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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8. 묵상글 ( 사순 제2주간 화요일. - 은총의 담지자? 낭비자?. 등 )
^ 호명환 신부님. 일부 : 아직 / 08:20 추가
^ 조명연 신부님 : 아직 / 08:20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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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8. 사순 제2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3.18 03:14
- 은총의 담지자? 낭비자?
우리가 겸손하게 되면 다른 사람 위에 있으면서 판단하고 단죄하는
그런 잘못을 범하지 않을 것이라는 나눔을 어제 저는 했지요.
겸손하지 못한 제가 다시 말해서 교만한 제가
저를 경계하는 뜻으로 겸손에 대해서 말을 많이 하게 되는데
그래서인지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도 다음 말씀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너희는 선행을 배워라.”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둘을 합치면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들처럼 선생이라고 불리길 좋아하며
가르치려고만 들지 말고 배우는 자세를 가지라는 가르침이 되겠습니다.
사실 나이를 먹으면서 좋아진 점은 옛날보다는 좀 겸손해진 점이 있고,
어디서나 남을 가르치려 드는 훈장 기질은 좀 나아졌지만
배우려는 자세는 아직 너무 부족하기에 아직 저의 겸손은 멀기만 합니다.
그렇습니다.
가르치려고 들지 않는 것만으로는 아직 겸손하다고 할 수 없고
배우려는 자세가 되어 있어야 그래도 겸손하다고 할 수 있지요.
어디서나 배우고 누구에게나 배우는 자세가 되어 있을 때
진정 겸손하다고 할 수 있고 성숙한 겸손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런 면에서 저는 교묘한 교만이 있습니다.
삼십 대 후반부터 저는 성경과 프란치스코의 글 외에
다른 책은 거의 책을 읽지 않습니다.
참고하는 차원에서는 책을 뒤적거리기도 하지만
내 인생의 답과 지침이 되는 것은 성경과 프란치스코의 글에서 얻지
다른 책에서는 얻을 것도 없고 그래서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맞는 말이지만
그렇지만 이것이 교묘하게 저를 영적으로 교만케 합니다.
영적으로 우위에 있다며 은근히 남을 낮추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두에게 배우고 모든 것에서 배우려는 자세일 때
그때 모든 사람 밑에 있는 것이고 이것이 진정 겸손일 것이고,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도 스승이 되지 말라고 하신 것에서
더 나아가 섬기기까지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저는 그렇게 되지는 못해도 은총의 담지자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담지자(擔持者)란 맡아 지니는 사람이라는 뜻인데
누가 은총의 담지자가 되느냐 하면 겸손한 자가 되는 법이지요.
그것은 비를 제일 먼저 맞는 것은 산꼭대기지만 다 흘려버리고
제일 낮은 계곡에 빗물이 고이는 것과 같고,
바다가 제일 낮지만 제일 넓고 모든 물이 고이는 것과 같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은총의 비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은총을 다 흘려버리는 낭비자지만
겸손한 사람은 은총의 가장 훌륭한 담지자입니다.
하느님의 말씀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그 말씀을 듣고 가르친다며 입으로 다 흘려버리지만
겸손한 사람은 그 말씀을 다 마음에 간직하고 행동으로 실천합니다.
나는 담지자인지 낭비자인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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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8. 사순 제2주간 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함께 머물기를 선택한 룻!
하느님의 숨
2025.03.17. 16:43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3월 17일 월요일 (호명환 번역) 열두 번째 주간: 낯선이를 환영하기
룻기는 국경을 넘어선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이야기입니다.
신학자 줄리아 램버트 포그(Julia Lambert Fogg)는 세대에 걸쳐 일어난 성경의 이주 이야기에 대해 이야기해 줍니다:
룻기는 남편을 잃은 시어머니와 역시 남편을 잃은 며느리가 피를 나눈 친척은 아니었지만 함께 살아남기 위해 국경을 넘어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이야기입니다.
룻은 며느리였습니다. 그녀는 자기 마을로 최근에 이주해 온 사람과 결혼하기 위해 아버지의 집을 떠난 모압족의 여인이었습니다. 그녀와 약혼한 사람은 나오미의 아들로서 유다인이었습니다. 비록 그들이 인종은 서로 달랐지만 룻은 이주해 온 유다인 남자에게 시집을 온 것입니다. 그녀는 다른 모압인 동서와 유다인 시동생, 그리고 유다인 시부모와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여섯 명의 성인(成人)이 요즘 말로 다문화 가정을 이루고 산 것입니다: 네 명의 이주민과 혼인으로 연을 맺은 두 명의 그 지역 사람이 함께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 두 부부는 아이들을 갖기도 전에 비극을 맞이하게 됩니다. 생계를 부양해야 할 남편들이 병에 걸려 한 사람씩 차례로 다 죽었기 때문입니다. 이 상황은 이 가족에게 크나큰 타격이었습니다. - 룻의 남편과 시동생, 그리고 시아버지까기 모두 죽었으니까요. 가족의 가장 역할을 할 사람은 하나도 없이 세 명의 여인만 남았기에 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결정해야 했습니다. 그들이 함께 모압인들 지역에서 살아가야 할지? 아니면 이 두 명의 젊은 여인은 새로운 가족을 만나 새 삶을 시작해야 할지? 그리고 모압 지역에는 친척이 하나도 없고 사회 관계를 맺을 수도 없으며 이제는 나이가 너무 많아 결혼도 할 수 없었고 아이도 낳을 수 없었던 이 두 사람의 시어머니 나오미는 누가 돌보아야 할지?
세 여인은 각자가 선택권이 있었습니다. 룻의 동서는 자기 아버지의 집, 즉 "자기 민족과 자기들의 신"에게로 돌아갔습니다(룻 1,15). 그녀는 다시 결혼을 하여 새로운 가정을 꾸렸을 것입니다.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는 유다에 있는 유다인 친척들에게로 돌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그곳에는 재정적인 밑받침은 없더라도 적어도 사회적 관계망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두 여인, 즉 룻의 동서와 시어머니는 새 삶을 시작하기 위해 자기들의 사람들에게 돌아갔다는 점에서 비슷한 선택을 했습니다. 그들은 각자 자기들이 태어난 곳의 가족들과 문화에 다시 흡수된 것입니다. 하지만 룻은 다른 선택을 합니다. 그녀는 자기 고향인 모압을 떠나 시어머니 나오미와 함께 유다 땅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룻은 이 여정을 위해 시어머니와 자기의 연이 끊어지지 않게 하려고 이렇게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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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을 두고 돌아가라고
저를 다그치지 마십시오!
어머님 가시는 곳으로 저도 가고
어머님 머무시는 곳에 저도 머물렵니다.
어머님의 겨례가 저의 겨레요
어머님의 하느님이 제 하느님이십니다.
어머님께서 숨을 거두시는 곳에서
저도 죽어 거기에 묻히렵니다.
(룻 1,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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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은 시어머니 나오미에 대한 사랑을 통해 예수님의 족보에 나오는 존경받는 한 인물이 됩니다:
룻의 말은 역사를 통해 있어 온 수많은 이주민들의 결연한 마음을 잘 표현해 줍니다. 그녀는 자기 부모와 자기 동서, 자기 겨례를 남겨두고 떠납니다. 룻은 나오미가 고향인 유다 땅에서 유다인들 가운데서 자신의 가계를 다시 이어갈 수 있게끔 도와줍니다. 우리는 룻이 자기 남편을 통해 시어머니와 한 번 맺은 계약에 충실했다는 점과 시어머니의 하느님을 신뢰하기고 마음먹었다는 점, 그리고 새로운 사람들 사이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용기를 가졌다는 점에서 룻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룻을 통해 다윗 왕과 나자렛 예수님을 포함한 여러 후손들을 나왔다는 점에서도 이 용기 있는 이주자, 룻을 기억합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깊이 성찰해 보았습니다. 아마도 그 사마리아 사람은 곤경에 처한 사람이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고, 또 그가 즉각적인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낯선이를 도울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제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우리 삶에서 악의적인 사람들과 불친절한 사람들을 돕는 것이 훨씬 더 어렵습니다. 쓰라린 경험을 하는 사람이 고통을 겪고 두려워하며 하느님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을 인식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그런 사람들을 대해야 할까요? 그리고 우리에게 해를 끼치고 - 계속해서 해를 끼치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동정심을 보일 수 있을까요?
—Shannon M.
Julia Lambert Fogg, Finding Jesus at the Border: Opening Our Hearts to the Stories of Our Immigrant Neighbors (Brazos Press, 2020), 78–79.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Lucas Dalamarta, Untitled (detail), 2024,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알지 못하는 존재와 함께 할 때 우리는 다른 이들을 위해 열린 마음으로 공간을 마련하고 함께 나아가는 수양을 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를 우리가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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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나'는 지금 무엇을 선택하고 있는가?
하느님의 숨 2025.03.18. 05:44
어느 랍비의 이야기부터 말씀드리고 오늘 복음 나눔을 시작하겠습니다.
어떤 랍비가 술주정꾼에게 돈을 주었던 모양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랍비에게 왜 그런 사람에게 돈을 주느냐고 나무라더랍니다. 그러자 그 랍비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에게 돈을 주신 하느님보다 내가 더 대단한 사람이어야 합니까?!"
참되고 진솔하게 하느님을 믿으며 살아가는 사람은 죄인을 심판하지 않고 그 죄인과 자신을 같은 사람이라고 여기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예수님처럼 요한의 세례를 받으려고 죄인들과 함께 줄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마르 1,9). 그러나 거짓되게 하느님을 믿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늘 다른 이들을 판단하고 심판합니다. 어쩌면 그들은 그런 심판과 판단을 먹고(?) 사는 사람들인지 모릅니다. 심지어 그들의 종교심과 신심은 다른 이들을 심판하기 위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예수님을 따르며 참된 하느님의 자녀로서 살 수 있는지를 수없이 듣고 읽고 심지어는 실제로 목격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이 '나'로 하여금 그 삶을 제대로 살고자 마음을 다지게 해 주는 박차가 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게 참된 살을 사는 것이 힘들어서 그런지 그런 노력을 기울이기보다는 그런 삶의 참된 지혜를 남을 판단하고 심판하는 정보요 잣대로만 삼으며 살아가는 경우가 더 많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나'의 삶은 '나'의 문제이지 다른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는 엄연한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사람들이 자기들의 화나 상처를 제대로 인식하고 치유하지 않으면 그 화나 상처를 다른 사람에게 전해 준다고 합니다. 자기 안에 화나 상처가 있지만 이를 인식하고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를 다른 이들에게 투사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그 문제를 '내'가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투사되었기에 그 문제가 나에게는 없다고 느끼는 것이지요....
그런데 '나'의 문제를 다른 사람들에게 투사한다고 해서 '나'의 문제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의 문제를 투사하면 할수록 우리 내면의 무의식 속에 그 문제들이 계속 쌓이게 되고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계속해서 음울한 삶으로 빠져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안에 이런 모순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인정하기 시작할 때 우리의 치유는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치유는 나만을 위한 치유가 아니라 내 주변에 함께하는 이들을 위한 치유로 퍼져 나갑니다.
예전에 어느 단체의 피정을 동반한 적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저와 면담을 하기 위해 들어와서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온통 분노와 불평만을 쏟아내더군요.... 한참 동안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제 가슴이 꽉 막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 사람에게 어떤 이야기도 해 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냥 원론적인 이야기밖에는....
그 사람이 그 방에서 나갔을 때 제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방의 창문을 여는 것이었습니다. 마음이 갑갑하니 창문이라도 열어야 할 것 같아서 그랬지만, 실제로 그 방 안에 그 사람의 분노와 어둠이 차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그랬습니다.
그런데 피정 마지막 날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제가 먼저 식탁에 와 있었습니다. 마지막 날이라 대침묵을 다 풀고 사람들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며 식당으로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를 하며 들어오는데 얼굴에 함박 웃음이 가득하더군요. 저는 전혀 딴 사람을 보는 줄 알았습니다. ㅎㅎ
그런데 참 묘하게도 그 사람의 그 함박 웃음을 보면서 제 마음의 체증이 싹 내려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우리 삶을 진솔하게 바라보고 인식하면서 '나' 자신은 물론이고 '내' 주변 사람들을 위한 치유가 될 수도 있고, 무의식적으로 암울하고 비판적이고 냉소적으로 살아가면서 우리 주변에 어두움과 갑갑함을 선사(?)해 주는 암이 될 수도 있습니다.
좋은 생각, 좋은 마음, 좋은 의지를 갖는 것은 우리가 문제가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문제를 녹여 내릴 수 있는 힘을 갖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에게는 문제가 없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문제에 눌려 살 필요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감당할 정도의 문제만을 주신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감당하는 힘도 주시고요!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마음만으로도 바리사이들처럼 다른 이들에게 부담을 주는 삶을 살 수도 있고, 또 그와는 정반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희망과 빛과 치유를 주는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모세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하였듯이, 우리에게도 매 순간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 번영과 멸망" 중에서 한 가지를 선택할 기회가 주어집니다(신명 30,15-20 참조). 그런데 이 선택이 우선은 '나'를 위한 선택이지만, 마침내는 '내' 주변에게도 깊이 영향을 주는 선택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깊이 인식하며 사랑과 희망의 하느님께서 새로운 선물로 주신 오늘 하루를 또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지금 이 순간 무엇을 선택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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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8. 사순 제2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자리”에 대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각자 자기의 자리를 차지하고 살아갑니다. ‘누울 자리’, ‘일자리’, ‘아버지 자리’, ‘앞자리’, ‘윗자리’ 높이와 위치와 순서와 역할 등등~.
예수님께서는 군중과 제자들에게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있음을 지적하시고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하지 마라.”(마태 23,3) 하시면서, 그들의 죄상을 세 가지를 고발하십니다.
먼저, “그들은 말만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무거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는다.”라고 언행의 불일치와 남에게 짐 지움을 질타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라고 표리부동과 위선을 질타하십니다. 또 “그들은 잔치집에서는 윗자리를 ... 사람들에게 스승이라 불리기를 좋아한다.”라고 자만과 허영을 질타하십니다.
오늘날 우리는 참된 스승이 없다고 한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진정으로 스승을 찾고 있는지를 물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우리는 자기의 무지를 깨우쳐주는 위대한 스승을 찾지만, 스승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방천지에서 만나는 우리 인생의 동반자들을 스승으로 모시지 않으려하기 때문에, 스승을 만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더 솔직히 말한다면, 그들에게 머리 굽히지를 못하기 때문에, 오늘도 제자가 되지 못하고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은 나의 무지를 깨우쳐주기를 바란다기보다 나의 유식을 인정해주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의 무지가 들추어지면 감사하기보다 오히려 상처를 받으니 말입니다.
참으로, 길이요 진리이신 참된 스승을 지척에 두고도 머리 굽혀 공경하기보다 오히려 고개를 쳐들어 먼 데서 스승을 찾고 있다면, 진정 우리가 눈멀어 있는 까닭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참된 스승이 있는가?” 하고 묻기에 앞서, 진정, 나는 참된 제자인지? 물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시작에서, 예수님께서는 군중과 제자들에게 하신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하지 마라.”(마태 23,3)는 말씀을 되새겨보게 합니다. 사실, 이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를 비판하기 위해서라기보다 군중과 제자들에게 ‘배움의 자세’를 가르쳐줍니다. 곧 그들의 말과 행실이 모순되고 언행이 불일치한다하더라도, 혹은 행실이 비록 모범이 되지 못하다할지라도, ‘그들의 말은 다 실행하고 지키는’ 겸손함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르지 않는’ 분별과 지혜를 군중과 제자들에게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자리’의 문제로 돌아와 봅시다. 나는 지금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가? 또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 하고 있는가? 진정, ‘배우는 자의 자리’는 어디인가?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23,11).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 23,12)
주님!
머리를 숙이고 겸손할 줄을 알게 하소서.
당신을 지척에 두고도 머리 굽혀 공경하기보다
고개를 뻣뻣이 세우고 먼 데서 당신을 찾지 않게 하소서.
나의 유식을 인정해주기보다 나의 무지를 깨우쳐주기를 바라게 하소서.
무지가 드러나면 상처받기보다 감사하게 하소서.
주님, 당신을 스승으로 모시고 늘 제 머리 위에 두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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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8. 사순 제2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4월 26일 토요일에 황창연 신부님이 ‘선교 이야기’라는 주제로 강의를 해 주기로 했습니다. 디자인에 재능이 있는 수녀님이 포스터를 2장 만들었습니다. 사목 회의에서 하나를 선택하기로 했습니다. 사목 위원들은 대부분 파란색 바탕에 만들어진 포스터를 선호했습니다. 그런데 디자인을 전공한 주일학교 선생님과 홍보분과장은 하얀색 바탕에 만들어진 포스터가 좋다고 했습니다. 디자인 분야에서는, 신문 광고에서도 파란색 바탕은 사용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당장 눈에는 파란색 바탕이 좋아 보이지만 홍보용으로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파란색 바탕의 포스터를 선택했던 사목 위원들도 전문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다시 하얀색 바탕의 포스터를 선택했습니다. 구역을 나누는 것은 구역분과에서 하고, 사제관 신축은 건축 위원회에서 하고, 본당 설립 50주년 행사는 준비 위원회에서 하기로 했습니다. 다수결로 결정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때로는 전문가들의 의견을 따르는 것도 중요하다는 걸 알았습니다.
민주주의는, 사회는 다수결이 기준이 될 수 있지만, 신앙은 결코 다수결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진리, 길, 생명 또한 다수결로 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구 온난화와 그로 인한 환경파괴는 다수결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지구는 우주에 여러 개가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지구는 우리의 조상들이 살았고, 우리가 살고 있고, 우리의 후손들이 살아야 할 소중한 삶의 터전이기 때문입니다. 자원을 재활용하고, 재생할 수 있는 에너지를 사용하고, 탄소 배출량을 줄이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지켜야 할 의무의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올라 고난받고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도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죄지은 나를 위해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한 예수님의 결단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주님 절대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오늘 복음의 말씀은 교회의 지도자, 특히 성직자들이 늘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과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파의 말은 들으십시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은 본받지 마십시오. 그들은 말은 하면서 실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생색내기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짐을 다른 이에게 맡기기 때문입니다. 사제복이 특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첫 번째 사제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생각합니다. 감옥에서도 교우들을 생각하며 위로하였습니다. 다시는 보지 못할 어머니를 생각하며 친구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께 어머니를 부탁한다는 편지를 읽으면서 마음이 울컥했습니다. 하느님을 찬미하며 기꺼이 목숨을 바쳐 순교하였습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참된 목자의 길을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여러분 가운데서 가장 높은 사람은 여러분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입니다.”라는 말을 삶으로 실천하였습니다. 세상의 나이로는 26살밖에 되지 않았고, 사제 생활은 1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한국의 ‘수선탁덕(首先鐸德)’이 되었습니다.
오늘의 독서는 늘 부족한 제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말씀입니다. “오너라. 우리 시비를 가려보자. 너희의 죄가 진홍빛 같아도 눈같이 희어지고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 너희가 기꺼이 순종하면 이 땅의 좋은 소출을 먹게 되리라.”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니 비록 나의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게 해 주신다고 하십니다. 비록 나의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처럼 희게 해 주신다고 하십니다. 주님의 자비하심에 의탁하며 걸어온 길을 돌아봅니다. 우리가 악행을 버리고 선행을 배울 수 있다면,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핀다면 비록 우리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처럼 희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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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8. 사순 제2주간 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는 것을 조심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다. 또한 아버지도 하느님 아버지 한 분이시며 선생님이라고 불리는 분도 주님 한 분이시다.’라고 말입니다.
왜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들려주셨을까요? 물론 주님께서 활동하시던 때에 스승이라고 불리던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지만 섬기는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사람, 즉 자기 자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이 비단 주님 시대의 그들에게만 국한된 말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도 그런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동시에 언제든 이런 유혹에 빠져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분명 유혹입니다. 처음에는 하느님을 섬기며 겸손하게 신앙생활을 이어가던 신앙인이 시간이 지나 자리에 올라 영향력이 생기면서 변하기 시작합니다. 물론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모습으로 변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즉 하느님 보시기에 하느님을 섬기지 않고 자신을 섬기는 모습으로 변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는 태초의 아담 때문에 우리 인간이 경계해야 하는 유혹입니다. 이 유혹을 우리는 ‘교만’이라 말합니다.
하느님의 자리에 자신이 앉고 싶은 욕망, 하느님보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머리를 조아리기를 바라는 마음, 하느님과 같은 위엄과 위상을 가지려는 어두운 마음들이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자리는 하느님께 늘 내어드리는 겸손의 모습으로 신앙의 길을 걸어가라고 말입니다.
⭐감기에 걸렸습니다.
벌써 지난달의 이야기입니다.
어느날 밤 갑자기 오한이 들었습니다.
이 느낌은 제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듯했습니다.
‘이제 감기 몸살이 시작될 거야.’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부터 열이 나고 목이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코도 막히기 시작했지요.
저는 바로 병원에 갔습니다. 주사가 가장 빠른 치료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병원문을 들어섰는데…. 이런 말이 쓰여 있었습니다.
‘질병을 이길병으로….’
처음에는 잘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잠시 쳐다보다 무릎을 쳤습니다.
‘괴로울 질(疾)’을 ‘이기다’의 반대말로 표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순간 여러 가지 질병으로 성지를 찾아오시는 분들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바로 기도했습니다.
주님….병에 지지 않게 하소서. 질병이 이길병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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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8. 사순 제2주간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된 리더십, 참된 영성
“경청, 회개, 섬김”
“살펴보소서, 주 저의 하느님.
죽음의 잠을 자지 않도록 제 눈을 비추소서.”(시편13,4)
대혼돈의 시대입니다. 국내외 상황이 그렇습니다. 내전상황의 국내상황은 더욱 그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중심의 삶을, 희망을, 꿈을, 빛을 찾아야 합니다. 이런 대혼돈의 시대에 은총의 거룩한 사순시기가 있음이 구원입니다. 참으로 기도와 회개의 시기입니다. 일희일비, 부화뇌동, 경거망동할 것이 아니라 삶의 제자리에서 주님 안에 머물면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초발심의 회개의 삶을 살아야 할 때입니다. 옛 현자의 지혜입니다.
“막연한 그리움만 품으면서 정작 다가가지 못하고 있다면, 그에 대한 마음이 식고 가라앉아 멀어질 준비를 마쳤다는 뜻이다.”<다산>
“‘산앵두나무꽃이 펄럭이면서 펄럭펄럭 나부끼네. 그대 어찌 그립지 않겠소만, 그대 머무는 곳이 너무 머네.’ 생각하지 않은 것이지, 진정 생각한다면 어찌 먼 것이 있겠는가?”<논어>
모두 실천의 중요성을 말합니다. 진정 생각한다면 생각은 지금 여기서 실천으로 이어집니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입니다. 마음으로만 회개가 아니라 회개의 실천이 뒤따라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시공을, 종파를 초월하여 모든 이들에게 특히 각계각층 지도자들에게 해당됩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참된 리더십, 참된 영성을 배웁니다.
첫째, 부단한 경청의 삶입니다.
귀기울여 듣는 경청이요 공경하는 마음으로 듣는 경청입니다. 경청을 위한 침묵이요 경청에 뒤따르는 겸손과 순명입니다. 경청이 바로 지혜이자 사랑입니다. 사순시기 경청의 선택과 훈련, 습관이 절실합니다. 오늘 이사야서는 ‘어리석은 하느님의 백성’을 대상으로 하는데 그대로 오늘의 우리를 두고 하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하늘아, 들어라! 땅아, 귀를 기울여라!
아아 탈선한 민족, 죄로 가득 찬 백성, 사악한 종자, 타락한 자식들!
소돔의 지도자들아,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고모라의 백성들아, 우리 하느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라.”
영성생활의 기초가 침묵과 경청입니다. 회개 역시 침묵과 경청으로 시작됩니다. 갈수록 시끄럽고 혼란한 가치관 부재의 시대에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침묵과 경청입니다. 적게 먹고 적게 쓰고 적게 말하고, 많이 기도하고 많이 공부하고 많이 나눠야 할 영적훈련의 사순시기입니다.
둘째, 부단한 회개의 삶입니다.
모두가 절박한 회개의 실천동사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날에도 그대로 우리의 무딘 마음을 울리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입니다.
1.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2.내 눈 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들을 치워버려라.
3.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워라.
4.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5.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자신은 물론 이웃 약자들에 대한 구체적 사랑의 실천으로 드러나는 회개가 선행과 공정입니다. 주님은 회개의 실천을 통해 죄를 용서받고 축복이 따름을 밝히십니다.
“너희의 죄가 진홍빛 같아도 눈같이 희어지고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 너희가 기꺼이 순종하면 이 땅의 소출을 먹게 되리라. 그러나 너희가 마다하고 거스르면 칼날에 먹히리라.”
오늘 복음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상징하는 바, 역시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의 종교지도자들은 물론 우리 모두를 포함합니다. 언행불일치의 삶, 타인의 인정을 추구하는 외적 허영의 삶이 바로 회개의 대상입니다. 바로 자기 중심의 삶에서 하느님 중심의 삶으로의 전환이 회개입니다. 이들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 이들의 말은 실행하되 행실은 따라하지 말라 하십니다.
참으로 알맹이가 아닌 실속없는 껍데기의 삶을 추구하지 말고 본질적 깊이의 삶을 추구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외적 허영의 삶을 단호히 끊어버리는 회개입니다. 본말전도本末顚倒, 주객전도主客顚倒, 지엽말단枝葉末端의 무지에 눈먼 무분별의 어리석은 삶을 단호히 끊어버리는 회개입니다. 예나 이제나 이런 무지에 대한 답은 주님의 회개 은총뿐임을 깨닫습니다.
셋째, 부단한 섬김의 삶입니다.
참된 회개의 열매가 섬김의 사랑, 섬김의 겸손, 섬김의 실천입니다. 우리에게 영성이 있다면 단하나 파스카의 영성이요 이는 섬김과 겸손의 영성으로 표현됩니다. 바로 이의 전형적 모범이 파스카의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날 종교지도자들은 물론 모두가 명심해야할, 배워야할 참된 리더십, 참된 영성의 진수를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분뿐이시고 너희는 형제다.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이처럼 하느님 중심의 삶에,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삶에 충실한 이가 무지의 어둠에서 벗어난 진정 자기를 아는 겸손한 지혜의 사람, 하느님의 자녀, 빛의 자녀입니다. 이어 주님은 자발적 섬김과 겸손이 참 영성의 잣대임을 설파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섬기는 사람이 높은 사람이요, 겸손으로 낮추는 자가 높아진다는 역설적 진리를 보여줍니다. 바로 이런 자기 비움의 섬김과 겸손의 모범을 보여주신 분이, 친히 무릎을 꿇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드린 파스카의 예수님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을 닮아 경청과 회개와 섬김의 참된 영성을 살게 하십니다.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시편50,23ㄴ).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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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8. 사순 제2주간 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이게 하소서>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마태 23,5)
굳이
보이려고
나 아닌 내가
되어야 하는
나에게마저
부끄러운
내가 아니라
아무도
보아주지 않아도
나인 내가
그지없이 좋아
내게 만이라도
사랑스러운
나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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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8. 사순 제2주간 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 23,3)
어떤 사제든 공경하라
사제를이 말을 잘한다면 그것은 그들에게 좋은 일입니다. 사제들이 잘 가르친다면,그것은 여러분에게 좋은 일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것은 받아들이고 남의 것에 관해서는 뭐라 하지 마십시오. 사제들이 악한 이들 때문에 선한 이들을 소홀히 하기보다는 선한 이들을 생각해서 악인들을 좋은 일로 부추기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여 신자들을 위해 비신자들을 가르치듯이, 여러분도 나쁜 사제들 때문에 훌륭한 사제들까지 매도하는 일이 없도록 선한 사제와 악한 사제를 다 공경해야 합니다. 선을 이루려다 의로운 이들을 멸망에 빠뜨리는 것보다는 악인들을 그대로 둘 망정 의인들을 지켜 주는 편이 더 낫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나쁜 사람을 훌륭한 신앙으로 치료하게 될 것입니다. 버려진 땅에서도 귀한 금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버려진 땅에서 나왔다고 해서 금이 멸시받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땅은 그대로 두고 금만 취하는 것처럼,여러분도 그들의 가르침은 받아들이고 그들의 행실은 버리십시오.
-마태오 복음 미완성 작품-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7
지성을 버리고 순수한 무지를 경험하라
예수가 열두 살 되던 해에도...(루카 2,42).
우리는 성서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읽습니다. “예수가 열두 살 되던 해에도 축제 관습대로 올라갔는데, 축제 기간이 끝나고 돌아갈 때 소년 예수는 예루살렘에 남았으나 부모는 모르고 있었다. 일행 가운데 있으려니 여기고 하룻길을 간 다음에야 천척과 친지들 사이에서 찾아보았으나 찾지 못해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 찾아다니다가 사흘 만에 성전에서 찾아냈다”(루카 2,42-46).
여러분이 이처럼 고귀한 탄생을 찾아내고자 한다면 진실로 군중을 떠나서 여러분의 근원, 곧 여러분의 출발점으로 되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영혼의 모든 기능과 모든 활동 - 이 모든 것이 바로 “군중”입니다. 기억, 이성, 의지 - 이 모든 것이 여러분의 마음을 흐트러뜨립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여러분은 모든 것, 곧 감각과 상상력의 모든 활동, 여러분이 마음과 눈 속에 담아 두었던 모든 것을 떠나야 합니다. 그렇게 한 뒤에야 여러분은 이 탄생을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결코 찾아낼 수 없습니다. 그분은 친구들이나 “친척들이나 친지들 속에서는” 결코 발견되지 않을 것업니다. 그들 속에서는 그분을 잃어버릴 따름입니다.(353)
✝️ 화요일 성령(성시간)의 날✝️
거룩한 성심에 대한 묵상, 요셉 맥도넬 신부
성심에 대한 묵상
첫 번째 시리즈
첫 금요일 신심
II. 성심을 둘러싼 가시관
네번째 요점. 영광의 면류관.
그리스도의 이마에 있는 영광의 면류관은 그가 지상에서 수고, 고난, 굴욕을 통해 얻은 영원한 영광의 면류관입니다.
그의 성심을 둘러싼 영광의 면류관은 그가 지상에서 우리를 위해 행하고 겪으신 모든 일을 생각할 때 그 모든 신경을 통해 전율하는 끝없고 무한한 행복입니다.
적용.
이 같은 밝은 영광의 면류관은 하늘에서 우리 각자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상에서 몇 년 동안 사랑하고 인내심 있게 수고한 후, 하늘에서 영원한 행복의 면류관을 받게 됩니다! 모든 것은 내가 지상에서의 짧은 시련의 순간들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가장 긴 삶도 영원성과 비교하면 얼마나 짧은지를 생각하면, 성 바오로의 말씀에 동의하게 될 것입니다.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로마서 8장 18절)
애정과 결심.
주님, 저는 사라지고 당신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당신의 마음과 정신을 항상 당신의 영원한 집에 두게 하소서.(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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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8. 사순 제2주간 화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그리스도인에게 큰 덕목은 겸손 /
박윤식 [big-llight] 250317. 18:40 ㅣNo.180817
명품 등 필요 이상 소유하려는 게 사람 심리다. 물론 관심 받으려면 더 많이 치장해야 된다나. 내적으로 비어 있는 이일수록 이렇게 늘 남의 눈을 의식한다. 누구나 다 자신만의 자리가 있다. 또 자리가 높아지면 웬만한 건 다 된다는 착각도 한다. 대단한 이 된 줄 여기기에. 사람은 그대로고 자리만 높아진데도. 그래서 고갤 숙이려 들지 않는다. 점차 마음의 고개도 숙이지 않는 뻔뻔한 이라나. 속이 텅 빈 자다. 이런 이가 많을수록 그야말로 가짜가 판치는 세상이다.
영어로 ‘이해한다.’라는 말은 언더스탠드(understand)이다. 직역은 ‘아래에 서다.’이다. 상대에게 맞추어야만 이해가 가능해진다는 거다. 이렇게 어울리는 게 겸손일 게다. 이게 신앙인에게 가장 중요한 자세이다. 이것 없는 행동은 결국 겉꾸밈으로 금방 그 힘을 잃는다.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 외에, 세상 누구에게도 아버지라 부르지 마라.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라. 너희는 섬기는 이가 되라. 누구든 자신을 높이면 낮아지고, 낮추면 높아질 게다.’
우리가 자신만의 욕심을 채우면, 결국은 공동체에서도 그리 오래 지탱하지 못한다. 남을 위해 살면 스트레스도 덜 받아 몸도 더욱 건강해지리라. 더구나 조건 없이 봉사하는 이들은 보는 이에게도 좋다. 남 위한 봉사지만, 결국 보람은 자신을 위한 것일 게다. 예수님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라고 이르셨다. 누구나 지향하는 목표인 높은 지위나 명예는 때로는 삶의 자극제다. 문제는 그것들이 정당한 결과에 따른 것이어야 할 게다.
자신을 낮추려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높이려는 종교인들이 너무 많다. 그들은 종교적 가르침을 실천하기보다 오히려 돈과 명예, 육체적 쾌락만을 찾는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종교를 이용해 다른 이들을 등치기도 한다. ‘믿는 이가 더하다.’라는 말을 결코 부인할 수 없는 게, 오늘 솔직한 우리네 모습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고백하는 우리 자신부터 회개하자. 스스로를 낮추며 믿음의 삶을 살자. 공동체에서 좀 똑똑하다고 불리는 이들에게, 큰 위험과 유혹이 따를 게다. 요람에서 무덤에 이르기까지 경쟁하는 때에, 이러한 유혹은 결코 적지는 않으리라.
사실 세상의 세속성보다 교회의 세속화가 때로는 더 두렵고 무섭단다. 교회 공동체에서도 겉으로는 하느님과 교회를 위한다지만, 실제는 자신의 명예를 추구하는 이도 쾌나 있다. 그러나 교회의 일꾼이 교회에서 세속의 가치를 얻으려한다면, 아마도 더더욱 고약한 악취만 풍기리라. 율법의 근본은 하느님과 이웃 사랑이다. 따라서 율법은 하느님 모습으로 창조된 우리를 더욱 인간답게 살도록 도와주려는 데 있다. 부당한 억압과 멍에로부터 해방하려는 것이리라. 따라서 과시하려는 욕망을 버리고 겸손하게 자신을 낮출 때만이, 하느님 뜻을 실천하게 되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성공과 권력이라는, 세속적 기준인 생활양식과 사고방식을 받아들이려는 유혹을 상당히 경계하라신다. 사실 그것이 자신을 높이려고 다른 이들을 얕잡는 오만한 마음과 한통속임을 우리는 안다. 위선과 오만에서 벗어난 것이 바로 자기를 낮추는 자세다. 이런 겸손이 그리스도인에게 무엇보다도 우선적 덕목이다. 이 겸손만이 가난하고 억압받고 소외된 이와 한마음이 되어, 그들과 진정한 친교를 나누는 통로다. 또 겸손은 어렵게 사는 이들의 처지를 헤아리고, 그들의 삶 현장으로 다가가는 것이다. 오늘날 하느님을 믿는 이들이 ‘작은 이’들과 함께하려는 순수한 마음을 잃는다면, 예수님의 질책에서 결코 벗어날 수가 없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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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8. 사순 제2주간 화요일. 한창현 모세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하였던 것처럼 스승의 구실을 하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군중과 제자들에게,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으니 그들이 말하는 것은 다 듣고 실행하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은 실제로 그들의 말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사람들이 자신들의 말을 듣고 실행하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가르침의 권위가 자신들에게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비유 하나가 생각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많은 사람이 환호하자, 나귀가 등에 예수님을 태우고 있다는 사실을 잊은 채 사람들이 자신을 반기는 줄 알고 우쭐해하였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 대하여 이야기하시면서, 사람들이 자신을 스승이나 선생, 또는 아버지라고 부르기 시작하면, 의도적으로라도 자신을 낮추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때가 바로 겸손해야 할 때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스스로 겸손해야 할 때를 알아차렸다면, 그토록 오만하게 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오만해진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다른 사람에게 부당한 요구를 하면서도, 그것이 잘못이라고 인식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마태 18,4)임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철저하게 자신을 돌아보고 겸손해지려는 태도는 다만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만 요구되는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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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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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8. 사순 제2주간 화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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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8. 사순 제2주간 화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 23, 3)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실행에
힘을
실어주십니다.
하느님을
향하는
실행입니다.
진심을 말하고
진심을 삶으로
실행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꽃보다
아름다운
참된
실행입니다.
사랑이란
서로에게
좋은 실행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십자가의
실행입니다.
마음을
하느님께
옮기는
실행입니다.
마음을 비워내는
실행입니다.
실행으로
만들어가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실행은
말에 갇혀있는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우리의 생활도
올바른 실행으로
아름다워집니다.
실행이 있기에
참된
기쁨이 있습니다.
실행이 있기에
십자가의 길이
있습니다.
이 사순시기가
실행으로
하느님을
만나는
아름다운
만남의
시간이길
기도드립니다.
착한 실행이
선물이고
은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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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8. 사순 제2주간 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가장 낮은 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주님!
예수님께서 만나기만 하면 강력한 경고 말씀을 서슴지 않았던 사람들이 있었으니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강도 높은 날 선 발언의 이유들은?
거룩함을 가장한 위선 때문이었습니다.
말과 실제 삶 사이의 큰 간극 때문이었습니다.
하느님보다 사람들의 시선을 더 의식하는 이중성 때문이었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강력한 경고 말씀 앞에 저 역시 섬뜩한 느낌이 들면서도, 요즘 저는 산전수전 다 겪은 덕에, 그리고 조금 나이가 든 덕에, 이런 측면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졌구나, 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기도 합니다.
저는 요즘 시골에 살다 보니 어깨 힘줄 일도 없고 폼 잡을 일도 없습니다.
주로 하는 일이 허드렛일에다 수렵 활동이다 보니, 늘 입고 다니는 옷은 시장표 작업복이요 추리닝입니다.
요즘 와서 결심한 것이 제일 힘든 일, 제일 궂은 일, 제일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은 내 일이다,
생각하고 기쁘게 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몇 년째 배수로에 켜켜이 쌓이고 또 쌓인 낙엽더미를 제거하며 하루를 보냈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시키지 않고 제 스스로 뭐든 하니 세상 편하고 자유롭습니다.
낮은 자리에 있어 보니, 참 좋은 것이 많습니다.
넘어져도 크게 충격받거나 다치지 않습니다.
높은 데 있다가 급추락하는 사람들은 기본이 전치 8주인데, 낮은 데 있다 보니, 넘어져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훌훌 털고 즉시 일어납니다.
가장 낮은 자리에 앉으니 정말 편하고 부담이 없습니다.
그러나 더 노력해야 할 부분이 아직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오늘 예수님께서 지적하시는 바처럼 내가 이렇게 산다며,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는
위선적인 마음, 겸손을 가장한 교만이 스며들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주변을 돌아보니 가난한 사람들, 절박한 사람들, 고통받는 사람들, 어린이들, 작은 이들, 낮은 이들은 대체로 교만하거나 위선적이지 않더군요.
그들의 삶은 그저 단순하고 솔직합니다.
기대치가 크지 않으니, 삶이 소박하고 겸손합니다.
반면에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 나이에 걸맞지 않게 이미 높은 곳에 앉아 있는 사람들, 지도자들, 고위층 인사들의 언행을 보니 엄청나게 위선적이고 이중적인 경향이 컸습니다.
어떻게든 높이 올라가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가능하면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 봐야 하겠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내려갈 수 있는 가장 낮은 곳에 주님께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실지 모르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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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8. 사순 제2주간 화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23,1-12: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2절). 자리가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리를 거룩하게 만든다. 자리에 앉아 훌륭히 처신하는 이는 누구든지 그로 말미암아 영예를 받을 것이다.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3절) 나쁘게 처신하는 지도자들 때문에 훌륭한 지도자들까지 매도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선을 이루려다 의로운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리기보다는 의인들을 지켜주는 편이 더 낫기 때문이다. 우리도 그들의 가르침은 취하고 그들의 행실은 버릴 수 있으면 된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사람들에게 율법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워 놓고는 그들을 도와주기 위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중에는 말하기 전에 행하고 현명하게 이야기하며 혼란에 빠진 자들을 인도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의 어깨에 자애로운 짐을 얹는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스스로 먼저 가장 무거운 짐을 진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허영을 꾸짖으신다. 이 허영은 그들을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였고, 오로지 다른 사람의 이목을 끄는 일을 하게 하였고, 타락하게 했다. 결국 그들은 아무 가치도 없는 것들에 목을 맨다. 성구갑과 옷자락 술이 그들이 변변치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오직 하느님께만 보이기 위해 행하였고, 그들의 손에 묶은 유일한 장식은 선행이었다.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8-9절). 아버지 하느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말고는 누구도 스승님이나 아버지로 불려서는 안 된다. 만물이 그분에게서 나오기 때문에 그분만이 아버지이시다. 그리스도만이 스승님이시다.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만들어지고,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과 화해를 이루기 때문이다. 이 말씀이 본성상 사용하는 아버지와 스승이라는 말을 하지 말라는 말씀은 아님을 알아야 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11절) 먼저 우리 신앙인들이 진정으로 자기를 낮추고 세상을 위하여 섬기는 사람들이 될 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다. 낮은 자리는 바로 봉사하기 위한 자리이다. 진정한 권위는 섬김과 봉사에서 온다.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는 사순절이 되도록, 그리하여 사순시기가 은총의 기간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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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8. 사순 제2주간 화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나폴레옹은 종교가 가톨릭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황제’라는 칭호를 가지고는 보통 왕관을 씌우는 의식은 교황이 주례를 맡게 되지만, 나폴레옹은 스스로 왕관을 씌우며 자신이 모든 권력의 근원임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자 했습니다.
황제란 자리가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닌 자신의 노력을 이룬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그의 황제 즉위 후, 그는 끊임없는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나폴레옹은 유럽을 정복하고, 자신의 황제 권위를 확립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무리한 전쟁은 결국 패배와 몰락을
초래하게 됩니다.
1812년 러시아 원정에서의 패배는 그가 칭호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무리하게 전쟁을 일으킨 결과로, 그의 군은 대패했고 많은 군인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결국 1814년, 나폴레옹은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며, 엘바 섬으로 유배됩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은 죽기까지 가톨릭 신앙을 주장했지만, 자아를 누르지 못하는 그냥 종교를 가진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종교가 그 사람을 바로잡아주었던 예도 있습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본래 깊은 신앙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어린 시절, 그는 매우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교회 생활을 하기는 했지만, 적극적인 신앙생활을 하거나 하느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청년 시절 링컨은 오히려 의심과 회의 속에서 살아갔고, 성경에 대해 의문을 품거나 하느님의 존재 자체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변호사로 활동하며 정치적으로 여러 번 실패를 겪고, 개인적으로도 가족의 죽음과 좌절을 경험하면서 그는 삶의 의미에 대한 깊은 의문을 품으며 방황하는 인생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링컨이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난 이후, 남북전쟁이라는 미국 역사상 가장 큰 위기를 맞닥뜨리자 그의 삶에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전쟁으로 수많은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고, 국가가 분열되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 링컨은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대통령의 막중한 책임과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에 대한 부담감은 그의 내면에 깊은 신앙을
일깨웠습니다.
그는 매일 아침 성경을 읽으며 하느님의 뜻을 찾기 시작했고, 특히 전쟁 기간 동안 시편과 복음서의 구절들에서 위로와 힘을 얻었습니다.
링컨은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전쟁의 무게와 책임을 온전히 혼자 짊어질 수 없음을 느끼고
점점 더 하느님께 의지했습니다.
그는 스스로 겸손해지고, "나의 관심은 하느님께서 우리 편에 서 계신지가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의 편에 서 있는가 하는 것이다"라고 고백하며, 하느님의 정의와 섭리를 정치적 결단의 중심에 두었습니다.
또 이같은 신앙으로 게티스버그 연설에서는 “하느님 아래 새로운 자유가 탄생하도록,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가 이 땅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헌신할 것을 굳게 다짐합시다.”
라는 훌륭한 말을 남겼습니다.
결국 링컨에게 종교는 단순히 개인의 위안이나 심리적 안정제가 아니라, 그가 대통령으로서
역사적 결정을 내릴 때 도덕적 기준과 방향을 제시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대통령 이전의 링컨이 종교에 무관심하거나 회의적이었다면, 대통령이 된 후 그는 진정으로
하느님을 찾고 의지하는 신앙의 지도자로 거듭났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과의 깊어진 관계가 링컨을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이자, 노예제 폐지라는 위대한 업적을 이룬 인물로 변화시킨 것입니다.
정말 자리가 사람을 만들기도 합니다.
로마의 초대 황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전쟁터에 있을 때는 부하 병사들과 함께 고난을 나누며 가장 앞장서서 적과 맞서는 용맹하고 현명한 지도자였지만, 평화가 왔을 때 그는 종신 독재관이 되고자 했고 점점 독재자의 모습을 띠었고 공화정이 무너질 것을 두려워한 이들은 국민 영웅인 그를 암살하였습니다.
어떤 자리에 오르거나 칭호를 가지게 되었을 때 시간이 지나면서 더 좋은 모습이 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더 악한 모습이 되어갑니다.
그 이유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 되려는 지에 대한 그 뜻에 달려있습니다.
그 사람이 섬기는 ‘신’ 때문입니다.
자아를 섬기는 사람은 자아가 원하는 인간이 되어갑니다.
그러나 선한 신을 믿고 지향하는 사람은 그 모습이 되어갑니다.
사울 왕이 왕이 되고 점점 나빠졌던 이유는 자아를 섬기고 있었기 때문이고, 다윗이 왕이 되어 점점 겸손해진 이유는 하느님을 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섬기는 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자기를 형성해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교만을 경계하라는 의미로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라고 하시고,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러면 아버지만을 스승으로 부르시고, 아버지만을 아버지라 불려지기를 원하셨을까요? 예수님은 당신이 주님으로 불리셨고, 또 제자들을 “아이들아!”(요한 13,33: 21,5)라고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데도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실 만큼 겸손하셨던 이유는 하느님 아버지를 섬겼기
때문입니다.
이 지상에서 아무리 위치가 바뀌더라도 그것들은 다 하느님 자녀라는 정체성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 정체성을 더 확고하게 하는 도구가 될 뿐입니다.
그러나 만약 이러한 신앙이 없다면 그 사람은 자아를 섬기기에 자리에 따라 자기가 바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정치인을 뽑을 때는 그 사람의 신앙이 무엇인지 아는 게 매우 중요합니다.
겉모양의 종교가 아닌 참으로 섬기는 신이 어떤 신인지를 아는 게 중요합니다.
오직 신만이 그 사람의 모습을 이 세상에서의 지위에 따라 흔들리지 않게 할 수 있습니다.
자아는 신이 되려는 존재기 때문에 자아를 누를 수 있는 분은 신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세.육.마.를 누르지 못하면 자신이 믿는 신은 그 사람 안에서 아직 신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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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8. 사순 제2주간 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말과 행실이 다르면, 그 말은 ‘빈말’이 될 뿐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 23,2-12).”
1) 3절의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라는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가 아니고,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아무리 좋은 말을 하고, 모든 사람이 실행하고 지켜야 할 말을 해도,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가 본래의 뜻입니다.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아무리 좋은 말과 거룩한 말을 해도, 그 말을 하는 사람의 행실이(삶이) 전혀 좋지 않고, 거룩하지 않다면, 그 말 자체를 귀담아 들을 수가 없습니다.
‘말과 행실이 다른’ 위선자들의 말에는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마르 1,22).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2) 우리는 사탄도 성경을 인용하면서 사람을 유혹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앞의 4장에 있는, 사탄이 예수님을 유혹한 이야기에도 그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 ‘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리라.’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마태 4,6)”
“사탄이 나쁜 의도로 성경을 인용한다고 해도
성경은 성경이다.” 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물론 아주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유혹을 받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사탄의 말은 사탄의 말일 뿐입니다.
성경 말씀을 인용한다고 해도......
<나쁜 의도로 성경을 인용하는 것은, 성경 말씀을 모독하는 죄입니다.>
위선자들이 성경 말씀을 말하는 경우도 다르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가 전하는 말씀은 거룩한 말씀이라고 주장한다고 해도, 그의 말과 행실이 다르다면, 그 위선자는 성경 말씀을 모독하는 죄를 짓는 사람이 될 뿐이고, 그들의 말은 전부 다 ‘빈말’이 될 뿐입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이고,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 어디서 누구를 가르치든지 간에,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말과 행실이 일치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3)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적이 없는 것과 가르치신 것과는 다른 것을 가르치는 일을 모두 금하신 명령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예수님의 가르침만을 믿고 따르는 종교입니다.
아무도 예수님의 가르침과 다른 것을, 또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적이 없는 것을 남에게 가르칠 수 없습니다.
<만일에 실제로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것은 ‘이단’이거나, 그리스도교가 아닌 ‘다른 종교’입니다.>
4)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고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
제자가 스승처럼 되고 종이 주인처럼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마태 10,24-25ㄱ).”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이라면, 아무도 예수님보다 더 높아질 수는 없습니다.
혹시라도 예수님을 능가하고 싶어 하거나 그렇게 하려고 시도한다면, 그 사람은 더 이상 예수님의 신앙인이 아닙니다.
그런 문제 때문에 바오로 사도가 코린토 교회의 신자들을 꾸짖은 일이 있습니다.
“하와가 뱀의 간계에 속아 넘어간 것처럼, 여러분도 생각이 미혹되어 그리스도를 향한 성실하고 순수한 마음을 저버리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사실 어떤 사람이 와서 우리가 선포한 예수님과 다른 예수님을 선포하는데도, 여러분이 받은 적이 없는 다른 영을 받게 하는데도, 여러분이 받아들인 적이 없는 다른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는데도, 여러분이 잘도 참아 주니 말입니다(2코린 11,3-4).”
<코린토 교회 신자들이 겪었던 일들은 오늘날에도 여기저기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5) 12절의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라는 말씀은, “교만한 자들은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사람만이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라는 뜻인데, 사람들의 존경과 칭찬을 바라지 말고
하느님께서 인정해 주시고 칭찬해 주시기만을
희망하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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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8. 사순 제2주간 화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태 23,1-12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율법의 준수도, 단식 자선 기도 같은 재계의 실천도 다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지적하십니다. 그들이 ‘입술로만 하느님을 섬길 뿐 그 마음은 그분에게서 멀리 떠나있기에’,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을 지킬 때에도 본질보다는 형식에, 근본정신보다는 허례허식에 집착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 이들이 쉽게 빠지는 유혹이 바로 ‘교만’입니다. 자기들이 고귀한 존재인 양 착각하며 힘들고 어려운 일에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다른 이들이 자기를 우러러 봐주기를 바라기에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사람들에게 인사받는 것을, 스승님 소리를 들으며 대우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자기들이 앉아있는 ‘모세의 자리’에 합당한 사람이 되려는 노력은 하지 않으면서 그 권위만 누리려는, 심지어 ‘하느님의 자리’까지 자기가 대신 차지하고 앉으려는 모습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 23,11-12)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더 나은 존재가 되고 싶다는, 더 높은 차원으로 고양되고 싶다는 열망을 품는 것 자체는 좋은 일이지만, 정말 그러고 싶다면 사람들 눈치를 보며 스스로 자신을 드높이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튼튼한 날개도 갖추지 않고 어슬프게 높은 하늘에 올라갔다가는 뜨거운 태양빛에 날개가 녹아내려 추락하고 말지요. 그러니 바닥부터, 기본부터 단단하게 다져가야 하는데 그 방법이 바로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며 다른 이들을 사랑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의무감으로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그들 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알아보고 하느님을 대하듯이 그들을 대하는 겁니다. 하느님 사랑은 이웃사랑을 통해서만 표현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믿을만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때 그가 평소에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지켜보는 것처럼, 하느님도 우리가 당신 피조물인 이웃 형제 자매를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시고 우리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판단하시는 겁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여야 하는데, 높이 오를수록 더 멀리, 더 크게 볼 줄 알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사람들이 참으로 많은 요즘입니다. 남들보다 뭐 하나라도 나은 게 있으면 목이 잔뜩 뻣뻣해져서 거들먹거리고, 높은 자리에 오르면 당장의 이익을 얻기 위해 과하게 탐욕을 부리다가 자기 자신은 물론 공동체 전체에 해악을 끼치고 말지요. 그렇다고 그런 이들을 비판하고 단죄하려고 들다가는 자기도 모르는 새 ‘욕하면서 닮게’ 될 겁니다. 그러니 우리 천주교 신자부터 변화되면 좋겠습니다. 늘 겸손한 자세로 만나는 모든 사람을 하느님으로 대하면 좋겠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한 없이 자신을 낮추시어 사람이 되시고 죽으신 주님의 큰 사랑을 생각하며, 감사와 사랑의 마음으로 이웃 형제 자매들을 섬기면 좋겠습니다. 힘으로 다른 이를 억누르며 억지로 그 위에 군림하려고 들면 ‘깡패’가 되지만, 겸손으로 다른 이를 귀하게 여기고 존중하면 자연스레 나도 귀한 존재가 된다는 걸 잊지 맙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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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8. 사순 제2주간 화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이사야 예언자는 과거에 하느님께서 대표적으로 응징했던
소곰과 고모라의 지도자들에게 가르침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언자는 그들에게 악한 행실에서 벗어나 회개하고 선행과 사회정의를 실천하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들을 치워 버려라.
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이사 1,16-17)
주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직접 거론하시고 그들을 비판하시며
지침의 말씀을 해 주십니다. 예언자는 하느님께 순종하면 살겠지만 하느님을 떠나면
스스로 멸망의 길을 가는 것임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말과 행동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 23,2)
주님께서 그들을 문제삼으시는 그들이 가르치는 대로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하느님의 법을 지키기 보다 남들에게 가르치며 의무를 얹어 놓고 정작 자신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 쉬운 방법으로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은 사람들에게는 존경을 받는 것을 좋아해서 눈에 띄도록 성구갑을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어뜨리는 것입니다.
그들은 또한 공공연한 장소에서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스승이라는 말을 들으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아예 스승이나 선생이라고 불리는 것을 원하지 말 것이며
남들을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십니다.
결론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11-12절)
예수님께서 당시에 스승이라고 일컫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반대하실까요?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 안에 머무는 이기적인 태도를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스스로 높아지려 하고 존경을 받으려 한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도 말했듯이 억압받는 이들을
보살피고 특히 소외된 이들, 고아와 과부의 권리를 찾아주고 억울함을 해결해주려는 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종교 지도자들은 사회정의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이익과 입지만을
따지는 데에만 골몰했던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입으로 하는 종교인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입에서는 성경 구절이 나오고 맹자공자 소리를 한다고 해서 다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아닌
종교인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특징은 자신은 실천하지 않으면서 남을 가르치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야단치시는
사람들이나 별 차이가 없지요.
남에게서 이것을 찾을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해서 이 사순절에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말이나 못하면 밉지나 않지’라는 우리 말이 있듯 우리 자신이 행동은 못 따라가면서
떠들기만 하는 그래서 이웃에게 빈축을 사는 그리스도인은 아닌지요?
나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는 복된 사순시기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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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8. 사순 제2주간 화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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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8. 사순 제2주간 화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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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7. 사순 제2주간 월요일.
주님이 오실 날을 준비하는 삶
<2025.3.18> 아침을 여는 묵상 (눅 12:35~48절)
❝주님이 오실 날을 준비하는 삶❞
❚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신 주님의 약속을 믿고 날마다 주님 맞을 준비를 해 나아가야 합니다.
✔ 주님 오실 날을 어떻게 준비해야 합니까?
➲ 부르심에 합당한 종으로써 준비하는 삶이어야 합니다(35~38절).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의 차이는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에 대해서 어떻게 준비하며 살아가고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35절). 항상 무언가를 행할 준비를 갖추고 있을 것과 어두움 속에서 항상 이동하거나 일을 할 자세를 취하고 있으라는 의미입니다. 주인이 밤중이나 혹은 새벽에라도 돌아왔을 때, 주인을 기다리며 깨어 있는 종은 그에 합당한 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주인의 식사의 자리에 앉게 해서 주인으로부터 직접 시중을 받게 되는 영광을 경험하게 될 것(37~38절)입니다. 종이 자신의 책임을 다하는 것은 마땅한 일일 텐데, 이 비유 속에 등장하는 종은 자신이 마땅히 감당해야 할 책임을 다하는 것으로 파격적인 칭찬과 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집중해야 할 많은 일들이 우리 앞에 산재해 있을지라도 우리의 삶에 있어서 우선순위가 되어야 할 일은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며,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가져오실 복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삶이어야 합니다. 도적같이 홀연히 오시겠다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늘 깨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랜 기다림이 자칫 주님의 재림의 약속에 대해 유야무야하게 인식해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스스로가 가져야 할 마음의 자세는 슬기로운 처녀들처럼 불시에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근신하는 마음입니다. 근신한다는 것은 자기 훈련을 통해 늘 깨어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비록 지금의 삶이 십자가를 지는 것 같은 고통이 따르는 삶이라 할지라도 참고, 인내함 속에서 주님의 때를 기다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날을 간절히 소망하면서 주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일하고, 주님이 하셨던 것처럼 섬김의 모습이 삶으로 실천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긴장감을 가지고 기다리며 준비하는 삶이어야 합니다(39~40절).
만일 집주인이 도둑이 언제 자신의 집에 침입할 것인지를 안다면 그에 대한 대비를 철저히 하겠지만, 실상은 도둑이 언제 침입 할지 알지 못합니다. 주님의 재림도 분명히 임하시지만, 도적이 들어오는 시간을 알 수 없는 것처럼 주님의 재림의 시간과 그 때는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39절).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40절).
잘 준비하여 그때를 기다리는 사람만이 그 영광을 맛볼 수 있습니다. 선한 행실로 그리고 어떠한 상황과 형편에서라도 복음을 증거하므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지나친 긴장감은 오히려 더욱 불안하게 하지만 적당한 긴장감은 오히려 더 집중하게 합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날을 분명히 믿기에 그날을 생각하며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아야 합니다. 그 긴장감 속에는 인내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내하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지만, 결국 인내하는 자는 열매를 보게 됨을 기억합니다. 주님의 오심을 소망하고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고 인내하며 그날을 준비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지혜롭고 진실한 청지기로 준비하는 삶이어야 합니다(41~48절).
예수님의 말씀에 베드로는 이 비유가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인지, 아니면 모든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인지 묻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베드로의 질문에 구체적으로 누구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다만 또 다른 비유로 대답을 하십니다.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42절)... 청지기의 역할이라고 하면 주인을 대신해서 주인의 재산과 종들을 잘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주인의 부재시 청지기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한 자에게는 그에 합당한 복이 약속되어 있지만, 그렇지 못한 청지기에 대해서는 그 이상의 벌이 내려집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않았다면 더 맞을 것(47절)입니다. 그러므로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하실 것(48절)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선생 된 자들이 더 큰 심판을 받는다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약 3:1). 즉 하나님은 영적인 지도자들에게 더 많은 책임을 요구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종으로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답은 ‘지혜롭고 진실한 청지기’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선한 청지기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기복이 없이 모든 일에 충성스럽고 믿음직하게 잘 감당해야 합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주어진 일이 작든 크든지에 상관없이 꾸준하게 감당할 때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의 것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바른 청지기의 삶은 섬김의 종이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내 인생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나의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은 만큼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주님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셨던 것처럼 나 역시 그런 마음가짐과 결단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주님이 나를 섬겨 주셨듯이 이제는 나 역시도 다른 사람을 잘 섬기는 섬김의 종으로서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주인의 뜻을 알면서도 준비하지 않고, 행하지 않으면 주인으로부터 심한 채찍을 맞는 심판을 당하게 됩니다. 늘 주님의 뜻을 상고해서 잘 분별하여 주님의 뜻을 따라가는 삶이기를 소원합니다. 무엇보다 영적인 리더십으로의 사역이 주어진 만큼 영적 부담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맡겨진 양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선한 목자로 그리고 지혜롭고 진실한 청지기로 그날을 준비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의 마음이 두려움이 아닌 행복한 기다림으로 만들어가도록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갈 뿐 아니라 그날을 고대하며 믿음의 긴장을 놓치지 말고 영적으로 깨어 있어 지혜 있고 신실한 청지기로 살아갈 수 있기를(눅 12:35~48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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