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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요한복음 10:1-12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도둑이 참 많습니다. 강도들도 도처에 있습니다. 좌편향 교육을 하여 우리 아이들의 신앙과 사고와 인격을 도둑질 하는 전교조와 진보역사학자, 진보교육감들도 도둑들이요, 호시탐탐 비진리로 진리에 속한 아이들을 거짓의 세계로 이끌고자하는 인권운동가들이나 페미니스트들도 다 강도요, 200만명이 넘는 이단들도 우리의 바른 신앙을 도둑질하는 도둑들입니다. 사방에 도둑과 강도가 들끓는 시대가운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목자와 양이라는 말은 더욱더 절실하게 들립니다. 이런 시대일수록 바른 목자를 잘 만나서 진리의 세계로 바르게 인도받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가리켜 ‘나는 선한 목자라’ 하시며 생명을 더 풍성히 주시겠다고 선포하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점에서 선한 목자이고 이런 시대가운데 우리는 어떻게 해야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을 수 있습니까? 오늘 말씀통해 목자이신 예수님을 잘 듣고 따르심으로 생명을 얻되 가득히 얻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첫째,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잘 알고 따라가야 합니다.(4)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1,2절을 보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예수님은 이 세상에는 목자도 있지만 사실은 도둑과 강도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목자는 한명인데 강도와 도둑은 사방에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 욕심을 위해 양들을 유혹합니다. 그들은 자기들도 목자라고 하며 심지어 목사라는 신분을 가지고 활동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양들을 철저히 속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를 목자와 양으로 표현합니다. 예수님은 목자가 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위해 당시 종교지도자들을 백성의 목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당시 지도자들은 욕심에 잡혀서 목자가 아니라 자기 잇속을 채우는 강도나 도둑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반면에 양은 어떠한 존재입니까? 양은 무지합니다. 바로 앞에 양의 탈을 쓴 늑대가 나타나도 “늑대다” 해야 하는데 늑대인지 알지 못하고 눈만 껌뻑거립니다. 으르렁 거리고 달려들면 그제서야 무섭다고 음- 매 거리기는 하지만 대책을 세울 줄 모릅니다. 혼자 살아남을 능력도 없으며 한번 웅덩이에 빠지면 속수무책 나오지 못하고 그대로 있다가 죽기까지 합니다. 이런 양이 말이라도 잘 들으면 도와주기가 쉬울텐데.. 양은 습관도 나쁘고 자기생각도 강하고 고집도 아주 셉니다. 이런 양을 감당하다보면 목자의 속은 새까맣게 탑니다. 그래서 팔레스타인 지방에서는 아주 고집세고 말안듣고 속썩이는 사람을 ‘이런 양같은 놈’이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양같은 인생들의 목자가 되십니다. 말썽피우는 양들에게 짜증내고 화내기보다 다만 사랑해주시고 푸른 초장 맑은 시냇물가로 인도하여주십니다.
그러면 참된 목자와 양의 관계를 특징지어주는 것으로 무엇이 있습니까? 3절을 보면 목자가 가면 양의 우리를 지키고 있는 문지기는 목자를 위해 문을 열어줍니다. 이때 목자가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내어 인도합니다. 양은 그 특유의 고집과 무지 때문에 목자를 많이 고생시킵니다. 말을 잘 안듣습니다. 그래서 목자가 양을 불러낼 때 ‘야 너 빨리 안나와’ 하며 올가미를 던져서 씌워 목을 잡아 끌어야할 것 같습니다. 회초리로 엉덩이를 때려가며 몰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목자는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내어 인도합니다. 목자가 양에게 번호가 아닌 이름을 붙여주었다는 것은 그만큼 그가 양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인격적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목자는 이 양은 어떠하고 저 양은 어떠한지 잘 파악합니다. 그리고 그 특징을 따라 이름을 붙여줍니다. “지마리아 편리브가 박사라” 이름을 붙여줍니다. 이때 양은 목자가 자기를 부르는 이름을 알아듣습니다. “박사라” “네” 자기를 부르는 목자의 음성 속에서 사랑을 느끼고 깊은 존재감을 느낍니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의미있고 값진지 모릅니다.
본문 1-18절에서 “음성을 안다”(4,5,14a,14b,15a,15b) “음성을 듣는다”(3,8,16)는 단어가 반복해서 나옵니다. 이는 양이 목자의 음성을 알고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해 줍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알고 들어야 합니다. 이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필수입니다. 왜냐하면 이는 목숨과 직결되는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양으로서 무엇보다 주님의 음성을 듣기에 힘써야 합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마음을 비우고 주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자 귀를 기울인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서 내가 원하는 것을 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이 많다보니 정작 주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하고 또 알고자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주의 음성을 귀 기울여 들을 때 죄의 유혹을 이길 수 있고, 세상을 승리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뿐만아니라 주님이 교회에 세워주신 목자의 음성을 알고 들어야 합니다. 이또한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목자의 음성을 무시하지 않고 목자의 음성을 신뢰하고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한사람 한사람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도와주십니다. 우리 내면의 고통을 알고 이해하며 그 이름을 불러 사랑하시고 위로해주십니다. 1955년 미국에서 마리안 앤더슨은 흑인 가수로는 처음으로 메트로폴리탄에 출연해 영감있는 노래로 관중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녀의 대표곡은 흑인 영가 찬송가 372장 ‘ 그 누가 나의 괴로움 알며 ’입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인종과 피부의 대한 편견과 차별로 불행한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이런 가운데 자신의 고통을 잘 알고 계시고 위로해주시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아시는 예수님을 찬양했습니다. “ 그 누가 나의 괴롬알며 또 나의 슬픔 알까 주 밖에 누가 알아주랴 영광 할렐루야 ” 이 예수님을 찬양했습니다. 세상은 흑인 마리아의 내면의 고통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시고 이해하셨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도둑과 절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양의 마음을 도둑질 하고 양들의 재산을 도둑질하였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나를 아십니다. 내가 지금 무엇으로인해 마음고생을 하는지, 내가 무엇때문에 기쁜지, 우리의 이름을 각각 불러 나의 슬픔과 고난, 기쁨에 깊이 동참해주시고 위로하시고 축복해주십니다. 우리의 이름을 불러주시는 예수님, 이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이 되십니다.
그리고 목자는 앞서 갑니다. 4절을 보면 이렇게 목자는 자기 양을 다 내어놓은 후에 앞서 갑니다. 그러면 자기 목자의 음성을 아는 고로 양들은 본능적으로 목자를 신뢰하고 따라갑니다. 목자가 앞서 가는 이유는 양들을 옳게 인도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양들은 스스로 앞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양들은 시력이 안좋아서 분별력이 없습니다. 조그만 장애물 하나 못건너 갑니다. 독초를 구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목자는 늘 양들 앞에 서서 위험한 독초같은 것들을 치워주고 위험하다고 경계시킵니다. 그들이 자기를 잘 따라오도록 길을 만들어주고 가시덤불 같은 장애물들을 치워줍니다. 그리고 섬김의 삶, 희생의 삶의 본을 보여주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안심하고 따라오도록 도와줍니다. 이런 목자를 양들은 전적으로 신뢰하고 안심하며 따라와야 합니다. 힘들더라도 피곤하더라도 따라와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생명을 얻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어머니들도 우리자녀들의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아이들에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아이들은 엄마가 순종하는 것을 봅니다. 주일성수하는 것을 보고 배웁니다. 백문이 불효일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백번 듣는 것보다 한번 어머니의 신앙의 모습, 기도의 삶, 섬김의 삶, 순종의 삶을 그대로 보고 따라합니다. 지금은 자녀들이 잘 따라하지 않고 불평할 수도 있지만 결국 본대로 따라합니다. 우리어머니들의 삶은 아이들에게 교과서가 됩니다.
둘째 양은 예수님의 문으로 들어가면 생명을 얻습니다.(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양은 목자가 인도하는 대로 따라 들어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문으로 들어가기를 주저하면 안됩니다. 예수님의 문으로 들어가면 돈을 잃을까봐, 자유를 잃을까봐, 내 마음대로 못살까봐, 자꾸 제한받을까봐 들어가기를 주저하면 생명을 얻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문을 통해 생명의 세계로 들어가야 합니다. 거기에 진정한 생명이 있고 진정한 자유가 있고 진정한 기쁨이 있습니다. 진정한 평화가 있고 진정한 능력이 있습니다. 간신히 주일날만 참석하는 것은 아직 예수님 문안으로 들어오지 않은 것입니다. 교회안으로만 들어온 것입니다. 주님안으로 들어와서 함께 밥도 먹고 속회도 참석하고 수요예배도 와야 들어왔다고 할 것입니다. 여선교회 회비도 내며 함께 하여야 합니다. 다른 곳에 가서는 돈을 잘 쓰면서도 교회 회비는 이상하게 아까워해서는 안됩니다. 목자가 물웅덩이에서 점프하면 양도 점프하고 목자가 오른쪽으로 돌면 양도 오른쪽으로 돌면 됩니다. 목자의 본을 보면서 따라가는 사람은 생명을 얻는 정도가 아니라 풍성하게 얻게 됩니다. 풍성하게 얻는다는 것은 자유, 기쁨, 만족, 충만하게 얻어서 큰 승리를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따르면 분명한 삶을 살게 되고 반드시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양들은 타인의 음성을 함부로 들어서는 안됩니다. 타인의 음성을 신뢰해서는 안됩니다. 여기서 타인이란 믿음없는 사람들이요, 세상친구들이요, 인본주의 신앙인들입니다. 아무나 목자로 여기고 그들의 음성을 중시하고 따라가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흔히 목자의 음성을 듣기 싫을 때는 그들의 음성을 듣고 그들의 음성을 신뢰합니다. 양들은 이런 타인의 음성을 신뢰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싫다고 해서 믿음없는 사람들의 말을 신뢰해서는 안됩니다. 사랑의 교회의 양이 아닌 사람들은 타인의 음성을 좋아합니다. 진짜 사랑의 교회 양들은 이런 타인의 음성이 들릴 때 양은 오히려 두려워하고 도망간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양들은 문이 되신 예수님을 드나들면서 예수님을 배우고 예수님의 은혜를 누립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가서 예수님의 세계로 들어가면 무슨 축복을 얻습니까? 9절을 보시면 “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 이는 누구든지 예수님을 통하여 들어가면 반드시 구원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안들어가면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세상에는 목자같이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인품을 보면 훌륭합니다. 교회도 다닙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신앙이 좋다고 여기고 그들을 따르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한결같이 도둑이며 강도입니다. 이단들만 도둑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혼을 도둑질하려는 자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10절을 보시면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고 <생명을 더 풍성히 얻게 하는 것> 입니다. 어떤 사람은 적당히 혀 너무 빠지지마 공부하는 학생이 공부에 열중해야지 그러다가 낙오혀 하는 분은 타인의 음성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강도요 도둑입니다. 이는 크게 오해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행복, 우리의 성공은 우리 노력을 통해서 오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하나님은 만복의 근원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들의 행복을 늘 생각하십니다. 인간을 만드시고는 에덴에 낙원을 만들어 인생들을 축복하고자 하셨습니다. 인간이 범죄하였을 때는 어떠하셨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 영광의 보좌를 뒤로하고 인간이 되어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온 마음을 다해 우리 인생들을 섬기시고 더 나아가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이렇게까지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10절을 다시 보면 ‘ ...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축복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축복하시되 ‘더 풍성히 얻게’ 하십니다. 일찌기 이 축복을 경험한 시편기자는 23편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니리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 우리가 때마다 양의 문되신 예수님을 드나들며 풍성한 삶, 충만한 삶, 영육간의 잔이 넘치는 삶, 더 풍성한 삶을 살 수 있길 축원합니다.
셋째, 목자보다 삵꾼을 따르면 위험합니다.(12) “삵꾼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삵꾼이란 품삵을 받고 일하는 알바생 같은 사람을 말합니다. 우리교회에도 심방 전도사나 교육전도사를 두고 일해 보았습니다. 어떤 성도는 잠시 와 있다 가는 전도사를 따르다가 실족하여 교회를 옮겼습니다.
목자는 양을 알고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고자 합니다.(11) 그러나 12절을 보면 삵꾼은 그렇지 않습니다. “삵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양을 물어가고 또 헤치느니라” 내 교회가 아니고 내 양이 아니므로 목숨을 걸지 않습니다. 떠나야 할 때 떠나갑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목자보다 삵꾼을 따르면 안됩니다.
오늘 이 시대는 치열한 경쟁사회입니다. 약육강식의 세계요 도둑들이 도처에서 우리를 집어삼키고자 하여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더 많아 지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이들을 목자같이 돌보아 주지 않으면 파멸하고 말 것입니다. 저들은 아직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양들입니다. 저들은 세상에 하이에나와 늑대 같은 이단들, 망하게 하는 세상친구, 공산주의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저들은 우리의 영혼을 망하게 하고자 거짓말로 속이고 꾀고 이끄는지 전혀 모릅니다. 우리 사랑의 교회는 선한 목자되신 예수님, 그리고 이땅의 목자인 목사님, 인도자들을 잘 따라서 예수님의 세계로 들어가서 생명을 얻고 넘치도록 얻으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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