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을 별답게 처음 본 것은 6·25 피난지인 어느 초등학교 마당에서였다. 우주에 대한 첫 경험은 아홉 살짜리에 게 놀라운 경이였다. 어둠 속에서 오롯하게 존재를 드러내던 신비로운 별, 작은 가슴이 팔딱거렸다.
이후로 두 번째의 충격은 지난겨울, 피지에 갔을 때였다. 그곳 원주민들이 모여 산다는 '나발라의 민속촌'을 찾았다. 300여 채의 부레草家에서 그들은 공동체를 이루며 살고 있었다. 관습에 따라 '술루'라는 치마를 구해 입고, 카바가루와 빵을 사 들고 현지인의 안내를 받으며 그들을 예방했다. '마마누카'라는 전통의식을 치른 뒤 추장이 내어 준 방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전기도 없는 오지의 산간 마을, 뒷간 볼 일로 남편을 깨워 더듬더듬 밖으로 나왔다.
칠흑 같은 밤에 대체 누구의 마련이던가.
온 하늘에 금강석을 뿌려놓은 듯, 찬란하게 펼쳐진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 태고의 신비 앞에 불려 나온 듯했다.
손을 뻗치면 금방이라도 닿을 듯한 공간에 주먹만 한 별들이 허파로 숨을 쉬는 게 느껴졌고, 눈을 깜빡거리는 별들의 촉광도 감지될 듯했다. 연이어 소리 없는 폭죽이 사방에서 터지고, 길게 꼬리를 물며 땅으로 내리꽂히는 유성들의 낙하, 숨죽이며 그 장관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린 왕자와 윤동주가 보았던 별도 이처럼 장엄하였을까?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을 외치던 윤동주 ㅅ인도 하늘에 올라가 별이 되었을까?
나는 별의 탄생과 윤회를 생각하다가 문득 서울에 두고 온 이시우 선생의 책이 생각났다.
《별처럼 사는 법》에서 선생은 별과 인간의 일생을 비교하면서 왜 우리가 별처럼 살아야 하는가를 조용히 역설한다.
별은 우리 인간과 달리 태어날 때, 평생 먹고살 수 있는 양식(질량)을 갖고 태어난다. 그러므로 그들에겐 탐욕이 없으며 탐진치가 없다. 어떠한 집착심도 없이 여여한 무아의 경지를 이루고 있다. 이미 수행도 필요치 않으며 후세의 과보 또한 받지 않는다.
별은 잘났다는 자아의식도 없으며, 남과 다투며 남을 무시하는 인상人相도, 다른 별들을 무조건 따라가는 중생상衆生相 또한 없으며, 오래 살고자 하는 수자상壽者相도 없다. 별들은 오직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화학적 및 물리적 집단 무의식만을 지니고 있으며 이것을 다음 세대에 물려줄 뿐이라는 것이다.
별은 언제나 가장 낮은 에너지 상태에서 가장 적은 에너지를 쓰면서 외부 반응에 순응하며 이웃과 조화롭게 관계를 맺고 있다는 대목에 나는 연필을 깎아 밑줄을 그었었다.
욕심을 줄여 저 별처럼 살지 않는다면, 우리는 과연 이 병든 지구에서 다른 생명들과 얼마나 더 어울려 살 수 있을까.
전기도 없디, 문명의 혜택도 없이, 온 식구가 방 하나에 거처하면서 손으로 빵을 뜯어 먹고, 소박하게 웃으며 맨발로 걸어 다니는 간소하기 이를 데 없는 그곳 사람들의 삶을 보면서, 나는 그날 밤 하늘의 별이 왜 그토록 영롱했었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맹난자 님의 수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