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와 다말
이른 기상을 하며 창세기 성경낭독을 듣게 된다. 38장 유다의 이야기를 들으며 순간적으로 스치는 장모님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다. 장모는 내가 결혼할 때 59세(57)이셨고 1년전 장인은 별세한 상태였다.
장모가 아내의 집으로 출가한 이후 한국전쟁이 나면서 아내의 유일한 삼촌은 학도병으로 출전해 사망을 하였다. 그리고 58세에 남편과 사별하였고 딸 다섯 아들 셋의 자녀중 둘째 아들이 30대 중반에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 그리고 몇년 후 장남이 간경화인지 심장마비인지 불분명한 사인으로 역시 별세. 하나 남았던 막내아들 역시 40대 초에 결혼을 앞두고 위암으로 별세했다. 당시 장모님은 치매 초기와 당뇨후유증으로 인한 시각장애로 요양원에 계실때라 막내아들의 별세소식도 들을 수 없는 상태였고, 막내를 보내고 5년후 83세에 별세 하셨다.
유다의 며느리 다말은 기구한 운명의 여인이다. 남편이 하나님 앞에 방자히 행동하다가 급사하였고, 형의 뒤를 이은 차남은 지나친 꾀를 부리고 하나님과 대적한 행위로 역시 급사했다. 유다는 자신의 며느리에 대하여 기가 센여자라서 자신의 아들들을 죽인다고 착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막내아들과 며느리의 합방이라는 당시의 풍습을 거부하고 인간적인 술수를 두다가 결국은 다말의 꾀에 말려들어 며느리를 통해 손자를 보는게 아니라 계획에 없던 아들을 얻게 된다.
한국 속담에 팔자센 여자라는 단어가 있다. 나는 장모님을 생각할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된다. 양씨 집안으로 출가한 이후 장모님은 5명의 양씨 남자들이 죽는 모습을 목격해야 했으니 여자팔자로는 드센 팔자라는 비아냥을 듣기에 족하다.
그러나 창 38장의 유다를 보게되면 아무도 다말을 팔자가 센 여자라 말할 수 없다. 첫남편은 다말때문이 아닌 방자함으로 죽은 것이다. 첫째 시동생 오난 역시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은 보여지는 현상만으로 상대를 평가하다보니 때로는 상처를 입히는 우를 범하게 된다. 장모님보다 몇년 먼저 죽은 막내처남은 마침 우리가 잠간 귀국해있는 기간에 투병을 하다 죽었기 때문에 임종과 장례절차를 내가 주관했었다. 하지만 장모는 우리가 중국에 있는 기간에 별세를 하시다보니 그 이튿날에나 귀국해 장례를 지켜봐야 했다.
진정으로 천국을 믿는다면 꼭 장수를 복이라 말할 수 없다. 그럼에도 성경은 장수를 복이라고 규정한다. 나의 친구들 중에는 50도 못넘기고 세상을 떠난 자들도 더러 있다. 인명은 재천이라는 동양의 교훈은 오랜 경험의 산물일 것이다.
우리가 얼마를 사느냐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역시 어떻게 살았느냐일 것이다. 그리고 얼마나 주와 동행했느냐는 더욱 중요한 평가가 될 것이다. 남은 삶이 하나님 보시기에 부끄럽지 않은 삶이어야 함을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