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발 천왕봉 산행.. 12km. 10시간. 2.5만보.
그동안 국내 수많은 산들을 등반해 보았다.
대표적인 능선 등반으론 설악산. 덕유산. 치악산. 백두대간.. 각각 그 산들에 특유한 젊음 아름다운 푸근함..등 장점들이 많았지만 다니고 다녀봐도 지리산 같은 무성하고 포근한 어머니 같은 품을 가진 산세는 없을 것이다. 국내의 최고 으뜸이 아닌가. 규모 면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부드러운 산줄기 곳곳의 아름다움 산능선에 걸린 운해 아름다운 꽃들 고사목.. 보면 볼수록 맘에 와닿는 산세이다.
예전에는 이러한 산들을 수도 없이 다녀보았지만 최근 2~3년 동안엔 산 같은 산을 가보지 않았단 생각이 든다. 아마 3년 전부터 취미에 빠진 맨발걷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맨발 덕분에 집근교 산이나 자그만 뒷산들을 주로 섭렵하고 다녔다. 그러면서도 나의 가슴 한구석엔 언젠간 지리산 천왕봉을 맨발로 등반해 보아야지 하는 야심이 꿈틀대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맨발 도전에 필요한 적응 기간도 필요하고 위험에 대비한 마음가짐 준비도 필요했다.
어느덧 벌써 맨발 3년이 지나간다. 단련할 만큼 단련도 했다. 백암산 1000 고지도 올라 보았고 근교산 이곳저곳도 맨발로 다녀 보았다.
맨발 적응은 되었다고 판단한다. 이제 남은 건 실행뿐이다. 날씨가 무척 덥다. 추석이 지났는데도 이러한 열기는 난생처음이다. 다행히 이번 주말에 비가 내리고 나면 무거위가 물러갈 것이라고 한다.
등반 계획은 중산리에 등반 전날 도착해 차박을 하고 다음날 일찍 산행을 시작할 예정이다. 침낭 식량 옷가지 등 필요한 물품을 준비한다. 베낭 무게는 최대한 필요한 것만 간단히. 더위를 생각해 물은 충분히 계획한다.
이번 출발은 지리산을 향한 맨발의 첫발이다. 나의 맨발 적응력 실험이다. 무리하지 않을 생각이다. 서서히 지리산에 맨발을 적응시켜 나가기로 한다. 얼굴에 트러블 현상이 맘을 잡지만 어쨌든 도전해 보기로 한다.
일기예보에 주말에 비 소식이 있다. 덕분에 그동안 맹위를 떨치던 무더위는 가라앉을 기분이다. 적당한 기온이다. 단지 비 온후 등산로 상태가 어떨지 주의가 필요한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강풍을 동반한 폭우가 내릴 거란 일기예보다. 도저히 갈 수가 없는 날씨다. 다음 기회로 미룰 수밖에 없다.
잡다한 일도 하고. 서울 친구들도 만나보고 하다 보니 시간이 흘러 가을 초입으로 접어들었다. 날씨도 밤공기가 추위가 느껴진다. 이것저것 고려하다간 올해 천왕봉 구경을 잘못하면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이번에는 무조건 앞뒤 볼 것 없이 출발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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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천왕봉 출발이다. 낮에 급한 일을 마치고 난 후 저녁을 먹고 5시 출발한다. 출발 2시간 걸려 지리산 중산리 주차장에 7시에 도착 차박 준비에 들어간다. 간단한 맥주 한컵에 심신을 달래고 9시 취침에 들어간다. 명일 일찍 산행을 할 계획이다. 새벽에 눈을 뜨니 4시. 출발 준비를 위해 간단한 아침 식사를 마치고 6시 드디어 출발이다. 새벽에 먹는 누룽지 맛이 끝내준다.
6시 40분 통천길 입구에 들어서면서 신발을 벗었다. 드디어 천왕봉 맨발 도전을 위한 첫발을 내딛는다. 그동안 버킷리스터에 넣어놓고 기회를 엿보다 드디어 오늘 도전이다. 맨발에 새벽 찬 기운이 느껴진다. 가을 초입 날씨가 제법 쌀쌀하다. 가을 낙엽이 길 위에 수북이 깔였다. 낙엽 위가 눈길같이 미끄럽다. 조심조심 비탈길을 올라간다. 새벽 이른 시간인데도 많은 산객들이 나의 앞을 추월한다. 숨이 거칠어진다. 나도 모르게 입호흡을 하고 있다. 다시 숨을 코호흡으로 다듬는다.
칼바위를 지난다. 점차 길이 가팔라진다. 앞서가던 산객들을 내가 오히려 앞지르기 시작한다. 초장 힘에 뒷맛이 없어지나 보다. 로타리산장. 법계사를 지난다. 예전에 고인이 된 친우 박이식이랑 무거운 베낭을 메고 낑낑거리고 천왕봉을 오르던 기억이 새롭다. 아마 그때가 업무의 과로로 인해 몸콘디션이 최악었던것 같다.
산객들 대부분이 60대 이하 청춘들이다. 70대 넘은 사람은 나 혼자뿐인 것 같다. 걷다 보니 내가 맨발인 것도 잊어버리고 걷는 것 같다.
드디어 천왕봉이다. 통천길 출발로부터 4.5시간이 흘렸다. 6km 거리다.
정말 오랜만이다. 반갑다. 하늘이 맑다. 정상에서 보기 어려운 맑은 날씨다. 천욍봉을 그동안 수없이 많이 밟아 보았지만 오늘 같이 맑고 바람없이 고요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던 것 같다. 덕분에 최고의 경치다. 더구나 구름 모양이 끝내 준다. 천왕봉 정상석 모습은 그대로이다. 역시 많은 산객들이 북적인다. 인정샷을 남기기도 힘든다. 정상의 기분을 만끽하고 통천문으로 향한다. 드디어 5시간 만에 최종 목적지에 도착했다. 맨발의 대성공이다.
이곳 지리산 자락에서 예전 빨치산들이 얼마나 수많은 고생을 하면서 드나 들었을까? 생각하면 민초들의 고통에 숙연한 맘이 든다. 하산길은 예초에 장터목으로 생각했으나 계곡길 잔돌이 많아 맨발엔 적합지 않을 것 같아 천왕봉으로 다시 백.. 왔던 법계사 길로 되돌아가기로 한다.
만나는 사람마다 와.. 맨발임을 감탄을 한다. 세상에 이런 일이... 불가사의 한 일로 생각한다. 아마도 인간이 아닌가 봐.. 하고 생각할 것이다. 내가 생각해 봐도 동감이란 기분이 든다.
하산길에 나이 듬직한 분을 만났다. 그분 말씀이 나이가 한살이라도 먹기 전에 지리산을 올라 보았다고 한다. 혼자라고 한다. 주변 친구가 아무도 지리산 동행이 불가하다고 해서 혼자서 다닌단다. 나이를 물어보았다. 아이고 나보다 2살이나 젊다. 나도 정말 나이가 들었나 보다. 이 나이에 나의 체력도 대단하다.
하산길 가을 낙엽이 눈밭같이 미끄럽다. 조심조심...
오늘 맨발 산행은 거리 12km. 소요시간 10시간. 2.5만보 소요되었다.
오늘 드디어 뜻깊은 버킷리스트 하나를 달성하는가 보다. 기분 찢어지게 좋다. 뜻깊은 날이다. 앞으로 자주 맨발 천왕봉을 도전해 보아야겠다. 법계사 하산길은 큰바위가 많아 맨발 하산이 가능했다. 참 가슴 뿌듯한 맨발 산행이었다.
이번 천왕봉 맨발산행의 성공은
그동안 꾸준히 단련해 온 달리기, 산행, 맨발, 집념, 단련의 과정이 모인 The System 결과물이다.
내년에는 장터목산장에서 일박하고 천왕봉, 연하봉, 중봉 주변을 둘러 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