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태화강역에서 첫차 6시에 출발하는 봉계시장행 버스를 집 앞에서 6시 30분에 탑승한다.
아침기온은 산행하기 좋은 날씨나 낮에는 27도까지 올라간다는 예보가 있다. 해마다 치산서원과 치술령을 한두번 오지만 매번 차를 가지고 새벽 산행을하는지라 이렇게 늦게 버스타고 오기는 정말 오랜만이다. 아래하리마을 입구에 6시55분 하차하여 농로를 따라 걸어올라간다. 양 길 가징자리에는 개망초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지금은 시들아가는 중이지만 금계국이 우리나라 온 산천을 뒤덮고 있는 꽃이다. 가시박등 퇴치해야 할 외래종이 여랏 있지만 이 아름다운 금계국도 번식략이 너무 좋아 일부에서는 퇴치해야 할 외래종에 포함시키자는 의견도 있다고 한다. 차산서원에 잠시들러 사진 몇장을찍고 주차장을지나 치술령 서북능선 입구에 도착하니 한시간 정도 걸어온듯하다. 지금부터 본격적인 오르막길을 한시간 이상 올라가야한다. 치술령 울산 망부석에 도착하여 짊어지고 온 막걸리 한잔하고 가려고 배낭을 여는데 아뿔사! 어제밤에 애써서 까놓은 우렁이는 냉장고에 낳어두고 애궃은 초장만 들어있네 어쩌나... 힐수없이 안주는 계란하나에 토마토 하나로 벗을 삼을 수 밖에.... 저멀리 보이는 영남알프스 능선과 맞은편에 있는 연화산을 조망하면서 휴식을 취하고 난 후 정상으로 가는 능선길을 십여분 걸어면 정상에 도착한다. 정상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곳에 경주 밍부석에서는 멀리 보이는 무룡산과 삼태봉 능선이 한눈에 들어오고 동해안도 들어오는데 오늘은 해무가 껴서 그런지 바닷물은 보이지 않는다. 풍경사진 몇장을 찍고 하산을 시작한다. 헬기장을 지나 갈비봉에 도착 지금부터 급경사를 이십여분 내려가야 임도를 만날수 있다. 임도길을 30여분을 걸어 법왕사 입구에 도착 다시 옻밭마을로 하산을 계속 이어간다. 여기는 교통편이 불편해서 아침에 미리 아내에게 픽업을 요청해 놓은 상태라 점심시간 맞춰서 하산 시간을 여유있게 하산해 본다. 현재시간 11시 40분 12시에 유적지에서 만나기로한 아내는아직 시간이 일러 도착하지 않았네요. 그늘 벤치에 앉아서 땀을 식히고 앉아 있습니다. 12시다 되어 아내가 도착 합니다. 오늘 산행을 마무리하고 식당으로 향 합니다.
아래는 퍼온글 이고 다들 내용은 아시겠지만 다시한번 역사 이야기를 접해 보시기 바랍니다.
(퍼온글) 치술령 : 울산광역시 울주군의 두동면 만화리와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에 걸쳐 있는 산이다(고도 : 765m). 치술령은 전설에 의하면 "박제상 사후 어느 겨울밤, 눌지왕이 잠을 청하는데 어디선가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결국 그 소리가 난 곳을 찾았는데 그곳이 지금의 치술령 중턱이었다. 신하들을 시켜 무덤을 파게 했는데 그곳에는 마치 아이의 모양을 한 금동불상이 있었다. 왕이 불상을 안으니 울음을 그쳤다. 왕은 불상을 가지고 환궁했고, 그 무덤을 만든 자를 수소문 했는데, 그 주인공은 다름 아닌 근처 마을의 금슬 좋은 부부였다. 어머님을 위해 송이버섯을 따서 반찬을 만들어 드렸더니, 어머님은 잡수시지 않고, 그 버섯들을 손자인 웅이에게만 먹이는 것이었다. 부부는 어머님은 돌아가시면 끝이라 의논하고는 웅이를 없애버리기로 하고 산 중턱에 묻어 버렸다는 것이다. 왕은 너무나 순박한 서민들의 애환을 한눈에 보고 이 산을 치술령(鵄述領)이라고 이름 지었다."라고 전하는 데서 지명의 유래를 짐작할 수 있다. 당시에 왕이 말을 매었던 자리를 마등이라고 전하며, 웅이가 묻혔던 자리에 웅치사(雄鵄寺)란 절을 지어 오랫동안 웅이의 넋을 위로 했다고 한다. 치(鵄)는 솔개 등의 새를 나타내는 단어이고, 술(述)은 수리, 즉 높은 산을 뜻하므로 치술령은 '새가 사는 높은 산'을 의미한다. 박제상의 부인은 두 딸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 일본에 간 남편을 기다리다 죽으니 그 몸은 돌로 변하여 망부석이 되고, 그 영혼은 날아가 숨었는데 그곳을 은을암(隱乙巖)이라고 한다. 이곳에 사당을 짓고 그 뜻을 기리는 제를 봉행하게 한 곳이 치산서원이라고 한다. 『조선지형도』(울산)과 『조선지지자료』에는 모두 치술령으로 기록하고 있다.
(퍼온글) 치산서원 : 신라의 충신 박제상과 그의 일가족을 제향하는 서원으로 보기 드문 서원 중 하나이다. 치산서원의 기원은 박제상의 처를 제사 지내기 위해 신라시대 경주 묵장산의 치술령이라는 고개에 세워졌던 [신모사]에서 시작한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영조 21년(1745)에 영해박씨 주도로 신모사가 있던 두동면에 다시 건립하여 박제상과 그이 부인 및 두 딸을 제향하고 있다.
박제상은 박혁거세의 후손으로 신라 눌지왕으로부터 실성왕 때 고구려와 왜국에 볼모로 간 아우들을 데려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박제상은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서 복호를 먼저 데려온 후 왜국으로 가 미사흔을 구출하고 자신은 심한 고문 끝에 불에 타 숨졌다. 두동면 만화리 동쪽 치술령에는 박제상의 부인이 두 딸과 함께 남편을 기다리다 죽어 망부석이 되었고, 영혼은 새가 되어 날아가 숨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망부석과 은을암이 남아 있다. 그 후 눌지왕은 박제상에게는 대아찬을 추증하고, 그 부인은 국대부인에 추봉하였다.
치산서원의 인접한 박제상 기념관에는 삼국시대의 생활상과 4~5세기의 국제정세와 박제상의 활약상 등이 전시되어 있으니 연계하여 방문하는 것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