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디슨 파크에 입성한 풋풋한 모예스..)
"패배를 받아들이기 시작한다면 승리를 얻을 수 없습니다."
"승리를 매주 거두는게 불가능한 팀들이 있지요. 저도 그러한 팀에서 플레이를 했었었습니다. 캠브리지 유나이티드에서는 선수로써 강등도 경험했었지요. 그런 이유에서 저는 축구계에서 이룬 모든 것이 승리로 이뤄졌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저의 목적은 언제나 승리하는 것이었어요."
"감독직을 맡고나서부터 승리는 절대적인 명제가 되었습니다. 자신만의 스타일은 중요하지만, 지속적인 체제를 구축하려면 결과를 내야만 하고 충분한 승리를 거둬야 하죠."
"그런 의미에서 10년이란 감독기간은 제가 충분한 결과를 냈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제가 에버튼에 처음 부임했을 당시 사람들은 '에버튼? 택도 없어.'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1~2년이 지나니 몇몇 사람들은 반대로 '이제 에버튼을 떠날 시기가 됬어. 거기서 충분히 성과를 거뒀자나'라고 말하더군요."
"저는 결코 그러한 방식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늘 제가 보다 잘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한계를 깨뜨릴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왔습니다."
"제가 어렸을 적 아버지는 지역 아마추어 팀에 데려가셨습니다. 저는 아버지와 함께 축구 경기를 지켜봤죠. 거기서 볼을 쫒고 선수들을 바라보며 이 모든 것들을 사랑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말은 거진 아버지 팀의 경기에 관한 걸로 보냈었어요. 그러면서 아무런 보상을 바라지 않은 채로 시간을 투자하며 아마추어 팀을 운영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해하기 시작했죠. 어쩌면 이러면서 저는 그들로부터 팀을 짜고 운영하는 계획같은 데서 무언가를 물려받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축구선수로 성장해 나간 것은 셀틱 유스에서였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저의 조직을 강조하는 면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묻곤 하더군요. 저는 셀틱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매주 선수들은 제대로 된 모습을 보여야 했습니다. 심지어 12살의 꼬맹이들도 셔츠에 타이를 매야 했죠. 셀틱의 선수라면 셀틱을 대표하는 것이니까요."
"당시 셀틱의 축구 스타일은 환상적이었습니다. 제가 추구하고 싶은 방식이 있다면 아마 그들의 화려하고 재밌는 공격축구일 것입니다. 훌륭한 선수들도 보유하고 있었구요."
"하지만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반드시 승리해야한다는 집념이었죠. 지금 1군코치로 함께하는 지미 룸스덴은 셀틱시절 제 유스팀 코치였습니다. 그에게 한 번 물어보세요. 아마 이렇게 대답할 겁니다. - 우리는 패배할 수 없다. 만약 진다면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다. 패배란 그저 용납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승리에 대한 집념을 셀틱에서 계속 주입받아 왔습니다."
"제 규율적인 측면의 많은 부분들이 아버지와 함께했던 클럽 로컬팀과 셀틱에서 경험한 것에서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축구에 관해 훌륭한 조기교육을 받았다고 할 수 있겠네요."
"프레스턴을 지휘할 때 프리미어 리그 승격을 아깝게 놓치고 다음 시즌 그 충격에서 회복해 나가고 있을 무렵 몇몇 오퍼를 받았습니다. 2~3 클럽의 영입제안에 근접해 있었고, 프리미어 리그 클럽의 제안도 있었죠. 하지만 저는 3월 에버튼의 콜을 받았고, 감독직을 수락했습니다."
"프레스턴 시절 챔피언쉽의 어느 클럽의 디렉터가 종종 저에게 경기 중에 '에버튼은 당신에게 딱이야, 에버튼은 당신의 클럽이 될거라고.'라고 말했던 게 기억나네요. 그가 단순히 제가 잘 어울리겠거니 생각한건지에 대해선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에버튼에 합류했을 때 저는 브리튼에서 가장 큰 클럽 중 하나에 입성한다고 생각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훌륭한 역사와 단단한 서포터 기반을 가진 클럽으로 당시에는 경기력이 좋지 못해 강등당할 리스크도 있었지만, 저로써는 거절할 수 없는 큰 제안이었습니다.
"학교를 졸업해 직장생활을 하면, 수습으로 일을 배우면서 자신의 인생에 대한 설계를 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저 제가 축구를 사랑하고 즐긴다는 이유로 일을 시작했기에, 얼마나 계속해 나갈 수 있을지에 대한 생각이 없었어요. 그런 제가 에버튼에서 10년이나 머무를 거라 생각했겠나요? 아마 당신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겁니다."
"4년 계약을 맺어도 얼마나 감독직을 채울지는 알기 어렵습니다. 이 직업은 많은 이들의 요구와 대중의 관심이 쏟아지고, 결과만이 모든 것을 말해줍니다. 꾸준한 승리가 없이는 어느 클럽에서도 10년동안 머무를 수가 없죠."
"저는 제가 감독직을 맡으면서 빌 켄라이트 구단주로부터 돈을 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선수를 팔아야만 하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죠. 켄라이 구단주는 제가 선수들에 관해서는 원하는 데로 할 수 있도록 전권을 주었습니다."
"제가 에버튼을 맡았을 당시 38살의 나이로 상대적으로 어린 감독이엇죠. 몇몇 선수들은 저랑 나이차가 얼마 나지도 않았는데, 저는 그들의 존중을 얻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운이 좋았어요. 훌륭한 선수들을 보유했고, 첫 경기부터 잘 풀려나가기 시작했거든요."

"저는 지금까지는 어떠한 우승도 얻지 못한 감독으로 규정되어 있을 겁니다. 하지만 프리미어 리그의 20년의 역사 속에서 첫 10년간 에버튼이 탑10에 단 2번 들었었데 반해, 제가 부임한 이후로 지난 10년은 7번의 탑10을 기록했습니다. 이것 자체로 제가 왜 10년간을 여기서 머무를 수 있는지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크고 빛나는 트로피를 보여드리지 못하는 점에서 우선 죄송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클럽은 향상되어가고 발전되어 나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클럽이 감당하는 정도의 스펜딩 속에서 꾸준한 성과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제가 처음 부임했을 당시 클럽은 노장들로 가득했습니다. 그들은 탑 플레이어들이었지만, 저는 즉시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스쿼드 구성을 바꿔나갔습니다."
"그렇게 5년이 지난 이후, 이제 다시 한계를 깨뜨리기 위해 새로운 플랜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옳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고, 새로운 단계로의 도약을 위해선 플레이 스타일의 변화가 필수라고 생각되었죠. 우리는 이를 실현하기 위해 계속 노력 중이고, 지난 1~2년까지 팀의 발전은 계속되어 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번 시즌은 정말 힘들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우리가 처한 상황에 대해 인식하고 있었고, 아마도 한 명의 선수를 잃게 되는 결과로 끝날 것이라는 것에 대해 알고 있었기 때문에요.
"우리는 여름에 누군가가 팔리거나 상황이 변화되면 어떻게 대처해야할지에 대한 계획을 세워뒀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필요로 하는 선수들을 얻기란 쉽지가 않죠. 우리는 좋은 딜을 통해 훌륭한 선수들을 영입하고자 노력했지만, 참 힘든 여름이었습니다."
"저도 주기적으로 빅 머니를 쓰고 싶습니다. 원한다면 당신에게 내가 에버튼에 데려오고 싶었던 선수들 명단들과, 영입에 근접했으나 돈이 모잘라 엎어졌던 선수들에 대해 말해줄 수도 있어요."
"이런 꿀꿀한 이야기에 대해 전부 말해줄 수도 있지만, 우리가 데려온 선수들은 거진 높은 가치가 더해졌습니다. 베인스를 영입했을 때와 지금의 가치를 비교하면 어떤가요? 케이힐이나 레스캇은요?"
"10주년을 맞이하게 된 것은.. 맞아요 큰 성취라 할 수 있어요. 하지만 클럽에도 똑같이 공을 돌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부임하고 저는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고 말했고, 그렇게 해나가고 있습니다. 지난 10년이 에버튼에 있어 분명한 발전의 시기였다고 생각해 주시길 바래봅니다."
"저는 여전히 믿겨지지 않을 정도의 야심을 가지고 있지만, 늘 그것을 에버튼에서 이루길 바란다고 말해왔습니다. 저는 야망을 가지고 있고, 이 곳에서 트로피를 들어올리길 원하고 있습니다."

에버튼 재직 중 모예스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기 10.
에버튼 2-1 풀럼 (2002년 3월 16일, 리그경기)
내가 'the People's Club'이란 문구를 사용한 것은 의도를 갖고 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감독직을 맡고 난 이후 자신이 에버튼 팬이라고 하는 엄청난 전화를 받아 놀라게 되었고, 동생인 케니와 리버풀 거리를 운전하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에버튼 셔츠를 입고 있는지 지켜보게 되었다.
이러면서 큰 감정적 울림이 있었고, 이 곳이야말로 리버풀 대중에 의해 선택된 클럽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첫 게임을 맞이하며 긴장했던 순간들을 기억한다. 마치 성냥개비가 눈을 감지 못하게 꼽혀져 있는 듯이 잠을 이루지 못했다.
에버튼 감독으로 부임한 것이 목요일이었는데, 첫 경기가 바로 그 주 토요일이었다. 데이빗 언스워스가 27초만에 골을 넣었고, 던컨 퍼거슨이 13분에 추가골을 올리며 좋은 분위기였는데.. 그라베센이 30분만에 퇴장당하게 되며 찬물을 끼얹었다. 하지만 승리했지.
나는 38살밖에 안되는 젊은 감독이라 드레싱 룸에 들어가는 데 어려움이 있었으나, 다른 누구처럼 행동하려 하지 않았던 게 중요했던 것 같다. 나는 선수들이 내 믿음과 열망을 보아주길 원했다.
완전 지쳐서 집에 돌아와서는 쇼파에 몸을 뉘었고, 안도의 한숨이 내쉬어졌다. 하지만 바로 다음 경기에 대한 생각으로 정신이 번쩍들더군.
뉴캐슬 6-2 에버튼 (2002년 3월 29일, 리그 경기)
내가 부임하고 치른 세 번째 경기였다. 우리는 더비카운티 원정에서 4-3으로 승리하고 뉴캐슬과의 경기를 긴장 속에 치르게 되었다.
6분만에 던컨이 다시 골을 터트리며 1-0으로 앞서나갔지만, 허접한 실수들로 골을 내주면서 2-2로 하프타임을 맞이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후 우리 팀은 상대의 공격에 너무 오픈되며 6-2로 대패하게 되었다.
프레스 컨퍼런스에서 바비 롭슨이 "It's welcome to the premier league for David Moyes." 라고 했는데, 무척 화가 났었고, 그의 발언이 일종의 로우 블로였다고 생각했다.
1~2년간 그의 말이 귀에 맴돌았고, 그의 진심을 알기 전까지 그를 꺾고자 전념을 다했다. 그는 그저 사실을 진술했던 것일 뿐이었고, 프리미어 리그는 쉽지 않으니 모든 것에 최선을 다하라는 경험에 우러나온 발언이었었다.
나는 결국 그에게 감사함을 표하게 되었다.

리즈 0-1 에버튼 (2002년 11월 3일, 리그 경기)
사람들에게는 구디슨 파크에서 벌어진 아스날 전에서의 루니의 위닝골이 회자되지만, 나는 이 골이 사람들이 루니가 어떻게 성장할 지에 대해 보여주는 확실한 증표였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51년간 앨런 로드에서 리그 승리가 없었는데, 이날 있었던 4000여 에버튼 팬들은 루니의 골을 포며 자신들의 어린 슈퍼스타의 포텐셜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날은 월드 스테이지에서 득점을 하며 상대팀을 무너뜨릴 수 있는 한 소년의 등장으로 기록될 것이다. 루니가 결승골을 터트리며 팬들과 함께 기뻐하는 장면이 담긴 사진이 있는데, 나는 그 사진에 루니의 싸인을 받았고, 내 집 벽에 여전히 붙어있다.
그 날은 웨인 루니, 나 자신, 그리고 에버튼에 있어 중요한 순간이었다.
아스날 7-0 에버튼 (2005년 5월 11일, 리그 경기)
우리는 뉴캐슬을 꺾으면서 챔피언스 리그 진출을 확정지었고, 나는 선수들이 일요일에 맘껏 즐기게끔 휴식을 갖게 결정을 내렸다.
우리가 수요일에 아스날과 경기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빅4외의 팀이 챔스에 나가는 것은 에버튼이 처음이라, 선수들은 이런 시간을 가질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경기가 치뤄지면서 나는 다른 생각을 갖게 되었다. 나는 경기력에 대한 책임감을 가져야만 했다. 나는 이후 우리가 패한 방식에 대해 당황스럽고 후회스럽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팬들또한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나는 그날 감독은 언제나 프로페셔널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안고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비야레알 2-1 에버튼 (2005년 8월 15일, 챔피언스 리그 경기)
나는 조 추첨을 보고 힘든 경기가 될 것임을 예상했다. 비야레알은 강력하고 발전하고 있던 팀으로 1차전에 2-1로 패했었다.
원정에서 1-0으로 끌려가고 있는 상황에서 아르테타가 프리킥으로 동점을 만들었고, 던컨 퍼거슨이 균형을 맞추는 2번째 골을 터트렸으나, 그의 확실한 골은 콜리나에 의해 기각되었다.
부당하다는 생각을 엄청나게 갖게 되었고, 결국 경기 종료쯤에 포를란에게 골을 먹게 되었다. 나는 우리가 그 상황에서 뒤집을 수 있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만약 우리가 그룹스테이지로 진출했다면 에버튼은 자금 면에서 풍족해지고, 선수들에게 보다 매력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콜리나의 이 판정에 대한 좌절감은 여전히 우리를 짓누르고 있었고, UEFA컵에서도 5-1로 대패하고, 리그도 최하위에 머무르게 됬다.
하지만 그 후 팀을 잘 추스려 11위로 시즌을 마감하게 되었다.

에버튼 3-0 리버풀 (2006년 9월 9일, 프리미어 리그)
리버풀은 우리보다 스펜딩파워를 가지고 있기에 그들을 꺾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1987년 이후로 단 한 번만 그들보다 높은 순위에 있었던 것은 2005년 우리가 챔스에 진출했던 해 뿐이었다.
우리는 이런 성과를 종종 거둘 필요가 있다. 이 날 앤디 존슨은 2골을 터트리며 환상적인 모습을 보였었다. 우리는 새로운 팀으로 변모해가고 있었고, 중요한 경기 결과였다.
또다른 선수를 하나 더 선택한다면, 편향심을 숨기지 않고 루니로 하겠음.
루니 : 부끄럼이 있는 선수지만 훈련에는 무척 열성적이었음. 훈련에서 말도 안되는 각도로 칩샷 성공시키며 내가 입이 딱 벌어지게 만들었음. 모든 코치들이 서로 바라보며 "저게 가능한거야?"라고 말하던... 엄청난 재능.
스포츠메일 선정 모예스 베스트 사이닝 10
나이젤 마틴 : 2003년 리즈로부터 0.25M에 영입
팀 케이힐 : 2005년 밀월로부터 2m에 영입
미켈 아르테타 : 2005년 레알 소시에다드로부터 임대, 그 후 2.8m에 영입
필 네빌 : 2005년 맨유로부터 3.6m에 영입
팀 하워드 : 2006년 맨유로부터 임대, 그후 3m에 영입
졸레온 레스콧 : 2006년 울브스로부터 2.5m에서 옵션으로 5m까지 오르는 계약으로 영입
필 자기엘카 : 2007년 셰필드 유나이티드로부터 4m에 영입
스티븐 피에나르 : 2007년 도르트문트로부터 2m에 영입
베인스 : 2007년 위건으로부터 5m에 영입
마루앙 펠라이니 : 2008년 스탕다르 리에쥬로부터 13m에 영입
PS) 모예스에 대해 당신이 잘 모르는 것들..
1. 북아일랜드 대표될 뻔 했음.
2. 에버튼 부임하기 전에 관심을 보였던 클럽은 사우스햄튼, 레스터, 셰필드 웬즈데이 등등..
3. 맨유에서 코치되는 것에 대해 퍼거슨과 인터뷰를 갖기도..
4. 축구 외에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는 골프
5. 형제인 케니 모예스는 찰리 아담의 에이전트. 모예스는 찰리 아담을 원했으나 안필드로..
6. 구디슨 파크를 제외하고 가장 맘에 들어하는 구장은 벤피카의 빛의 구장.
7. 모예스 체제에서 전통은 에버튼 커리어의 시작을 노래방 신고식으로 한다는 것.. 필 네빌은 헤이 주드를 불렀다가 동료들에게 구박당하며 최악의 퍼포머스로 기억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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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정말 좋아하는 감독 중 한 명!!!
인간적으로 존경스러운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