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곳은 경상북도 동북쪽 푸른 동해 바다가 바라보이는 울진이다. 남쪽에는 관동팔경의 명승지인 월송정과 북쪽에는 망양정이 어우러져 있으며, 낙동정맥을 따라 흐르는 백병산 준령 동쪽으로 흐르는 불영계곡이 가까이 있다.
현재 나는 천연기념물 155호 성류굴 앞으로 흘러내리는 왕피천을 마주보는 불영계곡 초입에 있는 작은 모텔과 7번 국도변 울진 원자력 후문에 있는 자동차 정비공장을 함께 경영하고 있다.
불보살님의 가피로 고난과 역경을 딛고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기까지 나는 시련과, 고통과 파란만장하고 우여곡절이 많은 한(恨) 많은 젊은 날을 보내며 살아왔다.
고뇌에 찬 삶과 시련의 연속
중학교 2학년, 15살 때 우연히 하교길에 반야심경 독경 소리에 인연이 되어 중학교, 고등학교 재학 중 불교학생회에 잠시 몸을 담기도 했었다.
또한 사회에서 직장생활과 부산에서 사업을 할 당시 작은 암자와의 인연이 있긴 했지만 정법과는 인연이 바로 닿지 못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절들은 대처승이 아니면 보살이 운영하는 작은 암자들이었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지척에 있는 천년고찰 천축산 불영사의 현 주지스님과의 만남이었다. 스님과의 인연은 지금으로부터 십 년 전이었으며, 내가 이절 저절 찾아 다닌 지 17년 만에야 올바른 부처님의 법을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고향에 낙향하여, 어쩌면 전생에 부처님과의 질긴 인연의 고리가 있었는지 불영사에서 불교교리강좌와 성지순례 등의 참여를 통하여 인과응보를 아는 삶에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그 무렵의 나는 그칠 줄 모르는 다혈질인 과격한 성격과 불타는 욕망으로 욕심과 아집과 아상으로 사로잡혀 있을 때였다. 몸에 밴 건달 기질과 타고난 장골의 육신으로 안하무인한 삶을 영유하였지만, 나의 밑변에는 풀어야만 할 숙제가 있었다. 바로 죽음과 내생의 윤회에 대한 고뇌였다. 그 고뇌에 몸서리 치는 것을 느낄 무렵, 엄청난 시련이 나에게 닥쳐왔던 것이다.
울진이 생긴 이래 가장 크다고 할만한 대형 화재가 내가 운영하는 공장에 일어난 것이었다. 그 화재로 인하여 공장과 이층 가정집을 모두 불태우고 수억 원의 재산 손실을 입었다. 잿더미로 변한 공장에 새벽 늦게 다시 와서 돌아보니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고 두 눈에선 하염없이 눈물만 흘렀다. 파김치가 된 아내의 손을 꼭 잡고 “여보, 재물은 서천에 뜬 구름이야. 인과의 업보구만.”하고 괴로움을 달랬다.
그 타오르는 불길 속으로 내가 지나온 젊은 날의 삶이 필름처럼 스쳐지나가는데, 내가 지금까지 남을 가슴 아프게 했던 일, 부모님께 불효한 일, 아내에게 가슴 아프게 했던 일 등이 동시에 떠올랐다.
흘러내리는 통한의 피눈물을 머금고 돌아서던 94년 1월 그 어느 날 이후, 울진에서의 사업을 정리하고 조금 떨어진 곳 죽변의 지금 이 자리에 새 터전을 마련하여 심기일전으로 다시 정비공장 일에 몰두하며 새 출발을 하였다.
또 다시 하늘이 무너지는 고통이
그 당시 불영사 신도회 총무로 소임을 보면서 내 딴에는 열심히 살고 있던 중, 나의 도반이자 사형이신 한전의 부장으로 계시는 현묵 거사의 질책으로 난생 처음 큰 신심을 내게 되었다.
불영사 명부전에서 3천 배의 원을 세워 8시간 만에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2층 계단을 거꾸로 내려와야 했는데, 다시 108참회문으로 3천 배 참회를 마치고 나서, 양산 통도사 큰법당에서 한숨도 자지 않고 장장 13시간 만에 3천 배를 다시 마쳤다. 나중에 천 배를 더 보태어 일만 배 회향을 하였다.
그 무렵 나의 숙세의 업이 아니라 할 수 없는 엄청난 큰 시련이 다시금 닥쳐왔다.
나의 분신이자 내 목숨보다 소중한 나의 아내와 두 딸 민지, 은지가 정비반장의 차로 울진에 갓 입학한 작은 딸 은지의 신발을 사러 갔다 돌아오던 중, 중앙선 침범을 한 음주로 만취된 상대방 운전자의 과속차량으로 인하여 내 가족이 죽음의 문턱에 다가간 대형 교통사고가 났던 것이었다.
아는 선배의 전화연락을 받고 군립의료원에 달려가 보니 몸서리가 쳐 졌다. 두 딸들은 이미 의식이 없었고, 아내 역시 몸을 가눌 수 없을 만큼 큰 중상이었다. 앰뷸런스 4대에 나누어 타고 포항으로 이송하던 중 큰 딸은 이미 피를 토하였고 의식마저 희미해져 갔는데, 아버지로서 딸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오직 한 가지가 있었다면, 염주를 내 딸에게 걸어주며 “민지야 지장보살 염불하며 가자.”고 하며 지장보살을 수천만 번을 염하면서 포항에 도착하였다.
큰 딸은 성모병원으로 보내고 아내와 작은 딸은 선린병원으로 보내면서 정신없이 난리를 치던 중, 큰 딸이 있는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가망이 없다고. 살릴 수 있는 확률이 10%도 안 된다고 하였다. 그래도 수술을 하고 싶으면 지금 하든지 아니면 대학병원으로 이송하라고 했다.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청천벽력이었다.
판단력은 이미 상실할 정도였지만, 그래도 딸을 살려야겠다는 일념으로 대학병원으로 이송을 서두르는데 병원에선 앰뷸런스가 없다는 것이었다. 기가 막히는 일이었다. 병원이 아무리 장사로 한다고 하지만 어찌 이럴 수가 있을까. 급한 마음에 119에 연락하니 거기서도 냉담하게 거절하였다.
하는 수 없이 응급구조단에 연락하여 대구 경북대병원으로 이송하던 중, 큰 딸이 ‘아빠, 물 달라’고 애원하며, ‘아이스크림이 공중에 날아다닌다’며 의식이 희미해져가던 것을 보니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아버지의 판단 실수로 대학병원으로 옮기는 도중에 혹시 잘못 될까봐 심장이 다 타 들어가는 이 아빠의 그때 그 비통함은 이루 말로 다 할 수가 없었다.
오직 일념으로 기도를
경북대병원 응급실에서 누구에게 연락을 취해서 도움을 청해야 하는데, 수많은 주변 사람들의 전화번호가 뇌에서 모두 지워져 생각이 전혀 나질 않았다. 그런 와중에 불영사 주지스님의 전화번호만이 유일하게 생각이 나서 스님께 전화를 올려, 초를 다투는 급박한 상황 속에서 스님의 기도 원력에 의지하였다.
맥박이 1분에 250번이 뛰어 수술을 받을 수 없다고 포기 하라던 의사선생의 냉담함. 그래도 이틀이 지나 보호자의 간절한 요청에 수술이 결정 나 중환자실에서 수술실로 내 딸을 올려보내고, 무릎 꿇고 합장하며 일념으로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명호를 불렀다.
처절하게 매달리며 기도하면서 부처님과 담판을 하듯이 약속을 하기를, “부처님! 그래도 저는 불자로서 불영사 신도회 총무 소임을 그나마 열심히 살았고 나름대로 기도를 하였는데, 내 딸이 죽는다면 부처님도 안 계시고, 나도 없고, 모든 것이 끝장입니다. 내 자식을 살려만 주시면 남은 인생은 부처님께 모든 것을 귀의해 살겠습니다.”하고 2시간 동안 기도하였다.
그러던 중, 한밤중인데 하늘에서는 서기가 비치고, 비둘기 5마리가 내 곁으로 날아 오는 것을 본 찰라, 수술실에서 손민지의 보호자를 부르는 소리에 놀라 대기실 바닥에 주저앉아 시선만 주고 있는데, 의사 선생님이 수술 중간에 수술이 잘 되어서 봉합하던 중, ‘수술이 잘 되었으니 걱정하지 말라’, ‘아버지의 간절한 기도에 감동이 되었다’며 같은 동향인 의사선생님께서 알려주었다. 너무나 감사하였고, 지금 이 순간에도 그 분을 잊을 수가 없다. 수술이 잘 되어서 천명(天命)으로 새 생명을 다시 얻게 된 내 딸이 마취에서 깨어나면서, ‘빨리 나아서 불영사 주지스님과 부처님과 손을 잡고 절에 가자’고 하더란 말에 감사한다.
“부처님!”하고 통곡을 하며 한숨을 돌리고 정신을 차려 포항에 있는 작은 딸과 아내에게 연락을 하니 작은 딸이 아직도 의식이 깨어나지 않았다는 말에 허겁지겁 다시 포항병원으로 갔다.
병원에 도착하니 중환자실에서, 뇌를 다친 둘째 딸은 의식이 없었고, 아내 또한 목 경추와 골반을 다쳐 꼼짝을 못하고 남편을 바라보며 닭똥같은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둘은 아무 말이 없었다.
한참을 지나 날짜를 보니 사고 후 벌써 사흘이 지나 있었다. 큰 딸을 살렸다는 안도감과 함께 작은 딸에게 달려와 손을 꼭 잡고서 기도를 하는데 자신이 생겼다. 의식이 없는 작은 딸이었지만 큰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신심으로 살린 내 가족
포항 병원에 와 있는데, 큰 딸이 열이 나고 아버지를 찾아 난리가 나서, 몇 시간 만에 대구 병원에 올라갔다. 병원에 들어가니 수술은 잘 되었지만 폐혈증 증세로 밤새도록 가슴과 등을 두들겨 주어야 했고, 목을 눌러 가래를 뱉게 해야 했던 날들...
소아과 중환자실에 6명이 입원하였는데, 3명이 소생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보아야 했던 그 때...
그래도 아저씨는 믿음이 있어서 너무나 부럽다고 하던 주변의 여러 보호자들. 늘 염주를 매달아 놓고 큰 딸과 기도하며 보내야 했던 그 날들.
큰 딸은 얼굴에 250바늘을 기웠고, 골반, 대퇴, 오른팔이 부러지고 장이 파열되어 이틀을 넘기고도 기적적으로 살아 났고, 작은 딸은 뇌를 다쳐 일주일 만에 의식이 깨어났으며, 아내 또한 순조롭게 건강을 되찾아갈 무렵, 나는 그제서야 밥 한 술 먹지 않고 일주일을 견디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근처 식당에서 밥을 물에 말아 겨우 한 술 뜨니 마치 모래알을 씹는 것 같았다.
가장으로서 최선을 다하여 식구들 모두 살려내었고, 그 지긋지긋한 병원생활을 아내와 작은 딸은 6개월 만에 건강을 되찾아 퇴원을 하였다. 한 달 뒤에 전신 기브스를 풀고 큰 딸이 퇴원하던 날, 우리 가족 모두는 부처님의 가피에 감사하며 통감의 눈물을 흘렸다.
보험도 들지 않은 차에 사고를 당하여 억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나, 큰 딸이 가해자를 용서해 주라는 말에 용서를 해줌과 함께 그 때 받은 약간의 합의금은 불영사 일주문 단청 불사금으로 보시를 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다.
당시 경북대병원과 포항선린병원에 7개월 동안 병문안 와 주신 수백명의 스님, 보살, 처사님, 일가친지, 형제들과, 특히 장모님, 처형, 형님, 형수님, 어머니께 감사를 드리고, 그 분들께 늘 부처님의 가피가 함께 하시길 두 손 모아 빈다.
무여 큰스님과의 인연
그 사건 이후, 우리 집은 모든 것이 달라졌다. 방 하나를 기도방으로 마련하여 지장보살님을 모시고 예불과 기도를 하고 있다. 두 딸은 날이면 날마다 방과후 108배를 4년이나 계속해 왔으며, 나 또한 그 해 겨울 동안거 백일 동안 십만배기도에 들어갔다. 매일 일천 배를 100일간 하면서, 전생, 금생에 지은 업장을 소멸해 주시고, 또 화두를 받아서 직지인심 견성성불의 대도를 이루게 해달라고 발원하였다.
재가불자가 사업을 하면서 백일기도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하기란 참으로 어렵다고 하는데, 그 어려운 100일간의 십만배기도를 마치고 나서도 공덕과 복이 모자랐는지 큰스님을 만나고 화두를 받을 인연을 만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더욱 철저히 하심(下心)을 하며 나 자신을 낮추고 때를 기다릴 즈음, 우연히 지나던 객스님이 자동차를 고치러 내가 운영하는 정비공장에 왔다. 차를 고치던 중 때가 되어서 점심공양을 함께 하며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었다. 그 스님이 강원도 정선의 작은 토굴에서 공부하고 계신다길래, 나 또한 멀리 해인사로 큰스님께 화두 받으러 갔으나 인연이 모자라 아직도 화두참선 공부를 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러니 그 스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아, 지척에 당대 도인이신 무여 선사가 계시는데 그렇게 멀리까지 화두를 받으러 가셨나?”하는 말에 두 귀가 열리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 그 스님께선 어디에 계십니까?”하고 반문하니 봉화 문수산 축서사에 주석하고 계신다고 하였다. 생전 처음 듣는 사찰이었다. 그 날 차 수리비용 전액을 보시하고 노자를 조금 드리고는, 이튿날 단걸음에 봉화에 와서 물어 물어 축서사에 도달하니 당대 큰스님이 주석하시는 도량이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초라하고 황량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 때가 이맘 때, 초겨울 11월이었던 것 같다.
정법(正法)과의 만남
오후의 산사에 초겨울 추위가 엄습할 무렵, 지금 대웅전 자리에 낡은 기와 지붕에 벽돌집이 옛 광산촌 사택 같았는데, 처사 한 분이 부엌에 불을 지피고 있었고, 그 뒷편 밭에 노스님 한 분이 저물어가는 산 그림자에 비쳐 찾아가서 여쭈니 방으로 들어오라고 하셨다.
큰스님께 삼배를 드리니 축서사의 창건 설화를 들려주셨다. 또, 앉은뱅이 아이의 다리를 낳게 했던 불보살의 가피에 대한 큰스님의 법문은 큰스님과의 첫만남을 영원히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게 했다.
그 날 저녁 공양상에 공양주 보살님의 된장찌개는 평생 지금까지 먹어 본 것 중에서 가장 맛있는 된장찌개였다.
그 후 몇 번 더 와서 찾아 뵙고는 큰스님께 약속하였다. “큰스님, 저, 여기 와서 기도하고 큰스님께 화두 받아서 공부하겠습니다.”하고 말씀드리니 허락하셨다.
그 이후 모텔 신축공사를 10개월 만에 준공을 하고 개업한 지 한 달 만에 축서사에 가서 3ㆍ7일간의 기도를 입재하여 난생 처음 집을 떠나 21일간의 산사 생활을 시작하였다.
하루에 평균 8시간씩 기도를 하였는데, 새벽 3시 도량석 소리에 잠을 깨어 새벽 예불과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여, 저녁에 기도를 마치고 나면 10시가 넘곤 했다. 밤늦게 빨래와 목욕을 한 후 방 청소를 하고 나면 12시가 되어 잠을 청하기를 21일간 계속 하며 한 번도 빠뜨리지 않고 산중일기를 썼다. 그 해 6월은 맑은 날은 거의 없을 정도로 비가 자주 와서 산사에 새벽 안개비에 딱따구리의 나무 쪼는 소리가 너무나 아름다운 때였다.
21일간 기도의 마지막 날 저녁 철야정진기도를 삼천 배로 마치며 부처님께 금생의 서원을 세우길, 무주상(無住相) 복지원을 지어 오갈 데 없는 노보살님들을 모시고 살 수 있게 해주시고, 작은 암자나 토굴을 지어서 금생에 이 공부를 마치게 해달라고 서원을 세우며 회향발원문을 사르고 큰스님을 찾아뵈었다. 지극 정성으로 삼배를 올리고 무릎 꿇고 않으니, 큰스님께서 처사는 ‘이뭣고’ 화두를 참구하라는 말씀에 금생에 이 공부 마치겠다고 맹세하고 산사를 뒤로 하며 봉화읍내에 내려오니 눈에 비친 세상과 냄새가 달라보였다.
그 이후 총체적인 국난인 IMF로 인하여 사업도 위기를 맞이하였으나 지혜롭게 잘 극복하였으며, 지금은 정비공장, 모텔 두 곳의 일이 바쁠 정도로 잘 운영되고 있으며, 교통사고로 다친 두 딸 모두 건강하니 이 어찌 부처님의 가피가 아니겠는가.
현재의 나의 상황으로는 전적으로 공부하기는 어려움이 많지만 늘 간절한 마음을 갖고 있다. 지난 20여 년간 피워온 담배를 올해 9월에 설악산 봉정암에 성지순례를 가서 부처님께 약속하며 끊었으며, 앞으로 몇 년간 사업을 열심히 하여 가족을 위하여 안정된 준비를 해 놓은 뒤, 이 공부를 위해 전력을 다 해 살기를 다짐한다.
대도(大道)를 향해
큰스님은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스승이다. 큰스님께 법명도 다시 혜초(慧超)로 받았으며, 마음의 고향 축서사를 위해 스님의 작은 그림자가 되고 싶다.
내 주변 모든 인연 있는 분들께 축서사 큰스님과 인연을 맺어주려고 한다. 범부들은 언제나 고통과 고뇌와 번뇌망상에 사로잡힌 삶을 산다. 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면 문수산 축서사로 가서 큰스님께 숙제를 받아서 팔자를 바꾸어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나를 보라’고, ‘큰스님께 숙제를 받아서 금생에 이 공부 해결하자’고 한다.
울진에서 축서사는 결코 가까운 거리는 아니다. 그러나 나는 단숨에 달려간다, 아주 기쁜 마음으로. 고향의 어머니 품 같이 따스한 곳. 할아버지 같이 자상하고 인자하신 큰스님. 이 어려운 시절에 대작불사를 이루신 큰스님께 존경과 감사를 드리며, 큰 힘이 못되어 드린 것에 대한 송구함 이를 데 없다.
큰스님께 화두 받아 공부하며, 정치에 관심을 두었던 금생의 꿈에 대한 미련도 없애버렸다. 이 정도면 팔자를 손톱 만큼이라도 고친 것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선이 맑고 고요하며, 칼날 같은 선사님의 가풍에 절로 고개 숙여지며, 축서사 돌담장 불사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또 한 번 큰스님께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보살, 처사님들 또한 정성이 대단하다. 이 분들의 공부 열정을 본 받으며 나 자신을 경책하고 참회한다. 법당에 예불 올리며, “부처님, 감사합니다.” 이 말 한 마디 외엔 달리 할 말이 없다.
한 해 한 해가 유수 같이 흘러 축서사와의 인연 또한 3년이라는 세월이 훌쩍 지나가고 있다.
큰스님 부디 건강하시고, 건강하십시오. 스님 회상에 누가 되는 일은 결코 하지 않을 것입니다. 팔자를 완전히 고치는 이 공부, 큰스님 회상에서 대도를 이루기 위해 열심히 하겠습니다.a
첫댓글 신심이 우러나오는 글 정말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제사 글을 읽었습니다.저두 무여큰스님께 법명과 화두를 받았습니다.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