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르시카섬.
"아... 오늘이 마지막인게 아쉽다."
어느덧 뉘엿뉘엿 지는 해를 바라보는 지희의 얼굴에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가득 묻어난다.
푸른빛에서 이제는 붉은빛을 머금고 있는 바다를 멀리 바라보던 승재가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올 수 있기에 지희만큼 아쉽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그렇다하니 맞장구 쳐준다.
"승재야."
"어?"
여전히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지희의 부름에 간략히 대답하며 그녀의 옆 얼굴을 응시한다.
동그란 이마는 예쁘게 곡선을 이루었고 긴 속눈썹은 한껏 올라선 채 맑은 눈동자엔 바다를 한가득 담고 있을 터였다.
한참을 그렇게 넋을 놓고 있는데 지희의 얼굴이 움직이는가 싶더니 곧 눈이 마주친다.
지희의 눈동자 속 저의 모습을 뚫어져라 보는 승재의 귀에 작은 목소리가 꽂힌다.
"분위기 좋네.."
"응?"
갑자기 웬...
"좋아. 여기."
지희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고 입꼬리가 매끄럽게 올라선다.
그 모습을 보고서야 지희가 한 말에 의미를 파악한 승재의 입에서 기가 막힌 탄성이 흘러나왔다.
승재의 반응에 지희는 몸까지 돌려 완벽하게 승재를 바라보고 선 후 뒷짐진다.
그리고 눈을 감았고 승재는 살풋 웃으며 천천히 얼굴을 가까이했다.
그가 눈을 감는 순간 부드러운 입술이 살포시 닿았다.
"나는.."
술이 확 깨는 것 같았다.
어지럽지도 않았고 머리 회전도 정상적으로 돌아간다. 심지어 심장도.
지희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승재의 눈을 직시했다.
그녀의 입술이 두어번 달싹거리더니 드디어 그 입술 사이로 또렷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너를 좋아해."
"듣고 싶었어. 그 말."
승재의 큰 손이 지희의 머리에 닿았다. 따뜻한 온기가 기분을 좋게 해주었다.
"같이 있을까?"
"뭐? 갈 거야."
"쿡. 농담이야. 가자. 데려다줄게."
12년 전엔 승재보다도 지희가 더 낯간지러운 말도 잘하고 스킨쉽도 적극적이었는데 지금은 딴 사람이 된 것 마냥 그런 것들이 쉽지가 않다.
뿌옇게 드리워졌던 안개가 순식간에 걷힌 것처럼 마음 한구석이 답답했던 것이 가셨다.
지희는 조금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승재와 나란히 걸었다.
제주도의 밤 바다는 찼지만 춥지는 않았다.
몸에 후끈한 열이 계속 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
한 숨 자고 일어나니 어제의 후폭풍이 밀려왔다. 머리가 아픈 것도 모자라 설상가상 몸까지 으슬으슬거렸다.
힘겹게 몸을 일으킨 지희는 비척거리며 창가 앞으로 가 짙게 드리워진 커튼을 걷어냈다.
"하아... 날씨까지..."
제주도 날씨는 변덕쟁이라더니 그 말이 딱이었다. 화창했던 어제와 달리 굵ㅁ은 빗줄기를 퍼부어대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내려도 너무 내린다.
"비행기.. 뜰까..."
12시 비행기였다.
지희는 서둘러 노트북을 펼치고 날씨를 검색해보고 항공사를 들어가봤다.
아직까지는 별다른 이슈는 없었다.
한시름 놓은 지희는 그대로 다시 침대에 누웠다. 오전에는 어차피 할 일도 없었고 비행기 타기 전까지 호텔에서 쉬다 나설 생각이었다.
시체마냥 그렇게 누워서 미동도 않고 있는데 노크소리가 들려온다.
"고객님. 편히 주무셨습니까. 주문하신 룸서비스 가져왔습니다."
"룸.. 서비.. 후우.."
누군지 뻔했다.
대단한 열정이라고 생각하며 그것을 들여보냈고 바로 전화를 건다.
-"좋은 아침."
"응. 그런데 나 술 마신 다음 날은 아침 안 먹어. 지난번에도 그래서 먹지 않은거였는데."
-"네 거 아니야."
"어?"
"그거 내 거야."
"..!!!!"
기계 속이 아닌 바로 가까이에서 생생하게 들린 승재의 목소리에 몸을 돌리니 이제 막 들어서는 승재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들어와 차려진 음식들에게 시선을 던졌다. 맛있는 냄새가 지희의 코에도 스며들어왔다. 하지만 역시 먹고 싶지는 않았다.
어느새 자리까지 잡고 앉은 승재는 눈을 가늘게 뜨고 팔짱을 낀 지희를 힐끔 보고는 짖궃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음식에 여전히 시선을 두고 있는 그녀는 보지 못했다.
"이걸... 너 혼자 다 먹겠다고..."
아무리봐도 2인분의 양인데...
"아침 같이 하려고 했는데 비가 와서 이동하기 번거로울 것 같아서."
"같이 먹으려고 주문한 건 맞네."
이제서야 승재 맞은편에 앉으니 반듯한 그의 얼굴이 더욱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몇시에 일어난걸까.
깔끔하게 정돈된 머리와 깨끗한 얼굴, 단정한 옷차림.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정갈하다.
그에 비해...
순간 눈이 번쩍 뜨인 지희가 다시 자리에서 일어선다.
"오기 전에 미리 전화라도 하지!"
그리고 후다닥 욕실로 달려가는 뒷모습을 보며 승재는 즐거운 듯 웃었다.
옛날부터 그랬다.
설렁설렁.
장장 한시간에 걸쳐 샤워를 마친 지희는 욕실에서 옷까지 다 갈아입고는 말끔한 모습으로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도도하게 앉아 다리를 꼰다.
"다른 사람 같네."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갑자기 쳐들어와서는."
불쾌함에 얼굴을 찡그려 보지만 승재는 개의치 않고 음식들을 음미했다. 부산스럽게 움직여댔더니 머리가 더 아파오는 것 같아 지희는 눈살을 찌푸리며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댔다.
승재의 눈동자가 위로 살짝 치켜떠졌다.
"뭐라도 먹어. 그래야 약 먹을 수 있어."
"무슨 약?"
"감기약."
"감기약... 왜?"
"늦은 시간이었고 바람이 찼어. 거기다 넌 옷도 얇았고."
새삼 감탄하는 지희의 눈이 승재에게서 떠나질 않는다. 이런 남자였지, 류승재는.
"고마워."
"그럼 한 숟갈이라도 먹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손대지 않은 수저를 건넨다. 묵묵히 그것을 받아들고 미지근하게 식은 국을 한 술 떠 먹는다.
"비행기가요. 네.. 알겠습니다."
"왜? 뭐라고 하셔?"
비행기 시간에 맞춰 나선 지희는 여전히 쏟아지는 빗줄기에 불안해하며 승재와 함께 택시에 올랐다.
공항으로 가는 내내도 불안함은 사그라들지 않았고 그 불안은 곧 확실시 되었다.
지희 뿐만 아니라 오늘 뜨려 했던 비행기가 전부 기상악화로 결항 된 것이다.
방금 전 김 비서의 전화를 받은 승재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기사님 차 돌려주세요."
"어어! 그렇다고 차를 돌리면 어떡해. 공항은 가 봐야지."
"여기 발이 묶인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야. 전부 공항에 몰려 있을텐데 거기 있는다고 결항된 비행기가 뜨지 않아."
"그럼 그냥 기다려야 한다고?"
"그래."
덤덤한 승재에 비해 지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결국 호텔로 돌아와 승재와 시간을 보내게 되었는데 비 오는 제주도에서, 호텔에서 두 사람이 할거라곤 무엇도 없었다. 그저 로비에 앉아 각자의 업무를 보기만 할 뿐이었다.
"나 궁금한게 있는데..."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고요함을 깨고 먼저 말을 건 지희는 눈으론 여전히 노트북을 바라본 채였다.
"우리 선 본 날.."
".."
"진짜 그 날 나한테...."
"..아. 잠깐만."
주머니에서 울려대는 진동에 지희의 입이 다물어졌고 그는 미안한 표정을 보이곤 받을 때까지 끊기지 않을 것만 같은 핸드폰을 들었다.
"류승재입니다."
-"승재군. 오랜만이야."
"아. 안녕하셨어요."
라며 자리에서 일어선 승재는 지희에게 잠시 통화하고 오겠다는 눈빛을 보내고 그녀에게서 좀 떨어진 곳으로 이동했다.
큰 키에 어울리는 큼직한 그의 몸이 멀어져 작게 보이자 지희는 눈을 내리 깔고 좀전에 물어보려 했던 말을 곱씹어본다.
'..첫눈에 반했어?'
그리고 힐끔 뒤를 보며 지희가 저를 보고 있지 않는 것을 확인한 승재는 무표정으로 딱딱한 음성을 내었다.
"어쩐 일이십니까?"
-"그렇게 딱딱하게 말하지마. 서운하게."
"제가 지금 약속이 있어서요."
-"아직 어머님께 말씀 못 들었나봐?"
"무슨 말씀이요?"
승재의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신주와 엮여서 승재에게 좋을 것은 그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터였다.
기분이 썩 좋지는 않은 승재와 달리 신주는 밝았다.
-"너희 약혼 날짜 잡혔는데. 아직도 말씀을 안 하시다니... 사돈도 참."
"...지금 무슨 말씀 하시는겁니까. 약혼 날짜라뇨."
-"자세한건 어머님께 듣는 것이 좋겠구나. 비행기는 내일이면 뜰 것 같으니 불장난은 오늘까지만 하렴."
승재가 대꾸하려는 찰나 전화가 일방적으로 끊겼고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려 이쪽을 힐끔거리는 지희의 시선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갑자기 전화해서는 약혼이라니!
이런 말 같지도 않은!
승재는 지체하지 않고 미옥의 번호를 눌렀다.
그러자 그녀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빠르게 받았다.
"어머니. 어떻게 된 거예요?"
-"승재야. 어떡하면 좋니..."
미옥은 난감함을 표하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녀가 이렇게 당황하는 것도 드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세요?"
차분히 묻고 싶었지만 목소리에 힘이 절로 실려 묵직하고 낮은 음성이 깔린다.
-"네 아빠가... 네 약혼날짜를 잡으셨어."
"들었어요. 그게 어떻게 된거예요?"
-"이번에 네 아빠가 사업 하나 준비하고 계신거 알지? 그 사업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게 성운그룹이야."
더 들을 것도 없었다.
유정이 움직인 것이다. 미옥이 말한 사업이라는 것이 류 회장에게 어느 정도의 크기인지 승재는 잘 알고 있었다.
-"네 아빠가 좋게 이끌어 가고 있었는데 돌연 태도를 바꿔버리잖아?! 그쪽에서 요구하는건 너와 유정이의 결혼인데 우리 입장에서야 경쟁 구도인 성운과 사돈을 맺어버리면 경쟁자가 사라지는거잖아."
"그래서 제 의사는 묻지도 않으시고..."
-"재벌 결혼이라는게 다 그렇지. 그래도 너 신 화백네 아가씨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길래 네 아빠 마음 돌리게 해 보려고 했는데 완강하셔서..."
그 뒤는 얘기하지 않아도 알지? 라는 뉘앙스가 풍겼다. 미옥과 얘기해서 될 문제가 아니었다.
얼른 서울로 가고 싶었지만 여전히 퍼부어대는 비는 그칠 줄 몰랐다.
"저는 결혼 의사 없다고 똑똑히 말씀 전해주세요. 서울 가는 대로 본가로 갈게요."
-"후. 그래, 조심히 오고."
"네."
긴 통화를 마친 승재가 지희 곁으로 오자 그녀는 어째서인지 축 늘어져 잠들어 있었다.
피곤해서 잠든건가 가까이 다가가니 얼굴이 빨갰고 손으로 이마를 짚어보니 뜨끈뜨끈했다.
승재는 서둘러 지희를 안고 자신이 묵고 있는 룸으로 향했다.
*
"유정씨는 언제 봐도 손이 예뻐."
"고마워요."
"그런데 오늘은 무슨 날이야? 하얀 매니큐어는 뜻깊은 날에만 바른다며."
유정의 손톱에 아무 무늬도 들어있지 않은 깨끗한 하얀색 매니큐어가 고르게 칠해진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는 그녀의 얼굴에 웃음이 번진다.
마지막 손톱까지 깨끗하게 발리자 두 손을 쫙 펼쳐본다.
"좋은 아이템을 써서 이기게 된 날이요."
게임 얘기인가?
재벌 아가씨들도 그런 게임을 하나보네.
네일아티스트는 입과 눈으로 웃음지어 보이며 속말을 삼켰다.
유정은 정말 기분이 좋아보였는데 저로 인해서 그 기분을 망치게 해서는 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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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뎃이 늦었어요~
죄송해요^^;;
카페 게시글
로맨스 소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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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oo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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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4.09 0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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