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튼 외 1편
이희은
밤새 죽었다가 꿈틀꿈틀, 아침을 여는 자벌레
주름진 사제복 벗듯 빛에게 자리를 내준다
네모난 풍경이 나타나고 자벌레의 키는 반쯤 줄었다
나뭇잎 냄새 속에서도 오와 열을 맞춘 네모, 네모, 네모들, 저마다 아침 닮은 자벌레 키우고 있을까 제 몸 끝까지 줄였다가 먼 길 떠날 수 있을까
사각사각 햇빛 갉아 먹으며
옆구리에 날개 돋는 듯 한껏 몸을 흔들어 보지만
풍경은 사라지고 자벌레는 서둘러 어둠을 풀어 놓는다
모든 신호 꺼버리고 벽으로 위장한다
첩첩 불빛
이희은
그림자 속으로 잠긴 밤도 아니고
눈부신 한낮도 아니죠
까만 공중에 모빌처럼 매달린 불빛에 갇혀
몸무게 잃고 비틀거리는
고장 난 고성능 로봇
멈칫거리는 점멸등 바라보다
고가도로를 달려 나가
어느 이름 없는 해변에 발 담그는 꿈 꾸어요
별빛은 멀리 있어 아름답고 어둠은 만질 수 없어 깊은데
층층 쌓인 불빛
현기증 나는 적막
꿈도 어디 한 군데쯤 고장 나요
----박용숙 외 {멸치,고래를 꿈꾸다}에서
▶약력
2014년 『애지』 등단
2018년 대전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수혜
시집 『밤의 수족관』
제7회 정읍사 문학상 (본명 이은희)
2023년 디카시집 『모자이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