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리앙)t.t
서울지하철 7호선 장승배기역 일대는 조선 정조 임금이 아버지 사도세자의 수원 묘소(융건릉)에 가는 능행길에 잠시 쉬었던 곳이라고 한다. 정조는 이곳에 호랑이가 자주 출몰한다는 말을 듣고 맹수를 쫓기 위해 두 개의 정승을 세우라고 명을 내렸다. 그때부터 그 일대에 장승배기라는 지명이 붙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이 장승 앞에서 동제(洞祭)를 지내며 마을의 안전을 기원했다.
1991년 장승배기역 6번 출구 부근에 장승 두 개가 다시 세워졌다. 매년 10월 24일에 장승제를 지내고 있다. 장승배기 장승제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열리지 못하다가 지난해에 4년만에 재개되었다. 장승제는 2015년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행사는 노량진2동 주민자치회에서 주관한다.
장승배기의 장승은 왕명으로 세워진 유일한 장승으로, 대방장승이라고도 하며 전국 장승의 우두머리로 대접받는다.
장승배기라는 지명은 서울 동작구 노량진에만 있는 게 아니다. 서울에도 강서구 염창동에도 장승배기라는 지명이 존재했으며, 서초구 염곡동에 장승꽂이, 송파구 삼전동에 장승골이라는 지명이 있었다. 장승은 20세기 전반까지 마을이나 사찰입구의 도로표지(路標)의 역할을 했다. 일제시대 연구에 의하면 흑석동, 동소문 밖에도 장승이 있었다. ‘장승배기’라는 명칭은 장승이 서 있던 고갯길을 지칭하는 보통명사형 지명이었는데 노량진 장승이 갖는 상징성으로 지금까지 지명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권혁희, 2014)
정조가 능행길에 장승을 세우라고 명했다는 기록은 없다. 해동지도(海東地圖)라는 고지도엔 노량진 장승배기길을 ‘과천계장생현로(果川界長牲峴路)’라고 표기되었다. 이 지도는 영조대에 제작되었는데, 정조 이전에 장승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정조가 만들라고 했다는 구전은 장승을 새로 만들어 세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조선후기 임금의 언행을 기록한 일성록(日省錄) 1786년(정조 10)조에 능행길인 수원 지지대(遲遲臺) 고개에서 현륭원까지 5리마다 11개의 장승이 있었다고 한다. 판소리 ‘변강쇠가’의 사설에도 노량진 대방장승이 언급되었다. ‘변강쇠가’ 사설에 따르면, 노량진 대방장승이 변강쇠의 만행에 분노해 전국의 장승을 모이도록 해 의논을 했는데, 여기에 사근내 장승과 지지대 장승 등 정조의 능행길에 있는 장승이 모였다고 한다.
장승배기 인근 지명이 번대방(番大方)인데, 이는 대방장승이 번을 서며 지킨다는 의미다. 번대방은 지금의 대방동과 신대방동이다
장승배기의 장승은 언제 사라졌을까. 일제시기인 1935년경에 일대에 도로가 개설되면서 소멸된 것으로 추측된다. 1940년에 황해도에서 노량진으로 이사를 한 모씨에 의하면 장승이 원래 있었던 곳에서 약간 벗어나 서 있었다고 기억하는 점에서 1930년대에 원래 위치에서 약간 이동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하지만 해방과 6·25를 거치며 장승을 보았다는 사람이 없다. 경기도 시흥군이었던 그 일대엔 서울이 팽창하면서 무허가 주택이 들어섰고, 고갯길에 장승배기라는 지명만 남게 되었다. 서울로 편입된 이후 관악구였다가 1980년 분구 이후 동작구 관할이 되었고, 1987년에 장승배기라는 표석이 설치되었다.
장승은 1991년 노량진 2동 바르게살기위원회와 주민대표에 의해 제작되어 그해 10월 24일 재건되었다. 하지만 곧이어 장승은 수난을 당했다. 그해말에 기독교단체들이 철거시위를 벌였고, 지하여장군 밑둥이에 불을 붙여 태운 그을림이 발생했다. 1994년 1월엔 단체명 불명의 기독교 교인에 의해 지하여장군 밑둥이가 전기톱에 의해 잘려나갔다. 잘려나간 부분은 두달 후에 목심을 끼우고 쇳조각을 덧대 다시 복원했다. 장승제는 1991년 장승 재건립과 함게 복원되었다.
우리나라의 전통문화 지키기 정말 빡세네요.
일제와 기독교는 진짜...
출처 :http://www.atla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7615
첫댓글 클리앙 댓글 중---
스윙체어
특정 종교에게 장승은 없애버려야 할 대상이긴 했습니다. 구한말 특정 종교의 전도사(불교용어입니다 오해 마세요)가 들어오면서 장승 탄압이 시작되었고, 일제시대에 이르러서는 일제의 힘을 빌어 남아 있던 많은 장승이 사라지게 되었죠.
그리고 6.25 때는 다시 세워졌던 장승들 이번엔 총을 들고 다니며 우상을 사냥하던 이들에게 사냥감이 되었죠. 불교의 사찰과 마애불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새마을 운동시기가 되자, 특정 종교는 구습타파를 말하며 그나마 남아있던 장승을 완전히 몰아내는데 성공했습니다. 이후 간간히 세워지는 장승과 그걸 보고 있지 못하는 특정 종교의 장승 세우기와 장승 불태우기가 반복되었고, 연세대 장승 부부 사건은 그중 유명한 사건중 하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