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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가톨릭 사랑방 원문보기 글쓴이: 孝在마리아
박상대 마르코 신부
성 십자가 현양 축일
복음 : 요한 3,13-17
오늘은 ‘큰’ 십자성호를 긋자.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 중에서 가장 의미 있는 상징은 무엇일까? 그것은 단연 십자가와 십자고상이다.
그래서 오늘은 전 세계의 가톨릭교회와 동방정교회와 성공회가 세상과 인간을 죄악으로부터 구원하시고 해방시키신
그리스도께서 매달려 돌아가신 십자가를 우러러 경축하는 날이다.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은 4세기경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었다.
정확히는 335년 9월 13일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예수님의 무덤 위에 성당을 지어 봉헌하고,
그 다음날인 14일에 그의 모친 헬레나 성녀가 발견한 것으로 전해지는 ‘성 십자가’를 무덤성당 안에 걸어 현양하여
신자들로 하여금 경배하도록 한 데서 오늘 축일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무덤성당은 곧 부활성당이기도 하다. 예수께서 무덤 안에 계시지 않고 부활하여 하늘에 오르셨기 때문이다.
나중에 페르시아의 침입으로 성 십자가는 약탈당하게 되는데, 628년 동로마제국의 황제 헤라클리우스가 이를 다시 찾아와
본래의 자리에 안치한 것을 기념하는 의미도 추가되었다.
교황 세르지우스 1세(687-701)에 이르러 이 축일은 전체 교회가 기념하는 축일로 자리 잡게 된다.
오늘 교회가 기념하는 성 십자가 현양 축일에 걸맞게 전례복음은 요한사가의 ‘십자가 신학’을 잘 보여준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니코데모와의 대화(요한 3,1-21) 중에서 발췌된 내용이다.
니코데모의 호감에서 출발한 예수님과의 대화는 어느새 세상을 향한 예수님의 자기계시적(自己啓示的) 가르침으로
반전되었다. 이는 곧 요한복음사가의 편집의도이기도 하다.
따라서 오늘 복음에 담겨있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니코데모와 행한 대화의 연속으로 보기는 어렵다.
즉, 예수의 역사적 발설(發說)이라는 보다는 요한복음사가의 독자적 성찰의 결과로 후에 편집된 것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의 아들 외에는 아무도 하늘에 올라간 일이 없으니(13절), 여기서 사람의 아들이란
그 누구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은 지고(至高)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와 사람이 되셨고, 영광 중에 다시 높이 들려 올려진 하느님의 아들이시다.
그분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높이 달리심으로써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을 보여주신 까닭에
세상은 물과 영으로 다시금 태어나, 멸망을 피하고 영원한 생명을 나누어 받게 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느님께 불순종의 대가로 불뱀에 물려 죽게 되었을 때,
모세가 기둥에 달아놓은 구리뱀을 본 사람은 치유를 받았다.(민수 21장)
여기서 구리뱀은 신약의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예수에 비유된다.
그러나 불뱀에게 물린 사람들을 실제로 치유한 것은 뱀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이다.
바로 그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이제 십자가에 높이 달려 있는 것이다.
십자가 자체가 세상에 구원과 생명을 주기보다는 십자가에 높이 달려 못 박혀 돌아가신 사람의 아들,
즉 하느님 스스로가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이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16절) 이 말씀은 모든 복음서와 성서 말씀의 요약이며, 결론이다.
요한은 자신의 서간에서 이 점을 더욱 분명히 하고 있다.(1요한 4,9-16)
세상의 구원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이루어졌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게 되는 동기(動機)는 바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구원의 방법(方法)으로 하느님은 ‘외아들을 보내주시고’, 외아들을 세상에 보낸 목적(目的)은
곧,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자기 외아들까지 보내어 세상을 구원하려는 동기(動機: motivation)이다.
그 동기가 바로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심이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경축하는 ‘성 십자가’ 위에서 성취된 것이다.
한때는 노예나 흉악범을 처단하던 형틀 십자가! 십자가는 이제 우리 구원의 상징이 되었다.
오늘은 왼손을 가슴에 얹고 오른손으로 이마에서 가슴으로 왼쪽 어께에서 오른쪽 어께로
‘큰’ 십자성호를 그으며 십자가에 묻혀있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감사와 찬미를 드리자. 아멘.
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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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한영 베드로 신부
성 십자가 현양 축일
복음 : 요한 3,13-17
창세기에서 뱀은 아담과 하와를 불순종의 죄로 유인한 동물로 묘사됩니다.
민수기에서 뱀은 이스라엘 백성을 물어 죽게 하는 동물로 등장합니다.
하느님을 불신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불 뱀은 죽음을 불러오지만, 모세가 만든 구리 뱀은 그들에게 생명을 찾아 줍니다.
그 구리 뱀은 기둥 위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에서 예표된 것처럼
십자가에 매달리시어 인류의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십자가 위에 매달려 돌아가셨으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찬미합니다.
우리는 입당송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리라.
주님은 우리 구원이요 생명이며 부활이시니, 우리는 그분을 통하여 구원과 자유를 얻었네.”
인간의 죄와 불순종으로 생긴 십자가의 예수님 상처가 하느님의 한없는 사랑을 드러내고,
인간을 새롭게 창조하는 근원이 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어리석음이 하느님의 지혜가 되고 있으며 그 고통은 하느님의 영광과 기쁨으로 변화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당하는 상처와 아픔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치유됩니다.
미켈란젤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림도 조각도 내 영혼의 갈망을 채워 주지 못합니다. 오직 십자가에서 팔을 벌리고 계신 하느님의 사랑만이 채워 줍니다.”
우리가 죽기까지 순종하신 그리스도를 따라나설 때, 그분께서 아버지께 드린 한없는 신뢰가 우리의 것이 될 때,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지며 우리 안에 십자가의 생명과 기쁨이 충만해집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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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양 요셉 신부
성 십자가 현양 축일
제 1독서 : 민수 21,4ㄴ-9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
복 음 : 요한 3,13-17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당신은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요즈음 젊은 의학도들이 몰리는 과(科)는 성형외과나 피부과 쪽이라고 합니다.
내과나 정형외과 같이 힘든 과목보다 몇 배나 인기가 높다는 것이지요.
피부과를 지망한 의사들에게 선택한 이유를 물어보았습니다.
"왜 하필 피부과를 택하셨습니까?" "첫째로 피부과 환자는 밤에 찾아오는 일이 없습니다. 귀찮지가 않지요.
둘째로 피부과 환자는 죽는 경우가 드뭅니다. 의료 사고가 있을 수가 없지요.
셋째로 피부과 환자는 완치되는 경우가 희박합니다. 안정된 수입을 보장받을 수가 있답니다."
이런 이유들로 피부과를 택했노라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누구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환경보다는 편하고 좋은 미래를 바라고 꿈꿉니다.
그래서 좀 편해 보이고 나아 보이는 곳을 택해서 인생의 방향을 잡습니다.
그런데 좀 편하고 나아 보인다고 해서 어려움이 없겠습니까?
편해 보인다고 선택하고 결정한 그곳에도 어려움은 도사리고 있게 마련이지요.
이것은 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천주교 신자가 되셨습니까?"하고 물으면 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 또는 "복을 받기 위해서",
"천국에 가기 위해서"라고 대답합니다.
모두가 좋은 것만을 바라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지요.
그런데 이것은 단지 우리의 바램일 뿐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와는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주 단호하게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루카9,23)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꿈꾸는 마음의 평화, 또 복을 받고 천국에 가는 일 따위는 말씀하시지 않고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만 말씀하고 계십니다. 십자가 없는 삶을 희망하며, 고통이 없는 삶을 위해서 예수님을 찾아 왔는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마태10,38)
예수님께서도 그 길을 가셨으니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것도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 구원을 위하여 지고 가신 거룩한 십자가를 경배하는 날, 성 십자가 현양 축일입니다.
십자가가 고통을 상징한다는 것은 누구나가 잘 아는 사실이지요. 그런 십자가를 드러내 놓고 찬양을 드리는 날입니다.
고통을 피하고 싶어서 찾아든 우리에게 교회는 이렇게 십자가를 강조하고 있지요.
십자가를 져야만이 부활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알고 믿음에도 불구하고 내 앞에 어려움이 가로놓이면 피하고만 싶은 것이 약한 우리의 마음이지요.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를 지셨으며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온 인류를 당신께 모아들이셨고,
또 당신을 따라 십자가를 지는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없는 축복과 평화, 구원을 바라지만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구원에 이를 수가 없을 뿐 아니라 마음의 평화도 하느님의 축복도 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 (갈라6,14)
바오로 사도의 고백처럼 십자가 안에는 우리의 구원과 생명과 부활이 있으며 십자가를 짐으로써 우리는
구원과 자유를 얻게 됩니다.
사람마다 져야하는 십자가의 모습은 다 다릅니다.
가난이 십자가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급하고 모난 성격으로 늘 어려움에 처하는 사람이 있고,
사고를 저지르는 자식이 십자가인 사람도 있습니다.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이렇게 하소연을 합니다. "왜 나에게만 이런 십자가가 있습니까?"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근시안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바로 눈앞의 자기 일 밖에 볼 줄 모르는 사람들이지요.
누구에게나 십자가는 있습니다. 가끔 저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신부님이 참 부럽습니다. 벌어 먹일 처자식이 있습니까? 회사에 나가 골머리를 썩힐 일이 있습니까?
세상에 무슨 걱정이 있으십니까? 얼마나 편하고 좋으시겠어요?"
그렇게 말하는 그 사람을 포함해서 영적인 아버지인 신부에게 딸린 신자(자녀)의 수는 평균 수천 명이 넘습니다.
바람잘 날이 없지요.
부자도 거지도 대통령도 성직자도 수도자도 십자가의 고통에서 예외인 사람은 없습니다.
거기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늘 제 1독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을 거역하다가 불 뱀에 물려 죽게 되었습니다.
살려달라고 달려드는 사람들을 하느님께서는 그냥 살려 주지 않으시지요.
"너는 불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민수21,8)
높이 달린 불 뱀을 쳐다보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만을 살려주십니다.
예수님 역시 광야에서 구리 뱀이 높이 들렸던 것처럼 십자가에 달리셔야 했습니다.
그렇게 높이 들리심으로써 이 세상을 구하시는 길이 십자가의 길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피할 수만 있었다면 어쩌면 예수님께서도 피해 가셨을지 모르지요.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도 지신 이 십자가를 어찌 우리가 피해갈 수 있겠습니까?
피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 무겁고 커지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는 처절한 십자가의 길을 다 걸으시고 이제 더는 내려갈 길이 없는 밑바닥에서
온갖 치욕을 다 겪으신 후에 부활을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냥 시늉으로만 지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이르기까지,
더 이상 치욕스러울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을 낮춤으로써 부활의 승리를 이루셨다는 것이지요.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절망의 끝까지 내려가야 부활은 시작됩니다.
죽음 같은 아픔이지요. 예수님의 부활은 그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바닥까지 내려감으로써 더 이상 희망이 없는 상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기서 새로운 희망이 솟아나는 것, 이것이 십자가의 신비이고 부활의 신비입니다.
오늘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은 삶의 십자가를 져야만이 우리가 원하는 마음의 평화와 축복,
또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는 그 십자가를 지겠다고, 또 거기에서 구원이 있음을 믿는다는 고백으로 삶의 중심에, 집안의 중심에, 성당에,
각 공동체가 모이는 회합실에, 그리고 심지어는 우리 몸의 중요한 부분에 십자가를 걸고 달며 그 의미를 되새기지요.
뿌옇게 먼지 앉아 있는 장식품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 기꺼이 십자가를 지겠다는 신앙 고백인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부딪혀오는 십자가를 피하려고 하지말고 나를 정화시키고 성숙시키는 은총의 십자가로 받아들이십시오.
부활의 영광이 여러분의 것이 될 것입니다.
서울대교구 이기양 요셉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에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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