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곡으로 가는 길
석 달 전 봄방학 때였다. 이른 새벽 시내버스와 농어촌버스를 갈아 타 동읍 본포까지 갔다. 낙동강을 가로지른 본포교를 걸어서 건넜다. 강 언저리 물안개가 피어나고 저 멀리 강물이 휘감아 돌아간 끝 지점 동녘 산등선에서 떠오르는 아침 해가 인상적이었다. 그날 아침나절 학포에서 임해진을 거쳐 부곡까지 걸었다. 온천에 몸을 담그고 바깥으로 나와 점심을 들고 창원으로 복귀했다.
봄날이 가는 오월 하순이다. 다시 온천에 몸을 담그려고 길을 나섰다. 그새 마금산 온천에 두 차례 들렸지만 다시 부곡 온천을 찾아 작으나마 지역 경제 도움이 될까 싶어서였다. 내가 부곡으로 가는 길은 특이하다. 그때처럼 이른 아침 본포로 가서 본포교를 건넜다. 이제는 강변 따라 걷지 않고 내륙으로 난 지방도를 따라 걸었다. 샛강 청도천 건너편은 밀양으로 초동 반월 지구였다.
구산리를 지나다가 남휘 정선공주 묘역에 들렸다. 정선공주는 태종의 넷째 딸이니 세종대왕과는 남매간이다. 남휘는 의령 남씨 7세손으로 조부는 영의정을 지낸 남재이고 손자가 남이 장군이다. 본디 경기 안성과 용인에 흩어져 있던 남휘와 정선공주 묘역을 후손들이 40여 년 전 창녕 부곡으로 이장했다. 예전 묘역 석물도 옮겨와 온전히 보존 관리되었다. 묘역 앞은 탁 트인 들판이었다.
묘역에서 비봉리를 거쳐 수다리로 갔다. 인교는 행정구역으론 창녕 부곡이나 밀양 무안과 초동의 경계였다. 국도는 자동차들이 질주하고 있어 마을 안으로 난 길을 걸어 부곡을 향해 걸었다. 학포와 구산 앞들 농지는 비닐하우스 단지로 딸기를 재배하였다. 인교에서 수다리로 가는 논밭은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었다. 이모작지대 논에는 보리가 패어 고물이 차 누렇게 익어 가고 있었다.
못자리에는 무논에 낼 파릇한 모가 자랐다. 양파와 마늘이 심겨진 논밭들도 보였다. 지난해는 양파와 마늘 농사 작황이 좋지 않아 값이 껑충 뛰었더랬다. 작황이 좋은 올해는 수확량이 늘어 산지에서 값이 어떠할지 궁금했다. 다른 농산물도 그렇듯 마늘과 양파도 산지와 소비자 사이 가격차가 크다. 중간 상인들이 보이지 않은 손에 의해 가격을 담합하거나 저온 저장의 한계 때문이다.
수다리를 거쳐 부곡으로 가는 산마루로 올랐다. 자동찻길이 고개를 넘는 곳과 겹친 구간을 걸었다. 선형 개량 이전 옛길로 걸었더니 자동차 매연과 소음을 피할 수 있었다. 부곡에는 농협중앙회 교육원과 보건복지부 산하 정신병원이 있다. 찻길 옆 산기슭에 그 병원이 있었다. 주로 약물 중독 환자들이 치료를 받는 곳이었다. 입원 환자들이 누군지 모르지만 하루속히 나아지길 바랐다.
저만치 부곡 하와이와 온천 시설이 보였다. 더 멀리는 골프장이었다. 면소재지를 지나 온천 지구에 닿았다. 본포에서 걷기 시작한지 세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지난번은 봄이 오는 길목에 들렸고 이제는 봄이 가는 즈음 들렸다. 외양이 깨끗해 보이는 온천장에 들었다. 부곡 온천의 명성이 예전만큼 못 미쳤다. 주말임에도 온천을 즐기려고 외지에서 찾아온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뜨거운 온천수에 몸을 담갔다. 봄 한 철 산자락을 오르내리고 들녘 들길을 걸었더니 발바닥엔 굳은살이 붙었다. 챙겨간 문구용 가위로 불린 발바닥을 조심스레 깎아냈다. 내가 온천을 찾으면 신경 써서 관리하는 데가 발바닥이다. 나는 발바닥에 굳은살이 잘 붙는 체질에다 워낙 많이 걷다보니 그 정도가 심하다. 한 시간 남짓 대중탕에 머물면서 온천을 찾아간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온천장을 나와 어느 식당으로 들었다. 주말임에도 테이블엔 손님이 텅 비었다. 그만큼 온천장이 쇠락하고 경기가 침체했다는 증표였다. 나는 된장찌개 들면서 온천장에서 느낀 갈증은 막걸리를 시켜 해결했다. 본포에서 부곡까지 걸으면서 땀은 알맞게 흘렸고 온천수에서 몸을 정갈히 했다. 점심자리 곡차까지 들었으니 고관대작도 부럽지 않았다. 시외터미널에서 수산행 버스를 탔다. 16.0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