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 탈환후 찍은 사진인듯 - 국군의 탈환 뒤에 여수에 큰 불이 났었다.
이불은 반란군들이 지르고 도주한 것이 시 전역에 퍼진 것이다.
대화재를 바라보는 여수시민
화재 진압 의용 소방대원이 애쓰지만 별 소용이 없다.
토벌군의 의무병이 부상자를 치료하고 있다.
공비화된 전 14연대소속 국군들 - 길게 자란 머리를 보니 여순 사건 한참 뒤의 토벌 작전에서 체포 된 것같다.
3,000여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반도중 2,333명이 포로가 되고 사살된 반도가 300여명,
김지회 홍순석과 함께 지리산으로 들어간 반도[반군+ 좌익 분자]들이 700명 정도다 .
포로가 많은 것은 14연대원 대부분이 멋도 모르고 좌익들에게 부화뇌동하다가 투항했다는 이야기다.
입산한 뒤부터 남로당 간부 이현상이 같이 입산하여 지휘했다.
김지회, 홍순석이 사살당한후부터 순천역앞 깡패출신 이영회가 이현상의 지시를 받으며 이 반군 부대를 총괄했다.
사진 설명은 통비분자인 어린 학생들이라고 되어 있지만
가운데 녀석은 도망 가려다가 벌써 두들겨 맞은듯-- 허리띠도 풀려있고 ..
국군은 여수 탈환 뒤,여러 곳의 학교 운동장등에 40세 미만 전시민을 모아놓고 통비분자를 찾아내서
학교 뒤로 데려가 총살했다.
이때 거창 위장공비 사건으로 유명한 김종원이 일본도를 휘둘러 좌익분자들을 죽였다고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여수 경찰서장 고인수 총경도 일본도로 참수되었었다.]
통비분자로 지목된 자의 항의에 발길로 묵살하는 경찰
운동장에 강제 집결된 집식구가 걱정되어 주변에 몰려든 주민들.
99식 소총을 들고 운동장 주변 경비를 서는 사람은 대한 청년단원 같다--
반란군 의심 좌익 분자 색출
경찰과 대한 청년 단원들이 색출해낸 좌익 의심 분자
국군이 처형한좌익들. 웃옷을 벗기고 총살했다.
이 여순 반란 사건은 지역에 큰 타격을 주고 국군의 역사에 오점을 남긴 사건이지만
글 앞에서 지적한대로 곧 다가올 북 도발 6.25사변을 위해서는 화가 복이 되었다는 시각을 가져 볼 수가 있다.
사건후 본격적인 숙군 사업이 진행되었는데 약 5,000명이 체포되었고 5,000여명의 군 좌익분자들이 탈영도주했다.
이 숫자는 국군의 10분지 1을 넘는 대규모다.
만약 국군이 이 좌익분자들을 안은채 남침을 받았었다면 남한은 손쉽게 적화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