게 꾸며 낸 신화를 따라 한 것이 아닙니다.” 라는 말은, “옛날이야기들을 짜깁기 하는 식으로 잘 만들어낸 이론이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신앙생활은 학문을 연구하거나 공부하는 생활이 아닙니다.
“살아 계시는 예수님”을 ‘삶 안에서’ 만나고,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신앙은 이론이 아니라 ‘삶’이라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 사건은 세 가지 중요한 일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 자신이 영광스럽게 변모하신 일이고, 두 번째는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난 일이고, 세 번째는 하느님께서 직접 사도들에게 말씀하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변모하신 일은, 당신의 신성을 드러내신(계시하신) 일입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난 일은, 율법의 대표자와 예언자들의 대표자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긴다는 것과 구약과 신약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면서 구약의 율법과 예언들이 예수님에게 종속되어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나눈 대화 내용은
중요하지 않고, 나타났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마태오복음과 마르코복음에는 대화 내용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직접 사도들에게 하신 말씀은, 예수님은 당신이 보내신 메시아라고 선포하시고 보증하신 말씀입니다.
3) 33절의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라는 말은, 예수님의 신성과 하느님 나라를 직접 체험하면서 ‘황홀경’에 사로잡혔다는 뜻입니다.
<헛소리도 아니고, 아무 말이나 막 한 것도 아닙니다.>
초막 셋을 지어 드리겠다는 말은, 너무 황홀해서 “그냥 이대로 영원히 이곳에서 살고 싶다.” 라고 소망하게 되었음을 나타낸 말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그 소망은 옳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라는 말씀에서 ‘그의 말’은 바로 앞의 23절에 있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라는 말씀을 가리킵니다.
십자가의 길을 생략하고 부활로 직행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아무리 좋아도 지상에서의 인생을 중단하고 그곳으로 직행할 수는 없습니다.
자살은 원래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대죄’입니다.
하느님께서 부르실 때까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끝까지 살아야 하는 것은, 사람마다 맡은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오복음과 마르코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침묵을 지키라고 명령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루카복음에는 제자들이 스스로 침묵을 지킨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차이는 중요하지 않고, 어떻든 제자들이 보고 들은 것에 대해서 침묵을 지킨 것은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증언하려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부터 믿어야 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4) 예수님께서 당신의 신성을 드러내신 것은, 또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게 해 주신 것은, “수난 예고 말씀을 듣고 기가 꺾여 있는 제자들에게 믿음과 용기와 힘을 주기 위해서” 라고 해석됩니다.
이 해석에 대해서, “그렇다면, 제자들은 왜, 예수님 수난 때에 모두 달아나 버렸는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 일에 대해서는, 예수님의 수난 전에는 사도들이 ‘머리로만’ 믿는 단계에 머물러 있었고, 부활 후에야 비로소 ‘온 마음과 온 삶으로’ 믿는 단계에 도달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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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6. 사순 제2주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9,28ㄴ-36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약속의 증표’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결혼반지’입니다. 결혼반지를 부부가 나누어 낀다는 것은 혼인서약 때 발설했던 사랑의 약속, 즉 상대방을 자신의 배우자로 맞아들여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할 때나 아플 때나, 일생 신의를 지키며 사랑하고 존경하겠다는 약속을 반드시 지키겠다는 다짐을 드러내는 것이지요. 상대방이 한 그 다짐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남편과 아내 상호간에 혼인 계약이 맺어집니다. 그리고 누군가와 혼인 계약을 맺게 되면 그 계약을 맺은 상대방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사랑으로 일치된 부부 공동체로 살면 여러가지 유익과 혜택들을 누리게 되니, 그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성실히 이행해야 함은 당연한 일인 겁니다. 만약 부득이한 사유가 없는데도 그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상대편 배우자에게 상처를 입히고 손해를 끼친다면 그건 혼인 때 했던 중대한 약속을 깨는 잘못이기에 사회적으로 큰 지탄을 받게 됩니다.
오늘의 전례 독서에서도 그와 비슷한 약속을 맺는 모습이 보입니다. 먼저 제1독서인 창세기는 하느님께서 당신 피조물인 아브람과 계약을 맺으시는 장면입니다. 아브람은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창세 12,1)라는 하느님의 말씀에 즉시 순명하여, 평생 터전을 잡고 살아온 우르 땅을 기꺼이 떠났지요.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었고,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창세 12,2)라는 하느님의 약속을 굳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하느님은 당신 말씀을 전적으로 믿고 즉시 실행에 옮긴 그의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런 그의 모습이야말로 당신 백성들이 마땅히 본받아야 할 올바른 태도라 보신 겁니다. 또한 아브람에게 했던 약속을 ‘계약’으로 발전시키십니다. 계약(契約)이란 ‘서로의 관계가 묶여지는 약속’을 의미하는데, 고대 근동지방에서 계약은 동물을 이용한 희생제사가 동반되는 일종의 ‘예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정해진 제물을 반으로 잘라 서로 마주보게 둔 후 그 사이를 계약 당사자들이 지나가며 계약의 세부 내용을 선언했는데, 이는 계약을 어길 시 두 동강난 제물처럼 파멸에 이르더라도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굳은 맹세를 드러내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하느님께서 아브람과 맺으신 계약에서 특이한 점은 아브람은 제물 사이를 지나가지 않고, 오직 하느님만이 “연기 뿜는 화덕과 타오르는 횃불”의 모습으로 제물 사이를 지나가시며 ‘이집트 강에서 유프라테스 강까지 이르는 큰 땅을 주겠다’고 선언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부족하고 약한 인간에게 그 어떤 저주나 손해를 끼치지 않고 무상으로 당신 사랑과 은총을 주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자비가 드러나는 겁니다.
한편,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놀라운 표징을 통해 당신께서 하신 약속이 반드시 실현되리라는 것을 확실하게 보증해 주십니다. 그 일이 일어나는 장소는 ‘타볼산’입니다. 성경에서 산은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거룩한 장소, 인간이 하느님 가까이로 나아가 그분과 친교를 맺는 특별한 장소를 가리키지요. 예수님께서 핵심 제자 세 명을 데리고 타볼산에 오르시는 것은 그들에게 하느님의 현존과 영광을 직접 느끼는 강렬한 신앙체험을 시켜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그 체험이 그저 놀라운 사건이나 일회성 이벤트로 여겨지는 건 원치 않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기도 중에 당신을 간절히 찾는 이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부족하고 약한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함으로써 거룩하고 완전한 존재로 변화된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산에 오르시는 내내 하느님께 기도하십니다. 그러자 ‘그분의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이 하얗게 번쩍였다’고 오늘 복음은 기록하고 있지요. 기도를 통해 하느님과 친교를 나누고 그분과 깊은 일치를 이룬 사람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하느님을 닮은 거룩한 모습으로 변화됩니다. 40일 동안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온 모세가 그랬지요. 그의 얼굴이 밝게 빛나는 것을 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의 현존을 느꼈던 것처럼, 예수님도 당신 제자들이 기도 중에 거룩하게 변화된 당신 얼굴을 보고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기를 바라셨던 겁니다. 한편 옷이 하얗게 빛났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신적 권능을 지니고 계시며 그 권능과 은총으로 당신을 믿고 따르는 이들을 깨끗하고 거룩한 존재로 변화시켜 주신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은 이 두가지 표징을 통해 당신께서 하느님의 일을 한다는 이유로 많은 고난을 겪고, 세상의 권력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겠지만, 사흘만에 반드시 되살아 나리라고 하셨던 그 예언적 약속(루카 9,22)이 반드시 실현되리라는 걸 제자들에게 알려주고자 하신 겁니다.
그 예언적 약속은 외아드님의 희생과 죽음을 통해 당신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뜻에 맞닿아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부활의 영광을 누리시려면 반드시 수난 당하시고 죽으셔야만 하는 겁니다. 거룩하게 변모하신 예수님 곁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난 것은 그런 점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영광을 누리는 거룩한 모습으로 나타난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온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눕니다. 율법을 상징하는 모세와 하느님의 구원 약속을 상징하는 엘리야가 예수님과 만났다는 건, 예수님께서 경직되고 문자화된 율법의 부족함을 당신 사랑으로 채우시고, 하느님의 구원 약속을 당신 죽음으로 완성하시리라는 것을 드러내는 일종의 예언에 해당합니다. 우리를 구원과 참된 행복으로 이끄시려는 하느님의 뜻은 예수님의 사랑과 희생으로 비로소 완성된다는 겁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구원의 그 심오한 진리를 깨닫지 못합니다. 좋은 것을 보았으니 그 자리에 머물고 싶었던 겁니다. “주님께 청하는 것이 하나 있어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을 우러러보고 그분 궁전을 눈여겨보는 것이라네”(시편27,4). 라고 노래했던 시편 저자의 마음이 바로 베드로의 마음입니다. ‘산 아래’의 세상에서는 하루 종일 예수님께 몰려드는 군중들에게 시달리느라 매일매일이 피곤하고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예수님은 자꾸만 당신이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할 거라는 절망적인 말씀을 하셔서 여러가지로 걱정되고 불안했던 게 사실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거룩하게 변모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그분께서 주님이심을 자기 두 눈으로 확인했으니, 그런 그분 곁에 유다인들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모세와 엘리야 예언자까지 함께 있으니, 베드로에게는 그 영광된 자리가 본인이 그토록 갈망하던 ‘하느님 나라’였지요. 그래서 예수님께 계속 그 산 위에 머무르자고 청합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자기들이 지금 당장 세 분이 머무르실 초막을 지어드리겠다는 허황된 약속을 하면서 말이지요. 그러나 주님께서 하느님 나라에 머무르실 거처는 때가 되면 재가 되어 사라질 세속의 것들로 만드는 게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고 들은 대로 실행하는 우리의 삶을 통해 단단하게 지어지는 겁니다. 그러니 하느님 나라에 참된 거처를 마련하여 주님과 함께 영원한 행복을 누리고 싶다면 쉽고 편한 것을 찾는 나태함과 안일함을 내려놓고 이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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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6. 사순 제2주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하얗게 변하신 주님”
아브람은 하느님만 말씀에 따라 생소한 광야로 나섰습니다.
그에게 펼쳐지는 것은 축복보다는 사막의 광활함과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위험들이었지만 그는 하느님을 믿고 그 말씀을 따랐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땅과 후손을 약속하시며 그 약속을 계약으로 보여주십니다.
삼 년 된 각각의 암송아, 암염소, 숫양 한 마리를 반을 쪼개고 와 산비둘기와
어린 집비둘기 한 마리를 준비하여 펼쳐 놓아 하느님께서 그것들의 사이를
지나가게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유목사회의 관습에 따라 아브람과 계약을 맺으시며 당신께
온전히 순명하는 아브람에게 후손이 살 땅도 주시는 것입니다.
“나는 이집트 강에서 큰 강 곧 유프라테스 강까지 이르는 이 땅을
너의 후손에게 준다.”(창세 15, 18)
예수님께서는 오늘 평소와는 다르게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야고보만 데리고
기도하시려고 산에 오르십니다.
그런데 겟세마니에서도 잠을 자던 제자들은 그곳에서도 잠에 빠집니다.
주님께서 기도를 하시는데 얼굴 모습도 달라지고 입고 계시던 의복도 하얗게 번쩍
거립니다. 그러는 사이에 구약의 대표적인 인물인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그제서야 갚은 잠에서 깨어난 그곳의 제자들은 이 광경을 목격하게 되고
두려움과 놀라움에 싸이게 됩니다.
사도 베드로는 자신도 모르게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과 하나는 모세 또 하나는
엘리야가 머물게 하면 좋겠다는 표현을 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그들은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24)
예수님의 변모 사건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만을 데리고 인적이 닿지 않는 산으로 올라가신 것은
특별한 의미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그렇다하더라도 한 세트처럼 다니던
안드레아 사도는 어디 갔을까요? 여러분 아셔요? 휴가를 갔다거나 아니면
식사 당번이었겠지요? 너무 싱거운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질문인 것 같습니다.
다른 날 같으면 주님께서 제자와 군중과 함께 계셨는데, 오늘은 아닙니다.
그 이유는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이지요. 잘못하다가는 주님의 참다운 모습이 와전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구약의 인물들과 이야기를 나누실 정도로
그리고 하늘에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선언하는 광경은 장엄하기조차 합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35)
그리고 하얗게 변한 모습은 당신의 부활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시는 것이고
모세와 엘리야와의 대화 내용은 장차 당신이 겪으실 수난, 죽음, 부활에 대한 중요한
주제였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이 길을 준비하고 계셨고 사랑하는 제자들의 신앙을 위해서도
특별한 장면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장차 수난과 죽음이 닥쳐오면 제자들은 흔들리고
뿔뿔히 헤여질 것을 미리 아셨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미 세상을 떠나실 때를 아시고 구약의 인물들과 이야기를 나누셨던 것은
이스라엘의 오랜 구원의 역사에서 중요한 획을 긋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들도 여러차례 예언했던 메시아의 도래인데, 그것은 수난과 죽음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누가 고통을 좋아할까요? 누가 군중 앞에서 펼쳐지는 수모를 좋아할 수 있겠어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고통의 잔을 마셔야 할 시간이 다가오는 것을 알고 제자들에게
신중하게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수난과 죽음은 오늘 주님께서 보여주신 하옇게 변하는 변모처럼, 부활의
기쁨이 또한 준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부활의 한 순간을 보여주셨는데도 사도 베드로는 말로 다할 수 없이 감격을 하였다면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뵙게 되면 그 기쁨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주님의 수난과 죽음은 절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영광의 부활의 영광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산위에서 주님께서 모습을 변하신 사건은 우리에게도 당신 부활의
영광된 모습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도 세상을 살면서 주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면서도 제자들처럼 갈팡질팡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제자들이 주님의 부활을 증명한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믿고 따르는 항구한 신앙을 일상생활에서 증명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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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6. 사순 제2주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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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6. 사순 제2주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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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6. 사순 제2주일.
두려움 없이 주를 시인하는 삶
<2025.3.16> 아침을 여는 묵상 (눅 12:1~12절)
❝두려움 없이 주를 시인하는 삶❞
❚ 하나님께만 시선을 주목하고, 온전히 헌신할 때 모든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 두려움을 어떻게 넘어설 수 있습니까?
➲ 하나님의 시선에 주목할 때입니다(1~3절).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 대해서 강도 높은 비판을 가하시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속은 탐욕과 악독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겉으로는 깨끗한 척하는 위선자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겉만 번지르르하게 함으로써 그들 마음속에 품고 있는 탐욕과 악독을 완벽하게 감출 수 있다고 생각(2절)했습니다. ‘...감추인 것..’은 누구도 모를 정도로 감추어진 상태, 덮인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숨기려 하고, 누구도 알아챌 수 없다고 확신한다 할지라도 마지막 날에 하나님 앞에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음을(3절)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시선보다는 사람들의 시선에 더 주목하기 때문에 외식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을 등지고 사람들의 시선 앞에서 높아지는 즐거움에 빠지는 오류가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외식, 즉 위선은 성도가 버려야 할 악덕 중의 하나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진짜 얼굴을 감추고,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킬 만한 가면을 쓰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리 완벽하게 가렸다고 할지라도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다고 경고하십니다. 그러므로 늘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서 있음을 인식하고 주님 앞에 정직하게 행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시선에 주목하여 살아갈 때, 환난 날에 하나님으로부터 건짐을 받게 될 것입니다.
➲ 하나님을 온전히 경외할 때입니다(4~7절).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내 친구’라고 부르셨습니다. 특별한 사랑의 대상임을 보여줍니다. 제자들에게 너희 몸은 죽이지만 그 이상의 것 즉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4절)하십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존재가 누구일까?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그...’(5절)를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일이 긴급함을 말씀하십니다. ‘앗사리온’은 노동자들의 하루 품삯을 뜻하는 데나리온의 16분의 1정도에 해당하는 작은 금액입니다. 노동자들이 30분 정도 일하면 벌 수 있는 수입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작은 참새조차도 돌보시는데, 하물며 예수님의 친구인 제자들은 더더욱 말할 것도 없다는 의미입니다. 뿐만 아니라 개개인의 머리털의 수까지 파악하고 계시는 하나님이 함께하시기에 세상에 대해서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을 가지고 있어야 함을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버리시기까지 큰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만큼 우리 자신이 주님에게는 특별한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새보다, 꽃보다 귀한 우리 자신의 모든 필요 또한 알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고난 가운데서 때로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처럼 느껴질지라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그리고 머리털의 수까지 파악하고 계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의 삶의 작은 부분까지 돌보시는 하나님을 경외함이 세상을 이기는 비결이 됨을 고백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당하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벧전 3:14).. 어떠한 상황과 형편에서도 하나님을 온전히 경외하는 삶을 살아갈 때,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게 됩니다.
➲ 예수님의 이름을 시인할 때입니다(8~12절).
예수님은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8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반대로 주님을 부인하는 사람은...부인당할 것(9절)입니다. 사람들을 두려워 해서 예수님이 성령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부인하면 하나님은 그를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10절)이라고 경고하십니다. 또한 복음을 전하다는 이유 때문에 세상의 권력자들 앞에 끌려 갈 때에 염려하지 말라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너희가 말해야 할 것을 바로 그 시각에 성령께서 가르쳐 주실 것...’(12절,새번역)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시인한다는 것은 곧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우리 자신은 ‘그리스도인’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는 말로써만 하는 고백과 결단이 아니라 날마다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나의 십자가를 지는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의 눈치나 보면서 부끄럽게 살아가지 말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차라리 고난을 받는 삶을 택할 수 있는 용기와 결단이 오늘 나에게 절실함을 깨닫게 됩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근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나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힘겨운 세상을 이겨내는 믿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할 때, 지금 내가 처한 상황과 환경을 뛰어넘는 성령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을 넘어설 수 있는 최선의 길은 어느 자리에서나 당당하게 주님을 시인하고, 헌신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도 다른 사람들의 인정과 시선에 연연하여 외식하는 자처럼 굳어진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께만 집중하는 삶을 살아갈 뿐 아니라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을 날마다 기억하고, 경외하고, 그 이름을 시인하여 두려움을 넘어 담대하게 증인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눅 12:1~12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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