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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윷놀이』 척사 또는 사희라고도 한다. 삼국시대 이전부터 전해오는 한국 고유의 민속놀이로 대개 정월 초하루부터 보름날까지 즐긴다.
줄타기 '줄어름타기'라고도 하며, 한문으로는 고환(高桓) · 무환(舞桓) · 환희(桓戱)라고도 한다. 1976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8호로 지정되었다. 길다란 통나무를 양쪽에 세워 기둥을 삼고, 양쪽 기둥에 삼껍질로 꼰 굵은 밧줄을 공중으로 잡아매어 설치된 줄 위에서 재주꾼이 걸어다니며 노래하고 춤추고 재담을 하는 놀이이다. 줄을 타기 전에 줄고사를 하는데 고사문은 돌아가신 스승 · 선배 또는 줄할머니 · 줄할아버지에게 사고없이 줄을 타게 해달라고 비는 것으로 줄광대나 어름산이가 읊는다. 고사가 끝나면 연희자들은 배례를 하고 올렸던 술을 양쪽 줄기둥과 줄에 붓고 줄의 동쪽으로 오르기 시작한다. 줄을 탈 때에는 아래에서 잡이들이 장구 · 피리 · 해금 등으로 흥을 돋는다. 이것은 줄을 타는 재주꾼의 동작을 율동적이고 날렵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며, 잡이들은 재주꾼의 말상대가 되기도 한다. 또한, 줄타기의 기교는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10여 가지나 된다. 기본적으로 줄 위에서 걷고, 뒤로 걸어가고, 한 발로 뛰고, 걸터앉거나 드러눕기도 하며, 떨어지는 척하며 구경꾼을 놀라게 하기도 한다. 사물놀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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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이란 원래 절에서 불교의식 때 쓰인 법고 · 운판 · 목어 · 법종의 네 악기를 가리키던 말이었다. 후에 이것을 북 · 징 · 목탁 · 태평소로 지금은 다시 북 · 장구 · 징 · 꽹과리의 네 민속타악기로 바뀌었다. 일반적으로 사물놀이라고 하면 이 네 종류의 악기로 연주되는 음악과 그 음악에 의한 놀이를 가리킨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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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뛰기
도판희 · 초판희 · 판무라고도 한다. 음력 정초, 5월 단오, 8월 한가위 등 큰명절 때 두툼하고 긴 널빤지 한복판의 밑을 괴어 중심을 잡은 다음, 널빤지 양쪽 끝에 한 사람씩 올라서서 번갈아 튀어올랐다가 발을 구르면 상대방은 그 반동으로 튀어오른다.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지만, 다만 고려시대부터 전승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 여성들은 말타기 · 격구 같은 활달한 운동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널뛰기 역시 놀이의 성격으로 보아 당시의 여성들이 즐겼을 것으로 짐작된다.
전설에 따르면 옥(獄)에 갇힌 남편을 보기 위해 널을 뛰면서 담장 너머로 남편의 얼굴을 볼 수 있었고, 부녀자들의 외출이 자유롭지 못하던 시절에 담장 밖의 세상 풍경과 호기심에 찬 외간 남자들의 모습을 훔쳐 보기 위해 뛰었다고 한다. 일본 오키나와현 류큐에서 전승되는 판무가 널뛰기와 유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라도 지방에 전하는 한국의 대표적인 부녀자 놀이로 중요무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되어 있다. 음력 8월 한가위밤에 곱게 단장한 부녀자들이 넓은 뜰에 모여 손에 손을 잡고 원형으로 늘어서서 '강강술래'라는 후렴이 붙은 노래를 부르며 빙글빙글 돌면서 뛰노는 놀이이다. 강강술래의 소리는 목청 좋은 여자 한 사람이 가운데 서서 앞소리를 부르면, 놀이를 하는 일동은 뒷소리로 후렴을 부르며 춤을 춘다.
강강술래
유래는 임진왜란 때, 당시 수군통제사인 이순신이 적의 군사에게 해안을 경비하는 우리 군세의 많음을 보이기 위해, 또 왜군이 우리 해안에 상륙하는 것을 감시하기 위해, 전지 부근의 부녀자들로 하여금 수십 명씩 떼를 지어, 해안지대 산에 올라, 곳곳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돌면서 '강강술래'라는 노래를 부르게 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싸움이 끝난 뒤 그곳 해안 부근의 부녀자들이 당시를 기념하기 위하여, 연례 행사로 '강강술래' 노래를 부르며 놀던 것이 전라도 일대에 퍼져 전라도 지방 특유의 여성 민속놀이가 되었다.
택견
1983년 중요무형문화재 제76호로 지정되었다. 우리나라 고유 전통 무예로 탁견 · 각희라고도 한다. 택견은 원래 호신술에서 유래한 맨손 겨루기 기예로, 그 기본은 차고 때리는 격술보다는 상대의 힘이나 허점을 이용하여 차거나 걸어서 넘어뜨리는 유술의 원리를 가지고 있다.
동작은 굼실굼실 능청거리며 우쭐 너울거리고, 는질거리는 몸동작을 기본으로 한다.
고구려시대의 무용총이나 삼실총 등의 벽화를 비롯한 여러 역사적 자료에 의하면 오랜 옛날부터 맨손 무예가 있었지만 이를 택견이라 단정할 수 없다.
맨손무예의 명칭이 정확하게 기록된 것은 고려시대 <고려사실록>에 의하면 '수박'이라는 무예가 있어 궁중에서부터 민간에 이르기까지 널리 성행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조선시대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수박'이 여전히 군사를 뽑는 정규시험 과목으로 되어 있던 것으로 보아 많은 사람들이 계속 '수박'을 수련해 왔음을 알 수 있다.
풍물놀이
풍물놀이는 예로부터 서민들의 오락으로 이들의 삶과 신명이 담겨져 있는 예능이다.
형태는 꽹과리 · 장구 · 북 · 징 · 소고 · 태평소 · 나발이 함께 연주하는 음악적 요소, 판굿과 풍물재비의 비성형화된 몸짓, 개인놀이에서 보이는 춤적 요소, 잡색을 중심으로 노는 연극적 요소, 우리 민요 가락과 사설 등 여러 요소가 합쳐진 종합적인 표현 매체이다.
농경생활이 시작되면서 발달된 풍물놀이는 원래 신을 부르고 잡귀를 몰아내는 것으로 사람의 기운을 북돋아 주는 주술적 기능을 지녔으며, 노래와 춤을 통해 외로움과 아픔을 달래고 기쁨으로 끌어올리는 역할을 하였다.
남사당놀이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었다. 구전에 의하면 남사당놀이는 신라 초기부터 구한말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에 전승하는 유랑연예인단인 남사당이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민중오락을 제공하던 연희 내용을 말한다.
남사당은 사회에서 격리된 상태로 자기들만의 사회를 갖고 전국 각지를 돌며 민중놀이를 하였는데 당시 사회에서 천대받던 서민들의 한과 양반 사회의 부도덕성을 놀이를 통해 풀고 비판하여 민중의식을 일깨우는 역할도 하였다.
오늘날 전승되고 있는 놀이에는 농악의 일종인 풍물, 쳇바퀴나 대접 등을 앵두나무 막대기로 돌리는 묘기인 버나, 오늘날의 텀블링을 연상시키는 살판, 줄타기 곡예인 어름, 탈을 쓰고 하는 연희로서의 덧뵈기, 남사당놀이의 마지막 순서이며 한국에 하나뿐인 민속인형극 꼭두각시놀음인 덜미 등이다.
잔도다시래기
1985년 중요무형문화재 제81호로 지정되었다. 다시래기는 '다시락'이라고도 하는데, '다시 낳다', '다시 생성하다', '여러 사람이 모여 즐거움을 갖는다'는 뜻이다. 전라남도 진도지방 초상집에서 출상 전날밤에 상주와 그 가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사물 음악에 맞춰 노래와 춤, 재담으로 진행되는 일종의 가무극적 놀이이다.
전라도 상여놀이 중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사당놀이 · 사재놀이 · 상제놀이 · 봉사놀이 · 상여놀이로 나누고, 이러한 놀이는 특별한 각본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재담 · 발림 · 춤 등 즉흥적으로 즐기면서 진행된다.
이 놀이는 다시래기소리 · 중타령 · 개타령 · 자장가 · 상여소리 등의 노래가 있고 허튼춤 · 곱사춤 · 봉사춤 · 북춤이 있다. 연희는 제1마당 가상제놀이, 제2마당 거사와 사당놀이, 제3마당 상여소리, 제4마당 여흥놀이로 연출한다.
진도다시래기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장례 때 신청(神廳)을 중심으로 조직된 당골 전문예인들에 의해 전승된 민속 소극으로 장례풍속과 민속극 연구에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부여산유화가
충청남도 부여군 세도면, 임천면 등 백마강 유역에서 널리 불려지는 산유화가는 모심기 소리인 긴 모심기 소리, 자진 모심기 소리가 있고 그 밖에 타작 소리, 나비질 소리, 벼쌓기 소리, 농부가, 어야헤 등이 있다.
선율은 육자배기 소리로 되어 있으나 전라도 상사 소리와 약간 다른 향토적인 가락으로 되어 있다. '자진 모심기 소리'는 모심기 끝판에 부르는 소리로 중중모리 장단으로 되어 있어 빠르고 소리도 짧으며, '김매기 소리'는 '덩어리 소리'라고 하여 느린 소리로 '에하 덩어리'하고 흥겹게 메기고 받는다. '벼부치는 소리'는 '나비질 소리'라 하여 돗자리를 펄럭여 벼의 먼지를 날리는 중모리 장단으로 되어 있다.
음조는 농민들의 생활 감정 즉, 부녀자의 생활 체험과 정서를 동요다운 감성으로 순박하게 보여주고 있을 뿐 아니라 백제의 비극적 멸망을 반영하기라도 하듯 처연하며 망국민의 한을 담아내고 있다. 부여 산유화가의 기능보유자로 1982년 박흥남, 이병호, 홍종관이 지정되었다.
고싸움놀이
1970년 중요무형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되었다. 광주시 남구 대촌동 옻돌마을에서 정월 초순경부터 2월 초하루까지 양편으로 나눠 굵은 줄로 묶은 '고'를 어깨에 메고 부딪쳐 서로 상대편 '고'를 눌러 땅에 닿게 하는 놀이 이다.
옻돌마을에 전해오는 속설에 따르면, 이 마을은 풍수적으로 황소가 쭈그리고 앉아 있는 형상이라 터의 기운이 거셌다. 그 기운을 누르기 위해 황소의 입에 해당하는 지점에 연못을 파 놓았고, 황소가 일어서지 못하도록 소의 고삐 부분을 나무에 묶어 놓고, 꼬리 부분을 돌 일곱 개로 눌러 두었다고 한다. 이렇게 자세를 푸는 방법의 하나로 고싸움놀이가 시작되었다고 전한다.
이 놀이를 통해 마을 사람들은 그 해 농사의 풍년과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였으며, 마을 사람들의 협동과 단결을 조장하고 악착 같은 패기와 투지를 키우도록 하였다.
농악
풍물 · 두레 · 풍장 · 굿이라고도 한다. 김매기 · 논매기 · 모심기 등의 힘든 일을 할 때 일의 능률을 올리고 피로를 덜며 나아가서는 협동심을 불러일으키려는 데서 시작되었다. 오늘날은 각종 명절이나 동제 · 걸립굿 · 두레굿 등의 의식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되었다. 농악의 유래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한민족이 한반도에 정착하여 농경생활을 시작한 그 때부터 있었으리라 추측된다.
농악은 꽹과리 · 징 · 장구 · 북 · 소고(매구북) · 태평소 · 나팔 등 타악기가 중심이 되고, 그 외에 양반 · 무동 · 가장녀 · 농구 · 집사 · 포수 · 창부 등의 가장무용수들의 춤과 노래로 이루어진다. 농악에 쓰이는 장단은 각 지방에 따라 많은 가락이 있는데, 대체로 굿거리형 · 자진모리형 · 타령형 · 난모리형 등이다.
이처럼 농악은 농자천하지대본을 삼는 한민족과 뗄 수 없는 인연이 있고 민중들의 솔직한 감정과 정서를 비교적 단순한 악기와 몸짓 · 춤들로 표현해 왔다. 어디에서나 판을 벌일 수 있고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민중음악이며, 그 세련도에 따라서 어떤 음악도 따를 수 없는 독창적인 분위기를 창출해 내기도 한다.
강릉농악
강릉농악은 강릉문화권인 영동지역에서 그 특색이 두드러진다. 마을굿으로 지신밟기가 성행하고, 단체적인 놀이를 위주로 하며 타지역에 없는 '달맞이굿'과 '횃불놀이', '놋다리밟기', '동고리받기'가 있고, 두레농악이라 할 수 있는 '김매기'와 '질먹기', 단오날 대관령 성황제의 '길놀이농악'이 있다.
특히, 무동들의 춤과 동고리, 농경생활을 모의하는 연극적 놀이인 농사풀이는 강릉농악의 대표적인 특색이다. 농악의 편성은 농기 외에도 신대를 사용하고 사물과 소고, 법고, 무동으로 잡이들의 수가 각각 네 부분으로 같은 수이며, 전체 구성인원은 25명에서 50명 내외로 구성된다.
무동을 제외한 모든 잡이들의 복색은 무명이나 삼베바지와 저고리를 입고 좌우로 청황색의 어깨띠를 두르고 적색 허리띠를 맨다. 쇠잡이들은 벙거지에 종이 상모를 달고 그밖에 장고잡이, 큰북잡이, 소고잡이들은 길이가 짧고 폭이 넓은 방망이를 상모에 단다. 무동들은 녹의 홍상에 남색 쾌자를 입고 손에는 수건을 들고 머리에는 고깔을 쓰는데 고깔에 단 꽃의 수가 40개나 된다. 특기할 사항은 무동 이외에는 잡색이 없다는 것이다. 놀이과장은 대체로 12과장이며 마을마다 조금씩 다르다.
강릉농악은 농사의 고달픔을 잊고 서로의 화합과 마을의 단합을 도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1985년 11월 29일 중요무형문화재 제11-라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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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빌방아
디딜방아는 지역에 따라 디딜방애 · 딸각방아 · 발방아 · 돈방아 · 드딜방아 · 드딤방아 · 손방아로 불린다. 발로 밟아서 곡식이나 양념을 빻거나 찧는 데 사용되는 기구이다.
Y자 모양으로 자란 자연목의 뿌리 쪽에 빻는데 사용되는 공이를 끼고 두 갈래로 된 목 부분, 즉 다리로 삼을 부분에는 아귀진 나무 둘을 양쪽에 세우고 그 사이에 굵은 나무를 가로로 대어 방아의 받침을 삼는다. 확은 돌로 만들어 속이 파여져 있는데 작은 절구통을 땅에 묻어 대신 사용하기도 한다.
방아의 종류에는, 두 사람 또는 그 이상의 사람이 마주 서서 찧는 양다리방아와 한쪽이 벌어지지 않고 곧아 한 사람이 찧는 외다리 방아의 두 가지가 있다.
외다리방아의 가장 오랜 증거는 황해도 안악의 옛 고구려 무덤의 그림으로 이 무덤은 4세기에 만들어졌으므로 이미 4세기 이전부터 이것을 써 왔음이 분명하며, 이 방아는 근래까지 전남의 해안 지방에서 사용되었다.
백제의상
백제의 의생활은 <후한서> 동이전을 통해 보면 귀금속을 중히 여기지 않았으며 화려한 구슬 장식을 하였다. 또한 상투를 틀고 베로 만든 도포와 짚신을 착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마한의 토착사회에서 직조와 양잠을 통한 복식 문화가 발달한 단계에서 복식 형태도 유입된 것을 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왕족의 복식은 자색의 옷은 왕 이하 6품 이상만이 입을 수 있으며, 금꽃으로 장식한 오라관과 흰 가죽띠, 검정 가죽신을 신었다고 한다. 관인(官人)의 복식으로는 고이왕 27년에 6품 이상은 자색옷을 입고 은관을 장식하며, 11품 이상은 붉은색 옷을, 16품 이상은 푸른색 옷을 입게 하였다.
이러한 기록은 백제가 국가 체제를 완전히 갖추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신라에 비해 약 2세기 정도나 앞서 있다는 점에서 백제문화의 선진적인 면을 엿볼 수 있다. 또한 평민에게는 대(帶)의 착용을 금지하고, 옷의 색으로 비자색(緋紫色)을 평민의 복색으로 사용할 수 없게 한 것으로 보아 관인과 평민의 차이를 두고자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한지제조과정
한지는 조선종이 · 창호지 · 문종이 · 닥종이 · 닥지 · 저지 등으로 불린다. 한지는 105년 중국 후한 때 채륜이 발명했다고 하나 발명이 아닌 개량했다는 설도 있다. 채륜의 종이 발명 연대는 고구려 태조왕 52년, 백제 기루왕 29년, 신라 파사왕 26년에 해당한다. 또한,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 창건부터 소수림왕 때까지 기록한 <유기>라는 사서에 낙랑시대 고분의 관에서 닥종이 뭉치가 발견되었다는 기록으로 종이의 역사는 소수림왕 때보다 훨씬 전으로 짐작된다.
제조과정은 원료인 닥나무의 줄기를 잘라 껍질을 벗겨 말린다. 말린 겉껍질을 물에 담가 불린 다음 솥에 넣고 소다회 · 수산화나트륨을 첨가해서 삶고 이물질을 제거한다. 삶은 백피는 물에 담가 표백시키거나 다시 직접 보면서 이물질을 제거한 후 절구통에 넣고 찧거나 넓은 판 위에 놓고 방망이로 두들긴다. 물과 함께 원료를 닥풀이라는 식물성 점액질과 삼출액을 첨가하여 종이를 뜬 후 열판에 말린다.
완성된 한지는 품질에 따라 백지 · 장지 · 각지로, 용도나 산지에 따라 창호지 · 유삼지 · 사고지 · 공물지 · 외장지 · 농선지 등으로, 염색의 재료에 따라 홍화염지 · 천근염지 · 자초염지 · 감염지 · 청태지 등으로 나눈다.
짚신제조과정
짚신은 신발 중 가장 서민적이고 대중적이며 실용성 있는 재래 신발이다. 짚신 · 고운짚신 · 엄짚신 · 부들짚신 · 왕골짚신 · 미투리 · 삼신 · 절치 · 탑골치 · 청올치신 · 초혜 · 비구 · 망리라고도 한다.
짚이나 삼으로 꼰 노끈을 사용하고 왕골이나 부들로도 만든다. <통전> 변방문 동이 마한조에 '초리'가 나오고 <진서> 사이전 마한조에 '초교'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마한시대부터 착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만드는 과정은 짚으로 새끼를 꼬아 4줄로 날을 하고 다른 짚으로 엮어 발바닥을 삼는다. 양쪽 가장자리에 짚을 꼬아 총을 만들고 뒷날은 하나로 모은다. 가는 새끼로 총을 꿰어 두르면 짚신이 완성된다. 짚신은 먼길 갈 때, 들일할 때, 선비들이 맑은 날 가까운 나들이할 때 착용하였고, 생삼과 짚을 섞어 삼은 삼신은 상제가 착용하였다
끝
숙제끝끝끝끝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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