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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론(破邪論)
1권
2권
파사론(破邪論)
[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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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론 하권
석법림 지음
이한정 번역
“진중(秦仲)에서부터 35세이니,
모두 6백여 년이다”라는
궤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사기(史記)』에서도
“은나라 이전에는 제후들조차 족보(族譜)가 없었다”했습니다.
세차(歲次)도 어긋난 것이 많아 연대의 추정이 사실상 어렵다고 했으니,
이 때문에 『상서(尙書)』에서도
단지 갑자(甲子)로만 차례를 정하고 연월을 따로 정하지 않았으니,
당시의 사관(史官)조자도 이를 빼고 기록치 않았습니다.
삿된 소견으로
진중(秦仲)에서 이세(二世)까지를 6백여 년이라 하는 것은,
한 세대가 너무 길다고 보이는데,
도대체 무엇으로 증거를 댈 수 있겠습니까?
춘추시대 이전에는
‘진(秦)’이란 나라가 원래 없었고,
춘추시대 이후에야 진백(秦伯)이 있었던 것입니다. 춘추시대를 당하여
진 나라가 점점 패권을 가지게 되었으나
단지 주나라의 소읍(小邑)이었습니다.
효왕(孝王)의 치세에 비자(非子)를 시켜 말을 연수(汧水)와 위수(渭水) 가에 기르게 하였는데,
미처 천명(天命)을 받지 못해 정삭(正朔)이 없다가, 증손자 진중이 선왕(宣王)의 치세에
거마(車馬)의 녹을 받아 임금을 섬기는
대신이 되었을 뿐입니다.
진중의 손자 진양(秦襄)이 평왕(平王)이
동쪽으로 천도하는 것을 호송하고서야
작위가 ‘백(伯)으로 봉(封)해졌기에,
비로소 문공(文公) 이후부터 『사기』에
출전되기 시작하는데, 이로부터 멸망하기까지가
불과 2백여 년입니다.
『사기』와 『죽서(竹書)』 및 『도공년기(陶公年紀)』 등에도
모두 진나라에는 역수(曆數)가 없었다고 말합니다. 비록 주나라 치세의 신하로 열거되지만
겨우 여러 제후의 말석에나 자리했는데,
어떻게 연기(年紀)가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호해(胡亥)에 이르기까지, 『사기』에서는
단지 여공(厲公)의 연대로만 열거하는데도,
2세를 끝으로 101년간뿐이니,
대부분의 연대는 모두 춘추에 부가되고
별기(別記)가 따로 없었습니다.
난왕(赧王)의 말엽에, 진나라 소양왕(昭襄王)이 주나라가 쇠약해진 틈을 타고
주나라를 멸망시키고서 왕호(王號)를 분수없이 자칭한 것뿐입니다.
따라서 여러 역사를 이어 보더라도 진나라는
고작 5세 49년입니다.
제(齊)나라의 비서(秘書) 양분(楊玢)의 『사목(史目)』에서는,
진나라가 국호를 봉(封)하고서 멸망하기까지를 대체로 35세 6백여 년간이라 한 것은
처음으로 ‘진(秦)’이란 국호를 봉하고서 6백여 년이 경과한 것을 취한 것이지
이는 중국을 패권으로 통일한 기간은 아닙니다.
부혁이 이처럼 삿된 소견으로
진나라의 짧은 연조(年祚)를 함부로 늘려서
금상(今上)의 긴 세월을 모욕했으니
어찌 망령되지 않습니까?
“제왕에게 부처가 없으면 연조가 늘어났으나,
부처가 있으면 국조(國祚)가 짧아졌다.
포회 이래로 한 고조(漢高祖)에 이르기까지
29대 동안 불법이 없었기에
임금은 성명(聖明)하고 신하는 충성스러웠다”
는 궤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포회씨는 어째서 나라를 자손에게 남기지 못하고 홀로 다스렸습니까?
요와 순의 두 임금도 오제(五帝)에 들어가는데, 요(堯)는 어질게 다스려 성명(聖明)을 다했고, 순(舜)도 자애로워 성명을 다했다고 합니다.
『상서』의 「이전(二典:요전과 순전)」에서 논하는 바에 따르면,
그 백성을 교화하여 도(道)로 다스리는 공업이 가히 으뜸이었는지라,
백성이 무어라 이름하지도 못했으니,
실로 하늘이 내린 명군(明君)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요는 형을 폐하고 자리에 올랐는데다
그 아들 단주(丹朱)는 불초했고,
순은 아비가 둔하고 어미는 강퍅한데다,
홀몸으로 후사도 없었습니다.
이때에도 부처님이 없었는데, 어째서 대대로 전하지 못하고 일찌감치 사라져 버렸습니까?
은거연기(隱居年紀)에 “하우(夏禹)가 다스린 지
9년 만에 예(羿)가 15년간을 찬탈하였고,
다시 착(浞)이 12년간을 찬탈하고
고(睾)가 11년간을 찬탈하였으며,
하규(夏癸)는 52년간이나 전쟁을 벌였다” 하였습니다.
『서경』에는 “순임금과 우임금은 천하에 우뚝하게 공을 이루었으니, 그 문장(文章)이 혁혁하다”
고 말합니다.
「대우모(大禹謨)」에는
“우임금은 궁궐도 초라하고 먹는 것도 거칠었으니, 검은 옷을 입고 수로의 관개에만 진력했다”
고 말하는데,
백성을 대신하여 치수(治水)했기에,
백성에게 세운 공이 황천(皇天)이 덕을 도운 것과 같다고 할 만합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천조(天祚)가 영구하지 못하고 단지 9년간만 다스렸겠습니까?
『감년기(勘年紀)』에는,
“하임금 이후에는 소강(小康)의 치세로 이르는데,
그 신하 가운데에는 유궁(有窮:나라 이름)의 예(羿)ㆍ한착(寒浞)ㆍ및 풍이(風夷)ㆍ회이(淮夷)ㆍ황이(黃夷)ㆍ짐심(斟尋) 등의
나라가 차례로 반란을 일으켜
대략 26년간 하 임금을 쫓아내고
스스로 자리에 올랐다”
고 합니다.
당시에도 부처님이 없었는데, 찬탈과 역모는 도대체 누구에 의한 것이었습니까?
은(殷)나라 탕(湯)의 치세, 외정(外丁)의 치세, 중임(仲壬)의 치세, 태갑(太甲)의 치세, 발정(沷丁)의 치세, 태무(太戊)의 치세, 외임(外壬)의 치세, 옥갑(沃甲)의 치세, 반경(盤庚)의 치세, 소신(小辛)의 치세, 무을(武乙)의 치세, 조경(祖庚)의 치세, 조을(祖乙)의 치세.
다시 답변 드리겠습니다.
탕 임금은 어질어 남살(濫殺)하지 않고 그물을 쳐도 세 곳을 열어 두었고, 하나라의 걸 임금도 명조(鳴條)로 추방했을 뿐이니, 그 어진 덕이 참으로 크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때에도 부처님이 없었는데, 어째서 천력(天曆)이 유구하지 못했으며, 외정(外丁)과 외임(外壬)도 연조가 그토록 짧았습니까?
『상서』에서는, “탕 임금이 아홉 차례나 정벌하였고 태갑이 다섯 차례나 정벌하였는데, 이윤(伊尹)이 탕의 둘째 아들 승(勝)을 옹립하고, 다시 승의 동생인 중임(仲壬)을 옹립하면서, 다시 태갑을 동궁(桐宮)으로 추방하였다”고 말합니다.
『급총서(汲塚書)』에서는, “이윤이 보위를 찬탈하였는데, 나중에 태갑이 몰래 도망 나와 직접 이윤을 죽이면서 그 아들을 채용하였다”고 전하니, 과연 ‘충직한 시대’라 부를 수도 있겠습니다.
이때에도 부처님이 없었는데, 어째서 소장(蕭牆:내란)의 변(變)이 잇따르고 군신은 그토록 무도했습니까?
주나라 무왕(武王)의 치세, 의왕(懿王)의 치세, 희왕(僖王)의 치세, 경왕(傾王)의 치세, 광왕(匡王)의 치세, 원왕(元王)의 치세, 열왕(烈王)의 치세, 정왕(靜王)의 치세, 정왕(貞王)의 치세, 도왕(悼王)의 치세, 애왕(哀王)의 치세, 사왕(思王)의 치세.
다시 답변 드리겠습니다.
무왕의 군대가 주(紂) 임금을 정벌하고자 맹진(孟津)을 건넜는데, 흰 물고기가 배로 뛰어 들어왔으니, 하늘의 가명(嘉命)도 이에 응했다고 하겠습니다.
시법(諡法)에 난리를 평정하게 되면 ‘무(武)’라 이름하였는데, 백성이 이에 의지하였다. 이문(里門)을 지날 때마다 수레에서 허리를 굽히고 무덤에 흙을 덮어 주는 예를 다하면서, 소를 놀리고 말을 풀어놓아 태평을 이루었는데도, 어째서 연조가 짧아 다스린 것이 겨우 11년뿐이며, 더욱이 의왕과 희왕에게는 후손조차 없었습니까?
“부처님이 있기 전의 세상에는 찬탈과 반역이 없었다”는 궤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어째서 주나라 열왕의 동생 현왕(顯王)은 보위를 찬탈했는데도 48년간이나 자리를 지켰으며, 도왕은 옹립된 지 불과 1백1일만에 서제(庶弟) 자조(子朝)에게 살해당했습니까?
경왕의 동생 애왕은 치세가 3개월에 만에 동생인 사왕(思王) 외(外)에게 살해당했으며 사왕은 5개월간 다스리다가, 어린 동생이었던 고왕(考王) 외(隗)에게 다시 살해당했으니, 이 세 왕이 다스린 기간이 모두 합쳐 고작 1년뿐입니다.
양분(楊玢)의 『사목(史目)』과 『도공연기(陶公年紀)』에서 출전되는 진나라 5세 여섯 임금의 재위 기간도 49년에 불과합니다.
소왕(昭王)은 5년, 효문왕(孝文王) 식(式), 양왕(襄王) 초(楚), 진시황(秦始皇) 정(政), 호해(胡亥), 상제(殤帝) 영(嬰).
현왕 5년째에 진나라 목공(穆公)이 패권을 잡기 시작했는데, 34년째에 진나라가 주나라의 정권을 이었습니다.
『죽서(竹書)』에서는 “중연(仲衍) 이전에는 연기(年紀)나 세기(世紀)가 없었었다”고 말합니다.
『도공연기』에서는 “진나라가 임금 자리를 찬탈하고서 덕정(德政)을 펴지 않았기에 그 차제가 오운(五運)의 경계에 들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연조가 유구하지 않으면 ‘제왕’이라 할 수 없는데도, 부혁이 짧은 것을 길다 하고 헛된 것을 가리켜 실하다 하니, 도대체 무슨 속셈이 있는 것입니까?
진나라 때에는 북쪽에 성곽을 쌓아 오랑캐를 방비하였는데, 부소(扶蘇)를 죽이고 2세를 옹립하자, 진승(陳勝)이 봉기하여 관동(關東)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한나라 때에는 흉노가 변방을 침입하여 봉화가 감천궁(甘泉宮)을 환히 밝혔는데, 남월(南越)과도 사이가 좋지 않아 수전(水戰)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한나라 고조(高祖)의 재위 기간, 혜제(惠帝), 문제(文帝)는 고조의 넷째 아들이었고 무제(武帝)는 본래 교동왕(膠東王)으로 경제(景帝)의 여섯 번째 아들이었습니다.
효경제(孝景帝) 때에 오나라와 초나라 등의 7개국이 반란을 일으켰고, 소제(昭帝)가 승하하자, 형의 아들 창읍왕(昌邑王)이 27일간 즉위하였으나, 무려 1천1백27가지의 죄를 물어, 곽광(霍光)이 이를 폐하고 나중에 선제(宣帝)를 옹립하였습니다.
이때에도 부처님이 없었는데, 어째서 이렇게 되었습니까?
후한(後漢)은 무려 12제 1백95년간입니다.
광무제(光武帝), 효명제(孝明帝), 장제(章帝), 화제(和帝), 안제(安帝), 순제(順帝), 환제(桓帝), 영제(靈帝), 헌제(獻帝).
『은거(隱居)』에서는 “위나라 황초(黃初) 원년부터 소제(蕭齊)의 말엽까지 대체로 2백80년이다”라고 말합니다.
척발(拓跋)의 원위(元魏)는 열일곱 임금이 있었는데, 대체로 1백79년입니다.
이때에는 부처님이 있었는데, 어째서 연조가 이렇게 유구하였겠습니까?
이에 대해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후한서』에서는, “광무제가 반란을 눌러 반정(反政)을 이루고, 명제가 이를 다스려 태평하게 하였으니, 백성에게 백리(百里)의 근심이 없었고 관리는 집을 떠나는 고달픔이 없었다. 기린(麒麟)이 담장 안으로 들어오고 신령한 봉황(鳳凰)이 오동나무에 깃들었으며, 붉은 참새ㆍ아롱진 거북이ㆍ파랑새ㆍ흰 사슴 등의 좋은 징조가 잇달아 백성들이 기뻐하였다.
그윽하고 가득한 은총이 내리고, 하늘에서 내리는 단비같은 은택이 펼쳐져, 팔방(八方)이 그 덕화(德化)를 마시고 만국이 그 풍화(風化)를 기렸다“고 말합니다.
『논형(論衡)』 등의 책에서도, “후한의 좋은 징조와 상서로움은 하ㆍ주에 부끄럽지 않다”고 말하였는데, 부혁이 부처님이 있으면 연조가 짧다는데, 이때는 어째서 연조가 이렇게도 길었습니까?
부혁이 말하기를, “서역의 호족 가운데 단말국(旦末國)은 병사가 3백20인에 불과하고, 소원국(小苑國)의 병사는 2백인에 불과하고, 융노국(戎盧國)의 병사는 3백인에 불과하고, 거륵국(渠勒國)의 병사는 3백인에 불과하고, 의내국(依耐國)의 병사는 3백50인에 불과하고, 욱립사국(郁立師國)의 병사는 3백31인에 불과하고, 단상국(單相國)의 병사가 35인에 불과하고, 고호국(孤湖國)은 병사가 45인에 불과하다. 무릇 여덟 나라의 오랑캐 군사가 모두 1천 8백 91인데 모두가 그 왕업(王業)을 빛내고자 땅을 점거하면서 서로 침략하여 인민을 살육한다. 하물며 지금 대당국(大唐國)의 승니가 20여만 대중이나 되는데, 오랑캐 나라의 법에 결탁하여 민심을 얻고 있으니, 어찌 이를 방비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한서』 「서역전」을 살펴보면, 단말과 소원 등의 8개 국은 모두 총령 동쪽에 있습니다.
한나라 지방에서 서역까지는 장안에서 만 리에 불과하니, 원래가 부처님께서 탄생하신 땅이 아닙니다. 또 승니 가운데에서 일찍이 모반을 꾀한 이가 없는데, 저들이 멋대로 죄를 짓는 것이 스님들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입니까?
이는 단지 마귀가 부혁의 마음에 들어가 밖으로 삿된 말을 하는 것으로, 지나간 일을 헛되게 끌어 붙여서 지금의 현인을 욕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어진 이는 이것이 미친 소리임을 알 것이나, 어리석은 이는 다른 생각을 낼 수도 있으니, 조야를 현혹시키는 것이 참으로 가슴 아픕니다.
“부처가 한나라 땅에 와서 해만 끼쳤지 이익 준 것이 없었으니, 집안에 들이면 집안이 망하고 나라에 들이면 나라가 망한다”는 궤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한나라 명제의 치세에 불법이 처음 전파되자, 대당(大唐) 성조(聖朝)의 신심 바른 군자들은, “여러 부처님의 대인(大人)들은 모두 속세를 벗어난 높은 선비인지라, 열반의 묘한 뜰에 노닐면서 반야(般若)의 진공(眞空)에 머무니, 그 모양을 말로 형용하지도 못하고 그 생각을 마음으로 통하지도 못한다. 형체가 같아도 법을 성품으로 삼는지라, 수명을 태허(太虛)와 함께 하다가, 단지 중생에 부응하여 몸을 나투는 것이 마치 물 속의 달과도 같다. 따라서 구담(瞿曇)스승의 석 자 모습을 우러르고 나한(羅漢)의 장륙(丈六)의 용자(容姿)를 뵙게 되면, 크게는 허공에 가득하시고, 작게는 털 끝에도 들어가신다. 인연을 따라 바탕에 응하여 교화하시므로 일정한 의표(儀表)가 없다”고 일렀습니다.
그러므로 석가에 대한 토대가 처음 확립된 것을 찾아 한동도(漢東都)의 교사(郊祀)와 『진서(晉書)』와 『위서(魏書)』 등의 사서 및 왕검(王儉)의 『사록(史錄)』과 비장방(費長房)의 『삼보록(三寶錄』을 의거하고 『보요경(普曜經)』과 『본행경(本行經)』 등을 상고하고 비교해보았더니 아울러 말하기를, “부처님은 주나라 때에 제15대 임금인 장왕 9년 계사년(癸巳年) 사월 초파일에 전단나무로 지은 누각에서 흰 코끼리 모양을 보이시면서 도솔천(兜率天)에서 천축국 가비라성 찰리왕종(刹利王種) 정반대왕(淨飯大王)의 제1부인 마야의 태중에 들었다. 10년 갑오년(甲午年) 사월 초파일 밤 귀수(鬼宿)가 만나는 때에, 람비원(嵐毘園) 바라수(波羅樹) 밑에서 마야(摩耶)부인의 오른쪽 옆구리로 탄생하였으니, 광명을 내어 삼천세계를 비쳤다”고 하였습니다.
『서응경(瑞應經)』에서는 “유성이 내려오면서 빛을 발하는 때에 태자가 태어났다”고 하며, 『본행경(本行經)』에서는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데도 비가 내렸다”고 이르는데, 『좌전(左傳)』에서 “유성이 비처럼 쏟아졌다”고 하고 『두씨주해(杜氏注解)』에서도 “이때에 구름이 없었다”고 주석하는 것이 불경과 일치됩니다. 따라서 통유(通儒)들은 대체로 부처님이 태어나신 때를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열아흡 살에 출가하여 서른 살에 성도(成道)하셨으며 49년간 세상에 머무시면서 설법하시어 하늘과 인간을 군품(群品)에서 해탈하도록 이롭게 보살피다가, 주나라 광왕(匡王) 4년 임자년(壬子年) 2월 15일 후야(後夜)에 구시성(拘尸城)에서 반열반(般涅槃)에 드셨습니다.
멸도하신 이래로 지금 대당국의 무덕(武德) 5년 임오년(壬午年)까지가 따져보면 1천2백21년입니다. 멸도하신 후 1백16년 만에 동천축국에 아육왕이 있어 부처님의 사리를 거두고 귀병(鬼兵)을 시켜 8만 4천 개의 탑을 염부제에 두루 지었는데, 우리 한나라 땅의 구주(九州) 안에도 보탑이 남아 있습니다.
바로 보탑을 지은 때가 이 땅에서는 주나라 경왕(敬王) 26년 정미년(丁未年)에 해당합니다. 탑이 주나라 치세에 세워져 12 명의 왕을 거쳤는데, 진시황 34년 분서갱유(焚書坑儒) 때에 아육왕의 여러 탑들도 이로 인해 훼손되었습니다. 아울러 불가의 경전도 전해졌다는데 그 소재를 자세히 알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석도안(釋道安)과 주사행(朱士行) 등의 『경전목록(經典目錄)』에는, “진시황 때에 외국의 사문 석리방(釋利房) 등 열여덟의 현인이 불경을 가지고 와서 진시황을 교화하고자 하였으나, 진시황이 따르지 않고 도리어 석리방 등을 가두었다. 밤중에 장륙(丈六)의 금강신(金剛神)이 감옥을 깨뜨리고 구해 내자, 진시황이 이에 놀라 머리 숙이고 사과하였다고 한다”는 대목이 출전됩니다.
혹 누군가가 “비록 이 같은 설이 있으나 연대를 알 수 없는데, 무슨 증거라도 있습니까? 그 결말을 말씀해 주십시오”라 묻는다면, 그 대답은 이렇습니다.
전한 성제(成帝) 때의 도수사자(都水使者) 광록대부(光祿大夫) 유향(劉向)의 전기(傳記)에는 “유향이 널리 사적을 살피고 경서를 보았는데, 매번 ‘내가 전적을 들출 적마다 가끔씩 불경을 보게 된다’고 말했다. 아울러 『열선전(列仙傳)』을 지으면서, ‘내가 장서(藏書)를 검색하며 태사 창(創)을 따라 열선도(列仙圖)를 찬술하였는데, 황제 이래의 여섯 대에서 지금까지 선도(仙道)를 이룬 이가 7백여 인이었다. 그러나 유향이 그 허실을 살펴보니 단지 1백46인만이 얻었다’고 말했으며, 또 ‘그 가운데 74인은 이미 불경을 보았다’고 말했다”는 대목이 출전됩니다.
추측컨대 유향이 말한 장서라는 것은 대개 시황시대 사람의 장서일 것입니다.
또 어떤 이는 공자의 집에 감춰져 있던 책이었다고 말하는데, 이로 미루어 보면, 어찌 진한(秦漢) 이전에 불법이 진단에 유행하지 않았겠습니까?
도안이 기록한 열두 분의 현자도 찾아보면, 바로 그 70인의 명수 가운데 있었는데, 지금 『열선전』에는 72인이 나옵니다.
『문수사리반니원경(文殊師利般泥洹經)』에서는, “부처님께서 멸도하신 지 4백50년 후에, 문수가 설산(雪山)에 이르러 5백 선인에게 12부(部)의 경전을 설하고서 본국에 돌아가 열반에 드는데, 항성(恒星)의 서광(瑞光)이 그 때를 조짐하였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지리지』 「서역전」을 살펴보면, “설산은 바로 총령이다. 그 밑에 있는 서른여섯 개의 나라가 예전부터 한나라를 받들었다. 총령에는 눈이 많기에 설산이라 부른다”는 대목이 있으니, 문수사리가 가서 선인(仙人)을 교화한 곳도 바로 이 곳입니다.
자세히 대조해 보면, 바로 유향의 말을 뒷받침하고 있으니, 비록 진나라 치세에 불타 없어졌다가 한나라가 일어나자, 다시 출현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도 형양(荊楊)ㆍ오(吳)ㆍ촉(蜀)ㆍ부풍(扶風)ㆍ낙양(洛陽)의 보탑이 있었던 자리는 모두 신비스러운 서응(瑞應)을 발하기에, 여러 서책이 있었다는 것도 단지 억설(臆說)만은 아닙니다.
성제(成帝) 홍가(鴻嘉) 3년 계묘년(癸卯年)에 유향이 『열선전』을 찬술한 것이 명확한 사실이니, 주나라 치세에 불법이 들어온 지가 오래되었는데도, 눈 뜬 장님이 “부처님이 있으면 연조가 짧아진다”고 말하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경률이상(經律異相)』에 따르면, 석가의 정법(正法)은 천 년이고 상법(象法)도 천 년이며, 말법(末法)은 만 년이라 합니다. 5천 년 이내에는 사부대중(四部大衆)의 학인(學人)이 삼달지(三達智)를 얻어 사도과(四道果)를 증득하고, 말법시대가 지나가면 드디어 가사(袈裟)를 입게 된다고 합니다.
『주서이기(周書異記)』를 살펴보면, “목왕(穆王)이 서방에 부처님이 있는 것을 알고는 화류팔준(驊騮八駿:화류는 목왕이 타던 8준마의 하나)의 말을 타고 서쪽으로 가서 부처님을 찾고자 하였으니, 이 때문에 선양(禪讓)하였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로 미루어 보면, 제나라 때의 상통(上統) 법사가 고려국(高麗國)의 사신에게 “서주(西周)의 제 5대 임금 소왕 24년 갑인년(甲寅年)에 태어나셨으니, 지금 무덕 5년까지가 바로 1천5백77년째이다”라고 대답한 것과 동일합니다. 따라서 목왕의 치세에 법이 이미 동방에서 행해졌음을 믿을 수 있으니, 유향조차도 “갈수록 분명해진다”고 말합니다.
또 한나라 무제 때에 곤명지(昆明池)를 파다가 검은 숯덩이 비슷한 것이 나왔는데, 동방삭(東方朔)에게 물어 보자, 동방삭이 “신도 잘 모르겠습니다. 서역의 호나라 사람에 물어보십시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나중에 외국의 사문 축법란이 왔을 때 이 같은 일을 물어 보자, 법란 스님이 이것은 겁초(劫初)에 타다 남은 재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동방삭은 박식한 사람으로 나면서부터 지혜가 남달라서, 묻는 것에 응수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고 대답 못하는 말이 없었는데, 어찌 동방삭의 강기(强記)가 호나라 사람만 못할 수 있었겠습니까?
대체로 동방삭이 불법을 일으키고자 뛰어난 사람이 온다는 것을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기에, 이같이 대답했던 것이라 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세상을 떠나시자, 아난(阿難)이 이를 총지(摠持)하여 한마디의 말씀도 잊지 않았는데, 가섭(迦葉)이 결집(結集)하는 때에, 1천 인의 나한이 모두 피지(皮紙)에 쓰고 패엽(貝葉)에 새겨서 5백 곳의 중국(中國)에 보내 각각 받들게 하였기에, 열여섯 대왕이 각각 탑을 동시에 세웠습니다.
한나라 치세에 비로소 동쪽으로 유전되었는데, 두 곳의 도읍을 거쳤으니, 제왕으로는 16대 동안 호본(胡本)과 범본(梵本)을 한나라의 정언(正言)으로 번역한 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와 6백여 년이나 되었습니다. 이로써 불일(佛日)이 다시 빛나게 된 것입니다.
영평(永平) 초년에 경전과 성상(聖像)이 다시 유행되어 개황(開皇)의 시작과 함께 흥성하였었습니다.
위(魏)나라 사람 주사행(朱士行)과 사문 위도안(衛道安) 등이 함께 기록해 둔 것만도, 화융(華戎)과 도속(道俗)을 망라하여 모두 1백82인이나 됩니다. 번역된 경ㆍ율ㆍ계 ㆍ논과 대소승 삼장(三藏)ㆍ 잡기(雜記) 등은 도두 2천1백71부로 총 6천4백46권이니, 참으로 팔마(八魔)의 경계에 감로(甘露)를 내지 않음이 없었기에, 혜일(慧日)이 삼유(三有) 가운데 들어와 장차 승업(勝業)을 영원히 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람에게 악행을 버리고 선행을 가르치는 것이 불법의 가장 최우선이기에, 나라를 보하고 인민을 이롭게 하는 것도 가히 여기에 따를 만한 것이 없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부혁이 망한다고 말한 집안은 도대체 누구의 집안이고, 망한다고 말한 나라는 도대체 어느 나라입니까?
삿된 소견의 어린 아이요, 뿔 없는 축생이며, 일찍이 승냥이의 마음을 먹고, 오랫동안 전갈 같은 독을 품어 털끝만큼의 선(善)은 없고 산악 같은 죄를 짊어졌으며, 자라서는 악을 뉘우치지 않았고 늙어서는 더욱 두터워져서 소경 같은 생각으로 성존(聖尊)을 헤아리니 이는 한 자[尺] 크기의 메추라기가 대붕(大鵬)을 비웃고 우물안 개구리가 창해(滄海)를 믿지 않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가히 천제(闡提)의 역종(逆種)이며 지옥의 죄인이라, 불쌍하고 연민스럽기 때문에 이렇게라도 논을 짓는 것입니다.
무릇 72군주ㆍ삼황ㆍ오제ㆍ공구ㆍ이노를 이 한나라 땅의 성인이라 하나, 그 골육을 삼천(三泉:지하)에 묻어 뉘여 놓으면 시체가 구양(九壤)에 세로로 누워있지 않은 이가 없었으니, 이는 부처님의 사리가 상서로움을 나투며 방광(放光)하는 것과는 같지 않습니다. 사리는 불로 태워도 타지 않고 다듬이돌에 놓고 망치로 내리쳐도 깨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지금이라도 다시 시험해 보면 분명해질 것입니다.
이 같은 한 가지 일만 하더라도 불법의 신령한 공덕을 알기 충분한데, 소위 진단의 여리 성인들로서 어느 누가 이에 짝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대도 비방하면서 소멸하려고 하니 참아 용납하기가 어렵습니다., 풍속을 해치고 복전(福田)을 깨뜨리며 생민(生民)을 현혹하고 조정을 더럽힌 것이 참으로 한탄스럽습니다.
사문 안세고(安世高)의 번역, 사문 구마라집(鳩摩羅什)의 번역, 사문 위(衛)나라 도안(道安)의 번역, 사문 엄불조(嚴佛調)의 번역, 사문 보창(寶唱)의 번역[『중경목록(衆經目錄)』 4권 1천4백33부], 오나라 사람 지겸(支謙)의 번역 , 진나라 사람 섭승원(攝承遠)의 번역, 진나라 사람 섭도진(聶道眞)의 번역[54부], 송나라 사람 사령운(謝靈運)의 번역, 북량(北涼) 안양후(安陽侯) 저거경성(沮渠京聲)의 번역, 원위(元魏) 기성군수(期城郡守) 양현지(楊衒之)의 번역, 원위 이곽(李廓) 찬술의 『중경목록(衆經目錄)』, 위나라 사람 만천의(萬天懿)의 번역, 제나라 경릉(竟陵) 문선왕(文宣王) 소자량(蕭子良)의 번역, 제나라 상시(常侍) 유힐(庾頡)의 번역, 양나라 사람 목도현(木道賢)의 번역, 양나라 무제(武帝)의 주해, 양나라 사람 원담윤(袁曇允)의 찬술, 양나라 간문제(簡文帝)의 찬술, 양나라 기실(記室) 우효경(虞孝敬)의 『내요(內要)』 수나라 사람 양천군수(洋川郡守) 담법지(曇法智)의 번역. 이상은 고래로 역경학자(譯經學者)들입니다.
송나라 임천(臨川) 강왕(康王) 의경(義慶)의 찬술, 태원왕(太原王) 염(琰)의 찬술, 낭야왕(瑯琊王) 건(巾)의 찬술, 제나라 경릉(竟陵) 문선왕(文宣王)의 저술, 제나라 저작(著作) 배자야(裴子野)의 찬술, 회남(淮南) 유준(劉俊)의 찬술, 진나라 중서령(中書令) 치경흥(郗景興)의 찬술, 중서령(中書令) 육명하(陸明霞)의 찬술[『사문전(沙門傳)』], 치중(治中) 장효수(張孝秀)의 찬술, 태원왕(太原王) 연수(延秀)의 찬술, 오홍(吳興) 주군태(朱君台)의 찬술, 진나라 중서시랑(中書侍郞) 우보(于寶)의 찬술, 팽택령(彭澤令) 도원량(陶元亮)의 찬술, 도사 도은거(陶隱居)의 저작, 도사 육수정(陸修靜)의 저작, 송나라 광록(光祿) 안연지(顔延之)의 저작, 제나라 은사(隱士) 주옹(周顒)의 찬술, 주나라 의동(儀同) 견란(甄鸞)의 찬술, 수나라 성도(成都) 비장방(費長房)의 찬술.
이상은 예부터 박식한 군자와 안목 있는 왕공(王公)이 삼보를 존중하여 사문의 전기를 손수 찬술한 이들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같은 선현들은 모두 불경을 번역하거나 목록과 전기를 썼는데, 학문이 깊고 옛것에 밝아 내외의 전적에 정통한 학자들입니다.
신망이 도속(道俗) 가운데 백미(白眉)이고, 문사(文士) 가운데 으뜸이었으나, 모두들 삼보를 받들며 일승(一乘)을 연구하였습니다. 세상을 멀리하고 영화(榮華)를 마다한 채 훌륭한 자취만을 즐겨 따랐기에, 삿된 소견의 무리들조차 한마디 입도 뻥긋할 수 없었는데, 유독 한 사람만이 이를 기뻐하지 않고 신랄하게 비난하고 악독한 말로 더럽히면서, 스스로를 반딧불처럼 빛내고자 그 모기 날개를 펴고자 하나, 어찌 하루를 사는 버섯[朝菌]이 초하루와 그믐[晦朔]을 알기나 하겠습니까?
쓰르라미가 봄 ㆍ 가을을 모르듯이, 그 들여다 본 것만 믿고 대도(大道)를 업신여기는 것이, 참으로 귀를 씻어야 할진대, 어찌 미더울 수가 있겠습니까?
조정의 대관과 박학한 군자를 청하여 내외의 전적을 살피게 한다면, 이 삿된 소견을 내는 자에게 무고(誣告)의 죄가 있음이 밝혀질 것입니다.
“불법이 한나라에 들어오자 치세에 이로움이 없었다”는 궤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공자는 주나라 영왕(靈王) 때에 태어났고 경왕(敬王) 때에 죽었으니, 세상에 70여 년간이나 있었습니다.
그를 성인이라 하니, 반드시 당시의 임금을 보필하여 바로잡을 수 있었는데도, 어째서 14년 동안 70개 국이나 다니면서, 송나라에서는 앉아 있던 나무가 잘리고 위나라에서는 쫓겨났으며 진채(陳蔡)에서는 양식조자도 떨어진데다 환퇴(桓魋)의 난에 살육을 피했으며, 부끄럽게도 초상집 개와 같다고 불렸겠습니까?
비록 제후(諸侯)가 부를 때마다 달려갔어도 일찍이 등용된 적이 없었으며, 춘추시대의 치세는 문무(文武)의 도(道)가 실추되어, 임금은 암둔하고 신하는 간사스러워서 예악(禮樂)이 붕괴되었습니다.
이때에도 부처님이 없었는데, 어째서 모반과 반란이 이리도 심했으며, 찬탈과 시역(弑逆)은 누구에 의한 것입니까?
공자가 완만하게 시절에 따르다가, 뒷걸음질쳐 난을 피하기에 바빠 처자식마저 보살피기 힘들었습니다. 백 년의 수명을 마치긴 했으나 역시 취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혹 포과(匏瓜)의 말이나 내뱉고, 혹 흘러가는 물을 보고 한숨을 쉬기도 하였으며, 실세인 계씨(季氏)에게 겸손했었고, 봉황새가 오지 않고 하수(河水)에 용도(龍圖)가 나오지 않는다고 애석히 여겼습니다. 마침내 노나라 애공이 서쪽에서 수렵하다 기린을 잡았다고 하자 소맷자락을 걷어 얼굴을 닦으면서, “내 도가 다했구나.”탄식하기도 했습니다. 비록 문도들이 3천 명이요 시(詩)를 산삭(刪削)하고 예(禮)를 정했다 하나, 죽은 뒤 이름조차 일컫지 않는다면, 내가 후대에 어떻게 비칠 것인가를 염려하고, 도척(盜跖)에게 모욕을 당했고 장인(丈人)의 기롱도 받았습니다. 이를 비교해보아도 논의하는 바를 가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공자와 노자 두 사람의 성인도 이를 근심하였는데, 어떻게 제가 목석처럼 입 다물고 탄정(彈正)조차 하지 않겠습니까?
“사찰에 승가 대중이 많아지면 반드시 역모 죄를 짓게 되니, 후조(後趙)의 사문 장광(張光)이나 후연(後燕)의 사문 법장(法長)이나 남량(南涼)의 도밀(道密)이나 위나라 효문제(孝文帝) 때의 법수(法秀)나 태화(太和) 시절의 혜앙(惠仰) 등이 모두 반란을 일으켰다”는 궤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최홍(崔鴻)의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를 살펴보더라도, 이같은 사람이 없었는데, 이는 도대체 어떤 사적에서 출전되는 것입니까?
거짓말을 지어내어 임금을 현혹시키니, 이에 나라의 사관(史官)에게 그 망령된 상주문을 조사할 것을 청합니다.
『전한서』와 『후한서』에 따르면, 곤양(昆陽)의 상산(常山)에 청니(靑泥)와 녹림(綠林), 혹산(黑山)에 백마(白馬)와 황건(黃巾) 및 적미(赤眉) 등의 수십여 적당(賊黨)이 있었으나, 모두 속인인지라 스님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데, 어찌하여 이것은 말하지 않습니까?
『후한서』에 따르면, 패주(沛州) 사람 도사 장로(張魯)의 어미가 자색(姿色)이 고우면서 귀도(鬼道)를 따랐는데, 유언(劉焉)의 집에 내왕하였다고 합니다. 유언이 나중에 익주자사(益州刺史)가 되자, 장로를 중용하여 독의사마(督義司馬)를 삼았는데, 장로가 별부사마(別部司馬) 장수(張修)와 함께 군사를 일으켜 한중태수(漢中太守)를 포위하여 살해하였습니다. 소고(蘇固)를 단절시키고 사곡(斜谷)에서 한나라 조정의 사신을 죽이고서 장로가 한중을 차지했던 것입니다. 다시 장수마저 죽이고 그 병졸을 가로챘는데, 이때서야 신(神)의 말이라 둘러대어 누런 옷을 입고 왕으로 자처하기 시작했습니다.
장로가 장각(張角) 등과 호응하여 무리를 모으면서 황건(黃巾)을 씌우고 도사의 복장을 차려 입혔는데, 마침내 이들 수십만 인의 적당이 천하에 해를 끼치면서 30여 년간이나 한중(漢中)을 점거하다가, 나중에 조조(曹操)에게 격파되자 황의(黃衣:황건적)도 이에 따라 멸망했다고 했습니다.
이때에도 사문은 한 사람도 없었고, 단지 도사만이 주름잡고 있었는데, 어찌하여 이것은 말하지 않는 것입니까?
한나라와 위나라의 명승(名僧) 가운데 덕화를 이루어 나라를 이롭게 한 이들이 즐비한데도, 어찌하여 이것은 말하지 않는 것입니까?
단지 나쁘게만 선전하여 남의 허물 잡는 것만 능하니, 어찌 군자라 할 수 있겠습니까?
『위지(魏志)』에서 말하기를, “장로(張魯)는 자(字)가 공기(公祺)이고, 조부는 능(陵)이다. 도를 배우더니 곡명산(鵠鳴山)에서 촉(蜀)의 학자를 불러다가 도가의 서책을 날조하여 백성을 속였는데, 도록(道籙)을 받는 이에게 다섯 말의 쌀을 받았기에, 세간에서는 쌀 도둑이라 불렀다.
장릉이 죽으면서 그 아들 장형(張衡)에게 업(業)을 전하였고, 장형이 죽으면서 장로에게 다시 전하였는데, 장릉을 천사(天師)라 하고, 장형을 사사(嗣師)라 하고, 장로를 계사(係師)라 하면서 자기들을 삼사(三師)라 불렀다. 장로는 어려서부터 유언과 친했는데, 유언이 죽자 그 아들 유장(劉璋)이 옹립되었으나, 장로가 따르지 않자, 장로의 어미와 그 가실(家室)마저 죽였다.
이에 장로가 한중을 점거하고, 귀도(鬼道)로써 백성을 다스리되, 부서(符書)와 장금(章禁)으로 근본을 삼았으니, 처음 배우는 이를 귀졸(鬼卒)이라 이름하였다. 도록을 받는데 황금이나 비단 같은 물건을 바치면 제주(祭酒)라 부르면서 제각기 무리를 통솔하게 하였으니, 무리가 많아지면 치두(治頭)라 달리 이름하였다. 병이 나면 머리에 대도(大都)를 차게 한 것도 장각과 흡사하다“고 하였습니다.
『후한서』 「황보숭전(皇甫嵩傳)」에 따르면, 거록(鉅鹿)의 장각(張角)이 대현랑사(大賢郞師)라고 자칭하면서, 황노를 받들며 장릉의 술법을 행하였다” 합니다.
부수(符水)와 주설(呪說)을 써서 병을 치료하였으니, 제자 여덟 명을 사방으로 보내서 그 교화를 펴게 하였는데, 다닌 지 10여 년만에 무리가 수십만에 이르러서, 청주(靑州)ㆍ서주(徐州)ㆍ유주(幽州)ㆍ기주(冀州)ㆍ형주(荊州)ㆍ양주(楊州)ㆍ연주(兗州)ㆍ예주(豫州) 8개 주의 백성으로 호응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이에 36방(方)을 설치하고 방마다 ‘장군’의 호를 내렸는데, 대방(大方)은 만여 명이고, 소방(小方)은 6천여 명이었습니다. “창천(蒼天)이 죽으니 황천(黃天)이 나오리라. 갑자년에 천하가 대길하리라”는 요언(謠言)을 퍼뜨려, 백토로 경읍과 사문(寺門)마다 쓰게 하되, 모두 ‘갑자’란 글자로 새겼습니다.
중평(仲平) 원년 3월 5일에 안팎에서 일제히 도사의 황건(黃巾)과 황갈(黃褐)을 입게 하면서 사람을 죽여 하늘에 제사지내기도 하였습니다.
이때에 적당 수십만의 무리가 처음으로 영천(穎川)에서 난리를 일으켰는데, 바로 황보숭에게 토벌되었습니다.
남정(南鄭)의 배반으로 한나라가 촉(蜀)을 잃은 일, 손은(孫恩)이 선도(仙道)를 익혀 진(晉)나라가 망한 일, 도육(道育)의 제사로 송나라가 화를 입은 일, 우길(于吉)의 부금(符禁)으로 오나라가 위태했던 일, 공기(公旗)가 선도(仙道)를 배웠다가 집안이 멸한 일, 진서(陳瑞)가 도법(道法)을 배웠다가 멸족된 일, 위화(魏華)가 지아비를 어긴 일, 장릉(張陵)이 조강지처를 버린 일, 자등(子登)이 아비를 등지고 위숙(衛叔)이 형을 죽인 일.
이상은 예전부터 도사로써 반역을 일으킨 자들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자고로 장릉의 3대가 귀도(鬼道)를 행하였으나 부서(符書)와 장초(章醮)는 도가(道家)에서 나왔는데, 요망한 짓을 서슴지 않고 길흉을 함부로 지껄이기에, 간악함이 이로부터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오나라와 위나라 이후나 진나라와 송나라 이래로 도속이 요매(妖魅)에 빠진 것이 그 수가 적지 않은데도, 어찌하여 스님들만을 이에 끌어들이고 유교와 도교의 두 교는 말하지 않는 것입니까?
대업(大業) 말년의 왕세충(王世充)ㆍ이밀(李密)ㆍ두건덕(竇建德)ㆍ유무주(劉武周)ㆍ양사도(梁師都)ㆍ노명월(盧明月)ㆍ이궤(李軌)ㆍ주찬(朱粲)ㆍ당필(唐弼)ㆍ설거(薛擧) 등도 모두 속인이었지 스님이 아닌데도, 어찌하여 이것은 말하지 않는 것입니까?
일마다 치우치고 도리마다 어긋나면서 악인과 빌붙어 현인을 시기하니, 부혁이야말로 충의롭지 못함이 명백합니다.
“개벽(開闢) 이래로 지금의 무덕 4년(621년) 신사년(辛巳年)까지 2백76만 1천1백8년을 거쳤다”는 궤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부혁 자신도, “포희씨(庖犠氏)는 대체로 30세 동안 2만 2백97년을 다스렸다”고 이미 말했습니다.
그러나 소호씨(少昊氏)에서 한나라 고조(高祖)까지가 3천2백1년이니, 포희씨에서 한나라 고조까지의 29대를 모두 합산하더라도 2만 3천4백98년에 불과한데, 도대체 어떤 것에 근거해서 처음 개벽한 무렵에서 무덕 4년까지가 갑자기 2백76만여 년으로 늘어났습니까?
제왕(帝王)의 계보(系譜)를 대조해 보면, 천지가 처음 일어났을 때는 마치 병아리 같았기에, 반고씨(槃古氏)가 그 가운데에서 9만여 년을 지나고서야, 그 다음으로 삼황 및 수인씨(燧人氏)가 비로소 2만 2백97년간을 다스렸습니다.
제나라 비서(秘書)인 양분의 『사목』에 따르면, 복희씨(伏犠氏)의 원년은 갑인년(甲寅年)인데, 개황 원년 신축년(辛丑年)까지가 6만 1천6백8년이라 하니, 총괄하면 17만 1천9백5년이나 여기서 말하는 것과 비해 보면 차이가 너무나 벌어집니다. 따라서 연기(年紀)를 다시 교감하여 짧게 고칠 것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정사(正史)의 기록을 살펴보면, 복희씨가 처음 팔괘(八卦)를 그리고 갑자(甲子)를 풀어서 서계(書契)를 지었기에, 세년(世年)이 있게 된 것으로, 포희씨 이전에는 기력(紀曆)이란 것이 아예 없었는데, 도대체 무엇에 근거하여 늘리고 줄이게 되었습니까?
“오랑캐 나라 부처의 삿된 가르침을 서역으로 물리치고 승니를 모두 환속시키라”는 궤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장주(莊周)는 “육합(六合)의 안에서는 성인에 대해 대강만 말하고, 육합의 바깥에서는 성인을 그대로 놓아둘뿐 논의하지 않는다”고 하였고, 노자는 “역(域) 가운데 사대(四大)가 있으나, 도(道)에 머무는 것이 첫째이다”고 하였습니다.
시(詩)ㆍ서(書)ㆍ예(禮)ㆍ악(樂)의 이룸을 살펴보면, 아름다운 인륜을 장구히 하고 충열(忠烈)과 효자(孝慈)를 밝히려면 먼저 마음을 공경(恭敬)에 두고서 임금과 아비를 섬겨야 하는데, 지극한 덕을 칭송 받더라도 오로지 위를 편안케 하고자 백성을 다스리는 것뿐입니다.
그 요도(要道)라는 것이 단지 풍속을 변화시켜 위(衛)나라를 노나라로 되돌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데, 어찌 해탈의 말을 입에 담을 수나 있겠습니까? 끝내 육부(六府)와 구주(九疇)에 구경(究竟)의 이치를 펴지도 못하는 것일 뿐입니다. 생을 두터이 하고 만물을 고르게 한다는 말이나 용도(龍圖)와 봉기(鳳紀)의 이야기조차도, 어진 마음을 지녀서 미더움을 더하여 여향(厲鄕)이나 다스리자는 뜻이고, 경(經)을 산정(刪定)하고 역상(易象)을 찬탄한 것도 궐리(闕里)의 글이나 펴자는 것뿐입니다. 그 다음을 ‘구류(九流)’라 이르고, 마지막을 ‘칠략(七略)’이라 하였습니다.
『전한서』 「예문지(藝文志)」에 실린 서책을 살펴보면. 모두 1만 3천2백69권인데, 작게 보면 일마다 이롭지 않은 책이 없으나, 크게 보면 도(道)를 풀어내는 책은 보이지도 않습니다.
결국 모두 한 생 이내에 국한되는 것으로 삼세(三世)를 밝혀 뛰어넘는 것은 없다 하겠습니다. 당세에 드러난 인과의 이치를 새벽에 건너고자 하여도 여전히 어둡고, 길하고 흉한 업보(業報)의 이치는 고개를 넘을 때까지도 훤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소요유(逍遙遊)」 한 편도 유유(有有)의 속정(俗情)에 미혹한 것이고, 『도덕경(道德經)』 두 편도 공공(空空)의 경계에 들지 못하기에, 여전히 육합의 껍데기 속이면서 오상(五常)의 속된 꾀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어찌 사류(四流)를 면하여 호한(浩汗)해질 수 있겠습니까?
번뇌의 장소에서 육취(六趣)를 시끄럽게 하면서 진로(塵勞)의 업이나 지을 뿐입니다.
원래 실상(實相)은 깊고 아득한지라, 요도지도(要道之道)를 넘어서는 것이며, 법신(法身)은 아예 끊어졌는지라, 현지우현(玄之又玄)을 벗어난 것입니다.
오직 우리의 큰 스승만이 이 같은 묘각(妙覺)을 체득해서 이변(二邊)을 담박에 버리고 만덕(萬德)을 모두 거두어 시끄럽지도 적막하지도 않으신데, 어떻게 경계의 지혜로 밝지도 않고 어둡지도 않음을 구할 수 있으며, 어떻게 형체와 이름으로 취할 수 있겠습니까?
작게는 작아서 안이 없고, 크게는 커서 바깥이 없는지라, 법계(法界)를 헤아려 대비(大悲)를 일으키고 허공을 따져서 서원(誓願)을 세우셨으니, 이것이 예토(穢土)에 생을 받아 왕궁에 거룩하게 태어나시어 금색신(金色身)을 보이시고 옥호(玉毫)의 상(相)을 펼치시면서, 자비의 구름을 취령(鷲嶺)에 드리워 화택(火宅)의 불길을 끄시고 계봉(雞峰)에서 지혜의 바람을 드날리자 어두운 길의 안개가 걷히게 된 이유입니다.
걸으실 적마다 금련(金蓮)이 발을 받치고, 앉으실 적마다 보개(寶蓋)가 몸을 덮었습니다.
나가시면 제석천(帝釋天)이 앞장서고 들어오시면 범천(梵天)이 뒤따랐으며, 왼쪽을 보필하는 밀적(密迹:불타를 보위하는 夜叉神의 총칭)은 악을 없애는 것으로 공을 삼고, 오른쪽을 살피는 금강(金剛)은 선(善)을 기르는 것으로 일을 삼았습니다. 성문(聲聞)과 보살(菩薩)들이 받들되 신하가 임금 모시듯 하였는데, 팔부(八部)의 만령(萬靈)이 다시 삼엄하게 에워쌌습니다.
열반경을 설하실 때에는 땅이 여섯 종류의 진동을 나타냈고, 반야경을 설하실 때에는 하늘에서 네 가지 꽃이 비 오듯 내렸습니다.
참으로 백복(百福)이 장엄하여 만월이 창해(蒼海)에 임하듯 하였고, 천 갈래 빛이 휘황하게 빛난 것이 햇빛이 보배산에 비치듯 했던 것입니다.
사자후(獅子吼)를 한 번 발하시면 외도(外道)들의 예봉을 꺾었고, 법고(法鼓)를 한 번 울리시면 천마(天魔)조차도 머리를 숙였습니다. 실로 이러한 까닭에 부처님을 법왕(法王)이라 부르는 것인데, 어찌 망해가는 주나라의 가섭(迦葉:老子)과 그 덕을 비길 수 있겠으며, 말세의 유동(儒童:孔子)과 서로 함께할 수 있겠습니까?
이리하여 천상천하에 홀로 조어장부(調御丈夫)라 칭하는 것인데, 삼천대천세계가 모두 그 자비의 은종을 우러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치가 심오해서 방편에 의지한 후에야 깨우치게 되니, 교문(敎門)의 선교(善巧) 역시 선지식(善知識)에 의지하여 형통하고 나서야 가르침을 가다듬을 수 있습니다.
8만 4천의 법장(法藏)이 그 도를 갈무리했으니, 이제(二諦)와 십지(十地)의 기틀이고, 기원(祈園)과 녹원(鹿苑)의 말씀이고, 바다 속 용궁의 밀지(密旨)일진대, 옥첩(玉牒)과 금서(金書)의 글자와 칠처(七處)와 팔회(八會)의 말씀 모두가 지극한 도를 백왕(百王)에 드리우지 않음이 없고 현풍(玄風)을 만고(萬古)에 드날리지 않음이 없습니다.
진리의 말씀과 실다운 말씀이 참으로 불가사의해서, 가까이는 나라를 편안히 하고 백성을 이롭게 하며, 멀리는 범부를 초월하여 성도(聖道)를 증득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형체가 육도(六道)에 두루하고 가르침이 시방에 가득한지라, 참으로 세계의 복전(福田)이고 창생(蒼生)이 돌아갈 곳입니다.
지금 이를 존중하고 믿는 이들은 마치 칠요(七曜:北斗七星)가 북진(北辰:北極星)을 도는 것과 같고, 교화를 받고서 믿는 이들은 만 갈래 강물이 바다로 흘러드는 것과도 같다 하겠습니다.
그 신변(神變)과 공업(功業)이 천도와 인도를 이롭게 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참으로 무어라 이름하지도 못하는지라, 항하사(恒河沙) 같은 인(因)이 충만해서 상락(常樂)의 과보를 얻기에, 그 어짊이란 이루 헤아릴 수도 없습니다.
단지 시운(時運)이 무르녹지 못해서 호족(胡族)과 한쪽(漢族)이 달리 감응한 것뿐인데, 이 때문에 서방이 먼저 그 말씀과 형상을 받들었고, 동국(東國)에서는 잠깐 보고 듣기만 했습니다.
자비의 구름이 층층이 쌓이고 지혜의 태양이 빛을 발함에 이르자 영평(永平) 연간에 금인을 꿈꾸었고 적오(赤烏)의 세차(歲次)에 사리(舍利)를 보았는데, 마침내 한(漢)ㆍ위(魏)ㆍ제(齊)ㆍ양(梁)의 정치에서 상교(像敎)가 부흥하게 되었습니다.
연(燕)ㆍ진(秦)ㆍ진(晉)ㆍ송(宋) 이래로 명승이 배출되었으니, 혹 청대(淸臺)의 주변에서 만월(滿月)을 그리기도 하였고, 혹 옹문(雍門)의 바깥에서 상륜(相輪)을 밝히기도 하였습니다.
하북(河北)에서 그 말을 새기면 한남(漢南)에서 이를 베꼈으니, 도는 삼보(三輔)를 흥하게 하고 믿음은 구주(九州)를 윤택하게 하였습니다. 강좌(江左)에서 성행하다가 금행(金行)을 거치면서 점점 풍성해졌는데, 위수(渭水)에서는 소요(逍遙)의 원(苑)이 갖춰졌고 여산(廬山)에서는 반야(般若)의 대(臺)에 인재들이 총집하게 되자 심오한 문장과 뜻을 지닌 이들이 총령을 넘어왔으며 이에 석학과 고승이 줄지어 멀리서 찾아 왔습니다. 마침내 양나라 무제의 치세에 이르러 삼교(三敎)가 연이어 저울질하였고, 수나라 문제(文帝) 초엽에는 삼승(三乘)이 나란히 하였습니다. 비록 몸은 자극(紫極)에 있어도 마음은 분양(汾陽)에 두었으니, 맛난 음식조차 끊고 요리사도 내보냈습니다, 계율의 향기를 맡고 법의 즐거움을 맛보며, 중생을 사류(四流)에서 건져내기 힘들 것을 염려하여 몸소 칠변(七辯)을 다하여 지키면서도, 곤룡포(袞龍袍)를 가벼이 보아 물들인 옷만 입고, 아로새긴 가마를 버리고 부들 방석에만 앉았기에, 지금에 이르도록 혜대(惠臺)의 업(業)을 널리 이룩하였고 표탑(表塔)의 기틀을 널리 열었던 것입니다.
마침내 다섯 도읍의 호족(豪族)이 벼슬도 마다 않고 찾아 들었고, 사해(四海)의 명가(名家)가 영화를 버리고 도에 들어갔습니다. 자고로 삼황(三皇)과 삼왕(三王)이 다스리던 땅은 성교(聲敎)가 미치는 경계였기에, 머리 숙여 회향(回向)하고 오체투지(五體投地)로 귀의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이미 만물을 이롭게 한 것이 깊고도 오래되었으니, 공자와 노자가 드리웠다는 풍화가 어찌 이보다 클 수가 있습니까?
『십육국춘추』나 『삼십국춘추(三十國春秋)』에서의 고승과 명승 및 모자(牟子) 등의 전기에 따르면, 바야흐로 무한 명제 영평 10년 이래로 불법의 동쪽으로 전해진 것이, 조대(朝代)로는 10대, 횟수로는 6백여 년이 흘렀는데, 명승과 대덕(大德)으로 세상에서 존중받은 이가 대체로 2백57인입니다. 방계(傍系)로 덧붙여 나타난 이나 연나라와 조나라의 왕공(王公) 및 제나라와 양나라의 경상(卿相) 등이 대체로 2백51인으로 도합 5백8인이었습니다.
그 행업(行業)을 표시하고자 크게 10례(例)를 정하였으니, 첫 번째가 역경(譯經)이고, 두 번째가 의해(義解)이고, 세 번째가 신이(神異)이고, 네 번째가 습선(習禪)이고, 다섯 번째가 명률(明律)이고, 여섯 번째가 유신(遺身)이고, 일곱 번째가 송경(誦經)이고, 여덟 번째가 흥복(興福)이고, 아홉 번째가 경사(經師)이고, 열 번째가 창도(唱導)입니다.
이 같은 고승들은 사의(四依)를 본받은 덕이 있고 삼업(三業)을 완비한 공이 있었는데, 법이 진단에 전해진 것도 실로 이들에 의한 것입니다. 이에 삿된 소견을 숨겨서 감히 말도 못하다가, 단지 몇 가지 악한 것만을 들추어 말한 것입니다.
대체로 설산 가운데 감로가 많더라도 독초도 있고, 큰 바다 속에 명주(明珠)가 있더라도 나찰(羅刹)도 있으니, 비유하건대 곤륜산(崑崙山)에 조약돌이 없는 것과 같고, 등나무 숲의 나뭇가지 하나가 부러진 것과 같다 하겠는데, 어찌 이를 괴이쩍게 여겨 아예 없애려 드는 것입니까?
역경 사문 제1례 의해 사문 제2례, 신이 사문 제3례[20인], 습선 사문 제4례, 명률 사문 제5례, 유신 사문 제6례, 송경 사문 제7례, 홍복 사문 제 8례, 경사 사문 제9례 , 창도 사문 제10례.
이들 사문들은 혹 험한 사막을 넘어오기도 하였고, 혹은 큰 파도를 타고 오기도 하였습니다. 모두들 목숨을 걸고 경을 홍포(弘布)하고자 몸을 잊고 순교(殉敎)하였는데, 혹 신통력으로 세상을 구하기도 하였고, 혹 사람들에게 기적을 행하기도 하였고, 혹 지혜로 인도하고자 가슴을 가르기도 하였고, 혹 감득(感得)하는 바에 따라 교화하기도 하였습니다.
깊은 선사(禪思)의 공덕이 숲처럼 무성하면서도, 높고 맑은 계행이 서릿발처럼 엄하고 깨끗하였습니다. 복을 심어 선(善)을 일으켜 구하는 바를 암암리에 이뤄주면서, 법언(法言)을 외워 유계(幽界)과 현계(顯界)를 모두 기쁘게 하여, 마침내 삼장(三藏)과 사아함(四阿含)의 공용(功用)을 넓혔는데, 방등부(方等部)와 반야부(般若部)에서 신심을 얻는 이가 유독 많았습니다.
신령스러운 교화는 넓디넓어서 먼 곳도 마다 않고 반드시 이르는지라, 총하(葱河)도 반 걸음의 거리일 뿐입니다. 그러나 성광(聲光)은 보고 듣는 한계가 있으니, 어찌 때를 맞추지 않았겠습니까?
인연과 운수가 맞아야 상교에 감득하여 통하게 되니, 혹 서역의 대신(大神)이라 이르거나, 혹 염부제의 임금이라고도 하였습니다.
마등 스님이 서둘러 왕림하시자, 이에 법란이 도를 머금어 덕을 내렸습니다. 구마라집(鳩摩羅什)은 학문이 크고 깊으며, 신감(神監)이 오묘한 데다 중국 땅을 누비면서 방언을 익혔는데, 배운 이가 3천이고 입실(入室)한 이가 바로 8명의 준재입니다.
도생(道生)ㆍ도융(道融)ㆍ담영(曇影)ㆍ승예(僧叡)ㆍ혜엄(惠嚴)ㆍ혜관(慧觀)ㆍ도항(道恒)ㆍ승조(僧肇)가 언전(言前)에 깨닫고서, 난초와 계수(桂樹)처럼 향기로운 말씀에 붓을 들어 뜻을 이었기에, 실로 사람을 제대로 얻었다 하겠습니다.
진(晉)나라에는 도안(道安)이 있어 당세에 이름을 날렸는데, 불도징(佛圖澄)에게 학문을 늘리고 혜원(惠遠)에게 그 업을 전했습니다. 문인(門人)이 날로 성하여 당세에 현인이 줄지 않았으니, 가히 진군(陳郡)의 사안(謝安)이 그의 신준(神俊)함을 추앙할 만 했고, 양양(襄陽)의 습욱(習郁)도 그의 뜻이 고원(高遠)함에 굴복하였습니다. 진 나라 혜제(惠帝)가 난리를 당해 파천(播遷)하게 되었는데 이로부터 갈호(羯胡)가 독을 뿜어 중주(中州)를 유린하고, 유요(劉曜)가 모반을 일으켜 앞에서 찬탈하고, 석륵(石勒)이 뒤에서 범하여 재앙을 뿌렸는데 이에 화하(華夏)가 나뉘고 무너져 인민이 도탄에 빠졌습니다.
성사(聖師) 불도징이 살상이 거듭되는 것을 가엾이 여기고 고통이 끝나지 않는 것을 불쌍히 여겨 드디어 갈피(羯陂)에서 신령한 교화를 펴시고, 양업(襄鄴)에서 현기(懸記)를 보이면서 비주(袐呪)로써 제도하였으니, 향기를 머금어 위급함을 구했습니다.
경종을 울리고 고달픔을 덮어 주며 길흉을 깨닫게 하면서 마침내 석륵(石勒)과 석호(石虎)를 발심시켜 사민(四民)이 해를 면하게 하였는데, 백족화상(白足和尙)이 칼날을 밟아도 상하지 않게 하였기에, 유법(遺法)이 이로써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뜻을 상분(上分)에 두고서 몸을 환호(圜戶)에 두었기에, 제왕이 더욱 신심을 다했던 것이 여러 사적에 더 자세히 나옵니다. 그 공에 힘입지 않았다면, 장차 영겁토록 등불을 전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논의하는 이마다 모두들, “스님들이 화하(華夏)의 성종(聖種)을 빛냈다”고 말하니, 부처님이야말로 암암리에 국가를 보살피고 황기(皇基)에 복을 내리시는지라, 반드시 물리쳐 폐지할 이유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우리 대당국이 천하를 소유하게 되어서는, 28수(宿)에 감응하여 천자(天子)의 운세를 안정시켰으니, 액운을 막고 세상을 건지는 덕은 탕왕과 무왕을 뛰어넘어 홀로 높다 하겠고, 흉노의 발호를 평정한 공은 한나라와 위나라를 뛰어넘어 고고하게 드러났으니, 참으로 위대하고 거룩한지라 찬양하기도 어렵습니다.
한층 더 마음을 불법에 두고 뜻을 현문(玄門)에 굽혀서, 불상을 조성하고 경전을 새기며 스님들을 득도(得度)시켜 사찰을 세우면서, 갖가지 공덕과 곳곳의 단나(檀那)로 화하(華夏)와 이융(夷戎)을 이롭게 하여 어진 백성을 물가로 이끌었습니다.
바야흐로 상황(上皇)의 풍화를 일으키고 정각(正覺)의 도(道)를 연다면, 이곳에서 오제(五帝)를 뛰어넘고 저곳에서 삼왕(三王)을 초월하게 되니, 다스림은 태평성세를 이루고 영구히 융성하고 풍화가 두터워질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껏 삿된 소견에서 나오는 부혁의 더러운 말은, 대체로 천지가 용납하지 않을 것이고, 인륜(人倫)도 함께 저버릴 것입니다.
이 못난 글을 성상(聖上)이 펴 보시기에는 보잘 것이 없다 하겠습니다만,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홍도(弘道)의 은총을 펴시고, 보육을 지극히 하는 혜택을 내려 주십시오.
청하건대, 역순(逆順)을 살피시고 진위를 의론해 주십시오.
『열반경(涅槃經)』에서도, 부처님께서 멸도하신 후에 법을 국왕께 부촉하셨다 하였는데, 폐하께서도 임금으로 임했으니 부촉하신 바를 바르게 행하십시오.
삼가 원하건대, 사설(邪說)을 막아 상교(像敎)를 부흥시키십시오.
이리하여 박학다식한 군자나 바른 소견의 도인이 이를 듣고서, 다 함께 팔을 걷어 올리고 손뼉을 치며 눈을 크게 부릅뜨면서 논(論)을 짓겠다 할 것입니다.
맹자는 “내가 어찌 변론 좋아하겠느냐. 부득이 해서 그렇게 한다” 하였습니다. 대체로 허망함은 참다움보다도 빛나고 진실한 기록은 거짓된 것보다 어지러운데, 세상 사람들이 옳고 그름을 깨닫지 못하고 붉은 색과 자주 빛을 가리지 못하여 기와조각과 보옥(寶玉)을 한데 섞어 뭉쳐 놓은 듯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말을 하려니, 어찌 제 마음이 이를 참고만 있겠습니까.
공자도 “시인(詩人)은 가만히 있지 못함을 근심하는데, 나도 숨기지 못함이 근심스럽노라”고 하였습니다.
이로써 논하자면, 대체로 옥이 돌로 인해 혼잡해지면 사람들이 가려내지 못하고 옳은 것을 도리어 그르다 하며 허망함을 돌이켜 실답다 하니, 어찌 이를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왕자(王者)의 혼령이 내리는 것을 살펴보면, 혹 유성이 달을 꿰뚫거나, 혹 긴 무지개에서 번개가 치거나, 혹 붉은 까마귀가 부서(符書) 물고 오거나, 혹 흰 옷 입은 혼령이 밤에 통곡하면서 운룡(雲龍)의 기운을 띠고 기이한 상(象)을 나투는 것은 모두가 천명(天命)이지 인간에 연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혹 누군가가 “주나라는 그 조력(祖曆)을 다했는데, 어찌하여 진나라는 대기(大期)에도 미치지 못했는가?” 하고 묻기에, “명리(冥理)는 헤아리기 어렵고 인정(人情)은 미혹되기 쉽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귀결을 대조해 보면, 대략이나마 자세해 질 것입니다.
예전에 송(宋)의 경공(景公)은 덕을 쌓고 마음을 지키고자 바로 벼슬을 물러났으며, 정란(丁蘭)은 효심이 지극하여 목모(木母)조차도 얼굴을 펴고 웃었습니다.
단지 마음을 정미롭게 한다면 가상(嘉祥)이 저절로 이루어질 터이고, 자신을 깨끗이 하면 재앙이 저절로 수그러질 것이다 했으니, 참으로 미더운 말이라 하겠습니다.
저 문왕(文王)ㆍ무왕(武王)ㆍ성왕(成王)ㆍ강왕(康王)의 정치가 융성했던 바를 볼 것 같으면, 대체로 선을 쌓은 바탕에서 복이 연이어 무성해지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조력(祖曆)을 다했던 이유입니다.
진시황이 보위에 있으면서 분서갱유(焚書坑儒)로 천하를 혹독하게 다뤘는데, 이세(二世)에 이르러 살육이 더욱 극심해져 생민이 두려움에 떨며 몸 둘 바를 몰랐기에, 마침내 상천(上天)이 화를 내려 대기(大期)에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주역』에서 “착하지 못한 집에는 반드시 나중에라도 재앙이 있다”고 하는 말은 바로 이것을 말한다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흥하고 멸하는 이치는 능력에 달린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일체가 예전의 인(因)에서 그리되는 것이고 모두가 행업에 연유하는 것이니, 참으로 증거가 분명하다고 하겠습니다.
근자에 주나라 무제(武帝)가 그릇된 소견으로 사찰을 허물고 스님들을 폐하였는데, 발걸음을 떼는 사이에 후사(後嗣)가 사라졌습니다.
수나라 문 황제가 처음 태어난 것을 한 번 살펴보면, 바로 어떤 신니(神尼)가 이를 양육하였는데, 나중에 보(寶) 선사가 보고 패왕(覇王)이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윽고 보위에 올라서 불법을 널리 일으켜 승니를 크게 득도시키자, 사부대중이 모여들어 삼학(三學)을 엄숙히 하면서 마음 놓고 도를 닦아 국은에 보답하였습니다. 문제가 등극하자 차츰 전쟁이 끝이 나고 나날이 풍요로워졌으니, 가상(嘉祥)의 신령한 감응은 사서(史書)마다 끊임없이 씌어 있습니다.
사해(四海)에 풍파가 없고 육합(六合)이 함께 기뻐했는데, 나중에 대악(岱岳)에서 봉선(封禪)하였으니, 그 치세야말로 태평스러웠다 하겠습니다. 이어서 양제(煬帝)에 이르러 사찰과 불탑을 봉쇄하고 승니를 내쫓았으니, 온갖 사치를 다하여 만사를 도에 지나치게 하였는데, 천명이 다했는지 해외로 친히 정벌까지 나섰으니 화근은 무고한 백성들에게 미쳤고 재앙은 신세(身世)에 심어졌습니다. 이로 보아 바로 눈앞에서 징험할 수 있는데, 어찌 내생까지 기다리겠습니까?
『논형(論衡)』에서 “속유(俗儒)는 옛 것만을 기리고 지금 것을 탓하니, 말마다 앞의 것은 감싸고 뒤의 것은 내친다. 옛날의 헛된 명예는 그르다 하지 않고, 지금의 실다운 의논은 꾸짖는다. 오래 내려온 거짓말은 믿고 근대와 지금의 진실된 일은 소홀히 한다. 지마(指馬)의 요체는 알지 못하고 유(儒)ㆍ묵(墨)의 이야기로 서로 다투는 것이, 이미 병세가 고황(膏肓)까지 들었기에 치료조차도 힘들다”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위대하구나, 석씨의 가르침이여. 삼세(三世)를 포괄하고 사류(四流)를 망라하니, 만상(萬象)이 태공(太空)에 즐비한 것과 견주어지고, 팔하(八河)가 창해(滄海)로 흐르는 것과 비슷하구나.
자(子)ㆍ사(史)를 널리 찾고 경(經)ㆍ고(誥)를 둘러보면, 육종(六宗)과 칠묘(七廟)의 전모(典謨)가 있고, 오악(五岳)과 사망(四望)의 의식(儀式)이 있고, 단사(丹笥)와 금판(金版)의 글이 있고, 명산(名山)과 석실(石室)의 전기(傳記)가 있고, 옥검(玉檢)과 지니(芝泥)의 책(冊)이 있고, 운대(雲臺)와 인각(麟角)의 서계(書契)
원문
破邪論卷下 旣唐濟法寺沙門釋 法琳 撰答秦仲已下三十五世六百餘年者對曰史記云自殷已前諸侯不可得而譜爲多失第次年代難知故尚書但以甲子爲次第而無年月者良以史闕不記也邪見乃云始於秦仲迄于二世有六百餘年者一往似長出何的證按春秋已前秦本未有春秋已來始有秦伯當春秋時秦雖漸霸但是周之小邑孝王之世令非子放馬於汧渭之間不承天命未有正朔曾孫秦仲宣王之世始受車馬爲侍御之臣仲孫襄公以送平王東遷進爵爲伯文公已下始見史記自茲訖滅不過二百餘年史記竹書及陶公年紀等皆云秦無曆數周世陪臣故隱居列之在諸侯之下何因得有年紀續至胡亥史記但厲公列之一百一年終乎二世縱有年代皆附春秋自無別紀
[출처] 불교기록문화유산아카이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