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엽의 아시아신기록...이나 그와 관련된 부산관중 난동사태...이런 얘기할라는게 아니다.
초딩 1학년때인가 아부지따라 야구장에 첨 갔었다. 워낙 말이 없으신 양반이라 어데 간다고 하지도 않고 형과 나를 데불고 불현듯 가신 곳이 야구장이었다. 당시 농협 vs 경리단이었고 6대 몇으로 농협이 이겼던 듯하다. 그리고는 동대문 운동장에 즐비하게 널린 운동구점에서 글로브를 사주셨을 것이다.
그 후 초딩 졸업 때까지 6년은 정말로 야구에 몰두했다. 물론 몰두의 정도가 '잘했다'라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은 다들 이미 눈치깠을 것이다. -_-
생일과 성탄절 등등 선물을 요구할 수 있는 모든 기회에 나는 야구용품을 늘려갔다. 게다가 우리집안은 부모님과 할머님뿐만 아니라 고모/작은아버님/이모님 등도 잦은 왕래로 선물을 주시는 시스템이었다.(지금 생각해보면 그 모든 조카들, 자식들의 선물을 챙기시느라 허리가 휘셨을 다양한 친척어런덜에게 존경의 념을 올리는 바이다)
덕분에...포수의 마스크, 가슴보호대, 무릎보호대 등 초딩 수준에서 갖기 힘든 모든 장비 풀 세트를 4학년때쯤부터 갖추게 되었다. 물론 알미늄 방망이에 5학년땐가 프로출범하면서 나무 방망이도 기본으로 갖추었고, 포수 미트(포수와 1루수 것은 왠지 글러브라 안했고 미트라고 했다)와 1루수 미트, 그 외 글러브 3~4개.... 물론 당시 있는집 자손들이 주로 갖추던 '미즈노 배트', '가와사키 배트', '미즈노 글러브' 등 명품 풀셋은 아닌 순수 국산 시리즈 였지만, 그래도 당시 기준으로 대단한 거였다. 열 댓명이 모여서 야구를 하더라도 다른 이들의 모든 장비를 합쳐도 내가 가진것보다 적을 때도 있었고, 내가 가진 장비에 글러브 한두개만 보태도 경기가 가능했다(동네야구라는게 대개 한편이 5~6명이니 -_-)
물론 고교야구도 참 열심히 봤다. 34회 황금사자기던가? 박노준과 김건우가 선린상고 2학년일때 우승한 대회일 꺼다. 그게 아부지가 날 데리고 간 최초의 고교야구 경기였고....(그때의 프로그램 20여 페이지짜리를 보고 또봐서 외우다 시피 했고...<--변태기질이다....결혼전까지 20년이 가깝게 보관했었는데 지금은 없어진 듯 싶다) 그 다음해 박노준과 김건우가 3학년으로 진출한 청룡기 준우승, 봉황대기 준우승 경기를 지켜보며 거짓말 안보태고 눈물을 뿌렸다...너무 억울해서...(두 결승전 모두 경북고에게 졌었고... 특히 봉황대기는 정말 억울했다)
그게 본인 2학년 때던가 그렇고.... 5학년때 프로야구 출범.... 당연한 수순으로 6개 구단 중 5개구단 어린이 회원 가입!!! 당시 연회비 5천원이었는데... 그걸 다 해주신 울 아부지도 참 괴짜다. 애가 야구 좋아한다고 전구단 어린이 회원 가입을 허가하시다니.... 유일하게 가입하지 않은게 MBC인데 그 사유인 즉슨 MBC청룡은 무슨 닭대가리가 기획을 했는지 초해년도 어린이 팬 클럽을 희망자 중 추첨으로 뽑았다. 난 추첨에 떨어졌고 서울연고지 두팀중에(정확히는 오비 베어스는 충남 1/2, 서울 1/2 연고지라는 엽기적 형태였다) MBC 마케팅팀의 결정으로 오비베어스의 팬이 되버렸다.
박철순의 22연승....야구장도 몇번 갔었고, '프로야구가 발전하면'이라는 많은 야구전문가들의 말 속에서 우리 프로야구가 발전하기를 염원하고 또 염원했다. 그리고 프로야구 출범 이전에도 한해에 몇개씩 늘어나던 고교야구의 발전은 더욱 촉진되리라 믿으면서 일본에 3000여개가 넘게 있다는 고교야구팀의 숫자를 조금씩 따라가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당시 반대항 구기종목의 제 1번은 누가 모래도 야구였고, 동네의 골목골목, 모터라이제이션이 진행되기 전에 출근 시간 이후면 텅 비는 아파트 주차장 곳곳은 모두 야구를 하려고 몰려든 꼬맹이들로 북적였었다. 동네 문방구에는 동대문 운동기구 가게에 비하면 질이 떨어지는 것이었지만, 글러브와 야구 방망이가 항상 걸려있었다.
.......
그리고 20여년이 지났다. 나는 물론 중간에 축구인으로 변절(?)했다. 하지만 주변에 보면 나와 동세대의 친구들 중에는 야구 골수팬들이 많다. 90년대 프로야구의 호황은 고교야구의 전성기와 프로의 탄생기에 어린시절을 보내며 야구하기에 광분했던, 프로야구단 초창기 어린이 팬클럽 출신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이젠 어디서도 야구를 하는 사람들을 찾기 힘들다. 예전에는 그 흔하던 캐치볼 하는 사람도 보기 힘들고, 또한 야구를 할만한 공터를 찾기도 힘들다. 인프라가 구축되기는 커녕 나날이 퇴보했고, 프로야구 출범시 53~4개에 달하던 고교야구팀이 요즘은 도리어 47~8개라고 들었다. 그나마 고공비행하던 프로야구의 성공도 잇따른 우수선수의 해외유출로 예전만큼은 아닌 듯 하다.
결국 모기업의 이미지 광고 정도로 생각하는 프로구단과 엘리트체육 이외에 체육정책이란 것이 전무하다시피한 지자체장, 정부, 협회에게 20여년간 야구를 맡겨놓은 결과는...결국 이런 것이다. 특히 야구는 특성상 최소한의 시설이 없으면 즐기기 어렵다는 점에서 노력과 투자 없이는 발전하기 힘든 종목이란 생각이 절절이 든다.
여튼...요즘 소란한 틈에서 축빠다 야빠다 투닥 거리는 얘기들 보다가....야구의 몰락이 가슴아프서, 또한 '축구라도' 진정한 스포츠로, 참여자들이 단순한 소비자가 아니라 즐기는 주체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쩝. 구청 홈피에 가서 잔디구장이나 조성하라는 도배글을 올릴까 하다가....귀찮아서 관뒀다...-_-
고교야구에 대한 기억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을 듯. 나 고딩때는 학교 담 뛰어넘어 야구장 달려가는 사람 많았는데.. 그때 그 선수들 지금 다 뭐하는지.. "보고싶다~" / 프로야구하면 잊을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프로야구 출범과 비슷하게 출간된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 그것도 "보고싶다~"
당수... 졸라 유복하게 자라셨구만... 근데 선린상고가 우승한 적이 있던가? 그 둘이 3학년일때 경북고에게 당했던 두번의 패배가 너무 크게 각인되어 기억에 없는건가? ㅡ.ㅡ ;;; 암튼 당시 홈으로 들어오다 발목이 돌아간 박노준이 우리 집앞 병원에 입원해 사인 받으러 갔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
받쳐줄 투수가 없다는게 아픔이었소이다. 이바오로라구 하나 있었지만...ㅠㅠ 내가 진정 억울해 했던 것은 박/김으로 먹고 살던 선린상이 봉황기에서는 1차전부터 박노준 김건우 교대로 완투하며 올라왔소이다. 결승전은 박노준이 완투할 차례였소...근데 1회에 발모가지 돌아가서 실려나가니 전날 완투한 김건우가
위의 목록 중에 빠진게 있었군. 야구 헬멧 2개... 하나는 롯데 어린이 회원 가입하며 받은 건데 리틀야구용이라 양쪽 귀가리개가 있어 가오가 좀 상했음. 하나는 싸제 구입품인데 귀가리개 하나 달려서 더 멋졌고...그걸 주로 썼다는... 그거 맨날 왁스로 닦고.... 내 야구용품들 어디갔나 몰러...
첫댓글 흑...저두 가슴 아파요. 전 롯데가 그리 되지만 않았어도...아직도 광적인 야구팬이었을텐데. 팀을 잃어버린 써포터는 갈 곳도 없이..훼엥~~
마지막 문장 원츄~~ "역시 업무시간 글 생산은 완전한 횡설수설이다" -_-b 내가 그래서 글을 잘 안쓰쥐. ㅋㅋ
고교야구에 대한 기억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을 듯. 나 고딩때는 학교 담 뛰어넘어 야구장 달려가는 사람 많았는데.. 그때 그 선수들 지금 다 뭐하는지.. "보고싶다~" / 프로야구하면 잊을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프로야구 출범과 비슷하게 출간된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 그것도 "보고싶다~"
나도 옛날에 어린이 회원 들뻔했는데 =ㅁ=a;;; OB 베어스 어린이 회원 으허허허허허허 -_-;;; 이모부가 OB 그룹에서 일하셔서 박철순 사인볼 이랑 OB 야구팀 모자는 있었음...--> 근데 이사를 자주다니니 없어진거 갚다 =ㅁ=a;;;
당수... 졸라 유복하게 자라셨구만... 근데 선린상고가 우승한 적이 있던가? 그 둘이 3학년일때 경북고에게 당했던 두번의 패배가 너무 크게 각인되어 기억에 없는건가? ㅡ.ㅡ ;;; 암튼 당시 홈으로 들어오다 발목이 돌아간 박노준이 우리 집앞 병원에 입원해 사인 받으러 갔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
솔봉이/우선 빌려가신 [가위손]을 다 보시고 리뷰를 살짝꿍 올려 주시면 [공포의 외인구단]도 빌려드리지요. ^^*
태빠/발목 아니구 무릎 아니었나?? 아리까리.. ㅋㅋ 그 야그는 나중에 라디오 극장으로 맹글어졌었지요
흠..DOUF 당수의 출현이라..항간에 떠도는 DOUF와해설이 사실인가 보오.ㅋㅋ
발목 맞소이다. 1회 무사 주자 만루에 주자 일소 3루타에 홈으로 들어오다가 발목이 꺽였나이다. 선린상고는 김건우/박노준 2학년때 황금사자기 우승했고...확실친 않지만 청룡기도 우승했소이다. 당시 3학년 사이드암 투수 나성국이 선발, 여차하면 김건우 박노준 투입이었는데...박/김이 3학년때는 받쳐줄 투수가...
받쳐줄 투수가 없다는게 아픔이었소이다. 이바오로라구 하나 있었지만...ㅠㅠ 내가 진정 억울해 했던 것은 박/김으로 먹고 살던 선린상이 봉황기에서는 1차전부터 박노준 김건우 교대로 완투하며 올라왔소이다. 결승전은 박노준이 완투할 차례였소...근데 1회에 발모가지 돌아가서 실려나가니 전날 완투한 김건우가
할수 없이 던졌고....결국 구위가 떨어져, 1회 대량득점에도 불구 역전...ㅠㅠ 경북고 선발 성준도 구위 떨어졌으나 어서 굴러먹던(실례!!) 신인 1학년 문병권이 등장하여 선린상 강타선을 6~9회동안 무실점으로 막았소....어찌 억울해서 눈물 안 흘리겠소....
ㅋㅋ 경북 에이스 문병권?? 이거 완전히 그때를 아십니까 같소이다 ㅎㅎ
1회 2사 만루상황에서 외야로 빠지는 타구가 나왔고, 그 때 박노준이 홈으로 돌진하다가 발목 돌아갔져. 타자주자가 3루로 내닫다가 아웃되면서 공수교대됐고여. 그니까 적시타 치고 3루에서 죽은 넘이 당시 6번이었는데...이름이 이아무개였던 거 같기도 하고 가물가물합니다.
박노준 그 담 대회에도 부상땜에 못 나왔고, 덕택에 선린상은 1회전에서 콜드패하면서 탈락하져(천안북일있던가 군산상고였던가...요것두 가물가물). 7회쯤에 선린상 감독이 마운드에 올라 외야쪽을 손짓하면 외야수를 보고 있다가 달려 나오던 박노준의 모습은 정말 멋졌는데...
위의 목록 중에 빠진게 있었군. 야구 헬멧 2개... 하나는 롯데 어린이 회원 가입하며 받은 건데 리틀야구용이라 양쪽 귀가리개가 있어 가오가 좀 상했음. 하나는 싸제 구입품인데 귀가리개 하나 달려서 더 멋졌고...그걸 주로 썼다는... 그거 맨날 왁스로 닦고.... 내 야구용품들 어디갔나 몰러...
네로/ 조카 야구용품 사주다 등골이 다 빠졌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