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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좋은글 스크랩 73세 서울대 명예교수 막노동꾼되다
고종우(동일) 추천 0 조회 102 06.06.27 22:4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73세 서울대 명예교수 막노동꾼 되다

           - 동산식물원 원장 고광출 박사 -

 

        

 

 

인생의 절반 이상을 서울농대 원예학과 교수로 활동하다가 정년퇴임을 한 후 10여년 동안 막노동꾼으로 살아온 특이한 인물이 있어 화제가 되고 있다.

화제의 주인공은 고희가 넘어 올해 73세가 된 서울대 명예교수 고광출(高光出) 박사다. 그는 1995년, 충남 천안시 동면에 내려와 10여년간 은둔생활을 하면서 동네사람들과 똑 같이 어울려지내며 국내 제일의 한국식 정원인 동산식물원을  일구워 왔다.

 

필자가 그에 대한 소문을 듣고 동산식물원을 찾아갔을 때 그는 온 몸에 구슬같은 땀을 흘리며 도로정비 작업을 하고 있었다.

고광출 박사는 "오는 8월 22일 부터 서울에서 세계원예학회가 개최 됩니다. 여기에 참석하는 63개국 원예학회 회장단 120여명이 하루 시간을 내어 이곳을 방문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요즈음은 그를 준비하기 위하여 매우 바쁩니다."라며 자신이 살아 온 생애와 식물원을 설립하게된 배경등에 대하여 허심탄회하게 이야기 해 주었다.

 

 

 

그는 1934년 1월 12일, 충북 영동에서 땅 한 평 없는 가난한 농부의 여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는 왜정시대로서 그의 부모님은 일본사람이 소유하고 있는 농토를 맡아 소작농을 지었다. 부모님은 아들만 열을 낳았는데 그 당시는 매우 가난하고 아이들이 아파도 병원에 갈 입장이 되지 못하였으므로 그 중 일곱을 저나라에 보내고 셋만 살아 남았다고 한다.

 

소년 고광출은 남달리 총명하여 학교선생님들과 이웃사람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6.25가 발발하자 그는 군번없는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1년간 전선에 투입되었다. 수차례 죽을고비를 넘기고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와 농사일을 돕다가 영동농고 2학년에 편입하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서울고등농업학교(서울농대 전신) 졸업생인 교장선생이 서울농대 진학을 적극 권면하였다. 그리고 담임선생으로하여금 입학원서를 작성 제출케하고 군용차에 태워 입학시험을 치르도록 보내 주었다. 그는 입학시험을 보고난 후 제5공군 사령부에 들어가 하우스보이생활을 하기시작 했다. 쿠킹, 슈샴보이, 세탁, 아이롱 등 닥치는 대로 일했다.

 

 

 

합격통지서를 받았으나 기쁨도 잠시였다. 등록금을 낼 입장이 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백방으로 들고 뛰어 돈을 빌려가지고 가까스로 등록마감 시간을 맞출 수 있었다. 대학에 들어 간 후에는 학업상 하우스보이생활을 할 수 없어 미술을 공부하여 미군들에게 초상화를 그려주고 돈을 벌었다. 그래서 빌린 돈도 갚고 매학기 등록금을 해결하며 부모님께 돈을 부쳐드리기도 했다. 휴전이 되면서 유엔군이 철수하자 그는 극장 간판을 그리는 페인터가 되었다. 그러나 그 당시 극장은 대부분 깡패들이 주관하고 있었기 때문에 애써 그림을 그려주고도 돈을 받지 못할 때가 많앗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철판(그 당시는 일본 말로 가리방이라 하였음) 글씨를 써서 시험지를 등사해 주는 일이었다. 그는 이와 같이 만고풍상을 겪으며 대학원까지 마쳤다.

 

시련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에게 또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 날라 들었다. 군번 없는 학도병으로 죽을 고비를 몇번씩 겪으며 군대생활을 한 그에게 또 다시 입영통지서가 날아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군 복무를 한 사실을 증명해 줄만한 사람들이 모두 전사하고 없어 그는 어처구니 없게 1년 6개월동안 다시 군대생활을 해야했다.

 

 

 

군 복무를 마친 후 그는 농촌진흥청 연구사로 취직을 하여 과학영농기술을 익히게 되었다. 그러다가 1963년 충남대학교 전임강사로 초빙되어 5년간 근무하면서 조교수로 승진되었다. 그런 그에게 서울대학으로부터 모교로 돌아오라는 낭보가 날라들었다. 그러나 학교에서는 TO상 어쩔 수 없어 전임강사로 임명할 수 밖에 없다고 했다. 그래도 그는 모교에 돌아와 근무하게 되어 무척 기뻤다.

 

고광출 교수에게는 뼈속 깊히 사무친 한이 있었다. 땅 한 평 없이 소작을 하며 온갖 서러움을 당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자꾸만 떠 올랐다. 그래서 그는 땅에 대한 애착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결혼 한 후 아내와 굳게 약속을 했다. 봉급을 타면 무조건 30%는 저축을 하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4~5년동안 모은 돈으로 집을 짓기 위해 100평짜리 땅을 샀다. 그런데 그 일대가 개발지역으로 책정 되면서 땅 값이 몇 배로 뛰었다. 두 세 차례 그런 과정을 거쳐 증식한 돈으로 그는 장차 농장을 설립할  땅을 물색하였다. 그래서 공동묘지 앞 땅 4천 평을 싼 값으로 매입하였다. 그런데 그 곳이 20여년동안 세월이 흐르는 사이에 또 개발지역으로 책정되어 땅 값이 천정부지로 치솟는 바람에 그는 생각치 않게 40억을 거머쥐는 거부가 되었다.

 

 

 

정년이 되어 대학교수 생활을 마치고 퇴직하면서 그는 가난한 학생들에게 꿈을 심어주기 위해 장학재단을 설립할까 망설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원래의 뜻대로 농장을 설립하기로 마음을 굳쳤다. 그래서 그 돈으로 지금의 동산식물원부지 8만여평을 구입하게 되었다.

 

고광출 박사는 대학에 재직하는 동안 전국원예인협회 회장을 지냈다. 동시에 한국을 대표하여 국제원예학회 이사를 역임하였다. 그는 수차례 국제회의에 참석하면서 견문을 크게 높혔다. 한 번은 미국에 가서 우연한 기회에 매시대학교수가 웰링턴식물원을 만들어 사회에 기증한 것을 보았다. 그 순간 그의 뇌리 속에서는 전광석과 같은 작용이 일어났다. "그렇다. 내가 시대적 조류에 따라 부자가 되었으나 그건 순전히 내 노력으로 이룩한 것이 아니지 않은가! 이건 단지 하늘이 내게 내려주신 복일 뿐이다. 나도 한국적인 특색을 지닌 정원 하나를 잘 꾸며 세계만방에 널리 알리고 사회에 완전히 환원을 하고 가자." 그는 바로 그 시간에 이와 같은 중대한 결심을 하였던 것이다. 

 

사실 고광출교수의 이와같은 결심은 이미 그 전부터 가슴 속에 꿈틀거리고 있었다. 다만 웰링턴식물원을 보고 그 결단의 시기를 앞당긴 것 뿐이었다. 그는 평소에도 늘 다음과 같은 의견을 일관되게 주장해 왔다. 

 

 

 

 

"일본 사람들은 분재를 통해 볼 수 있는 것처럼 모든 것을 인공적으로 축소해 놓고 그 속에 앉아 마치 천하를 다 얻은 것 처럼 좋아 합니다. 인공적인 것을 좋아하기는 중국사람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들은 넓은 땅을 확보하여 그 둘레에 높은 담을 쳐 놓고 그 안에다 커다란 연못도 파고 큰 괴석도 옮겨다 놓습니다. 그리고는 그 속에서 자신의 파워를 과시하며 주색과 향락을 즐겨왔습니다. 여기에 비해 우리나라 정원문화는 전혀 다릅니다. 자연을 전혀 훼손하지 않고 오히려 그 자연을 최대로 활용하고 부대적으로 인공적인 것을 약간 가미하여 정원을 꾸며 왔어요. 우리 조상님들은 요즈음 흔히 말하는 웰빙시대 친환경, 친자연적인 가든문화를 아주 오랜 옛날부터 실현해 오신 것입니다. 그게 얼마나 자랑스럽습니까?  그런데 세계 여러나라를 돌아 보면 일본과 중국의 가든 문화는 세계속에 크게 부각이 되어 있는데 한국의 수준 높은 가든 문화는 전혀 알려지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나는 그것이 무척 안타깝습니다."

 

 

 

 

고박사는 동산식물원을 구상하면서 전국의 유명한 고택과 서원 등을 모두 돌아 보았다. 예산의 추사고택, 논산의 윤씨문중 고택, 안동의 도산서원, 청풍관아, 담양 양선비 소새원, 해남의 고산 윤선도 고택, 강능의 오죽헌, 수원 민속촌의 고택 등 안가본 데가 없다. 그래서 얻은 결론은 한국식 정원에는 1. 한옥, 2. 송죽, 3. 암석, 4. 배산인수(背山引水),  5. 학(鶴) 등의 공통점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걸 중심으로 한국가든 문화의 철학적 근거를 정립하였다.

 

평생을 교단에서만 살아 온 고광출박사가 시골로 이사를 와서 제일먼저 시작한 일은 전직이나 명예 등에 대한 관념을 훨훨 벗어버리고 동네사람들과 어울려 두터운 친분관계를 맺는 것이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인간관계를 중시하며 살아 온 사람이다.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큰 길에서 안동네까지 1.5km가 넘는 거리를 걸어다니는 노인이나 짐을 많이 가진 아녀자를 보면 차를 세우고 집에까지 모셔다 주었다. 동네에 초상이 나면 문상을 하는 것은 물론 누가 아파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이 들리면 밤 늦게라도 꼭 문병을 다녀오곤 했다. 그래서 동네사람들은 모두 그를 존경하고 좋아하며 매사에 우호적이다.

 

 

 

 

그는 매일 아침 4시에 기상하여 한시간동안 산책을 하며 그날 할 일을 구상한다. 그리고는 다섯시 부터 작업을 시작한다. 동산식물원에는 정식 직원이 단 한사람도 없다. 그때 그때 필요에 따라 인부를 사서 일을 한다. 식물원을 꾸민다는 것이 간단한 일이 아니다. 자금이 보통 소요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운 좋게 부지를 확보했지만 개발비가를 충분히 확보해 놓고 시작한 일이 아니다 보니 매사를 절약하고 웬만한건 직접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식물원에서는 매일 평균 13명의 인부가 일을 한다. 고박사는 뒷짐을 찌고 이들에게 일을 시키는 감독자가 아니라 젊은 일꾼들 보다도 어려운 일을 더 앞장서서 하는 편이다. 식사 시간이면 인부들과 같이 자기 집 식탁에서 함께 둘러 앉아 식사를 한다. 그래서 모두 한 가족과 같다. 세세하게 일일이 지시하지 않아도 각자 자기가 할 일을 알아서 한다.

 

고박사와 처음으로 먼나 악수를 해 본 사람은 그의 손이 평생 농사를 지어 온 농부의 손 보다도 훨씬 더 못이 많이 박이고 거칠어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는 혼자서 설계하고 집을짓고 정원을 꾸미다 보니 만능 재주꾼이 되더라며 빙그레 웃는다. 그는 산소용접과 전기용접을 할줄 안다. 트랙터, 경운기, 포크레인, 예초기 등 모든 장비를 다룰줄 안다. 외국에 가면 국내에서 쉽게 구할 수 없는 전동공구부터 사오는게 그의 일이다.

 

 

 

 

동산식물원의 꽃길을 따라 걷다 보면 로면이 일정하게 매끄럽지 않고 여기저기에 연결된 부분을 발견하게 된다. 자본이 충분치 못하다 보니 일시에 포장을 하지 못하고 밤늦게 공사장에서 일하던 레미콘차가 당일 일하다 남은 시멘트를 갖다 부어주면 그때그때 받아 깔았기 때문이다.

인부들도 다 돌아가고 없는 늦은 밤에 레미콘차가 반죽한 시멘트를 부려 놓고가면 고박사는 혼자 밤을 지새우다시피하며 정리작업을 한다. 그럴 때는 시멘트가 오래 방치되면 곧 응고되기 때문에 신들린 사람처럼 바쁘게 작업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 생활을 오래하다 보니 그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원두막을 짓다 지붕에서 추락하여 늑골 두 개가 부러지기도 하고, 화단의 레벨을 맞추기 위해 톱을 사용하다가 실수를 하여 왼쪽 엄지 손가락이 절단되기도 했다. 한번은 비가 온 뒤에 담프트럭을 몰고 성토한 곳을 지나다가 차가 전복되는 바람에 죽을번했으나 다행히 커다란 소나무 덕분에 가까스로 큰 화를 면할 수 있었다.

 

현대인이 가장 추구하는 정원은 산수정원(山水庭園)과 별서정원(別墅庭園)이다. 고박사는 이곳의 빼어난 지형과 자연을 이용하여 이 둘을 조화시킨 그야말로 한폭의 그림같은 교과서적 공원을 꾸미고 있는 것이다.

 

 

 

동산식물원 중심에 있는 전통식 한옥, 동산재(東山齋)는 조선왕조 중기의 사대부집을 참고하여 지은 것으로 정남향이며 호연지기 기상을 자랑하는 낙낙장송을 배경으로 세워져 있다. 게다가 전통문양의 벽돌로 울타리를 두르고 주위에 화려한 꽃밭을 만들어 놓았다. 옛날 선비들이 살던 집들은 대개 매화나 난초 대나무등을 몇그루 심어 놓긴 했으나 화단을 중시하지 않아 좀 어둡고 무거운 감이 없지 않았다. 고박사는 한국정원이 세계적 가든으로 확실하게 자리 매김을 하기 위해서는 전통적미와 현대적인 화훼의 미를 조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동산 식물원의 화원은 한국적 소재의 전통문양을 이용하여 아름답게 조성했다. 갖가지 자생하는 야생초에 부족한 부분은 수입종을 심어 조화를 시켰다. 동산 허리에는 우학정(友鶴亭)이란 정자가 있다. 이곳에 오르면 마치 학을타고 창공을 나르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그 일대의 지형이 마치 커다란 한마리의 학과 같은데 우학정은 그 학의 등에 해당하는 지역에 세워 놓았다.

 

 

 

 

동산의 명물 가운데 하나는 종각이다. 이곳의 동종은 문화재적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인간문화재 112호 원광식 선생이 장인정신을 발휘하여 만든 동종은 3억원의 제작비를 들여  6개월에 걸쳐 제작한 것이다. 이 종은 자체내에서 공명하여 오랫동안 길게 파장되는 소리가 가히 환상적이다.

 

동산에는 고려청자 모양의 주병탑과 매병탑이 있다. 고박사가 직접 설계하고 석공장에서 버린 돌조각을 실어다 일일이 다듬어서 꼬박 2년간에 걸쳐 쌓았다는 이 탑들은 단순한 석탑이 아닌 정성탑이다. 여기에는 또 첨성대 모양의 돌탑, 해시계, 용궁정, 별주부전을 연상시키는 토끼와 거북이, 복돼지상, 12지장상 등 여러가지 조형물이 이곳 저곳에 설치되어 있다. 

 

게다가 전통 한옥인 동산재(東山齋)에는 홈시어터 시스템을 갖춘 시청각 교육실이 마련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국내외 관광객들에게 세계 각국의 정원과 비교하며 한국의 전통가든이 지니고 있는 특징 및 우수성에 대한 강의를 할 예정이다. 그러므로 동산 식물원은 단순히 꽃구경을 하고 가는 관광식물원이 아니라 한국의 얼을 느끼고 직접 체험하는 하나의 교육장인 셈이다.

 

 

 

 

고광출박사는 동산식물원의 미래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난 이 동산식물원을 절대로 자식들에게 물려주지 않을 것입니다. 한국적 전통가든의 표본을 세우고 그를 세계 만방에 널리 알리고자 하는 나의 설립취지를 잘 이해하는 기관이나 사회단체, 아니면 국가에 헌납할 예정 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애들에게도 여러번 공언하였습니다. 한 번은 모 텔레비젼방송국의 대담프로에 나가 이런 뜻을 밝혔더니 여기저기에서 전화통이 불이날 정도로 전화가 왔습니다. 그들은 이곳에 "기도원을 짓겠다". "절간을 짓겠다". "실버타운을 꾸미겠다". "소년소녀 가장을 위한 복지센터를 세우겠다"라고 말했습니다. 단 한사람도 내 뜻에 부합하는 정신을 가진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어요. 심지어 어떤사람은 지금까지 당신이 쏟아 부은 돈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드릴테니 팔라고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내뜻은 조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장시간 다소곳이 옆에 앉아 한마디 말도 않고 듣기만 하던 부인 성갑늠(68)여사가 입을 열었다.

 

"이 양반의 고집은 아무도 꺾지 못합니다. 아주 말도 못해요. 보통 교수들은 연구비를 타면 이런저런 명목으로 다 쓰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집 양반은 서울대학에서 나올 때 연구비를 철저히 정산하여 단돈 10원 한장도 남기지 않고 고스란히 받치고 나온 그런 사람이예요. 남편은 여기와서 일하고 나는 서울에서 살고 있는데 하루는 전화가 왔어요.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를 팔아가지고 오면 이곳에다 그림같이 아름다운 별장같은 집을 지어 준대요. 그래서 3억을 받고 팔아기지고 왔더니 글쎄 그 돈을 몽땅 종(鐘)제작비로 써버리는거예요. 내가 속은거죠. 한마디로 내가 남편한테 사기를 당한 겁니다." 성여사는 그렇게 이야기 하면서도 남편을 바라보며 껄껄 웃었다. 고박사도 그런 아내를 바라 보며 빙그레 웃었다. 성여사의 이야기는 계속됐다.

 

" 서울에 살면 친구도 많고 좀 좋습니까? 요즈음은 식물원이 개원을 하여 사람들이 찾아 오니 좀 났지만 처음 몇 년은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 얼마나 외로웠는지 모른 답니다. 솔직이 말해서 나이가 70이 넘었으면 인생을 향수하며 즐겁게 살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국내외 여기저기 여행도 하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그런데 이 양반은 도무지 일 밖에 몰라요. 낮에 피땀흘리며 뼈빠지게 일하고 저녁에 끙끙 신음소리를 내며 설잠을 주무시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아파요. 그러나 이제는 이 모두가 팔자려니 하고 산답니다."

 

 

 

 

자고로 역사적인 인물은 그 배후에 현모양처의 내조가 있기 마련인데 고박사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다. 고박사 내외는 슬하에 아들만 셋을 두었는데 장남 기완씨는 경희대 출신의 한의학박사로 한의원 원장을 맡고 있고, 차남 기성씨는 유전공학박사로서 미국에서 돌아와 현재 원광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3남 기남씨는 환경생물학 박사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독일의 한스연구소에서 줄기세표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란다.

 

고박사는 "사실 칠십세살이면 작은 나이가 아니죠. 내 친구들 가운데는 이미 세상을 뜬 사람도 많고, 병원신세를 지고 있는 사람도 많아요. 그런데 내가 이 나이에 밤낮으로 쉬지않고 일을 하면서도 큰 병이 없이 이렇게 즐겁게 살고 있으니 이보다 더 큰 복이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그러나 내가 앞으로 일을 하면 얼마나 더 하겠어요? 해는 저물고, 갈길은 멀고, 마음이 급합니다. 난 나머지 여생을 오로지 한국정원을 세계화 하는데 정력을 쏟을 것입니다. 지극히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 될 수 있다고 나는 확신하고 있으니까요."

 

고광출 박사와 장시간 대화를 나누고 동산식물원을 나서는 내 발걸음은 한 없이 가벼웠다. 이곳은 장차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정신적으로 큰 깨달음을 주는 전설적인 공원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내] 동산식물원에 대한 자료는 이 블로그 <아름다운 풍경>편에서 더 찾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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