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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기병의 모습. 기병 위주의 이슬람 군대는 빠른 기동성을 발판으로 중동에서부터 북아프리카를 차례로 정벌해 나갔다. 필자 제공 |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유럽의 역사를 볼 때, 유럽 전체가 이교도의 수중에 떨어질 뻔한 경우가 적어도 두 차례 있었다. 8세기 중엽 남쪽으로부터 치고 올라온 이슬람군의 위협과 13세기 중엽에 동쪽으로부터 쇄도한 몽골군의 침략을 꼽을 수 있다.
후자의 경우 외적이 스스로 홀연히 사라져버린 천운(天運) 덕분이었던 데 비해 전자의 경우 자력(自力)으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476년 서로마제국이 몰락한 이래 우후죽순처럼 등장한 게르만 왕국 중 하나에 불과했던 프랑크 왕국은 7세기에 오면서 갈리아의 강국으로 대두하기 시작했다.
특히 메로빙거 왕조 시대에 프랑크 왕국의 정복사업은 더욱 활기를 띠었다. 그 중심에 바로 궁재(宮宰·Mayor of the Palace)로서 왕국의 실력자였던 카를 마르텔(Karl Martell·라틴어 원명은 카롤루스 마르텔루스)의 활약상이 있었다. 그런데 732년 가을, 그는 황급하게 왕국의 정예 병력을 이끌고 갈리아 남서부로 출동해야만 했다. 왜 그랬을까? 이 글은 바로 이에 대한 답을 찾으려는 한 시도다.
프랑크 왕국의 궁재 카를 마르텔. |
중세 유럽 초기 대두한 프랑크 왕국
476년 서로마제국이 몰락한 이래 과거 로마제국의 서부영역에는 게르만족의 여러 부족이 세운 독립왕국들이 우후죽순으로 들어섰다. 이들은 바로 갈리아(오늘날 프랑스 지역) 동남부에 등장했던 부르군트 왕국, 갈리아에서 이베리아반도로 밀려난 서고트 왕국, 이탈리아반도 동남부를 장악했던 동고트 왕국, 이탈리아 북부의 롬바르드 왕국, 그리고 북아프리카에서 반짝했던 반달 왕국 등이었다. 하지만 이들 중 최종적으로 갈리아 지방을 차지하고 이후 중세 유럽 초기 역사의 주인공으로 대두한 세력은 바로 프랑크 왕국이었다.
그렇다면 프랑크 왕국은 어떻게 갈리아 지방의 강자로 부상할 수 있었을까? 5세기 중엽 서로마제국이 몰락한 이후 갈리아의 맹주는 서고트족이었다. 당시 서고트족의 리더였던 에우리크는 오도아케르에게 협력하는 대가로 갈리아 거의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양도받았다. 심지어 그는 갈리아를 넘어 이베리아반도까지 넘볼 정도였다. 그런데 서고트족 단합의 구심점이었던 에우리크의 이른 사망 후 그의 어린 아들(알라리크 2세)이 즉위하면서 서고트족의 위세도 시들기 시작했다.
뛰어난 리더십 발휘한 프랑크족 클로비스
이에 비해 오늘날 프랑스 북부와 벨기에 사이의 아헨 지방에서 출발한 프랑크족이 점차 새로운 강자로 부상했다. 그 중심에 클로비스(Clovis I·재위 481~511)라는 인물이 있었다. 어린 나이에 프랑크족의 통치권을 이어받은 클로비스는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해 휘하 병력을 이끌고 군사적 승리를 이어갔다. 특히 그는 노획한 전리품을 병사들에게 분배하는 아량으로 다른 부족민도 유인하는 지도력을 발휘했다.
먼저 5세기 말에 독일의 쾰른을 거점으로 독일 남부로 세력을 확장한 다음, 6세기 초엽에는 갈리아의 맹주였던 서고트족에게 도전장을 던졌다. 내부 분쟁에 휩싸여 있던 서고트 왕국의 알라리크 2세는 병력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클로비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서고트족에 이어서 갈리아 동부의 부르군트 왕국도 클로비스 군대의 말발굽에 짓밟히고 말았다. 6세기 중엽 비옥한 갈리아 전체를 차지한 클로비스는 메로빙거 왕조를 창건했다.
클로비스는 세상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한 지도자였다. 그는 일찍이 정통 그리스도교(아타나시우스파)로 개종하고 교황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덕분에 그는 합법적인 군주이자 교회의 구원자라는 칭송을 받았다. 또한, 그는 풍요로운 데다 로마화의 정도가 높았던 갈리아를 부족의 뿌리로 둔 이점을 십분 활용했다. 즉, 다른 게르만 부족들이 일거에 한곳에서 다른 곳으로 근거지를 옮겨 다닌 데 비해 프랑크족은 초기 정착지인 아헨 지방을 본거지로 고수한 채 영토를 축차적으로 넓혀갔던 것이다. 이처럼 이동 폭이 좁았던 덕분에 설혹 일시적으로 패배하더라도 쉽게 재기할 수 있었다.
그러나 클로비스 사후에 메로빙거 왕조의 프랑크 왕국은 점차 팽창의 여력을 상실했다. 어리고 허약한 국왕의 계승이 반복되면서 7세기 중엽 이래 실제 권력은 일명 ‘궁재’라고 불린 귀족 실력자의 손아귀에 놓이게 됐다.
빠른 기동성으로 대제국 건설한 이슬람군
한편, 서로마제국 멸망 후 벌어진 권력 판도의 변화가 서유럽 지역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저 멀리 지중해 남쪽 열사(熱砂)의 땅, 중동지역에서도 빠르게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아라비아반도의 통상 및 종교 중심도시 메카 출신인 무함마드가 신의 계시를 받아 610년경에 창시한 이슬람이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이슬람이라는 종교 교리로 아랍 유목민들을 결속시킨 무함마드의 후계자들(칼리프라 불림)이 그의 사후 축적해온 폭발력을 외부로 발산하기 시작했다. 그 첫째 대상은 오랫동안 중동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비잔티움제국이었다. 아라비아반도 북서쪽 시리아의 중심도시인 다마스쿠스에 대한 공격을 신호탄으로 636년경에는 팔레스타인의 유서 깊은 도시들까지 점령했다.
이어서 중동의 전통적 강국 사산조 페르시아마저 손아귀에 넣은 이슬람군은 630년대 말부터 정복의 말 머리를 반도 서쪽으로 돌렸다. 전광석화처럼 이집트를 차지한 이슬람군은 북아프리카 사막을 가로질러 8세기 초반에는 서쪽 끝인 모로코의 탕헤르에 이르렀다. 기병 위주의 이슬람 군대가 빠른 기동성을 발판으로 이룩한 놀라운 성취였다. 무함마드가 신흥 종교를 창시한 지 불과 100년도 지나지 않아 이슬람 세력은 중동에서부터 북아프리카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한 것이었다.
내분 휩싸인 서고트족, 이슬람 군대 불러
그런데 이슬람의 영토 확장에 대한 열망은 여기에서 만족하지 못했다. 특히 비잔티움제국의 심장인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두 번에 걸친 점령 시도에 실패하면서 유럽의 다른 지역을 노렸다. 절호의 기회가 뜻밖에 빨리 찾아왔다. 710년 내분에 휩싸였던 서고트족이 모로코에서 이베리아반도를 노리고 있던 이슬람 군대에 도움을 청했던 것이다. 이후 벌어진 상황은 토끼굴로 여우를 불러들인 거나 마찬가지였다. 지브롤터 해협을 건넌 이슬람 군대가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숨겨온 이빨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빠르게 이베리아반도를 석권한 이들은 8세기 초경 피레네 산맥을 넘어 갈리아 남부까지 넘보기에 이르렀다. 막강한 이슬람 기병대의 위력 앞에 망연자실하고 있던 서유럽 세계에 한 구원자가 등장했으니, 그가 바로 프랑크 왕국의 궁재 카를 마르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