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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블로그라는 것을 시작했는데 농구 탭의 첫 글로 저의 favorite 플레이어 코비 브라이언트에 대해서 포스팅 했습니다.
기념이라고 생각되어 LA포럼에 한 번 올려봅니다. 부족한 점이 많은 글이지만 한 번 읽어봐 주세요.^^...
(블로그에 덧글이 없어서 피드백 얻고자 온 것은 맞습니다.ㅜㅜㅜㅜ 저에게 대...댓글을!!!)
난 전부터 블로그를 개설해서 농구에 대해서 포스팅을 하면 항상 제일 먼저 이 사람에 대해서 써야겠다고 생각했었다.
Kobe Bryant.
얼마 전까지 지구상에서 농구를 가장 잘하던 사람이다. 쓸 것이 참 많지만 일단 이것부터 보고 시작해보자.
년도 팀 출장 선발 출전시간 필드골% 3pt% 자유투% 오펜r 디펜r 토탈r 도움 스틸 블락 턴오버 파울 평득
년도 팀 출장 선발 출전시간 필드골% 3pt% 자유투% 오펜r 디펜r 토탈r 도움 스틸 블락 턴오버 파울 평득
출처 : nba.com
차례대로 시즌 평균 스탯, 시즌 통산 스탯, 플레이오프 평균 스탯, 플레이오프 통산 스탯이다.
19살에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NBA에 데뷔하여 벤치로 나오던 첫 두시즌 이후 급격한 성장을 통해 경이로운 커리어를 쌓은 것을 볼 수 있다. 그 중 통산득점 29484점은 역대 5위의 기록으로 지난 시즌 샤킬 오닐의 5위 자리를 밀어내면서 획득하게 되었다. 다음 시즌에 30000점을 넘을 것이라고 예상되며 커리어가 끝났을 때 적어도 마이클 조던의 3위 자리는 가질 수 있지 않겠느냐는게 중론이다.
앞으로 써내려갈 내용들은 2005년도부터 코비 팬이 되어 그의 커리어를 함께한 부분, 그 이전의 데뷔부터 쓰리핏까지는 다양한 간접경험을 토대로함을 먼저 밝힌다.
1. 고등학생 애송이에서 조던의 후계자로
난민
1996년, 레이커스에 Lower Merion high school 출신의 '코비 브라이언트'라는 삐쩍마른 애송이가 입단하게 된다. 샬럿에 13번째 드래피트로 픽 되었던 그는 당시 레이커스의 주축 중 하나였던 블라디 디박과 트레이드되어 레이커스로 오게 되었다. 코비는 고등학생 당시 2학년 때부터 평균 30점 기록, 1번부터 5번까지 소화하는 등 전국구 스타였다. 그럼에도 대학 농구를 경험해보지 못한 부분 때문에 13번째까지 픽이 내려갔고 이 애송이의 미래를 예측한 레이커스 구단의 수는 신의 한수가 되었다.
첫 해 는 주로 에디 존스의 백업을 소화하며 그의 루키 시즌을 소화했고 둘째 해 부터 출전시간도 25분 이상으로 상승하여 평균득점을 첫해보다 두배 가량 끌어올리는 성과를 이룬다. 세번 째 시즌인 1998-1999시즌 엔 레이커스가 에디존스를 트레이드함에 따라 자연스레 직장폐쇄로 인해 축소된 리그 50경기 중 50경기 모두 스타팅 멤버로 출전한다. 평균득점도 20점 가까이 올린 그는 어느새 리그에서 알아주는 스윙맨으로 부상한다.
당시 nba는 마이클 조던 은퇴 이후 그의 후계자를 찾는 것에 심취해있었는데 코비도 그 후보 중 하나였다. 같은 드래프트 동기인 아이버슨과 레이 알렌, 아트 덩커로 이름 날리던 카터, 보스턴의 떠오르는 심장 폴 피어스 등 조던의 영향을 짙게 받은 걸출한 스윙맨들이 출몰한 시기이다. 코비는 이들과 함께 이 때만해도 떠오르는 샛별들이었으나 2000년도에 들어서는 리그를 대표하는 탑 스윙맨들로 거듭난다.
2. 쓰리핏
차례대로 2000, 2001, 2002년 우승 당시 사진이다.
코비의 4번 째 해는 그의 화려한 커리어의 시작을 알리는 해다. 지난 세 시즌이 애송이였던 그를 리그의 아이콘으로 점찍을만한 재목임을 시험하는 기간이었다면 4번 째 시즌부터 그 자신의 능력과 노력으로 자신의 진면목이 과시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당 시즌 필 잭슨이 레이커스의 감독으로 부임하여 과거 불스를 왕조로 이끌었던 트라이앵글 오펜스를 레이커스에 접목 시킨다. '젠 마스터'라는 그의 별명처럼 그는 레이커스 선수단 자체의 조화를 잘 이루어냈고, 'Most Dominant Ever(MDE)'라고 스스로 칭할만한 괴물센터 샤킬오닐의 MVP 활약으로 1990-2000년 시즌을 마침내 우승으로 장식한다. 코비 자신 또한 All-NBA second team, All-NBA Defensive first team을 커리어 최초로 수상하는 등 화려한 한 해를 보냈다.(1999-2000 시즌 팀내 어시스트, 스틸 리더였다.)
5번째 시즌인 2000-2001 시즌 엔 리핏(두번 연속 우승)을 이루었다. 당 시즌에는 평균 출전시간을 40분씩 소화하며 평균 득점 28.5득점을 기록하며 놀라운 해를 보냈다. 경기당 5개의 어시스트로 팀 내 어시스트 리더였던 점은 덤이다. 스틸 또한 평균 1.7개를 기록했고 이는 지난 해와 같은 All-NBA second team, All-NBA Defensive first team을 수상하는데 부족함이 없는 기록이었다. 이 시즌은 정규리그 때는 전 시즌보다 11패나 더 당했지만 플레이오프를 치루고 우승까지 하는데 단 1패만을 기록하며 전무후무하게 15승 1패로 nba 타이틀을 따냈다.(1패는 파이널에서 아이버슨의 76ers에게 당한 패배로 2000년대 클래식 매치 중 손 꼽히는 매치이다. 아이버슨이 너무 잘했을 뿐 코비의 활약이 저조한 것은 아니었다.)
다음해인 2001-2002 시즌 까지 우승하며 쓰리핏(세번 연속 우승)을 이룬 코비. 23살 나이로 nba 타이틀을 세개나 따낸 그는 nba 역사상 세개의 타이틀을 획득한 가장 어린 선수가 되었다. 이 시즌 또한 25.2득점 5.5리바운드 5.5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올어라운드한 모습을 보여줬고, 중요한 플레이오프 경기마다 고른 활약 특히 클러치 타임 때 강한 면모를 보이며 점점 리그에서 '클러치 플레이어'라는 칭호도 얻게 되었다. 그리고 이 해가 그가 처음으로 All-NBA first team을 수상한 해이다.
위와 같은 세 시즌이 그가 샤크와 함께 '리그 최고 원투펀치'로서 쓰리핏을 이룬 시즌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당시 레이커스를 괴물같은 샤크의 활약에 코비가 보조를 이룬 정도로 여긴다. 하지만 이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관점의 차이는 있겠으나 기록으로보나 플레이의 순도로 보나 코비의 활약이 샤크의 그 것에 미치지 못한 것이 아니다. 괴물 센터 샤크의 도미넌트함을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라 내외곽을 가리지 않는 슈퍼 스코러어인 코비가 없었다면 샤크의 도미넌트함도 우리가 알던만큼 빛을 발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이 부분이 사람들에게 회자되는만큼 당시에는 이 듀오가 쭉 함께할 수 있을까가 호사가들 사이에서 쉽게 오르내렸고 코비의 팀 내 입지가 넓어짐에 따라 자존심 강한 샤크가 어디까지 코비를 용인할 것인가가 끊임없이 제기 되곤 했다.
3. 결별 그리고 자립
여보 우리 헤어져.
그런 얘길 무슨 호숫가 꼼장어집에서 하니.
지금 장소가 중요해?
내가 제일 잘나가~♪ 팀은 간당간당
7번째 시즌인 2002-2003 시즌 엔 평균 30득점 6.9리바운드 5.9어시스트 2.2스틸을 기록하며 최고의 활약을 펼쳤으나 서부 파이널에서 샌안토니오 스퍼스에 패하고 만다. 이 시즌은 그가 최초로 82경기를 모두 출장한 해이기도 하다. All-NBA first team, All-NBA Defensive first team 수상은 당연히 뒤따랐다. 이 때까지만해도 자잘한 소음은 있었으나 큰 문제 없이 다음 시즌에 다시 잘 정비해서 우승을 이루자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바로 그 이듬해가 파란의 시즌이 될 줄이야.
코비의 8번째 시즌 의 시작은 호쾌했다. 비록 나이가 들었으나 여전히 높은 수준의 플레이를 보여주던 노장 칼 말론, 게리 페이튼을 영입하면서 코비, 샤크, 말론, 페이튼의 미래 명예의 전당 입성이 당연시되는 4명이 함께 뛰는 초호화 라인업이 결성되었다. 일명 '전당포 멤버'{우승(반지)을 위해 모였다는 의미}로 불리는 이 라인업은 시즌 시작 전부터 큰 기대감을 형성했다. 그러나 시즌이 시작하기 전 코비는 성폭행 파문에 휩쌓이며 법정을 들낙날락하게 되었고 칼 말론 또한 부상을 입으며 전당포 라인업이 제대로 가동될 수가 없었다. 설상가상 페이튼마저 '트라이앵글 오펜스' 적응에 실패하며 기대 이하의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악재 속에서도 레이커스 팀과 코비는 고군분투했으나 이미 팀원들 간의 불신과 불화, 기대 이하의 성적 등으로 인해 팀은 위기에 봉착했다. 결국 파이널에서 역대 최고 수비팀 중 하나인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에게 무너지며 자연스레 전당포 레이커스는 해체하게 된다. 이 당시 코비와 샤크의 불화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결국 샤크의 무리한 재계약 요구로(자신과 코비 중 하나만 고르라는 의미의 계약 요구) 리그 최고의 원투 펀치 또한 서로의 길을 가게 되었다. 레이커스는 코비를 선택하게 되고 샤크는 마이애미로 트레이드 되어 쓰리핏을 일구었던 두 플레이어는 결별하게 된다.
26살의 코비가 맞이하게된 9번째 시즌 은 녹록지 않았다. 샤크를 주면서 데리고온 '토탈패키지' 라마 오덤은 조던의 피펜처럼 코비의 제2의 조력자가 되길 바랐다. 그러나 오덤은 이상할 정도의 부진을 겪으며 '토탈폐끼침'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었고 2000년대 초반 최고 왕조였던 레이커스는 그렇게 몰락해갔다. 급기야는 지난 10년만에 처음으로 플레이오프 진출에마저 실패하면서 최악의 한 해가 되고 만다. 지난 시즌의 후유증을 완연히 털쳐내지 못해보이는 코비는 그 활약 또한 지난 날들에 비해 미미했고 급기야는 4년 연속 따던 All-NBA defensive team 탈락과 All-NBA third team 수상밖에 못했다.
실망스러운 2004-2005 시즌을 뒤로 한채 코비는 2005-2006 시즌 에 돌입하는데 이 시즌의 그의 인생에 있어 새로운 터닝 포인트가 되지 않았나 싶다. 필 잭슨의 귀환으로 팀 캐미스트리가 다시 안정화에 돌입했고 코비 또한 전보다 성숙한 모습을 보이며 그의 스승과 함께 목표를 이루려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당시 nba를 시청한 사람 사이에서는 아직도 종종 회자되곤 하는 '스무쉬 파커(자동문) - 코비 - 룩 월튼(그림자) - 오덤(토탈폐끼침) - 콰미 브라운(기름손)'의 전설이라 쓰고 레전드라 읽는다 라인업으로 코비는 후세까지 입방아에 오르내릴 괄목할만한 플레이를 한 시즌에 몇차례나 보여줬다. 일단 당 시즌에 35.4점의 평균득점으로 득점왕을 차지하는데 이 기록은 5.3리바운드 4.5어시스트 그리고 1.8개의 스틸과 함께라 더욱 빛이 나는 기록이다. 평균 35점을 넣는 시즌에 그는 nba 한 경기 득점 역대 2위인 81점을 2006년 1월 22일에 기록한다. 기록을 의식한 플레이가 아닌 3쿼터까지 큰 점수차로 지고 있던 팀에게 승리를 안긴 순도 높은 기록이다.(이 날 레이 알렌 또한 피닉스에서 자신의 인생 게임을 시전했으나 코비로 인해 이슈 증발..) 또 2005년 12월 20일 댈러스 전에서는 3쿼터까지 혼자서 62점을 쓸어담았는데 이 때 3쿼터까지 댈러스 팀 전체가 기록한 점수는 61점(..) 즉, 한 선수가 상대팀보다 3쿼터까지 득점을 더 많이 한 것이다. 이후 4쿼터는 통으로 가비지 타임이 되서 코비는 출전을 안했지만 만약 기록을 의식하여 출전을 감행했으면 몇 점까지 해냈을지 궁금하다. 이런 단일 경기 퍼포먼스 이외에도 4경기 연속 45+ 득점, 1월 한달 동안 평균 43.4득점을 하는 등 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슈퍼 득점머신의 모습을 한 시즌 내내 보여줬다. 이 시즌에 그는 당연하게도 다시 All-NBA first team에 합류했다. 이러한 인간을 초월한 듯한 시즌을 보냈지만 위의 전설 라인업을 서부 상위팀으로 이끌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플레이오프 끝차에 합류한 레이커스는 또한 최고의 활약을 보이던 스티브 내쉬의 피닉스를 맞아 시리즈 3-1까지 갔으나 이후 내리 3번을 지며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탈락하고만다. 이 시리즈 4차전에서 팀을 연장으로 보내는 클러치 레이업과 연장 막판 1초를 남기고 위닝샷을 꽂아서 업셋을 희망하게 했으나 3연패를 하면서 무릎을 꿇고 말았다. 비록 시리즈는 내줬지만 이 경기는 레이커스 플레이오프 역사에서도 손 꼽히는 명경기로 회자된다.
이듬해의 2006-2007 시즌 또한 화려하고 굵직한 한 해이다. 시즌 시작 전 기존에 8번을 달고 뛰던 코비는 져지 번호를 24번으로 바꾼다. 그는 데뷔할 때부터 24번을 원했으나 불가능했고 고등학생 때 쓰던 33번은 압둘자바의 영구 결번 번호라 사용을 못해서 아디다스 캠프 때 입었던 143번 번호를 다 더한 8번을 입다가 그제서야 24번으로 바꾼 것이라고 한다. 24번의 의미는 말이 많은데 조던의 23+1은 속설이고 정설은 24시간 내내 농구에 빠져 있겠다는 것인데 진실은 코비 자신만 알 것이다. 코비는 평균 31.6점을 넣으면서 2년 연속 득점왕 타이틀을 수상했는데 당 시즌의 득점 기록들 또한 탈인간적이다. 그는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저스, 미네소타 팀버울브즈, 멤피스 그리즐리스, 뉴올리언스 호넷츠 이렇게 네팀을 상대로 차례대로 65, 50, 60, 50점을 넣으면서 4번 연속으로 50+득점을 한 nba 역사상 두번째 선수가 되었다.(1위는 신화 속 인물 체임벌린의 7번 연속, 3위는 엘진 베일러와 마이클 조던의 3번 연속.) 31 - 5 -5 의 엄청난 활약을 한 시즌이었느나 이 시즌 또한 부족한 팀원들의 도움으로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피닉스에 4-1로 시리즈를 내준다.
위의 시즌들은 코비의 최전성기 시절이라고 할 수 있다. 여전한 운동능력, 농익은 경험 등이 어루어져 그 누구도 범접하기 힘든 자신만의 아우라를 뽐내던 시절이다. 아쉬운 점이라하면 역시, 이 같은 최전성기 시절에 팀은 암울했다는 점. 그의 기량과 더불어 팀이 승승장구 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하는 생각을 팬으로서 해본다.
4. 리핏 NBA Champion
내..내게 반지를!
오키. 하지만 파이널엠뷔피는 내꼬.
여러분 날 가져요(feat.5th ring)
샤크와의 결별 이후 코비는 그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리고 실제로 개인 능력에 있어서는 데뷔 이후 라이벌이라고 여겨지던 여타 스윙맨들 이상의 퍼포먼스로 리그를 지배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팀 성적은 플레이오프 1라운드를 넘어서지 못해 이 부분에 있어서 비판을 피해갈 수 없었다. 농구를 혼자 하는 이기적인 플레이어, 독선적 리더 등의 비판을 참지 못하던 코비는 2007-2008 시즌 에 제리 웨스트의 팀 복귀를 요구하며 불응시 트레이드 되고 싶다고 선언한다. 즉, 트레이드 요청을 한 것이다. 리그 최고 플레이어 중 하나인 코비의 이 발언은 당시 굉장히 충격적인 일이었고 필 잭슨과의 면담, 그리고 GM과의 대화를 통해 트레이드 요청은 일단락이 되고 시즌이 시작됐다. 시즌 시작 이후 만년 유망주였던 센터 바이넘의 성장과 토탈폐끼침 오덤의 토탈패키지화, 벤치 멤버들과의 조화로 서부 1위를 달리게 된다. '올해만큼은..'이라는 생각이 들려는 찰나, 바이넘이 부상으로 이탈하게 되고 골밑 구심점을 잃은 레이커스는 다시 하향곡선을 그렸다. 이 때, 긴 레이커스 프랜차이즈 역사에도 남을만한 '가솔 트레이드'가 이루어진다. 눈엣가시 같았던 콰미 브라운과 미래 1라운드픽 2장으로 멤피스 그리즐리스의 에이스 파우 가솔을 데려왔다. Wow! 당시 레이커스 팬들은 이런 황당하리만치 기쁜 소식에 기뻐 날뛰지 않은 사람이 없으리라. 올스타 기량을 갖춘 가솔의 영입은 하향곡선을 그리던 팀에 다시 비상할 수 있는 날개를 달아줬고 레이커스 팬들의 기대대로, 다른 팬들의 우려대로 57승을 거두며 서부 1위를 차지했다. 코비 또한 커리어 처음으로 시즌 MVP를 차지하며 개인으로서나 팀으로서나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플레이오프에서도 자신의 실력을 과시하며 최고 수준의 플레이를 펼친 코비는 차례대로 덴버 너겟츠, 유타 재즈, 샌안토니오 스퍼스를 격파한 레이커스는 마침내 파이널에 진출했다. 코비는 과거 샤크와 함께 올랐던 이후 스스로의 힘으로 다시 한번 파이널 무대에 섰다. 상대는 레이커스와 유구한 라이벌 역사를 가지고 있는 보스턴 셀틱스. 이 시리즈는 레이커스 전체가 매우 아쉬웠는데 특히 가넷을 상대로 전혀 힘을 못 쓴 가솔의 부진이 뼈 아팠고 코비와 레이커스는 6차전에 패함으로서 시리즈를 마감했다. 비록 파이널에서 패하며 준우승에 그쳤지만 가솔이 합류하자마자 파이널에 직행한 모습으로 팬들은 다음 시즌에 대한 기대를 안 할 수 없었다.
2008-2009 시즌 은 코비 커리어의 one of the best moment이다. 개인 기록은 건재했고 팀은 65승 17패로 서부 1위를 달성했다. 또 당 시즌에서는 뉴욕 닉스의 홈구장 Medison Square Garden에서 61득점을 하며 MSG에서 가장 높은 득점을 기록한 선수가 되는 등 자신의 커리어에 족적을 남길만한 활약을 보였다. 플레이오프에서도 유타 재즈, 휴스턴 로켓츠를 이기고 서부 컨퍼런스 파이널에서도 덴버 너겟츠를 탈락시키며 2년 연속 파이널 진출의 쾌거를 이룬다. NBA 파이널에서 리그 최고 센터 하워드가 이끄는 올랜도 매직을 만난 코비는 시리즈 평균 32.4득점 5.6리바운드 7.4어시스트 1.4스틸 1.4블락을 해내며 팀을 우승으로 이끔과 동시에 파이널 MVP를 수상했다. 1969년 파이널에서의 제리 웨스트 이후 32.4득점 7.4어시스트를 파이널에서 해낸 첫번째 선수가 되었으며 조던 이후 파이널에서 32 - 5 - 5를 해낸 첫번째 선수가 되었다.
2009-2010 시즌 에는 코비의 클러치 플레이가 빛을 발한 시즌이었다. 그는 당 시즌에만 6개의 위닝샷을 꽂았다. 4쿼터에 보여준 클러치 플레이어로서의 면모 이외에 순수히 위닝샷을 넣은 횟수만 여섯번이었다. 그는 이 시즌 최연소 통산득점 25000점을 돌파했고 제리 웨스트가 가지고 있던 레이커스 프랜차이즈 통산 득점 기록도 획득했다. 코비는 당 시즌에 지난 시즌부터 가지고 있던 고질적인 손가락 부상으로 신음했고 수술하는 대신 붕대를 감고 출전을 감행했으며 정규 시즌 말미에는 무릎 부상으로 잔여 5게임을 결장했다. 시즌 통째로 손가락, 발목, 무릎에 부상을 가지고 있던 그는 짧은 휴식 이후 플레이오프에 돌입했다. 1라운드에서 떠오르는 젊은 팀 오클라호마 시티 썬더를 제압하고 2라운드에서는 유타 재즈를 스윕하고 올라선 서부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만난 상대는 피닉스 선즈였다. 원맨팀 시절 그를 번번히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탈락시킨 스티브 내쉬의 피닉스 선즈와의 대결을 시리즈 6차전에서 승리로 마무리 지은 코비는 3년 연속 파이널에 진출했다. 그렇게 올라 선 파이널 무대에서 만난 상대는 드라마틱하게도 2008년 코비와 레이커스에게 뼈아픈 패배를 알게 해준 보스턴 셀틱스였다. 전통의 라이벌, 2008년의 리매치 등 파이널에서 볼 수 있는 드라마틱한 요소는 전부 있었던 이 시리즈에서 7차전까지 가는 혈투 끝에 보스턴을 제압하고 우승을 차지했다. 특히 7차전에서는 전반의 부진 속에 자신의 게임 득점 23점 중 10점을 4쿼터에 몰아 넣는 활약을 보이며 팀을 우승시켰기 때문에 킬러 에이스로서의 면모와 팀을 이끄는 리더십 모두를 선보이며 자타공인 NBA 최고 플레이어로서의 자리를 매김하게 됐다.
코비는 에이스 다툼에 의한 샤크와의 불화 그리고 그와의 결별 이후 끊임 없이 비판과 맞서야했다. 무혐의 처리가 된 성폭행 혐의에 대해서도 계속해서 안티들의 비난에 시달려야했고 개인 기록이 뛰어나지만 팀 성적이 안 나오는 것에 대한 책임도 홀로 감수해야 했다. selfish player라는 꼬리표도 계속해서 따라다녔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차후 더 길게 글을 쓸 생각이다. 이러했던 그를 샤크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해준 것이 위의 백투백 NBA Champion title이다. 코비의 자립을 완성하는 퍼즐임과 동시에 그를 nba 최고 선수로 생각해도 무방함을 알리는 마침표였다.
5. 계속되는 여정
this is me!
아이언맨
2010-2011 시즌 의 레이커스는 쓰리핏에 대한 열망으로 첫 8게임에서 모두 승리를 챙기는 등 당차게 시작했다. 당 시즌의 정규시즌은 코비나 레이커스 전체적으로 '리핏 당시보다는 못 하지만 여전히 우승 후보'의 모습을 보였다. 코비는 당 시즌 통산득점 27000점을 돌파하여 존 하블리첵, 도미닉 윌킨스, 오스카 로버트슨, 하킴 올라주원, 엘빈 헤이스, 모제스 말론을 제치고 통산득점 순위 6위에 랭크됐다. 플레이오프에 돌입한 레이커스는 1라운드에서 뉴올리언스 호넷츠를 맞아 6차전에서 시리즈를 챙겨 우승으로 향한 여정의 시작을 잘 끊었으나 2라운드에서 댈러스를 맞아 4-0 스윕을 당하는 굴욕으로 플레이오프에서 탈락하고 말았다.(댈러스는 당 시즌 역대급 플레이오프 활약을 하며 마이애미 히트를 꺾고 파이널 우승을 차지했다.)
2011-2012 시즌 전망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오프 시즌에 레이커스를 리핏 우승으로 이끌었던 명장 필 잭슨이 은퇴했고 그 자리에 다소 기대에 못 미치는 마이크 브라운 감독이 왔다. 전체적으로 팀이 노쇠한 가운데 역시 리핏 우승 당시 핵심 벤치 멤버였던 라마 오덤이 댈러스로 트레이드 되버렸다. 다만 코비가 독일에서 성공적인 무릎 치료를 했다는 점, 그리고 바이넘의 성장만이 믿을 구석이었다. 밝지 않았던 시즌 전망은 결국 들어 맞았고 레이커스는 과거 우승후보로서의 위용을 떨치지 못했다. 핵심 코어들은 노쇠했고 벤치 멤버들은 이전보다 약해졌다. 그 와중에 코비는 자잘한 부상과 단축 시즌에 대한 체력적 압박 속에서도 분전하여 팀을 이끌었으나 다소 노쇠한 모습에 주춤한 모습을 보이며 팬들의 아쉬움을 샀다. 그러나 미국 나이 33세의 나이로 마지막 경기까지 득점왕 경쟁에 가세하는 등 나이를 잊은 듯한 모습 또한 보여 팬들의 기대를 어느 정도 충족시켰다고 볼 수 있다. 당 시즌에 샤크를 제치고 통산득점 순위 5위에 올라섰다. 삐그덕 거리는 와중에도 분전하여 서부 3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레이커스는 1라운드에서 경험은 부족하지만 젊고 빠른팀 덴버 너겟츠를 맞아 힘겨운 싸움 끝에 2라운드로 올라갔으나 2라운드에서 만난 서부 2위이자 우승후보인 오클라호마시티 썬더를 맞아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채 탈락했다. 코비는 플레이오프 평균 30득점 4.8리바운드 4.3어시스트로 팀을 이끌었으나 팀 전체의 느려진 발과 부족한 체력으로 열세의 상황을 뒤짚기는 역부족이었다.
마치며..
원래는 코비 브라이언트라는 선수 전체적인 면을 한 글에 실으려고 했는데, 역시 파란만장했던 농구 인생이라 그런지 커리어를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긴 글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글을 나누어서 쓰도록 하겠다.
코비의 커리어를 쭉 봐온 사람으로서 자랑스러운 점이 있다. 한 두가지가 아니지만 그 중 단연 으뜸으로 치는 점은 그의 꾸준함이다. 1996년에 데뷔한 애송이가 2012년 시즌까지 득점왕 경쟁을 하고 있다고 표현하면 와닿을까? 2000년 대 조던의 후계자들로 꼽히던 아이버슨, 트레이시 맥그레디, 빈스 카터, 레이 알렌(코비까지 일명 2000년도 슈가5성) 등은 이미 nba에서 커리어가 끝났거나 커리어의 황혼기를 보내고 있다. 레이 알렌의 경우 여전히 위력적인 슈터이지만 과거 스코어를 맡았던 그의 능력에 비해서 다소 못 미치는 모습이다. 이렇듯 그의 라이벌들이 점점 뒤로 밀려나는 가운데 코비만은 여전히 리그 정상권에 떡하니 버티고 서있는 것이 매우 인상적이다.
또 이른 나이에 정상에 섰음에도 계속해서 목표를 정하고 그에 따른 모티베이션을 부여하여 자신을 갈고 닦는 그 정진함도 자랑스럽다. 소위 '농덕후'라고 불리는 그의 기질에 관한 포스팅은 따로 이루어지겠지만 그의 굴곡 있는 커리어는 오로지 그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졌다. 밑바닥으로 떨어졌던 그가 다시 정상에 서기까지의 모습은 다른 역사 속 레전드들의 커리어와 비교하여 전혀 꿇리지 않는다.
나는 내가 농구에 처음 흥미를 가진 중학생 시절부터 코비를 봐왔다. 당시에 나는 사춘기 소년이었으므로 매우 감성적이고 감정적이었기 때문에 코비라는 선수에게 받은 영향은 내가 스스로 느끼는 것 이상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자신의 분야를 사랑하는 마음, 그 분야에 매진하는 모습, 자신을 계속 채찍질하여 더욱 높은 곳으로 가려는 그 향상심 등 단순히 영향을 받은 것만이 아닌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서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그가 가장 암울하던 시절에도 그를 믿으며 다시 높게 멀리 비상할 것을 믿었고 실제로 그렇게 된 모습을 보여 가슴이 따뜻해짐을 느꼈다. 그의 커리어가 아직 끝나지 않았음에 감사하고 나이가 들어도 그만이 가지고 있는 멋진 모습을 보여줄 거라는 생각에 아이처럼 즐거워진다. 즐거운 마음으로 앞으로를 응원한다.
첫댓글 새삼스럽게 느끼는 거지만..우승 많이도 했네요 5번..
그쵸? 맨날 비교 대상이 조던 or 레전드들이라 5번이면 뭐..그러려니.. 하다가 퍼뜩 정신차리고보면 코비 짱!
잘보고 갑니다~~~^^
코비팬으로서 재미나게 읽고갑니다~
즐겁게 보셨다니 다행입니다.ㅎㅎ 레이커스 팬분들과 이런 감정?을 한번 공유해보고 싶었습니다.
2011-2012시즌 코비 네경기연속 40+ 득점한 내용 나올줄 알았는데 없네요.. 다시는 이런 고득점 못할거 같았는데
아 그리고 글 정말 잘봤습니다 ㅎㅎ
덕분에 모르던 사실도 배우고 가네요
계속 독한 맘 먹고 잘하란 의미에서 지난 시즌 내용은 최대한 줄였답니다.ㅎㅎ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5번이면 엄청나네요~....ㄷㄷ
은근 팬들조차도 대단함을 깜빡하게되는 우승 다섯번이죠.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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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전문칼럼이상이네요. 잘봤습니다. 중간중간에 사진까지 굿입니다~
과찬이십니다.ㅜㅜㅋㅋ 큰 힘이 되네요 감사합니다.ㅎㅎ
정말 잘밨습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코비 쭉 응원해요 함께 ㅜㅜㅋㅋㅋ 늙코 ㅜㅜ
10년넘게 레이커스를 응원했던 추억들이 파노라마처럼 떠오르는 글이네요. 이젠 코비도 늙고 나도 늙고..ㅠ.ㅠ
ㅜ.ㅜ
동감.코비만 늙는게 아니였어요..ㅜㅜ
코늙나늙인가요..ㅠㅠ
저도 곧있으면 십년 채우겠네요ㅜㅜㅋㅋ 제가 조금더 일찍 농구를 알아서 좀 더 일찍 접하지 못했던게 아쉽습니다.ㅎㅎ 코늙나늙..ㅜㅜ
정말 드라마 같은 인생을 살고 있는 남자야 ㅜㅜ 잘 봤습니다.
리그 정상에 몇년째 있는 남자라고는 믿기 힘든 굴곡 깊은 삶을 살고 있죠..ㅋㅋ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코비가 너무너무 좋아요 ㅠㅠ잘 봤습니다, 피닉스전에서 나온 "브라이언트 포더 윈"을 내쉬와 함께 불꽃을 태우길 ,
저의 닉넴 브라이언트 포더 윈!! 그 이후 코비 믹스라면 필수 장면이 되어버렸죠.ㅎㅎ 스테이플스 센터 관중마냥 저도 두다리로 벌떡 섰던 기억이 나네요.ㅋㅋ
코비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오는 글이네요 ㅎ 잘 봤습니다 ㅎ
그의 꼰대터프샷을 볼때면 애정이 어느새 애증으로... 부글부글..ㅋㅋ 감사합니다.^^
저를 느바의 길로 이끌어준 코비. 그가 어느덧 황혼기에 접어드고 볼 날이 머지않았다는 사실에 서글프네요ㅜㅡ 은퇴전에 꼭 한번 스테이플스 직관해보고싶네요
저도 정말, 처음 팬 될때부터 간직한 꿈인데 이루어질지 모르겠습니다.ㅜㅜ 코비형 한 십년만 더뛰어죠 보러갈게....
좋은글 잘봤습니다
좋게 봐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하긴 5번이면 후덜덜인데 아직도 배고픈 우리 랄팬들은 욕심쟁이
나는 여전히 배고프다. - 히딩크가 아니라 코비팬.
우승 더해줘 코비형 나믿코믿
정말 즐겁게 잘 봤습니다! '이 선수의 팬이어서 행복했고, 자랑스럽다'라고 말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코비!
정말 공감가는 말씀입니다.ㅎㅎ 십년 이십년 후에 nba팬들에게 자랑스레 떠들고 다닐 것 같아요!!
옛 추억도 새록새록 생각나고 정말 몰입하면서 잘봤습니다. 쓰리핏 시절에는 코비가 별 좋지 않은 앨리웁패스도 희한하게 넣고 포효했는데,, 과거를 잊고 살다가 옛 추억이 많이 생각나네요 그 때는 nba 본격적으로 막 입문했던 시절이라서 그게 얼마나 대단한 플레이인지 몰랐다는.... 요새 들어서 엄청난 운동능력을 갖고 있었던 그리고 싱싱했던 8번 코비가 무척 그립습니다.. 물론 지금도 노련미로 충분히 잘하지만요^^
맞습니다. 저는 자립 시작하는 시절부터 봐서 팀원들 후달리는데 본인이 어떻게든 해보려고 코트 안팎 가리지 않고 광분(?!)하는 듯한 그의 모습에 반했었는데, 이제는 어엿한 리그의 대선배로서 황혼기를 보내는 모습을 보니 정말 짠합니다. 앨리웁을 찍어대던 그가 이제는 앨리웁을 올려주면서 홀홀 대는 코노인이 되다니... 아참, 부족한 글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훌륭한글 잘보았습니다!!! 브라이언트에 대해 새삼 뭔가 다시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좋은글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함께하는 팬 분들이 있어서 그를 응원하는 마음이 계속 한결 같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ㅎㅎ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쭉 응원하자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