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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1929~) - 인간과 사상
파리의 한 대학에서 사회학을 가르치고 있던 어떤 교수의 저서가 출간되었을 때, 1986년 4월 10일자 프랑스 일간지 《리베라시옹(Liberation)》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렸다.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그를 사회학자로 믿고 있었다. 또 모든 사람들과 같이 나는 그가 약간은 비정형적이며 거의 정통적이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나는 심지어 그가 언젠가는 마침내 기술적 실업 상태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물론 기고가(Robert Maggiori)는 이 글에서 자신의 추측이 틀렸음을 고백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가 무슨 까닭으로 이와 같은 예견을 했었을까 궁금하다. 이유인즉, 모든 것은 의미의 파괴일 뿐이라고 말하는 사회학자, 모든 것은 시뮬라시옹(simulation)과 시뮬라크르(simulacre)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회학자, 결정적으로 사회적인 것의 종언을 말하는 사회학자에게 과연 무슨 할 일이 더 남아 있겠느냐는 것이다.
문제의 '사회학자' 쟝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1929~)는 1966년부터 1987년 은퇴할 때까지 줄곧 파리 낭떼르(Nanterre) 대학의 사회학 교수 노릇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포스트모더니즘 논의를 거침없이 쏟아 내놓고 있는 문화이론가로서 아직도 건재하다.
보드리야르는 자신 스스로도 말하고 있지만 고유한 의미에서의 철학자도 사회학자도 아니며 문학가는 더욱 아니다. 그는 소위 포스트모더니즘 '이론가'이고 싶어한다. 사실 그를 어떻게 규정하든지 간에 그는 마르크스주의에서 출발하여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선회해 나가면서 세계적인 지명도를 얻고 있다.
프랑스 사회학자로 말하자면 부르디외(Bourdieu)나 부동(Boudon) 등과는 견줄 수 없는 보드리야르이지만 1968년에 그의 첫 번째 저서인 《사물의 체계》가 출간된 이후 그는 지금까지 프랑스 밖에서 오히려 더 잘 알려진 프랑스 지식인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사실 프랑스에서 적지 않은 기간을 지내는 동안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용어를 과연 몇 번이나 들을 수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전통적 ― 다시 말해 '모던' 철학에 빠져 있다가 돌아온 필자로서는 지난 90년대 한국에 불어닥친 포스트모더니즘 바람이 놀라운 것일 수밖에 없었다.
보드리야르의 작업은 197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포스트모던 이론으로 전개되지만, 이미 그 이전부터 그를 일약 국제적인 스타 지식인으로 만든 것은 위의 박사학위논문을 포함하여 1973년까지 나온 《소비의 사회》(1970), 《기호의 정치경제학 비판》(1972), 《생산의 거울》(1973), 이렇게 4권의 초기 작품들이었다. 그는 비록 합리적인 논거의 제시를 거부하는 이론가이지만, 특히 기호의 세계로 현대의 문화현상을 파악하려는 그의 논리는 많은 문화이론가들에게 유익한 통찰을 제공해주고 있다.
이와 같은 보드리야르의 초기 작업은 여전히 마르크스적 사회이론의 틀 속에 있었지만, 1970년대 중반부터는 마르크스주의와의 결별이 이루어지고 포스트모던의 사회이론이 등장하게 된다. 《생산의 거울》에서 이미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이 시도되고 있으며, 《상징적 교환과 죽음》(1976)과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1981) 등에서는 아예 정치경제학은 자취를 감추고 포스트모던 사회의 묘사와 함께 새로운 사유방식의 필요성이 이야기되고 있다. 우리의 이 짧은 글에서는 주로 이 시기까지의 내용이 주제가 될 것이다.
한편 보드리야르는 《유혹에 대하여》(1979)와 《숙명적 전략》(1983)에서 이와 같은 새로운 유형의 사유방식으로 '숙명적 이론'을 주장한다. 이를 계기로 보드리야르의 사상은 이른바 '포스트모던 형이상학' 시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1986년의 《아메리카》와 1987년의 《차가운 기억》은 그의 '형이상학적 전환' 이후의 저작이다. 이 시기에 보드리야르가 생산주의적 성 개념인 남성, 여성의 이분법을 빗겨 가는 대안으로서 내놓는 '유혹'이라는 범주나 또 사물들이 주체에 대하여 취하는 '숙명적 전략'에 관하여 하는 이야기는 여기서는 일단 접어두기로 하자.
초기에 보드리야르는 바르트(Barthes)나 지도교수였던 르페브르(Lefebvre) 등으로부터 다양한 영향을 받아 현대성에 대한 새로운 사유의 기초를 놓는다. 전반적으로 그가 새롭게 반성하고 있는 것은 한 마디로 '재현(representation)'의 문제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70년대 전반부 서구사회를 특징짓는 상징체계에 주목하여 그가 정확하게 묘사하려고 했던 것은 바로 '소비'라는 현상이다.
마르크스의 시각에서 보면 '생산', '노동', '교환가치' 등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개념이겠지만, 보드리야르는 서구사회에서 소비의 문제가 그 중심에 있음을 갈파하였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의 문제틀에 기호학을 접합시켜 만든 도구를 사용하여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일상성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기 시작한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후 점차적으로 서구의 정치․경제계는 '생산이 소비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사실 팔릴 것이 보장되지 않는 물건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는 점점 '소비의 사회'로 되어갈 수밖에 없었고, 기업 중에서도 상업분야가 그 중요성을 더해가기 시작한다.
여기서 보드리야르가 관심을 갖고 수행하려는 작업이 변화하는 사회의 제도나 문화에 대한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사회학적 접근은 물론 아니지만, 한 사회가 어떻게 기능하고 있는지 그 법칙을 찾는다는 점에서는 여전히 사회학의 테두리 안에 머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변화된 새로운 세계와 기존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심성(la mentalite) 내지 정신적 구조에 어떤 변화가 나타나는가 하는 것을 찾아내어 기술하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드리야르는 우선 사물들이 갖는 새로운 의미를 보여준다.
오늘날 신제품, 신기능, 자동기구, 기발한 제품(gadget) 등으로 대변되는 기술혁신은 이제 우리의 일상을 이루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사용자들도 점차 이와 같은 혁신의 노름에 동참하게 되어 온갖 가전제품으로 집안을 가득 채우게 되고, 더 편리하고 신기한 선택사양이 장착된 자동차로 바꾸지 못해 조바심을 내게 되었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매스컴과 광고의 역할이 컸으며, 사람들은 거기에 더욱 열중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나의 사물에서 또 다른 사물로, 사물에서 그 이미지로, 다시 사물의 이미지에서 사물에 대한 담론으로 나아가는 과정 속에서 일반 사용자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엄청난 물량과 경이로운 기능들 앞에서 갈피를 잃고 말았다. 사물들의 새로운 질서를 파악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 때 사물들과 생산품들과 이미지들이 단지 다양화되고 완벽해진 것만이 아니라, 그것들의 의미가 바뀌어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사물의 체계》에서 보드리야르는 기술․산업사회에서 사물들이 갖는 위치가 무엇인지를 묻고, 우리들이 사물들에 부여하는 심리학적이고 사회학적인 의미를 밝히려 한다. 이와 같은 작업은 사물들에 대한 면밀한 기술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조직하고 그것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구조들에 대한 기술로 시작한다.
사물들의 의미변화는 단지 다양한 사물들의 양적인 증가에 의해 초래된다기보다는 우리가 사물들에 부여하는 새로운 기능에 의해서 생긴다. 전통적으로 볼 때 사물은 다음의 세 가지 양태로 그 기능을 수행하였다. 그것이 1)실제로 어디에 쓰이는지, 2)또 필수적이고 기본적인 욕구와 충동을 만족시키고 있는지, 3)그리고 인간과 어떤 상징적인 관계를 맺는지에 따라 그 기능을 달리 하였다. 예를 들어 집은 실제로 거주용으로 쓰이면서 기본적인 욕구를 만족시켜주지만, 집은 또한 우리가 거기에 부여하는 상징적인 의미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사물들의 기능 상 사용가치나 상징가치가 더 이상 본질적이지 않고, 중요한 것은 사물들이 기능체계 속에 통합되는 능력이다. 다시 말해서 사물들이 본래 갖고 있는 내재적인 성질이 아니라 다른 재료들과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능력이 중요해진 것이다. 예를 들어 실내를 장식하고 있는 물건들은 그 형태나 색상 자체가 가치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연출되는 분위기의 단순한 요소로서의 가치만을 갖는다.
'오크재'가 '티크재'와 차이나는 이유는 그 원산지나 자연재질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분위기를 위해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오크재가 고상한 분위기를 자아낼 수 있는 것은 오크재가 본래 고상함을 간직한 물질이어서가 아니라 단지 고상함의 문화적 기호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현대 실내장식이라는 체계에서 '고상함'의 기호로서의 임무를 수행하는 오크재는 바로 그 체계에 의해서 나름의 의미와 기능을 부여받은 것이다. 이제 사물들은 전체에 동화되는 능력에 의해서만 그 가치가 평가된다는 것은 바로 이런 뜻이다.
이와 같은 사물들의 의미변화는 결과적으로 우리가 세계와 교섭하는 방식을 변화시켰다. 사물들이 본질적으로 그 고유한 성질과 상징적 차원을 상실했다는 것은 우리의 육체가 더 이상 세계에 뿌리내리지 못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본디 우리의 육체는 사물들의 저항에 맞부딪치면서 세계와 만났으며 또한 그 노동의 몸짓 속에는 상징적인 것이 담겨져 있었다. 바로 이 대목에서 현상학 내지 실존주의 철학과 정신분석학은 우리 육체가 담당하는 역할을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기술의 시대에 우리는 기계의 작동단추나 원격조정기와 대면할 뿐, 우리의 육체와 사물 사이의 실제접촉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기껏해야 육체의 최소 말단을 통해 육체가 존재한다는 기호들만을 자동화, 기술화된 사물들에게 보내고 있는 셈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사물들은 기호이며 그 각각의 의미와 기능을 전체 기호체계 안에서 정합적으로 부여받는다면, '소비'의 개념도 역시 그 기호체계 안에서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며 그럴 경우에 소비는 하나의 사회적 언어가 된다. 이러한 이유로 보드리야르의 두 번째 저서 《소비의 사회》는 《사물의 체계》에서의 논리를 충실히 따르고 있는 것이다.
생산자는 더 이상 소비자의 필수품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들의 욕망을 자극하는 물건들을 생산한다. 생산이 소비의 논리에 의해서 움직이게 됨에 따라 대중매체는 소비자의 욕망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광고를 통한 기호의 창출에 나선다. 결과적으로 이제 소비자가 원하는 것은 광고상품이 아니라 기호 그 자체가 된다. 구성원들이 기호를 욕망하고 기호를 소비하고 있는 새로운 자본주의의 사회가 바로 '소비의 사회'인 것이다.
한편 《기호의 정치경제학 비판》에서 보드리야르는 상품의 기호가치를 더욱 강조하면서, 사용가치에만 근거한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을 비판하기 시작한다. 상품형태가 기호형태로 대치되고 기호가치는 상품들의 위계질서를 통해 발생하며 정치경제의 코드에 의해 조직되는 것이 바로 '기호의 정치경제학'인 것이다. 이제 사물들은 기호가치의 체계가 되며, 반면 주체는 사회적으로 생산된 욕구의 체계가 된다. 여기서 물론 보드리야르는 마르크스를 비판하고는 있지만 아직까지는 마르크스 정치경제이론에 대한 기호학적 보완의 차원에 머물고 있다.
하지만 1973년에 발표한 《생산의 거울》과 1976년의《상징적 교환과 죽음》을 계기로 해서 보드리야르는 기존의 산업사회를 설명하는 개념적 범주와 가치로는 새로운 사회현실을 더 이상 설명할 수 없음을 비로소 깨닫게 되고 본격적으로 마르크스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보드리야르는 초기 저작에서 보여준 자기 나름의 분석을 통해서 사회적 갈등이 생산수단 보다는 코드의 지배를 둘러싸고 일어난다고 보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생산은 더 이상 모순의 영역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사회비판의 대상이 상품의 정치경제학에서 기호의 정치경제학으로 옮겨져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전히 생산 제일주의의 논리에 근거하고 있는 마르크스주의는 그 사회비판과 사회변혁의 능력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생산 중심 체계의 존속을 강화하는 역할을 할뿐이다. 결국 마르크스주의조차도 부르조와 가치를 옹호하게 되는 '생산의 거울'일 뿐이라고 보고, 서구의 모든 형이상학이 반영된 이 생산의 거울을 무너뜨리자고 보드리야르는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보드리야르가 제시하는 대안은 잘 알려진 대로 '상징적 교환'이라는 개념으로서, 이는 자본주의 사회의 논리와는 대립되는 소비원리이다. 등가교환이나 이윤발생 없이도 물건을 자발적으로 소비할 수 있는 이유는 그 물건이 사용가치나 교환가치로 환원될 수 없는 상징적 가치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마르셀 모스(Marcel Mauss)의 '선물교환' 개념이 이러한 성격을 갖는 소비의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선물을 하는 행위는 일종의 희생이나 심지어 낭비로 볼 수 있지만 자본주의 사회 내에도 분명 선물은 존재하며, 이는 인간의 경제를 결코 평형상태만으로는 볼 수 없음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결국 보드리야르는 원시사회를 모델로 하는 상징적 교환의 사회를 혁명적 대안으로서 자본주의 사회에 대립시킨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소유와 무한한 축적의 과정이 유일한 정치경제학의 과정이라면 상징적 교환의 사회에서는 생산물은 축적되지 않고 교환된다. 선물교환, 축제, 종교적 제의 등의 상징적 교환에 의해 조직된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를 지배하는 생산의 논리와 유용성, 도구적 합리성의 전복을 꾀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현대의 새로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기호의 생산이 사물의 생산을 대체하였으며 기호와 코드가 지배하는 의미작용의 양식이 생산 양식보다 우월하다고 보드리야르는 보고 있는 것이다.
보드리야르는 초기 저술에서부터 기호들의 체계를 가리키면서 소쉬르의 '랑그(langue)'에 해당하는 '코드(code)'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했으며 《상징적 교환과 죽음》에서부터 '코드' 개념은 중요성을 갖게 되었다. 보드리야르가 말하는 코드는 유전자 코드나 디지털 코드와 같은 의미의 코드인데, 그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코드와 재생산품 간의 관련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코드라는 개념을 통해서 원본과 복제품 사이의 구분을 전적으로 부수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코드가 우리로 하여금 자연적 현실을 무시할 수 있게 함으로써 이른바 '가역성'이라는 결과가 나타난다. 다시 말해서 그 어떤 것도 체계의 밖에서 존재하지 않게 된다. 심지어 죽음조차도 체계 안에 통합되기 때문에 죽음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가역성의 원리는 함축하고 있다. 이와 같은 가역성은 《시뮬라크르과 시뮬라시옹》에서 가장 명백하게 나타난다.
이제 보드리야르는 기호가 사물을 대체하고 시뮬라크르가 실재를 대신하는 사회, 즉 이른바 '포스트모던' 사회에 대한 묘사를 통해서 자타가 공인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이론가로 등장하게 된다. 우선 재현과 현실, 모사와 실물 사이의 관계가 무너졌다거나 역전되었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야기해보자. 이는 오늘날 무엇이 실물이고 무엇이 그 모사인지가 분명하지 않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재현의 질서가 새로운 문화적 질서가 되어가고 있음을 뜻한다. 보드리야르는 역사적으로 재현과 현실의 관계가 어떻게 변해 왔는지 정리하고 있는데, 어느 시기에나 재현 과정으로서의 시뮬라시옹, 다시 말해 모사과정은 있었지만, 그 의의는 시대에 따라 달랐다.
르네상스 시기는 중세의 신분사회와 신 중심사회가 끝나는 시기였다. 신의 질서에서 자연에 대한 믿음으로 전환이 이루어지고 예술은 자연의 모방을 시도하고 기호는 현실을 비추는 거울의 역할을 하였다. 산업화 시대 이후에는 모사품은 대량생산이 가능해짐에 따라 공산품으로 취급받게 되었다. 하지만 르네상스에서 산업화 시대에 이르기까지 재현은 항상 현실을 바탕으로 진행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다시 말해 현실이 모사과정의 대상이 되고 기준이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위조와 생산의 시뮬라시옹을 넘어서 현재는 코드가 지배하는 시뮬라시옹의 시대가 온 것이다. 위조나 산업적 생산의 경우에는 대상과 모사의 차이가 분명하지만 시뮬라시옹의 시대에는 대상의 생산이 아니라 재생산이 중요하며 그 재생산의 원칙은 바로 코드 안에 포함된다. 생산품뿐만 아니라 노동까지도 모두 재생산되는 경우, 사물들의 기원은 원래의 사물이 아니라 코드이다. 이렇게 재생산되는 원본이 생산되는 대상이 아니라 생산의 원리라면, 생산된 최후의 원본도 역시 완벽하게 재생산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드리야르가 보건대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시뮬라시옹의 사회질서에서는 재현과 현실의 차이 내지 간극이 없어져버렸다. 심지어 현실을 모방한 것이 재현이 아니라 재현을 통해서 현실이 확인되는 전도가 일어난다. 시뮬라시옹을 통해서 만들어진 시뮬라크르가 현실의 기준이 되어버린 것이다. 바야흐로 시뮬라크르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비근한 예로 요즈음 텔레비전 쇼프로를 보면 성대모사의 장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누군가의 말투를 특징적으로 잘 모사하는 사람이 생기게 되면, 결국 사람들은 그 모사를 모사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예를 들어 대통령의 말씨를 흉내내기 위해서 대통령의 성대모사를 잘 하는 개그맨을 흉내내는 경우가 생겼다면, 이는 원본과 시뮬라크르가 완전히 뒤바뀌었음을 뜻한다.
시뮬라크르를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대중매체가 현실을 압도하고 그 잣대가 되는 사례는 이 밖에도 무수하게 많다. 이와 같이 현실을 압도하는 가상현실을 보드리야르는 '극실재(hyperrealite)'라고 부른다. 이는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재현, 원본보다 더 원본의 행세를 하는 시뮬라크르를 이르는 말이다. 이제 재현 내지 모사만이 실재하는 극실재의 영역이 사회적 질서를 지배하고 급기야 사회를 구성하게끔 된 것이다.
이렇게 재현이 불가능해지고 의미가 사라지며 실재와 재현 등 서구 '모던' 사유가 기반을 두고 있었던 이분법적 차이가 소멸하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하여 보드리야르는 '내파(implosion)'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그는 대중과 매체가 포스트모던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중요한 요소라고 보는데, 매체는 기호와 정보를 증대시킨 나머지 의미를 소멸시키고 매체와 실재의 구분을 와해시켰으며 이와 같은 정보의 과잉공급은 결국 대중을 '침묵하는 다수'로 만들어버렸다는 것이다.
보드리야르는 더 나아가 사회니 계급이니 하는 기존의 사회학적 범주들도 시뮬라시옹의 사회에서는 내파되었기에 무의미하다고 본다. 대중은 의미와 정보의 수용과 생산을 거부함으로써 모든 것을 무의미하게 하며 결국 사회 자체가 무관심하고 냉담한 대중 속으로 내파되어 소멸되었다고 본다. 한 마디로 말해서 사회적인 것의 존립이 불가능해진 것이다.
본래 대중매체는 그것이 전달하는 메시지가 의미를 만들어냄으로써 사회 제도로서의 존재 가치를 갖지만, 보드리야르의 시각에서 보면 메시지는 의미를 만들어낼 수 없다. 메시지는 매체를 넘어서 있는 현실을 재현해내지 못하고 재현과 현실 사이의 구분조차 모호해지는 상황에서 메시지 또는 정보의 의미는 해체되고 마는 것이다. 다만 의미 없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만들어냄으로써 '통신의 황홀경'만이 우리에게 남게 된다.
정보매체 속에서의 의미의 내파, 실재와 시뮬라크르의 혼동, 원인과 결과, 진짜와 가짜가 서로 서로를 만들어내는, 즉 뫼비우스의 띠와 같이 계속 물고 물리는 시뮬라시옹의 사회가 바로 보드리야르가 그려내고 있는 포스트모던 사회이다.
모더니즘의 이분법적 사유로는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된 이와 같은 사회에서는 정보매체의 폭발적인 증가에 의해서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에 대한 정보의 구분도 사라진다. 모든 것이 투명하게 노출되고 낱낱이 보여지는 외설적 시기를 맞이한 것이다. 이와 같이 안과 밖의 구분이 없는 뫼비우스 효과는 공․사의 구분뿐만 아니라 고유와 공통, 주체와 객체, 좌익과 우익의 이분법에서도 나타난다. 요컨대 모던적인 사고체계로는 수용할 수 없는 '포스트모던'의 세계가 보여주는 소멸된 의미, 투명한 기호 등의 모습은 허무주의의 광경 또는 광경의 부재이다. 이렇게 의미가 불가능하고 시뮬라시옹의 끝없는 순환만이 있는 공허한 세계는 분명 묵시록적이다.
다양한 분야에서 현기증이 날 지경으로 급변하는 현실을 바라볼 때 모든 실재의 '허구화' 내지 '비실재화'를 이야기하고 쉽사리 허무주의적 태도를 취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겠다. 실제로 보드리야르는 일종의 보편적 소멸의 도래를 암시하고 있으며, 가공할 만한 시촵공간의 내부 폭발을 예견하는 소위 '사회․문화적 묵시록'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소 성급하게 말한다면, 인류 문명은 결코 파국으로 치닫지는 않으리라. 보드리야르의 비관적인 통찰에도 불구하고 새 천년에도 인류는 사회․문화적인 진화를 계속해 나갈 것이고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현명하게 그 진화의 흐름을 이론적이며 동시에 실천적으로 잘 제어해 나가느냐에 달려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보드리야르라는 현대성의 사회사상가로부터 무엇을 얻어야 하는가? 그는 처음부터 '재현'의 문제에 주목하여 결국 재현이 불가능함을 말하고 있지만, 공상과학적이기까지 한 그의 시각은 현대사회에 대한 다양한 모습을 충실하게 '재현'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그가 행하고 있는 서구의 합리적인 사유틀에 대한 극단적인 비판과 해체작업은 종종 그를 비합리주의적 에세이스트로 보여지게 하지만, 그의 풍부한 포스트모던의 성찰은 인류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되어감(devenir autre)'의 진화과정을 정확히 읽어낼 수 있는 진화된 이론들을 제공하고 있다.
[출처] 보드리야르 |작성자 툭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