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의 계절
원제 : The Vintage
1957년 미국영화
감독 : 제프리 헤이든
출연: 멜 파라, 존 커, 미셀 모르강, 피어 안젤리
리프 에릭슨, 데오도레 비켈
'포도의 계절'은 1950년대 헐리웃 메이저 영화사가 만든 영화중에서 국내 개봉하여
히트한 작품중에서는 가장 구하기 힘든 영화가 아닐까 싶습니다. 오래도록 많은
고전영화 애호가들이 찾는 영화이고, 다시 보고 싶어하는 추억의 영화인데
1983년 공중파 TV 방영후 자취를 감추었기 때문입니다. 유명 배우들이 출연한
어지간한 헐리웃 고전영화는 대부분 구할 수 있는 시대에 보기 드물게 자취를
감추어버린 작품이라고 할 수 있지요.
결국 이 영화가 정녕 MGM에서 만든 영화일까 하는 의심을 하게 됩니다. 우선
감독 제프리 헤이든이 미국인이지만 그는 오로지 TV에서만 활동하는 인물이고
그의 이력에 극장용 영화가 '포도의 계절' 한 편이 덜렁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출연하는 배우도 멜 파라, 존 커, 미셀 모르강, 피어 안젤리 등 유럽의 유명
여배우와 헐리웃에서 A급에는 미치지 못하는 남자 배우들로 구성되어 있고
영화의 배경도 이탈리아 형제들이 프랑스에 가서 벌이는 내용입니다. 무엇보다
그 정도 레벨의 배우들이 출연하는 영화가 해외에서조차 출시가 안되고
있다는 사실이 의문입니다. 외관상 헐리웃 영화처럼 포장된 유럽제작 영화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듭니다. 막상 영화를 봐도 이탈리아 영화 분위기가 나고.
지안카를로(멜 파라)와 에네스토(존 커) 형제는 이탈리아 국경을 넘어서서
프랑스로 도주중입니다. 에네스토가 술집에서 여자를 패는 남자를 말리다
실수로 그를 죽이게 되고 경찰을 피해서 프랑스로 피신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도착한 프랑스의 시골마을은 막 포도 수확철이 되었고, 많은 일꾼이
필요한 시기였습니다. 농장주인 모렐(리프 에릭슨)은 수상쩍은 낯선 이방인들을
달가워하지 않지만 두 형제는 쾌활한 이탈리아 노동자들과 친해진 덕분에 겨우
농장에서 일할 기회를 얻습니다. 그런 와중에 모렐의 아내인 레오네(미셀 모르강)는
말이 없고 고독해 보이는 에네스토에게 호감을 느끼고 에네스토 역시 엄마처럼
푸근한 레오네에게 연정을 느낍니다. 레오네의 여동생인 루시엔(피어 안젤리)은
젊은 남자친구가 있었지만 낯선 이방인인 지안카를로에게 호기심을 느끼고
급기야는 사랑의 감정으로 발전합니다.
어느날 거대한 포도 농장에 나타난 두 남자와 그 농장에 사는 두 여인, 영화가
대략 어떤 식으로 흘러갈지는 대략 20분 정도 보고 나면 뻔히 예측이 가능합니다.
아주 전형적이고 보편적인 통속 멜러물이고, 쫓기듯이 농장에 숨어든 형제가
그 농장에 사는 여인들의 여심을 사로잡으면서 벌어지는 사건입니다. 보통
이런 영화는 한 명의 도망자의 이야기가 많지만 여기서는 형제라는 점이 좀
독특하고, 나이든 형은 농장의 여린 여자와 좋아하게 되고 어린 동생은 그
언니와 좋아하게 된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삼촌뻘되는 남자를 좋아하는 소녀,
엄마뻘(까지는 아니지만 고모뻘)되는 애딸린 유부녀에게 연정을 느끼는 청년.
우리나라 에로물 '애란'이라는 영화도 이렇게 쫓기는 남자와 사랑하는 자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남자 하나 더 등장시키면 유사한 부분이 있습니다.
경찰의 눈을 피해서 포도농장으로 숨어든 형제, 그렇지만 집요하게 쫓아오는
경찰, 들킬 위기를 맞이하지만 동료 노동자와 두 여인의 도움으로 간신히 추적의
손길을 아슬아슬하게 벗어나는 상황, 하지만 결국 비극적 결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만 비극적인 결말만 있는게 아니라 희망적인 사랑도 싹트면서
끝난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거의 통속물의 전형적이고 뻔한 흐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평단에서는 특별한
좋은 평가를 받기 어렵지만 고전 통속물 좋아하는 팬들에게는 아련한 50년대
고전입니다. 오드리 헵번의 남편으로 더 알려진 멜 파라와 '차와 동정'에서 연상녀
데보라 커와 순정적 사랑을 하는 청년으로 기억되는 존 커, 남자배우의 레벨은
A급에는 못 미치지만, 여배우는 당시 '은배' '상처뿐인 영광'으로 이탈리아에서
헐리웃에 성공적인 입성을 한 피어 안젤리와 프랑스의 30-40년대 명배우 미셀
모르강이 출연하여 남자 배우들의 인지도를 압도하고 있습니다. MGM에서
이정도 레벨의 유럽 여배우들을 섭외해놓고 저런 레벨의 남자배우들을 상대역으로
내세운것도 수상쩍은 부분입니다. 완전히 유럽영화 분위기가 나는 헐리웃영화
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네 명이 주요 배우에 가려서 눈에 덜 띄긴 했지만 미셀 모르강의 남편 모렐역으로
등장하는 리프 에릭슨도 꽤 마음에 드는 상남자 역할입니다. 거대한 농장의
대지주이면서 마초적인 남자이며 포도수확에만 신경쓰느라 오래도록 아내를
제대로 신경쓰지 못했지만 젊은 이방인을 만난 아내가 모처럼 여자로서의
설레임을 되찾게 되자 그 상황에서 아내의 항변을 이해하고 반성하는 모습은
마초 중에서도 상남자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렐의 역할은 도피중인
두 형제를 힘들게 하는 역할과 이들을 이해하고 도와주는 역할 두 가지를 모두
하고 있습니다.
이런 2 : 2의 로맨스 통속 내용외에 이탈리아 사람들의 특유의 흥겹고 넉살좋은
풍경과 늙은 삼촌 역 배우의 감초같은 익살이 영화의 재미를 곁들여주는 양념
역할을 합니다. 이런 전형적인 예측 가능한 통속 드라마가 1시간 30분간의
시간속에서 펼쳐지고 있고, 특히 '제 3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포도가
광활한 농토에서 수확되는 모습, 와인으로 제조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흥미거리입니다.
이 영화가 과연 언제까지 수면밑으로 가라앉아 있을지 모르겠지만 DVD 출시가
된다면 많은 고전영화 팬들이 꽤 반가워할 영화임은 분명합니다. 도피중인 형제가
그런 와중에서도 농장의 자매를 사랑하는 낭만적인 이야기가 아련한 추억의
고전으로 목록에 남는 것은 당연합니다.
ps1 : 반항적인 분위기와 순정적인 분위기를 모두 갖춘 존 커는 그리 많이 기억되는
배우는 아닙니다. 다만 그가 제임스 딘 처럼 일찍 요절했다면 아마 '차와 동정'
'남태평양' '포도의 계절'등 인상적인 3편 정도를 남긴 전설급 청춘배우로 기억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남태평양 이후로 별 기억되는 작품도 없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제임스 딘이 오래 생존했더라도 존 커나 트로이 도나휴 급의 반짝 청춘 스타가
되지 말란법도 없다는 것입니다.
ps2 : 젊고 어여쁜 농장주의 처제가 왜 정체불명의 떠돌이이며 나이도 많은 남자에게
그토록 푹 빠져들었는지 설득력이 약해 보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유부녀였던
오드리 헵번이 애가 다섯이나 딸린 12살 많은 유부남 멜 파라에게 빠져들어서
결혼까지 한 것을 보면 영화속의 그런 설정이 설득력이 없는 것만은 아닙니다.
더구나 당시 오드리 헵번은 최고의 스타로 막 떠오르던 시기였으니까요.
멜 파라는 오드리 헵번 때문에 대작 '전쟁과 평화'의 주연을 맡기도 했는데
이 영화가 범작이 되었고, 오드리 헵번은 나중에 후회했다고 합니다.
둘은 영화가 개봉되었을 때 이미 부부였는데, 부부공연의 효과를 별도
못 본 셈입니다.
ps3 : 프랑스 농장에서 이탈리아 노동자들을 고용해서 일을 시키는 것을 보면 전후
시대인 당시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경제적인 위상이 꽤 차이가 났나 봅니다.
국경을 넘어서 농사일을 해주러 올 정도니.
ps4 : 알베르토, 로베트로, 움베르토, 이베르토 등 이탈리아에는 '베르토'라는 이름이
무척 흔하네요. 우리나라의 '철이' 같은 이름인가 봅니다.
[출처] 포도의 계절(The Vintage 57년) 초 희귀작이 되버린 통속 고전영화|작성자 이규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