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영산신씨 후손이다. 이상하게 영산신씨 집안에서는 신돈어른을 모시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신돈어른에게 더욱 애착이 가며 또한 조상으로 생각하고 있다. 아마 이씨조선의 역사적인 배경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내면을 살펴보면 이씨조선을 건국한 신진사대부들은 신돈아래에서 배출된 학자들이 많다. 신돈은 도가에서 청한거사라 불리운다. 또한 수원에서 유배되어 마지막 나그네 신세가 되었다. 요즘 카페를 돌다보면 마초기질을 가진 땡추들이 가끔 보인다. 사실 요즘같이 심심한 세상에 민중을 흥분하게 할 재밌는 땡추(가을열매)가 필요한 시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끔 해 본다.
땡추란 고려 시대에 개혁을 추진하던 스님들의 모임이었다
-고려 공민왕 때 몽골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한 스님들의 모임이었으나, 조선 시대에 불교가 탄압을 받으면서 부정적인 뜻으로 변했다.
'땡추'에서 파생한 '땡중'은 술을 즐기고 고기를 맘대로 먹는 가짜 중을 일컫는다. 이는 고려 시대에 몽골에서 벗어나려고 개혁을 추진했던 공민왕이 신돈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도에서 1명씩 모두 7의 스님과 신돈이 만든 개혁 단체였다. 당시에는 곳곳에 몽골에 빌붙었던 친원파가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신변의 안전을 위해 술 마시고 고기를 먹는 등 스님들이 하지 않는 행동으로 서로를 확인하는 신표로 삼았다. 더구나 이들 스님들의 비밀은 철저히 지켜져서 다른 사람들 눈에는 땡땡이 중으로만 보였던 것이다.
- 땡추의 활약
개혁의 중심 인물이었던 신돈은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여 부호들의 권세로 빼앗은 토지를 각 소유자에게 돌려주고, 자유민이 되려는 노비들을 해방시켰으며, 국가 재정을 정리하여 민심을 얻었다. 그러나 급진적은 개혁은 상류계급의 반감을 샀으며, 신돈 자신도 왕의 신임을 믿고 점차 오만해지고 방탕하게 군나머지 상층계급에서 배척 운동이 일어났다. 공민왕 18년(1369) 신돈은 풍수도참설로 왕을 유혹하여 서울을 충주로 옮기고자 했지만 왕과 대신들의 반대로 실패하고, 급기야는 왕의 신임마저 잃자 역모를 꾸미다가 발각되어 수원에 유배된뒤 공민왕 20년(1371)에 처형당했다.
- 억불정책에 따른 자체의 변질
그 뒤 이 모임은 개혁적인 성향은 변질되었다. 특히 조선 시대 들어 불교를 배척하는 정책으로 승려의 지위가 땅에 떨어지고 무자격 승려가 많아지면서 수행에 관심이 없었던 일부 중들은 당파를 만들어 세력을 키우게 되었다. 10∼20명씩 패를 지어 다니면서 수행 스님이나 학승을 괴롭히고, 식량과 의복 등의 물자를 마음대로 가져다 먹고 입었으며, 승려들을 모아 놓고 참회시킨다면서 매질도 했다지 모야. 땡추는 일종의 부랑집단으로 전국적인 조직을 갖추고 통일된 행동을 했으며, 곤란한 일을 당하면 서로 도와주고, 조직원 가운데 누가 봉변을 당하면 반드시 복수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