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048
11월21일[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기념일/연중 제33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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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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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3y7bpQT8ltQ
[작은형제회 박희전 루케시오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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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는 내 아들이기도 하지만, 만민의 아들, 내 스승, 내 주님이십니다!>
오랜 준비 끝에 드디어 공생활을 위해 출가하신 예수님, 그리고 나자렛에 남아 계셨던 성모님, 두 분은 비록 몸은 떨어져 있어도 몸과 마음은 언제나 일심동체, 하나였을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이 그러셨듯이 성모님의 머릿속은 온통 아들 예수님으로 가득 차 있었을 것입니다. 특별한 음식을 드실 때는 머릿속에 즉시 예수님 얼굴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끼니나 챙기며 다니나? 걱정이 앞섰을 것입니다.
오늘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나, 식사나 제때 하고 다니나? 춥지는 않을까? 어디 아픈 데는 없을까? 성모님의 안테나, 주파수는 오로지 예수님을 향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성모님에게 그리 달갑지 않은 소식이 전해집니다.
“마리아! 큰일 났습니다. 아드님 상태가 꽤나 심각한 듯합니다. 사람들이 미쳤다고 합니다. 유다 세력가들과 맞짱을 뜨는 것은 보통이고, 헤로데를 비롯한 고위층의 심기를 거스르는 발언들을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그냥 두었다가는 제 명대로 못 살겠는데, 어쩌죠? 우리가 가서 데리고 와야 하지 않을까요?”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성모님은 형제들(아마도 사촌, 팔촌 형제들)을 앞세워 예수님께서 머무시는 곳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문밖에 나와 있는 사도에게 면회를 신청했습니다.
결과는? 놀랍게도 문전박대였습니다. 어머니가 오셨다고 분명히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밖으로 나와보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리고는 한술 더 떠 하시는 말씀이 성모님에게는 엄청난 상처가 되었음일 분명합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오 복음 12장 48절, 50절)
나자렛으로 돌아오는 길에 성모님께서 느끼셨을 비참함이 하늘을 찔렀을 것입니다. 문전박대로 인한 수모와 상처는 엄청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예수님 입에서 나온 정말이지 이해하지 못할 말씀을 마음에 담고 또 다시 성찰과 숙고를 시작합니다. 지금은 비록 내 귀가 뚫리지 않아서 이해를 제대로 못 하지만, 기도하고 또 기도하다 보면 아들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할 순간이 올 것을 확신하며, 또다시 깊은 침묵 속에 기도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런 평생의 노력 끝에 마리아의 신앙은 조금씩 성장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어느 순간 위대한 하나의 깨달음에 도달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내가 낳은 아들이지만, 내 안에 가둬두어야 할 아들이 아니라, 세상을 위해, 주님을 위해, 주님의 백성을 위해 부단히 내어드려야 할 아들, 정말 아쉽지만, 떠나보내 드려야 할 아들입니다. 그는 내 아들이기도 하지만, 만민의 아들, 내 스승, 내 주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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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7D1JNUIrP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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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내 뜻 안에 머물게 하려면>
오늘은 성모님께서 성전에 봉헌되신 일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성모님께서 3살 때 요아킴과 안나로부터 성전에 봉헌되었다고 합니다. 이는 당시 동정녀들을 성전에서 키우며 메시아의 어머니가 될 것을 준비하던 관습에서 비롯됩니다.
요아킴과 안나는 성모님을 메시아를 맞이하기 위해 제물로 성전에 봉헌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전에 봉헌된다는 말은 ‘하느님의 뜻’에 봉헌한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누구의 집에 살려면 그 주인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집에 봉헌된다는 말은 하느님의 뜻에 봉헌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예수님께서 형제요, 누이라고 하시는 이유는 같은 집에 살기 때문입니다. 같은 부모님의 같은 뜻을 따르기 때문에 같은 집에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집에 살려면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봉헌해야 합니다.
내가 하느님의 집에 나 자신을 봉헌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그러면 이제 그분이 내 안에 사시게 됩니다. 하느님이 성모님의 집에 사시게 되는 것입니다. 제르뚜르다 성녀에게 예수님은 “네가 내 뜻을 따라주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내가 네 뜻을 따라주기로 결심하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분 집에 살기로 결심하면 그분이 내 집에 사십니다.
이것이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삼위일체 신비의 핵심입니다. 여기서 뜻은 성령님이 됩니다.
이 원리를 인간관계에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요?
누군가를 나의 뜻 안에 머물게 하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가 먼저 그 사람의 뜻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러면 일반적으로 그 사람도 내 뜻 안으로 들어옵니다. ‘일반적으로’라고 말한 이유는, 가리옷 유다처럼 끝까지 거부하는 사람도 없지 않아 있다는 말입니다.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에 〈50년째 돌 속에 사는 할아버지〉 사연이 나왔습니다. 할아버지는 매일 싸우는 부모 밑에서 두려움 속에서 살았습니다. 유일하게 그 할아버지를 아껴 주었던 분이 할머니였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마저 돌아가시자 할아버지는 산으로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만나지 않고 산 깊은 곳에서 무려 50년을 돌 틈에 움막을 짓고 살았습니다.
바로 밑이 고향이었지만 할아버지는 동물 사료를 훔치러 내려가는 것 외에는 누구도 만나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극도로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프로그램 제작팀이 할아버지에게 다가갔을 때 할아버지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습니다. 부모가 다 돌아가시고 안 계시는 상황이었지만 할아버지는 좀처럼 세상으로 내려가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할아버지의 옛 친구분들을 불러서 설득해보려 했지만, 할아버지는 도망쳤습니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할아버지의 건강이 걱정이었습니다.
이때 이 프로그램 제작진이 항상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할아버지가 사는 움막 옆에 텐트를 치고 무작정 같이 지내는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먼저 내려오라는 말보다 당신과 함께 살아줄 사람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한 열흘 정도 있다가 보면 숨어 사시는 분들도 마음을 열게 됩니다.
열흘 동안 할아버지가 먹고 마시고 일하시는 것을 함께 하다 보니 할아버지도 제작진의 설득을 받아들여 검사를 받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할아버지가 드시는 것을 함께 먹어야 할 수도 있습니다. 다른 프로그램에서는 쓰레기를 뒤지며 산에 숨어 사시는 할머니를 설득하기 위해 함께 머무르며 사는데, 그때는 할머니가 남이 버린 음식으로 만든 것을 함께 먹어주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니 그 할머니도 병원 치료받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모든 것이 이와 같을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나의 뜻을 강요하기 이전에 먼저 상대의 뜻을 들어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상대의 거처에 함께 머무는 것과 같습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께서 성모님의 뜻을 들어주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성모님께서 항상 주님의 뜻 안에 머무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도 가족이나 이웃들을 주님께 데려와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나의 뜻을 비치는 것보다 그들의 뜻이 무엇인지 헤아린 후 나의 뜻을 따라줄 수 있도록 호감을 얻어야 합니다. 남이 나의 말을 안 들어준다고 불평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나도 남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항상 주님이나 이웃들에게 나의 뜻을 이야기하기 전에 내가 먼저 그들의 집에, 혹은 그들의 뜻에 나 자신을 봉헌했는지를 먼저 살펴야 할 것입니다. 누군가의 마음에 드는 것은 매우 어렵고, 많은 사람의 마음에 들려면 그 모든 사람들의 뜻에 따라주고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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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마리아는 성령으로 인한 예수님의 잉태를 하느님께 대한 순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은 어머니이고, 마리아는 초대 교회 사도들과 함께 복음을 선포했던 사도들의 어머니입니다. 초대 교회는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 사도들의 어머니인 마리아, 신앙인의 모범인 마리아를 공경하였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교회는 마리아의 역할에 대해서 새로운 교리를 선포하게 됩니다. 성모 마리아의 승천, 성모 마리아의 평생 동정, 성모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에 대한 교리입니다. 저는 신학교에서 ‘마리아론’을 배웠습니다. 교회에서 성모 마리아의 역할과 성모 마리아의 존재가 신학적으로, 교리상으로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학적인 의미와 성모 마리아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잘 모르는 일부 개신교회는 가톨릭교회를 ‘마리아 교회’라고 오해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는 ‘마리아론’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을 지내면서 성모 마리아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과 성모 마리아의 신앙에 대해서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로서 교회의 영적 어머니 역할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머니 이 사람이 이제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제자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분이 이제 어머니이시다.” 교회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근거로 교회가 ‘사도’로부터 이어져 왔음을 믿을 교리로 선포하였습니다. 따라서 마리아를 교회의 어머니로 공경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이런 측면에서 성모 마리아의 발현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의 발현을 통해서 치유와 기적이 일어나는 것은 발현의 현상이지, 발현의 본질이 아닙니다. 성모 마리아의 발현은 신앙인이, 교회가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파티마 발현에서는 회개와 평화의 중요성이 강조되었고, 루르드에서는 치유와 신앙의 부르심이 나타났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신앙인에게 “회개, 묵주기도, 단식, 미사참례, 선행”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성모님의 발현을 통해 신앙의 경고와 위로를 받아들이는 동시에, 자신이 변화하고 신앙을 깊게 하는 기회로 삼는 것이 바람직한 태도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해서 깊은 성찰을 했습니다. 교회의 학자들이 모여서 하나의 결론을 내렸습니다. 예수님은 온전히 사람이면서, 온전히 하느님이라는 교리가 선포되었습니다. 이런 교리가 선포되면서 성모 마리아의 정체성도 재정립되었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인간 예수님의 어머니이기도 하지만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어머니도 되었습니다. 이것이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교리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어머니는 당연히 죽음의 과정을 거치지 않을 거로 생각했습니다. 초대 교회는 성모 마리아가 죽음을 겪지 않고, 승천하였다고 믿었습니다. 죽음을 거치지 않았으니, 성모님은 죽음의 원인이 되는 원죄를 받지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교회는 성모님이 원죄 없이 잉태되었다는 교리를 선포하였습니다. 루르드에서 발현하신 성모님은 ‘나는 원죄 없이 잉태되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하였기에, 평생 동정이었다는 교리도 선포되었습니다.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입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서 성모님의 의견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성자 예수님을 성모님께로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자신을 선택하신 예수님을 사랑으로 돌보셨습니다. 지금 내 곁에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신발, 옷, 책, 전자제품, 운동기구, 친구, 가족, 이웃’들입니다. 이 모든 것들을 제가 선택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저를 선택해 준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선택한 것이라고 하면 애착이 있을 수 있고, 욕심이 생길 수 있고, 상실에 대해 아쉬움이 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나를 선택해 준 것으로 생각하면 감사할 수 있습니다. 제 곁을 떠난다고 해도 속이 상하거나, 아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내 것’이라는 틀을 ‘하느님의 것’이라는 틀로 바꾸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선택하셨다고 믿는다면 우리를 가로막는 많은 벽이 사라질 것입니다. 외롭지만 우주에서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지구는 하느님의 선물이며, 하느님 나라는 바로 이곳에서 시작될 것입니다. “영원하신 성부의 아드님을 잉태하신 동정 마리아는 복되시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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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2,46-50: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오늘 축일은 예루살렘 성전 가까이에 세워진 성당의 봉헌을 기념하는 이 날, 성모님이 원죄 없이 잉태되실 때 충만히 내리신 성령의 감도로 성모님이 어린 시절부터 하느님께 당신을 바치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전승에 의하면, 성모님의 부모인 요아킴과 안나는 마리아가 세 살 되던 해에 성전에 봉헌하였는데, 세 살 된 마리아가 성전으로 올라갈 때, 계단에는 성모님의 발자국마다 장미가 피어났다고 한다.
오늘 복음에서 악마는 교활하게, 예수님의 육에 따른 친척들을 등장시킨다. 그리하여 사람들의 눈길을 그 친척들에게 향하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신성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려고 했다.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47절). 이 말은 인간에게서 태어난 이가 하느님의 아들일 수 없다는 말이며, 땅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 어떻게 하늘에서 왔다고 하느냐는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보시며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48절) 하신다. 그리고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49절) 하신다. 그분은 말씀을 따르는 이들을 가리키신다. 말씀을 실천하는 관계로 당신과 맺어진 이들에게 가족관계에 따른 모든 명칭을 붙인다. 당신의 말씀을 실천하며 따르는 사람들을 가리키신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50절) 신앙으로써 주님의 형제자매가 될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분의 어머니가 될 수 있을까? 바로 복음을 전함으로써 그분의 어머니가 된다. 이것은 주님을 낳아, 듣는 이들의 마음에 그분을 불어넣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삶을 통해 이웃의 마음에 주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이 생겨나도록 하는 사람이 어머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셨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하셨기 때문에 복되신 분이시다. 그리스도는 진리이시며 육신이시다. 그리스도는 마리아의 마음속에서 진리이시며, 마리아의 태중에서 육신이시다. 그분의 어머니이신 것은 그 진리를, 말씀을 실천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도 말씀을 실천하며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마리아를 닮는 우리가 되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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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성모님의 관계를 묵상하게 합니다. 예수님과 성모님께서는 특별한 관계를 맺으시고 있지만, 이 관계는 단순히 혈연관계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며, 하느님의 뜻에 대한 충실성에 근거한다고 말합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의 어머니이시며, 교회의 본보기로서 특별한 공경을 받으시는 이유는 그 누구보다 하느님 뜻에 순종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복음은 우리도 인간적인 혈연 이기주의에서 벗어나도록 요청하는 듯합니다. 많은 부모가 자녀와 관련된 일 앞에서 하느님의 뜻이 뒤로 밀려나는 경험을 합니다. 또한 많은 경우 가족 특히 자식에 대한 사랑 때문에 죄인 줄 알면서도 잘못된 선택을 할 때가 있습니다. 자신은 복음적 삶에 따르는 역경과 환난에 맞설 각오가 되어 있지만, 자신의 자녀만큼은 이런 어려움 없이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인 줄 알면서도 가정의 안정과 안락을 위해서, 자녀의 미래를 위해서 옳지 않은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가족을 사랑하는 선한 마음이 죄의 동기가 되고 죄의 변명 거리로 전락해 버릴 때, 이는 사랑이 아니라 혈연 이기주의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오직 하느님 말씀을 따름으로써 진정한 부모의 사랑이 실현됩니다. 자녀에게 물질적 재산이나 사회적 지위나 세속적 처세가 아니라, 영적 유산을 남겨 주어야 합니다. 자녀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하느님 뜻에 따라 살아갈 수 있는 힘입니다. 곧 정직하고 올바르게 살아가는 곧은 마음, 다른 이에 대한 배려와 존중, 고통받는 이에 대한 공감과 연민, 영원한 가치를 볼 수 있는 지혜, 배려와 희생을 아는 성숙함 등입니다. 이 모든 것은 신앙을 바탕으로 하여 자라납니다. 신앙의 전달 안에서 부모와 자녀 관계는 거룩해지고, 진정한 의미의 성가정을 이루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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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아직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시는데,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분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있었다. 그래서 어떤 이가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당신께 말한 사람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46-50)
1)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은, ‘가족’에 관한 가르침이 아니라, ‘구원’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당신의 가족들과 친척들이 찾아온 일을 계기로 삼아서, 하늘나라에서 ‘당신의 참 가족’이 되는 방법을 말씀하신 것인데, 그 나라에서 예수님의 ‘참 가족’이 된다는 것은 곧 구원을 받아서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는 것입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라는 말씀은, ‘어떤 사람’이, 또는 ‘어떻게 사는 사람’이 나의 참 가족이 될 수 있겠느냐?라는 질문입니다. (‘그들은 내 가족이 아니다.’라는 뜻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라는 말씀은, 산상 설교에 있는,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라는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2) 성모님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신앙인들’ 가운데에서 첫 자리에 계시는 분이고, 신앙인들의 모범이신 분입니다. 성모님께서는 “믿을 수 없는 일도 믿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서 한 말은 모두 인간의 머리로는, 또는 상식적으로는 믿을 수 없는 일들에 관한 말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성모님께서는 그 말이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믿으셨고,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으셨습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7)라는 천사의 말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인간의 과학을 초월하고, 인간의 상식을 초월하는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성모님께서는 바로 그것을 믿으셨습니다. 동정녀가 남자의 도움 없이 아기를 잉태하는 것, 그 아기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아라는 것, 메시아의 나라가 영원하다는 것 등은 인간의 과학과 상식을 초월하는 일입니다. 사실 믿을 수 없어서 믿지 못하는 것이 죄는 아닌데, 믿지 못하면 하느님의 일에 참여하지 못하게 됩니다. 바로 그 점에서 성모님은 위대한 신앙인이십니다.
3) 성모님께서는 “내가 원하지 않아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면 순종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아직 결혼을 하기 전이고 동정녀인 자신이 갑자기 아기를 잉태하게 된다는 것은, 성모님의 입장에서는 원했던 일도 아니고, 그런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던 일이었는데도, 하느님의 뜻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기꺼이 순종하셨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는 응답의 말씀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니 저도 그 일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각자 원하는 일들이 있고, 원했던 일들이 원하던 대로 이루어지면 은총을 받았다고 좋아하고 기뻐하다가, 원하는 일은 안 이루어지고, 원하지 않는 쪽으로만 가게 되면 하느님을 의심하거나 원망합니다. <좋은 예가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의 인사 발령인데, 만일에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이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만 가겠다고 고집 부린다면, 교회는 그대로 병들어 버릴 것이고, 하느님의 뜻이 그들을 통해서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원하지 않는 곳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더라도 기꺼이 순종하는 것, 그것이 성모님을 본받는 믿음의 자세입니다. 신자들이 본당에서 어떤 직책에 임명될 때 받아들이는 일, 또는 반대로 그 직책에서 물러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4) 성모님께서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끝까지 절망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헤로데의 박해를 피해서 이집트로 피신해야만 했을 때에도 많이 고통스러우셨을 텐데, 그래도 하느님을 믿으셨기 때문에 절망하지 않고 고통을 참고 견디셨습니다.
성모님의 생애에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 때에, 사도들은 모두 달아나거나 숨어버리고, 다른 여자들은 극심한 슬픔과 고통 속에서 울고 있었지만, 성모님께서는 전혀 흔들림이 없으셨다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아마도 성모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가 예고한 일들이 십자가로 가로막히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으셨을 것입니다.
5) 성모님께서는 “믿음과 순종이란 전적인 헌신”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루카 1,38)라는 응답의 말씀이 바로 그것을 나타냅니다. 이 말씀은, “종이 주인에게 복종하듯이 주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겠습니다.”라는 뜻이고, 전적인 헌신을, 즉 당신의 전 생애를 모두 바치겠다는 결심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로마 14,8)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은 성모님의 믿음과 순종에 그대로(첫 번째로) 적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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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에 대한 신심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에 대한 단서를 발견합니다.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실 때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방문합니다. 고대 근동 지방과 성경 전통에서 “형제”라는 말은 한 어머니의 자식들뿐 아니라 가까운 친족까지 포괄합니다. 이어서 마태오 복음사가는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라고 서술하는데, 직역하면 ‘그러고서는 당신의 제자들 위로 당신의 손을 뻗으시며 또 이르셨다.’가 됩니다.
아울러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행동과 말씀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습니까? 이는 제자 공동체가 스승 예수님의 새로운 가정 공동체라는 신학적 의미로 풀이됩니다.
이 구절에서 ‘하느님’ 대신 ‘아버지’라는 칭호를 사용하여 제자 공동체가 지닌 가정으로서의 새로운 신원과 정체성이 드러납니다. 혈육으로 이루어진 가정 공동체의 중요성만큼 하느님의 뜻을 실천함으로써 새로이 구성된 가정 공동체의 중요성이 부각됩니다.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포함한 친족에게 면박을 주시기보다 새로운 교회 공동체의 사명을 더욱 강조하시려는 의도로 해석됩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제자이며 그분의 가정 공동체에 속합니다. 이 공동체의 본질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며, 이것이 곧 존재의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성모님처럼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찾고, 그 뜻을 삶에서 실천하도록 초대받은 복된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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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라는 표현 때문에 혼란스러워합니다. 마리아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에 의구심을 가지기도 하고 다양한 해석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를 소개한다면 당시에 ‘형제’라는 표현이 지금보다는 넓은 의미로 이해되었고 사촌들에게도 적용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이 강조하는 것은 새로운 관계입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을 형제자매로 생각합니다.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사람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으시는 것을 보여 주고 우리에게 증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죄인으로 여겨지던 이들과 함께 어울리시고 그들을 용서하시고 받아들이십니다. 이것 때문에 종교 지도자들과 마찰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과 과부들도 돌보시고 병자들을 고쳐 주시고 공동체에서 소외된 이들을 공동체 안으로 돌려보내십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기존의 관계에서 벗어나시어 새로운 관계를 형성해 가십니다. 제자들과 예수님의 관계도 이런 새로운 관계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 새로운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인이 가지는 새로운 정체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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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고찰하게 해 줍니다.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분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있었다."(마태 12,46)
예수님이 집 안에서 군중들에게 말씀을 들려주고 계실 때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집앞에 다다른 것 같습니다. 어느 친절한 이가 예수님께 이를 알리지요. 보통 사람이라면 가족이 우선일 테니까요.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49-50)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 곁에 있는 제자들을 가리키며 어머니고 형제라 하십니다. 육신과 인간 사회의 질서 안에서 태어나 자라셨지만 동시에 하느님과 같은 분이신 예수님은 영의 질서 안에서 모든 것을 포괄하고 또 초월하는 분이십니다.
"안"과 "밖"을 관상합니다. 예수님 말씀을 듣자 하니, 우리와 예수님과의 관계가 제도나 신분, 육적 관계나 물질적 기여도, 관습만으로 좌우되기는 어려워 보이네요. 이런 "밖"의 조건들에서 넉근히 우위를 차지한들, 그것들만으로는 자신이 있는 "밖"으로 예수님을 불러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과 진정으로 관계 있는 존재가 되려면 우리가 예수님 곁으로 가야 합니다. 속된 말로 계급장 다 떼고 가면도 다 벗어버리고, 영혼의 민낯과 알몸으로 그분이 계신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거기서 그분과 맺는 관계를 통해 우리는 주님의 어머니고 형제가 됩니다.
먼저 우리는 예수님이 계신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거기서 말씀을 듣습니다. 그분의 말씀이 우리를 그분과 강하게 결속시킵니다. 그리고 듣고 품은 말씀을 실행해야 합니다.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 행동을 통해 세상에 탄생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를 통해 육화하는 것이지요.
그러니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예수님의 어머니고 형제일 수밖에 없습니다. 영혼의 태 안에 그토록 귀하신 말씀을 잉태해 품고 세상에 낳아주었으니 말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시온에 당신의 현존을 약속하시는 주님의 밝은 음성이 울려퍼집니다. "딸 시온아,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정녕 내가 이제 가서, 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즈카 2,14)
주님께서 우리 한가운데에 몸소 들어와 머무르시겠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그분 계신 곳에 들어갈 수 없으니 그분께서 친히 움직이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게 되면 우리가 있는 곳이 더 이상 "밖"이 아니라 "안"입니다.
"모든 인간은 주님 앞에서 조용히 하여라."(즈카 2,17)
그분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구원의 때에 모든 인간은 삼가고 경외하며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분이 들어오시니 모든 분심과 소음은 잠잠해져야 합니다. 말 많고 탈 많은 이 세상에, 우리 존재에 하느님께서 친히 개입하시는 그때, 온갖 인간의 말과 인간의 행위는 그만 숨을 죽이고 그쳐야 합니다. 말씀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셔야 하고, 움직이시는 분도 오직 그분이셔야 합니다. 그분의 시간이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복음 속 예수님은 어머니 마리아와의 육친관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리아께서 육적으로만이 아니라 영적으로도 가장 가까운 관계임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마리아 안에 들어 오실 때 마리아는 순종과 침묵으로 인류 역사상 가장 귀한 열매를 품으신 것이니까요. 마리아의 순종은 이 세상에 하느님의 현존을 가능케 했습니다. 구원이 들어와 거처를 삼으신 것이지요.
사랑하는 벗님! 성모님의 봉헌을 기리며, 침묵과 순종 안에 구원의 말씀을 품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말씀을 품고 살아가며 실천으로 열매 맺는 우리는 이미 주님의 어머니고 형제랍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은 행복하여라."(복음 환호송)
문 밖에서 서성대지 말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예수님 곁으로 다가갑시다. 말씀으로 우리와 함께하시고자 우리에게로 마중나오시고 성체로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주님을 기쁘게 맞이합시다. 그렇게 그분과 하나되어 살아가는 벗님을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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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네가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을 가져라.”(19,17)
오늘 우리가 들은 루카 복음은 마태오 복음과 그 내용에서 약간의 차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마태오는 어떤 주인이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그 능력에 따라 각각 5, 2, 1 탈란트를 맡기고 떠나는 데 반해, 루카는 왕위를 받기 위해 먼 길을 떠나는 한 귀족이 10명의 종들에게 똑같이 미나(=금화) 한 개씩을 주고 떠납니다. 루카는 비유의 배경에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건을 토대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기원전 4년경 헤로데 대왕이 죽었을 때, 그의 아들 아르켈라오가 왕위 계승의 청탁을 위해 로마로 갔던 사실(19,12), 백성의 대표단이 이를 반대한 사실(19,14), 그리고 실제로 아르켈라오가 로마 황제로부터 왕위를 받지 못하고 유다와 사마리아지방의 영주로만 책봉되어 돌아와서 왕위 계승을 반대하던 사람들을 모조리 참살한 사실(19,27) 등이 그것입니다.
마태오복음에서는 사람마다 타고난 재능이나 능력이 다름을 전제로 하고, 각 사람에게 적당한 금액을 맡기고 주인이 떠납니다. 하지만 루카는 열 사람 모두에게 동일한 금액 한 미나를 주고 떠납니다. 여기서 동일한 액수인 미나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언뜻 먼저 다가오는 생각은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각기 다른 능력이나 재능을 주셨지만 본질적으로 인간은 모든 점에 차이나 차별이 없다는 사실을 말씀하고자 하신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느님은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시는”(마태5,45) 분이시기에 인간을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방점은 동일한 은총과 사랑을 받는 우리 자신에게 주어진 삶과 삶의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고 봅니다. 그래서 첫째와 둘째 종의 태도보다는 다른 종의 주인에게 대한 태도에서 복음의 메시지를 찾아보아야 하리라 봅니다.
다른 종은 돌아온 주인에게 “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수건에 싸서 보관해 두었습니다. 주인님께서 냉혹한 사람이어서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시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시기에, 저는 주인님이 두려웠습니다.”(19,21)라고 고백하는 가운데 주인에 대한 평소의 두려운 생각과 이런 주인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실수를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혹시 이 종의 모습에 견주어 여러분에게 있어서 하느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이 다른 종에게 있어서 주인 곧 하느님의 이미지는 전형적인 벌주고 심판하는 하느님 상을 갖고 있습니다. 더욱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시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시는 두려운 하느님이시기에 혹시라도 맡긴 금화를 잃게 될 때. 받을 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곧 하느님에 대한 신뢰의 부족이며 그러기에 그 종의 삶은 전혀 여유롭거나 자유롭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른 종이 선택한 삶은 안전 제일주의, 무사안일주의, 복지부동과 무책임으로 점철된 불행한 삶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우리네 삶 혹은 신앙생활이 이렇게 된다면 얼마나 불행하겠습니까? 이러한 다른 종의 삶의 태도나 방식을 참으로 하느님께서 원하신다고 생각하십니까? 한 마디로 다른 종은 잘못 알고 있었으며, 스스로 선택한 잘못된 삶의 태도나 방식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스스로 단죄한 결과를 낳습니다. 이 삶이 끝나면 모든 것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으로 나아가기에 지금 주어진 삶에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고,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충실해야 합니다.
실패를 두려워하기보다 최선을 다하려는 마음 자세와 그리고 그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하느님의 자비에 모든 것을 내맡긴다면, 이런 우리의 삶의 노력을 보시고 오히려 주님은 더 큰 상을 내려 주시리라 믿습니다. 작은 일, 곧 세상일에 충실하였으니, 더 큰일 곧 천상의 일을 맡기시리라 믿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말합니다. “하루를 돌아볼 때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했느냐이다. 적은 사랑으로 많은 일을 하는 것보다 많은 사랑으로 적은 일을 하는 것이 낫다.”라고 했습니다. 하루가 아닌 일생도 역시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모든 일을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기쁨으로 시작하고 모든 일을 감사하며 마친다면 그것이 곧 하느님께서 가장 바라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아 세웠으니, 가서 열매를 맺어라. 너희 열매는 길이 남으리라.”(요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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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부부싸움을 안 하는 집이 없다고 말합니다. 하긴 남남이 만나서 서로 맞춰서 산다는 것이 절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부모님께서 살아계실 때 부부싸움 하시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물론 큰 목소리가 날 때가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그래서 남들이 서로 물건을 부수면서 싸운다는 것도, 말다툼으로 며칠 동안 말하지 않는다는 것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부부싸움 후 이혼하고 싶어도 자식 때문에 이혼하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자녀 때문에 억지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가 이혼해서 한 부모 가정으로 자란 아이의 정서보다 이혼하지 않고 같이 살면서 계속 싸우고 상대를 비난하는 말을 듣고 자란 아이의 정서 문제가 더 심각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아이 때문이라는 말을 하려면, 절대 아이 앞에서 싸워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상대 때문이라는 말을 하며 싸우지만, 그때 아이를 위한다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이 때문이라면 좋은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부모님의 함께하는 모습을 떠올리며 이제야 감사함을 깨닫습니다. 얼마나 좋은 모습을 자녀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셨을까요? 비록 배우자 없는 저의 삶이지만, 저 역시 좋은 모습을 세상에 보여주며 최선을 다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함께 살아가는 이 세상에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주위 사람들의 영향을 받는 것처럼, 그들도 제게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성모님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실 때 은총을 가득히 채워주신 성령의 감도로 성모님께서 아기 때부터 하느님께 봉헌되신 것을 기리는 날입니다. 성모님의 봉헌은 성모님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가장 큰 것은 성령의 감도이지만, 성모님의 부모님이신 요아킴과 안나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오실 수 있었던 것은 이렇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이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당신을 찾아온 어머니와 형제들을 뒤로 하고, 당신 제자들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되어 주위 사람에게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처럼, 우리가 모두 한 가족이 될 수 있도록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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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형제님 자매님>
마태오 12,46-50 (예수님의 참가족)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시는데,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분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있었다. 그래서 어떤 이가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당신께 말한 사람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형제님 자매님>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오 12,50)
형제님 자매님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이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이에게
형제님 자매님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이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이로부터
형제님 자매님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이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이와
형제님 자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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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 나라의 가족>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며 잘났건 못났건, 경건한 사람이건 죄인이건 상관없이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입을 수 있고 하느님의 백성이 될 수 있음을 선언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예수님의 행동은 오해를 사기도 했고,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생겨났습니다. 가족과 친지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미쳤다는 소문이 들리자 그를 붙잡으려 나서기도 하였습니다.(마르 3,21) 예수님께서 의인과 죄인,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별하거나 거부하지 않으시고 그들과 함께 섞이고 어울렸기 때문입니다. 힘들어 아파하는 곳에 그분이 사랑으로 계셨습니다. 열린 마음으로 모두를 받아들이신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 안에서도 살아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시는데, 어떤 이가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마태 12,48)고 반문하시며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들이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이 말씀은 하느님 나라의 참된 가족에 대한 기준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형성되는 새로운 가족은, 더 이상 혈연관계에 기반을 두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데에 기반을 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족 공동체를 형성하고 결속시키는 데 초석이 되는 것은 혈연, 학연, 지연이나 좋은 감정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의지입니다. 그러므로 설혹 예수님과 가족관계에 있는 사람들도 하느님의 뜻을 실행할 때 비로소 그분의 참다운 가족이 될 수 있습니다. 아시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내 뜻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을! 내려놓으려면, 그분의 뜻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하고, 그 신뢰가 믿음이죠. 아버지의 뜻이 나에게서 이루어지도록 내 삶을 맡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7)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려면 그분의 뜻을 실행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성모님의 삶을 보면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가브리엘 천사에게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하고 응답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을 지닌 복된 분으로서 사셨습니다. 마지막 아드님이 십자가의 죽임을 당하는 것까지도, 감당하시면서 흔들림 없는 믿음을 지키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모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참된 가족에 속하십니다. 성모님은 성령의 은총으로 처음부터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된 분이시고. 그 품위를 한 번도 잃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도 비록 예수님과 혈연관계에 있지 않더라도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면 누구든지 그분의 가족이 됩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해를 형님으로 달을 누님으로 고백했습니다. 해와 달은 생겨난 뒤로 하느님을 거역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지구는 우리 공동의 집이고, 하나인 인류 가족입니다. ‘가톨릭 교회는 모든 사람을 따뜻하게 맞아들이며 모든 사람을 사랑합니다. 어디서 왔든, 가난하든 부유하든, 어느 민족에 속하든, 사회적 출신이 어떠하든 모두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한 가족입니다.’(프란치스코 교황)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이들은 서로가 형제자매입니다. 많은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행동하는 믿음으로 형성되는 새 가족의 품위를 지켜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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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입니다. 성모님께서 하느님께 봉헌된 것을 기리는 날입니다. 곧 성모님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실 때 가득했던 그 성령의 감도로 어린 시절부터 하느님께 봉헌되신 것을 기리는 날이다.
전승에 의하면, 성모님은 세 살 때, 그의 부모인 요아킴과 안나에 의해 하느님께 봉헌되었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찾아온 어머니와 형제들을 문전박대하십니다. 사실, 마리아는 이와 같이 아들로부터 냉대당한 것은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에 잃었던 아들을 성전에서 찾았을 때,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라고 했을 때도 그러했고,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어머니가 예수님께 “포도주가 없구나.” 하였을 때,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요한 2,4) 하였을 때도 그랬습니다.
이는 마치, 옷가지와 음식을 마련하여 찾아오는 어머니를 돌로 쫓았던 성철스님 이야기를 떠올려줍니다. 이는 참으로 불효처럼 여겨지지만, 사실은 진리를 향한 결연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냐?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이다.”(마태 12,48-50)
이 말씀은 언뜻 보기에는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내치신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성모님에 대한 외적인, 가시적인 이해를 뛰어넘도록 해줍니다. 사실, 성모님께서는 육적인 혈연으로서만이 아니라, 영적으로 당신의 첫 번째 가족이셨음을 드러내줍니다.
왜냐하면 어머니 마리아는 그 누구보다도 먼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천사 가브리엘의 방문을 받고 아기예수님을 잉태하실 때 바로 그렇게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였습니다. 그렇게 성모님은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여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그러니 분명, 성모님께서도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분으로서 ‘예수님의 영적 가족’이 되셨습니다.
이처럼, 성모님께서는 어렸을 때부터 또한 아기를 잉태하는 순간부터 자신을 봉헌하고 또한 축성 받으셨습니다. 결국, 성모님도 예수님도 다 같이 아버지께 봉헌하고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사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님과 함께 하루하루를 아버지께 봉헌하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면서 살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제 자신을 들여다봅니다. 성모님과 그리스도와 함께 아버지를 향하여 있는지, 그분의 뜻을 실행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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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마태 12,48)
주님!
당신께서는 당신의 혈통에 저를 입적시키셨습니다.
당신과 함께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형제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오니, 제 삶이 당신 신성으로 거룩해지게 하소서!
제 안에서 당신의 말씀이 자라나고, 아버지의 뜻이 실행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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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들>
“거룩하신 어머니, 찬미받으소서. 당신은 하늘과 땅을 영원히 다스리시는 임금님을 낳으셨나이다.”(입당송)
요즘 산책때 수확이 끝난 텅빈 밭의 흙을 바라보며 잔잔한 감동에 젖습니다. 흙은 제 영원한 스승입니다. 흙같은 어머니를 생각하며 그 겸손의 덕을 배웁니다. 며칠전 써놨던 글입니다.
“흙의 침묵
흙의 겸손
흙의 사랑
우람한
무우 자식들
초연히 다 떠나 보내고
늘 깨어
묵묵히 기다리며 준비하는
어머니 흙, 흙같은 어머니”<2024.11.13.>
흙(humus)을 닮아 겸손(humilitas)한 사람(homo)입니다. 겸손도 사람도 흙에 어원을 둡니다. 수도원내에서야 흙냄새를 맡으며 흙을 보며 흙길을 산책하지만 수도원정문을 나서면 온통 포장으로 어머니 흙을 보기가, 흙길을 걷기가 참 힘든 사막한 현실입니다. 더불어 며칠전 나눴던 ‘소망’이란 글도 다시 나눕니다. 청정과 온유의 마음 역시 마리아 어머니의 마음처럼 생각됩니다.
“차가운 날씨
청정해서 좋다
맑고 깨끗하다
살짝 덮인 회색 구름 사이
쏟아지는 햇빛
온유해서 좋다
따뜻하고 부드럽다
청정淸淨과 온유溫柔를 겸할 수 있다면”<1997.12.2.>
요즘 만추의 위령성월이 청정한 날의 연속입니다. 청정에 온유를 겸할 수 있다면 더할나위 없이 이상적일 것입니다. 아주 예전 미국에 있는 미네소타주 생존 수도원에 머물 때 노수도사제와의 우정을 잊지 못합니다. 어느 추웠던 날 노수도사제에 악수를 청하니 손이 차다며 사양할 때 드린 짧은 덕담과 더불어 시작된 우정입니다.
“Your hands are cold, but your heart is warm!”
(네 손은 차나 네 마음은 따뜻하다!)
날씨는 차가워도 마음은 늘 따뜻하고 부드러웠으면 좋겠습니다. 바로 오늘 기념하는 복되신 동정마리아 성모님 마음이 그러할 것입니다. 오늘 옛 어른이 말씀도 좋은 깨우침이 됩니다.
“마음에는 저마다의 알맞은 자리가 있다. 감정의 자리를 찾을 수 있어야 흔들리지 않게 된다.”<다산>
“희로애락이 생겨나지 않은 평온한 상태를 ‘중中’이라 하고, 질서에 맞게 감정을 발현하는 것을 ‘화和’라고 한다.”<중용>
하느님을 중심으로 한결같이 충실한 삶을 살 때, 마음과 감정의 순화로 평온하고 질서에 맞는 마음에 감정일 것입니다. 바로 성모님의 마음과 감정이 이러했으리라 생각됩니다.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입니다. 오늘이 영명축일이라며 각별한 기도를 청하던 신심깊은 마리아 자매도 생각이 납니다. 로마가톨릭이나 동방정교회나 오늘 똑같이 축일을 지냅니다만 동방정교회는 ‘지극히 거룩하신 하느님의 어머니 입당 축일’이라 부릅니다.
이 축일은 신약성경에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 200년경에 쓰여진 외경인 야고보 원복음서에 근거합니다. 이 문헌에 따르면 요아킴과 안나는 오랫동안 자식이 없어 걱정중 하늘로부터 한 아이를 갖게 되리라는 계시를 받고 딸 마리아를 갖게 되었고, 3세 정도 나이에 성전에 봉헌합니다. 전승에 의하면 마리아는 성전에 있는 동안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기 위한 준비과정으로 종교교육을 받습니다.
콥트교 전승에 의하면 마리아의 부친 요아킴은 그녀가 6세때, 모친 안나는 8세 되던 해에 사망합니다. 증명되지 않은 전설이지만 한가지 중요한 것은 마리아가 유년시절부터 하느님께 전적으로 봉헌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며 이를 토대로 마리아의 자헌 축일이 생기게 됩니다.
동정녀 마리아의 자헌 축일은 543년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이나누스 1세 황제의 명령으로 과거 예루살렘 성전이 있던 곳 근처에 비잔티움 양식으로 건축된 성 마리아 대성당의 축성식에서 유래합니다. 동방에서 오랫동안 기념되었던 이 축일은 9세기쯤 이탈리아 남부 수도원들에서 기념이 시작되었고 1372년 교황 그레고리오 11세는 아비뇽에 있는 교황 전용 경당에서 처음으로 이 축일을 기념합니다.
그후 1472년 로마 미사 경본에 처음으로 기재되었다가 사라졌지만, 1585 교황 식스트 5세는 이 축일을 다시 허용했고, 1597년 교황 클레멘스 8세는 2등급 축일로 지정했으며, 마침내 1969년 로마 전례력에 그대로 남아 지금까지 계속 오늘 11월21일 ‘복되신 동정마리아 자헌 기념일 미사’를 봉헌하게 됩니다.
오늘 제1독서 즈카르야 예언서의 말씀이 은혜롭습니다. 시온의 딸은 바로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집단인격으로서의 이스라엘 백성을, 우리 공동체의 형제자매들을 상징합니다. 그러니 성모 마리아는 물론 우리 각자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이해해도 무방합니다.
“딸 시온아, 기뻐하며 즐거워하여라. 정녕 내가 이제 가서, 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그날에 많은 민족이 주님과 결합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모든 사람은 주님 앞에서 조용히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의 거룩한 처소에서 일어나셨다.”
그날이 바로 오늘이요, 예언 그대로 오늘 복음에서도 실현되고 오늘 우리 교회공동체에서도 실현되어 주 예수님을 중심으로 참가족이, 한가족이 되어 기뻐하며 즐거워하며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은 교회 공동체의 원형을 보여줍니다. 그대로 예수님 중심의 공동체를 미사장면을 연상케 합니다.
밖에서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당신을 찾고 있다는 전갈에 주 예수님은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하고 반문하신후, 당신을 에워싸고 있는 당신 공동체의 제자들을 가리키며 이르시니 오늘 복음의 절정이자 요약입니다. 바로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주 예수님은 혈연이 아닌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들이 당신의 참가족이자 한가족임을 천명하십니다. 주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들은, 그가 언제 어디에 살든 모두 당신의 한가족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아버지로, 성모님을 교회의 어머니로 둔 우리들은 모두 한가족의 형제자매들임을 깨닫습니다. 우리 한가족 교회 공동체 모두의 어머니인 마리아 성모님을 잊어선 안됩니다.
평생 그 누구보다 한결같이 아드님과 함께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해온 마리아 성모님이야 말로 봉헌 삶의 영원한 모범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복되신 동정 마리아 자헌 기념미사를 봉헌합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의 참가족, 한가족을 이뤄주시며, 더욱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참 삶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행복하여라, 하느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들!”(루카11,2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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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봉헌과 은총>
은총은 선물입니다. 거저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돈을 주고 사는 것이 아니고, 일의 대가로 받는 것도 아니며, 공로의 상급으로 받는 것도 아니고, 애써 얻는 게 아니라 거저 받는 것이며, 그러기에 능동태가 아니라 완전한 수동태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본래 이런 것인데 오늘 성모 자헌 축일의 봉헌기도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성자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전구를 들으시어, 봉헌하여 은총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없게 하시고, 청원하여 응답을 얻지 못하는 사람이 없게 하소서.”
그러니까 봉헌하여 은총을 받는 측면도 있다는 말이고, 오늘 축일을 지내는 성모님처럼 자신을 봉헌하여 우리도 은총이 가득한 사람이 되라는 기도입니다.
성모님처럼 아버지의 뜻이 그대로 이루어지도록 완전한 순종의 수동태가 되는 것도 은총의 길이지만 성모님처럼 자신을 온전히 내어드림으로써 능동적 사랑의 수동태가 되는 것도 은총의 길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능동적으로 수동태가 되게 하고, 사랑은 능동적으로 자신을 봉헌하게 하며, 사랑은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갈망하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사랑의 갈망이 은총을 받기 위한 능동적인 자세입니다.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이루어지라는 순종보다 더 적극적인 은총의 자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종보다 동정녀가 더 은총에 어울리겠지요?
이렇게 비유하면 어떻겠습니까? 종의 순종이 계곡 저 아래에서 은총이 물처럼 내려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라면 동정녀의 사랑은 원천을 향하여 물길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사랑과 은총의 원천을 향해 열정적으로 산을 치오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사랑과 은총을 갈망하며 자신을 봉헌한 마리아에게 은총을 거절하지 않으셨던 것처럼 우리가 마리아처럼 자신을 봉헌하며 은총을 청하면 우리에게도 거절하지 않고 은총을 주실 것이라는 믿음과 희망으로 은총을 갈망하고 청하는 우리가 되기로 결심하며 그 결심을 봉헌하는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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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마태12,48)
<더해진 것을 향해 나아가자!>
오늘 복음(마태 12,46-50)은 '예수님의 참가족'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시는데, 어떤 이가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마태 12,47) 하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마태12,48) 하고 반문하시면서,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렇게 이르십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의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49)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입니다.
'자헌(自獻)'은 '성모 마리아의 부모(요아킴과 안나)가 세 살 된 마리아를 성전에서 하느님께 봉헌 한 일'이라는 뜻이며, 오늘은 이를 기념하는 날입니다.
성모님은 하느님 구원 사업의 결정적 도구로 선택되어진 분입니다. 사람의 모습을 지니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시는 결정적 태가 되셨고, 주님을 온전히 따르신 첫 제자가 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관계를 확장시켜 주십니다. 그래서 육의 관계를 뛰어넘어 영의 관계로 확장되어집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로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모든 사람이 내 형제이고 누이이고 어머니가 되게 해 주십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인생'은 '플러스(+) 알파의 인생', 곧 '더해진 인생'입니다. '인성(사람)에 신성(하느님)'이 더해졌고, '육신의 관계에 영적 관계'가, '이 세상 것에 저 세상 것인 영원한 생명'이 더해졌으며, 결정적으로는 '죽음에 부활'이 더해졌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더해진 은총에 감사드리면서, 더해진 은총을 향해 나아가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애쓰는 성실한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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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마태 12, 49)
봉헌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신
성모님의
삶을
만납니다.
세상의 많은
길 중에서
가장 뜨거운
길은 봉헌의
길입니다.
봉헌은
고정된
우리의 시각을
깨뜨리며
성장합니다.
하느님을 향한
봉헌은
확고한 우리의
믿음입니다.
신앙의 실천인
봉헌은
강한 유대감으로
너와 나를
이어줍니다.
이렇듯
봉헌의 삶은
자아를 비우는
사랑입니다.
비우지 못하면
갈등과 반목으로
치닫게 됩니다.
참된 모습인
봉헌의 사랑은
간절한 기도로
드러납니다.
끊임없이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는
어머니의 삶을
뜨겁게
만납니다.
무한한 실천의
자리가
우리의
현실입니다.
현실의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은
끊임없는
봉헌입니다.
신앙인의 완성은
봉헌입니다.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봉헌의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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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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