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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7. 묵상글 ( 사순 제2주간 월요일. - 쟤들이 아니라 저희가. 등 )
^ 호명환 신부님. 일부 : 아직 /
^ 조명연 신부님 : 아직 / 04:33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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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7. 사순 제2주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3.17 03:14
- 쟤들이 아니라 저희가
“저희는 죄를 짓고 불의를 저질렀으며 악을 행하고 당신께 거역하였습니다.”
오늘 다니엘서에서 저희는 죄를 지었다는 고백이 몇 차례 반복되는데
이 고백에서 저는 ‘저희는’이라는 표현이 유독 마음에 다가왔습니다.
예언자는 하느님께 쟤들이 죄를 지었다고 고발하지 않고,
‘저희는’ 죄를 지었다고 공동의 죄를 공동 고백하는 겁니다.
이래야만 살 수 있습니다.
이래야지 같이 살 수 있습니다.
공멸하는 공동체를 보면 서로 쟤가 잘못했다고 합니다.
저는 요즘 이런 모습을 너무 많이 보고 있고 그래서 무척 가슴이 아픕니다.
공멸의 길을 끝까지 가려는 그들이 가엾기도 하고 분노가 치밀기도 합니다.
서로 너를 눌러 이기고 자기만 살려고 하다 결과적으로 공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는 몇 가지 구체적으로 지적하시는데
먼저 남을 판단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남을 판단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판단 받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제 생각에 여기에는 ‘함부로’라는 부사 하나가 빠져있고
그래서 주님께서는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판단은 그 자체로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때 우리는 판단을 잘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육신으로나 정신으로 병이 있으면
그 병이 무엇인지 정확한 진단이 필요하고 그래야 정확한 치료가 되겠지요.
그러므로 함부로 판단치 말고 신중히 그리고 정확히 판단하면 될 것입니다.
그렇게만 한다면 그 판단은 사랑의 판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일이나 사람의 상황 판단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 판단이 문제이고 그것도 단죄가 목적인 판단이 문제이겠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판단하지 말라고 하신 다음
남을 단죄하지 말라는 말씀을 이어서 하십니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오늘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그다음이 더 중요합니다.
단죄하지 말라는 말보다 용서하라는 더 적극적인 사랑,
또는 더 적극적인 자비의 말씀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말씀을 종합하면 단죄하지 말고 용서하라는 말씀인데
이와 관련하여 저는 옛날의 저의 부끄러운 모습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옛날의 저는 단죄한 다음 용서하느라 애썼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많은 경우 멀쩡한 사람을 단죄하여 죄인 만들고,
그런 다음 용서가 안 되는 사람을 용서하느라 애를 썼습니다.
애초에 단죄하지 않았으면 용서하느라 애쓸 필요가 없었는데
교만했기에 감히 단죄하는 위치에 있었던 것이고 죄지었던 것이며,
교만을 제거하지 않고 용서하려고 했기에 용서하는 것이 어려웠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하고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가 자비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겸손이 밑바탕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겸손이 밑바탕 되었을 때야 우리는 다니엘서의 예언자처럼
쟤들이 죄지었다고 고발치 않고 저희가 죄를 지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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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7. 사순 제2주간 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성경의 명령!
하느님의 숨
2025.03.16. 16:14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3월 16일 일요일 (호명환 번역) 열한 번째 주간: 낯선이를 환영하기
우리는 매일 이 질문을 해야 합니다: "나는 사랑하기를 시작이라도 했는가?"
리처드 신부는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 대로 다른 이들, 특히 낯선이를 얼마나 제대로 사랑하는지에 대해 성찰하라고 초대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우리가 우리 시대의 여러 문제에 참여하는 방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또 그 방식을 변화시키기까지 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좋은 종교라도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하느님에 관해 말하는 것"은 우리가 참된 빛이 아닌 오직 우리 자신의 반사체만 볼 수 있는 불투명한 화면일 뿐입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1요한 4,20). 우리 중 누구도 거짓말쟁이가 되고 싶어하지 않지만, (법과 규칙의 준수와 관련한) 종교의 높은 목표는 우리 모두를 불가피하게 거짓말쟁이로 만들어 버립니다(로마 7,7-25에서 바오로가 이런 역설적인 현상을 설명하는데, 이를 한 번 읽어 보십시오.) (법이나 규칙에 더 많은 신경을 쓰기보다) 우리는 매일 이 질문을 해야 합니다: "나는 사랑하기를 시작이라도 했는가?"
그리스도인들 대부분은 자기 나라나 민족의 지배적인 집단의 문화적 편견과 세계관을 반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삶의 태도와 의식(consciousness)의 참된 변모를 드러내 주는 이들은 소수의 사람들인데도 말입니다. 이는 노예 제도와 인종 차별, 계급주의, 소비주의, 이민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의 의료 혜택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항상 가난한 사람들을 치유하고 외국인들을 찬양하던 한 사람(예수 그리스도)에 기반을 둔 종교는 지배적인 것을 선택하는 식의 논리, 즉 대중심리를 거부해야 합니다!
혹자는 한 분이신 하느님을 믿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이 그 한 분이신 하느님의 동등한 자녀라는 사실을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국가와 계급 체제, 문화, 그리고 심지어 종교에 의해 생겨난 인위적인 경계들을 넘어서는 줄에 첫 번째로 서 있어야 하는데도, 우리는 그 줄의 늘 맨 꼴찌에 서 있어왔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는다고 말하는 바를 정말로 우리가 믿는지에 대해 의심하게 됩니다. 종교가 너무나 종종, 예수님께서 솔직 담백하게 가르치신 바와 같이 "자기를 버리는" 길(루카 9,23 참조)이 아닌 자기를 지키는 길이 되고 있습니다. [1]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낯선이를 환영할 의무가 있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 우리 모두 집중해 봅시다: "내가 나그네였을 때 따뜻이 맞아 주었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다."(마태 25,35-36). 우리 시대에 외국인들과 관련한 자선 행위는 어느 때보다 더 의미가 있고 또 필요합니다. 경제 위기와 무력 전쟁, 기후 변화 등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땅을 떠나 이주하게끔 합니다. 하지만 이주는 새로운 현상이 아닙니다; 이는 인류 역사의 한 부분입니다. 이런 현상이 최근에 생겨났다고 생각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의식이나 기억이 부족한 탓입니다....
때로는 다양한 방식으로 난민들과 이주민들을 돕고 돌보기 위해 자기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수많은 남녀의 침묵의 노력이 본능적인 이기심의 목소리를 내는 이들의 크나큰 함성으로 인해 가려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국경을 폐쇄하는 것은 해결책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로 인해 범죄적 인신매매를 조장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해결책으로 가는 유일한 길은 연대입니다. 특히 외국인과의 연대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모두 ... 전쟁과 기아, 폭력, 그리고 비인간적인 환경으로부터 도망 나오는 형제자매들을 환영하라는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함께라면 자기들 땅과 가족과 일, 그리고 존엄성을 잃은 이들을 위한 충분한 도움의 손길이 될 수 있습니다. [2]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깊이 성찰해 보았습니다. 아마도 그 사마리아 사람은 곤경에 처한 사람이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고, 또 그가 즉각적인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낯선이를 도울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제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우리 삶에서 악의적인 사람들과 불친절한 사람들을 돕는 것이 훨씬 더 어렵습니다. 쓰라린 경험을 하는 사람이 고통을 겪고 두려워하며 하느님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을 인식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그런 사람들을 대해야 할까요? 그리고 우리에게 해를 끼치고 - 계속해서 해를 끼치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동정심을 보일 수 있을까요?
—Shannon M.
[1] Adapted from Richard Rohr, “We Have Not Yet Begun to Love: Religion and Immigration,” Radical Grace 24, no. 4 (2011): 3.
[2] Pope Francis, “A Stranger and You Welcomed Me,” in A Stranger and You Welcomed Me: A Call to Mercy and Solidarity with Migrants and Refugees, ed. Robert Ellsberg (Orbis, 2018), 53, 54, 55.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Lucas Dalamarta, Untitled (detail), 2024,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알지 못하는 존재와 함께 할 때 우리는 다른 이들을 위해 열린 마음으로 공간을 마련하고 함께 나아가는 수양을 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를 우리가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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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7. 사순 제2주간 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25.03.17 04:17
어느 마을에 심한 가뭄이 찾아왔습니다. 계속된 가뭄에 마을 사람들은 성당에 가서 함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며칠째 계속 성당에서 기도회를 하고 있는데, 성당 한가운데에 천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하늘에 너희의 기도가 닿았다. 참된 믿음을 가진 이가 제단에 초를 봉헌하면 곧바로 비를 내려주겠다.”
사람들은 서로 주저하기 시작했습니다. 초를 봉헌했는데 비가 오지 않으면 참된 믿음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까? 신부도 수녀도 망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자들도 차마 신부, 수녀에게 초를 켜라고 하기 힘들어서, 신자들의 대표이며 믿음이 크다고 알려진 사목회장님이 등 떠밀려서 제대 초를 켜서 봉헌했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쉽게도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누가 제대 초를 켜서 봉헌해야 하는지 눈치만 보고 있었습니다. 신부님이나 수녀님밖에 없다는 의견이 모이고 있을 때, 성당 한가운데로 한 꼬마 아이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초를 켜서 제단에 봉헌하자마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이 아이의 복장에서 참된 믿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아이는 비가 온다는 믿음을 가지고 우비를 입고, 장화를 신고, 또 손에는 우산을 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어떤 사람도 비가 내리길 기도하면서도 비 올 것을 준비하고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떤가요?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온전한 신뢰를 하느님께 하고 있습니까? 이렇게 하느님께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지키려고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라고 말씀하시면서, 남을 심판하지 말고, 또 남을 단죄하지 말고, 무엇보다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제일 못하는 부분이 아닐까요? 너무 쉽게 심판하고 단죄하고 있으며, 용서를 가장 힘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온전한 신뢰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이 온전한 신뢰는 지키기 힘들어도 그 말씀을 지키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습니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 6,38)
이 말씀의 주인공이 바로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께 대한 온전한 신뢰를 보이는 굳은 믿음의 소유자만이 이 말씀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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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잔잔해진 눈으로 뒤돌아보는 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 젊은 날에는 왜 그것이 보이지 않았을까(박경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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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7. 사순 제2주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이는 단지 우리에게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는 말씀인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왜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지를 깨우쳐줍니다. 다시 말해서, 이는 자비로운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먼저’ 자비를 베푸셨다는 사실, 곧 우리는 아버지의 ‘먼저 베푸신 자비’를 입었다는 사실을 깨우쳐줍니다. 나아가서, 우리 안에 당신의 거룩한 형상인 ‘자비의 얼굴’을 심어놓으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바로 그 ‘자비의 얼굴’을 드러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비를 베풀 것인가?
이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네 가지 동사로 표현하십니다.
“심판하지 말라”, “단죄하지 말라” “용서하라”, “주어라”
그러니 ‘자비의 실천’은 우선 심판과 단죄를 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요, 악을 피하고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입니다. 타인의 허물을 심판하기보다 오히려 자신의 허물을 들여다보며, 타인들 앞에 자신을 앞세우기보다 자신을 다소곳이 내려놓고, 겸손하게 엎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먼저’ 용서와 자비를 베푸셨듯이, ‘먼저’ 용서를 베푸는 것입니다. 묘한 것은 ‘먼저’ 용서하면, 저절로 단죄와 심판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곧 ‘단죄, 심판하지 않고 용서하라’는 것이 아니라, 먼저 용서하면 단죄, 심판하지 않게 됩니다. 이는 악을 피하되 선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비록 자신이 죄에 떨어지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사랑으로 나가지는 못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결국, 악이 스스로 선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먼저 선을 베풀면 악이 물러가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선을 행하는 것이 악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됩니다. 그러니 어둠을 저주하기보다 한 개의 촛불을 켜야 하고, 평화를 보존하려하기보다 평화를 창조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 12,21)
그러니 우리는 ‘용서할 수가 없다’고, 혹은 ‘용서가 안 된다’고 말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나아가서 이미 용서받은 죄인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용서받았다는 것을 알아야 용서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서, 아직도 용서하지 않고 있는 자신마저도 하느님께서는 용서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먼저,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죄를 주님께 용서 청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용서하시니 우리도 용서하는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주님!
제 안에 심으신 당신의 자비가 저를 다스리게 하소서.
제 안에서 자비가 흘러나게 하소서.
당신께서 자비하신 것같이 자비로운 자 되게 하소서!
자비 안에 심어 둔 당신의 거룩한 형상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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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7. 사순 제2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가톨릭 연구소에서 교우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내용을 보았습니다. 질문의 내용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성당에 다니는 이유였고, 다른 하나는 성당을 떠난 이유였습니다. 그리고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에 따른 성당에 다녀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였습니다. 사순시기를 지내는 신앙인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아서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먼저 성당에 다니는 이유입니다. 이유는 다섯 가지 정도 되었습니다. 첫째는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성체를 모시기 전에 ‘평화의 인사’를 합니다. 마음의 평화는 자아를 잃어버린 현대인에게 필요한 위로입니다. 둘째는 ‘삶의 의미와 목적 발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주라는 사명입니다.
셋째는 ‘공동체와의 유대감 형성’입니다. 여행을 가도 혼자 가는 것도 좋지만 함께 가는 것이 좋습니다. 재미있기도 하고, 안전하기도 합니다. 초대교회는 함께 모여서 기도하였고, 찬양하였습니다. 가진 것을 서로 나누었고, 힘들고 어려운 이웃을 도왔습니다. 가톨릭은 세계 어디에 가도 같은 전례를 하기에 유대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넷째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지침’을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계명은 이렇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여라.” 예수님께서는 “첫째가 되려거든 꼴찌가 되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 겸손, 희생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계명입니다. 다섯째는 ‘전례와 의식 참여로 영적인 충만감’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체성사’를 제정해 주셨습니다. 성체성사는 신앙생활의 정점입니다. 고백성사를 통해서 주님을 합당하게 모실 준비를 합니다.
성당을 떠나는 이유도 다섯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삶이 바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신앙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성직자와 수도자에 대한 실망 때문입니다. 넷째는 성당 내에서의 소속감, 교제, 혹은 따뜻한 공동체 경험이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다섯째는 교회 조직의 경직된 구조나 변화에 대한 저항, 혹은 내부 정책과 결정 과정에 대한 불만 때문입니다. 교우들이 성당에 바라는 것도 다섯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신앙 교육 강화입니다. 둘째는 공동체 내에서의 소통입니다. 셋째는 신자들의 재교육입니다. 넷째는 성당의 시설개선입니다. 다섯째는 청년 사목의 확대입니다.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은 성당에 다녀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성찬례(미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미사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마련해주신 축복과 감사의 예배입니다. 이 미사를 통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기억합니다. 둘째는 ‘하느님과 깊은 만남’입니다. 모세는 거룩한 곳에서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성당은 하느님과 만날 수 있는 거룩한 곳입니다.
셋째는 ‘죄의 용서와 영혼의 회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고 하셨습니다. 용서는 아낌없이 모든 것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넷째는 ‘공동체로서의 신앙’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 교회가 모진 박해를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몸으로 의지하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시편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좋기도 좋을시고 아기자기한지고, 형제들이 함께 모여 오순도순 사는 것” 다섯째는 ‘구원의 은총’입니다. 우리가 성당에 다니는 것은 현세에서 축복받는 것만이 아닙니다. 현세에서 비록 고난과 역경을 당할지라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성당에 다니는 진정한 이유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다니엘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 저희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고 용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저희는 주님께 거역하였습니다. 주 저희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당신의 종 예언자들을 통하여 저희 앞에 내놓으신 법에 따라 걷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의 신앙은 진실한 회개였습니다. 하느님의 법과 계명의 준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다니엘의 신앙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방식을 말씀하십니다. 먼저 용서하고, 먼저 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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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7. 사순 제2주간 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우리 그리스도교의 가르침 중 그 중심 주제들이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아마도 첫 번째는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다음 자리가 바로 ‘용서’일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도 용서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저들의 죄를 알지 못합니다.’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용서하셨다고 해서 용서가 그리 쉬운 것은 아닙니다.
용서는 우리 삶의 커다란 산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올라가기를 처음부터 포기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올라가다 지쳐서 포기하기도 합니다. 용서라는 산의 정상에 선다고 하더라도 또 다른 정상을 향해 가야 한다는 것에 허무함을 느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용서는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용서는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닌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디언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고 합니다.
‘용서하지 못하고 분노 안에서 사는 사람은 하루하루 무덤을 두 개 파는 것과 같다. 하나는 마음으로 저주하고 있는 다른 이의 무덤이고 또 다른 하나는 자신의 무덤이다.’
용서하지 못하고 어두운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그 마음이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갈 것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는 것입니다.
용서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포기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산을 오르다 쉬어가는 것처럼 힘들면 쉬어가도 됩니다. 정상에만 도달하면 되니까요. 그렇게 정상에서 마시는 신선한 공기가 우리를 새롭게 하는 것처럼 용서라는 정상에서 만나는 기쁨이 우리를 새롭게 만들어 삶을 더욱 기쁘게 살아가는 은총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소중한 것은 항상….
어릴때 할아버지의 심부름으로 ‘베지밀’을 사러 갔습니다.
오면서 아이스께끼 사 먹으라고 여윳돈도 주셨습니다.
물론 신났습니다.
봉지에 베지밀 두 병을 담고
아이스께끼를 입에 물고 흥얼거렸습니다.
신나는 마음을 몸으로 표현하며 들고 있는 봉지를 빙글빙글 흔들었습니다.
집에 도착했습니다. 몇 개의 계단을 올라 집 대문에 들어서야 하는데…. 그만…. 신나게 흔들던 봉지가 계단에 부딪혔습니다.
그 이후는 말 안 해도 아실 것입니다.
‘소중한 것은 양손으로….’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 손으로 받드는 것과 양손으로 받드는 것은 그 마음이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체를 양손으로 받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 바로 성체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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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7. 사순 제2주간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닮의 여정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
여전히 병원에 계시지만 점차 병세는 호전되고 있다는 프란치스코 교황님 소식입니다. 새벽에 읽은 어제 발표한 삼종기도후 메시지도 교황님 믿음을 반영합니다.
“하느님을 찬미합시다, 그분은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몸은 약할지라도, 그 어느 것도 우리를 사랑으로부터, 기도로부터, 줌으로부터, 믿음 안에서 서로 희망의 빛나는 표징이 되는 것으로부터 막을 수 없습니다. 부단히 하느님 사랑의 광선을 반사하십시오.”
그 어떤 환경 안에서도 자비하신 하느님의 빛나는 표징으로, 영원한 삶을 살 라는 고백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은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를 닮아가는 하닮의 여정입니다. 오늘날 모든 불행과 재앙은 하느님을 떠남에서, 하느님을 잊음에서, 잃음에서 기인합니다. 발광체發光體 자비하신 하느님을 반사하는 반사체反射體 인생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광신도狂信徒가 되어 발광發狂하지 말고, 광신도光信徒가 되어 발광發光하는 삶은 살라는 것입니다.
어느때보다, 하느님을 찾아야할 위기의 시대입니다. 해마다 맞이하는 사순시기, 날로 나라 안팎으로 위험이 증폭되어가는 위기의 시대에 올해 맞이하는 사순시기는 더욱 고맙고 반갑습니다. 어느때 보다 절실한 4월20일 부활대축일까지 기도와 회개, 절제와 극기의 사순시기입니다.
제 집무실 벽에 늘 걸려 있는 렘브란트의 돌아온 작은 아들을 품에 안고 기뻐하는 자비하신 아버지야 말로 자비하신 하느님의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당신을 떠난 모든 사람들의 귀가를 간절히 한없이 기다리는 자비하신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오늘 옛 현자의 지혜도 자비하신 하느님이 답임을 보여줍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사람은 ‘밖’을 두려워하게 된다. 안에서 밖으로 나와야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다산>
나로부터 벗어나 밖의 하느님을 향할 때, 부단히 하느님을 향한 여정에 오를 때 비로소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두려움을 몰아내는 하느님의 자비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비슷한 성질을 가진 것들끼리 모이고, 만물은 무리를 지어서 나뉘어 산다. 길흉吉凶이 그로 말미암아 생긴다.”<논어>
부단히 한계를 넘어 대자대비, 공평무사한 자비하신 하느님을 향해 닮아감으로 평화 공존의 삶을 살 때 길흉도 점차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은 하느님을 닮아가는 하닮의 여정입니다. 다음 행복기도의 다음 대목을 마음에 새깁니다.
“자비하신 아버지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오늘 복음도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 아드님을 통해 우리 믿는 이들을 향해, 아니 전인류를 향해 당신의 평생 소원을 말씀하십니다. 당신의 모상대로 지음받은 우리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기대 수준은 이처럼 높습니다.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루카복음 평지설교의 결론같은 말씀입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하느님의 제시하는 바 유일한 평생과제이자 우리 모두를 향한 평생소원이자 우리의 평생목표이기도 합니다. 이래서 우리 삶은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를 닮아가는 하닮의 여정이라 하는 것입니다. 몸은 노쇠해가도 날로 자비의 삶은 깊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신 하느님 아버지입니다. 하느님이 되고 싶은 마음에 써놨던 ‘하늘’이란 고백 글도 생각납니다.
“하늘이
하늘에 가다니요?
그냥
있으세요
당신은
늘 높고 푸른 하늘이예요”
하느님의 자비는 추상적이 아닙니다. 애매한 추상명사가 아니라 구체적 실행동사입니다. 하느님의 깊이는 인간의 깊이입니다. 하느님의 신비는 인간의 신비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신비가 바로 답입니다. 예수님의 구체적 처방이 모두 실행동사입니다.
“1.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2.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3.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4.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되로 되받을 것이다.
바로 이런 구체적 자비행이요 이런 행위 또한 부단한 의도적, 의식적 선택이자 훈련이요 습관화의 노력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자비하신 하느님을 닮은 결정적 수행은 기도와 회개임을 제1독서 다니엘서가 제시합니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하늘을 우러러 두려워할 줄 모르는 후안무치, 철면피, 적반하장의 뻔뻔한 미치광이, 특히 오늘날 대한민국의 일부 극소수 양심과 상식을 잃어버린 무지한 사람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기도와 회개의 삶입니다.
“아, 주님! 위대하시고 경외로우신 하느님,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 계약과 자애를 지키시는 분!
저희는 죄를 짓고 불의를 저질렀으며 악을 행하고 당신께 거역하였습니다.
당신의 계명과 법규에서 벗어났습니다.
당신의 종, 예언자들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저희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당신의 법에 따라 걷지 않습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의로우십니다.
그러나 저희는 오늘 이처럼 얼굴에 부끄러움만 가득합니다.
저희는 모두 얼굴에 부끄러움만 가득합니다.
저희가 당신께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주 저희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고 용서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다니엘의 회개의 기도가 가슴을 칩니다. 마음에 새기듯 절실한 내용들이라 대부분 다 써봤습니다. 거룩하고 은혜로운 사순시기 집중적 수행이 기도와 회개입니다. 진정성 넘치는 회개의 기도가 하느님 자비에 이르는 지름길입니다. 문제는 나에게 있고 답은 하느님께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가 궁극의 답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사순시기,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간절하고 항구한 회개의 기도와 더불어 하닮의 여정에 충실하도록 좋은 힘이 되어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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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7. 사순 제2주간 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늘 하느님처럼 되어가는 것>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결코
하느님이
될 수는 없지만
쉬지 않고
하느님처럼
되어가는 것이니
하느님을
향한 믿음은
늘 더욱 깊숙이
뿌리내리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희망한다는 것은
결코
하느님이
될 수는 없지만
쉬지 않고
하느님처럼
되어가는 것이니
하느님을
향한 희망은
늘 더욱 새롭게
피어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코
하느님이
될 수는 없지만
쉬지 않고
하느님처럼
되어가는 것이니
하느님을
향한 사랑은
늘 더욱 뜨겁게
타오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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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7. 사순 제2주간 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인간의 자비 안에는 하느님의 모습이 들어 있다
하느님 모습의 흔적은 썩는 육신이 아니라 영혼의 지성 안에서 분명하게 알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의 의로움, 용기, 절제, 지혜, 훈련과 본디 하느님의 것인 온갖 덕 안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봅니다. 이런 것들은 “그러므로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고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하느님을 닮고자 애쓰는 사람들 안에 있습니다.
-오리게네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6
의지를 버려라
모세는 그의 하느님 야훼께 애원했다(탈출 32,11).
우리가 이토록 철저하게 버린다면, 무슨 일이든지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의 뜻이 하느님의 뜻과 하나가 된다면, 그런 우리의 뜻이야말로 행동의 원천이 될 것이고, 우리는 우리의 행위나 무위를 변명할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 본의 아니게 나의 손이 악행을 저질렀더라도, 그것은 죄가 되지 않을 것이며, 나는 그 책임을 질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의지 안에서라야 여러분은 모든 것을 성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이든, 아니면 여러분이 좋아하는 것이든 간에 말입니다. … 오직 그런 의지만이 사랑의 자리입니다. 그러한 의지를 더 많이 가진 자들은 더 많은 사랑을 얻게 될 것입니다. 누가 그것을 더 많이 가졌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느님이 영혼의 터에 숨어 계시듯이, 그것도 영혼 안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자유의지에서 우리의 일은 하느님의 일이 된다. 이때 우리는 “자기를 보내신 분의 영광을 찾고” “속에 불의가 없게"(요한 7,18) 될 것이다. 의지가 자유로워질 때, 우리도 자유로워지고, 하느님도 자유로워지며,우리의 일도 막힘이 없게 될 것이다.(351)
✝️ 월요일 거룩한 독서(렉시오디비나)의 날✝️
마태 25,1-13
열 처녀의 비유
“그때에 하늘 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신랑이 늦어지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그런데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났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그러자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 저마다 등을 챙기는데,
어리석은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이 꺼져 가니 너희 기름을 나누어 다오.’ 하고 청하였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안 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 하고 대답하였다.
그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나중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지만,
그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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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7. 사순 제2주간 월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생활묵상 : 가스 정기점검과 판공성사
강만연 [fisherpeter] 250317. 00:10 ㅣNo.180799
이틀 전에 매년 정기적으로 저는 봄 가을 이렇게 두 번 가스점검을 받습니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가스렌지는 7년 됐습니다. 제가 사용한 지 7년 됐다고 했는데 만약 이 사실을 숨기고 누군가에게 이 가스렌지 구입한 지 석 달 정도 됐다고 해도 아마 믿으실 겁니다. 사실 한 1.5 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본다면 일주일 전에 구입했다고 해도 믿을 정도입니다. 저는 오늘 이 사실을 근거로 해서 평소 생각한 묵상이 있고 여러분에게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사실 모르는 사람은 제가 엄청 관리를 잘 해서 그렇게 깨끗하게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하실 분도 계실 텐데요 꼭 그런 건 아니고요 크게 보면 일 년에 두 번 보는 가스점검이 가장 큰 요인 중 하나가 아닌가 싶습니다. 가스렌지는 크게 두 가지만 조심하면 깨끗하게 특별히 유지하려고 하지 않아도 깨끗하게 유지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봤을 때 음식물이 끓어넘치는 경우와 기름이 들어가는 요리를 할 때 기름이 튄 것을 제때 잘 청결하게만 해 주면 정말 깔끔한 상태가 됩니다. 아무리 유명한 세프가 요리를 한다고 해도 계란후라이 같은 것을 해도 기름이 튀게 됩니다. 오른쪽 한 쪽이 한 번 예전에 음식물을 올리고 난 후에 딴 일을 하다가 냄비를 태운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 흔적이 잘 없어지지 않습니다. 이건 나중에 한번 물과 베이킹소다 같은 걸로 좀 담궈놓고 세척하면 깨끗해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제가 살림 사는 주부도 아니고 해야 할 것도 많기 때문에 두 달에 한 번 정도만 가스렌지 전용 세제로 청소를 합니다. 이게 시간이 좀 지나서 청소를 하면 힘이 듭니다. 그리고 가스점검 온다는 카톡이 오면 그때 한 번 꼼꼼히 청소를 합니다. 어떻게 보면 남에게 청결하지 못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그렇게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 가스점검하는 분이 남자분이라면 그냥 적당하게 하고 넘어갔을 수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그랬을 겁니다. 여자분이라서 생각보다 신경이 쓰입니다. 물론 그분이 고객의 가스렌지가 청결하든지 말든지 신경을 쓰는지 안 쓰는지는 잘 모릅니다. 제가 이런 부분에 대해 신경을 쓰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지금 계산해보니 38년 전쯤 됐습니다. 제 중학교 은사님 댁에 심부름을 학교에서 급히 가게 됐습니다. 그 당시 제가 선생님 이사하실 때 도와드려 저만 선생님 댁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도 좀 난감하셨는데 제가 어쩔 수 없이 갈 수밖에 없었던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저는 그날 이사하시고 난 후에 처음 갔던 날입니다. 그날 선생님 댁에 들어가서 부엌을 보고 기절초풍하는 줄 알았습니다. 가스렌지 부근이 마치 중국집 부엌 같았습니다. 솔직히 고백하면 그날 이후에 선생님에 대한 환상이 완전 무너졌습니다. 제가 아무것도 모르는 중3 어린 학생이었지만 말입니다. 아마 평소 깔끔한 이미지의 선생님 모습을 보지 않았다면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겁니다. 아마 저한테는 그때 그 일이 간접적인 트라우마 같은 걸로 작용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아무리 남자라고 해도 그 정도까진 아닌데 아무튼 이게 그런 건 여자, 남자의 성별하고는 무관한 것을 언제 성인이 된 후에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 아마 그때 그 선생님은 그렇게밖에 할 수 없는 사정이 있으셨을 겁니다. 나름 제가 청결하게 깔끔을 뜨는 사람이라서 그런 건 아니지만 본의 아니게 제 의도와는 상관없이 청결하게 유지될 수 있었던 건 이런 영향이 있었던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저는 10년째 사용하고 있는 흰 사각 접시 두 개가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이 접시를 설거지할 때마다 저도 모르게 바치는 화살기도가 있습니다.
이 접시는 대개 계란후라이를 담는 용도로 많이 사용합니다. 먹고 나면 저는 노른자를 완전히 익히지 않기 때문에 약간 노른자 자국이 좀 남습니다. 이 자국이 설거지할 때 씻겨나가면 순간이지만 기분이 상쾌한 걸 느끼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그때부터 바친 화살기도가 이 접시처럼 내 영혼도 깨끗했으면 좋겠다는 지향으로 화살기도를 했는데 언제부터인가는 그냥 무의식적으로 말을 하지 않아도 그런 기도가 자연히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가스렌지 이야기를 하다보니 접시 이야기도 하게 됐습니다. 사실 저는 이 접시에 관해 묵상한 걸 언제 한번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오늘 약간 하게 돼 다음엔 하지 못하겠네요. 이젠 마무리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판공성사 시간이 다가옵니다. 재의 수요일 때 하고 또 오늘 미사 때 성사를 봤습니다.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저는 평균적으로 죄를 고백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요즘은 20초를 넘기지 않습니다. 제가 죄를 잘 짓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니고요 가스렌지를 청결하게 유지되는 것 보고 저는 제 영혼도 이렇게 관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한 3년 전부터 하게 된 이후에는 가능하면 한 달에 세 번은 성사를 꾸준히 보려고 마음으로 작정을 한 것입니다.
제가 성사를 이렇게 보다 보니 실제 판공 땐 특별히 제가 제 자신이 그동안 어떤 죄를 지었는가 성찰해야 하는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서 그것 하나는 좋은 것 같습니다. 물론 그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로 퉁 쳐서 할 수도 있지만 그건 다른 사람한테는 모르겠지만 저한테는 제 개인적으로는 하느님께 비겁한 모습을 보이는 것 같아 저는 그게 싫어서라도 가능하면 미루지 않고 그냥 주기적으로 가급적 볼려고 노력합니다. 제가 해보니 이게 습관만 잘 들이게 되면 다른 건 모르겠는데요 영혼은 가급적 자주 청소되는 느낌이라 조금은 상쾌하긴 합니다. 감사합니다. 이건 저만의 생활 스타일이기 때문에 사람마다 다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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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7. 사순 제2주간 월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구원은 지금 당장 용서로부터 /
박윤식 [big-llight] 250316. 19:42 ㅣNo.180795
‘벤허’는 용서와 구원을 다룬 영화다. 이스라엘에 로마의 새 총독이 부임하는 거리에서 벤허의 여동생이 실수로 기왓장을 떨어뜨려 공교롭게도 그게 총독 머리에 떨어진다. 벤허 친구 멧살라는 이게 계획적인 게 아님을 알고도 벤허 가족을 감옥에 가두고, 친구 벤허를 노예로 보내 버린다. 오랜 기간 온갖 시련 뒤에야 자유인이 되어 돌아온 벤허는 멧살라와 목숨을 건 마차 경주를 한다. 경기는 멧살라가 사고를 당하면서 승부가 났고, 그가 죽는 순간 벤허에게 그의 가족이 살아 있음을 알린다. 그리하여 벤허는 사람 모습이라고는 할 수 없는 문둥이 어머니와 여동생을 데리고 마을로 온다. 그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타로 오르시는 중이었다.
벤허는 자신이 노예로 팔려 가는 중 탈진 상태에서 물을 떠 주신 분이 바로 그 예수님임을 안다. 그는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 모습에 치를 떨며,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라는 그분 음성을 듣는다. 이에 벤허는 가슴에 품은 원한의 칼을 떨어뜨리면서, 오랜 친구 멧살라에게 품었던 증오와 복수심이 자신에게서 빠져나감을 느낀다. 벤허의 마음 안에 쌓인 분노의 복수심은 원수까지도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거룩한 사랑 앞에 눈 녹듯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바로 그 순간 나병을 앓고 있던 어머니와 여동생이 낫게 되면서 가족은 ‘기쁨의 포옹’을 한다. 벤허가 목동의 길을 나서면서 영화는 끝난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이가 되어라.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 받지 않는다. 용서하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는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는다. 넘치도록 후하게 받는다.’ 예수님께서는 심판하지 말라신다. 우리는 남 이야기를 자주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비판마저 쉽게 일삼는다. 하지만 그게 정작 잘못되었는지 모를 때도 있다. 물론 군중 심리로 비난을 한다. 또한 상대가 저지른 잘못을 자신도 종종 범하면서, 막상 자신이 비판받을 때는 엄격한 잣대를 요구하기도.
주님 말씀이 그 사랑의 길잡이라는 사실을 이 사순에 우리가 가져야 할 사명이다. 이 당연한 진리가 거짓되게 다가오기에, 우리는 무수히 넘어지고 부서진 뒤에서야 비로소 사랑을 깨닫는다. 부활 때에 새롭게 일어설 수 있도록 하느님 앞에서 우리의 약함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은총의 시기가 되었으면 참 좋겠다. 우리가 하느님을 가장 닮을 수 있는 길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을 가장 아름답게 표출하는 건 용서를 포함해야만 할 게다. 그것도 진정함이 묻어 있으면서. 다른 이를 판단하고 용서하는 일은 참으로 어렵다. 그러기에 섣불리 판단하지 말자. 정확한 판단은 오직 하느님만이 하시기에. 그 일을 그분께 맡겨야만 오판의 누를 벗어날 게다.
친구 멧살라에 대한 오랜 증오가 예수님의 용서 앞에서 물거품으로 녹아 벤허에게는 사랑으로 안겼다. 결국은 용서로 피어났다. 잃어버린 세월과 무참히 짓밟힌 가족에 대한 그 한 많은 억울함을 억누를 길 없었지만, 그분의 용서 앞에서는 차마 몸부림을 치면서도 달랠 수밖에. 그렇게 그의 용서는 자신은 물론 가족도 구했다. 하느님의 자비가 결국은 벤허의 증오를 불살라 버리고 용서를 안겼다. 사실 우리의 잘못된 판단으로 이해 아닌 오해가 곳곳에 널려있다.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판단을 이제는 내려놓자. 그리고 용서하자. 용서를 받으려면 먼저 용서해야만. 그간의 오해를 회개로 용서 청하자. 회개의 용서만이 진정한 사랑을 보일 수 있다. 하느님 사랑을 드러내려면 용서뿐이다. 하느님 구원을 진정으로 받으려거든 용서하자. ‘지금 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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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7. 사순 제2주간 월요일. 한창현 모세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자비로움을 실천하려면 남을 심판하거나 단죄하지 말고 용서하라고 이르십니다.
그리고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들을 심판하시거나 단죄하시지 않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이 여정 안에서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알아차리기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이해하는 데 바오로 사도가 회심하는 과정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회심하기 전까지 십자가 죽음의 신비를 이해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박해하였습니다.
그런 바오로를 하느님께서는 심판하시거나 단죄하시지 않고 용서하셨습니다.
바오로는 죄인인 자신에게 베푸신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체험으로 배반자 이스라엘이 자기 잘못을 깨닫고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셨던 하느님의 자비(예레 3,12-13 참조)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담긴 신비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로마 11,32 참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이해하려면 우리에게 베푸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먼저 체험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남을 판단하거나 단죄하는 것을 의식적으로 멈추고 자신을 돌아보는 데 집중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는 상대에게 잘못이 없다고 인정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만 보려는 우리의 한계를 먼저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시선으로 다른 이들을 바라보고자 노력합시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겸손의 은총을 청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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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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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7. 사순 제2주간 월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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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7. 사순 제2주간 월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루카 6, 37)
우리는
매일매일
심판에
발목이 잡혀
우리 영혼을
잃어버립니다.
심판에 빠져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길조차
잃어버렸습니다.
우리가
서야 할 자리가
어딘지를 묻는
은총과 용서의
사순입니다.
용서는
빛 속을
걷게 하지만
심판은 사람을
끊임없이
어둠으로
중독시킵니다.
심판에
중독된 채
살아가는
우리들
삶입니다.
심판의
돌을 던지면
그 심판의
돌은
또 다른
심판의
돌이 되어서
우리에게
되돌아옵니다.
심판을
끊는 것이
복음입니다.
심판은
우리 모두를
가두지만
복음은
우리 모두를
자유로이
풀어줍니다.
복음을 벗어나는
심판을 멈추고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용서로
걸어가야 할
때입니다.
심판에 빠져있는
우리를
건져올리시는
주님이십니다.
나누어야 할 것은
하느님의 자비이고
멈추어야 할 것은
심판입니다.
되받아야 할
자비의
기쁜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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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7. 사순 제2주간 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신앙생활보다 더 좋은 우울증 치료제는 다시 또 없습니다!
오늘 첫 번째 독서인 다니엘 예언서 말씀은 깊은 절망감과 우울감으로 가득한 요즘 제 심정을 대변하는 듯한 분위기입니다.
주님께서 사랑이요 자비 그 자체이신 분이시면서, 어찌 이리 큰 참담함과 혹독함을 체험하게 하시는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주님이십니다.
그분 마음속을 헤아리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주님, 저희의 임금들과 고관들과 조상들을 비롯하여 저희는 모두 얼굴에 부끄러움만 가득합니다.
저희가 당신께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다니엘 예언서 9장 8절)
지난 우리의 삶을 더 깊이 성찰할 순간인 듯합니다.
누구를 탓하기에 앞서 더 유심히 내 발밑을 내려다봐야 할 때입니다.
더 부끄럽게 되지 않기 위해 더 정신 차리고 깨어있어야 할 때입니다.
부디 너무 우울해하지 말길 바랍니다.
초기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 같아서 본인의 적극적인 의지로 극복이 가능합니다.
규칙적인 운동, 산책이나 등산, 마음 비우기 작업 등이 도움이 됩니다.
스스로 극복하기 힘겨울 때는 의사나 전문가의 진단에 따른 처방과 치료는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명의(名醫)이자 주치의가 한 분 계십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치유자이신 예수님께 다가갈 때 그분께서 우리를 우울증에서 해방시켜 주십니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신앙생활보다 더 좋은 우울증 치료제는 다시 또 없습니다.
우울증의 원인을 찾아 올라가 보니 실망이란 단어가 자리 잡고 있더군요.
그렇다면 실망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나 자신과 이웃에 대한 지나친 기대가 결국 실망을 불러옵니다.
부족하고 나약한 우리 인간이기에 실망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이 세상에서 실망감을 느끼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과 함께라면 언제든지 일어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망했을 때 낙담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우울증으로 진전되도록 방관하지 말고 넘어진 그 자리에서 바로 일어서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과거의 상처와 아픔을 하느님 자비의 강물에 흘려 보내는 일이야말로 우울증 치료에 최선책임을 강조합니다.
“예전의 일들을 기억하지 말고 옛날의 일들을 생각하지 마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하려한다.”
(이사야 43장 18~19절)
한편 다윗 임금은 자신에게 다가온 우울증이 하느님 은총과 자비 안에서 완치되었음을 크게 외칩니다.
“내 영혼아, 어찌하여 녹아내리며 어찌하여 내 안에서 신음하느냐?
하느님께 바라라, 나 그분을 다시 찬송하게 되리라, 나의 구원, 나의 하느님을.”(시편 43장 5절)
우리 그리스도교는 철저하게도 희망의 종교입니다.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 때조차도 주님께 희망을 두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참 그리스도인으로서 취할 태도입니다.
암담하고 울적할수록 주님께 매달려봐야겠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향후 5년간을 대 피정 기간으로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뉴스도 끊기로 했습니다.
대신 더 깊이 복음 속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습니다.
더 깊이 책 속으로 빠져들어가기로 결심했습니다.
더 인간다운 세상, 더 의로운 세상, 더 복음적인 세상 건설을 위해 노력하고 연대할 바가 무엇인가, 고민해보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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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7. 사순 제2주간 월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6,36-38: 남을 용서하여라.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36절). 자비는 훌륭한 덕으로서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며 경건한 사람들에게 최고로 어울리는 덕이다. 이 자비는 하느님의 속성임을 항상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한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37절) 남을 심판하지 말고 자신의 허물을 돌아보라는 말씀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반성하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의무지만, 남의 일에 참견하느라 바쁘다. 남을 심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다른 이의 허물을 찾거나 들추는 대신 자신의 잘못을 성찰한다. 심판하지 말아야 한다. 심판하는 그대로 우리도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마태 7,2 참조).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37절). 우리는 하느님을 세상에 보여 주고 정의와 용서와 은총으로 심판해야 한다. 그러면 정의에 따라 심판받을 때, 은총으로 용서받을 자격을 지니게 된다. 정의에 따르지 않고 보복하려고 심판하지 말라는 뜻이다. 자신을 위해 앙갚음하는 심판은 안 된다. 심판하기보다는 훈계하거나 충고하라는 뜻이다.
“용서하여라.”(37절) “주어라.”(38절) 용서하고 베푸는 것, 이것은 기도를 싣고 하느님께로 날아가는 두 날개라고 한다. 잘못한 사람을 용서해주고, 가난한 이에게 베풀어야 한다고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선을 베풀고, 용서하며 너그럽게 베푸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마찬가지로 자선을 받고 용서받으며 너그러운 대접을 받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한 이들의 곳간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줄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더 많이 주실 것이며, 우리의 죄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모든 것을 충분히 주시는 하느님께서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38절) 하셨다. 용서는 단지 상대방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위한 것이다. 내 안에 미움과 분노가 있으면 바로 나를 해치는 결과를 초래한다.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말씀과 권고를 받아들이고 실천하면서 주님과 함께 살아가며, 좀 더 자비롭게 용서를 베풀며 하느님과 함께 여정을 계속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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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7. 사순 제2주간 월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완전한 용서에 이르는 유일한 방법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많이 들어본, “뿌린 대로 거둔다.” 법칙입니다. ‘부메랑’ 법칙이라 해도 될 것입니다.
법칙은 예외가 없어야 합니다.
심판받지 않으려면 심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잘 됩니까? 잘 안 됩니다.
영화 ‘밀양’에서는 신앙으로 용서를 하려고 해도 잘 안되는 불편한 상황을 잘 그려냈습니다.
회개만으로는 뭔가 부족한 느낌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먼저 어떻게 하면 남을 심판하지
않을 수 있을지를 조금 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께서 그 책임을 물을 때 다른 이들에게 책임을 떠넘깁니다.
이렇게 자신이 아닌 타인을 심판했기 때문에 자신들도 심판받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타인을 심판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자신부터 심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은 이미 자기 자신을 심판하였습니다.
그래서 부끄럽고 두려워 몸을 무화과 잎으로 가린 것입니다.
자기를 심판하지 않는 이들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솔직함입니다.
타인의 판단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자기 부끄러운 것을 쉽게 드러냅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판단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도 아니요, 이웃도 아니요 하느님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자비로운 분임을 믿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믿지 못할 때 저절로 자기가 자기를 심판합니다.
이것으로 충분할까요? 충분하지 않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완전한 용서를 위해 반드시 여기까지 이르러야 했습니다.
바로 나 자신을 심판하는 내 안의 심판자, 자아를 완전히 십자가에 못 박는 일입니다.
자아는 ‘나의 뜻’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이 아니면 절대 완전히 죽지 않고 계속 나를 심판합니다.
영화 ‘반지의 제왕: 반지 원정대’에 나오는 아라곤은 왕국 곤도르의 정통 후계자로 태어났으나, 자신의 조상이었던 이실두르가 사우론에게서 ‘절대반지’를 빼앗고도 끝내 파괴하지 못한 과오 때문에 깊은 죄책감과 두려움을 안고 살았습니다.
이실두르의 그 선택은 훗날 사우론이 다시 힘을 키우는 빌미가 되었고, 후손인 아라곤은 “나도 언젠가 조상처럼 약해져서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을까?” 하는 공포와 자격 상실감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래서 젊은 시절부터 그는 은둔자처럼 숨어 지내며 방랑 생활을 이어갔는데, 이는 스스로 “내가 왕의 자리에 설 자격이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내가 힘을 발휘하면, 혹시 조상 이실두르처럼 반지와 악의 유혹에 휘말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끊임없는 자기 의심이 마음 한편에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두려움과 자기 정죄가 쌓여서, 아라곤은 왕좌를 이어받을 수 있는 용기도 없었고, 왕이 되어야 한다는 소명조차 뿌리 깊이 거부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반지 원정대에 함께하면서 서서히 자신의 두려움과 조상의 죄책감을 이겨 내기
시작합니다.
절대 반지를 파괴하기 위해 길을 떠난 이들과 동행하는 동안, 아라곤은 단지 무력이나 권위가 아닌, 진정한 용기와 헌신으로 동료들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을 느끼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조상과는 달리 “절대 반지의 악한 힘에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없애는 사명을 완수하도록 동료들을 돕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스스로는 반지를 소유하지 않았지만, 반지를 지닌 프로도와 그 곁의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고, 숱한 전투와 유혹 속에서도 ‘반지의 힘을 탐내지 않겠다’는 결심을 지켜 냅니다.
결국 그는 “이실두르가 실패했던 과제를 후손인 내가 마무리하겠다”는 마음으로 모든 두려움을
떨쳐 내고, 인간과 엘프, 호빗과 드워프가 하나 되는 연대를 이끌어 갑니다.
특히 프로도가 반지를 파괴하기까지 시간을 벌어 주기 위해 사우론의 군대를 상대로 과감히 전쟁을 걸고, 자신의 힘을 다해 동료들을 지켜 내는 장면에서, 그는 더 이상 “조상의 잘못된 길을 밟을까 두려워 숨어 있는 존재”가 아니게 됩니다.
그렇게 반지가 결국 파괴되고 사우론의 권세가 무너져 내렸을 때, 아라곤은 마침내 스스로
“나는 조상과 다르며, 나에게 주어진 사명을 끝까지 책임 있게 완수했다”는 내적 확신을 얻게 됩니다.
그 결말로 아라곤은 ‘엘레사르’라는 이름을 받아 곤도르의 왕으로 즉위하고, 왕이 된 이후에도 과거의 경험과 겸손을 잊지 않으면서 백성과 중간계 여러 종족을 아우르는 훌륭한 통치자가 됩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기를 가리려는 노력을 멈췄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마련하신 용서의 가죽옷을 입었어야 합니다. 그래도 부족합니다.
또 과거의 망상이 자기들을 괴롭힐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일’에 매진했어야 합니다.
그 뜻에 자기 뜻을 죽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에 당신의 뜻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셨던 것처럼.
여기까지 오지 않으면 자아는 끊임없이 나를 괴롭혀 다른 이들을 심판하게 만들 것입니다.
탈출기에서 ‘모세’는 사실 죄책감에 시달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민족을 버리고 도망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그 민족에게 되돌아가야 했습니다.
하느님은 그러한 직무를 맡기심으로써 과거의 일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리셨습니다.
결국 나에 대한 죄책감을 없애는 가장 완전한 길은 그분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믿는 것입니다.
죄책감은 ‘자격이 없다’로 귀결됩니다.
그리고 그 죄책감을 타인을 판단하면서 합리화하려고만 합니다.
죄책감이 없었다면 분명 사명을 수행했을 것입니다.
사명을 받아들여 수행함으로써 이전의 나를 판단하던 자아는 죽습니다.
자아를 죽이는 가장 완전한 길은 하느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수행하는 일입니다.
자격이 있다고 하느님께서 인정해 주셨고 내가 그것을 받아들였다면, 나의 발밑에서 계속 자격이 없다고 말하는 뱀의 소리는 그저 쐐야 쐐야 하는 소리에 불과하게 됩니다.
이렇게 뱀이 무력하게 될 때 나는 의로움으로 타인을 심판할 존재가 아닌 용서할 존재로 새로 태어납니다.
이것이 완전한 용서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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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7. 사순 제2주간 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함께 회개하고, 함께 구원 받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 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 6,36-38).”
1) “남을 심판하지 마라.” 라는 말씀은, “하느님 행세를 하지 마라.” 라는 뜻입니다.
‘심판’은 하느님과 예수님의 권한입니다.
인간에게는 남을 심판할 권한은 없고, 남에게 자비를 베풀 의무만 있습니다.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남을 심판하는 일은 심판받을 죄다.”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요한복음 7장을 보면,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남을 함부로 심판하고 단죄하는 말을 한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전 경비병들이 돌아오자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왜 그 사람을 끌고 오지 않았느냐?’ 하고 그들에게 물었다.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고 성전 경비병들이 대답하자, 바리사이들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도 속은 것이 아니냐? 최고의회 의원들이나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그를 믿더냐?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요한 7,45-49)”
여기서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 라는 말은, “성경을 모르는 저 무식한 놈들은 구원받지 못한다.”, 또는 “이 무식한 놈들아, 저주나 받아라.(지옥에나 가라.)” 라는 뜻입니다.
이런 말이 바로 남을 함부로 심판하고 단죄하는 말인데, 하느님의 권한을 침해하는 신성 모독죄이고, 하느님의 사랑을 거스르는 죄이기도 합니다.
2) “남을 심판하지 마라.” 라는 말씀을, 요한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해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
‘하느님의 뜻’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구약성경 에제키엘서에, “나는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는다.
오히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을 기뻐한다(에제 33,11).” 라는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이, 함부로 남을 심판하고 단죄하고 저주하는 말을 하는 것은 ‘하느님 뜻’을 거스르는 죄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과 예수님의 구원 사업에 동참하고 협력하는 사람인데, 사탄은 그 구원 사업을 어떻게든 방해하려고 애를 쓰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남을 심판하고 단죄하고 저주하는 말을 하는 것은, 신앙인의 본분을 잊어버린 채 사탄이 하는 일을 도와주는 것과 같고, 사실상 사탄의 뒤를 따르는 것과 같습니다.
3) “‘남을 심판하지 마라.’ 라는 말씀과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어라.’ 라는 말씀은 모순되지 않은가?”
루카복음 17장에,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루카 17,3ㄴ).” 라는 말씀이 있고, 마태오복음 18장에는 더 길고 자세한 말씀이 있습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마태 18,15-17).”
형제가 죄가 되는 일을 하고 있을 때, 그 일이 죄라는 것을 판단하는 일은 심판일까, 아닐까?
또 그 형제에게 가서 ‘너, 그런 짓을 하지 마라.’ 라고 꾸짖는 것은 단죄일까, 아닐까?
‘죄 짓는 형제를 꾸짖는 일’과 ‘남을 심판하고 단죄하는 일’이 겉으로는 비슷하게 보일 수도 있는데, 같은 일이 아닙니다.
죄짓는 형제를 꾸짖고 타이르라는 예수님 말씀은,
그를 회개시켜서 구원의 길로 인도하라는 가르침입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라는 말씀은, “그 사람의 회개와 구원 가능성을 믿지 않고, 또는 인정하지 않고, 구원받지 못한다고 함부로 판단하지 마라.” 라는 뜻입니다.
<지옥에 갈 줄 알았던 ‘그 사람’은 천국에 가 있고,
당연히 천국으로 갈 것이라고 생각한 ‘나는’ 연옥이나 지옥에 가 있는 일이 많이 생길 것입니다.>
4) “남을 심판하지 마라.” 라는 말씀은, 인간 세상의 사법제도를 부정하는 말씀도 아니고, 사도들에게 주신 ‘매고 푸는 권한’을 부정하는 말씀도 아닙니다.
민주주의 국가의 사법제도는 원래 ‘정의와 선의 실현’입니다.
그것은 하느님 뜻에 합당한 일입니다.
또 사도들에게 주신 권한은 심판하는 권한이 아니라, 사람들을 회개시켜서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권한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2-23).”
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은, 용서하거나 용서하지 않는 것을 마음대로 판단하고 결정해도 좋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구원’을 바라시는 ‘하느님 뜻 실현’을 위해서, 죄인들을 회개시키고 구원의 길로 인도하라는 지시입니다.
여기서 ‘용서’는, 회개하도록 인도하는 일까지
포함되어 있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는, “용서받지 못한 채로 남아 있게 하지 마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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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7. 사순 제2주간 월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6,36-38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지난 주 평일의 복음은 ‘대당 명제’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최소한’의 규정을 그마저도 겨우, 마지못해 실천하는 모습을, ‘남들도 다 그러는데뭐’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따라하지 말고, 하느님께 사랑받는 자녀이자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특별한 존재로서 계명의 근본정신을 온전히 실현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라는 것이었지요. 그리고 오늘 복음은 그 가르침을 마무리하시면서 우리에게 하시는 엄중한 권고의 말씀입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이 말씀은 그저 자비를 베풀라고 명령하시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왜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그리고 하느님께 받아 누린 그 자비를 어떻게 베풀어야 하는지 그 방법을 깨우쳐 주시려는 겁니다. 우리가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 이유는 자비로운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먼저’ 조건 없이 한 없는 자비를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나도 이웃 형제 자매에게 ‘거저’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자비를 어떻게 베풀어야 할까요? 그 구체적 방법에 대해 예수님은 네 가지 동사로 설명하십니다. “심판하지 마라”, “단죄하지 마라”, “용서하여라”, “주어라”. 앞의 두 가지는 자비의 소극적인 실천으로써 적극적인 측면으로 나아가기 위한 준비과정입니다. 이웃에게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웃을 비판하거나 단죄하려는 마음부터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된다”고 말씀하셨지요. 팔짱을 낀 채 째려보아서는 그 사람의 진면목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습니다. 그가 잘 되기를 바라는 긍정적 지향과 호의를 가지고 보아야 그 사람을 있는 모습 그대로 내 안에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그 사람의 행동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건 ‘법’이 할 일입니다. 그 사람의 속마음과 의도를 판단하고 단죄하는 건 ‘하느님’이 하실 일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남을 심판하고 단죄하는 게 아니라, 그를 본보기 삼아 나 자신을 깊이 성찰하여 잘못을 식별하고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는 일입니다.
뒤의 두 가지는 자비의 적극적인 실천으로써 하느님의 선하심을 닮아가는 과정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먼저 한 없는 자비를 베풀어 주심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도 그분께서 사랑하시는 내 이웃 형제 자매들에게 기꺼이 자비를 베푸는 것이지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내 안에 ‘담고’ 전달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자기도 모르는 새에 하느님을 ‘닮아’가는 겁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런 우리에게 은총과 사랑을 충만하게 내려 주시지요. 여기서 주의할 점은 우리가 ‘되질하는 그 되로 돌려받는다’는 점입니다. 이는 우리가 먼저 자비를 베풀어야만, 베푼만큼만 은총과 복을 주시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조건부로 사랑하시는 까다로운 분도 아니고, 받은 만큼만 돌려주시는 속 좁은 분도 아니지요. 우리가 이웃에게 기꺼이 베풀고 나누어서 생긴 ‘빈 자리’가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과 사랑을 담는 ‘그릇’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눈치보거나 아까워하지 말고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베풀고 나누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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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7. 사순 제2주간 월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용서와 자비의 주님”
바빌론으로 유배를 떠났던 특히 종교 지도자들은 회한의 마음을 갖고 살아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에는 많은 예언자들이 이스라엘의 죄에 대해서 고발하고 회개하도록
외쳤던 것입니다.
더욱 불행한 것은 북쪽 이스라엘 제국이 멸망했는데, 남쪽 유다 제국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결국 예루살렘 성과 성전이 폐허되과 많은 이들이 바빌론으로 강제 유배를
떠난 것입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과거의 죄에 대해서 깊이 아파하며 하느님께 자비를 구하는 것입니다.
다니엘 예언자가 그 중에 하나입니다. 과거 동족이 저지른 죄를 위해 하느님께 용서의
기도를 청하는 것입니다.
“저희는 죄를 짓고 불의를 저질렀으며 악을 행하고 당신께 거역하였습니다.
당신의 계명과 법규에서 벗어났습니다. 저희는 저희의 임금들과 고관들과 조상들과
나라의 모든 백성들에게 당신의 이름으로 말하는 당신의 종 예언자들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다니 9,5-6)
의인의 기도는 그 어느 것 보다 주님께서 들어주시고 공동체에 용서와 자비의 은혜를
베푸시겠다고 주님께서는 말씀 하십니다.
루카는 ‘하느님의 자비를 닮은 사람이 되라.’는 뜻으로 자비를 베풀고 용서하는 사람이
되라고 당부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 6,37-38)
주님께서는 남을 심판하거나 단죄하지 말라고 아울러 당부하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 괜히 마음이 찔립니다. 너그러운 마음보다는 오히려 옹졸한 마음에
사로 잡히기 쉽고 넉넉함 보다는 인색하고 남을 쉽게 판단하고 좋게보다는
나쁘게 말하는 타성에 젖어 들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순절을 지내면서 우리는 주님의 소중한 이 당부 말씀을 가슴에 새겨야 하겠습니다.
부족하고 악습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었다하더라고 이제라도 회개하고 이웃에 너그럽고
넉넉한 마음으로 살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씨와 같아서 준비된 좋은 땅에는 언제라도 뿌리를 내리고 성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순절의 복된 하루를 맞으며 기쁘게 생활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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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7. 사순 제2주간 월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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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7. 사순 제2주간 월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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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7. 사순 제2주간 월요일.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삶
<2025.3.17> 아침을 여는 묵상 (눅 12:13~34절)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삶❞
❚ 믿음 안에서 모든 염려를 내려놓고, 하늘로부터 임하는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는 삶이어야 합니다.
✔ 우리는 어떠한 삶이어야 합니까?
➲ 탐심을 이기는 삶이어야 합니다(13~21절).
무리 중에서 한 사람이 예수님께 자신의 형과 유산을 나눠 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재판관도 물건도 나누는 자도 아니라며 거절을 하십니다(13~14절). 그리고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15절). 부자로 살아가는 것이 잘못이 아니라 물질을 소유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람의 생명이 물질의 풍성함에 있다고 여기고 살아가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한 부자가 그의 밭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어 몇 년 동안 쓸 많은 것들을 큰 곳간에 쌓아 두었으니 편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기자(17~19절)합니다. 이때 그를 향하여 하나님이 오늘 부르시면 그 소유가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말씀하십니다. 결국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21절)두면 하나님 앞에서 결코 부요한 자가 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인생의 참 생명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조금 덜 소유하고 있다 할지라도, 조금 덜 건강하다고 할지라도, 작고 미약한 존재라 할지라도 하나님 안에 거함이 참 생명과 풍요로움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좀 더 가지려는 탐심과 욕망에 빠지지 않도록 늘 경계해야 합니다. 사람은 내일 일이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쌓아 놓은 재물과 권력등에 자신의 생명을 의지한 채 살아갑니다. 참된 쉼과 안식과 즐거움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다면서 저장할 창고만 늘려 가는데 심혈을 기울지 않아야 하며, 무엇보다 물질 앞에서 우리 자신이 비겁해지거나 추해지지 않아야 합니다. 돈이면 다 되는 세상이라고 말하고 있는 이 때에, 우리 마음엔 돈과 재물과 권력과 탐욕과 탐심이 아닌 주님의 영으로 가득 채우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염려를 버리는 삶이어야 합니다(22~28절).
염려하고 근심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형편을 아시고 공급하여 주신다는 확신과 약속에 대한 신뢰입니다. 내 목숨이 그리고 내 몸이 음식보다 그리고 의복보다 중요한 것처럼 주님을 향한 믿음은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합니다(22~23절). 까마귀는 부정한 조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까마귀를 돌보십니다. 씨를 뿌리지도, 수확을 하지도, 골방이나 창고가 없어도, 사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까마귀보다 더 귀하지 않은가....(24절).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염려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이 없다(25절)고 말씀하십니다. 백합화 역시 스스로 옷감을 짜는 것도 아닌데, 솔로몬의 영광보다 아름다운 옷을 하나님이 입히셨을 뿐만 아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25~28절)...라고 책망 하십니다.
참으로 많은 염려와 근심을 안고 살아갑니다. 염려는 우리 자신을 더 깊은 절망의 늪으로만 이끌어 갑니다. 내가 아무리 염려한다고 해도 내 키를 한 자라도 키울 수 없고, 단 1분 1초도 내 생명을 연장할 수도 없는 존재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나의 능력으로는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통제력 밖의 문제입니다. 내가 염려한다고 해서 변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쓸데없이 염려하느라 시간과 에너지만 낭비하지 말고, 오히려 나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기도와 감사함으로 맡기는 것이 진짜 믿음 있는 삶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금 내가 염려하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은 결국 나의 능력 밖에 있는 것임을 인정하고, 주님만을 온전히 신뢰하여 먹고, 입는 문제 때문에 염려하지 않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내 안에 있는 모든 염려를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소유를 나누는 삶이어야 합니다(29~34절).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책망하신 예수님은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찾지 말고, 근심도 하지 말라...’(29절)고 말씀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바라고, 세상 사람들이 간절히 필요로 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은 이미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자들은 그의 나라를 구하는 삶이어야 합니다(30~31절). 두려워하지 않고 그 나라를 구하면 하나님도 기쁘게 주실 것입니다(32절). 그리고 이어서 예수님은 강력한 도전을 말씀하십니다.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라...’(33절). 진정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삶은 구별하거나 인색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실 때마다 형편이 되는 대로 계속해서 구제를 베푸는 삶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34절)..
지금 우리에게 태산처럼 높아만 보이는 문제가 하나님의 눈에는 조그마한 언덕에 불과한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처럼 가장 단순한 문제에 매달려 근심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와 그의 뜻을 구하며, 무엇보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애쓰고, 수고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단순한 세상 염려와 근심 때문에 더 크고 높은 소망을 잃어버리지 않아야 합니다. 차라리 육신의 고통이 뒤 따른다 할지라도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살아가게 될 때에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게 됩니다. 또한 우리의 삶을 더욱 가치 있는 삶으로 만들어 가기 위해 나보다 더 힘들어 하는 이들을 돌보고, 격려함으로 보물을 하늘에 쌓아가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부유하심에도 부유한 삶을 내려놓으시고, 가난한 자의 삶을 몸소 보이시며 실천하셨던 예수님의 삶을 따르는 제자의 삶이길 소원합니다. 하늘의 보물을 추구하는 삶, 세상의 보물을 추구하는 삶. 이 두 가지 마음, 두 가지 보물은 서로 양립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선순위를 정해야 합니다. 재물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고 주님을 따르라는 명령에 많은 재물 때문에 근심하고 돌아간 부자 청년과 같지 되지 말고, 자기 재산의 절반을 나누어 주고, 그가 빼앗은 것은 네 배로 갚기로 약속함으로 주님을 따른 삭개오처럼 하늘에 보물을 쌓아 두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들이 비록 작고 빈약할지라도 이것들을 나눔으로 나의 이웃들이 하나님 나라의 풍성함과 기쁨을 경험할 수 있도록 베푸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우리 안에 있는 탐심을 버리고 하나님 안에서 참 생명을 소유한 자답게 하나님으로 부요한 삶을 살아갈 뿐 아니라 모든 필요를 아시는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므로 모든 염려를 내려놓고,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눅 12:13~34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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