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르페브르의『리듬분석』
『리듬분석(Ele、ments de Rythmanalyse)』은 ‘일상생활 비판’으로 유명한 프랑스 철학자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bvre)의 유작이다. 1991년 르페브르가 세상을 떠난 후, 이듬해 동료이자 친구인 르네 루로에 의해 출간됐다. 이 책에는 루로의 서문과 함께, 르페브르가 그의 마지막 아내 카트린 레귈리에와 함께 쓴 「지중해 도시들에 대한 리듬분석 시도」가 부록으로 실려 있다. 한국어판에는 르페브르 연구자이자 영어판 번역자인 스튜어트 엘든의 해제와 조명래 단국대 교수의 해제, 『리듬분석』에 앞서 발표된 「리듬분석 프로젝트」가 추가로 수록됐다. 르페브르는 서론에서, “리듬들을 분석하기 위한 하나의 과학, 새로운 지식의 영역을 정초하는 것이 이 책의 목표”라고 밝히고 있다.
왜 리듬인가?
기존의 신학, 철학, 자연과학이 조각낸 지식들을 하나로 융합하기 위해, 시간과 공간, 주체와 대상의 분리를 넘어서기 위해, 데카르트 철학 전통 이래로 경시돼 온 ‘감각적인 것’의 지위를 되찾기 위해 리듬이라는 개념이 필수적으로 요청되기 때문이다. “장소와 시간, 에너지 소비의 상호작용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나 리듬”이 있다. 주지하다시피, 르페브르는 마르크스주의가 시간론에 경도됐다고 비판하면서 『공간의 생산』 등의 저서를 통해 공간적 사유와 비판을 전개했다.
인생의 막바지에 그가 관심을 기울인 리듬의 개념은 어쩌면 이 여정의 자연스러운 귀착점이었는지도 모른다. “리듬의 이론적 지위가 확고해지고 사유를 위한 유효한 개념, 실천을 위한 도구로서 인정받는다면, 리듬이야말로 지금까지 철학적 체계가 결여하고 정치조직들이 망각해 왔음에도 감성과 육체에 의해 체험되고, 느껴지고, 만져진 바로 그 구체적 보편이 아니겠는가?”
인생 막바지에 관심 기울인 리듬의 개념
르페브르는 리듬의 성격을 다리듬성(polyrythmie), 조화리듬성(eurythmie), 부정리듬성(arythmie) 등으로 나누고 리듬분석 과정에 적용한다. 우리는 자신의 몸을 구성하는 리듬들을 기준으로 해서만 자신의 리듬 혹은 외부의 리듬을 파악할 수 있다. 우리의 “몸은 메트로놈 구실을 한다.” 그러나 다리듬성이나 조화리듬성 상태에서는 개별적인 리듬들과 그것들의 어울림을 모두 파악하기란 불가능하다. 우리는 대개 장애, 질병, 사고의 순간에, 즉 부정리듬성을 통해 특정 리듬을 파악한다.
새로운 리듬이 기존의 리듬을 대체할 가능성이 대두하는 것도 이런 순간이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생활을 구성하는 리듬들을 파악하고 분석하는 일만큼이나 그 속에 새로운 리듬들을 새겨 넣는 실천은 어렵다. 우리의 자유 역시 사회적 생산물이기 때문이다. “거리에서 사람들은 왼쪽 혹은 오른쪽 방향을 선택할 수 있지만, 자신의 걸음걸이, 그 걸음걸이의 리듬, 제스처는 쉽게 바꾸지 못한다.” 왜 그럴까. 인간 역시 동물처럼 조련되기 때문이다. 이 책 4장 ‘조련’은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을 연상시킨다. 조련은 리듬을 통해 이뤄진다. 조련사는 선형적 리듬과 순환적 리듬을 적절히 결합할 줄 안다.
근대 서구사회와 식민지에서는 군사적 모델이 일반화됐다. 시민들은 학교와 공장, 군대가 강요하는 반복적인 리듬들을 따르도록 길들여졌다. 그럼에도 우주와 생명의 근본을 이루는 순환적 리듬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일률적으로 강요되는 반복의 리듬 속에서 예기치 않은 리듬이 불거져 나올 수도 있다. 반복은 차이를 생산하기 때문이다. 르페브르는 일상의 반복 속에서 창조적 순환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르페브르가 ‘전유된 시간’이라고 명명하는 시간은 “시간을 잊어버린 시간으로서, 이 시간 동안 시간은 중요하지 않으며, 계산되지도 않는다.” 자본이 강요하는 반복적인 리듬에 의한 상품 생산 노동에서 벗어나, 고유의 ‘작품’을 생산하는 창조적 행위 속에서 우리는 그런 충만한 시간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미디어는 우리의 일상을 채우는 리듬들을 생산한다. 미디어는 “무개매적인 것과 현전성을 지우고, 현재를 위해 현전과 현재의 차이를 지우는 자신의 행동을 숨긴다.
” 現在(pre、sent)와 現前(pre、sence)은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개념쌍이다. 르페브르에 따르면 “현재는 현전의 외양을 취하며 사회적 실천 속에 시뮬라시옹(시뮬라크르)을 주입한다. 현재는 살아 있는 것을 따라하거나 감추면서 시간을 채우고 점령한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미디어화한(매개된) 일상 속에서 살아간다. 미디어의 재현이 신속하고, 생생하고, 개별화될수록 우리의 일상은 현전성을 상실한다.
현대의 커뮤니케이션 수단에 의해 시간과 공간의 거리와 간극이 거의 사라졌다. 우리는 사건들이 벌어지는 그 순간에 그것들을 지켜본다. “미사일과 로켓이 우리의 눈앞에서 목표물을 향해 날아간다. 우리는 그곳에 있다. ─ 하지만 그곳에 있지 않다. 그곳에 있다는 느낌이 들 뿐이다.”
모순적인 이중성이 자본의 리듬 구성
마침내 6장 ‘시간의 조작’에 이르러 르페브르는 자본주의적 리듬에 대한 구체적인 비판을 시도한다.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자본은 자연을 죽인다. 자본은 도시를 죽인다. 그럼으로써 스스로의 근거를 파괴한다. 자본은 예술적 창조, 창조적 능력을 죽인다. 자본은 급기야 최후의 원천인 자연, 조국, 뿌리마저 위협한다. 자본은 인간을 고향에서 쫓아낸다. 사람들은 시도 때도 없이 기술을 내세운다. 그러나 기술은 살아 있는 것에서 산출되는 것이 아니다.”
르페브르는 생산하고 파괴하는 모순적인 이중성이 자본의 리듬을 구성한다고 말한다. 가령, 주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원자력 발전소를 짓고 농촌 마을 한복판에 고압 송전탑을 세우는 것은 현대적 도시의 일상생활에 필수적인 전력 에너지를 생산·운반하기 위함이지만, 그것은 우리 모두의 건강과 생명을 담보로 하여 이뤄진다.
일본의 도호쿠 지역을 덮친 강력한 지진과 쓰나미는 인간의 힘으로 제어할 수 없는 대자연의 순환적 리듬에 의해 발생한 것이지만, 연이은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는 인간 자신의 손으로 만든 과학기술의 가공할 파괴력을 여실히 드러내었다. 그뿐인가, 2008년 서브프라임 사태로 촉발된 세계 금융 위기는 자본주의의 표면적 조화리듬성 뒤에 숨어있던 무정부성(부정리듬성)이 폭로되는 계기가 됐다.
미디어와 화폐가 매개하는 시뮬라크르의 일상에서 벗어나 진정한 현전성을 되찾기 위한 노력이 절실한 시점이다. 이 책은 리듬분석이라는 새로운 방법론에 대한 밑그림에 불과하다. 아쉽게도 르페브르는 후속 저작들을 내놓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우리의 몸에서 출발해 사물과 자연, 생명과 사회의 구체성과 현전에 접근하는 리듬분석의 과학을 정교하게 가다듬고 창조적으로 계승하는 일은 우리 자신의 몫으로 남아있다.
□ 필자는 파리8대학 철학과에서 공부하고 한국외국어대 통역번역대학원을 졸업했다. 『프랑스는 몰락하는가』, 『리듬분석』 등 다수의 책을 옮겼으며,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번역에도 참여하고 있다.
정기헌 전문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