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무늬 휴지
현택훈
비 오는 날 잎사귀에 쓴 구름은 나무였고
나무는 얇고 하얀 꽃이 되었어요
음각으로 새긴 꽃무늬
심지어 휴지에서 꽃향기도 나요
두루마리로 감아져 있는 공원 벤치
얼음이 다시 얼 것 같은 테이크 아웃
눈물을 닦으면 그대 목소리에서
숨바꼭질이 보일까요
스며들기 좋은 건 여전한 밤
한 칸 한 칸 뜯어서 날리면
꽃잎처럼 흩날리겠죠
바람에 날리는 꽃무늬 휴지
고개를 돌려보면 지천에 꽃이네요
쓰러지면 그 자리가 꽃밭
우리 이제 어디선가 뚝 끊어져도
달력을 뜯듯 넘길 수 있잖아요
뜯어 먹기 좋은 빵처럼
뜯어내기 좋은 하루
아침마다, 다른 사람을 만날 때에도
서둘러 가기도 하죠
하얀 꽃 활짝 핀 화장실
꽃무늬 새겨진 울음 기차
지네 인간
지네는 괜히 발만 많아진 것 같다
수많은 발들로 기어서 너에게 간들
동굴에서 석순처럼 자라는 마음
주체하지 못해 동굴 밖으로 나가면
사타구니에서 전설이 전해져왔다
옛날에 어떤 지네는
사람보다 길었다지
브란 캐슬에는 여전히 드라큘라 혈통을
이어받은 후예가 성을 쌓고
내 피에는
지금은 멸종됐거나
숨어 살고 있는 종족의 파도가 밀려오는가
너를 바라보는 심장이 많아져 마구 뛴다
자정을 알리는 시계탑 위로 기어오른다
― 라음동인 네 번째 묶음, 『플라스틱 아일랜드』(한그루/2015)
현택훈
제주 출생. 2007년 《시와정신》으로 등단. 시집 『지구 레코드』, 『남방큰돌고래』, 『난 아무 곳에도 가지 않아요』, 산문집 『기억에서 들리는 소리는 녹슬지 않는다』, 『제주어 마음사전』, 『제주북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