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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 문화의 원류 원문보기 글쓴이: 솔롱고
제가 『대쥬신을 찾아서』에서 이미 상세히 해설해드렸다시피 까오리는 고구려, 고려, 코리아, 고려족, 고려인
등으로 끝없이 재생되고 부활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 까오리에서 바로 부여국이 나온 것입니다. 이후 부여는 까오리(코리)의 일부가 남하하여 형성되었고, 부여로
부터 고구려[까오리]가 성립되고 다시 백제(반도부여)가 성립되었으며 이것이 궁극적으로는 일본 열도로 이동하여
열도부여를 건설하게 됩니다.
이 같은 부여 - 고구려 - 백제(반도부여)의 친연성을 고증하는 많은 기록들이 보입니다.
백제 전문가 이도학 교수는 고구려와 백제의 국가적 기원에 대한 시기적인 기록을 다음과 같이 정리합니다.15)
① 3세기 후반 : "고구려는 부여의 별종이다(夫餘別種 : 『三國志』)"
② 5세기 초(414) : "옛적에 시조 추무왕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추무왕께서는 북부여에서 오셨다
(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 :『광개토왕릉비문』)"
③ 5세기 전반 : "추모성왕께서는 원래 북부여에서 오셨다(鄒牟聖王 元出北夫餘 :
『모두루 묘지』)"
④ 5세기 후반 : "고구려는 부여의 별종이다(夫餘別種 : 『後漢書』)"
⑤ 6세기 중엽 : "고구려는 부여에서 나왔으며 스스로 말하기를 선조는 주몽이라고 한다(出於夫餘
自言先祖朱蒙 : 『魏書』)"
⑥ 7세기 중엽(630년대) : "고구려는 본래 그 선조가 동명으로부터 비롯되었고 동명은 본래 북방
오랑캐인 고리국의 왕자였다(其先出自東明 東明本北夷櫜離王之子 :『梁書』)"
⑦ 618~628년 : 고구려는 그 선조가 부여에서 왔고 스스로 말하기를 시조는 주몽이라고 한다
(其先出於夫餘 自言始祖曰朱蒙 : 『周書』)"
⑧ 627~659년 : "고구려는 선조가 부여에서 나왔다(其先出夫餘 : 『北史』)"
⑨ 629~636년 : "고구려는 부여에서 나왔다(出自夫餘 :『隋書』)"
⑩ 10세기 중엽(945) : "고구려는 부여의 별종에서 나왔다(出自扶餘之別種也 : 『舊唐書』)"
⑪ 11세기 중엽(1044) : "고구려는 본래 부여의 별종이다(本扶餘別種也 : 『新唐書』)"
이상을 보면 고구려가 부여에서 나온 것은 분명합니다. 다음은 남부여(백제)의 경우를 보도록
합시다.16)
① 5세기 후반(472) :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국서에서) 저희는 근원이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습니다(『魏書』卷100 百濟傳)."
② 6세기 중엽 : "백제는 그 선조가 부여에서 나왔다(其先出自夫餘 :『魏書』)"
③ 7세기 중엽(630년대) : "백제는 그 선조가 동이족이며 삼한국에 있었다
(其先東夷有三韓國 :『梁書』)
④ 618~628년 : "백제는 그 선대가 대개 마한의 속국으로 부여의 별종이다. 구이라는 사람이 있어
처음 대방의 옛땅에 나라를 세웠다(其先蓋馬韓之屬國 夫餘之別種 … <중략> : 『周書』)
⑤ 627~649년 : "백제는 그 선조가 동이족이며 삼한국에 있었다(其先東夷有三韓國 : 『南史』)
⑥ 627~659년 : "백제는 그 선대가 대개 마한의 속국으로 고리국에서 나왔다
(蓋馬韓之屬國 出自索離國 :『北史』)"
⑦ 629~636년 : "백제의 선조들은 고구려로부터 나왔다(百濟之先 出自高麗國 : 『隋書』)"
⑧ 10세기 중엽(945) : "백제는 부여의 별종이다(夫餘之別種 : 『舊唐書』)"
⑨ 11세기 중엽(1044) : "백제는 부여의 별종이다(夫餘別種 :『新唐書』)"
이상을 보면 백제(남부여)도 분명하게 부여의 별종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다만 고구려와는 주체 세력이 다를
수가 있습니다. 즉 백제 왕성인 부여씨는 그 내력을 "그(백제) 세계(世系)는 고구려와 함께 부여(扶餘)에서 나온
까닭에 부여(扶餘)로써 그 씨(氏)를 삼았다"고 합니다.17) 이것은 왕성이 국호에서 비롯되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고구려 왕실의 경우도 고구려로 인하여 고(高)를 성씨로 삼았다고 합니다.
이상의 기록들을 통하여 우리는 두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남부여(백제 또는 반도부여)는 부여의 후예들
이며 4세기 중후반 백제 왕성이 부여씨(扶餘氏)였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구려의 건국에는 고씨가 중심이 되었
다는 것입니다. 즉 같은 부여족이라고 할지라도 부여와 고구려는 중심 세력이 좀 다르고 고구려 건국의 중심 세력
인 고씨가 부여의 주된 세력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참고로 기록들 가운데는 남부여왕(백제왕)인 위덕왕(夫餘昌 : 554~598)이 대적 중이던 고구려 장수와 통성명하는
가운데 "서로 성이 같다."라고 하는 대목도 있습니다.18)
그 말은 결국 고구려나 부여나 지배계층이 서로 비슷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죠. 물론 중심 세력들은 차이가 있겠지만
말입니다.
고구려나 남부여(백제 또는 반도부여)는 하나같이 동명묘(東明廟)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19)
고구려와 백제(남부여)는 그 나라를 실제로 세운 시조와는 달리 동명왕을 시조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즉 부여의 시조인 동명묘를 고구려와 남부여(백제) 모두 세우고 있으며 이에 두 나라의 왕들은 정기적
으로 참배하고 있습니다.
고구려의 경우 대무신왕 3년 동명왕묘를 건립한 기록이 보이는데 고구려가 시조묘를 건립한 기록은 없지만 시조
묘에 가서 참배한 기록은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역대 고구려왕들이 참배한 곳은 바로 동명묘로 간주해도 좋을 것입니다.20)
신뢰하기는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지만, 『삼국사기』의 「백제본기」의 온조왕편을 보면, 도읍을 정할 때 신하
들이 동서남북의 사방의 입지조건을 들어서 왕을 설득하고 있습니다.
즉 지배영역을 사방사비(四方四至)로 표현하는데 이 같은 사분관적(四分觀的) 의식은 부여인들의 공통된 특성
이라고 합니다. 오바야시타로오(大林太郞) 교수는 이 같은 사분관(四分觀)이 부여국의 독특한 우주론적 신성왕권의
구조를 암시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21)
이 부분에 대해서는 부여나 고구려나 모두 이동성이 강한 사회에서 나타나는 5부 조직으로 보는 관점도 강합니다.
즉 중앙과 4방을 합하여 5부로 족제조직이나 행정조직을 편성한다는 것이죠.
만약 이와 같이 고구려와 남부여가 공통의 근원에서 나왔다면 필히 나타날 수밖에 없는 문제는 바로
정통성 시비일 것입니다.
이것은 지속적으로 양국간의 집안싸움으로 발전할 것이고 실제로도 이들은 천년의 숙적이 되고 만 것입니다.
백제 관련 기록에서 매우 중요한 점 가운데 하나는 "백제는 그 선대가 대개 마한의 속국으로 고리국에서 나왔다
(蓋馬韓之屬國 出自索離國)"는 『주서(周書)』나 『북사(北史)』기록들입니다. 이 기록은 백제와 거의 동시대의
기록들이기 때문에 어떤 기록보다도 믿을만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의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백제가 부여계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마한의 속국이라는
점입니다. 마한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한반도 중남부 일대를 지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여는 송화강 유역의 북만주 일대에서 터전을 잡은 국가입니다.
따라서 부여계의 극히 일부가 한강 유역에서 자리를 잡으면서 마한의 영역에 들어갔다고 봐야 합니다.
이것은 『삼국지(三國志)』의 기록으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즉 3세기 후반에 씌어진 『삼국지』에서는 백제에 대한 이야기가 일체 없습니다.
3세기 후반까지 백제는 "사실상 없는 나라"이거나 고려할만한 국가 수준이 안 되는 나라라는 것입니다.
『삼국지』는 마한(馬韓)에는 여러 소국이 있다고 하면서 54개국들을 나열하였는데 이 가운데 백제국(伯濟國)이
나타나 있습니다. 당시 마한의 맹주는 목지국(目支國)으로 알려져 있으므로 한반도에 소재한 소국들 가운데 하나
에 불과한 백제국(伯濟國)은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따라서 3세기 이전, 더 정확하게는 고이왕 이전에 한반도 안에 존재했던 백제(伯濟)는 고려할 만한 수준이 못 되는
소국(小國)에 불과합니다. 문제는 이 백제가 부여계라는 것을 여러 사서들이 지적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서 한강유역의 마한연맹 지배하의 소국 백제가 있는데 이들은 부여계라는 것입니다.
참고로 부여계의 극히 일부가 한강 유역에서 자리를 잡으면서 마한의 영역에 들어가고 이로부터 성장하여 마한을
정복해 가는 과정은 『삼국사기』에 매우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 시기 온조왕의 기록들은 시기적으로
볼 때, 신뢰하기 어려운 기록들입니다.
왜냐하면 『삼국사기』에서 말하는 온조왕의 시대는 BC 1세기 후반이었고, 마한이 크게 타격을 받은 것은 245년경
으로 이 때, 위나라의 군현이 마한 지역을 군사적으로 크게 압도한 것으로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22) 시기적으로
무려 260년도 더 지난 일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소국 백제는 부여계 가운데 극히 일부가 한강유역에서 정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삼국사기』기록의
일부를 인정한다면, 이들이 온조계나 비류계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삼국사기』를 제외하면, 온조나 비류에 대해 알 수 있는 신뢰할만한 정사의 기록은 어디에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는 백제라는 나라의 실체를 다시한번 제대로 살펴봅시다.
필자 주
15) 이도학 『고구려와 백제의 출계 인식검토』(고구려 연구재단 게재논문).
16) 이도학, 앞의 논문.
17) 부여씨는 줄여서 여씨로 주로 기록되어 있다(其世系與高句麗同出扶餘 故以扶餘爲氏 :三國史
記 卷 23, 溫祚王 卽位年)
18) "今欲早知與吾可 以禮問答者姓名年位 餘昌對曰 姓是同姓 位是杆率 年二十九矣"(『日本書紀』
卷 19, 欽明 14年)
19)『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는 대무신왕 3년, 신대왕 3년, 고국천왕 2년, 동천왕 2년,
중천왕 13년, 고국원왕 2년, 안장왕 3년, 평원왕 2년, 영류왕 2년 에 시조묘
(始祖廟 : 시조를 모신 사당)에 대해 제사를 지내고 있다. 백제의 경우에도 온조왕 원년,
다루왕 2년, 분서왕 2년, 아신왕 2년, 전지왕 2년 등에 동명묘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
20) 이도학, 앞의 논문.
21) 大林太郞『邪馬臺國』(中央公論社 : 1977) 143~145쪽.
22) 『三國志』魏書 「東夷傳」韓.
"예수는 신화다"
제 4 장. 백제는 신화다
들어가는 말 : 역사가 된 신화
지난 2000년 『The Jesus Mysteries』라는 책이 출판되었습니다. 한국에서는 2002년 동아일보사에서 『예수는 신화다』로 번역하여 출판했습니다. 그러나 무슨 이유인지 이 책은 절판되고 말았습니다. 이 책은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뿌리를 흔드는 것이었습니다. 이 책에 따르면, 예수는 실존인물이 아니고 그 이전에 살았던 성인급 인물들의 '거룩하고 고상한 행적'들을 총동원하여 짜집기하여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하면서 그 증거를 일일이 들고 있습니다.
당시 로마인들은 유럽세계의 지배자였고 자기들의 모든 활동에 대해서 꼼꼼하게 기록을 남겼는데도 인간 예수에 대한 기록은 로마 문헌 어디에도 없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라는 이름은 당시에 지나치게 흔한 이름이었으며 유태인 역사가들의 저술 속에서도 역사적 예수에 대한 증거가 없다고 합니다.1)
쉽게 말해서 예수(Jesus Christ)의 이야기는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한 분의 메시아(Messiah)의 전기(傳記)가
아니라 이교도(Pagan)의 유서깊은 이야기들을 토대로 한 하나의 만들어진 '신화'라는 것입니다.2)
예를 들면, 오시리스-디오니소스는 12월 25일 동정녀에서 태어났으며 결혼식 때 물을 포도주로 바꾸었고,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려내었으며, 영성체 의식으로써 자신의 몸과 피를 나누어주었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으며 죽은 후 사흘만에 부활했다고 합니다. 어째 예수님의 일생과 완전히 동일한 듯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는 이교도들의 미스테리아가 유태인들에게 수용될 수 있도록 유태인 메시아로 변장한 오시리스-
디오니소스라는 것입니다.3)
그래서 철학자인 켈수스(Publius Juventius Celsus, 67?~130?)는 예수의 이야기가 실제로는 이교도 신화의
저급한 모방일 뿐이며 그리스도교인들이 그것을 새로운 계시인양 유포시키고 있다고 비난합니다.
켈수스는 "그리스도교의 수많은 아이디어는 고대 그리스인들에 의해 더 잘 그리고 더 오래전부터 표현되어왔다.
그러한 표현들의 이면에는 과거부터 이미 존재해온 고대의 교리가 또아리를 틀고 있다."라고 말합니다.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한 물고기의 상징은 피타고라스(Pythagoras, BC582?~BC497?) 학파의 상징이었던 바로 그 물고기라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가 죽은 지 나흘된 나자로(Lazarus)를 살려낸 것처럼, 엠페도클레스는 죽은 지 30일이 된 여자를 살려
내었다고 합니다.4)
고대 그리스에서 이런 신인(神人)을 믿기 시작한 것은 BC 6세기부터였다고 하는데 이런 류의 신앙을 그리스어로
미스테리아(Mysteria)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런 류의 이야기들은 헤로도토스나 플라톤의 저술에는 도처에 나옵
니다. 미스테리아에 대한 연구는 조지프 캠벨(1904~1987) 등의 연구에 의해 심도있게 밝혀집니다.5)
미스테리아의 핵심에는 죽어서 부활한 신인(神人)이 있고, 이 신인은 고대 이집트시대에는 오시리스(우시르),
고대그리스에는 디오니소스(우리에게는 술주정뱅이로 알려져 있죠), 소아시아에서는 아티스, 시리아에서는
아도니스, 이탈리아에서는 바쿠스, 페르시아에서는 미트라스로 불렸다고 합니다. 그리스도교에 따르면,
예수는 3월 23일 죽었고, 25일 부활했다고 하는데 아티스의 죽음과 부활의 날도 바로 이날이라고 합니다.
예수는 사흘만에 부활하는데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오시리스도 역시 사흘만에 부활했다고 합니다.6)
그러면 누가 왜, 이 같은 일을 하였을까요? 그것은 바로 아우구스투스의 제국과 같은 로마를 꿈꾸었던 콘스탄티
누스 황제(재위 : AD 306~337)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강력한 통치를 위해 그리고 자신의 제국이 영원무궁
할 수 있도록 하기위해 그리스도교를 이용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 책에 따르면, 성서(Bible)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철저히 국가적으로 기획되고 만들어진 국가 이데올로기
홍보용 책일 뿐이라는 것입니다[마치 소비에트러시아의 '스탈린주의(Stalinism)'나 북조선 인민공화국의 '주체사상'
처럼 말입니다].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의 주장인 하나의 제국, 하나의 황제를 확고히 하기 위해 하나의 신과 하나의
종교가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로마제국의 재건자로 성인처럼 알려져 있는 콘스탄티누스는 니케아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후 아내를 목졸라 죽였고 아들을 살해했습니다. 그는 임종할 때까지 일부러 세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잔혹한 행위를 계속하다가 최후의 순간에 세례를 받음으로써 천국의 자리를 보장받겠다는 생각에서 그렇게 했다고
하는군요.
『The Jesus Mysteries』에 따르면, 이 일을 주도한 사람은 이른바 교회박사인 유세비우스(AD 263~339)였고,
그는 이후 자기가 주도한 성서에 대해 조금이라도 어긋나거나 다른 주장을 펴는 모든 사람들을 제거하였다고 합
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기독교나 불교, 이슬람교 등과 같은 종교와도 다르지 않는 그리이스의 신앙체계를 거의
연예인 가십(gossip) 거리로 전락시켜버렸다는 것입니다[사실, 올림포스의 남신(男神)과 여신(女神)들이 변덕
스럽고 파벌적이며 온갖 엽색행각을 벌리는 것에 우리는 너무 익숙해있습니다].
유세비우스 덕분으로 예수의 기적은 신성함의 표시인 반면, 이교도의 기적은 악마의 활동이 되고 말았습니다.
켈수스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나님 맙소사, 똑같은 활동을 했는데도 어떤 사람은 신이고 그의 라이벌은 그저
'마법사'일 뿐이라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논법인가?"7)
마태, 마가, 누가 등의 복음서도 원래부터 특정한 저자가 있었던 것이 아니며, 문제가 되는 내용들을 끊임없이
수정·보완하여 오늘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무작위로 마가복음 10~11장을 뽑아 비교해보니 48 군데나
서로 달랐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역시 후대에 씌어진 것으로,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유창한 그리스어의
축어적인 장문의 설교는 유태인 목수의 아들이 구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8)
그러면서 『The Jesus Mysteries』는 초기 기독교의 최고 권위자 가운데 한 사람의 말을 의미있게 인용하고
있습니다.
"역사를 쓰는 자는 승리자들이다. 그들은 제멋대로 쓴다. 그러니 기독교의 기원에 대한 전통적 설명에서 자기
들은 정통이고 적들은 '이단'이라고 정의했다고 해서 놀랄 것은 없다. 나아가 그들은 자신들의 승리가 역사적으로
불가피했다고 ― 종교적 용어로 말해서 '성령의 인도'를 받은 것이었다고 ― 선전했다. 그들은 자기 만족을 위해서
라도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9)
필자 주
(1) Timothy Freke『The Jesus Mysteries(예수는 신화다)』(동아일보사 : 2002) 236~246쪽. 단 한 사람의 저서
(요세푸스)에 예수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이것 조차도 당대의 기록이 아니라고 한다. 그 동안의 연구에 따르면 이
기록은 후대에 추가된 것이라고 한다.
(2) Timothy Freke 앞의 책, 21쪽. 그리고 이교도(Pagan)란 원래 시골의 거주자를 경멸해서 부르는 말이었다.
그리스도교인들이 이 말을 사용한 것은 고대인들의 영적 신앙이 원시적인 시골의 미신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아냥
거리기 위해서였다고 한다(같은 책, 43쪽).
(3) Timothy Freke, 앞의 책, 12쪽. 357쪽.
(4) Timothy Freke, 앞의 책, 81쪽. 83쪽. 119쪽. 피타고라스는 희고 헐렁한 의상을 걸친 '방랑의 현자(賢者)'였
으며 사제이자 과학자였다. 피타고라스는 고대 이집트 신전에서 22년을 보내고 고대 이집트 미스테리아의 입문자
가 되었다. 피타고라스는 그리스로 돌아와 자기가 배운 지혜를 가르쳤고 기적을 행하여 죽은 자를 일으켜 세우
기도 했다(같은 책, 55쪽). 뿐만 아니라 피타고라스의 전기를 슨 이암블리코스(AD 250~325)에 따르면, 피타고라
스는 '사도들이 쉽게 건너갈 수 있도록 강과 바다의 물결을 잔잔케한 기적도 많았다'고 한다(같은 책, 80쪽).
예수의 12사도 역시 이스라엘의 12부족을 상징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황도(태양이 지나는 길)의
상징적인 언급이며 피타고라스 학파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이라고 한다(같은 책, 85쪽).
(5) Timothy Freke, 앞의 책, 62쪽.
(6) Timothy Freke, 앞의 책, 24쪽. 107쪽.
(7) Timothy Freke, 앞의 책, 84~85쪽.
(8) Timothy Freke, 앞의 책, 257~259쪽.
(9) Timothy Freke, 앞의 책, 37쪽.
백제의 신화
(1) 백제의 신화
반도쥬신(한국)의 사학계에서는 백제를 실체로 보고 있습니다. 반도 사학계에 따르면, 백제는 BC 18년경에 한강
유역에 건국하여 스스로 성장하다가 3세기 중엽 고이왕대에 이르러 연방제의 성격을 지닌 초기 고대국가를 성립
시키고 4세기 후반 근초고왕 때 중앙집권화에 성공하여 고대국가로 발전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대쥬신을 찾아서』를 통하여 반도 사학계가 말하는 백제는 역사적 근거가 없는 신화에 불과함을
강력하게 제기했습니다. 저는 만주지역에서 세력이 궤멸된 부여계가 남으로 이동하여 이전에 이미 한강 유역에
정착하고 있던 부여계 소국을 정벌하여 정착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부여계의 회복을 추구하다가 강력한 고구려의
남하로 인해 열도부여의 개척에 눈을 돌렸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이 점을 제대로 해명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반도와 열도간의 관계사에 대해서 거론할 예정입니다.
구체적으로 보면, 475년 개로왕의 피살로 백제는 사실상 멸망한 후 곤지왕자(곤지왕 : 개로왕의 아드님)를 중심
으로 한편으로는 반도부여의 재건에 다른 한편으로는 열도부여의 건설에 매진해온 것이 부여계의 역사였습니다.
이 점들을 앞으로 여러 장에 걸쳐 계속 밝혀갈 것입니다.
먼저 반도쥬신(한국) 사학계의 입장을 살펴봅시다.10)
2005년 현재 한국의 고등학교용 국사책에서는 "백제는 한강 유역의 토착세력과 고구려 계통의 유이민 세력의 결합
으로 성립되었는데(B.C. 18), 우수한 철기 문화를 보유한 유이민 집단이 지배층을 형성하였다.
백제는 한강 유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던 한의 군현을 막아내면서 성장하였다. 3세기 중엽 고이왕 때 한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중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정치 체제를 정비하였다. 이 무렵 백제는 관등제를 정비하고 관복제
를 도입하는 등 지배체제를 정비하여 중앙집권 국가의 토대를 형성하였다."라고 합니다.11)
이는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바탕을 두고서 쓴 기록인데 현대 반도쥬신 사학계의 입장을 서술한 것입니다.
초기에는 고구려 계통의 유이민이 내려와 건국한 소국 백제가 이후에는 큰 외부세력의 유입이 없이 스스로 성장
하여 대국 백제가 되는 것으로 분명히 서술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각종 세력들이 복잡하게 교차되는 한반도의
중앙부에 위치하면서 급변하는 국제정세의 변화 속에서도 굳건하게 자력갱생(自力更生)하여 중견국가로 성장
한다는 식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대학용 교재에서는 "마한의 한 군장국가인 백제국(百濟國)으로부터 발전하여 기원 전후에 초기
국가를 형성한 백제는 3세기 중엽에 이르러 고대국가를 이룩하였다. … 3세기 중엽 고이왕(古爾王 : 234~286) 대에
이르면 대외적으로 정복사업을 활발히 하고 대내적으로 국가체제를 정비하여 고대국가로 발전하였다. … 이에
백제는 고이왕 때에 이르러 광대한 정복국가를 이루고 고대국가 체제를 완비하였던 것이다.
『주서(周書)』나 『수서(隋書)』에서 백제의 시조를 구이(仇台)라고 하는데 이 구이는 바로 이 고이(古爾)에 해당
하는 것으로 고이왕대에 백제의 시조적인 발전이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12)라고 하여 이를 부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는 지금까지 진행되고 있는 반도 사학계의 백제사 건국과정에 대한 논의들을 좀더 깊이 살펴봅시다.
반도쥬신 사학계는 "후한의 환제·영제(147~189) 말년에 한(韓)과 예(濊)가 강성하여 한나라의 군현이 이를 능히
제압하지 못하자 많은 백성들이 한국(韓國)으로 흘러들어갔다."는 『삼국지』의 기록을 근거로 하여, 한강 하류
지역의 백제를 중심으로 소국간의 연맹이 이루어지고 이에 따라 국호도 십제(十濟)에서 백제(百濟)로 바뀌면서
한강 이북에서 한강 이남으로 중심지의 이동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즉 이 시기는 백제의 초고왕 시기인데
당시 낙랑군 관할 하의 많은 백성들이 마한의 북부지역으로 유입됨으로써 심각한 정세의 변동이 있었고,
이를 계기로 백제가 성장하게 되었다는 논리입니다.13)
그런데 문제는 『삼국사기』의 초고왕대의 기록이라는 것은 신뢰할 수가 없는데다가 단순히 많은 백성들이 한국
으로 이동했다는 사실이 바로 백제의 성장을 가져고 왔다는 논리는 이해가 안되지요.
아무런 근거도 없이 추정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반도의 사학계는 『삼국사기』를 근거로 하여, 백제는 한강유역을 매개로 하여 미추홀의 비류집단과 지역
연맹체를 형성하고 맹주국의 지위를 차지하여 세력을 키웠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점차 마한 연맹체의 맹주권에
도전하려했다고 합니다. 그 기회가 된 것이 245년 한(韓) 세력과 중국 군현과의 싸움이라고 합니다.
즉 위나라의 군현이 진한 8국의 교섭 창구를 대방군에서 낙랑군으로 바꾸려 한 것이 빌미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 싸움에서 마한은 대방군의 기리영(崎離營)을 공격하였고 대방태수인 궁준(弓遵)을 전사시키는 등 승리를 거두
었지만 결국은 마한의 패배로 끝이 나서 이 전쟁을 주도한 목지국의 위상이 약화되어 그 틈새를 타고 백제가
목지국을 멸망시키고 새로운 맹주국으로 등장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기를 고이왕대로 추정합니다.14) 그러면서도 "백제는 비록 마한연맹체의 맹주국이 되었지만 『진서』
「마한전」에서 보듯이 서진(西晉)과 교섭할 때는 마한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이는 3세기 말까지 백제가 아직 연맹체적인 형태를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고 합니다.15)
여러분은 이해가 되십니까? 도대체 위에서 말하는 논리 가운데 마한의 패배로 인하여 백제가 성장했다는 기록은
당대의 사서 가운데는 어디에도 없는데도 이런 식으로 추정합니다.
특히 백제는 위치로 보면 대방의 공격의 최전선에 있기 때문에 전쟁의 피해를 가장 크게 입을 수 밖에 없는 지역
입니다. 오히려 마한의 맹주국은 최전선의 소국백제를 자기의 안위를 위해 이용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마치
장제스(蔣介石)가 장시에량(張學良)을 이용했듯이 말입니다]. 또한 백제국이 한(韓)의 맹주가 되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지요. 사서에는 없는 기록입니다.
반도 사학계는 "초기의 백제 역사는 실제로 마한사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확실히 마한과 백제는 동일체(同一體)
에서 점진적인 성장과정을 보여주고 있으나 다만 어떤 선에서 분명하게 끊을 수 있는가는 역사학계의 오랜 숙제로
남아있다. 천관우는 어디까지가 죽순(마한)이고 어디부터가 대나무(백제)인가 하는 것처럼 매우 어려운 으로 매우
풀기 어려운 문제라고 비유한 바 있다."고 결론내리고 있습니다.16)
우리가 대국으로 인식하고 있는 백제의 역사를 마한사의 일부로 보고 있다는 그 자체가 신화(神話)지요.
부여사의 흐름속에서만 파악될 수 있지요. 그리고 반도의 사학계는 온조의 백제가 한강변에서 자생하여 반도의
서남단을 지배하는 거대세력이 되었다는 식으로 해석하는데 그것은 역사 패러다임의 가장 큰 오류 가운데 하나입
니다.
반도 사학계가 이른 바 백제(百濟)의 전신(前身)을 『삼국지』에 보이는 미미한 소국 백제국(伯濟國)17)으로 보는
것은 『양서(梁書)』부터였습니다. 이 백제(伯濟)가 한강(漢江) 하류에 있으면서 중국 남북조(南北朝) 시대의 등장
으로 위기를 느껴 한편으로는 자발적인 연횡(連橫)·합종(合縱)하기도 하고 주변 소국(小國)들을 통합하여 4세기
전반부터 중엽에 걸쳐 마한(馬韓) 전역을 대표하는 국가로 성장하고 국호도 백제(百濟)로 고쳤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증거가 될만한 사료는 『삼국사기』를 제외하면, 어디에도 없습니다.
아무리 고대라 해도 "일단, 무조건 쓰고보자"는 식이 되면 곤란합니다. 이 같은 서술방식은 『삼국사기』나 『일본
서기』나 다를 바 없지요.
이런 서술 방식이 백제의 역사, 나아가 부여의 역사를 암흑으로 몰고간 계기가 된 것입니다. 반도 사학계의 이 같은
연구 태도는 백제의 역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부여계의 흐름을 종합적으로 파악하지 못한 소치입니다.
문제는 이것을 고증할만한 어떤 증거도 없는데도 이것을 하나의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철저히 증거 중심의 고증을 강조하는 반도 사학계가 정작 민족사의 가장 중요한 고리 중의
하나에 대하여 침묵하는 까닭을 알 길이 없군요.
소국(小國) 들간의 연횡합종은 쉽게 이루어질 사안이 아닙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발적인 연횡합종의 경우가 나타나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가야의 경우에는 주변의 매우
강압적이고 위험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통일된 왕국을 구성하지 못하고 각개 격파되어 역사에서 사라졌습니다.
국제정치란 과거나 지금이나 냉엄한 것입니다.
대개는 외부의 압도적이고 강력한 힘에 의해 영역이 결정되고 있습니다. 중국의 경우에도 춘추전국 시대 당시
국가가 서로 합쳐진 예는 없습니다. 특히 전국시대 당시 강력한 진(秦) 나라의 공격이 바로 코앞에 있어도 국가가
서로 연합하면서 거대 세력화 된 예는 없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백제'가 3세기까지 정사에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대표적인 식민사학자인 스에마쓰 야스
카즈(末松保和)는 "백제의 이름이 중국에 처음 보이는 것은 동진(東晋)의 영화(永和) 2년(346년) 경이므로 백제국
의 성립은 4세기 전반이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서는 백제의 시조 온조왕의 즉위 원년이 전한(前漢)의 성제(成帝) 홍가(鴻嘉) 3년(BC 18)
으로 되어있다. 이 개국 기년은 백제의 독자적인 기년으로 전해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고구려의 기년에서 만들어진
책상 위에서의 조작이다."라고 하고18) "13대 근초고왕, 14대 근구수왕의 '근(近)'자는 5대 초고왕, 6대 구수왕과
구별하기 위하여 관(冠)한 것이고 초고왕과 구수왕은 역사상 실재한 왕이 아니다."라고 주장합니다.19)
이 말을 제대로 반박할 만한 반도 사학자는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이제 이 점들을 하나씩 살펴보면서 베일에 쌓인 백제 건국의 비밀을 풀어갑시다. 북위의 사서인 『위서(魏書)』
이전의 중국의 역사서, 예를 들면 『한서(漢書)』『후한서(後漢書)』『진서(晋書)』『삼국지』등의 동이전(東夷傳)
에 보면 백제(百濟)가 나오지 않고 부여(夫餘)라고만 나오고 있습니다.
중국의 여러 역사서들 가운데 백제와 동시대에 가까운 기록들인 『한서』『후한서』『삼국지』『진서』등에는 백제
(百濟)라는 말이 없습니다. 반도 사학계에서 주장하는 대로라면 건국한 지 이미 2백년이나 지난 나라를 기록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중국 사서들 가운데 백제가 처음으로 제대로 등장하는 사서가 바로 남북조 시대 『송서(宋書)』입니다. 송나라
(420~478)는 사마씨의 동진(東晋)을 이은 한족의 왕조로 『송서』는 머릿글(自序)에서 보면, 제(齊)의 영명(永明)
5년(487)에 칙명을 받아 편찬에 착수하여 이듬해에 본기와 열전이 완성되었고 후에 지(志)가 추가되어 간행된 것
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송서』는 송나라가 멸망한 이후 바로 편찬되었기 때문에 이 책에 대한 신뢰도
가 높은 것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송서』를 포함하여 『남제서(南齊書)』『위서(魏書)』등에는 백제가 등장합니다.
물론 『송서』 이전에 백제가 등장하는 경우가 있지만 국체를 가진 나라로 열전에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이처럼 『송서』와 같이 열전(列傳)의 하나의 항목이 아니라 '백제'라는 말 자체가 처음 등장한 것은 4세기 중반
이후 입니다. 즉 반도 사학계에서 말하는 대로라면 백제가 건국한 지 무려 360년 이상이 되어서야 기록에 등장한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보면, 『진서(晋書)』에 "342년 구려와 백제와 선비의 우문, 단부 등의 사람들이 모두 병력
들을 옮겨서"라든가20) "372년 춘정월 백제와 임읍왕(林邑王)이 각각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라는 기록이
보입니다.21)
이들 기록은 백제라는 항목이 없고 극히 단편적인 사실만 기록되어있는데 그것도 대개는 4세기 중후반이라는 것
입니다.22)
『송서』에 백제라는 이름의 국체(國體)가 제대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적어도 5세기 중엽까지도 백제보다는
부여로 인식했다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백제가 현실적으로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미미한 소국이었다는 말
입니다. 그리고 6세기에는 바로 남부여(538 : 성왕 16년)로 바뀌고 맙니다.
일부에서는 중국 측의 사관의 나태함이나 편견 또는 변방민의 역사이니 대수롭지 않게 묘사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잘못입니다. 이 시기에 이미 역사학이나 사관의 기록 체제가 많이 발달해 있는 상태인데도 (『삼국사기』에 의거
한다면), BC 18년에 건국하여 무려 3~4백년 건재한 나라에 대하여 일언반구도 없다는 것은 그 나라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특히 『후한서』는 남북조 시대에 편찬되었고 『진서』는 당나라 때 편찬되었으니 백제의
건국 기점으로 본다면 무려 8백년이 지나서 편찬된 책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백제를 건국했다는 말보다는 부여의
분국이 끊임없이 만들어져서 원래의 부여가 멸망하더라도 그 부여의 불씨가 꺼지지 않도록 했다고 해야 맞는 말
입니다.
여러 사서들은 백제를 건국한 지역을 대방(帶方) 지역 즉 울구태의 남부여(요동부여)를 지목하고 있습니다.
『북사(北史)』에는 "백제는 처음으로 그 나라를 대방의 옛 땅에 세웠다"23)고 하고 『수서(隋書)』에도 이 기록은
그대로 있습니다.24) 여기서 말하는 대방은 황해도 지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요동 만주 지역을 의미합니다.
이 점은『대쥬신을 찾아서』2 (2006) 16장에서 이미 충분히 고증하였으므로 생략합니다.
백제의 시조를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필자는 『대쥬신을 찾아서』(2006)를 통해서 백제의 시조가 부여왕
울구태(蔚仇台)임을 충분히 고증하였습니다.
즉 백제의 시조가 요동·만주 땅의 부여왕 울구태라는 것은 백제의 건국이 한반도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말입
니다. 그 동안 반도의 사학계가 한반도에서 온조·비류가 백제를 건국해서 남북조의 위기 상황에서 서로 연횡 합종
하여 강력한 백제로 거듭났다는 논리는 철저히 사실을 무시하고 신화적인 요소만으로 역사를 왜곡했다는 것을
입증합니다. 물론 이 왜곡의 주체는 『삼국사기』의 저자인 김부식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아마도 그 이전의 백제왕조가 1차적으로 서술한 사료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큽니다.
다시 말해서 고주몽의 아들들이 내려와 한강유역에 백제를 건국하여 대국 백제를 건설했다는 것은 확실히 신화
라는 것입니다(고주몽의 실존성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거론할 것입니다). 사실이 아니라는 얘기지요.
요동 만주 지역에서 부여왕 울구태가 백제를 건국했다는 것은 부여왕이 요동 만주 지역에서 보다 강력한 새로운
국가를 준비했다가 국가적 위기를 맞아 한강으로 이동해왔음을 보여주는 주요한 단서가 됩니다.
결국 만주의 부여계가 망국적 상황을 피해 한반도로 이주해온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망국적 상황이란 제가
『대쥬신을 찾아서』(2006)를 통해 이미 고증했듯이 위나라에 의한 요동정벌을 말합니다. 만주 부여계의 한반도
에로의 이동은 한강유역에 선착한 부여계와 무관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따라서 백제의 시조에 대해서도 울구태(蔚仇台)라고 새롭게 볼 필요도 없이 동명(東明)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합
니다. 왜냐하면 백제는 존재하지 않았고 부여계인데다 울구태는 부여왕이므로 '부여의 시조 = 백제의 시조'이기
때문입니다.
『삼국사기』「백제본기」에서도 일관되게 나타나는 한 가지는 백제의 모든 왕들이 하나같이 시조 동명왕 사당
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는 것입니다(설령 중시조가 있다고 해도, 그 중시조는 시조에 제사를 지낼 것이 아닙니까?
중시조에 대한 제사는 세월이 한참 흐른 후에 그 후손들이 지내는 제사지요).
즉 부여의 시조와 백제의 시조가 완전히 같지요. 다만 그 중시조(中始祖)는 울구태이며 반도에 일찍 남하했던
무리들이 온조와 비류라는 것이고 이들은 후일 요동과 만주지역의 부여세력과 연합하여 부여계의 국가로 다시
태어나는데 그 이름이 백제였다는 말입니다. 아마도 만주나 요동 지역으로부터 이주하는 사람들과 토착민 사이의
관계를 원활히 하고 덕업(德業 : 왕업)을 일신한다는 의미에서 백제(伯濟)라는 말을 사용하되 좀 변경된 이름인
백제(百濟)를 사용한 듯합니다.
그러나 이 국호도 6세기에 들어서 남부여(538)로 다시 바뀌어 원래로 돌아갑니다. 결국 백제라는 용어가 국제적
으로 사용되었다면 그것은 아마 5세기 중엽에서 6세기 중엽까지 많아도 1세기 남짓할 것입니다. 참고로 만주지역
의 부여가 완전히 역사의 무대에 사라진 것은 494년입니다. 이제 공식적으로 부여의 정통은 반도로 이전되게 됩
니다.
부여계가 백제라는 가면을 벗어버리고 민족의 원래 이름으로 돌아가자는 성왕의 부여 중흥의 논리는 결국 민족적
정체성을 강화하는 이데올로기적 신념에 의한 것입니다. 성왕은 백제를 버리고 부여를 선택했으며 그 부여를 강화
하기 위해 불교를 결합시킵니다. 이로써 쥬신의 역사상 쥬신의 뿌리를 유지하면서 가장 세련된 국가 이데올로기로
무장된 문화국가가 탄생하게 된 것이고 이것은 이내 열도로 연장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백제라는 말을 사용할
필요도 없고 반도부여(백제)라고 부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요동만주의 부여계가 한강으로 이주하여 한강유역에 이미 정착했던 약소한 온조계를 정복하는 것 역시 평화적인
방식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한사람의 몸에서 빼낸 혈액도 후일 수혈을 받게되면 몸이 이를 거부하는 현상이 생기
듯이 '권력과 생존'이라는 문제는 형제라고 예외일 수만은 없습니다.
다만 강력하고 압도적인 무력을 지닌 채 남하하였기 때문에 이 과정이 매우 신속하게 이루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요동의 부여계는 세련되고 체계적인 한족(漢族)의 행정원리나 사회구성의 운영원리를 깊이 터득한 사람들
이기 때문에 한강 유역의 소수 부여계를 제압하고 그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주변을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지배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삼국지』「공손도전」에 따르면 공손씨와 부여계는 서로 연합하여 중원 정벌을 도모하기도
할 정도로 포부가 큰 사람들이었습니다.
필자 주
(10) 이 내용은 김운회『대쥬신을 찾아서』(해냄 : 2006) 48~85쪽 참고.
(11) 국사편찬위원회.『국사』(교육인적 자원부 : 2005)
(12) 변태섭 『한국사통론』(삼영사 : 2001) 79쪽.
(13) 백제문화사대계 연구총서 1 『백제사 총론』(충남역사문화연구원 : 2007) 16쪽.
(14) 백제문화사대계 연구총서 1 , 앞의 책, 62쪽.
(15) 백제문화사대계 연구총서 1 , 앞의 책, 64쪽.
(16) 백제문화사대계 연구총서 1 , 앞의 책, 34쪽.
(17) 『三國志』「東夷傳」韓傳
(18) 末松保和『日本書紀上朝鮮史關係』(岩波書店 : 1967)
(19) 末松保和『任那興亡史』(1956) 58쪽.
(20) "句麗、百濟及宇文、段部之人,皆兵勢所徙,非如中國慕義而至,咸有思歸之心. 今戶垂十萬,狹湊都城,恐方將爲國家深害,宜分其兄弟宗屬,徙于西境諸城,撫之以恩,檢之以法,使不得散在居人,知國之虛實."(『晋書』券109「慕容皝載記」)
(21) "二年春正月辛丑, 百濟、林邑王各遣使貢方物" (『晋書』卷9 帝紀第9 )
(22) 『진서』는 646년 방현령(房玄齡) 등이 당태종의 칙령을 받들어 편찬한 정사로 진나라를 기점으로 보면 300여년이 지나긴 했으나 당시에 남아있던 많은 『진서(晋書)』들을 총 정리한 결과물이다.
(23) "始立國于帶方故地"(『北史』「百濟傳」)
(24) "始立其國帶方故地"(『隋書』「百濟傳」)
일본(日本), 왜(倭)를 정벌하다.
(2) 일본(日本), 왜(倭)를 정벌하다
그러면 당시 중원(中原)에서는 쥬신과 부여를 어떤 방식으로 계통화하고 있는 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즉 쥬신 - 부여 - 까오리 등이 항목별로 어떤 식으로 사서에서 묘사하고 있는 지 살펴보고 가야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인 사서의 신뢰도를 볼 때는 『한서(漢書)』를 기점으로 하지만, 일단 사마천의 『사기(史記)』부터
한국인들과 관련된 부분의 항목이 어떤 식으로 구성되었는 지를 부여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사기』― 朝鮮列傳(조선열전)
②『한서』― 朝鮮傳(조선전)
③『후한서』― 동이열전 : 부여, 읍루, 고구려, 동옥저, 예, 한, 왜
먼저 한나라[전한(前漢)] 때까지는 요동, 만주, 한반도 일대를 조선(쥬신)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후한서에 이르러서야 구체적으로 분류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대체로 만주와 요동지역의 민족을
조선과 결부시켜서 이해하다가 점차적으로 세밀하게 분류하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동이(東夷)라는
말이 후한대부터 널리 쓰이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③『후한서』― 동이열전 : 부여, 읍루, 고구려, 동옥저, 예, 한, 왜
④『삼국지』― 위서동이전 : 부여, 고구려, 동옥저, 읍루, 예, 한, 왜인
⑤『진서(晉書 : 265~420)』― 동이열전 : 부여, 마한, 진한, 숙신, 왜인
『위서(魏書 : 386~534)』― 동이열전 : 고구려, 백제, 물길
진나라 때는 숙신(肅愼)이 새로이 추가되고 고구려, 동옥저, 읍루, 예 등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 대신 『진서』
에는 요동·만주·몽골 지역의 사람들을 동호(오환[오랑, 오롼], 선비)로 부르고 있습니다.
주의할 점은 이들 예맥이 갑자기 이 지역에서 사라지고 한반도로 다 내려간 것이 아니라 원래 요동·만주·몽골
지역에 살던 사람들을 부르는 이름이 바뀐 것뿐이라는 사실입니다.
다만 고구려는 국체가 분명한 나라이므로 동이에서 빠진 것이지, 사멸해서 동이에서 제외된 것은 아니지요.
특히 주의할 점은 3세기 말에서 5세기초의 역사를 기록한 『진서(晋書)』에는 부여국(夫餘國)이 상세히 정리된
반면, 백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또 특이한 점은 『진서』에서는 북적(北狄)은 흉노로 압축되고 동이는 부여, 마한, 진한, 숙신, 왜인 등으로 서술
하고 있습니다. 『진서』에서는 태강(太康) 6년 즉 296년 모용외(慕容廆)의 침입을 받고 그 왕 의려(依慮)가 자살
하였고 그 자제들이 옥저로 달아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25)
이제 부여는 존립하기 힘든 상황이 오고 있습니다. 설령 부여가 존립한다하더라도 거의 명목뿐일 정도의 국가로
전락하였습니다.
⑥『송서(宋書 : 420~479)』― 夷蠻列傳(이만열전) : 고구려, 백제, 왜국
⑦『남제서(南齊書 : 479~502)』― 동남이열전 : 고구려, 백제, 가라, 왜국
『위서(魏書 : 386~534)』― 동이열전 : 고구려, 백제, 물길
『송서(宋書)』에 이르러 비로소 백제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제 부여는 역사상에 사라졌음을 알 수 있고 숙신은
국가명이라기 보다는 종족의 명칭으로 명맥을 유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가야가 새로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가야는 한반도 남단의 소국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서에 기록이
될 정도로 당시의 사서들은 신뢰할만한 수준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이들 사서의 기록자들이 그동안 백제를
기록하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가 아는 대국 백제가 없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죠.
참고로 이 시대에 이르기까지 신라(新羅)는 등장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 시기부터는 부여가 없어진 자리에 백제가 이를 대신하고 있고 그 지역적인 위치도 만주와 요동에서부터 한반도
남부로 이전되고 있습니다.
이 시기의 왜(倭)는 이른 바 왜5왕(倭五王)의 시기로 왜왕들은 끊임없이 남조 정부로부터 정치적인 작호를 요구
하고 있습니다. 즉 421년(영초 2년) , 443년, 451년, 462년 등에 걸쳐 한반도 남부의 지배권을 의미하는 작호를
요구하고 있던 시기입니다. 이 부분은 다른 장에서 상세히 거론할 것입니다.
⑧『양서(梁書 : 502~557)』― 동이열전 : 고구려, 백제, 신라, 왜국
『위서(魏書 : 386~534)』― 동이열전 : 고구려, 백제, 물길
이 시기에 물길(勿吉 : 와지)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라가 처음으로 『양서』에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봐서
적어도 5세기말까지 신라는 고대국가를 제대로 갖춘 상태는 아니었다는 추정이 가능합니다.
그러니까 BC 57년에 건국했다는 『삼국사기』의 신라는 확실히 신화에 불과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물왕(356~402) 이전의 경우는 『삼국사기』를 제외하고는 역사적 사실로 간주할만한 다른 증거들이 없는 상태
입니다.
⑨『주서(周書 : 557~581)』― 異域列傳(이역열전) : 고구려, 백제
『남사(南史 : 420~589)』― 동이열전 : 고구려, 백제, 신라, 왜국
『북사(北史 : 386~618)』― 열전 : 고구려, 백제, 신라, 물길, 왜국26)
『남사』는 송(宋 : 420~479) ·제(齊 : 479~502) ·양(梁 : 502~557) ·진(陳 : 557∼589) 등의 네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것입니다. 이 책은 남조사(南朝史)를 대표하는 책으로 동이가 고구려·백제·신라로 굳어지고 있습니다.
『북사』는 북조(北朝), 즉 위(魏)·북제(北齊)·주(周)·수(隋) 4왕조 242년간의 역사서를 말하는데 백제와 관련해서는
고구려, 신라, 왜 등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⑩『수서(隋書 : 589~618)』― 동이열전 : 고구려, 백제, 신라, 말갈, 왜국
⑪『구당서(舊唐書 : 618~907)』― 동이열전 : 고구려, 백제, 신라, 왜국·일본
北狄列傳(북적열전) : 말갈, 발해말갈
『신당서(新唐書 : 618~907)』― 동이열전 : 고구려, 백제, 신라, 일본
북적열전 : 흑수말갈, 발해
이제 처음으로 일본(日本)이 열전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구당서』에서 나타나는 기록은 우리의 상식과 완전히 벗어납니다.
즉 『구당서』에는 일본도 나오고 왜국도 나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앞으로 상세히 거론할 과제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초기에는 왜(倭)와 일본이 동시에 등장하다가
점차적으로 일본만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일본(부여계)이 왜(가야계)를 통합한 것으로 파악됩니다.
일본이 등장하는 것은 『구당서』『신당서』이후로 7세기 경 또는 8세기경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수서』에는 607년 왜왕은 사신을 보냈는데 그 국서에 "해 뜨는 곳의 천자(東天皇)가 해지는 곳의 천자(西皇帝)
에게 글을 보내는데 그 동안 별일이 없는가?(無恙)"라는 표현27)에 대하여,
수나라 양제는 분노하여 이러한 서신을 다시는 보내지 말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28)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표현은 바로 한나라 문제(文帝 : BC 180~157) 때 흉노의 텡그리고두[天子 흔히 말하는 선우]이 한나라 황제에
보낸 편지 글과 매우 유사합니다. 한번 보시죠.
"하늘과 땅이 생기는 이 곳, 해와 달이 있는 곳인 흉노(先쥬신 : Pre-Jushin)의 천자(대단군?), 한의 황제에게
묻노니 그 동안 별일이 없었는가?(無恙)"
이 편지는 마치 황제가 어느 식민지의 총독에게 보내는 편지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편지는 목간(木簡 : 종이
대신 사용, 당시에는 종이가 없었음)도 한나라 황제가 쓰던 목간보다도 큰 것을 사용하고 봉인(封印)도 모두 더
넓고 길게 하여 한(漢) 나라 황제를 하대(下待)하여 위엄을 보였습니다.
사마천의 『사기』에서는 이런 언사를 망언(妄言)이라고 하고 있지요.
일본에서 보낸 국서가 흉노의 것을 참고한 것인지는 분명하지는 않습니다만 어쨌든 중원과 대등하다는 국가적
이데올로기를 가졌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신라 문무왕 10년(670) 왜가 해 뜨는 곳
가까이 있기 때문에 일본(日本)이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다시 『구당서』로 돌아갑시다. 『구당서』에는 "일본이 왜국을 병합했다."는 것입니다.
반도 사학계의 시각으로만 보면 '왜 = 일본'인데 어떻게 이런 논리가 성립하는지 이해가 안되지요?
분명한 것은 왜가 반드시 일본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보시겠지만 왜는 산동 - 요동 - 한반도
- 일본 규슈 등지에 이르는 지역에 광범위하게 거주하는 한국인들로 연안 또는 도서 지역에 주로 거주하는 사람
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당서』에서 왜국은 옛날 왜로국(倭奴國)이었는데 신라의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 있으며 성곽이 없고 풀로
집을 짓고 사면이 적은 섬으로 50여개의 나라가 있었다고 합니다.29)
그러면 이 왜국을 병합한 일본(日本)이 누구인가 하는 점이 문제의 관건이 되겠죠?
저는 이를 부여계라고 보고 있습니다. 먼저 일본이라는 명칭 자체가 한반도 거주민을 의미할 수 밖에 없죠.
즉 일본은 '해 뜨는 곳'이라는 의미인데, 일본열도 내에서 일본이라고 부르기는 어렵습니다.
일본열도에서 '해 뜨는 곳'은 태평양 바다 한가운데 일 것이고 한반도에서 봐야 열도가 '해 뜨는 곳[日本]'이 될
수 있습니다. 또 이 말은 불(Fire) 즉 부여의 또 다른 표현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구당서』에는 "일본은 왜국의 하나로 나라가 태양이 뜨는 곳에 있다하여 일본으로 불렀다.
또는 말하기를 왜국 스스로가 그 이름이 우아하지 못하므로 일본으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혹은 이르기를 '일본은 원래 소국이었는데 왜국을 병합하였다'라고 하였다.
그 나라의 경계는 동서남북으로 각 수천 리였으며 서남쪽으로 바다에 이르며 동북으로는 큰 산들이 경계를 하고
있고, 동북의 산 밖으로는 털이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30)
앞으로 충분히 거론하겠지만, 『구당서』에 나타나는 이 일본을 부여계의 열도 진출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위치에 대하여 "서남쪽으로 바다에 이른다."라고 하는데 이러한 표현은 현재의 교토(京都)나
오사카(大阪) 지역이 아니면 할 수 없는 표현입니다.
또한 현재의 히다(飛) 산맥, 아카이시(赤石) 산맥 등을 넘으면, 모인(毛人) 즉 아이누가 살고 있기 때문에 현재의
간사이(關西) 지역에서 서남쪽이 바다라고 할 수 있는 지역은 교토(京都), 나라(奈良) 등 과거 야마토를 건설한
부여계의 중심지들 뿐입니다. 따라서 위의 기록은 부여계의 열도 근거지를 중심으로 서술된 것임을 알 수 있습
니다.
이상으로 우리는 부여, 백제, 왜, 일본을 정사(正史)들의 열전의 항목들을 중심으로 살펴보았습니다. 특이한 사실
로는 일본이 왜와는 다른 존재라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게 되었군요.
이제는 이 비밀스럽고 안개 속에 있는 백제라는 나라의 이름을 한 번 살펴보고 넘어갑시다.
필자 주
(25) 武帝時, 頻來朝貢, 至太康六年, 為慕容廆所襲破, 其王依慮自殺, 子弟走保沃沮.(『晋書』東夷列傳 夫餘)
(26) 『북사(386~618)』관련 부분은 列傳第八十一 僭偽附庸(序言 夏赫連氏 燕慕容氏 後秦姚氏 北燕馮氏 西秦乞伏氏 北涼沮渠氏 後梁蕭氏) 卷九十四 列傳第八十二 卷九十三(序言 高麗 百濟 耽牟羅國 新羅 勿吉 奚 契丹 室韋 豆莫婁 地豆幹 烏洛侯 流求 倭) 등이다.
(27) 참고로 이 기록은 『일본서기』 스이꼬(推古) 천황 16년(608)에 나온다. 문헌상으로 천황이라는 용어가 사용된 최고의 것이라고 한다.
(28) "日出處, 天子致書, 日沒處, 天子無恙云云.」帝覽之不悅, 謂鴻卿曰:「蠻書有無禮者, 勿復以聞."(『隋書』倭國傳)
(29) 倭國者, 古倭奴國也. 去京師一萬四千裏, 在新羅東南大海中. 依山島而居, 東西五月行, 南北三月行. 世與中國通. 其國, 居無城郭, 以木爲柵, 以草爲屋. 四面小島五十餘國(『舊唐書』「東夷列傳」倭國)
(30) 日本國者, 倭國之別種也. 以其國在日邊, 故以日本爲名. 或曰 : 倭國自惡其名不雅, 改爲日本. 或雲 : 日本舊小國, 倂倭國之地. 其人入朝者, 多自矜大, 不以實對, 故中國疑焉. 又雲 : 其國界東西南北各數千裏, 西界·南界鹹至大海, 東界·北界有大山爲限, 山外卽毛人之國(『舊唐書』「東夷列傳」日本)
(김운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