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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진정구협회회원들이 정구의 대중화를 꿈꾸며 밝게 웃고 있다.(사진 왼쪽 맨앞이 양곡 김남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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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24일부터 전남도민체전이 강진에서 열리면서 각종 스포츠에 대한 관심들이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예전 강진 주민들이 연식정구에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면서 전국대회를 제패한 사실은 쉽사리 알지 못한다. 또 지역을 대표하는 서정시인 영랑선생이 연식정구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다는 사실도 뒤늦게 알려지고 있다.
연식정구는 쉽게 말해서 딱딱한 공 대신에 부드러운 고무공을 사용하는 것이다. 테니스를 경식정구로 표현하는 것과 반대인 연식정구는 경기시간이 짧고 잔재미가 있는 스포츠로 알려져 있다.
연식정구는 미국인 선교사가 경식정구를 전파하자 이것을 일본에서 값이 싸고 부드러운 공을 사용하면서 시작됐다. 국내에는 연식정구가 일제 강점기를 통해 전파된 것으로 8·15 광복이전까지 전국 학교와 관공서에서 스포츠로 큰 인기를 끌었다.
강진의 연식정구의 역사는 일본 유학생들이 들어와 전파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영랑선생이다. 영랑선생은 일본 유학시절 연식정구를 배우기 시작해 직접 집에 정구코트장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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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1년 김영배 전원장이 서울약학대 주최의 남녀중학교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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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랑선생은 당시 생소했던 연식정구를 지도했고 김현무, 김현장씨등과 함께 어울려 정구를 쳤다.
사랑채에서 강진군청 방향에 설치된 정구장시설은 전남 지역 최초의 개인 정구장시설이라고 볼 수 있는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런 모습들은 현재 찾아볼 수 없다. 당시 정구장으로 사용됐던 공간에는 모란꽃이 자리 잡은 화단으로 변해버렸다.
영랑선생은 시 이외에도 음악과 운동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정구장 시설도 영랑선생의 발자취 중에 하나인 것이다.
이형희 전 문화원장은“어릴적 영랑선생이 아버지 이형욱씨와 함께 경기를 하던 모습이 생각난다”며 “생가를 복원하면서 예전 영랑선생의 모습들이 사라져 가는 것이 아쉽다”고 설명했다.
영랑선생의 생가외에 강진군청에도 정구장이 마련돼 있었다. 현재 군청 대회의실이 위치한 별관자리에 정구장이 마련돼 당시 공무원들을 비롯한 연식정구 동호인들의 숫자를 가늠케 한다.
강진에서는 지난 32년 6개군 연합 정구대회가 열렸다. 강진, 완도, 해남, 장흥, 영암등 인근 6개군의 대표들이 참석한 정구대회가 진행됐다. 이어 다음해인 1933년 정구협회에 해당하는 구락부 주최 대회에서 강진군이 우승을 차지할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자랑했다.
관내에서는 이형욱, 김현민, 김상수, 문준호, 조영기씨등이 전남지역을 대표하는 정구실력가로 각종 대회를 석권하기도 했다.
연식정구의 모태에는 중앙초등학교가 자리 잡고 있다. 중앙초등학교는 1926년경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다. 그전에는 중앙초등학교는 군청 뒤편에 자리한 상태였다.
중앙초등학교가 이설하고 난 곳은 거대한 하나의 정구장으로 연식정구의 후학들을 길러냈다.
영랑선생을 이어 연식정구의 실력가의 한사람으로 김영배 전 중앙병원장을 들 수 있다.
42년 중앙초등학교에서 처음 라켓을 잡았던 김전원장은 광주서중에서 정구를 이어갔고 3학년때 도대표로 각종 대회에 출전하게 된다.
이어 김전원장은 48년 서울대학교 약학대 주최 남녀 중학교 대회에 우승을 차지하고 다음해 서울운동장 정구코트에서 열린 전국체육대회에서 광주서중대표로 출전해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김전원장은 73년부터 강진 연식정구협회장을 맡으면서 뒤이은 연식정구의 부흥을 알렸다.
김전원장은 “강진은 인근 6개군에서 실력가들이 즐비한 연식정구의 시작점이라고 볼 수 있다”며 “역사가 있는 강진 연식정구에 많은 동호인들의 참여로 다시 한번 폭넓게 확대되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강진에서는 일제시대 이후 이형욱, 김현민, 김계옥, 조영기씨등이 뛰어난 실력을 자랑했다. 특히 이형욱씨와 김계옥씨는 뛰어난 콤비플레이로 각종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강진 정구의 대부는 이형욱씨다.
흔히 이선웅씨로 알려져 4명의 자식들이 모두 정구를 강진에 알렸다. 강진 정구의 산증인이라고 할 수 있다.이후 남문식당을 운영하는 김계택(78)씨와 조선일보 지국장을 맡았던 이운희씨가 강진정구의 명맥을 뒤이었다.
70년대 들어서면서 다시 한번 강진정구의 중흥기라고 볼 수 있다. 강진경찰서 뒤편에 정구장을 새로 설치해 30여명이 넘는 회원들이 정기적인 활동을 가졌다. 의료보험공단 강진지사장을 맡었던 이관희씨가 회장을 맡으면서 하종길 재무과장, 김광석 농업기술센터 소장등 군청 공무원들의 활발한 참여가 뒤따랐다.
현재 강진정구협회는 병영면사무소 민원담당 원용휴 회장이 회원들을 이끌고 강진 정구의 부활을 위한 힘찬 날개짓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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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2년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전국체육대회 학생부 준결승이 펼쳐지고 있는 모습이다. 가운데 앉아있는 사람들이 이승만대통령과 프란체스카여사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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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정구장도 세월따라 변했다.
예전 정구가 처음 강진에서 알려지기 시작할 때 아이들의 손에는 판자형 라켓이 들려 있었다고 한다. 정식 라켓을 구입할 수 없던 시절 나무판자로 라켓모형을 잘라 정구연습을 했다는 것이다. 이때는 잘 단장된 정구장 공무원과 선수들 이외에는 출입도 힘든 실정이였다.
강진 정구장의 역사도 시간과 함께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정구 원로들에 따르면 일제시대부터 강진군청에 정구장이 마련됐다. 현재 대회의실이 위치한 별관자리에 정구장이 위치해 직원들과 기관단체장이 사용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후 강진군청 뒤편에 위치해 있던 중앙초등학교가 지난 1923년 이전하면서 생긴 부지를 이용해 늘어난 동호인들이 정구장으로 활용했다.
이어 세무서를 비롯한 기관들이 들어오면서 지난 75년 강진경찰서 뒤편 현재 주차장 자리에 정구장이 위치했다. 당시 부임한 차상록서장이 정구에 관심을 나타내면서 경찰서 직원들과 동호인들이 새롭게 정구장을 단장했다.
하지만 80년 강진고등학교 설립후 새로 부임한 황덕기교감을 통해 테니스가 전파되면서 점차 동호인들의 숫자가 줄어들게 된다. 동호인들의 정구장은 종합운동장이 새로 설치된 97년 10월 또 다시 보금자리를 옮겨 현재 회원들이 활동하고 있다.
▶▶▶강진의 정구역사 1925년 영랑등 일본 유학파통해 전파 1932년 강진 인근 6개군 정구대회 개최 1933년 협회 주최 전국대회 강진군 우승 1950년대 이후 김계옥, 조영기, 이형욱씨 등 전국대회 활약 정구중흥기 1973년 김영배 강진협회장 취임 1980년 이관희 강진협회장 취임 1987년 황호용 회장 1995년 천석기 강진협의회장 취임 1999년 강현주 회장 현 원용휴(병영면 민원담당)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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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역사적인 기록으로 평가할만. 강진초등학교가 원래 북산에 있었다는 얘기는 처음 듣네. 동호인들이 많이 늘어나 예전처럼 번성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