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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 좋은 시 다시 읽기
시가 태어나는 자리와
순간을 찾아가는 시인의 길
박완호
시인은 ‘나는 왜 쓰는가?’ ‘나는 왜 써야만 하는가?’ 하고 자기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되물어가며 자기만의 길을 찾아 언제까지라도 뚜벅뚜벅 걸어가는, 그렇게 걸어가야만 하는 존재이다. 시 쓰기가 지닌 의미, 성격은 시인에 따라 저마다 다른 맥락으로 나타난다. 무엇으로도 벗어날 수 없는 천형天刑으로서의 시 쓰기에 매달려 삶의 모든 순간을 치열하게 견뎌 나가는 시인이 있는가 하면, 타고난 재능에 힘입어 어느 날 반짝하고 나타났다가는 아무도 모르게 종적을 감춰버리는 시인, 마음에 드는 시 한 편을 건지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써 보지만 매번 변죽만 울리다 마는 시인, 이것저것 가진 게 너무 많다 보니 거기에다 시인이라는 호칭까지 더 얻어서 알량한 명예욕을 채우고자 하는 이들도 있다. 서로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들 모두는 시 쓰기에 매달려 자기 생의 어느 한때를 건너온 것이 사실일 것이다. 좋은 시와 나쁜 시, 좋은 시인과 그렇지 못한 시인이 따로 존재한다는 생각을 가져 본 적은 없지만, 자기 삶의 모든 순간 속에서 무언가를 시의 언어로 표현해내고자 하는 마음가짐을 한시도 놓치지 않고 살아가는 시인이야말로 ‘진정한’ 시인이라는 당연한 편견을 마음속에서 지워낸 적도 없다.
팬데믹으로 모두가 끝이 보이지 않는 시련의 터널을 지나는 중에서도 누군가는 그러한 시인의 자리를 변함없이 지켜가며 한 줄 한 줄 자기만의 시를 써 내려간다. 아름다운 무언가를 마주하는 찰나 떠오른 미적 감각을 형상화하거나 자기가 살아가는 세계 속에 내포된 모순이나 문제점을 남다른 안목으로 끄집어내고, 슬픔과 기쁨이 어우러진 삶의 순간순간을 건너오는 동안 겪은 상처와 기억을 승화시키는 것은 시인에게 주어진 사소하면서도 특별한 몫일 것이다. 어떤 시 쓰기가 더 나은 것인가를 따지는 건 의미 없는 일. 시인은 다만 제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서서 자기만의 언어로 지금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닐 어떤 지점에서 마주치게 될 ‘황홀한’ 시의 꽃을 피워 내려 애쓸 뿐이다.
가을호에 발표된 시들 가운데 몇 편을 주의 깊게 읽으며, 나는 작품마다 다르게 나타나는 화자의 시간(작품 속에 나타난 시적 화자의 성장 시기와 맞물린 의미로 사용)을 바탕으로 시 쓰기의 의미와 성격에 대해 한 번 더 고민해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무의식 속에 깊이 잠들어 있던 유년기의 아픈 기억을 되살려내는 일은 상처와 추억이 뒤섞인 시간을 거슬러 가는 과정만큼이나 고통스럽고도 까다로운 작업이다. 화자의 기억 한가운데 존재하는 아버지가 앞선 시(세)대의 본질이나 가치를 비유적으로 드러내는 시어가 아닌, 불행(행복)한 삶의 원천으로 각인된 생물학적 부모로 직접적으로 표현될 때 그가 느끼는 복합적 감정은 무엇과도 견줄 수 없을 만큼 크고 깊은 것이리라.
간혹 죽은 개 울음이 들려요 식욕을 떨어트리기에는 그만이에요 우리 가족은 정말 그만이에요 다락방 나무계단 일곱 개를 내려가면 아빠가 목침을 베고 누워있어요 아빠는 싱싱한 시간을 아삭아삭 더디고 맛나게 먹어 치우죠 매일 식욕이 없다며 엄마의 머리카락을 한 움큼씩 뽑아 먹어요 앙상한 엄마의 몸에서 머리카락은 윤기 나게 쑥쑥 자랐어요 온몸의 골수가 머리로 가나 봐요 보름달이 뜨면 아빠의 식욕은 더 했어요 새우 눈을 뜨고 웅크린 엄마 등을 짓밟았어요 늙은 개는 마루에 올라 달 보고 짖었어요 소리에 예민해진 것은 아마도 이웃집 암캐 탓일 거예요 어느 날 마당에도 작은 꽃밭에도 엄마가 보이지 않았어요 엄마가 보고 싶어 하늘을 보면 아빠의 억센 손과 큰 장화가 떠올라 엄마가 집으로 돌아오지 않기를 바랬어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날은 사금파리로 마당에 이파리만 그렸어요 이파리를 수십 장 그리고 나면 보고픔이 뭉개졌어요 꽃 없는 이파리는 짙푸르러서 오래 바라보지 못했어요 가을이 되어도 엄마는 오지 않고 대추나무에 노란 꽃이 피었어요 엄마의 노란 한복 같아서 마루에 앉아 보고 있으면, 아빠는 방문이 부서질 정도로 세게 닫았어요 밤이면 대숲에서 우우 댓잎이 울고 낮에 본 뱀이 문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어요 뒤란에 솥을 걸치고 아빠는 수제비를 끓였어요 물이 끓고 치댄 밀가루가 다 익을 때까지 엄마에 대한 욕도 끓어 넘쳤어요 그해 가을 우물에서 쇳물이 흘러 넘쳤어요 라디오에서 뽕짝이 흐르고 아빠는 목침에 누워 오른쪽 다리를 왼 무릎에 걸치고 흔들었어요 목 때 타서 번들번들한 아빠의 목침을 보고 있으면 속이 울렁거렸어요 아직도 나는 다락방에 있어요
- 이화영, 「다락방의 여자들 2」 전문
성장기에 겪은 억압적 상처의 기억을 담아낸 이화영의 「다락방의 여자들 2」는 억압적 존재의 상징인 아빠를 중심으로 하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독특하게 형상화해냄으로써 우울한 주인공의 모습이 그려진 이야기책을 읽는 듯한 느낌을 받게 한다. 잔뜩 부풀어 오른 ‘보름달’은 “싱싱한 시간을 아삭아삭 더디고 맛나게 먹어 치우”고, “엄마의 머리카락을 한 움큼씩 뽑아 먹”고, ‘뒤란에 솥을 걸치고 수제비를 끓이는’ 아빠의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의 크기를 짐작하게 만든다. 아빠의 억압적 성격은 식욕의 형태로 대표되는 욕망의 일그러진 표출 행동으로 구체화 되는데, 그러한 행위의 맞은편에 놓인 엄마는,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는 관찰자인 동시에 아빠의 억압적 태도로 인해 상처 입은 존재이기도 한 ‘나’에게는 연민과 그리움이 결합한 복합적 성격을 지닌 대상으로 그려진다. 추억과 억압적 상처가 공존하는 공간인 ‘다락방’은 끝부분에 나오는 “아직도 나는 다락방에 있어요”라는 표현이 함의하듯 화자의 무의식을 끊임없이 자극해 가며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존재하는 세계로서, 이 시의 바탕을 이루는 빼어난 시적 상상력의 뿌리가 되어준다. 바람직하게도 시인은 대상(사건)과의 거리를 적절하게 유지해 가며 상처 가득한 그 시절의 기억을 감정의 치우침 없이 시적으로 형상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별의 방식으로 만나
벚나무 아래
꽃처럼 하얗게 졌네
검은 벽처럼 돌아앉아서 우네
늙은 나무에게 돌아온 새가 환하게 물어온
봄빛에도
그림자와 서 있네
흘러간 말 뒤에서
심지 뽑아버린 등잔처럼 혼자 어두워지네
달이 어두워지는 그믐
먼 곳으로 흘러간 물소리, 한 사람의 등처럼 아득하여라
낮은 음계로 흐르는 물의 바닥에 천천히 귀를 대보네
- 남유정, 「무심천」 전문
천변을 따라 길게 늘어선 벚나무들을 양쪽에 끼고 청주 시내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무심천’을 떠올릴 때면 어느새 스무 살 이전으로 되돌아가 있는 나를 마주치게 된다. 늘 시에 담아내고 싶었으나 무슨 까닭인지 그러기가 쉽지 않았던 무심천을 다룬 시를 이렇게 마주치게 되니 반갑고도 부러운 마음이 앞서는 느낌이다. 남유정의 「무심천」을 읽으며 나는 날마다 그곳을 지나치며 울고 웃던 어떤 시절의 나를 떠올리는 한편, 언제부터인가 “낮은 음계로 흐르는 물의 바닥에 천천히 귀를 대”고 있는 누군가의 그림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회자정리會者定離라는 말처럼, 인간의 만남이란 언젠가 다가올 헤어짐을 숙명적으로 끌어안은 것이기에 우리는 애초부터 “이별의 방식으로 만나”게 되었던 것. 그런 우리에게 갑자기 들이닥친 이별은 ‘벚나무 아래 하얗게 지는 꽃’처럼 슬프고도 아름다운 일이어서, “검은 벽처럼 돌아앉아서 우”는 사람의 마음속에도 언젠가 “늙은 나무에게 돌아온 새가 환하게 물어온/ 봄빛”만큼이나 환한 시절이 찾아오게 될 것이다. 지금은 “낮은 음계로 흐르는 물의 바닥에 천천히 귀를 대”고 “달이 어두워지는 그믐/ 먼 곳으로 흘러간 물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누군가의 마음을 헤아리는 시간. 떠나간 사람의 등처럼 아득하기만 한 물의 음계를 천천히 짚어가는 이의 아리고도 반짝이는 심정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건 나 또한 그이와 마찬가지로 그곳에서의 아프고도 빛나는 시절을 지나쳐온 까닭이리라.
바깥쪽으로 돌아야 한다
오른손잡이를 만나면 오른쪽 밖으로
왼손잡이를 만나면 왼쪽 밖으로 돌아야 한다
링에 오르면 혼자다 보는 이들을 잊어야 한다
몸을 낮추고 고개를 숙여야 한다
무릎을 굽히고 끈질기게 거리를 둔다
한쪽 손을 끊임없이 내밀어 준다
언젠가 맞받아칠 한 손을 턱 밑에 감춰주고
눈싸움을 피하고 눈빛을 봐야 한다
빈틈을 보여도 좋다 빈 곳을 찾아야 한다
같은 걸음으로 휩쓸려 따라가면 길을 잃는다
아웃복서는 피해 가는 쪽에서 길을 만든다
…(중략)…
언제나 스스로 물음을 던져야 한다
머리가 옆구리에게 옆구리가 머리에게, 아직은?
링 위에는 때로 공이 울리지 않는다
드세게 휘두르는 자일수록 자주 끌어안아야 한다
아직도 이 네모진 세상은 인-파이터의 정글이다
- 곽경덕, 「아웃사이더」 부분
전후좌우를 따질 수 없는 모순과 갈등으로 가득 찬 사회 현실 속에서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앞서가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바라볼 기회조차 빼앗긴 채 각자에게 주어진 하루하루를 끼니 때우듯 무의미하게 연명해가는 중이다. ‘인파이터의 정글’ 같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는 곽경덕의 「아웃사이더」는 자신이 생각하는 ‘아웃사이더’의 생리 및 태도를 ‘인파이터’의 방식으로 담아내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시에서 말하는 삶의 방식은 시 쓰기 또는 언어를 대하는 태도라는 맥락으로도 읽어낼 수 있는데, 시인은 툭툭 가벼운 잽을 던져가며 직접적인 타격을 절제하며 대상의 본질에 가까이 다가서려는 ‘아웃복싱’의 방식이 아니라, 길고도 구체적인 진술을 거듭해가며 여러 타격점을 가격하는 ‘인파이팅’의 방식으로 주제에 접근하려는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언어를 최대한 아껴가면서 여백이 내포한 의미를 한순간에 극대화하려는 시 쓰기가 아웃복싱의 성격에 가깝다면, ‘해야 한다’라는 표현의 반복을 통해 자기 생각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화자의 진술 태도는 ‘인파이팅’의 기질과 닮은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매 순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고 질문하듯, ‘어떻게 써야 하는가?’ 하는 물음을 자기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던져가며 ‘자기만의 길’을 찾아가는 것 또한 시인이 마땅히 지녀야 할 본분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네모진 인파이터의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해 빈 곳을 찾아 바깥쪽으로 피해 돌아가면서 길을 만드는 ‘아웃복서’처럼 우리 또한 “언젠가 맞받아칠 한 손을 턱 밑에 감춰주고” 기다리는 순간이 찾아올 때까지 스스로 무너지지 않기 위해 “처음과 같은 몸짓을 잃”지 않으려 애써가며 삶의 순간순간을 어떻게든 버텨내야만 한다는 것을 시인은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1962년 서울대 영어교육과 2학년 이수익은
신춘문예에 시를 응모해 놓고
겨울방학이 되어 고향으로 내려갔다
부산행 완행열차는 가다 쉬다 했다
1963년 1월 1일 아침
가판대에서 서울신문을 사보고는 깜짝 놀랐다
그의 시 「고별」이 당선된 게 아닌가
당선 소감도 떡하니 나와 있었다
부산 사투리로 이수익은 소리쳤다
-우째 이런 일이?
부산 앞바다에서 높은 파도가 쳤다
우리 시대의 시인 이수익은 이렇게 탄생했다
당선 소감은 문화부 기자 박성룡 시인이
시 쓰듯 대신 썼다
응모할 때 주소를 서울 삼촌 집으로 해놓고는
방학이 되자 고향으로 그냥 내려간
이수익!
아기집 태아가
제 태어날 날짜 모르듯
시인은
저도 모르게 태어나야 시인이다
- 오탁번, 「이수익」 전문
한국시를 대표하는 해학의 달인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오탁번의 「이수익」은 누구나 알 만한 어떤 시인의 등단 과정에 얽힌 에피소드를 독자들 앞에 고스란히 꺼내 놓음으로써 독특한 웃음을 자아내도록 한다. “아기집 태아가/ 제 태어날 날짜 모르듯/ 시인은/ 저도 모르게 태어나야 시인이다”라는 진술은 이 땅의 시인들에게 던지는 평범하면서도 의미심장한 메시지이면서, 한편으로는 자신이 생각하는 시 쓰기의 본질을 넌지시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시(인)는 만드는 게 아니라 태어나는 것’이라는 전통적 가치관에 바탕을 둔 그의 사유는 조립하듯 시를 만들고 억지스럽게 쥐어짜는 듯한 시작詩作 태도가 만연한 오늘날에 와서는 오히려 신선하게 와닿는 면이 적지 않다. 핸드폰을 쓰지 않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든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 자신이 신춘문예에 당선된 사실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자기가 쓴 시는 물론 제 손으로 쓰지도 않은 당선 소감까지 떡하니 나와 있는 신문을 보고는 ‘시인 이수익’은 얼마나 놀랐을까? 기쁨과 놀람이 뒤섞여 최고조에 이른 한 인물의 흥분된 심리상태를 ‘부산 앞바다에서 높은 파도가 치듯’ “-우째 이런 일이?”하며 순진한 느낌의 사투리에 담아내는 것이야말로 이 시인만이 지닌 특별한 재주라 할 만하다. “주민 여러분! 워따, 귀신 곡하겠당께! / 인자 우리 동네 몸땅 좆돼버렸소잉!”(「폭설」)이라는 표현처럼 ‘좆’이라는 단어조차 반감 없이 익살스럽게만 느껴지게 만들고, “이 빠진 종지들이 달그락대는 살강에서는 생쥐들이 주걱에 붙은 밥풀을 냠냠 먹는다”(「두레반」)라며 ‘냠냠’이라는 시어를 통해 작고 반짝이는 눈동자를 요리조리 굴리는 생쥐를 떠올리게 만듦으로써 시의 분위기를 둥글고 환한 익살로 물들이는 것은 누구나 해낼 수 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갇힌 문장은 가시가 되어 찌르고
누워있던 활자가 젖어든다 창마다 불빛
들어서고 얼어붙은 길이만큼 창문은
떨고 있다 땅을 재단하던 발자국 따라
돌을 깎던 손금, 녹아내린다
야맹증에 걸린 판결문 앞에서
망사스타킹은 뛰어다녔고 문제연구소
문패를 반납했을까 항공 우편기가
추락하고 자동차는 시동이 꺼지고
파랑경보가 울렸다 어디로 갔을까
우아한 일들이 빗나간 공을 쫓아간다
모자이크 처리된 행방行方 몇 장
띄우고 삭제된 심장이 양팔 벌린다
배치도를 확인하고 성급한 막대그래프는
사무적인 얼굴을 첨부했다
오늘도 묻지 못한 뒤 페이지를 잠근다
얼음 밑으로 굼실거리는, 온몸으로
슬라이딩하는 목청, 큰 별을 기다릴 때
바람의 손가락이 겨드랑이를 간지른다
- 김명아, 「빗나간 공」 전문
어떤 시인도 마음속의 언어를 고스란히 활자로 담아내지 못한다. 그러기에 시인의 언어는 항상 결핍 상태에 머물 수밖에 없는 법이다. 김명아의 「빗나간 공」이 가리키는 지점에는 영원히 과녁 한가운데 박히지 못하는 화살처럼 매번 자신의 의도를 빗나가고 마는 시적 언어의 본질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선 시인이 보인다. ‘갇힌 문장’ ‘야맹증에 걸린 판결문’ 같은 표현을 통해 시인은 자신이 느끼는 시의 언어가 지닌 한계와 본질을 단적으로 표현해낸다. 어제처럼 오늘도 “묻지 못한 페이지”를 잠그는 화자의 모습에서 우리는 시 쓰기의 열망과 한계를 동시에 짊어진 채 여전히 ‘큰 별’을 기다리며 서 있는 시인의 자화상을 마주하게 된다. ‘빗나가는 공’처럼 언제나 시인의 의도를 벗어나고 마는 시의 언어는 시 쓰기가 지닌 본질과 한계를 의미하는 한편, 어떻게 해도 달성될 수 없는 표현의 욕망이 끊임없이 지연(자크 라캉의 ‘욕망 이론’에서 살짝 빌어옴)됨에 따라 시인의 시 쓰기 또한 영원히 지속될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이유를 제시해준다.
시인이 제각기 다른 삶의 이력을 지녔듯, 시가 태어나는 지점 또한 시인마다 다르기 마련이다. 성장기의 상처와 기억을 되살려내어 그 속에 깃들어 있는 아리고도 찬란한 아픔을 드러내고(이화영), 특정 공간과 연결된 이별의 기억을 떠올리며 그것을 잔잔한 서정의 울림으로 표현하거나(남유정), 자기가 존재하는 세계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야 하는가를 되물어가며 자신이 생각하는 삶의 방식을 구체화하고(곽경덕), 시적 대상이 무엇(누구)이든 간에 독특한 해학의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해가며 자기만의 시 세계를 구축해가며(오탁번), 매 순간 시 쓰는 행위가 지닌 본질과 한계를 깨달으면서도 빗나가는 공(언어)을 끊임없이 던지는(김명아) 시인들을 통해 우리는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여전히, 어제와 다르지 않은 길 위에 처음인 듯 발을 얹으며 자신만의 시를 꿈꾸기 시작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