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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11: 10-26
셈의 후예는
본문에 기록된 이 사건에 따라서 모세는 셈의 자손 중에 특별히 에벨을 위시하여 경건한 운동이 있었으며 그 계열에서 아브라함이 나게 되었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1. 본문 10절은
“셈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셈은 일 백세 곧 홍수 이년에 아르박삿을 낳았고” 입니다.
1) 셈의 후예에 관하여 모세는 이전 장에서 약간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사람들의 이름들과 그들의 여러 생애들의 기간을 종합시킵니다. 이로서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의 연대에 대하여 무지를 벗어나도록 자료를 제공합니다. 만약 이 간단한 묘사가 보존되지 않았다면 지금 이 시대에도 사람들이 홍수시대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세우신 시대 사이에 어느 정도 시간이 끼어 있는지를 몰랐을 것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이 셈의 후손으로부터 이 세상의 연대를 영예로운 표로서 인정하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관찰해 봐야 될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역사가들이 왕들의 이름들이나 대표자들의 이름으로 그들의 연대를 추정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셈의 가족이 지니고 있는 숭고성과 장점 때문에 이런 명예를 주신 것보다는 그분의 은혜로 양자 삼으신 것을 인하여 더 많은 명예를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셈의 후손들 가운데 대부분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기는 상태에서 배교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의 목록에서 그들을 지워버리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전적으로 세상에서 없애버림을 받아야 될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한 그분 자신이 택하신 선택을 지극히 존중하고 계십니다. 그 선택으로 하나님은 이 가족을 모든 백성들에게서 분리시켜서 사람들의 죄 때문에 멸망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결과로 아르박삿의 아들들 가운데서 셀라 혼자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그에게서는 에벨 혼자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아브람에게 이르기 전에는 그 혼자만 남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을 부르신 것을 바로 교회의 혁신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나머지 사람들에게 관해서와 같이 그 세기가 다 가기 전에 그들이 불경건한 가증스런 미신에 빠지고 말았는 듯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조상들인 데라와 나홀이 이상한 신들을 섬겼던 사실을 유대인들에게 혐의로 씌우실 때에(수24:2)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될 것은 그들이 출생한 셈의 집이 하나님의 성소였다는 점입니다. 거기서 진정한 종교가 발전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추측해야 되겠는가? 과연 맨 처음부터 이런 제사에서 놓임을 받을 듯이 보이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났겠는가? 거기에서는 틀림없이 엄청난 죄악성과 타락성이 나타날 뿐만 아니라 또한 완전히 굳어져 버린 인간의 마음이 나타날 뿐입니다. 홍수를 직접 목격한 노아와 그의 아들들은 아직까지 살아 있습니다.
그 역사의 해석은 하나님 자신이 가시적으로 나타나신 것보다 조금도 못지 않게 무서운 공포로 사람들을 감동시켰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갓난아기 때부터 그들은 종교적인 교훈의 그런 요인들로 감화를 받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교훈으로 하나님이 경배를 받아야 되실 예배 방법들과 그분의 말씀을 순종해야 될 경외심과 그리고 하나님이 명시해 주신 질서를 어기는 자들에게 주어질 그분의 무서운 가차없는 보복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었습니다.그런데도 그들의 헛된 허영심으로 그렇게 철저하게 부패되는 것을 도저히 삼갈 수가 없어서 결국 그들은 철저하게 하나님을 버리고 배교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답게 특이한 열심과 영웅적인 견인불발의 정신으로 거룩한 길을 갑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지탱하기 위하여 모든 면에서 투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예리하게 그리고 가혹하게 그리고 사실상 호통을 치며 그의 후손들의 불신적인 배교를 비난했을 것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실은 바로 그가 나타나는 것을 보면 모든 사람이 떨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그들은 제 아무리 큰 소리로 꾸짖고 호통을 쳐도 그들이 처하고 있는 생활에서 조금도 탈피하지 않았습니다. 또 그들의 격분이 그들을 몰아 넣었던 과정에서 조금도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회의주의자들의 무감각한 감언이설에서보다는 이 거울에서 우리의 타락한 성품이 얼마나 많은 대가를 받고 있는가를 배워야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노아와 셈 그리고 그 밖에 다른 저명한 선생들이 가장 용기 백배하게 투쟁하였을지라도 세상에 그런 불경건한 가증스런 일들이 팽배하는 것을 예방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오늘날에도 세상의 걷잡을 수가 없는 정욕이 건전한 교리와 교훈과 위협들로 사이에 끼워놓은 장애물들을 무시해 버리고 불경건하고 의곡된 예배 양식으로 달려 치닫고 있는 광경에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이 거룩한 사람들 속에서 관찰해야 될 사실은 다름이 아니라 그들의 신앙이 얼마나 확고했으며 얼마나 끈기있는 인내이며 얼마나 참을성 있게 그들의 경건성을 계발시키는 데에 주력하며 잘 견디어 냈는가라는 점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투쟁해야 되었던 수많은 공격의 상황 가운데서도 전혀 그들에게 허점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루터는 아주 적절하게 그들이 필연적으로 당했던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무서운 고통들을 많은 순교자들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후손들이 하나님에게 결별되어 관계가 멀어진 상태가 그들 자신들의 창자가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을 보는 것 뿐만 아니라 또한 사단의 수렁 속으로 그리고 지옥으로 던져지는 것보다 못지 않게 그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그렇게 불경건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 반면에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도록 몇 사람을 놀랍게 잡아 두셨습니다. 그것은 교회를 멸망에서 보존하시기 위해서인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배교자이었습니다. 그 단점이 처음에는 그들에게 시작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계속되는 후손의 계열을 추리해 내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여 그들을 성자들의 목록에 등록시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교회가 그 종족에게 포함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분 자신을 순결하게 경배하는 사람들과 아브라함의 시대까지도 생존해 있는 사람들을 지니고 계셨던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가 추론할 수 있는 것은 가장 고귀한 소중함으로 하나님은 교회를 붙들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비록 수적으로는 적은 것이지만 그 교회가 아직도 세상 전체보다 더 하나님에게 귀중한 것입니다.
2) “셈은 일 백세 곧 홍수 후 이년에 아르박삿을 낳았고”라는 말씀에서 모세가 아르박삿을 셈의 아들들의 서열 가운데서 세 번째로 두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한가지 의문시되고 있는 것은 어떻게 이 사실이 홍수 후에 2년째 되는 해에 그가 출생했다는 것과 일치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가 제기됩니다.
이것에 대한 해답은 아주 쉽습니다. 모세가 기록하고 있는 목록에서는 어느 때에 각자가 출생했는지는 정확하게 밝혀낼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때로는 지위의 우선권은 출생서열에서 아직도 후부에 있는 자에게 돌려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대답하기를 만 2년 만에 셋째아들이 출생했다고 모세가 여기서 선언하고 있는 것으로 추측하는 면에서는 전혀 모호한 점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제공한 해결책이 더 참된 것입니다.
2. 본문 11-26절은
“(11) 아르박삿을 낳은 후에 오백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2) 아르박삿은 삼십오 세에 셀라를 낳았고
(13) 셀라를 낳은 후에 사백삼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4) 셀라는 삼십세에 에벨을 낳았고
(15) 에벨을 낳은 후에 사백삼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6) 에벨은 삼십사 세에 벨렉을 낳았고
(17) 벨렉을 낳은 후에 사백삼십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8) 벨렉은 삼십세에 르우를 낳았고
(19) 르우를 낳은 후에 이백구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0) 르우는 삼십이 세에 스룩을 낳았고
(21) 스룩을 낳은 후에 이백칠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2) 스룩은 삼십세에 나홀을 낳았고
(23) 나홀을 낳은 후에 이백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4) 나홀은 이십구세에 데라를 낳았고
(25) 데라를 낳은 후에 일백십구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6) 데라는 칠십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 입니다.
이 부분에는 “셈”으로부터 “아브라함” 까지의 족보를 말하여 줍니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가 명심할 것이 있습니다.
(1) 그 조상들의 대수(代數)와 그들이 대대로 자녀를 낳았다는 말이 있을 뿐이고, 5장에 있는 족보처럼 죽었다는 말은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들이 죽지 않은 것은 아니로되 여기서는 자녀들을 낳았다는 사실만 강조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죽음에 대하여는 관설하지 않은 것 뿐 입니다. 이 조상들이 많은 자녀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이름들을 모두 다 기록하지는 않았습니다. 이 이름 모를 자녀들이 이 때에 세계적으로 분산하여 있었을 것은 확실합니다. 그 이유는 특별히 바벨탑이 심판 받은 후에 에벨을 위시하여 특별히 그의 아들 “벨렉”의 시대에(10:25) 족속들이 흩어지는 것이 그 때의 특징이었기 때문입니다. 생각건대 동양 민족들(몽고족)은 이 때에 중앙 아세아에서부터 극동으로 번져 온 듯합니다.
(2) 이 시대에 사람들의 수명(壽命)이 점점 짧아진 것이 드러납니다.
특별히 바벨탑 심판이 있은 후 족속들이 흩어지는 때(벨렉의 시대, 11:18-19, 10:25)부터 이 사실이 현저하게 드러납니다. “벨렉”의 부친 “에벨”은 464세까지 살았는데 “벨렉”은 겨우 239년을 살았으니 양자의 차이는 현저합니다. “벨렉”부터는 사람들의 수명이 200년대에서 더 올라가지 못하였습니다. 이렇게 수명이 짧아진 원인에 대하여 학자들은 여러 가지로 추측합니다. 혹은 홍수로 말미암아 기후가 변동되었다는 것, 혹은 족속들이 다 흩어져 살게 되었다는 것 등을 원인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본문이 보여주는 대로 그들의 수명이 짧아진 원인이 바벨탑을 쌓던 죄악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바벨탑 심판으로 인하여 족속들이 흩어진 사건 직후부터 그들의 수명이 짧아졌기 때문입니다. “벨렉”은 족속들이 흩어지는 사건과 관련된 조상의 이름인데(10:25), 수명이 짧아진 역사가 바로 벨렉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11:18). 우리는 인간의 생명이 죄악으로 말미암아 감손(減損)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도 범죄 때문에 사망하였습니다. 바벨탑 사건 전에도 죄악은 많았습니다(6장). 그렇기 때문에 홍수가 왔습니다.
그러나 홍수 심판이 아직 기억에서 사라지기도 전에 바벨탑을 쌓는 사건이 있은 것은 너무도 하나님의 노를 격동시킨 것입니다. 오죽하면 하나님께서 그때 사람들의 말을 혼잡케 하셨겠습니까? 그야말로 그들 자신도 말이 막힐만한 기막히는 죄악을 범한 것입니다. 이런 죄 값으로 인류의 수명은 짧아졌습니다. 잠10:27절에 말하기를 “여호와를 경외하면 장수하느니라 그러나 악인의 연세는 짧아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공경하며 잘 순종하면 마음이 즐겁기 때문에 오래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악을 범하면 근심에 사로잡혀서라도 단명(短命)하여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잠17:22에 말하기를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한번 웃으면 한번 젊어지고 한번 노하면 한번 늙는다”(一笑一少一惡一怒) 란 말도 옳은 말입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직접 벌을 내려 오래 살지 못하게도 하십니다. 그 이유는 죄인들이 너무 오래 살면 죄악이 더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특별한 악인이 오래 사는 수도 있고 특별한 의인이 단명한 일도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외입니다. 무슨 일이나 예외는 있는 법입니다. 물론 이 예외의 사실들도 하나님의 경륜에 의하여 발생됩니다.
(3) 그리고 참으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어느 때를 막론하고 땅 위에 경건한 자손을 두시고 교회를 이루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영생을 보장하신다는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