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 시인의 인문학 산책] <56> 탈 현대 사유의 거장, 장 보드리야르 | 세계일보 (segye.com)
[장석주 시인의 인문학 산책] <56> 탈 현대 사유의 거장, 장 보드리야르
파리10대학 사회학과 교수로 강의
사유의 내용 복잡하고 난해한 스타일
포스트모더니즘 문화이론가로도 유명
장 보드리야르(Jane Baudrillard·1929년∼2007년)는 프랑스 랭스에서 태어난 탈현대 사유의 거장으로 꼽는 철학자이자 문화이론가다. 좌파 이론가인 앙리 르페브르의 제자로 그의 지도 아래 박사논문을 쓰고, 낭테르대학에서 조교로 있을 때 1968년 5월혁명에 참가했다. 이후 낭테르대학, 즉 파리10대학에서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강의를 했다. 그의 사유는 복잡하고 내용과 스타일은 난해하다. 1986년부터는 파리9대학인 도팽대학의 사회경제조사연구·정보연구소 교수로 있었다.
40여년 동안 여러 책을 펴내며 탈현대의 사회이론가, 하이테크 사회이론가, 포스트모더니즘의 문화이론가로 명성을 떨친 보드리야르는 2007년 3월 6일 장티푸스로 죽었다. 그가 죽자 프랑스 일간지 ‘리베라시옹’은 “섹스, 언어, 기호, 상품, 전쟁 등 그 어떤 것도 이 사회학자의 역설적인 분석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보드리야르는 호기심 그 자체였다”라고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그가 생전에 펼친 사상의 뜻을 되새겼다.
‘아메리카’는 20세기 후반기에 아메리카 대륙을 횡단하며 보고 느낀 것을 적은 보드리야르의 미국문명 기행문이다. 보드리야르는 제 태생의 조건인 유럽인의 눈으로 초현대성으로 덧칠된 미국을 본다. 유럽인에게 유토피아는 꿈이고 이상이고 관념이다. 미국은 그것을 현실로 빚어낸 나라다. 미국이 현실로 빚어낸 유토피아는 유럽인들에게는 착잡한 역설이다.
“우리가 반문화, 의미의 전복, 이성의 파괴와 재현의 종언 등 급진적인 기호 아래 꿈꾸어온 모든 것, 결코 정말로 실현되어 본 적은 없지만 유럽에서 그토록 많은 이론적, 정치적, 미학적, 사회적 격변들을 풀어놓아 왔던 이 모든 반유토피아(anti-utopie), 이 모든 것들이 여기 아메리카에서는 가장 단순하고 가장 급진적인 방식으로 실현되었다.”
유토피아는 결코 물질화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관념으로 존재하는 그 무엇이고, 그것은 현실을 가늠하고 평가하는 당위적 표준이고, 현실에서 유통되는 제도와 규범들의 당위성을 재는 꿈으로서의 잣대다.
그 유토피아가 현실이 되면 그건 반유토피아가 되는 것이다. 꿈이 현실이 되면 그건 더 이상 꿈이 아닌 것이다. 미국의 순진함과 원시성은 바로 이 지점에서 폭발한다. 유럽에서는 ‘꿈’인 게 미국에서는 ‘현실’로 물질화하고 실재로 작동한다. 유럽인은 할 수 없었고, 그것이 ‘꿈’이기에 감히 하려고 시도하지도 않았던 것, 그것을 미국인들은 황당하게도 실재로 만들어버렸다.
그렇게 미국은 20세기를 자기들의 세기로 만들어버렸다. 사람들은 너도나도 미국을 동경하고, 성공을 꿈꾸는 사람들은 다 미국으로 몰려갔다. 그들 중 일부는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었다. 과연 미국은 진짜 낙원이었을까? 그 물음에 보드리야르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것은 낙원일 것이다. 샌타바버라는 낙원이다, 디즈니랜드는 낙원이다, 미합중국은 낙원이다. 낙원은 그냥 낙원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구슬프고, 단조롭고 피상적인. 그러나 이것은 낙원이다. 다른 것은 없다.”
보드리야르는 낙원은 그것이 꿈일 때 아름답지만 현실이 되었을 때 진부해진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물질화한 유토피아에는 의미나 정체성, 초월성이나 미학은 어디에도 없다. 건물들은 오로지 “거대한 현대적 수직성”만이 있다. 그것들은 초현대적이고 초기능적이지만 아름다움도 초월의 숭고함도 찾아볼 수 없다. 관념에 지나지 않는 것을 물질로 빚어 현실로 이끌어낸 ‘아메리카’라는 현상은 유럽인의 눈으로 보자면 불가사의할 수밖에 없다. 보드리야르는 디즈니랜드, 자동차 전용도로, 마천루, 속도, 모텔들, 광물성의 지표면들, 사막 등을 보고 난 뒤 이것들은 단지 “기호들의 영속적인 현실성”을 보여줄 뿐이라고 말한다.
미국은 과거도, 기원도, 창립의 진리도, 시간의 축적도 없이 그렇게 낙원으로 급조된다. 초현대성과 속도와 물량적 소비와 절대적 자유에서 그렇다. 미국이 무지막지하게 현실로 만들어버린 유토피아의 본질은 “풍요의, 권리의, 자유의, 사회계약의, 그리고 재현의 유토피아”다. 누구나 동경해 마지않는, 그 매혹적인 ‘유토피아’가 숨긴 진실은 밋밋함과 지루함이다. 캘리포니아는 미국을 대표하는 기표다. 퇴폐의 거울이고, 극사실적인 활력으로 넘치고, 그러나 진짜가 아닌 것. 그게 바로 캘리포니아다.
보드리야르는 캘리포니아에서 “시뮬라크르와 진위불명성의 세계적 장소”를 읽어내고, 그 의미를 “유럽의 절대적 반테제”에서 찾아낸다. “캘리포니아는 아무것도 발명하지 않았다. 그것은 모든 것을 유럽에서 가져와서는, 왜곡되고 의미를 박탈당하고 디즈니랜드의 금박으로 덧칠된 상태로 그것들을 다시 차려냈다.” 이게 아메리카다! “꿈도 아니고 실재도 아닌”, 할리우드의 영화 세트장 같은 모사물로서의 유토피아다.
보드리야르가 ‘극실재’라고 부른 것, 그것은 “처음부터 마치 실현된 것처럼 체험되어온 유토피아이기 때문에 극실재”이고, 엄밀하게 말하자면 모조된 유토피아에 지나지 않는다. 20세기에 미국은 “세계 권력의 독점적인 중심”으로 제국의 지위를 차지했다. 제국의 위세를 떨칠 때 미국 내부에서는 자신들이 제국이라는 사실을 완강하게 부정했다. 21세기로 접어들며 쇠락의 기운을 드러내고 “물렁물렁한 세계 질서, 물렁물렁한 세계적 상황”에서 허우적거리며 급격하게 제국의 힘과 광영(光榮)을 잃자, 미국 내부에서 오히려 제국이라는 주장이 나온다. 이 주장은 과거의 영광에 대한 향수, 과거로 회귀하고자 하는 욕망을 보여준다. ‘제국’과 ‘유토피아’는 이미 황혼이다. 보드리야르는 지구상의 유일한 ‘제국’이자 ‘유토피아’가 소실점을 향해 질주하는 장엄한 광경을 주시한다.
‘아메리카’의 국내 번역판은 두 가지가 있다. 처음 1994년 주은우가 번역한 것을 ‘문예마당’에서 펴낸다. 2009년 같은 번역자에 의해서 ‘산책자’에서 다시 펴내는데, 변화가 있다. 앞서의 것은 영역판을 옮긴 것이고, 뒤의 것은 프랑스어판을 옮긴 것이다. 책에 실은 사진도 다르고 문장이나 내용도 달라졌다. 그 ‘차이’가 느껴진다. 뒤의 것이 훨씬 의미도 선명하고 잘 읽힌다.
미국은 과거도, 기원도, 창립의 진리도, 시간의 축적도 없이 낙원으로 급조됐다. 그러나 낙원은 그것이 꿈일 때 아름답지만 현실이 되었을 때 진부해진다. 물질화한 유토피아에는 의미나 정체성, 초월성이나 미학은 어디에도 없다.
미국 텔레비전에서 웃음은 그리스 비극의 합창을 대체했다. 그것은 가차 없는 것이며, 뉴스·증권 거래 보도, 그리고 일기예보 외에는 웃음을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웃음은 그 강박증의 힘에 의해 레이건의 목소리나 베이루트에서의 해상 재난 뒤에서, 심지어 광고 뒤에서도 계속 들린다. 그것은 우주선의 복도를 배회하는 ‘에일리언(Alien)’의 괴물이다. 그것은 청교도적 문화의 빈정거리는 유쾌함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웃는 배려는 시청자들의 몫이다. 이곳에서는, 그들의 웃음은 볼거리에 통합되어 화면 위에 운반되어 있다. 웃고 있는 것은 화면이고, 즐기고 있는 것은 화면이다. 당신은 망연자실한 채 있을 뿐이다.”(‘아메리카’)
한국의 텔레비전에서 웃음은 문 닫는 자영업자들과 노동쟁의와 청년실업과 북한 주민이 처한 굶주림과 비참한 실존 상황, 그리고 ‘88만원 세대’가 표상하는 현실의 피눈물 나는 비극들을 대체한다. 텔레비전이라는 미디어는 웃음의 강박증에 들려 있는 게 분명하다. 웃고 있는 것은 텔레비전 화면이고, ‘1박2일’ 속에서 좌충우돌하는 ‘강호동’이다(그는 텔레비전 화면 속에서 잠시 사라졌지만, 얼마 있지 않으면 반드시 돌아올 것이다. 매체들이 그의 놀라운 대중 친화력과 상품성을 마냥 방치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텔레비전에서 웃음은 현실의 잔혹함을 가리는 가림막이고, 그 가림막 뒤에 숨어서 낄낄거리는 흉한 괴물이다. 나는 ‘강호동’의 웃음 앞에서 망연자실한 채 있을 뿐이다. 3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뒤 ‘아메리카’의 현실은 정확하게 ‘한국’의 현실로 바뀌었다. 지금 한국은 30년 전 미국의 판박이다. 이미지와 미디어가 지배하는 세상에 대해 남다른 통찰력을 보여준 보드리야르의 책들을 다시 정독해봐야겠다.
보드리야르는 2002년 9월에 우리나라를 방문했다. 그때 그는 대중강연을 통해서 이미지와 기호, 시뮬라크르들이 지배하는 세상에 대해 도덕적이고 철학적인 메시지를 전한다. 보드리야르의 책들이 국내에 번역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초다. 내가 처음 읽은 그의 책은 ‘소비의 사회’(문예출판사, 1991)다. 소비가 욕망을 생산하고, 욕망은 다시 소비를 낳는다. 어느덧 ‘거대 소비사회’로 진입한 우리 현실을 겹쳐보며 그 책을 읽었다. 아주 건조한 지적 의무감을 갖고 꾸역꾸역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 뒤로 ‘시뮬라시옹’(민음사, 1992), ‘기호의 정치경제학 비판’(문학과지성사, 1992), ‘섹스의 황도’(솔출판사, 1993), ‘생산의 거울’(백의, 1994), ‘유혹에 대하여’(백의, 1996), ‘사물의 체계’(백의, 1999), ‘예술의 음모’(백의, 2000) 등을 사서 여전히 건조한 의무감으로 읽었다.
보드리야르의 책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책은 시적 직관, 통찰의 의외성, 매혹적인 수사, 객관적 거리가 돋보이는 ‘아메리카’(산책자, 2009)다. 이 책은 보드리야르가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걸쳐 미국을 여행하고 쓴 여섯 개의 글, ‘소실점’ ‘뉴욕’ ‘별의 아메리카’ ‘실현된 유토피아’ ‘권력의 종언?’ ‘영원한 사막’으로 이루어져 있다. 롤랑 바르트가 일본을 여행하고 난 뒤 쓴 ‘기호의 제국’과 견줄 만큼 매력적인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