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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방사우(文房四友)
서재에 꼭 있어야 할 네 벗이라는 뜻으로, 종이, 붓, 벼루, 먹을 말한다.
文 : 글월 문(文/0)
房 : 방 방(戶/4)
四 : 넉 사(口/2)
友 : 벗 우(又/2)
(유의어)
사보(四寶)
사우(四友)
문방사물(文房四物)
문방사보(文房四寶)
문방사사(文房四士)
문방사후(文房四侯)
지필연묵(紙筆硯墨)
문방(文房)은 학용품과 사무용품 등을 파는 문방구도 되지만 서적을 갖추고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서재를 가리키기도 한다.
우리 선조들은 기품 있는 풍류를 즐겨 시서화(詩書畵)를 중요시 했기에 문방에는 항상 글과 그림을 그릴 종이 붓 먹 벼루 등 시서화(四友)를 갖추고 있었다.
이것을 한꺼번에 칭해 지필묵연(紙筆墨硯)이라 하기도 하고 문방사보(文房四寶)나 문방사후(文房四侯)로 높여 부르기도 한다.
사후는 이들을 의인화시켜 벼슬이름을 붙인 것인데 붓은 관성후(管城侯), 벼루는 묵후(墨侯), 종이는 호치후(好峙侯), 먹은 송자후(松滋侯)로 불렀다고 한다.
먼저 종이는 기록할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인 자료다. 문자가 발명되고도 상대에 전달하려면 필수적인 종이가 발명되기 전에는 돌이나 나무, 대나무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종이의 기원은 서양에서는 이집트 나일강 주변 지중해 연안에서 자생하는 파피루스(papyrus) 속을 말린 것을 친다. 동양에서는 중국 후한(後漢)시대의 환관 채륜이 105년 만든 종이를 채후지(蔡侯紙)로 부르며 오늘날 한지의 선행형태이자 완성형으로 보고 있다.
문자가 보급되고 바탕이 되는 종이가 있다면 그곳에 쓸 필기구가 필요하다. 붓을 말하는 필(筆)의 글자를 보면 원래의 붓을 뜻했던 율(聿)의 위에 대 죽(竹)이 있다. 대나무를 재료로 진(秦)나라 때 처음 몽염(蒙恬)이 만들었다고 한다.
죽간(竹簡)에다 금으로 만든 칼로 글을 새기는 것이 직업인 도필리(刀筆吏)로 한(漢)의 유방(劉邦)을 도왔던 소하(蕭何), 조참(曹參) 등이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던 연유이기도 하다.
그 뒤 짐승의 털을 추려서 모아 대나무 관에 고정시킨 붓으로 발전했다. 붓끝의 가는 털을 호(毫)라고 하는데 호리(毫釐)라 하면 매우 적은 분량을 가리킨다.
먹은 종이와 같이 후한시대에 오늘날과 같은 것이 만들어 졌다고 한다. 오대십국(五代十國)의 후주(後周) 때 먹의 사용을 권장하여 이정규(李廷珪) 같은 유명한 묵공(墨工)을 배출했다.
고구려의 담징(曇徵)이 일본에 불법을 강론하고 610년 종이와 함께 먹도 전래하여 매우 귀중한 문방으로 여기고 있다.
대개 돌로 만드는 벼루는 와연(瓦硯), 도연(陶硯) 외에 보석까지 다양하고 형태도 직사각형에서 타원형까지 독특한 의장도 많다.
먹을 가는 부분이 연당(硯堂), 먹이 모이는 오목한 곳이 연지(硯池)다. 좋은 조건으로는 첫째 먹이 잘 갈리고 고유의 묵색이 잘 나타나는 것을 친다.
오늘날 서예 외에는 사우를 사용하는 일은 드물다. 먹과 벼루는 물론 종이와 펜도 컴퓨터로 문서를 작성하는 시대에 옛날 물품이 되고 있다. 지필묵연의 기품 있는 문예가 한꺼번에 일상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닌지 염려스럽다.
문방사우(文房四友)
문방(文房)이란 말은, 서재(書齋)와 거의 같은 뜻으로 쓰이지만, 특히 글씨나 그림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방을 문방이라 하고, 학자나 선비들의 방을 서재라고 한다.
주로 그 속에서 책을 읽고 글을 짓고 글씨를 쓰고, 그림을 감상하고 마음에 맞는 친구들과 학문이나 예술을 토론하고, 제자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글하는 사람들이 평생 늘 가까이 하는 네 가지 물건이 있으니, 곧 붓(筆), 먹(墨), 종이(紙), 벼루(硯) 등 네 가지다. 문방사보(文房四寶), 문방사후(文房四侯), 문방사사(文房四士), 문방사물(文房四物)이라고도 한다. 간혹 문방사우를 줄여서 문방(文房)이라고도 한다.
오늘날 학생들이 사용하는 학용품을 문방구(文房具)라 하는데, 그 근원은 문방사우에서 나왔다. 문방사우(文房四友), 문방사사(文房四士)라고 한 것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고, 인격체로 대접했다는 뜻이다. 문방사후(文房四侯)라고 한 것은 그 공로를 인정하여 제후로 봉했다는 뜻이다.
붓은 기원전 2세기 경에 진(秦)나라의 장수 몽념(蒙恬)이 만들었다고 하나, 이미 기원전 3세기의 붓 실물이 출토되었고, 실제로는 3500년 전 은나라 때 갑골문(甲骨文)에서 글씨를 쓴 흔적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먹 역시 3500년 정도의 역사를 가졌는데 처음에는 검은 돌을 갈아 쓰다가, 나중에 그을음과 아교 등을 섞어 만들었다고 한다.
종이는 후한(後漢) 때 채륜(蔡倫)이라는 사람이 만들었다. 그 이전에는 돌이나 대나무, 나무, 피륙 등에 글씨를 썼다. 벼루는 진(秦)나라 때의 돌벼루가 출토된 것이 있다.
문인들이 문방사우를 사랑한 기원은 오래됐지만 중국 남당(南唐)의 임금인 이욱(李煜)이 직접 만들게 한 이정규(李廷珪)의 먹, 남당의 관아에서 만든 용미연(龍尾硯)이란 벼루, 징심당지(澄心堂紙), 오백현(吳佰玄)이 만든 붓을 사보(四寶)라 부른 것이 문방사우의 효시였다.
송(宋)나라에 이르러 이런 문방구 애완의 풍조가 더욱 고조되고, 문방구의 종류도 늘어나 연적(硯滴), 필통 등 70여 종에 이른다.
한국에서는 1세기경 가야시대의 붓이 창원(昌原) 다호리(茶戶里)에서 출토되었고, 평양 부근에서 낙랑시대의 벼루와 먹이 출토되었다.
또 고구려의 승려이며 화가인 담징(曇徵)이 610년(영양왕 21년) 일본에 건너가 채색(彩色), 종이, 먹의 제조 방법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문인들이 늘 사용하는 생활의 필수품이었으면서도 문방사우에 대한 연구나 기록은 드물다. 우리나라는 더욱더 심하다. 조선왕조가 망한 이후로 현대적 필기구가 등장하여 문방사우는 생활필수품에서 밀려났다.
최근에 와서는 컴퓨터가 등장한 이후로 문방사우를 접할 기회가 없을 뿐만 아니라, 현대적 문방사보라 할 수 있는 펜, 볼펜, 만년필, 잉크마저도 쓸모가 없어졌다.
더구나 스마트폰, 아이패드 등이 등장한 지금은 각 사무실이나 학교에서는 필기구 갖다버리기가 일이라 한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의 얼이 서려 있고, 전통이 담긴 문방사우 한 벌 갖추어 놓고, 마음의 여유를 갖고 글씨나 그림을 한번 해 보는 것도 복잡한 현대생활에서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된다.
중국에서는 지금 문방사우를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등록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문방사우(文房四友)
호치후(好畤侯), 관성후(管城侯; 붓), 송자후(松滋侯; 먹), 즉묵후(卽墨侯; 벼루)와 같이 벼슬 이름을 붙여 문방4후(文房四侯)라고도 하며, 문방4보(文房四寶)라고도 한다.
가장 유명한 4보로는 각 명산지의 이름을 딴 안휘 경현의 선지(宣紙), 흡현의 휘묵(徽墨), 절강 오흥의 호필(湖筆), 광동 고요현의 단연(端硯)을 든다.
북송 소이간(蘇易簡)의 문방사보는 지필묵연의 여러 종류와 원류, 고사, 제조법, 문학작품 등에 대해서 지보, 필보, 묵보, 연보로 나누어 기술하고 있다.
후한 105년 채륜에 의해 제지술이 발명된 이래 중국의 종이는 원료, 용도, 생산지에 따라 크기, 지질, 색깔, 이름 등을 달리해 매우 다양하게 만들어졌다.
문방에서는 선지, 화선지, 옥판선지(玉版宣紙) 외에도 화려한 색깔로 염색하고 판화로 여러 가지 문양을 찍은 시전(詩箋)이 애용되었다.
한국에 종이가 전래된 것은 왕인 박사가 285년 일본에 건너가 논어와 천자문을 전하고, 353년 왕희지가 잠견지(蠶繭紙; 高麗紙)에 난정서를 썼다는 기록을 통해 200년경으로 추측된다.
그후 고구려의 담징이 610년 제지술과 조묵법(造墨法)을 일본에 전한 기록과 751년 석가탑 탑신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당시의 우수한 제지술을 증명해 준다.
조선시대에는 수요가 급증해 창의문(彰義門) 밖에 조지소(造紙所)를 설치했고, 충청도의 마골지(麻骨紙), 전라도의 고정지(藁精紙), 경상도의 모절지 같은 특수지의 진상 의무가 민간과 사찰에 부과되기도 했다.
한국의 종이는 지질이 좋고 질기기는 하나 서화에는 적당하지 않아 주로 중국산 종이가 사용되었다.
붓의 사용은 중국 은나라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이나 기록상에 나타난 최초의 붓은 진(秦)의 몽염(蒙恬)이 나무 붓대에 사슴털과 양털로 붓촉을 만든 창호(蒼毫)이다.
한국에서도 경상남도 의창군(지금의 창원시) 다호리의 철기시대 목곽분에서 5자루의 붓이 발굴된 바 있다.
조선시대에는 공조에서 관장해 붓을 생산했으나 중국만큼 발달하지는 못해 상류층에서는 거의 중국에서 수입된 붓을 사용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족제비털로 만든 황모필(黃毛筆)이 가장 유명하다.
먹은 위진대(魏晋代)에 옻과 소나무 그을음으로 만든 둥근 형태의 묵환(墨丸)에서 비롯되었다.
그뒤 조묵법이 발달해 기름의 그을음으로 만든 유연묵(油烟墨), 소나무 그을음과 사슴의 아교로 만든 송연묵(松烟墨), 유연에 사향을 섞어 금박을 입힌 용향묵(龍香墨), 먹똥과 응어리가 안 생긴다는 청묵(淸墨) 등을 만들어 냈다.
우리나라에서는 유연묵과 송연묵이 제조, 사용되었으며 평안도 양덕과 황해도 해주의 먹이 유명했는데 서울의 먹골(지금의 묵정동)에서도 생산되었다. 또한 해주 먹은 중국과 일본에까지 수출되었다고 한다.
벼루에 대한 기록은 중국의 상고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나 진대(晋代)에 묵환과 함께 사용된 요심연(凹心硯)이 본격적인 벼루라 할 수 있다.
벼루는 벼루돌[硯石]에 의해 그 질이 좌우되는데 중국에서는 단계연(端溪硯)이 가장 좋으며, 한국에서는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산의 남포석과 자강도 위원군의 청석이 유명하다.
석연(石硯) 이외에 가야와 백제의 도연(陶硯)이 있으며 통일 신라시대의 것으로는 귀면각(鬼面脚)에 인화무늬[印花紋]가 장식된 것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형태, 조각장식, 문양 등이 다양해지고 문인취향의 시구(詩句)가 곁들여지기도 했다.
이렇게 중국에서 전해진 지필묵연은 삼국시대부터 발달하기 시작해 조선시대에 이르면 송 이래의 문방취미의 유행과 함께 널리 보급되었고 우리의 생활양식과 미감이 반영되어 발전했다.
문방사우(文房四友)
문방(文房)은 문인(文人)의 서재를 가리킨다.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장소다. 여성의 거처와는 구분되는 남성 전용의 사색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나름대로 품격이 있는 문방을 갖는 건 아마도 모든 독서인의 로망일 것이다. 지금은 컴퓨터나 노트북이 이 문방의 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과거엔 바로 이곳에 없어서는 안 될 네 친구(四友)가 있었다.
붓(筆), 종이(紙), 먹(墨), 벼루(硯)다. 이름하여 문방사우(文房四友). 보배처럼 진귀한 친구들인 까닭에 문방사보(文房四寶)라고도 하고 귀한 까닭에 벼슬 후(侯)를 하사해 문방사후(文房四侯)로도 불렸다.
붓을 뜻하는 필(筆)은 짐승의 털을 대나무 막대에 넣어서 만든 붓을 한 손으로 들고 있는 형상을 본뜬 글자다.
중국 안후이성 쉬안저우(宣州)의 징(涇)현에서 나는 붓이 유명해 '부드럽지도 않고 딱딱하지도 않은 게 사람의 손에 딱 맞고 100개의 붓 중에 어느 하나 질이 떨어지는 게 없다(軟硬適人手 百管不差一)', '천금을 주고 사려 해도 시장에서 구할 수 없을 정도(千金求買市中無)'라는 찬사를 들었다고 한다.
종이 지(紙)는 실(絲)의 뜻과 나무뿌리 씨(氏)의 음과 뜻을 결합한 글자다. 검다(黑)와 흙(土)을 합친 글자인 묵(墨)은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릴 때 쓰는 검은색 안료다. 그리고 돌(石)의 뜻과 보일 견(見)의 음과 뜻을 결합한 글자인 벼루 연(硯)은 돌로 된 먹을 가는 도구다.
이 네 친구가 힘을 모아 연출해 내는 글씨 예술이 바로 서예(書藝)다. 중국에선 실용적 측면을 강조해 서법(書法), 일본에선 정신 수련을 중시해 서도(書道)라 부른다.
문방사우의 합작품인 서예는 한.중.일 3국이 공유할 수 있는 문화다. 꽉 막힌 세 나라 관계를 풀기 위한 방안 중 하나로 3국을 대표하는 서예 작품전을 우리나라에서 개최하되 여기에 3국 정상이 참석하는 기회를 만들면 어떨까 싶다.
▶️ 文(글월 문)은 ❶상형문자로 攵(문)의 본자(本字)이다. 사람 몸에 ×모양이나 心(심)자 꼴의 문신(文身)을 한 모양이다. 살갗에 바늘로 찔러 먹물이나 물감 등으로 글씨나 그림이나 무늬를 들이는 것을 문신이라 하고, 형벌로서 하는 수도 있지만 축하(祝賀)하는 표로도 하였다. 나중에 '무늬', '글자', '학문', '문화' 따위의 뜻에 쓰였다. ❷상형문자로 文자는 '글'이나 '문장'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文자는 양팔을 크게 벌린 사람을 그린 것이다. 그런데 文자의 갑골문을 보면 팔을 벌리고 있는 사람의 가슴에 어떠한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몸에 새긴 '문신'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文자의 본래 의미는 '몸에 새기다'였다. 그러나 文자는 시간이 지나면서 '문서'나 '서적'과 같이 글을 새겨 넣은 것과 관련된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文자가 이렇게 글자나 서적과 관계된 뜻으로 쓰이게 되면서 지금은 여기에 糸(실 사)자를 더한 紋(무늬 문)자가 '무늬'라는 뜻을 대신하게 되었다. 文자는 부수로 지정되어 있기는 하지만 상용한자에서는 관련된 글자가 없다. 그래서 文(문)은 (1)문장(文章) (2)무(武)에 대하여 학문, 학예, 문학, 예술 등을 이르는 말 (3)어떤 명사 아래에 쓰이어 문서, 문장(글)이라는 뜻을 나타내는 말 (4)신발의 치수의 단위 (5)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글월, 문장(文章) ②어구(語句; 말의 마디나 구절), 글 ③글자 ④문서(文書) ⑤서적(書籍), 책 ⑥문체(文體)의 한 가지 ⑦채색(彩色), 빛깔 ⑧무늬 ⑨학문(學問)이나 예술(藝術) ⑩법도(法道), 예의(禮義) ⑪조리(條理) ⑫현상(現狀) ⑬산문(散文) ⑭결, 나뭇결 ⑮얼룩, 반점(半點) ⑯돈의 한 가지, 그 돈의 개수를 나타내는 말 ⑰신발의 치수의 단위 ⑱아름다운 외관(外觀) ⑲주문왕의 약칭(略稱) ⑳빛나다, 화려하다 ㉑아름답다, 선미(鮮美)하다 ㉒몸에 새기다 ㉓꾸미다 ㉔입묵(入墨)하다, 자자(刺字)하다 ㉕어지러워지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책 책(冊), 글 서(書), 글 장(章), 문서 적(籍),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호반 무(武), 말씀 언(言)이다. 용례로는 생각이나 느낌이나 사상 등을 글로 표현한 것을 문장(文章), 글자나 숫자 따위로 일정한 뜻을 나타낸 것을 문서(文書), 공적인 성격을 띤 문서나 서류를 문건(文件), 좋은 글을 가려서 뽑음을 문선(文選), 옛날의 제도나 문물을 아는 데에 증거로 되는 기록이나 서적을 문헌(文獻), 글의 성분들이 서로 맺고 있는 관계를 문맥(文脈), 글의 구절을 문구(文句), 글을 짜고 꾸미는 법칙을 문법(文法), 글을 볼 줄도 쓸 줄도 모름을 문맹(文盲), 살갗을 바늘로 찔러 먹물이나 다른 물색을 넣음 또는 그렇게 만든 몸을 문신(文身), 한 사람의 시문을 모아서 엮은 책을 문집(文集), 서재에 꼭 있어야 할 네 벗 즉 종이와 붓과 벼루와 먹을 일컫는 말을 문방사우(文房四友), 전문식과 무략을 다 갖추고 있음을 이르는 말을 문무겸전(文武兼全), 문화의 모든 산물이 서로 오고 감을 일컫는 말을 문물교류(文物交流), 남의 글이나 저술을 베껴 마치 제가 지은 것처럼 써먹는 사람을 일컫는 말을 문필도적(文筆盜賊), 허물도 꾸미고 잘못도 꾸민다는 뜻으로 잘못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뉘우침도 없이 숨길 뿐 아니라 도리어 외면하고 도리어 잘난 체함을 일컫는 말을 문과식비(文過飾非), 까막눈인 사람들을 가르쳐 글 모르는 이가 없도록 하는 일을 일컫는 말을 문맹퇴치(文盲退治), 문장이 썩 잘 되어서 한 점도 가필할 필요가 없을 만큼 아름다움을 이르는 말을 문불가점(文不加點), 문도 번거롭고 예도 번거롭다는 뜻으로 규칙이나 예절이나 절차 따위가 번거롭고 까다로움을 일컫는 말을 번문욕례(繁文縟禮), 가난한 사람은 농사 짓느라고 여가가 없어 다만 삼동에 학문을 닦는다는 뜻으로 자기를 겸손히 이르는 말을 삼동문사(三冬文史), 유교를 어지럽히는 도적이라는 뜻으로 교리에 어긋나는 언동으로 유교를 어지럽히는 사람을 이르는 말을 사문난적(斯文亂賊), 어떤 일을 시작하기는 쉬우나 이룬 것을 지키기는 어렵다는 뜻을 이르는 말을 창업수문(創業守文), 용과 같이 위엄 있는 모양을 하고 있으나 실은 물고기라는 뜻으로 옳은 듯하나 실제는 그름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어질용문(魚質龍文) 등에 쓰인다.
▶️ 房(방 방)은 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지게 호(戶; 지게문)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에 곁의 뜻을 가진 方(방)으로 이루어졌다. 당집 옆의 작은 방을 말한다. 그래서 房(방)은 (1)궁(宮) (2)조선시대 때 시전(市廛)보다 작고 가가(假家)보다 큰 가게 (3)사람이 거처하거나 일하기 위하여 집안에 만들어 놓은 간. 방사(房舍) (4)성(姓)의 하나 (5)방성(房星) 등의 뜻으로 ①방(房), 곁방 ②규방(閨房), 침실(寢室) ③거실(居室) ④관아(官衙) ⑤사당(祠堂) ⑥집, 가옥(家屋) ⑦전동(箭筒; 화살을 담아 두는 통) ⑧아내, 처첩(妻妾) ⑨방성(房星; 28수의 하나) ⑩별의 이름 ⑪도마(제사의 희생을 올려놓는 제기) ⑫둑, 제방(堤防) ⑬송이, 꽃송이 ⑭향시(鄕試; 지방에서 실시하던 과거의 초시 初試)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로 안방 규(閨)가 있다. 용례로는 방을 드나드는 문을 방문(房門), 집안에 사람이 거처하거나 일을 하기 위해 벽 따위로 막아 만든 간을 방사(房舍), 방을 빌린 세를 방세(房貰), 겨울에 외풍을 막고자 창문이나 방문에 치는 휘장이나 모기장이라는 방장(房帳), 남녀가 성적으로 관계하는 일을 방사(房事), 방안이나 방안에 들어 앉은 사람들을 방중(房中), 방을 덥게 함을 난방(暖房), 더운 철에 일부러 방 안의 온도를 낮춤을 냉방(冷房), 음식을 차리는 방을 주방(廚房), 한약을 지어 파는 곳을 약방(藥房), 세를 내고 빌어 쓰는 방을 셋방(貰房), 차를 마시는 곳을 다방(茶房), 혼자서 거처하는 방을 독방(獨房), 형무소에서 죄수를 가두어 두는 방을 감방(監房), 주인 마누라가 거처하는 방을 내방(內房), 남을 대신하여 일을 처리함을 대방(代房) 등에 쓰인다.
▶️ 四(넉 사)는 ❶지사문자로 亖(사)는 고자(古字), 罒(사)는 동자(同字)이다. 아주 옛날엔 수를 나타낼 때 가로 장대 네 개의 모양으로 썼으나 三(삼)과 혼동되기 쉬우므로 전국시대 무렵부터 四(사)를 빌어 쓰게 되었다. 四(사)는 코에서 숨이 나오는 모양을 본뜬 것이었으나 그 뜻으로는 나중에 呬(희)로 나타내고, 四(사)는 오로지 수의 넷을 표시하는데 쓴다. ❷상형문자로 四자는 숫자 '넷'을 뜻하는 글자이다. 그런데 四자의 갑골문을 보면 긴 막대기 4개를 그린 亖(넉 사)자가 그려져 있었다. 그러니까 갑골문에서는 막대기 4개를 나열해 숫자 4를 뜻했던 것이다. 그러나 亖자가 숫자 三(석 삼)자와 자주 혼동되었기 때문에 금문에서는 '숨 쉬다'라는 뜻으로 쓰였던 四자를 숫자 '사'로 쓰기 시작했다. 四자는 사람의 콧구멍을 그린 것으로 본래는 '숨쉬다'라는 뜻으로 쓰였었지만, 숫자 4로 가차(假借)되면서 후에 여기에 口(입 구)자를 더한 呬(쉴 희)자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래서 四(사)는 ①넉, 넷 ②네 번 ③사방(四方)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네 사람을 사인(四人), 네 곱절을 사배(四倍), 넷으로 가르거나 갈라짐을 사분(四分), 사방의 경계를 사경(四境), 사방의 둘레를 사위(四圍), 사방을 돌아보아도 친척이 없다는 뜻으로 의지할 만한 사람이 도무지 없다는 말을 사고무친(四顧無親), 사방에서 들리는 초나라의 노래라는 뜻으로 적에게 둘러싸인 상태나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고립 상태에 빠짐을 이르는 말을 사면초가(四面楚歌), 주위에 사람이 없어 쓸쓸함을 일컫는 말을 사고무인(四顧無人), 길이 사방 팔방으로 통해 있음이나 길이 여러 군데로 막힘 없이 통함을 일컫는 말을 사통팔달(四通八達), 이리저리 여러 곳으로 길이 통한다는 뜻으로 길이나 교통망이나 통신망 등이 사방으로 막힘없이 통함을 일컫는 말을 사통오달(四通五達), 사면이 봄바람이라는 뜻으로 언제 어떠한 경우라도 좋은 낯으로만 남을 대함을 이르는 말을 사면춘풍(四面春風), 사해란 곧 온 천하를 가리키는 말로 천하의 뭇사람들은 모두 동포요 형제라는 뜻을 이르는 말을 사해형제(四海兄弟), 네 갈래 다섯 갈래로 나눠지고 찢어진다는 뜻으로 이리저리 갈기갈기 찢어짐 또는 천하가 심히 어지러움 또는 질서 없이 몇 갈래로 뿔뿔이 헤어지거나 떨어짐을 일컫는 말을 사분오열(四分五裂), 네 가지 괴로움과 여덟 가지 괴로움이라는 뜻으로 인생에 있어 반드시 받지 않으면 안 되는 온갖 괴로움을 이르는 말을 사고팔고(四苦八苦), 사철의 어느 때나 늘 봄과 같음으로 늘 잘 지냄을 비유하여 일컫는 말을 사시장춘(四時長春), 사주의 간지로 되는 여덟 글자 또는 피치 못할 타고난 운수를 이르는 말을 사주팔자(四柱八字), 천하의 풍파가 진정되어 태평함을 이르는 말을 사해정밀(四海靜謐), 갓마흔에 첫 버선이라는 뜻으로 뒤늦게 비로소 일을 해 봄을 이르는 말을 사십초말(四十初襪), 404 가지 병이라는 뜻으로 인간이 걸리는 모든 질병을 이르는 말을 사백사병(四百四病), 네 마리 새의 이별이라는 뜻으로 모자의 이별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사조지별(四鳥之別), 천하를 제 집으로 만든다는 뜻으로 천하를 떠돌아 다녀서 일정한 주거가 없음을 이르는 말을 사해위가(四海爲家), 사궁 중의 첫머리라는 뜻으로 늙어서 아내가 없는 홀아비를 이르는 말을 사궁지수(四窮之首), 사방의 지세가 견고하고 험한 자연의 요새로 되어 있는 땅을 이르는 말을 사색지지(四塞之地), 사방으로 흩어져 서로 따로따로 떨어짐 또는 그렇게 떼어놓음을 일컫는 말을 사산분리(四散分離), 어떤 주창에 응하여 모든 사람이 함께 행동함을 이르는 말을 사방향응(四方響應) 등에 쓰인다.
▶️ 友(벗 우)는 ❶회의문자로 또 우(又; 오른손, 또, 다시)部가 겹쳐 쓰여 이루어졌다. 又(우)가 음(音)을 나타내기도 하며 친한 친구끼리 왼손(부수를 제외한 글자)과 오른손(又)을 서로 맞잡고 웃으며 친하게 지낸다 하여 벗을 뜻한다. 동족의 친구를 朋(붕)이라는데 대하여 관리(官吏) 친구를 友(우)라 하였으나 나중에 朋(붕)도 友(우)도 친구를 의미하며 사이좋게 하는 일의 뜻으로 쓰인다. ❷회의문자로 友자는 ‘벗’이나 ‘사귀다’, ‘우애가 있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友자의 갑골문을 보면 又(또 우)자가 나란히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친한 벗과 손을 맞잡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사이가 매우 가깝다는 뜻이다. 가까운 친구 간에 또는 이성 간에 손을 맞잡고 다니는 모습은 지금도 흔히 볼 수 있다. 友자는 그러한 의미가 반영된 글자이다. 그래서 友(우)는 벗, 친구, 동무의 뜻으로 ①벗(비슷한 또래로서 서로 친하게 사귀는 사람) ②동아리(같은 뜻을 가지고 모여서 한패를 이룬 무리) ③뜻을 같이 하는 사람 ④벗하다, 사귀다 ⑤우애가 있다, 사랑하다 ⑥가까이하다 ⑦돕다 ⑧순종하다, 따르다 ⑨짝짓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벗 붕(朋)이다. 용례로는 친구와의 정을 우정(友情), 형제 사이의 정애 또는 벗 사이의 정분을 우애(友愛), 벗으로 사귐을 우호(友好), 가까이 사귀는 나라를 우방(友邦), 친구 사이의 정분을 우의(友誼), 친하게 지내는 사람을 이르는 말을 우생(友生), 자기편의 군대를 우군(友軍), 비슷한 또래로서 서로 친하게 사귀는 사람을 붕우(朋友), 친한 벗이나 가까운 친구를 친우(親友), 오래도록 사귄 벗을 고우(故友), 한 학교에서 함께 공부하는 벗을 학우(學友), 벗을 사귐이나 친구와 교제함을 교우(交友), 같은 학급에서 배우는 벗을 급우(級友), 마음으로 사귄 벗을 심우(心友), 서로 마음을 아는 친한 벗을 지우(知友), 동기끼리 서로 사랑하는 정을 우애지정(友愛之情), 바람은 구름과 함께 움직이므로 구름의 벗이고 비는 구름으로 말미암아 생기므로 구름의 자식이라는 뜻으로 구름을 일컬음을 우풍자우(友風子雨), 나라와 나라 사이의 우의를 위하여 맺는 조약을 우호조약(友好條約)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