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049
11월22일[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연중 제33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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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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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mMyMFxzXjD4
[살레시오회 이현진 바오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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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불멸의 성녀, 체칠리아>
로마 시와 로마 근교는 거의 모든 곳이 유적지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지상뿐 아니라 지하 여기저기서도 다양한 유적들이 발견되고 있기에 지하를 개발하기가 어렵습니다. 로마에 가서 서울지하철처럼 쾌적한 지하철을 기대하면 큰 실망입니다. 아주 소란스럽고 노선도 짧고 노후화된 지하철에 깜짝 놀랍니다.
로마 근처 지하에서 현재까지 약 60여개의 카타콤바가 발견되었는데, 카타콤바란 초세기 교회 공동체의 지하공동묘지를 지칭합니다.
그중 순례객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카타콤바가 산갈리스토 카타콤바입니다. 순교자이자 교황이었던 성 갈리스토(217~222)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현재까지 발견된 카타콤바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큽니다. 현재 지하 5층까지만 개발되어 있는데, 잠깐 한 눈 팔다가는 길 잃어버릴 정도로 길고 복잡한 미로로 가득합니다.
교황님께서는 이 산 갈리스토 카타콤바의 관리를 저희 살레시오회에 위탁하셔서 현재 살레시오 회원들이 거주하면서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 산 갈리스토 카타콤바에 가시면 꼭 들러야 하는 명소가 한 곳 있습니다. 바로 오늘 우리가 경축하는 체칠리아 성녀의 조각상이 있는 장소입니다. 한때 산 갈리스토 카타콤바에 안장되어 있던 체칠리아 성녀의 시신이 다른 곳으로 이장되고 난 다음 이 조각상으로 대치한 것입니다.
그녀의 무덤은 지금까지 딱 두 번 공개가 되었는데 500년이 지난 810년, 그리고 1599년. 이장을 위해 그녀의 무덤이 공개되었을 때 성녀의 시신은 순교 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고, 이에 감동 받은 스폰드라도 추기경은 스물 셋의 젊은 작가 스테파노 마데르노에게 이 모습 그대로를 조각할 것을 요청하여 오늘날까지 아름다운 조각상이 남게 된 것입니다.
성녀는 얼굴을 땅에 묻고 두 손을 앞으로 내민 채 옆으로 누워 있는데 마치 잠을 자듯이 편안한 모습입니다. 자세히 보면 성녀의 목에 칼자국이 보입니다. 참수 당할 당시 목에 칼을 세 번 맞고도 목이 떨어지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사실이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두 손을 보면 왼손은 세 손가락을 펴고 있고, 오른손은 검지 하나만 펴고 있는데 이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임종 마지막 순간까지 증거하였음을 보여줍니다.
가톨릭교회 안에서 무척이나 유명하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성녀가 체칠리아 성녀지만 솔직히 그녀에 관한 기록은 거의 전무합니다. 오직 구전으로 내려온 전설들을 통해 그녀의 삶과 신앙을 추측할 수 있을 뿐입니다.
체칠리아는 로마 귀족 가문 출신의 총명하고 신앙심 깊은 딸이었답니다. 자신을 하느님께 온전히 바치기 위해 동정으로 살고자 마음먹었지만 부모는 발레리아누스란 전도양양한 청년과 혼사를 밀어붙입니다.
하느님의 영과 지혜로 충만했던 체칠리아였기에 자신의 계획을 남편에게 설명하고 설득하기 시작합니다. 설득에 성공한 체칠리아는 비록 결혼한 몸이었지만 자신이 꿈꾸어오던 봉헌생활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놀라운 일 한 가지, 체칠리아는 거기에 머물지 않고 이교도였던 남편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킵니다. 시댁 식구들도 차례로 개종시킵니다. 남편 발레리아누스에게 얼마나 신앙교육과 교리교육을 철저히 시켰으면 남편은 체칠리아에 앞서 순교의 영예를 얻게 됩니다.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후 체칠리아 역시 체포당하여 법정에 소환됩니다. 그녀는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당당하게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밝히고, 갖은 위협과 감언이설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버리겠노라고 외칩니다.
구전에 따르면 체칠리아는 언제나 성경을 몸에 지니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녀는 하루 중 기도를 드리지 않는 시간이 거의 없을 정도로 신앙심이 깊었답니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기로 개인적인 종신서원도 발했답니다. 부모가 강제로 밀어붙인 결혼식 날 체칠리아는 아름다운 금실로 장식된 예복을 입었지만 속에는 거친 삼베옷을 입었답니다.
체칠리아의 깊은 신앙에 감화를 받은 남편 발레리아노는 자신은 물론 동생까지도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남편은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순교자들에게는 무덤을 제공하였습니다.
결국 우상을 숭배하지 않았다는 죄명으로 참수당하여 순교의 영예를 얻게 됩니다.
그 가녀린 목에 세 번씩이나 칼을 맞고도 3일 동안 목숨이 붙어있었던 체칠리아는 임종 직전 우르바노 주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저는 당신이 제 부탁을 들어주도록 하느님께 3일을 기도했습니다. 제 집이 있는 자리에 교회를 세워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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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0i4JyKalvx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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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는 집: 로고스가 레마가 되는 집>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쫓아내십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비판하십니다. 그리고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십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듣고 배우는 것이 곧 ‘기도’입니다.
우리는 모두 한때 부모님의 성전이었습니다. 부모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며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L.A. 올림픽 때 다이빙 금메달을 딴 한 중국 선수는 자신이 금메달을 딴 것이 어머니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선수는 본래 다이빙 선수가 아니었고 100m 육상선수였습니다. 이 선수는 시합 때마다 자주 넘어졌고 성적도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풀이 죽은 딸에게 언제나 이렇게 격려를 해 주었습니다. “나는 네가 1등을 해서 좋은 게 아니야. 엄마는 네가 달리는 것만 보아도 너무 좋아 넘어졌을 때 계속 넘어져 있지 않고 다시 일어나 달리는 것만 보아도 엄마는 너무 기쁘단다.”
나중에 다이빙할 때도 엄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는 네가 다이빙대 위에 서 있는 것만 보아도 너무 기뻐.” 이 선수는 다이빙대에 설 때 항상 엄마의 이 말을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긴장이 풀리면서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엄마의 말이 이 다이빙 선수에게 등불이자 빛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나 이런 말을 해 준다고 그 말이 한 사람의 삶에 그런 힘을 줄 수 있을까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의 말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의 말은 그저 잔소리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나를 사랑해주더라도 내가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 안에 강도가 살 때 그렇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기 전에 장사꾼을 채찍으로 쓸어내시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사랑의 말은 사랑이 없는 사람에게는 그저 잔소리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나의 말이 영향을 미치게 하려면 그 듣는 사람이 나를 먼저 사랑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를 사랑하지 않게 만드는 자아와 삼구를 없애야 합니다. 그 자아와 삼구는 나의 피로서만 죽습니다. 주님께서 장사꾼들을 내쫓기 위해 사용하신 채찍은 곧 그리스도의 피, 성령을 의미합니다.
먼저 사랑으로 자아가 죽지 않으면 예수님은 분명 우리 안에 함께 계시는 것 같지만 우리가 그분을 벙어리 취급하는 꼴이 됩니다. 마치 ‘소리 없는 사랑’이란 태국 광고와 같습니다.
한 여학생은 자신을 홀로 키우는 아버지를 싫어합니다. 듣지 못하여 말도 못 하는 장애인이고 돈도 없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이 학생의 등에 “아버지가 바보 같은 장애인”이라는 글을 써서 붙이며 놀립니다. 자기가 그렇게 취급당하는 것이 아버지 때문이라 여깁니다. 자기가 왜 힘들어하는지 들어주지도 못하는 아버지는 이제 싫습니다. 그래서 비뚜로 나갑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언제나 자신이 청각장애인으로 태어난 것에 대해 미안하고 다만 딸이 착하게 커달라고 수화로 말해줄 뿐입니다. 이런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 딸은 더는 살고 싶지 않아 자살 시도를 합니다.
피가 너무 빠져나가 위험한 상태입니다. 아버지는 자기 재산을 다 줄 테니 딸만 살려달라고 합니다. 딸은 아빠의 피를 받고 살아납니다. 딸은 자신을 위해 피를 내어준 아버지를 보며 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고 손을 잡습니다. 이제 아버지의 소리 없는 말이 딸의 마음에 들어가 딸을 착하게 만들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읽는다고 그것이 나를 변화시킬까요? 아닙니다. 내 안에 삼구가 살아있으면 여전히 삼구는 하느님을 원망하게 할 것입니다. 이 뱀은 태초부터 하느님께 대한 불만을 심었고 아담과 하와는 삼구를 다스릴 줄 몰랐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무시하여 강도의 소굴이 되게 하였습니다.
말씀 묵상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조건 묵상을 한다고 되지 않습니다. 먼저 하느님 사랑을 깨닫고 감사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해야 합니다. 그런 상태라면 내 안의 말씀이 나를 변화시키는 은총으로 변합니다. 이것을 말씀이 로고스에서 레마가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전신 마비로 누워서 성경을 읽고 하느님을 받아들였던 미즈노 겐조의 시를 살펴봅시다.
하느님
오늘도 말씀해주세요
단 한 마디뿐이어도 좋습니다
내 마음은 작아서
많이 주셔도 넘쳐버려
아까우니까요
성경의 모든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데 왜 굳이 따로 또 말씀해 달라고 하는 것일까요? 이는 미즈노 겐조가 이미 로고스와 레마의 차이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미즈노 겐조는 불우한 상황에서도 감사를 찾았습니다. 그러니 주님의 말씀이 자신 안에서 로고스에 머물지 않고 레마가 되게 했습니다.
내 안에 아무리 하느님의 말씀이 뿌려져도 그것은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하늘에 뜬 별과 같습니다. 세.육.마.로 땅만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 별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로고스이지만 그 별을 따라 결국에 만나게 되어 내 삶을 완전히 변하게 하는 그리스도는 레마입니다.
내가 진정한 성전이 되어 하느님의 말씀이 로고스에 머물지 않고 레마로 변하게 하려면 그리스도의 피로 내 자아를 죽여야 합니다. 그렇게 죽은 결과는 ‘감사’로 나타납니다.
감사가 아니면 성경을 읽고 묵상해야 소용이 없습니다.
기도하는 집은 감사하는 집입니다. 그리고 말씀이 레마로 변해 나를 감동하게 하고 변화시키는 집입니다. 그런 집만이 성전으로 인정받고 구원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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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보름달이 주는 상징은 ‘충만하다’라는 의미와 ‘풍요롭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충만하고 풍요로운 건 이웃에게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한국의 추석과 미국의 추수 감사절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풍요롭게 해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겁니다. 충만하게 해 주셨으니, 이웃에게 나누는 겁니다. 저도 하느님의 은총으로 충만하고, 풍요로웠던 날이 있었습니다. 수요일에는 암 환자를 위해서 집으로 찾아가서 세례를 주었습니다. 형제님은 건강을 많이 회복했습니다. 암을 치료하면서 지난날들을 돌아 볼 수 있어서 감사했다고 말했습니다. 세례명을 레오라고 정했습니다. 사자처럼 용맹하게 암도 이겨내고, 신앙생활도 열심히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목요일에는 교통사고로 크게 다친 아이를 위해서 집으로 찾아가서 세례를 주었습니다. 4달 전에 중환자실에 있을 때는 의식이 없었습니다. 찾아가서 기도하니, 발가락이 조금 움직였습니다. 아직 말은 못하지만, 지금은 이야기를 듣고 빙그레 웃기도 합니다. 그날 세례를 주면서 함께 했던 분들 모두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이는 요셉으로 세례명을 정했습니다. 아이의 생일이 3월 19일이라서 제가 그렇게 정해 주었습니다.
금요일에는 장례미사가 있었습니다. 4살 된 아들과 임신 중인 아내를 남겨 두고 하느님의 품으로 떠났습니다. 세상을 떠나기 전날, 아버지가 끓여준 된장찌개를 맛있게 먹었다고 합니다. 어머니와 산책하러 나갔다가, 상태가 좋지 않아서 병원으로 갔다고 합니다. 온 가족이 모여서 고인의 임종을 지켜보았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떠나보내야 하는 부모님의 심정도, 사랑하는 남편을 떠나보내야 하는 아내의 심정도 무척이나 가슴 아팠을 겁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4살 아들과 아직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는 태중의 아이를 생각하니 저도 마음이 아팠습니다. 장례미사가 있던 날은 ‘모든 성인 대축일’이었습니다. 모든 성인이 세상을 떠난 안드레아를 천국으로 인도하리라 생각하며 장례미사를 봉헌했습니다. 토요일에는 ‘유아세례’가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아기를 위해서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동부에서 왔습니다. 아기의 대부는 휴스턴에서 왔습니다. 아이의 세례명은 ‘노엘’이었습니다. 아이의 부모님이 정했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충만한 날이었습니다. 마침 부주임 신부님이 성지순례 중이어서 제가 충만함을 온전히 받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관해서 이야기합니다. 성전의 고유한 모습은 ‘기도하는 집’입니다. 더불어서 성전은 복음을 전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하느님을 믿는 형제와 자매들이 친교를 나누는 곳입니다. 성전은 이제 예수님께서 당부하셨던 것처럼 나눔이 이루어지는 곳이어야 합니다. 특히 가장 가난한 이들, 아픈 이들, 외로운 이들이 머물 수 있는 위로와 치유의 공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곳에서 희망의 빛이 퍼져나가야 합니다. 우리들 또한 거룩한 성전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를 만나는 사람들이 지친 삶에서 위로를 얻는다면, 우리를 만나는 사람들이 복음의 기쁨을 느낄 수 있다면, 우리를 만나는 사람들이 절망 중에서도 희망의 빛을 볼 수 있다면 세상의 어떤 성전보다도 거룩하고 아름다운 성전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미사를 통해서 ‘성체’를 받아 모십니다. 바로 우리들의 몸이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모시는 나의 몸과 마음이 주님의 뜻에 따라 충실하게 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 너그러운 마음으로 가진 것을 나누는 사람들이 있는 곳 그곳이 진정한 성전이고 그곳이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분열과 갈등이 있는 곳, 욕심과 분노가 있는 곳은 아무리 화려하고 아름답게 보여도 주님께서 원하는 성전이 아닙니다.
2024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기도하는 집으로 만들면 좋겠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내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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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9,45-48: 너희는 하느님의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성전이 장사치의 소굴이 아니라, 거룩한 집이기를 바라신다. 그분은 사제의 직무가 부정직한 종교적 의무 수행이 아니라, 자발적인 순명으로 이루어지기를 바라신다. 주님께서는 성전에서 세속적인 교환행위가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신다. 즉 돈 바꾸는 환전상들을 성전에서 쫓아내기까지 하셨다. 주님의 돈으로 이익을 챙기려 하는 자는 바로 환전상이다. 그 주님의 돈은 성경이다. 성경을 가지고 자기 이익을 챙긴다고 한다면, 그는 성경을 파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들은 모두 환전상들이지 참 목자가 아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성경을 가지고 현세의 이익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이제 없어지고, 우리 신앙인들의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행실, 흠 없는 삶의 영광, 영광과 진리 안에서 드리는 향기로운 예배가 빛을 내야 한다. 이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성전 정화이다.
주님께서는 성전의 주인으로서 당신의 권한을 행사하신 것이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비롯하여 유대인 지도자들 모두의 죄가 더욱 크다. 배우지 못한 백성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였고, 그 구원의 말씀을 단비처럼 받아 마셨다. 그들의 마음은 열매를 맺을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분의 가르침에 따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을 지도하는 자들은 주님을 거역하고 살인을 계획하고 있다. 그들은 모퉁이 돌에 걸려 넘어지고 말 것이다. 주님의 집은 하느님과 우리의 형제들을 만나는 장소이다. 이 만남은 사랑의 만남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 하느님의 집이 어느 개인의 욕망을 해소하기 위한 장소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오늘 복음에서 보여주고 있다.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몸도 성령의 궁전이라고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셨다. 이 궁전을 인간적인 욕심으로 채우려고 한다면 하느님의 성전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언제나 주님을 모실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그래서 세상을 비출 수 있는 신앙인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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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체칠리아 성녀는 하느님을 열렬히 사랑하여 어릴 적부터 동정을 서원하였습니다. 집안의 강압으로 혼례를 치르지만, 남편인 발레리아노에게 자신이 동정을 서원하였고, 수호천사가 자신을 보호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발레리아노는 만일 자기에게 수호천사를 보여 주면 체칠리아의 동정을 지켜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그 말에 체칠리아는 남편을 우르바노 1세 교황께 보내어 세례를 받게 합니다. 세례를 받은 발레리아노는 수호천사를 보게 되었고, 체칠리아를 따라서 깊은 신앙을 가지게 됩니다. 그 뒤 발레리아노는 친동생 티부르시오도 세례를 받게 하였고, 그들은 함께 자선 활동에 전념하며 그리스도교를 전합니다. 그들 주위에 있던 막시모는 이 두 형제가 보여 준 굳은 믿음을 보고 감화를 받아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이 셋은 이교도 신전에 희생 제물을 바치라는 강요를 거절하여 같은 날 순교하였습니다. 체칠리아 성녀는 이 세 명의 순교자들의 장례를 치른 뒤 체포되어 순교하였습니다.
체칠리아 성녀의 일화는 신앙이 신앙을 증언하는 사람의 삶을 통하여 밖으로 퍼져 나가는 것임을 알려 줍니다. 체칠리아와 그 주변의 순교자들은 입으로 신앙을 전파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의 선한 행위와 신앙의 삶으로 주위 사람을 감화시켰습니다. 이처럼 신앙은 신앙인들의 삶을 통하여 생명력을 얻고 밖으로 뻗어 나가 주위 사람들에게 전파됩니다. 그래서 말로 주님을 선포하는 것보다 삶으로 증언하는 선포가 더 힘 있는 선교입니다. 우리 주변의 이웃들이 우리의 삶을 통하여 주님을 바라보게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삶으로 주님을 세상에 드러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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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신앙인들에게 지금 이 시대는 분명히 ‘위기의 시대’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았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도를 찾지 못하였다. 온 백성이 그분의 말씀을 듣느라고 곁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루카 19,45-48)
1) 온 백성이 예수님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는 말은, 예수님의 ‘성전 정화’를 백성들이 지지했음을 나타냅니다. 그 당시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은 서민들에게는 대단히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과 장사꾼들에게 자릿세를 받은 사제들은 사실은 한통속이었습니다. <어쩌면 사제들이 장사꾼들을 고용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께 제물로 바칠 짐승이나, 여러 가지 물품들을 다른 곳에서는 사지 못하게 하고, 성전에서만 사라고 강요하면서, 아주 비싼 값으로 그것들을 팔았는데, 그것은 서민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일이었고, ‘강도짓’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이었으니, 예수님께서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라고 꾸짖으신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백성들이 예수님의 성전 정화를 지지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물론 성전 정화를 지지했다고 해서 백성들이 예수님을 지지한 것은 아니고, 또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따른 것도 아니지만, 어떻든 기득권층 사람들에게는 백성들이 성전 정화를 지지하면서 예수님의 곁을 떠나지 않은 것은 크게 부담스럽고 불편한 일이었습니다.
2)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당시 ‘최고의회 의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단순하게 말하면 서민이 아니었던 사람들, 즉 기득권층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기존의 종교 질서와 사회 질서를 뿌리째 흔들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자기들의 기득권이 위협을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하느님의 일’이고 ‘선한 일’인데, 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을까?”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교 입장에서 하는 말이고, 그 당시의 유대교 지도자들과 기득권층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하느님의 일’로 생각하지도 않았고, ‘선한 일’로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자기들이 죄를 짓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고, 예수님의 비판을 인정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는 말씀을 듣고서 자기들이 모욕당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또는 예수라는 자가 성전을 모독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우리 입장에서 생각하면 성전을 모독한 것은 그자들인데, 그자들은 반대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3)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의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게다가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 그들은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짓을 할 것이다."(요한 16,2-3)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지도자들이 자기들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기는커녕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것은, 자기들은 하느님 편에 서 있고, 예수님은 반대편에 서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죽이는 일은 곧 하느님께 충성하고 봉사하는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왜, 그들은 어쩌다가 선과 악을 판단하지 못하고, ‘하느님의 뜻’과 ‘인간의 탐욕’을 구분하지 못하게 되었을까?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그들은 왜 그렇게 어리석은 위선자가 되었을까?
4) 이천 년 전의 유대교와 예루살렘 성전의 모습이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이 되긴 하지만, 사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의 모습은(신앙생활은) 어떤가?”입니다.
중세 때의 교회의 모습을 보면, 예루살렘 성전보다 더 타락했었고, 더 큰 죄들을 짓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만일에 그때 훌륭한 성인 성녀들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교회는 아마도 그대로 망해 버렸을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도 우리 교회에게는 분명히 여러 가지 이유로 ‘위기의 시대’입니다. 통계표를 보지 않아도, 성소자 수가 줄어들고, 새 영세자 수도 줄어들고, 냉담자 수는 급격히 증가하고 있고, 사회에서 교회의 영향력은 점점 줄어들고, 그만큼 ‘복음화의 힘’은 약해지고 ‘세속화의 힘’은 강해지고 있다는 것을 누구나 잘 알고 있습니다.
교회가 심각하게 타락했을 때 성인 성녀들이 나타나서 교회를 쇄신하고 개혁하면서, 사람들을 회개시키고, 무너지는 교회를 다시 세운 것은, 분명히 ‘성령의 도우심과 보호’입니다.
주님께서는 변함없이 성령을 통해서 교회와 신앙인들을 보호해 주시고 지켜 주신다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이 성실하게 응답하고 회개하는 생활을 할 때에만 그 보호와 도우심이 ‘살아 있는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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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시는 장면을 소개합니다. 루카 복음서에 따르면, 이 일화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바로 그날에 이루어집니다. 그만큼 성전 정화 사건은 예수님의 메시아 왕권을 재확인하는 중요한 기능을 담당합니다. 그런데 메시아 예수님의 왕권은 세속적 의미에서 가리키는 지배와 통치를 위한 ‘권력 쟁취’와는 거리가 멉니다. 그분의 왕권은 오직 하느님 아버지를 올바르고 합당하게 섬기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물건을 파는 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이 구절에서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은 이사야서 56장 7절의 인용입니다. 곧 성전의 본래 기능이 기도하기 위함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강도들의 소굴’은 예레미야서 7장 11절에 나오는 표현입니다. 예레미야 예언자 시대나 예수님 시대나 사람들이 성전의 본래 기능을 왜곡하여 잘못 사용하고 있다는 비판입니다.
마침내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았다.”라고 복음은 전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 상인들을 꾸짖으신 일과 성전에서 가르치신 일이 유다교 지도자들에게는 ‘눈엣가시’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 내용은 구약과 신약 시대의 이야기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들도 ‘기도의 집’인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거나, 왜곡된 목적으로 사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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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유다교에서 성전은 신앙생활의 중심이었습니다. 모든 제사의 의식은 성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제사는 하느님과 화해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여겨졌습니다.
구약 성경에 따르면 사제들은 조를 나누어 돌아가면서 성전에 머물며 봉사하였습니다.(1역대 24장 참조) 그렇다고 성전이 제사를 바치는 곳만은 아니었습니다. 성전은 하느님과 만나는 장소이자 기도의 장소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루카 복음서에서 성전은 가르침의 장소로 표현됩니다. 이것은 비단 예수님만이 아니라 사도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성전은 사도들과 신앙인들에게 기도의 장소였으며 부활하신 예수님을 선포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장소였습니다.
예수님의 성전 정화는 십자가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분의 행동은 성전만이 아니라 유다교의 제도에 반대하는 것처럼 보였기에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애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행동은 성전이 지닌 진정한 의미를 되찾는 것이고 하느님의 뜻에 맞게 되돌려 놓는 것입니다.
성전이 참의미를 잃고 수단과 도구로만 사용된다면 종교의 모든 제도는 하느님을 잊은 채 인간의 이익만을 위하여 남습니다. 개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이 삶의 태도와 생각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다만 나를 위한 도구가 된다면 신앙은 가치를 잃습니다. 그 가치를 되돌려 놓는 것이 정화의 참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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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 우리는 성전의 본래 모습을 봅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루카 19,46)
예수님께서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해 성전의 본질을 일깨우십니다. 성전이 거래와 잇권의 장이 되면서 그 본연의 모습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지요. 예수님은 물건 파는 이들을 쫓아내시는 거친 행동을 하시면서까지 성전의 성전다움을 되찾으려 하십니다.
이 일은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 그리고 백성의 지도자들의 심기를 건드립니다. 지금의 성전 모습은 그들의 기득권이나 재산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온 백성이 그분의 말씀을 듣느라고 곁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루카 19,48)
하지만 예수님을 참 예언자 또는 메시아로 여기는 백성들이 그분 곁에 머무르고 있으니 적대세력들은 예수님을 붙잡을 기회를 좀처럼 얻기 어렵습니다.
말씀이신 분 곁에 모여든 백성들을 관상합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인지요! 그분 입에서 흘러 나오는 진리의 가르침이 백성들의 영혼을 적시고 있습니다. 귀를 쫑긋 세우고 그분께 집중하고 있는 이들은 온 존재로 듣는 중입니다. 말씀이 예수님에게서 흘러나와 백성들 안으로 스며들며 공유됩니다. 과연 그들 모두는 말씀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성전이 성전다워집니다. 하느님의 거처인 기도의 집은 영혼들을 말씀으로 엮어 주는 안식처입니다. 성전이 이 본질을 지킬 때 세상 모든 사물도 자기 자리와 제 질서를 찾습니다. 피조물다움, 사람다움이 회복되는 것이지요.
제1독서에서는 요한 묵시록 저자의 놀라운 체험을 이야기합니다.
"나는 그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받아 삼켰습니다. 과연 그것이 입에는 꿀같이 달았지만 먹고 나니 배가 쓰렸습니다."(묵시 10,10)
그는 천사가 명한 대로 두루마리를 받아 삼킵니다. 주님을, 말씀을 입으로 받아 먹은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은 입에는 달고 배는 쓰리게 합니다. 말씀은 힘 주어 전하는 이의 입을 즐겁게 하지만 육신은 고달프게 만들지도 모릅니다.
"너는 많은 백성과 민족과 언어와 임금들에 관하여 다시 예언해야 한다."(묵시 10,11)
말씀을 받아 먹은 그는 예언자의 소명을 이어가야 합니다. 그동안 충실해 해온 대로 듣고 본 말씀을 받아 적고,이를 전하는 일입니다. 그는 말씀을 받아 먹은 이, 말씀을 품은 이, 말씀을 전달하는 이입니다.
이미 그 자신이 성전입니다. 그를 살게 하고 움직이는 존재가 주님이신데, 그분이 곧 말씀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기도를 주님께 뭔가 졸라대고 간청하는 것으로 국한시켜 생각하지만, 기도는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주님 현존 안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그분을 듣고, 그분을 생각하고, 그분을 사랑하는 존재적 상태가 곧 기도입니다. 이처럼 말씀 안에 머무르는 이는 기도하는 사람이고, 성전입니다.
매일 다가오시는 말씀을 들으려 이곳을 찾으시는 벗님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여러분이 주님 곁에 머물러 말씀을 듣고 묵상하고 관상하고 기도하는 동안, 우리의 성전다움이 차츰 회복됩니다.
그리고 그런 우리를 통해 공동체와 세상도 조금씩 더 자기다움을 회복해 가는 것이지요. 말씀이신 주님을 모시고 세파와 격랑을 헤치며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를 응원합니다. 함께 걸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성전이 되신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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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너희는 하느님의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19,46)
예수님의 성전 정화는 하느님의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린 인간 의식의 정화이며 참된 성전인 몸과 마음의 정화를 위한 촉구이자 초대입니다. 오늘 복음 성전 정화를 들으면서, 공자와 안회의 「심재」에 관한 논의가 먼저 떠오릅니다. 어느 날 공자의 수제자인 안회가 공자에게 감히 마음의 재계를 물었습니다. (敢問心齎) 그러자 공자께서는 심재를 묻는 안회에게 생뚱맞게도 심재의 반대쪽인 좌치坐馳를 언급합니다. 어쩌면 역설적으로 공자는 좌치를 알고 깨우치면 심재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는 의도로 말씀하신 게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곧 마음의 재계란, 『날개 달고 날았다는 말은 들었어도, 날개 없이 날았다는 말은 듣지 못했을 걸세. 지식으로 사물 이치를 안다는 말은 들었어도 무지로 모든 것을 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겠지. 저 텅 빈 것을 보게나, 휑하니 빈 방이지만 환하게 밝지 않는가. 좋은 것은 빈 마음에 모인다네. 그쳐야 할 곳에 그치지 않으면 이를 몸은 앉아 있어도 마음은 달린다, 라고 이름하지.(是之謂坐馳)』 (장자. 인간세) 좌치란 몸은 그대로 있으나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이익이나 명예, 불필요한 관심, 감당하기 어려운 일로 인하여 생기는데, 이 때문에 본래 마음의 상태가 어지러워지게 되며 결국엔 본성(=장자가 말하는 심재)까지 침해되어 혼란스럽게 된다는 것으로 장자는 이를 매우 경계한 것입니다. 따라서 좌치의 상황은 욕망에 미혹하여 당연히 유지되어야 할 본성을 침해하게 되고 마침내 그 본성조차 잃어버리게 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심재란 좌치’에서 회복을 의미하듯, ‘강도들의 소굴’에서 정화가 ‘하느님의 기도하는 집’으로 회복인 이치와 같다고 느껴집니다.
예수님의 최우선적인 관심사는 곧 아빠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며, 자기 말과 행동을 통해 여기 우리 가운데 아빠 하느님이 계시며, 하느님의 나라는 바로 아버지의 구원의 표지이시다, 라는 점을 환기하시고 되돌리시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당연히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맨 먼저 찾아가신 곳은 예루살렘 성전이었습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12살 때, 자신을 찾아 사흘 길을 헤매신 부모님께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2,49)라고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 바로 성전이었고, “아버지에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 삼킬 것입니다.”(요2,17)라는 표현에서도 드러나고 있지만, 성전을 다시 찾기 이전부터 예수님은 아버지에 대한 관심과 열정으로 불타올랐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그런 예수님이셨기에, “성전에 들어가시어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린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쫒아내기 시작하시며,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19,46)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돌발적인 반응이나 행동이 아니라 늘 예수님의 마음속에 아버지의 집에 대한 열정에서 성전이 성전으로 회복을 위해 때를 기다렸던 겁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정화하신 성전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성전이나 성지라는 곳이 본래의 역할과 기능을 다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지 감히 묻습니다. 성지순례를 가 보신 분들이라면 공감하시겠지만, 거의 모든 성지와 모든 곳의 성전이 상업화되고 세속화되어 버린 것은 아닌가 싶은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러기에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성전 정화의 본질을 담고 있습니다.
본래 회복! 근본으로 돌아감! 본래本來라는 말은 처음부터, 원래, 근본 등의 의미로서 천성적이고 자연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성전의 본래 기능과 역할을 온전히 회복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참된 성전 정화의 의도일 것입니다. 타락하고 부패한 성전을 바라보시며 예수님은 아버지의 집 곧 나의 집이라 말씀하신 것은 지금까지 사람들은 성전하면 하느님의 집이었다고 생각했었는지 모르지만, 이제 자신의 강생과 현존을 통해서 사람들은 이제 성전은 바로 당신의 몸을 두고 말하는 것임을 알게 될 날이 올 것임을 암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요2,21) 이로써 자신이 있는 곳에 아버지께서 함께 계시고, 아버지 계신 곳에 당신 또한 함께 있다, 는 말씀을 통해 아버지의 집은 이제 당신의 집이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전이, 본래 성전의 역할을 다하지 못할 때 끊임없이 정화를 반복해야 하며, 이는 우리의 과업이며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전 정화는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그 본을 보여 주시고 솔선수범하신 행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습니다.”(19,47) 지금도 예수님은 강도의 소굴이 아닌 기도의 집이 되도록 날마다 우리에게 가르치고 계십니다. 이를 본받아 교회는 스스로 자정과 함께 늘 마음의 재계를 위한 반동으로 좌치에서 벗어나 본래의 역할과 기능을 잃지 않도록 삼가 조심하고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성전의 웅장함과 화려함을 즐겨 하시는 아빠 하느님과 예수님이 아니시며 오히려 성전의 본래 몫을 다하지 못함을 마음 아파하시며 안타까워하심을 잊지 않고 마음에 새겨 간직해야 합니다. 성전의 정화, 본래 회복을 부단히 노력할 때,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그자를 파멸시키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3,16.17) “주님, 당신께서 말씀하신 ‘성전을 허물라’는 말씀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날마다 성전을 정화하면 살아갈 수 있도록 저희 육신의 감실에 머물러 주십시오. 아멘,”
(** 성녀 체칠리아 축일 맞는 분들, 모두 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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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이탈리아에서 박사과정에 들어가면, 서울교구의 사제들은 한인 신학원에 들어가 살게 됩니다. 한인 신학원이란 한국의 모든 교구의 사제들을 위해 설립된 곳으로 그들의 공부와 복지를 위해 애쓰는 교황청립 기관입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살다보면 여러 가지 일들이 주어집니다. 한인 본당 신자들의 교리를 가르친다거나, 추기경님 혹은 주교님들을 수행한다거나, 그 밖의 행정 업무를 위해 운전을 해야 한다거나 등등 여러가지 일들을 돕게 됩니다. 물론 한국 교회를 위한 일이기에 이러한 일들을 맡게 되면 기꺼이 시작 하지만, 나에게 일이 몰리게 되면 아무래도 본전 생각이 나게 됩니다.
공부하기도 바쁜데 왜 항상 내가 많은 일을 도맡아야 하는지, 왜 다른 사람들은 일을 하지 않는지 화가 나기도 합니다. 다시 말 해, 나도 좀 편하고 싶다는 본전 생각이 나는 셈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세상에 봉사하기 위해 사제직을 선택한 제 자신이 일거리 몇 개로 본전을 생각했다는 사실이 참으로 미성숙한 모습이었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것은 곧 주님의 일보다는 내 일을 고집하는 자세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시며, 성전이 강도들의 소굴로 변질 되었다고 심하게 질책하십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가장 큰 축제였던 무교절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이뤄진 그릇된 상행위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눠 볼 수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돈을 환전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은 누구나 성전세를 지불해야 했는데, 당시 이스라엘 안에서는 여러 종류의 돈이 통용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성전세를 낼 때 부정한 돈을 내서는 안 된다는 규정으로 인하여 순도가 놓은 은화만 봉헌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순례객들은 성전세를 위해 다른 종류의 돈을 은화로 환전해야 했는데, 노동자의 하루 임금의 절반에 해당하는 높은 수수료를 그 대가로 부담해야 했습니다. 두 번째는 번제물을 파는 행위였습니다. 순례객들은 성전에 들어가 살아있는 동물을 제물로 바쳐야 했는데, 밖에서 제물로 바칠 동물을 데리고 들어가기 위해서는 검사관들에게 보여주고 확인받아야 했습니다.
성전세와 마찬가지로 제물 역시 정결하고 흠이 없는 것이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검사관들은 이런저런 트집으로 외부에서 가져온 동물은 불합격 판정을 내렸으며 이에 사람들은 할 수 없이, 밖에서 구입하는 것 보다 열배 이상 비싼 비둘기를 성전에서 구입해야 했습니다. 한마디로 순례객들은 착취의 대상이었고 대사제들은 마음껏 이들을 착복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정의로우신 예수님께서 이러한 상황이 마음에 드실 리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에서는 물건을 파는 이들을 꾸짖고 쫒아 내십니다.
이에 병행구절인 마태오 복음 21장 12절은,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환전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수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다.”라고, 당시의 상황을 표현합니다. 이는 단순한 질책이 아닌, “목숨을 바친” 정의로운 행동입니다. 이로 인해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강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가장 커다란 수입원이 타격을 받은 상황에서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악이 자리잡고, 어떻게든 예수님을 몰아내야 한다는 미움이 생겨납니다. 오늘의 이 복음은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이기적인 마음, 하느님의 일을 해야 하는 우리들이 가지게 되는 여러 가지 ‘본전 생각’을 지적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물질적인 욕심, 육체적인 편안함, 부담이 없는 일을 찾아 나서곤 합니다. 나에게 직접적인 이득이 보이지 않으면 회피하고 싶고 타인을 위한 봉사는 사치라는 생각마저 들기도 합니다.
그래도 선한 일에 동참하고자 남을 돕기도 하지만, 적당히 타협할 수 있는 수준에서 그칠 때가 많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욕심 앞에서, 우리들은 무엇보다 주님의 일을 앞서 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마치 오늘 복음의 수석 사제들과 같이, 겸손한 자세를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예수님의 목소리, 즉 양심의 소리를 나도 모르게 없앨 방도를 찾고 있지는 않은지, 애써 무시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이켜 봐야 하겠습니다. 우리들의 주인은 주님이시며 그분은 언제나 우리를 선한 길로 이끄시는 목자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분명 그분의 목소리를 잘 알고 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부모가 자녀를 포기할 수 없듯, 우리의 어버이이신 주님께서는 언제나 그 자리에서 변함없는 목소리로 우리의 양심을 일깨우십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복음 환호송은 다음과 같이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마음을 전해줍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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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사람이 암에 걸리는 이유는 첫째, 유전, 두 번째로는 환경, 세 번째는 음식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 가장 중요한 것이 스트레스라고 하지요. 하고 싶은 말 참고, 하고 싶은 행동을 참으면서 스트레스가 더해져 병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회생활 하면서 어떻게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하고 싶은 행동 다 하면서 살 수 있느냐고 하지만, 이해하려 하고 또 삶 안에서 의미를 찾아가면서 본인에게 닥친 문제들을 풀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분의 인상 깊은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최후에 웃는 사람이 승자가 아니라, 자주 웃는 사람이 승자더라.’
이를 위해 자주 감동받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참는 사람은 감동도 참게 됩니다. 그래서 아무리 재미있는 상황에서도 뚱한 표정을 짓습니다. 어쩌면 감정이 메말라 있는 상태가 아닐까요? 참다 보니 자기감정을 참는 것도 습관이 되었고, 이로써 어떤 상황에서도 감동을 잘 받지 못하게 됩니다. 스트레스만 자기 안에 쌓이는 것입니다.
통증 완화에 도움을 주는 엔도르핀은 모르핀의 약 48배 효과가 있고, ‘감동 호르몬’이라 하는 다이돌핀(didorphin)은 모르핀의 약 200배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미국의 인디애나주 메모리얼 병원 연구팀에 의하면 15초 동안 하하호호 웃기만 해도 엔도르핀이 증가해 수명이 이틀 정도 연장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더 효과가 큰 다이돌핀의 효과는 어떠할까요? 따라서 이 효과를 위해 일상의 작은 순간에서도 감동하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면서 말씀하십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우리 각자는 하느님의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몸은 기도의 집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자리는 보이지 않고 세상의 자리만이 가득합니다. 하느님의 자리가 강도들의 소굴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평화가 있을 수 있을까요? 하느님의 자리가 없으니 하느님의 일을 통해 작은 순간에서도 감동하고 깨달음을 얻을 수 없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서로 공감하고 감동받을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내 마음에 하느님의 자리를 만들어 기도의 집을 만들어야 합니다. 세상의 스트레스를 날려 버리고, 주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평화와 위로를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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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곁에 벗이 있음에>
루카 19,45-48 (성전을 정화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았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도를 찾지 못하였다. 온 백성이 그분의 말씀을 듣느라고 곁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곁에 벗이 있음에>
“온 백성이
그분의 말씀을 듣느라고
곁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루카 19,48)
붉은 촛불이
아낌없이 스스로를
사르는 까닭은
칠흑 같은 세상에서도
빛 품고픈 고운 벗들
곁에 있기 때문입니다
여린 바람이
쉼 없이 모든 이에게
스쳐가는 까닭은
갈라진 세상에서도
하나 되고픈 고운 벗들
곁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얀 눈이
티 없이 소복하게
나리는 까닭은
잿빛어린 세상에서도
맑은 꿈 이루고픈 고운 벗들
곁에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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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성전을 지킵시다>
태국의 왕궁을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발 디딜 틈도 없이 많은 관광객에 떠밀려 겉모양을 보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화려한 수공예 작품으로 꾸며진 왕궁을 보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국왕의 권위를 인정하며 존중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짧은 치마를 입은 사람은 무릎 밑으로 내리는 긴치마를 빌려 입어야 하고 슬리퍼를 신은 사람은 다른 신으로 갈아 신어야 할 정도로 국왕에 대한 예의를 챙겼습니다.
왕궁의 곳곳에 그려진 벽화는 규모나 섬세함이 대단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벽화를 복원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장인 정신을 생각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들락거려 소란스러운데도 전혀 개의치 않고 온갖 정성을 들여 붓을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몇몇 한국인들이 눈에 뜨여 아주 반가웠습니다. 한국 사람은 사원이나 왕궁 등 역사적인 장소를 찾기보다는 먹고, 마시고 즐기는 곳을 즐겨 찾는다는 말을 들었기에 그들이 달리 보였습니다.
국왕의 권위를 인정하는 만큼 왕궁은 보호되겠지만 관광객으로 넘쳐 나는 왕궁은 아마도 돈벌이의 장소로 전락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잘 포장된 과일바구니를 봉헌하고 있었는데 봉헌한 사람이 자리를 비우기가 무섭게 바구니는 치워지며, 이미, 판매되었던 과일 바구니를 다시 판매하는 모습을 보면서 봉헌의 의미가 무시되고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왕궁의 덕분으로 백성이 사는구나 하는 마음입니다. 모쪼록 왕궁이 돈벌이의 장소가 되지 않고 백성을 살리는 곳, 곧 기도의 집이 되기를 희망했습니다.
가끔은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무엇인가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것, 마음에 끌리는 것과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상충할 때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이 됩니다. 마땅히 주님을 따라야 함에도 말입니다. 육적인 것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르면 몸은 고달플지라도 마음의 자유를 누립니다.
그러나 육적인 욕망을 따르면 당장은 즐겁고 기쁘지만, 주님을 따르지 못한 안타까움에 마음이 걸립니다. 사실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지 못한 마음이 강도의 소굴입니다.
우리의 몸은 하느님의 모상을 닮았고, 하느님의 숨을 받았으며 주님을 모시는 거룩한 성전입니다. 그 몸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상태가 강도의 소굴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루의 끝맺음에 늘 “허물로 누벼놓은 이날 하루를 주님의 자비로 지켜주소서.” 하고 기도를 하지만, 일관된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기엔 여전히 힘에 겹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혀에 감미로운 자는 기도의 집이요, 육의 욕망을 따르는 자는 강도의 소굴이거늘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애 버릴 방도를 모색하였습니다. 설사 그들의 계획이 성공한다 해도 진리 안에 자유를 누릴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끝내 ‘강도의 소굴’을 ‘기도의 집’으로 회복시키지 못한 채 죽음을 자초하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오늘도 여전히 그들의 전철을 밟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기도의 집을 복구하는 날 되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신 것은 성전은 이익을 남기는 곳이 아니라 하느님을 예배하고 사람을 섬기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이 장터였다면 그들을 쫓아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밑지고 파는 장사는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건을 파는 이들은 당연히 이익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셈을 하고 이권이 살아있는 곳이 세상입니다. 성당에서 운영하는 성물방이나 카페가 물질적 이익의 창구가 된다면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실까요? 우리 삶의 자리는 주님을 모시는 성전입니다. 성전을 지킵시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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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맨 먼저 찾아가신 곳은 예루살렘 성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면서 말씀하십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루카 19,46)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나의 집, 곧 당신의 집’으로 말씀하십니다. 이는 <이사야> 56장 7절의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리리라.”는 말씀을 지칭합니다. 그런데, 성전이 장사와 환전이 행해지는 불결하고 부정한 곳, ‘강도의 소굴’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새롭게 정화하시는 일을 맨 먼저 하십니다.
예수님의 성전정화는 교회개혁의 표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교회가 항상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을 드러내고, 주님의 생명과 사랑에 응답해야 함을 말해줍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당신 자신을 쪼개시고, 성전의 장막을 두 갈래로 가르셨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물리적이고 공간적인 성전에 갇히지 않으시는 당신의 몸을 성전으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하느님 현존의 성전이 되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러한 사실을 잘 깨우쳐줍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 3,16)
참으로 그렇습니다. 우리의 몸은 주님께서 주신 거룩한 품위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비록 질그릇 같은 깨지기 쉬운 몸이라 할지라도,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값진 보화를 간직한 거룩한 몸입니다. 당신께서 우리 안에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서 현존하시며 활동하시기 때문입니다. 단지 우리 안에 계시고 활동하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주님의 성전인 우리의 몸이 ‘강도의 소굴’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우리의 몸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어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몸으로 그분의 영광을 드러냄이란 우리 몸을 잘 보전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처럼 우리의 몸을 다른 이들을 위해 내어주는 데 있습니다.
이를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로마 12,1)
그렇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을 때, 곧 우리 자신을 타인과 세상을 위해 내어놓을 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우리 자신은 ‘기도의 집’이 되고, 우리 안에서 그분의 영광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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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루카 19,46)
주님!
기도하게 하소서
제 몸으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소서.
제 행실로 당신의 성전임을 증거 하게 하소서.
제 영혼이 당신의 거룩함을 드러내게 하소서.
제가 당신이 거주하시는 당신의 집인 까닭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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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교회공동체는 물론 개인성전정화가 우선이다>
“당신 말씀 제 혀에 얼마나 달콤한지! 그 말씀 제 입에 꿀보다 다옵니다.”(시편119,103)
참으로 하느님을 믿고 사랑하는 이들은 세상맛, 밥맛, 돈맛이 아닌, 말씀맛, 기도맛, 하느님맛으로 살아갑니다. 오늘 옛 어른의 지혜도 교회 공동체에 속한 이들의 성전정화가 우선임을 깨닫게 합니다. 아무리 성전건물이 좋고 화려해도 그 안에 좋은 사람들 공동체가 없으면 헛되고 공허할 뿐입니다. 참 좋은 사람들이 세상의 보물이요 희망입니다.
“내 마음이 삐뚫어지면 세상도 어그러진다.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나의 마음부터 바꾸어라.”<다산>
바로 사람이, 나 자신의 성전정화가 우선임을 깨우쳐줍니다.
“몸과 마음을 닦아 수양하고, 집안을 가지런하게 하며,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안하게 한다.”(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대학>
역시 나부터의 수양이, 수행인 성전정화가 우선임을 밝혀주는 동양의 지혜입니다.
오늘은 3세기 순교한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입니다. 가톨릭교회 역사교육 차원에서 순교 성녀의 감동적 일화를 공부해 봅시다. 이런 일련의 교육도 우리의 회개와 더불어 각자의 성전정화에 좋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어제는 뜻밖에도 교황의 교육에 대한 귀한 언급이 많아 나눕니다.
“교회역사는 단지 연대기적 사실로 환원될 수 없다.”
그래서 순교성인들의 감동적 일화를 살펴보며 배우는 것이 필요합니다.
“교회는 오늘날 신자들이 더 잘 살 수 있도록 자신의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
“교육의 실패는 미래의 아이들을 탈취해 가는 ‘문화적 집단학살(cultural genocide)이다.”
문화적 집단학살이라 표현이 아주 자극적이지만 역사교육의 중요성이 그토록 지대함을 새삼 깨닫습니다. 우리나라 학생들의 역사교육이 얼마나 부실한지 개탄합니다. 이래서 신자들의 평생교육에 가톨릭교회의 매일미사가 그렇게 고마울수가 없습니다. 저역시 공부하는 마음으로 날마다 쓰는 강론입니다.
“선교사들은 교회의 사랑의 언어로 말해야 한다.”
“교육에의 열쇠는 학교와 가정간의 좋은 협력에 있다.”
금과옥조의 지혜 가득한 교황의 메시지를 공부하는 마음으로 자세히 읽어보려 합니다. 성녀 체칠리아의 순교에 이르기까지의 감동적 과정을 살펴봅니다. 성녀의 이름은 ‘천상의 백합’을 뜻합니다. 흔히 성녀는 비올라나 작은 오르간을 연주하는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체칠리아는 로마제국의 명문 귀족의 규수로 어린시절부터 독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합니다. 자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부모의 강권에 의해 발레리아누스와 결혼하였고 이교도인 그에게 종신동정서약한 사실을 밝혔고 도움을 청합니다. 그런 사실을 알리는 성녀의 수호천사와의 만남을 통해 남편은 적극적 협조자로 바뀌었고 마침내 교리를 공부하여 가톨릭으로 개종합니다.
발레리아누스는 함께 개종한 동생 티부르시우스와 신자생활에 열심하였고 이들 형제의 삶에 감동한 막시모라는 젊은이는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이 셋은 이교도 신전에 희생제물을 바치라는 강요를 거절함으로 같은날 순교합니다. 체칠리아 역시 체포되었으며 한치의 흐트러짐없이 당당하게 자신의 신앙을 밝히고 온갖 회유와 감언이설에도 신앙을 지키다가 모진 고문으로 고통을 겪다가 참수형으로 순교합니다.
성녀의 사후, 821년 교황 파스칼 1세가 성녀의 무덤을 열어보니 시신은 썩지 않고 살아 생전 그대로의 모습이었고, 이에 감복한 교황은 정중히 예식을 갖춰 그녀를 성녀로 인정하고 그녀에게 봉헌된 성 체칠리아 대성당의 지하묘소에 안치합니다. 전설적 일화지만 생명보다 강한 주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이 우리에게 깊은 감동과 더불어 우리의 왜소한 신앙생활에도 큰 자극과 충격이 되니 저절로 성전정화가 되는 느낌입니다.
어느날 갑작스런 신망애信望愛의 성장은 없습니다. 부단한 주님을 향한 신망애의 수행과 더불어 정화되고 튼튼해지는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형제들의 성전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 말씀이 우리에게는 영원한 화두가 됩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너희는 이곳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고 있다.”
세상을 성화해야할, 세상의 마지막 보루와 같은 청정해야 할 기도의 집인 성전이, 수도원이 속화되어 강도의 소굴이, 영적 조폭들이나 영적 무뢰한들, 영적 사기꾼들의 소굴이 된다면 이보다 큰 재앙은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주위의 위험에 아랑곳 없이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고 온 백성은 주님의 말씀을 듣느라고 곁을 떠나지 않음으로 주님과 혼연일치의 공동체를 이루니 적대자들도 어쩌지 못합니다.
말그대로 주님께서 교회공동체 형제들의 성전정화에 온힘을 다하는 모습입니다. 새삼 공동체의 성전정화에 날마다 봉헌되는 성체성사 은총의 영향이 얼마나 지대한 지 깨닫습니다. 오늘 묵시록의 요한이 작은 두루마리를 받아 삼킨 체험을 우리는 미사를 통해 합니다.
“이것을 받아 삼켜라. 이것이 네 배를 쓰리게 하겠지만 입에는 꿀같이 달 것이다.”
그대로 이뤄지는 사도 요한 개인의 성전정화요 이어 예언하라는 선교사명이 부여됩니다. 흡사 성찬전례중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먹어라.’ 또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라는 말마디를 연상하게 합니다. 주님의 성체와 성혈을 받아 모심으로 주님과 하나되는 미사은총보다 교회공동체의 성전정화에, 교회의 선교활동에 좋은 수행은 없을 것입니다.
“너희는 보고 맛들여라. 주님께서 얼마나 좋으신지! 행복하여라, 그분께 피신하는 사람!”(시편34,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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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는 이곳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루카 19,46ㄴ)
<예언자들이 되자!>
오늘 복음(루카19,45-48)은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聖殿)을 정화하십니다.
이는 '기도하는 집'인 성전이 '장사하는 집'으로, '강도의 소굴'로 변해버린 것에 대해 분노입니다.
그런데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이런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습니다.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면서 백성을 구하시려고 애쓰고 계시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오늘 독서(묵시10,8-11)에서 사도 요한은 "이것을 받아 삼켜라. 이것이 네 배를 쓰리게 하겠지만 입에는 꿀같이 달 것이다."(묵시10,9ㄴ) 라는 하늘에서 들려온 목소리를 듣고,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받아 삼킵니다. 그리고 이렇게 들려오는 소리를 듣습니다. "너는 많은 백성과 민족과 언어와 임금들의 관하여 다시 예언해야 한다."(묵시10,11)
깨어있는 마음의 상태에서 들려오는 하느님의 말씀은 꿀처럼 달지만, 받아 삼킨 말씀을 삶으로 살아야 하고, 또 말과 행동으로 너와 세상에 전해야 하기 때문에 쓴맛으로도 다가온다는 말씀입니다.
귀로 듣고 입으로 받아 삼킨 하느님의 말씀을 내가 먼저 살아야 하고, 또 세상에 전해야 하는 예언직의 소명이 지금 여기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졌습니다. 이는 수많은 예언자들이 받은 소명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를 죽기까지 세상에 전하신, 참예언자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길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그 소명에 충실해야 합니다.
오늘은 '음악인의 수호성인'이신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입니다. 성녀 체칠리아(세실리아)는 어린 나이에 동정을 서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배교의 강요를 물리치고 끝까지 동정을 간직한 채 순교하셨습니다.
우리도 끝까지 말과 행동으로 하느님을 세상에 드러내는 예언자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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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루카 19, 46)
새롭게
만드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미
만들어진 것을
우리가
소중히 다루며
잘 키우는
것입니다.
성전의 붕괴는
기도의
붕괴입니다.
우리의
정신과 영혼이
무너지면
성전도
무너져
내립니다.
이와 같이
기도는
삶의 방식을
하느님
중심으로
바꾸어 줍니다.
기도하는 삶이
곧 우리를
정화하는
자기정화의
삶입니다.
성전의 본질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며
기도하는
거룩한
곳입니다.
기도하는
모든
성전의
주인은 다르지
않습니다.
바로
한 분이신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공동체적 삶을
지향하십니다.
몸과 마음
너와 나는
이미
공동체적
삶을 살아갑니다.
기도하는 인격
기도하는 성전은
언제나 같은
동격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일상에서
평화와 위로
겸허한
생명력을
불어넣습니다.
건강한 성전은
건강한 기도로
자라납니다.
우리의 일상이
참된
기도가 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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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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