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주로 알라딘 중고서점이나 신촌 헌책방에 가다 지난 주말 처음 청계천 헌책방 거리에 갔다. 찾고보니 유명한 광장시장 바로 건너편이었다. 전태일 동상 앞에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죽 늘어선 평화시장 상가 건물 모자나 옷가게가 주로 모여있는 사이사이로 헌책방들이 한두 개씩 자리잡고 있었다. 어떤 데를 갈까 하다 마침 눈에 띄는 곳이 있었다. 책방 이름이 고향과 가까운 곳이라 사장님이 그쪽 출신인가보다 생각했다. 처음이라 분위기도 살필겸 말 없이 길가에 나와있는 책들을 쓰윽 훑어봤다. 식물도감이나 소설, 여행책과 사전류 등 다양한 종류들이 쌓여 있었다. 안쪽을 둘러보니 대략 너댓 평 좁은 공간에 사방으로 책들이 가득했다. 다른 여자 손님과 얘기하는 걸 넌지시 들어보니 왠지 이분(사장님) 오랜 관록이 묻어났다. ‘그래 오늘은 여기서 구경좀 하자.’ 하고 말을 건넸다. “사장님 안녕하세요. 책구경 좀 할게요. 근데 저는 천천히 이것저것 살펴봐서 시간이 좀 걸려요. 여기 가방 좀 내려놓고 봐도 될지요?”
본격적으로 구경을 시작했다. 그러다 소설류들이 쌓인 안쪽 두번째 칸에 숨어있던 책 하나를 발견하고 순간 가슴이 뛰었다. <내 생의 적들>, 소설가 이인휘 선생이 10여 년 전 쓴 책이다. 안그래도 올해초 그의 신작 소설집 <폐허를 보다>를 보다 그의 예전 책을 더 볼 수 있으면 좋겠다 했는데 마침 여기서 만나다니. 뜻밖의 선물이었다. 들뜬 마음으로 계속 책장을 살펴보며 몇 권을 더 골랐다. 그러다 또 발견한 책이 <소설 목민심서>. 다산 정약용 선생을 마음으로 깊이 존경하는 터라 절로 손이 갔다. 다산에 대해서는 어린이 위인전과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다산 산문선> 등을 읽은 적이 있고 최근에도 어느 인문학 강좌 강연자료를 읽은 터였다. 다산이라면 앞으로도 두고두고 배워야할 분이니 그에 관한 책은 언제나 욕심이 난다. 그런데 순간 ‘이 많은 책을 언제 읽지?, 오늘은 몇 권만 사고 다음에 다시 올까.’ 하다 곧 ‘아니야. 다산 선생을 만났는데 뭘 망설여. 당연히 이걸 먼저 읽어야지.’ 하고 생각이 바뀌어 다섯 권을 다 가방에 넣었다. 계산을 하고보니 책 열두 권에 이만 사천원이란다. 나직이 여쭤봤다. “사장님 너무 싼 거 아니에요?” 그는 그냥 말없이 웃어보였다.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우선 1권을 꺼냈다. 그런데 잠시후 책이 나를 마구 흔들고 잡아 끌었다. 마치 “지금 당장 읽어. 꼭 그래야돼. 충분히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책이야.” 황인경 작가가 나에게 건네는 무언의 압력을 주는구나 싶을 정도였다. 아무튼 ‘가자마자 이 책부터 읽어야지.’ 싶었다. 아래 구절 때문이었다.
“내가 다산 정약용의 생애와 사상에 매료되고 심취하여 그의 일생을 추적하고 그의 사상을 규명하는 데 내 젊음을 바치기로 결심한 지 어언 10년이 넘었다.(중략) 다산에 대한 자료를 2백여 권이나 독파했고 대우재단의 다산연구발표회에 1년이나 쫓아다녔다. 다산에 대해선 털끌만한 것까지도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중략) 자료수집에 3년, 집필에 5년, 추고에 2년을 소비했다. 나의 피와 땀과 영혼의 소산이다. 마거릿 미첼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란 단 한 권의 소설을 쓰고 절필했으나 노벨상까지 탔다. 나도 그녀와 같은 비장한 각오로 이 책을 집필했다.” - <소설 목민심서>(5-7쪽) 머리말
특히 이런 말이 눈에 쏙쏙 들어왔다. “내 젊음을 바치기로 결심한 지 어언 10년이 넘었다, 다산에 대해선 털끌만한 것까지도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나의 피와 땀과 영혼의 소산이다.” 이건 정말 쉽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지 않은가. 작가의 비장한 각오가 진심 그대로 느껴졌다. 전체 다섯 권 중 이제 둘째 권 절반 정도 읽었다. 영조와 사도세자의 애증에 얽힌 이야기에 한창 빠져있다. 목표(?)는 내주 말까지 다 읽는 거다. 책 읽는 속도가 하도 느려 어떨지 모르지만 아무튼 한동안 다시 다산 선생에 빠질 것은 틀림없다. 아 이 행복한 빠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