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서 땅고를 가르치는 by Veronica Toumanova 라는 분의 홈페이지(http://www.verotango.com/p/essays.html)에 있는 땅고 에세이를 번역한 것입니다. 이 분의 글을 보다 보면 땅고를 추는 사람들은 참 똑같은 것을 느끼며 땅고를 배우고, 땅고를 춘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회가 될 때마다 하나씩 번역해볼게요. 좋은 글이 많으니 들어가 보시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Why we are often confused about what it means to be “social”?
by Veronica Toumanova
많은 사람들이 ‘땅고는 사교댄스(social dance)인데, 그렇게 사교적인 춤이 아니야’ 라고 생각을 합니다. 살사나 스윙 같은 다른 사교댄스와 종종 비교하며,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는 결론에 도달하곤 하지요. 땅고를 얼마나 추는지, 나이가 어떻게 되는지에 관계없이 누구나 환영받는 그런 문화가 아니라, 엘리트적이고 속물적인 춤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땅고를 추기 시작하고, 우리가 여기에 빠져있는 것을 보면, 칼같은 흑백논리로 이렇다 저랗다 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요. 하지만, 약간 공감가는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럼 왜 땅고는 다른 사교 댄스에 비해 덜 사교적인 것일까요?
땅고는 즐기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모든 것이 그러하듯, 한 사람으로서 성장할 기회를 줍니다. 하지만 그 기회를 내 것을 만드냐, 안 만드느냐는 자신에게 달린 것이지요. 그저 즐기기만 해도 되는 것이지요. 그럼 땅고에서 즐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어울린다는 것이겠지요. 자기한테 맞는 신발을 사고, 춤을 배우고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만족스런 경험을 하는 수단에 불구합니다. 만족스런 경험을 하는 것은 사람마다 다른 것입니다.
이것은 어느 사회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러나 땅고와 다른 것들은 확연히 다른 한 가지가 있죠. 그것은 아마 ‘클로즈 아브라소’로 가장 잘 설명할 수 있을 것 같군요. 클로즈 아브라소는 참 미묘한 것이죠. 땅고의 안기로 만드는 커넥션은 육체적으로 가까우면서, 개인적이고, 내적으로 지향(inwardly oriented)되는 동시에 완전히 포용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클로즈 아브라소로 즉흥적으로 춤을 춘다는 것은 참 많은 연습을 필요로 합니다. 그 자리에서 일어나면 그냥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죠.
땅고는 춤 중에 가장 내적인 춤입니다. 왜냐하면 춤을 추는 커플의 커넥션이 좋을 수로, 밖으로 보이는 것은 덜 중요해지기 때문이죠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에, 어디를 가든 참 좋은 사람들이 춤을 출때는 엉망인 흐름을 만든다고 봅니다. 내 파트너와 커넥션에 집중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다른 커플이 춤추고 있는 상황을 인지하는 것은 오쵸를 배울때와 마찬가지로, 연습이 필요합니다. 아쉽게도, 이것에는 충분히 투자를 안하죠. 땅고는 심오하고 심각한 감정의 춤입니다. 땅고를 추는 사람들의 사진을 보세요. 그 얼굴에는 내적으로 집중하고 있다는 것과, 뭔가 내적인 흐름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땅고에서 커넥션은 우리를 위험에 빠드립니다. 책을 여는 것처럼 우리 안으로 들어가게 만들고, 다른 사람과 그 안에서 발견한 것들을 공유하게 합니다. 이런 것들은 주의 깊고 의도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에로틱한 커넥션도요, 생긴다면, 의도적인 것입니다.
저는 누구나와 그러한 커넥션을 만들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누구나와 그런 것을 만드는 것을 원하지도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커넥션을 만들려면, 사람들간에 있어 뭔가 통하는 것이 있어야하고 그것에 대한 바램이 있어야 합니다. 누구나와 그렇게 깊게 커넥션을 이룬다 한다면, 저는 그것이 더 이상하게 여겨질 것입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아예 그런 것을 바라지도 않고, 따라서 고통을 안겨주고, 어떤 때는 많은 논란이 되기도 합니다. 땅고에서 거절과 회피는 인간으로서의 내적인 가치에 큰 영향을 주기도 합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크든 작든 거절은 상처를 남기기 때문이지요. 거절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알기 때문에 거절을 하는 것도 쉽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가혹하게 행동을 할 수 있지만 감정적인 존재이기 때문이죠. 보통은 우리가 당하고 싶지 않은 것을 남에게 가하지 않토록 하기 떄문이죠
땅고는 빠르게 성장는 문화입니다. 그렇지만, 많은 작고 지역적인 공동체들로 구성됩니다.
Tango is a quickly growing subculture, but it consists mainly of small local scenes.
공동체가 작을수록, 구성원간의 유대는 강하고, 그럴수록 거절의 결과가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 큰 도시에서는 공동체들 내부에 또 작은 그룹들이 형성이 되게 되는데요, 이것은 우리가 편안하게 친해질 수 있는 사람들의 수가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죠. 우리가 큰 군중 안에 던져지는 순간, 우리는 사막 한가운데 서 있는 것 같다고 느낄 것입니다. 이 때문에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과 유대감을 갖는 것은 사실상 어렵고, 결국 우리가 각별하다고 느끼는 친한 친구들에게 신경쓸 수밖에는 없는 것이지요. 이것은 낯선 사람이라도 작은 공동체에서는 비교적 환영을 받는 반면, 큰 도시에서는 쉽게 무시되는 이유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작은 도시 사람들은 따뜻한 마음을 가졌고, 큰 도시 사람들은 못된 속물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너무 단순하게 갈라서 생각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땅고의 소셜하지 않은 부분에 잘 대처하기 위해서는, 먼저 기본적인 선택의 권리에 대해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의 삶 자체도 하나의 “사교댄스”입니다. 어떤 때는 “예”라 말하고, 어떤 때는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잖아요. 누구와 춤추고 싶다는 것은 그 이유와 상관 없습니다. 그저 그사람과 춤을 추고 싶은 것이면 그 이유는 충분하죠. 다른 이들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당신마저도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죠. 그런데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단지 춤을 추고 싶다는 것이 중요하죠. 이것은 누구와 춤을 추고 싶지 않은 것에도 그대로 적용이 될 수 있죠. 우리는 어떤 경험을 하고 싶은 이유나 하고 싶지 않은 이유를 설명할 수조차 없습니다. 욕구란, 참 희한하게 작용하니까요.
그리고, 다른 사람도, 선택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다른 사람도 당신과 똑같아요. 그들도 욕구를 느끼고, 또 못 느끼기도 합니다. 당신과 춤을 추고 싶은 것도, 춤을 추고 싶지 않은 것 모두 정당합니다. 그것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요. 욕구는 춤을 추는 중간에도 올 수 있어요. 마치 식욕처럼요. 춤을 추고 싶은 마음은 서로 다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큰 문제는 아니죠. 당신이 젊고 아름답기 때문에 누군가가 당신과 춤을 추고 싶을 수도 있는 반면, 당신은 그 사람이 춤을 잘 추기 때문에 추고 싶을 수 있죠. 둘이 모두 춤을 추고 싶다면, 출 수 있는 것이지요. 이런 상호 춤을 추고 싶은 욕구는 만족스런 춤이 만드는 내적인 커넥션을 만들 기회를 줍니다. “기회”입니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죠. 그렇다면 금전관계가 있는 춤은요. 택시 댄서말이죠. 믿거나 말거나 그러한 땅고 속에서도 양쪽 모두의 춤을 추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한쪽은 춤출 상대를 만들고 싶어하는 것이고, 한쪽은 그렇게 돈을 벌고 싶어하는 것이죠. 이것을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냥 다른 것일 뿐입니다.
우리는 욕망을 무엇인가 가지려고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어나, 누군가와 춤을 추자고 신청하거나, 신청을 받아들이는 것은 무엇인가 나누려는 마음가짐을 가져야한다.
춤을 추고 싶다는 마음 없이 춤신청을 받아들이고, 딴따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으로는 아무것도 나눠줄 수 없습니다. 춤 신청을 받아들이고, 당신이 그것을 얼마나 싫어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을 춤을 추는 파트너에게 매우 예의 없는 행동입니다. 만약 누군가와 춤을 즐겁게 출 용의가 없다면, 거절하는 법을 배우세요. 당신이 춤을 신청하는 쪽이라면, 반드시 자신에게 물으세요. 이 사람과 춤을 추면서 무엇을 바라는가? 그리고 무엇을 나눠줄 수 있는가? 사람들은 당신 뭔가 가지려고만 한다면 금방 알아챕니다. 그러면 당신에게 돌려주려고 생각하지 않지요. 저는 얼마나 잘 추는지에 대해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실 그렇게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죠. 뭔가를 나누려고 한다면, 성공할 수 있는 확률이 훨씬 높아질 것입니다.
만약 신청하는 입장이라면, 신청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거절하기 힘든 상황을 만들면 안됩니다. 당신과 커넥션을 이루려는 의도가 없는 사람과는 만족스런 춤을 출 수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좋아도 그저그런 정도이겠지요.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도 거절 당하는 것 만큼이나 어려운 일입니다. 속으로 기분 나쁜것은 매한가지이지요. 구두로 신청을 해서 거절하기 어렵게 하지말고, 신청을 받는 사람이 분별력있게 거절할 수 있도록 까베세오를 사용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의 춤추고 싶은 마음을 존중해줘야, 거절을 아무런 감정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춤을 추고 싶지 않은 이유는 당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을 수도, 완전히 당신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당신을 그 이유를 알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드려야만 합니다. 그 사람에게 왜 그랬는지 묻기 전에는, 그 저 당신만의 생각일 뿐이니까요. 거절도 감사히 받아들이세요. 그냥 떨치고 잊어버리세요. 그 사람을 개인적인 적으로 만드시지 않기 바랍니다. 충분히 상황이 허락하지 않는한 설명을 요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춤을 구걸하지 마세요. 거절하는 사람이 이미 불편한 감정을 더 불편하지 않게 만드시기 바랍니다. 모욕 받은 것처럼 행동하지 마시고, 다른 사람들이 자신과 춤을 추지 않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하지 마세요. 다른 사람을 속물이라 하지 마세요. 그들이 당신과 춤을 추지 않는 말도 안되는 이유를 이야기하려고 하지 마세요. 그런 이유도 당신이 만들어낸 이야기일 뿐입니다. 이런 행동들은 단 한 가지의 결과만 가져올 것입니다. 그냥 당신의 기분이 나빠지는 것이요
그럼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래 좋아요 좋아. 그런데 나는 아주 작은 공동체에 속해서 춤을 출 사람이 많지 않아요. 내가 춤추고 싶은 사람들하고만 추면 아무도 나랑 춤추려고 하지 않을 겁니다. 내 주변에서 내가 춤추고 싶은 사람이 있든, 내가 춤을 추고 싶은 사람이 없든요.” 이런 상황은 쉽지 않은 상황이지요. 그러나, 춤추고 싶은 마음은 그냥 내다버리거나, 강제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비 불균형을 맞추기 위해 남자들로 하여금 더 많은 여성과 춤을 추게 하는 것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더 많은 남자들이 춤을 추게하는 것만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요. 사람들로 하여금 당신과 춤을 추지 않는다고, 죄의식을 느끼게 하는 것 또한 바람직하지 않아요. 마음은 그렇게 작용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춤추고 싶은 사람이 적다면 다른 곳에서 찾으세요. 당신과 춤을 추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적다면, 당신과 춤을 추고 싶어하도록 노력하셔야 하거나, 다른 곳에 당신과 추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는지 찾아보세요. 무슨 방법이든 찾는 자에게는 좋은 해결책이 나타날 것입니다. 땅고는 당신이 즐기기 위해 거기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으로서 더 성장하기 위해 사용한다면, 훨씬 더 멋질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첫댓글 좋은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개인 메일로 퍼갑니다~
형님이 직접 번역 하신 글이군요! ㅎㅎㅎㅎ
중요한 건 역시 즐긴다는 마음가짐이겠지요.
이 분 책이 이미 번역이 되어 있었네요
https://books.google.co.kr/books?id=h4enCgAAQBAJ&pg=PT4&lpg=PT4&dq=김용백+번역&source=bl&ots=JXuY8iK4RH&sig=tYnB-EhyNmUfq_1pD3nk7AeTHTI&hl=ko&sa=X&ved=0ahUKEwi2lJf0tp7OAhWIRY8KHQcyANEQ6AEIJDAD#v=onepage&q=김용백%20번역&f=false
왜 전혀 이런 정보가 없었는지....괜히 힘들게 번역을 했군요. 다른 좋은 글들이 많으니 읽어보세요. 왜 맨날 상투적으로 탱고를 정열적이라고 표현하는지 모르겠지만 정열의 꽃 탱고라는 제목으로 나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