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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조커, 그 기원과 혼돈의 정체
영화 조커(Joker, 2019)
서울공대지 2019 Winter No.115
이수향 영화평론가 서울대 국문과 강사
2013년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신인평론상 수상.
공저로 『1990년대 문화 키워드20』, 『영화광의 탄생』, 『영화와 관계』 등.
1. DC코믹스의 외전
“Check out this, joker.”
관객수와 세계관의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점점 규모를 불려가는 MCU(마블코믹스 원안 계열인 마블 히어로들을 중심으로 한 Marvel Cinematic Universe)가 <어벤져스> 시리즈로 지난 세기의 <스타워즈>의 파괴력을 넘는 충성도 높은 관객층을 만들어내고 있을 때, <저스티스 리그>(Justice League, 2017)는 DC코믹스의 영웅들을 모아놓고도 별로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다만, <아쿠아맨>(2018)이나 <원더우먼>(2017) 등의 개별 작품에서 솔로 히어로 무비로의 가능성이 긍정적으로 전망되었다. 이에 DC 코믹스는 자신들의 캐릭터 중 크리스토퍼 놀란 이후 흥행과 비평의 양 면에서 가장 고평 받았던 배트맨시리즈물, 그 중 가장 흥한 빌런 캐릭터인 ‘조커’를 영화화하기로 결정한다. 그렇지만 폭음과 약물에 정신을 잃은 남자들을 주인공으로 한 성인물 코미디인 <행오버>1,2,3 시리즈로 유명한 토드 필립스감독이 <조커>의 연출을 맡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의구심이 생긴 것도 사실이었다. 근미래적 가상의 범죄 도시 고담에서 고뇌하는 히어로인 배트맨과 짝패처럼 기능하는 조커는 그 자체로 매력적인 캐릭터이지만, DC의 빌런들 중 가장 악의적이고 종잡을 수 없으며 악당이 되어버린 전사(前史)마저도 불확실하다는 점에서 제대로 그려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토드필립스 감독과 제작사 양측은 영화 <조커>가 기존의 배트맨시리즈물과 연결되는 세계관을 공유하는 것은 아니고, 스핀오프(spin-off)로서 캐릭터와 설정의 몇 가지 유사함이 있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놀란 감독이 마스터피스 <다크 나이트 The Dark Knight>(2008)를 통해 기존의 스타일리시한 배트맨 영화의 오락적 카타르시스 대신 히어로의 내면과 그를 둘러싼 압박감에 집중했을 때 원안의 특성인 어둡고 진지한 분위기는 빛을 발했고 DC코믹스 중 가장 성공적인 작품이라는 평을 얻었다. 그러므로 ‘아서 플렉’이라는 한 남자가 ‘조커’로 탄생하는 과정을 다룬 <조커>는 그 세계관의 다크한 에너지를 전유해 낸다는 점에서 명백히 놀란이 만든 정전(cannon)격인 전작들의 성취에 빚지고 있는 외전(supplementary story)이라고 볼 수 있다.
<다크나이트>에서 시민을 위한 선량한 영웅 배트맨과 사악한 악당인 조커가 대결하는 것은 최신 무기들의 각축장을 통한 액션의 물량공세만이 아니다. 인간의 선의가 과연 그 자신에게 갑작스레 닥친 불행을 이기고도 타인을 위해 선취될 수 있는가라는 다소 심오한 철학적 질문의 대결인 것이다. 이 대결은 타락한 도시를 구해내려고 용감하게 나섰던 검사 하비덴트가 연인을 잃고 화상으로 ‘투페이스’가 되어 고통과 분노에 휩싸이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진행된다. 조커는 “고담의 백기사를 우리와 같은 수준으로 끌어내렸지.”라는 대사를 통해 결국 영웅과 악당을 넘어서서 고담의 일반 시민이 아닌 도시의 어두움에 머무르는 기이한 존재들로서 자신과 배트맨, 투페이스를 규정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히어로의 존재론적 고찰 대신 영화 <조커>를 지배하는 것은 열패감으로 가득한 분노의 정서라고 할 수 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1981년의 도시 고담에 사는 아서 플렉(호아킨 피닉스)은 코미디언 지망생으로 어릿광대 분장을 하고 판촉이나 간단한 공연을 하면서 생계를 어렵게 유지해나간다. 그는 운신이 불편한 노모(프란시스 콘로이)와 함께 살며 즐겨보는 TV프로그램 ‘머레이쇼’의 머레이(로버트 드 니로) 같은 유명 코미디언이 되기를 꿈꾼다. 그는 자기애적 망상장애라는 정신과적 병력과 더불어 웃음을 조절하지 못하는 신경성 장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상황에 맞지 않는 웃음을 터트리곤 한다. 여러모로 사회에서 최하층인 그는 종종 사람들에게 하대를 받는데 악의적인 거리의 아이들에게 얻어맞거나 직장 동료에게 누명을 뒤집어쓰기도 한다. 어느 날 전철에서 3명의 무뢰한들에게 희롱 받는 여성을 구해주다가 우발적으로 그들을 살해하게 되는데, 처음엔 자기 자신도 너무 놀라 도망을 쳤지만 곧 알 수 없는 희열과 해방감을 맛보게 된다. 이후 자신의 출생과 성장을 둘러싼 내막을 알게 된 그는 큰 충격을 받고 세상의 질서들에 반감을 품게 된다. 그는 결국 자신을 무시하고 조롱했던 사람들에 대한 극심한 분노로 그들을 전부 응징하기로 결심하며 더 이상 아서 플렉이 아니라 광대 분장을 한 조커로 재탄생한다. 그리고 고담시에는 광대 분장을 한 사람들에 의해 무질서한 소요 사태가 벌어진다. 시위대 중 몇몇에 의해 유력인사인 토마스 웨인 부부가 피살되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 이들의 어린 아들인 브루스 웨인의 존재는 훗날 또 다른 다크히어로를 예비하게 된다. 시위대에 의해 영웅처럼 고취되었던 조커는 에필로그에서 정신병동에 갇혀 있는 상태인데, 상담이 끝난 후 피로 물든 발자국으로 걸음으로써 또 살인을 했음을 보여주고 곧 병원 내에서 간호사들에게 쫓기면서 슬랩스틱 코미디처럼 웃음을 자아내며 마무리된다.
전체적으로 배트맨 시리즈물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고 밝힌 것 치고는 브루스 웨인의 부모가 죽은 경위, 아캄정신병원 등 코믹스에서 조커와 관련되었던 지명이나 이전 영화들의 중요 대사, 인물의 특정행동 같은 것들이 꽤 등장해서 시리즈물과의 연결지점들이 눈에 띤다. 물론 코믹스에 등장했던 조커의 부모나 아내에 관한 내용이 다르고, 얼굴이 일그러진 이유에 대해 화학약품에 빠진 것이라는-코믹스에서 잭 니콜슨이 분한 조커까지의-설정과는 차이가 있으며, 무엇보다 ‘조커 베놈’이라는 웃음가스 무기가 등장하지 않다는 점이 다르다.
내용적으로는 전작인 <다크 나이트>의 조커(히스 레저)가 “Why so serious?”란 질문과 함께 단순히 돈에 눈이 먼 악당이 아닌, 배트맨을 자극시키는 목적 없는 악행 그 자체를 즐기는 광기어린 모습으로 공포를 자아냈다면, <조커>의 아서는 “내 죽음이 내 삶보다 ‘가치’있기를. (I hope my death makes more cents than my life.)”1)라는 말을 반복하면서 죽음 이후에도 자신의 존재가 회자되기를 원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전편의 조커들이 ‘광대’라는 포인트를 분장이나 행동의 차원에서만 사용한 것과 달리 아서에게 ‘광대’는 자신이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은 코미디언으로서의 꿈을 상징한다. 그런 의미에서 아서는 머레이가 조롱을 섞어 관객에게 “조커(조크를 하는 사람)를 확인해보시죠! Check out this, joker!”라는 말로 그를 소개한 데서 착안,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이름을 찾아낸다.
조커라는 캐릭터의 이러한 성격적 차별점은 실상 두 영화 전체의 주제의식을 아우르는 중요한 분기점이 된다. 이를 드러내는 에피소드가 ‘자경단(自警團, Vigilante)’과 관련된 두 영화의 온도차이 이다.
전작 <다크 나이트>에서도 배트맨 코스튬을 입고 영웅처럼 행동하겠다는 ‘배트맨 자경단(Citizen for Batman)’ 무리들이 나오는데, 배트맨은 이들을 처단해 버린다. 즉, 고담의 공권력이 가진 취약성에도 불구하고, 이에 반하는 행위를 통해 자신을 흉내 내며 영웅행세를 하려는 이들을 부정적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전작에서는 공적 질서와 담론에 대한 일종의 윤리적 선지키기를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조커>에서는 신문에 실린 “광대 자경단? (Clown Vigilante?)”이라는 기사 제목을 보고 망상 속 여자친구는 ‘고담시의 영웅’이라고 그에게 말하여 추켜세운다. 또한 반정부 시위를 주도
하는 사람들이 광대 가면을 쓰면서 조커가 시위대의 상징이 되는 장면들은 무너져 내리는 공권력에 대항하는 사적 질서의 필요성을 긍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타락한 공적 질서에 반하여 스스로 자신들을 구한다는 이 이 영화적 설정이 영화의 종반부를 지배하는 부분을 무감하게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결국 <조커>를 둘러싼 비판적인 독해의 많은 지점들은 바로 이 부분의 불편함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2. 사적 복수로서의 원한감정
“Happy? Hm, I haven’t been happy one day out of my entire fucking life.”
영화 <조커> 둘러싼 찬반양론은 선공개영상 이후부터 미국 내에서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고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타낸 이후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미국 내에서는 ‘R등급(청소년은 부모동반 관람 등급)’으로 모방범죄나 총기 사고 등에 대한 우려가 높다는 점 때문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개봉과 더불어 폭력성이나 잔인한 표현 등에서 관람연령등급(15세 관람가)이 지나치게 낮게 나온 것이 아니냐는 비판과 보고 나면 우울한 기분이 감염되는 ‘위험한(?)’영화라는 감상평들이 올라오고 급기야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82년생 김지영>과 대비시켜 온라인을 중심으로 일부 급진적인 정치성향 계층의 옹호/반박 양상까지 벌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그 위험함 혹은 불온함의 정체는 무엇인가. 우선, <조커>는 배트맨시리즈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악의를 가진 조커의 광기가 타고난 것이 아니라 주변에 의해서 그렇게 만들어졌다는 내용을 핵심으로 한다.
아캄정신병원의 서류 관리직원은 여기에 온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냐는 아서의 질문에 일부는 그냥 미쳐서 자신과 사회에 악이 되는 존재이고 일부는 길을 잃어버려서 그렇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기존의 영화들에서 조커의 광기를 전자로 보았다면, 이 영화에서는 후자 즉, 불행하게 길을 잃어버린 사람들 중의 하나로 설정을 하면서 그의 악의에 대한 면피가 가능하게 하는 변명거리를 만들어준 셈인 것이다.
그러니까 아서의 통제할 수 없는 신경증적인 웃음의 근원에는 학대와 방치를 일삼던 모친의 정신병적 상태가 있었고, 자신의 선의를 도리어 괴롭힘과 속임수로 되갚고 조롱과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에 있었던 것이다. 그가 유일하게 가족이라고 생각하던 모친은 늘 그에게 웃으라며 ‘해피’라는 애칭으로 불렀지만 그 기만성을 알게 된 그는 “해피? 흠, 난 엿 같은 삶 내내 단 하루도 행복했던 적이 없었어. (Happy? Hm, I haven’t been happy one day out of my entire fucking life.)”라고 말하게 된다.
발작적인 웃음을 터트리지만 단 한번도 진짜로 즐거워서 웃은 적이 없었다는 생각은 아서에게 자신의 불행을 벌거벗은 것처럼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만든다. 불행이 불가항력적인 것이 아니었다는 인식에 이르자 그에게는 비로소 자신과 반대편에 있는 타자-사회에서 유복한 자리에 올라가 있는 사람들이 보이게 된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그가 아서였던 시절 가장 선망하고 간절한 인정을 바랐던 두 대상-사회적 인정의 아버지인 유명 코미디언 머레이와 실제 자신의 생물학적 아버지일지도 모르는 토마스 웨인-에게 받은 냉대와 조소가 그를 더욱 고통스럽게 한다. 세상이 자신에게만 친절하지 않다는 생각은 그가 머레이에게 했듯 “왜 다들 이렇게 무례하죠?”라는 질문을 이끌어내며 그를 분노에 사로잡히게 만든다. 이는 니체적 의미의 ‘원한감정 (Ressentiment)’2)이라고 할 수 있는데 주인의 도덕을 행하는 강자에게 노예로서의 약자가 느끼는 울분과 복수심의 감정을 뜻하는 것이다. 노예가 된 약자는 이러한 원한감정으로 타자인 강자를 부정하고 비난하며 자신의 선함을 강조하여 선/악의 도덕적 대비라는 인식론적 규정을 만들어낸다. 타인에 대한 강력한 적대감과 반감은 거대한 부정적인 에너지의 총합으로서 그를 완전히 사로잡는 것이다. 문제는 한 개인이 겪은 불행한 개인사가 그의 악의에 대한 알리바이가 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서가 사는 고담시에서는 환경미화원들의 파업으로 거리에는 쓰레기가 넘쳐나고 슈퍼쥐가 돌아다니며 시민들을 괴롭히지만 부유한 계층은 이에 아랑곳 않으며 그들만의 안온한 생활을 즐기고 있다. 부와 권력을 가진 이들의 무책임한 외면에 분노한 시민들은 시위를 시작하는데 이들은 3명의 금융회사 직원들을 죽인 광대가면을 쓴 남자에 크게 고무된바 광대 가면은 시위의 상징이 된다. 이러한 영화의 설정은 시위대를 그려내는 방식에 있어 애매모호성을 보여준다는 점에 있어서 문제적이다. 왜냐하면 애초에 시민들은 공적 질서의 유지와 복지의 적법한 적용을 바란 것이기 때문이다. 아서의 경우에 있어서도 기계적인 상담이기는 하지만 공적 복지의 수혜로서 정신과의 약을 받을 수 있었던 시기에는 발현되지 않았던 망상장애가 심해진 것이 정부의 지원금이 끊긴 탓도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불안한 치안과 극심한 빈부 격차의 해소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시위는 이들이 돌연 광대의 가면이라는 상징을 입자마자 약탈과 방화, 폭력 등의 행위로 격화되는 것으로 그려진다. 즉, 정치적 주체로서의 시민을 소거해버리고 남은 자리에 결국 미치광이를 흉내 내어 따라 움직이는 폭동무리 정도로 놓이게 되는 것이다. 이는 플라톤 시대 이래 끊임없이 우려되어왔던 폭민에 의한 ‘중우정치(衆愚政治)’로서의 우려를 재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조커>에서는 아서의 불행에 동질감을 느끼는 뭇사람들이 그를 추종하는 설정을 통해 그 부정적인 에너지에 영향을 받아 카니발적 혼돈 자체를 수긍해버린다는 점이 문제적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더욱 문제적인 부분은 조커에게 시위대는 자신의 인정욕망으로 채워주는 대상일 뿐으로 그들의 시위 내용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점이다. 조커가 형사들을 피해 열차 안에 들어갔을 때 광대 가면을 쓴 시위대들로 인해 그의 존재는 숨겨진다. 경찰이 신분을 밝히고 피켓을 내리고 가면을 벗게 하려 했지만 오히려 아서가 빼앗아 쓴 가면에 의해 일반 시민들끼리 서로 육탄전이 벌어진다. 조커는 갈등의 양측이 경찰 대 시민이든, 시민 대 시민이든 관심이 없으므로 그저 포위망을 빠져나가 버리고 만다. 이후 머레이쇼에 나가 말했듯 그에게 광대화장은 “정치적 표현이 아니라 그저 웃기고 싶을 뿐”인 것이다. 즉, 우연찮게 얻어진 나쁜 유명세가 지니는 파괴력만 강조되면서 시위대의 성격은 극초반의 목적과는 달리 폭력성을 띠게 된다.
결국 이 시위대는 강도로 돌변하여 한 아이의 부모를 빼앗고 그 아이를 어둠의 기사(Dark Knight)로 살도록 만든다. 그리고 조커가 탄 경찰차에 부딪혀 그를 탈취해 그를 법치의 응징에서 구해준다. 피를 흘린 채 누워있던 아서는 일어나라고 고취하는 시위대에 의해 경찰차를 밟고-공권력을 짓밟고 일어선다. 그를 둘러싸고 환호성을 지르는 시위대를 통해 오랜 동안 관객-사람들의 인정욕망에 목말라 있던 그는 마치 영웅이 된 것처럼 흥분에 빠져들고 코에 흐르는 피를 찍어내어 웃는 입술 모양을 그려낸다. 비로소 아서를 완전히 버린 악당 조커로서 재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때 그는 행복할 때면 늘 그렇듯 춤을 추는데 첫 살인 때처럼 이 때의 춤도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 자신에게 스스로 취해있는, 말 그대로 자기애적 망상장애병자로서 몸짓에 완벽히 부합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3. 망상에 사로잡힌 자아의 위험성-자기애적 망상장애
“For my whole life, I didn't know if I even really existed. But I do, and people are starting to notice.”
내 일생 동안, 난 내가 존재하는지조차도 모르고 있었어. 하지만 이젠 아니야. 사람들이 날 알아보기 시작했지.
<조커>가 가진 영화적 장점은 80년대라는 시대 분위기를 덧입은 색감의 화면과 잘 배치된 미술적 오브제들, 적절한 음향에 더불어 클로즈업과 풀샷을 집중적으로 사용하여 인물의 내면과 그를 억누르는 사회적 의장들을 효과적으로 표현한 촬영에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물의 불행과 고통에 대해 관객들이 충분히 공명할 수 있도록 아서가 조커가 되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구현해낸 주연 배우의 뛰어난 연기에 있다. 그런데 아서에게 크게 공감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같이 우울한 기분이 된다는 관객들의 반응을 숙고할 필요가 있다. 결국 조커가 악당이 되어버리는 것을 알면서도 이 영화의 어떤 지점들은 관객들에게 강력한 감응력을 가진다는 점, 그것이 이 영화에 대한 ‘위험함’이라는 비판의 근거라 할 수 있다.
아서는 요즈음의 표현대로라면 ‘관종’이다. 그런데 사람들의 관심을 끌만한 매력적인 요소가 전혀 없다는 점, 특히 코미디언으로서 관객들에게 적절한 상황에서 웃음을 끌어내지 못한다는 점이 불행한 사람이다. 신경증적인 문제로 그의 웃음 포인트가 다르다는 이유 외에도 아이디어 노트에 적힌 여러 설정으로도 그는 사람들을 웃기지 못하는데, 도리어 웃기지 못한다는 점만이 유일하게 그의 웃기는 점이 되어 머레이쇼에 초대받기에 이른다. 하지만 그 자리는 그를 희롱하면서 자신의 코미디를 완성하려는 머레이의 계획된 쇼의 도구로 사용되는 자리였고 이를 간파한 아서는 더욱 극심한 분노를 표출하게 된다. 그의 모친도, 동료들도 그의 코미디 능력을 의심한다. 그를 쫓던 한 형사는 그의 발작적인 웃음이 ‘광대 짓’의 일종인 거냐고 진지하게 묻는데 이는 아서를 더욱 자괴감에 빠지게 할 뿐이다.
억울함에 휩싸인 그가 이 현실에서 탈출하는 방법은 망상, 즉 실제와 다른 자신만의 공상 속에서 원하는 꿈을 이루는 길밖에 없었을 것이다. 실제 이 영화 속에서 어느 부분까지가 망상인 것이냐는 평자에 따라 다르겠지만 명확하게 망상임이 드러난 부분은 극 초반에 머레이쇼에 관객으로 갔다가 머레이에 의해 무대로 나온 후, 그에게 아들이라는 칭호를 들었을 때와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이웃집 여성을 여자친구인 것처럼 생각한 장면들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가장 선망되는 욕구는 머레이라는 코미디언에 의해 아들과 같은 존재로 사회적 승인을 받는 것과 그의 곁에서 감정적 동요를 눌러주고 자신의 일상을 함께할 연인의 존재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지점들은 최근 미국만이 아니라 우리나라를 비롯한 전세계에 공통적으로 문제시되고 있는 자조감과 열등감의 정서를 상기시키는 측면이 있다. 직업의 안정성과 사회적 지위를 갖지 못한 채, 연애마저도 포기한 ‘밀레니얼 세대(millenials)’3)가 가지는 루저로서의 정서를 감정적으로 추동하는 면이 있다는 것이다. 머레이쇼에 나간 아서는 “세상이 어떤지 알기나 해? 다들 소리를 지르고 예의가 없고 상대에 대한 배려가 없다고!”라고 소리친다. 이어 토마스 웨인 같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어떻게 하든 고분고분할 거라 생각한다며 가진 자들에 의해 짓밟힌 자신과 같은 사람들의 고통을 이야기한다. 사실 그가 토마스 웨인에 대해 부정적으로 바라본 것은 그가 광대 자경단을 비하하는 발언을 한 것과 자신의 생부임을 부정한 것 두 가지에서 비롯된다. 그렇지만 병원 기록을 통해 웨인이 자신의 생부가 아닐 가능성이 높음을 알았기 때문에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광대가면 시위대를 무지하고 용기 없는 폭도들로 칭하는 그의 교만하고 고압적인 태도 때문이었을 것이다. 토마스 웨인으로 상징되는 가진 자들에 대한 조커의 분노는 결국 이 영화에 가장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밀레니얼 세대 일부의 불행 서사와 통하는 측면이 있다. 최초로 부모보다 잘 살지 못하는 세대로 명명되는 그들은 고통을 견디며 차곡차곡 착실하게 살아왔는데도 그러한 삶이 보상받지 못한다는 억울함을 호소한다. 이 영화는 그런 부류에게 다소 위험한 동력을 촉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신중하게 독해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기생충>이 그랬듯 영화 내내 그의 사회적 위치를 지시해주는 장면들은 지형에 그가 놓인 위치를 통해 시각적으로 표현된다. 그가 얻어맞고 도시에 나뒹굴 때와 그가 집에 가기 위해서 엄청난 높이의 계단의 맨 밑에 위치해 있을 때 그는 불행하고 그의 자존감은 바닥에 닿아 있다. 그러나 그가 웨인이 아버지임을 확인하기 위해 그들이 머문 극장의 층계 맨 위에서 그들과 영화를 보며 같이 웃을 때, 그리고 완전히 조커로서 재탄생하여 집 앞 계단의 맨 윗층에서부터 유쾌한 듯 춤추며 내려올 때 그의 심리적 흥분과 기쁨은 최고조에 달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고통스런 아서의 현실을 버리고 조커라는 망상의 세계에 기쁘게 함몰된 그를 어떻게 봐야 할까? 이 영화에 열광하고 조커의 위험한 질주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낀 사람들 중에서도 위험군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의 저변에 있는 공감의 정서에는 내면화된 분노 포인트가 있다. 즉 여러 계층과 성별, 상황의 사람들을 개인적으로 판단한 사회적 위계의 틀로 나누면서 이들에 비해 자신이 노력이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다는 부분에 분노하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는 특히 자신의 불행하게 키워낸 모친, 자신의 말을 제대로 들어주지 않았다는 심리상담사, 버스에서 만난 아이에게 웃음을 주던 그를 냉랭하게 대하던 아이 엄마, 그리고 자신이 호감을 보였으나 망상이었음이 밝혀진 이웃집여자, 머레이쇼에서 자신을 진단하기 위해 기다렸다는 나이든 정신과 의사 등이 여성으로 그려지며 이들에 대한 적의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 문제적이다. 선의로 전철에서 희롱 당하는 여성을 도와주다가 그가 처음 살인에 가담하게 되었다는 정황에서도 당사자 여성은 아서에게 불량배들의 관심이 몰린 사이 빠르게 전철에서 내리고 이후 등장하지 않는다.
명시적이지는 않지만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여성들은 대개 그에게 무례하다는 인상을 남기고, 그의 호의는 되돌려 받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이웃집 여자의 입장에서는 어떠한가, 어린 딸과 사는 싱글맘으로서 별 친분이 없는 남자가 어느 날 비에 젖은 모습으로 자신의 거실에 앉아있는 것 자체가 엄청난 공포를 유발하는 행위이다. 머레이쇼의 늙은 정신과 의사는 조커와 아직 어떠한 접점도 없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갑자기 악동처럼 딥키스 -물론 이 부분은 전작의 한 장면을 패러디한 것이기는 하지만-를 당해서 당황스러워진다. 정작 조커 자신의 무례함은 고려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백인 남자의 승인만이 중요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동료 중 자신을 속인 랜들을 죽이고 소인증의 장애가 있는 개리는 살려보내주는 장면도 의미심장하다. 표면적인 이유로는 그가 자신에게 잘해줬기 때문이지만 다른 한편 자신보다 키가 작고 더 하대 받는 존재라는 무해성이 그에게 아량을 베풀 수 있는 여유를 준 것이다. 그러므로 조커의 분노는 시위대의 초기 시위 목적처럼 세상을 둘러싼 상위 심급을 향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 모욕감을 줬다는 것에 대한 사적 복수심인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상담사를 죽인 그를 유쾌한 음악과 함께 키치적으로 처리한 설정 역시 부정적인 이 영화의 에너지를 쉽게 수용하게 만들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영화에 대한 비판적인 우려들은 한 영화의 독자반응비평으로서 지나친 게 아닐까 의구심이 들 수 있다. 그러나 대개 모방이나 부정적인 공감의 반응을 일으킬 수 있는 설정들을 영화화할 때는 완전히 영화적인 것, 즉 꾸며낸 이야기일 뿐이라고 받아들이도록 만들어서 윤리적 논란을 우회한다. 때로는 그 사실적인 특징들을 지나치게 전시하지 않도록 촬영술이나 화면의 각도, 미술, 편집 등을 이용해서 교란한다. 그런데 이 영화가 가진 파멸과 폭력을 추동하는 파토스는 이 영화가 잘 만들어졌다는(well-maded) 점에서 우려스러울 만한 것이 된다. 왜냐하면 특정 세대의 자조적 시선이 아니더라도 조커의 대사처럼 ‘세상은 미쳤’고, 81년도의 고담은 현실의 은유법으로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서의 고통에 공감하고 조커의 익살스런 악의에 속 시원해할 무렵,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에서 살해당한 부모 옆에 홀로 남겨져 떨고 있는 아이(브루스 웨인)가 삽입화면으로 잠깐 스쳐 지나갔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고담시에서는 악당들 때문이 아니라 뉴스에 나와 마이크를 잡고 입바른 소리를 하며 사회적 역할을 자임한 교만한 가진 자들 때문에 시위가 일어났고 도시가 불바다가 되었다는 점도 같이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인종과 계층과 성별이 용광로(melting-pot)처럼 뒤얽힌 현재의 사회에서는 언제든 작은 불티로도 엄청난 분노를 끓어오르게 할 수 있고 그 위험은 미국으로 상징되는 패권주의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전세계에 걸쳐 산재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이 이 영화가 가진 추동력을 정체라고 볼 수 있다.
※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조커>
주해
1). 공식 번역본 대사이다. 감독은 ‘cents’가 원문맥상 ‘sense’여야 할 부분에 의도적으로 넣은 철자였다고 밝힌 바 있다.
2). 프리드리히 니체 저, 김정현 역, 『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 책세상, 2002, pp.353-340 참조.
3). 주로 1980년대 초 (1980~1982년) 부터 2000년대 초 (2000~2004년) 까지 출생한 세대를 일컫는다. 컴퓨터나 SNS를 자주 사용하며 대학진학률이 높고 자기표현욕구도 강하지만, 다른 세대보다 물질적으로 궁핍해서 결혼과 주택 구입을 미룬다. 그러면서도 자기 개성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에 소비를 줄이지 않으며,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일에 민감하며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경향이 있다. 닐 하우와 윌리엄 스트라우스가 1991년 책 『세대들, 미국 미래의 역사(Generations:The History of America's Future)』에서 처음 언급된 용어이다. (한경닷컴에서 제공하는 ‘한국경제용어사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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