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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관점
마가복음은 전기나 역사적인 관심에서 예수를 소개하고 있지 않다. 마가복음은 스승으로서의 예수보다는 기적을 행하는 이로서의 측면을 강조한다. 12장에 나오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성전에서 예수가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를 가르침,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문제, 부활, 가장 으뜸되는 계명, 다윗의 자손. 12장에서는 예외적으로 예수의 스승으로서의 측면이 부각된다.
오늘 본문의 초점은 거만한 종교적 과시에서 신실한 희생으로 이동하는데, 양자를 깊이 이해하지 못한 채 너무 빨리 이동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물론 예수는 위선적인 종교적 행위에 대해 경고를 하신다. 그렇지만 너무 이들의 과시욕을 강조함으로 우리가 다른 방식으로 예전을 너무 강조하는 잘못이나, 신실한 경건보다는 자기 비하적 태도를 조장하는 잘못에 대해 깨닫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한다. 실로 희생은 아주 위험한 개념이다. 특히 우리는 가장 연약한 사람들에게 가장 큰 희생을 강요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오늘 본문도 잘못 해석하면 그런 식으로 악용될 수 있다.
우리는 왜 희생의 가치를 강조하는 것일까? 오늘날 희생은 헌신이나 예배와 상관없는 경우가 많다. 오늘날 희생은 우리가 해야 하는 것보다는 조금 더 많이, 그렇지만 할 수 있는 한도 보다는 조금 적게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미국에서는 노동자와 빈민층에게 더 잘 사는 사람들을 위해서 세금의 짐을 조금 더 부담하라고 요구한다. 종종, 수입이 적은 사람들이 부자보다 더 높은 비율의 세금을 낸다. 이런 희생을 생각해볼 때 우리는 예수의 경고를 새겨들어야 한다.
때로는, 희생이 남이 해야 할 때는 최고의 미덕인 것처럼 여겨진다. 테레사 수녀나, 상의군인 가족들, 빈민가에서 가르치는 교사들의 희생에 찬사를 보낸다. 우리는 그들을 이 가난한 과부와 함께 높은 단상에 모셔놓고 찬사를 보내면서 우리의 매일의 삶에서 격리시킨다. 그들의 초인적 희생과 우리의 무능력이 강조된다. 그러나 바뀌는 것은 없다. 누군가에게 찬사를 보낼 때 이런 문제가 있다. 그들을 아주 특별한 사람으로 치부하면서 보통 사람인 우리는 그런 희생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스스로를 합리화한다.
이런 잘못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우선 드림(offering, 헌금)의 의미를 생각해보자. 그 동전은 단순히 돈이 아니다. 그것들은 믿음을 상징하고 구체적으로 우리의 생활에서 써짐으로 우리의 매일의 삶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무력한 예식은 일상생활에 아무 신앙적인 영향을 못준다. 도리어 그런 예식은 형식만 있는 잠자는 경건만 만들어낸다. 그 동전들은 믿음이 수반된 드림으로 하나님 앞에서 이 세상을 섬기는 우리의 현재와 미래의 모습이 다 담겨있는 것이다.
진정한 드림은 기도, 십일조, 성찬과도 다른 것이다. 그 본질은 주는 행위(act of giving)에 있는 것이 아니고 존재하는 행위(act of being)에 있는 것이다.
드림을 이와 같이 헌신으로 생각할 때 어떤 이미지, 이야기, 개념이 마음에 떠오르는가?
그리스도가 떠오른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성찬식에 참여할 때 전 존재를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고 말했다. 우리는 성찬에서 경험하는 은혜와 소망을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경험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가 그 동전이 되어, 동전이 사용되는 것처럼, 우리가 사용되어야 한다.
오늘 본문은 “가진 것 모두”를 드리는 것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게 한다.
진실된 드림을 구현하는 삶은 어떤 삶일까?
그 예는 어떤 것이 있는가?
오늘날 이 과부와 같은 자세로 동전을 바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우리는 본문을 통해 우리의 실패와 한계가 아니고, 우리의 가능성에 초점을 두고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충실하게 살아가야 하겠다.
주석적 관점
▶ 종교적 직책이 위선과 욕망의 안전판이 아니다. 진실로 이 본문은 다른 많은 본문과 마찬가지로 불신앙이 신앙으로 위장하고, 믿음의 집에서 가장 높은 차원에서도 가식이 경건으로 행진함을 보여준다. 반대로 어떤 위대한 신앙의 행위는 단순하고, 이기적이지 않으며, 겸손하게 일어난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신앙의 진정한 실체를 가짜들과 구별하도록 도와준다.
이 본문은 예수의 성전에서의 행동과 그에 대한 다양한 반응(11:27-12:44)들에 대한 마가의 결론이다. 이 본문 다음에 마가는 예수께서 종말에 나타날 사건들에 대해 경고하신 올리브 강화(Olivet discourse)를 보여준다. 예수는 종교적 위선에 대해 강력하게 경고하셨고(39-40),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신뢰를 행하는 것을 격려하신다(41-44).
▶ 종교적 위선에 대한 경고(38-40절)
이 본문 전반부와 병행구에서(마23:1-12;눅20:45-47), 예수는 명성, 권력 그리고 물욕의 유혹에 굴복하는 것에 대해 경고한다. 이러한 경고는 모든 율법학자들에 대한 경고는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왕국과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와 율법학자들과의 관계도 언제나 갈등 관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막12:28-34). 도리어 예수의 권고는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실제적인 모습은 엘리트적 태도나 행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본래 이스라엘의 서기관들은 공직자들로 특히 재정적 문제(렘32:12-15;왕하22:3이하)와 정치적 문제(사22:15;36:3)에 관한 법적 문서들에 대한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다. 서기관들은 숙달된 사관들로 때때로 정의감과 지혜를 가졌다고 상찬 받는다(단11:32-35;12:3 라7:6-10). 그들의 재정에 대한 명민함과 문필적 재질은 특별한 계급으로 구분되어 불가피하게 돈과 권력, 종교와 정치적 권력과 연결되게 된다. 바벨론 유수 이후 율법이 유대인들의 생활의 핵심적 토대가 되면서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법의 해석자와 교사로서의 명성을 더 하게 되었다. 불행하게도 모든 서기관들이 그들의 직책을 충실하게 수행했던 것은 아니다. 예수가 서기관들의 잘못된 행동에 대한 경고는 더 잘 알고 행동해야 할 그들의 위선의 여러 가지 측면들을 강조한 것이다. 그들의 잘못된 태도와 행동의 첫 번째 차원은 명성을 추구하는 것이다(38). 그들은 주목의 중심이 되는 것을 바라고 즐긴다. 그들은 각광을 받길 원하고, 그들의 위신을 보여주고 다른 사람들의 주의를 끌기 위해 긴 예복을 입는다. 그들은 예수는 시장터라고 말한 성전과 같은 특별한 장소에서 대중들에게 인정받고 인사받기를 원했다. 그들이 하나님의 길에서 멀어진 두 번째 측면은 종교적 영역에서 권력을 추구하고 경쟁하는 것이다(39). 그들은 회당에서 상석을 원했는데, 그것은 율법의 권위적 해석이 주어지는 “모세의 자리”와 비슷한(마23:2)“율법의 박사”를 위한 자리였다. 그러한 자리가 유명한 사람 특히 율법학자들에게 제공되었고, 각 회당마다 그 자리에 앉아 그들이 가르치곤 했다.
그러한 자리를 차지한 사람은 그들의 공동체에서 정책을 세우고 실행하는데 있어 상당한 영향력과 힘을 가졌다. 비슷하게 “잔치자리에서 상석”도 지위와 권력을 가진 사람에게 주어졌다. 유대의 종교적 절기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적 잔치도 포함된다. 지위와 명예와 더불어 서기관들은 자신들의 직책과 아젠다를 진척시킬 수 있는 통제와 권력을 추구했다. 세 번째 예수가 반대했던 특징은 자비 없는 물욕이었다. 율법은 어디에서도 과부들을 동정하며 대접하도록 했고, 그들에게 소홀하거나 억누르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계속해서 말씀하신다(욥22:0-11,29-39등). 그러기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사람들은 과부와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의 고통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이 율법을 잘 아는 사람들이 도리어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고 있다(40). 어떻게 과부들을 착취했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아마도 그들의 집이나 개인재산 그리고 땅을 거래할 때에 그렇게 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서기관들이 남에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하지만 그들의 개인적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먹이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 모범적 신앙의 예(41-44절)
동정심 없는 종교적 엘리트주의에 대항하여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단순한 행동을 보여준다. 이 이야기에서 예수는 헌금함 맞은쪽에 앉아 사람들이 헌금하는 것을 바라본다. 마가가 말한 이 헌금함이 제사장들이 헌물한 것에 대해 무슨 목적으로 했는지를 선언하는 성전에 있는 헌금함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예수가 많이 넣는 부자 여러 명과 팔레스틴에서 가장 가치가 적은 동전 두 닢을 넣는 가난한 과부를 예리하게 비교하면서 감동을 받았다는 것이다. 가난한 과부는 회당에서 상석과 잔치자리에서 상석을 차지하는 사람들과 반대 스펙트럼에 있는 사람이다. 많은 군중들은 그녀의 헌금을 무시했지만, 예수는 이를 주시하고 제자들에게 주의를 요청했다. 예수는 제자들이 헌금 이면에 있는 진정한 믿음을 보기 원했다. 과부의 헌금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믿음을 보여준 것이다. “이 과부는 가난한 가운데서 자신의 것 모두를 털어 넣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값비싼 제자도가 있고 예수는 그녀의 모범적 신앙을 칭찬했는데, 그녀의 믿음은 많은 종교지도자들의 믿음을 능가했다. 그녀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예수의 믿음과 동일선상에 있다.
목회적 관점
Kathleen Norris는
놀라운 은혜 라는 책에서 “의로움”이라는 단어로 인한 갈등에 관하여 썼다.
“의로움”이라는 단어는 내 귀에 거슬렸다; 여러 해 동안 나는 이 단어를 독선이나 판단 같은 부정적인 용법으로만 들어 왔다. 차츰, 이 단어의 성서적 용법에 익숙하게 되면서, 이것이 독선을 의미하는 것이 전혀 아니고,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의로움은 그 사회의 가장 연약한 사람들, 고대 이스라엘의 경우에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가난한 사람들을 기꺼이 돌보는 것이라고 예언자에 의하여, 그리고 시편과 복음서들에서 계속해서 정의해 왔다. [Kathleen Norris, Amazing Grace: A Vocabulary of Faith (New York: Riverhead Books, 1998), 96.]
Norris는 계속해서 성경이 알려주는 하나님의 분노의 대부분은 자기들의 재산을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을 향한 것이라고 한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읽으면, Norris의 사려 깊은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첫 번째 장면에서, 예수는 예복을 입고 다니기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잔치에서는 윗자리에 앉기를 좋아하며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고, 남에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하는 율법학자들을 조심하라고 경고한다. 이 말씀에 대해서는 별 문제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불운한 사람들을 위해 사용해야 하는 돈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일에 사용하는, 가식적이고 자기의 지위를 과시하는 위선자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덜 판단하고 더 거들먹거리는 것은 여전히 역겨운 일이다.
두 번째 부분에서, 예수는 성전 헌금궤에 작은 동전 두 개를 바치는 것에 대해 언급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예수가 과부의 희생을 칭찬하는 것이라고 읽지만, 본문을 자세하게 읽어보면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보다는, 예수는 단지 그의 제자들에게 과부가 바친 작은 동전 두 개가 훨씬 더 많은 돈을 바쳤지만 매우 적게 희생한 부자들이 바친 것보다 훨씬 값지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두 부분을 같이 읽으면, 종교 시스템이 가난한 과부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바치게 해서 그 시스템의 지도자가 부유하고 안락한 생활을 지속하게 하는 것에 대한 한탄과 고발이 된다. 이러한 공격은 유대교의 종교적 실천에 대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이기주의와 탐욕을 감추고 있는 모든 종교적 실천을 공격하는 것이다. 율법학자들은 가진 것이 거의 없는 가난한 과부가 가진 것을 희생하도록 만드는 종교 시스템에서 유익을 얻는 거머리 같다. 우리는 빈곤층과 차상위층에 속한 사람들이 가진 것을 착복해서 엘리트들의 부를 영속화시키는 어떤 체제에 대해서도 분노해야 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하여 정직하게 되면,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궁지에 빠질 것이다.
찰스 L. 캠벨은
The Word before the Powers 라는 책에서 교회들, 특히 주로 부유한 백인들의 주류교회들이 어마어마한 특권과 지위를 누리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썼다. 그는 비폭력적 저항의 윤리를 설교해야 한다고 요청하면서도, 인류는 자신이 이익을 얻는 체제를 보존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잊지 말라고 한다.
현실은 이런 것이다: 교회가 비폭력적인 저항의 윤리를 설교하지만, 교회의 설교 자체는 그러한 윤리에 미치지 못한다. 직접적으로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물리적 폭력에 대해 저항한다고 하면서 종종 설교는 폭력적이라고 할 만한 심리학적, 영적, 심지어 물리적인 강제라는 해로운 형식을 수반하는 통치 행위와 체제에 참여하곤 한다. 결국 기독교 설교자들은 강단을 통해서 기독교 신자들을 십자군으로 파송하고 모든 종류의 전쟁을 후원하게 한다. 기독교의 설교 또한 노예 제도, 인종 차별을 지원하고, 여성, 게이, 레즈비언에 대한 억압을 지원하고 있다. 그리고 기독교 설교는 자본주의로 인한 경제적인 폭력과 씨름하기는커녕 경제적인 현상 유지를 빈번하게 지지한다.
캠벨은 교회가 너무나 자주 억압과 폭력-심리적, 영적, 경제적 그리고 심지어 물리적-의 체제에 가담한다고 말하면서, 그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루어진다고 지적한다. 교회의 교인들이 회사의 이사로 있고 입법부에서 투표하고 있다는 것은 대단한 도전이다. 많은 교회 지도자들과 교인들이 자기들이 별로 힘이 없다고 느끼지만, 실제로는 그것은 거대한 환상의 핵심이다. 예수가 정죄한 많은 율법학자들 역시 그들이 명예롭고 정당하며 선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그들 역시 그들이 통제할 수 없다고 느끼는 체제 안에 사로잡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사람들이 폭력과 억압의 체제로부터 어떻게 이익을 얻는지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그들을 정죄하지는 않는다. 예수는 그들이 알고 있건 그렇지 않건, 그런 체제로부터 이익을 얻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정죄했다. 무지는 변명이 될 수 없다.
오늘 본문을 읽는 독자들은 폭력과 억압이라는 현재의 체제에 그들 자신이 공모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심각하게 반성해야 한다. 그러나 반성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반성은 반드시 교회와 국가와 세계의 정치 경제적인 체제에 도전하는 영적인 실천에 참여하는 구체적이고 지속적인 행동으로 이어져야만 한다. 굶주린 사람들이 먹고 입을 것을 제공하는 것도 중요한 영적인 실천이지만, 그러나 교회는 이러한 실천을 프로그램 이상으로 보아야 한다. 교회는 이러한 실천들을 예배로부터 이어지는 삶 자체로 보아야만 한다. 뿐만 아니라 교회는 사회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일을 사회의 가장 우선적인 목적으로 여기도록 요청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교회가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보여주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의로운 정치를 형성하는 것이다.
설교적 관점
-이 본문을 가지고 설교할 때쯤이면 새로운 일꾼을 교회에서 선출하여 새해 교회를 위해 일하겠다는 다짐을 하게 될 때이다. 그래서 언뜻 보기에 성서정과의 이 본문은 설교자에게 기쁜 본문이 된다.[헌신을 요구하는 설교본문으로] 오늘날 교회에서처럼 예루살렘 성전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은 부유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 본문을 사용하여 교회에서 설교할 때 설교자는 도전을 받게 되는 데 그것은 이 본문이 “풍성한 가운데” (out of their abundance) 헌금을 하는 사람을 칭찬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설교자가 직면해야하는 더 심각한 문제가 본문에 있다. 그것은 본문이 예수께서는 마지막 동전 두 개를 성전에 내는 가난한 과부를 헌금의 모델로 제시하고 있는 가이다.
-이 과부는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앞으로 완전히 파괴될 기관에[성전] 내고 있다. 다음 구절에서 예수는 성전에 관해 “여기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 (막 13:2)라고 선포한다. 예루살렘 성전 운영에 대해 부분적으로 책임이 있다고 서기관들을 비난한 예수의 경고를 보면 예수는 분명하게 그들이 과부의 집을 삼킨다고 비난하였다. 이 총체적 종교체제는 변질되었다. 그 운영자들은 특혜를 받고 있고 이 체제는 더 이상 과부, 가난한자, 약한 자들을 보호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을 착취하며 유지한다.
-만일 설교자가 예수께서 이 가난한 과부를 종교체제에 의해 착취당해온 불쌍한 사람으로 지목했다고 설교하기로 결정한다면 그 설교자는 [교회-종교체제를 위해] 새로이 선출된 일꾼들을 기쁘게 하는 설교는 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설교는 안락하게 지내왔던 종교체제의 날이 계수되고 있음을[끝나가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날에 인자가 와서 이런 종교체제는 예루살렘 성전과 같이 완전히 파괴될 것이라고 선언할 것이다. 그 날 억압을 당하던 사람들이 종교체제로부터 해방될 것이라고 예수는 선언한다.
-만일 설교자가 예수께서 이 가난한 과부를 헌금생활의 모델로 지목했다고 설교하기로 결정한다면 설교는 어떻게 바뀔 것인가? 이 설교도 역시 새로운 일꾼들을 기쁘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과부의 경우 헌금의 대상인 성전은 여전히 비난받고 있기 때문이다.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되지 못해왔고 강도의 소굴이 되어버렸기 때문에(막 11:17) 파괴되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이 본문을 가지고 설교자가 교회라는 종교기관이 사람들로부터 특히 가난하고 약한 자의 헌금을 받을 가치가 있다고 설교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만일 설교자가 이 과부를 헌금생활의 모델로 여겼다는 입장을 고수하려면 몇 가지 주목해야할 점이 있다. 즉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 과부가 자신이 가진 모든 것-문자적으로 “자기 생활비 전부를” (the whole of her life, 막12:44) 바친 것에 주목하게 한다. 그녀는 생활비 전부를 오염되고 비난받고 있는 무언가에 [성전체제] 바치고 있다. 게다가 이 장면이 예수의 공생애의 마지막 장면이다. 이제 마가의 이야기에서 남아있는 것은 성전논쟁과 수난이야기 이다. 그러므로 이 과부는 예수가 하려는 것을 언뜻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즉 예수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오염되고 비난받아 마땅한 무언가를 위해 내어주는 길을 가고 있다. 그것은 모든 인간과 온 세상이다 (all of humanity, the whole world.)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교회를 자신에게로 부르고 이 가난한 과부와 헌금하는 태도에 주목하게 한다. 하지만 그런 선물을 받을 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들을 위해 가진 모든 것을 내어놓았다는 것은 오늘날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부름을 더욱 강조하게 된다. 미국 한 주류교회의 내규문서는 이렇게 선언한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들에게 부여한 새로운 세상을 위해 그리고 그 세상의 표지(sign)로 부름받았다” 어떻게 교회는 그런 표지가 될 것인가? 그 문서는 “치유하고 화해시키고 상처를 묶어줌으로써...
가난한 자, 병든 자, 고독한 자, 약한 자의 필요를 돌봄으로써...죄, 두려움, 억압, 굶주림, 불의로부터 사람들을 자유케 하는 투쟁에 개입함으로써... 고난당하는 자들을 섬기는데 교회 스스로를 내어줌으로써...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정의, 평화, 사랑을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와 함께함으로써 표징이 된다. 교회는 생명을 잃는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이 사명을 감당하도록 부름 받았다”라고
말한다.
이 가난한 과부는 자신이 가진 전부를 비난받아야 할 것을 위해 드린다. 이것이 예수께서 모든 교회를 향해 외치는 부름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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