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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청법가 가사에 문제가 있다는
마성스님의 주장 및 조계종의 결정에 대한 반론
소위 남방불교를 연구하고 귀국했다는 <마성스님>이
조계종에 건의하여,
<이광수 선생의 청법가 원본 가사를 회복시켰다는 주장>이 있어,
이에 대한 나의 반론을 제기하는 바입니다.
먼저 마성스님의 주장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일망타진님이 올려주신 <마성스님의 주장> 전문
(http://cafe.daum.net/sangullsa/6DOu/554)
덕높으신 스승님 사자좌에 오르사
사자후를 합소서 감로법을 주소서
옛인연을 잊도록 새인연을 맺도록
대자비를 베푸사 법을 설하옵소서.
이 청법가는 춘원 이광수가 짓고, 이찬우씨가 곡을 붙인 것이다. 춘원은 원래 기독교 신자였는데, 뒤에 불교로 개종하였다. 그래서 그의 초기 작품에는 기독교 사상이 많이 들어 있고, 후기 작품에는 불교사상이 저변에 깔려 있다. 특히 {원효대사}와 같은 소설은 그가 불교로 개종한 이후 터득한 불교의 심오한 사상을 담고 있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청법가는 춘원이 효봉 스님으로부터 불교를 배울 때, 재래 불가의 청법게를 본받아 지은 것이다. 필자는 청법가의 가사가 재래의 청법게보다 더 잘 다듬어진 훌륭한 글이라 믿고 있으며, 이보다 더 좋은 청법가는 앞으로도 나오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훌륭한 청법가의 가사 일부를 최근 바꿈으로써 본래의 뜻이 크게 훼손되고 있다. 원래의 가사는 "옛인연을 잊도록 새인연을 맺도록"인데, "옛인연을 이어서 새인연을 맺도록"으로 누군가가 고쳤다. 아마 표현을 부드럽게 한다고 '잊도록'을 '이어서'로 바꾼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이것은 큰 과오를 범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옛인연과 새인연이 상징하는 의미를 무시하였기 때문이다. 청법가에서 말하는 옛인연은 춘원이 과거에 믿었던 기독교를, 새인연은 새로 귀의한 불교를 상징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옛인연을 이어서'라는 것은 절대로 성립될 수 없다.
사실 청법가의 핵심 구절인 "옛인연을 잊도록 새인연을 맺도록"은 불교의 근본 사상을 현대어로 표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불교의 정의(定義)로 알려져 있는 칠불통계게(七佛通誡偈)의 내용을 살펴보면 곧바로 알 수 있다.
"제악막작(諸惡莫作) 모든 나쁜 짓을 저지르지 않으며,
중선봉행(衆善奉行) 모든 착한 일을 받들어 실천하고,
자정기의(自淨其意) 스스로 자기의 마음을 청정하게 하라.
시제불교(是諸佛敎)"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이 게송의 앞부분 제1구 제악막작(諸惡莫作)은 옛인연을, 제2구 중선봉행(衆善奉行)은 새인연에 비유할 수 있다. 이럴 경우 옛인연은 잊어야 하는 것이고, 새인연은 맺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예는 소심경(小心經)에 나오는 삼시게(三匙偈)에서도 찾을 수 있다.
"원단일체악(願斷一切惡) 일체의 악은 모두 끊기 원이며,
원수일체선(願修一切善) 일체의 선은 모두 닦기 원합니다.
원공제중생(願共諸衆生) 원컨대 모든 중생이 다함께
동성무상도(同成無上道)" 위없는 도를 함께 이루어지이다.
이 게송의 제1구 '원단일체악(願斷一切惡)' 즉 '일체의 악을 끊는다'는 것은 곧 옛인연을 끊는다는 것이고,
제 2구 '원수일체선(願修一切善)' 즉 '일체의 선을 닦는다'는 것은
새인연을 맺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옛인연을 잊도록 새인연을 맺도록"은 사정근(四正勤)의 가르침을 간단 명료하게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정근이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선(善)을 생하게 하고, 이미 일어난 선은 늘게 하며, 아직 일어나지 않은 악(惡)을 생하지 않게 하고, 이미 일어난 악은 멸하게 한다"는 것이다.
의상(義相)스님이 지은 '화엄일승발원문'에 나오는 "제악일단일체단(諸惡一斷一切斷) 제선일성일체성(諸善一成一切成)"도 옛인연과 새인연으로 비유될 수 있다.
이처럼 불교에서는 옛인연이라고 하면, 과거의 나쁜 습관·악우(惡友)·악업(惡業)· 번뇌 등을 상징하고, 새인연이라고 하면, 현재와 미래의 좋은 습관· 선우(善友)·선업(善業)·열반 등을 상징한다. 따라서 옛인연은 마땅히 끊어야 하고, 새인연은 마땅히 새로 지어야만 하는 것이다. 경전에서 나쁜 벗을 멀리 여의고, 어질고 착한 벗을 가까이 하라. |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마성스님은 이처럼 정확한 근거가 될 수도 없는 불경의 언구들을 열거하면서
청법가 가사 내용 중 "이어서"를 "잊고서"라고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창원에 계신 일망타진님(포교사)은 마성스님의 이러한 주장글과 더불어,
이러한 마성스님의 주장을 조계종에서 받아들여
청법가 가사 중 '이어서'를 '잊고서'로 결정했다고 하는 내용의 글을
저희 통영 미륵도용궁사 카페에 올려 주셨습니다.
그런데........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마성스님이 <문제의 가사>라고 지목한 바 있는
"옛 인연을 이어서 새 인연을 맺도록"이란 현재의 가사가
"옛인연을 잊고서 새인연을 맺도록" 으로 복원돼야 한다는
<마성스님의 주장>에 대해 결코 찬성할 수 없다는 점을
다음 두 가지 이유를 들어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이유 두 가지 :
첫 번째는, 비록 원작사자인 춘원 이광수 선생이
원가사를 "이어서"가 아닌 "잊고서"라고 지었다고 할지라도
마성스님의 주장처럼,
이광수 선생은 기독교를 믿다가 불교로 개종한 직후,
그러니까 그가 아직 불교를 깊이 있게 잘 모르던 시절에 작사했기 때문에,
문제의 가사처럼 내용의 일부가, 불교교리와 부합하지 못한 내용으로
잘못 지어졌을 수도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청법가를 비롯한 수많은 찬불가를 작사 작곡하시고
보급에도 앞장서오신 정운문 큰스님을 비롯한 불교음악 지도자들과
법회를 이끌어가는 대부분의 스님들과 지도자들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옛 인연을 ('잊고서'가 아닌) 이어서 새 인연을 맺도록" 이란 내용으로
그 문제의 가사를,
교리에 부합하도록 자연스럽게 고쳐서 불러왔던 것입니다.
(이것은 무지해서라기보다,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안목에 부합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한 한국불교음악회 결정문을 참고자료로 제시합니다. (참고 바랍니다)
청법가 확정안 소개 : http://cafe.daum.net/kbm55997/EMYX/235
두 번째는, 마성스님이 경전의 구절들을 예로 들어서
이것이 원작사자가 말한 인연일 것이라고 설명한
<옛인연>과 <새인연>에 대한 개념 설명이
인연에 대한 불교적 이해는 물론이거니와
일반적인 이해와도 매우 동떨어진 설명이라는 점 때문입니다.
이는 어디까지나 마성스님 자신의 자의적인 유추 해석일 뿐,
일반인들이 흔히 사용하는 보편적 개념의 인연이란 말,
즉 통념상의 인연이란 말과는 많이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불가에서, 불교적으로 사용되어지는 인연이란 말은
어떤 결과를 낳기까지의
<직접적인 원인>과 <보조적인 조건>을 의미합니다.
여기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쓰여지는 인연이란 용어는
흔히 부부, 가족, 친구 기타 등등....
주로 <사람과의 관계를 일컫는 말>로 사용되어 집니다.
이런 점에서 살펴볼 때,
마성스님 주장처럼, 청법가 작사자 춘원 이광수 선생이,
그 자신의 특수한 상황, 즉 자신의 개종 상황을 염두에 둔 채
"옛인연(기독교 믿음)을 잊고서 새인연(불교 믿음) 맺도록
덕 높은 스승에게 법을 설해 달라" 는 식으로
청법가의 노래말을 지었을 것으로 볼 수 있겠는가 하는 점입니다.
결코 그렇게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참고 : 마성스님 주장처럼, 춘원 이광수 선생이
기독교에서 불교로 개종하면서, 자신의 상황에 빗대어
청법가 가사를 그렇게 지은 것이 맞다고 한다면
이는 아직 불교에 대한 이해가 일천한 춘원 이광수 선생으로서
불교의 용언(用言)을 잘못 선택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옛인연>과 <새인연>에 대한 노래말의 이해를
춘원 선생처럼 기독교에서 불교를 개종한 그런 특수 상황이 아닌,
보다 보편적인 입장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백번 양보하여, 마성스님 주장이 맞다고 치고
기독교에서 불교로 개종한 상황에서 부르는
"옛인연을 잊고서 새인연을 맺도록~" 이란 청법가 라고 한다면
이 청법가는 <개종자를 위한 아주 특수한 상황>에서만 사용돼야 할
특수한 사례의 청법가가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옛인연>이란
불교를 알기 이전의 모든 인연들, 특히 가족, 친구..... 기타 등등
이러한 세상 인연 전체를 아우르는 말로 보는 것이
진실로 타당하지 않겠는가 라고 되묻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보는 것이
함께 구제의 길로 나가가려는 대승의 정신에 보다 부합하는
보편타당한 이해라고 판단되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옛인연들을 버리지 않고 모두 소중히 이어서,
이 모든 세상 인연들과 함께
부처님과의 새 인연, 곧 법연을 맺어갈 수 있도록
스승이시여, 법을 설하여 저희를 구제하여 주소서" 라는 의미로
청법가 내용 가운데의 문제 구절을 판단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이런 관점에서, <문제의 가사 내용>을 다시 한 번 살펴보면,
<옛인연을 잊고서 새인연을 맺도록>이 아니라
<옛인연을 이어서 새인연을 맺도록>이 맞다고
분명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 점은 특히,
대승불교적 시각으로 살펴볼 때도 명확합니다.
즉, 우리 불자들이 불교를 알지 못했던 시절
세속의 옛 인연들을 잊거나 버릴 것이 아니라,
그러한 세속의 옛 인연마저도 모두 이어서
부처님과의 거룩한 새인연으로 만들고 또한 맺어나가는 것이
진정한 보살의 서원이요, 참불자의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지금까지 불교계가 해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옛 인연을 이어서 새 인연을 맺도록...."라고 부르는 것이 옳고,
또한 그렇게 부르는 것이 교리에도 부합한다고
분명히 결론 내릴 수가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는
조계종이 독단적으로 이래라 저래라 결정할 문제도 아니거니와,
설령 그렇게 주장하고 결정한다고 해도, 대다수 불자들은
마성스님의 주장 및 조계종의 결정에 대해 따르지 않을 것으로 봅니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요즘 조계종 참 문제가 많아 보입니다. (수준이 영~그렇습니다.)
한국불교 장자 종단이라고 일컬어지는 조계종의 행보가
불자들이 걱정하지 않도록 안정되고 든든해 졌으면 좋겠습니다.
소위 남방불교를 연구하고 귀국했다는 마성스님의
청법가 가사 일부를 변경해야 한다는 주장,
그리고 이 주장을 받아들인 조계종의 독단적 결정은
즉각 철회되어 마땅합니다.
청법가 확정 참고자료 보실 분 클릭 : http://cafe.daum.net/kbm55997/EMYX/235
2009-05-24(일)09:00
통영 미륵도 용궁사
주지 이협우 월명종민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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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법가(請法歌) 가사 보기
1절
덕 높으신 스승님 사자좌에 오르사
사자후를 합소서 감로법을 주소서
옛 인연을 이어서 새 인연을 맺도록
대자비를 베푸사 법을 설하옵소서
2절
덕 높으신 법사님 대법좌에 오르사
법을 설하옵소서 맘을 씻어 주소서
모두 발심하여서 같이 성불하도록
대원력을 펴시사 길을 인도하소서
3절
법 높으신 스승님 큰법좌에 오르사
법을 설하옵소서 맘을 씻어 주소서
묵은 업장 멸하고 참된 나를 찾도록
대자비를 베푸사 법을 설하옵소서
불교에서 설법을 듣고자 하면,
먼저 스승께 예배한 후 간절한 마음으로 '법을 설해 주십시오'라고
세 번 청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다.
법사는 제자 및 신도들의 청법(請法)을 받고서야 비로소 설법을 한다.
이러한 청법의례(請法儀禮)는
그 어떤 다른 종교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불교 고유의 독특한 전통이다.
이러한 전통은
불본행집경 중 <범천권청(梵天勸請)> 부분에서 보듯이,
부처님이 붓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이룬 직후,
세상을 위해 이 진리를 설할 것인가를 두고 망설이고 있을 때,
하늘의 범천(梵天)의 천주가 부처님 발아래 예배드리며
세상을 위해 법륜을 굴려주시기기를 간청하였기 때문에
비로소 법을 설하기로 결심한 데서 유래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청법의 역사와 전통은
오늘의 한국불교에서도 소중하게 지켜져 오고 있다.
현재 일반법회에서 실시되고 있는 청법의식은
옛날 범패 방식(請法偈)과
현대 찬불가 방식(請法歌)의 두 가지로 준행되고 있다.
이 두 가지 가운데서
요즘은 후자의 청법가(請法歌)를 위주로 하는 실정이다.
청법가는 앞에서 소개했거니와
재래식 청법게(請法偈)의 문안은 다음과 같다.
차경심심의(此經甚深意) 이 경의 깊고 깊은 뜻을
대중심갈앙(大衆心渴仰) 대중들은 목마르게 갈구합니다.
유원대법사(唯願大法師) 오직 원컨대 대법사님께서는
광위중생설(廣爲衆生說) 중생들을 위해 널리 법을 설하여 주소서
첫댓글 ?
일망타진님! 올린 게시물을 삭제한 점은 사과드립니다.(잘 안 보여서 그랬습니다. 그래서 마성스님의 주장을 충실히 담은 내용을 상불사 카페에서 복사하여, 반론 앞부분에 다시 올려놨습니다.죄송!) 그리구요, 관점과 견해가 다른데서 펼치는 비판을, 근거없이 주장하는 비방과 같은 개념으로 바라보는 데는 동의할 수가 없다는 점을 일망타진님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일망타진님, 너그러이 이해하시고 조금만 더 마음을 열고 청법가 가사를 묵상해보시고 판단해 주시기 바랍니다..... 종교의 발전은 끊임없는 논쟁, 즉 주장이 있으면 그에 대한 수용과 반론, 그리고 이해를 통해 이뤄져 왔고, 또 앞으로도 그러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
글쎄요. 타인이 올린 게시물을 삭제하면서 개인적인 주장만 하시는 모습은 좀 그렇습니다. 그리고 한참동안이나 스님도 적을 두었던 종단을 비방하시는 모습도 스님답지 못하신 것 같구요. 언짢다면 이해바랍니다. 저로서는 올린게시물이 남을 비방한 글도, 만인을 눈 어둡게 한 글도 아닌데 삭제되어 없으니 영...
저도 리허브 스님 말씀이 옳다고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나쁜 인연은 다 버리고 좋은 인연만을 만나야 옳은가요? 악연을 선연으로 바꾸는 일이 우리 불자가 해야할 행이 아닌지요?_()_
한국불교의 맹점이 스님이나 재가자나 확실한 근거에 의해 법을 전달하지 않고 개인의 판단에 의해 그냥 법을 전하는 것이죠. 마성스님은 찬불가 초기 보급을위해 전국을 누비신 스님이고 그 때 보급하시든 내용이 잘못 되었기에 잘못된 자료를 추적하여 확실한 근거를 갖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좀 있으면 논문도 발표하실 계획이라 하고요.
이광수 선생의 원작을 복원해야 한다는 점에는 동의합니다. 왜냐면 원작자의 가사를 편의대로 바꿨기 때문이죠. 하지만 청법가는 법사에게 바치는 노래인 만큼 내용과 곡이 어울려야 하고 곡조도 불교의 정서와 어울려야 하는데 이 노래는 전혀 아닙니다. 참으로 부르기가 어렵고 편하게 부를 수 있는 노래가 못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고 봅니다.
찬불가에는 물론 원작자가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보다는 역사를 거쳐오면서 수없이 다듬어지고 변행되어온 민요(아리랑)처럼 많은 불자들이 자연스럽게 유통시켜온, 또한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 노래가 바로 찬불가라는 점에 우리 모두 주목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의 주장이 반드시 옳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다만 하나의 주장이고 반론임을....
먼저 작곡하는 분들이 제대로 해야 하고 가사도 청법의 의지를 담아 누구든지 쉽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옛 인연은 옛날 일이라는 말이고 새인연은 새로운 일을 의미한다고 할때, 옛일을 잊어야 하는지 아니면 옛일을 계속 이어가면서 새일을 도모해야 하는 것인지... 이광수 작사자의 의도는 옛일은 잊어야 한다고 생각한듯 합니다. 왜냐면 옛일은 예전의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었기에... 옛 믿음을 버리고 새 믿음을 가져야 하기에... 새 인연은 새로운 발심으로 새로운 삶을 열어가자는 뜻이었다고 봅니다. 옛 인연이 무엇인지에 따라 가사의 내용이 다르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종민 사형님 주장대로 고쳐서 부른 '옛인연을 이어서...'라고 한다면 새인연을 맺어 옛인연을 완성하고자 하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옛인연은 낡은 믿음을 버리고 새로운 마음으로 부처님의 법에 기울여야 한다는 부처님의 설법과 동떨어진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쨋거나 저는 청법가는 의식의 노래로서 완성도가 떨어지는 곡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예 사용하지 않는 편이 나을 수도 있습니다. 그냥 간절하게 청법의 게송으로 대신하거나 사회자의 청법말씀으로 대신하고 법사께 삼배의 예를 갖추는 편이 낳다고 봅니다.
<옛인연=낡은 믿음>이란 근거는 무엇인지요?...나의 관점으로는, 부처님 법을 믿기 이전의 모든 인연(가족, 세상 기타 등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만....만약 낡은 믿음을 의미하는 것이 맞다면, 춘원 이광수 선생이 옛인연이란 모호한 표현보다는 "옛 믿음을 잊고서 새 믿음을 갖도록....." 이렇게 분명한 표현을 썼을 것으로 보여집니다.
옛인연을 이어서가 변모된 과정 : 맨처음은 옛인연을 '잊도록'에서 어느사찰 법요집에서 잊도록이 '잇도록'으로 다시 그것이 불어기 쉽도록 '이서서'로 바뀐 것을 추적해서 자료를 갖고 있답니다. 부처님법과 관련된 것은 근거없이 변화되면 어서 본래자리에 앉혀야 된다고 판단합니다.
여기서 엣인연은 춘원 이광수선생께서 믿었던 기독교를 얘기하고요. 이는 다시 칠불통계게의 제악막작의 제악을 잊자는 의미이고, 새인연은 춘원선생님이 효봉큰스님을 인연맺어 큰스님과 맺은 불법을 말하고 중선봉행을 의미 한답니다.
또 한가지는 청법가를 받는 위치에 있는 법사의 입장에서 보면 청법가는 상당히 부담감을 느끼게 하고 있습니다. 덕 높으신 스승님 사자좌에 오르사... 이 구절을 듣는 순간 자신감이나 부족함을 느껴 설법사의 열정을 식게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 법을 청중에게 맞춰 해설하고 안내하는 것이 설법이어야 하는데 부처님처럼 진리를 선포하는 입장에 서게 하니 평범한 법사에게는 마음 편한 노래일 수가 없습니다. 옛인연을 잊든 아니면 이어가든 이 참에 청법가 없애기 운동을 전개하면 어떨지... 황당한 주장일 수도 있는데, 청법가 없이 법사에게 간단한 예를 갖추는 것이 나을 듯합니다.
공감되는 지적입니다.
노래는 마음이 정화되고 행복해질 수 있도록 진심을 담아 부를 수 있는 것이어야 하고, 찬불가 역시 그런 점에 하나 더하여, 불교 교리에 부합하여야 하고 불교를 더욱 아름답게. 더욱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마음 속으로 전파하고 또한 그 마음 속 깊이 다가갈 수 있는 내용으로 작사 작곡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봅니다.
제일 좋은 방법은 춘원 이광수 선생을 무덤에서 불러내어, 왜 그렇게 작사했는지를 물어보는 것이겠죠? 하지만 그럴 수가 없으니, <민심이 천심>이란 명언도 있듯이, <문법도 세월따라 변하듯이>, 불교 믿는 대부분의 국민들이 <자연스럽게 불러온 데로> 인정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잊고서...."와 "이어서...."를 어떻게 볼 것인가? 복잡하게 생각지 말고 간단히 봅시다. 세상은 외면한 채 혼자 득도를 향해 나아가는 소승불교와는 달리, <함께 부처님께로 나아가는> 대승불교 정신이 "잊고서"가 아닌, "이어서" 속에 들어 있지 않겠아요?....!!!
스님의 주장이 이해가 갑니다. 원문이 '잊어서'인 것은 분명하나 현재 모든 이들이 바꿔 부르는 만큼 현재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낳겠습니다. 그러나 옛인연에 대한 정확한 규정이 필요할 듯합니다. 스님의 주장대로라면 '이어서'도 문제가 없겠습니다.
마성스님의 주장을 충실히 대변하고 계신 일망타진님! 참으로 답답하십니다. 만약 청법가를 춘원 이광수의 기독교에서 불교로의 개종 상황(옛인연=기독교, 새인연=불교라는 식으로)에 국한 시켜서 해석하고 만다면, 그것은 이광수 혼자만의 청법가요, 기독교 믿다가 불교로 개종한 사람들만의 청법가이지 어찌 그것이 전체 불교인의 청법가가 될 수 있겠어요? 그럴 수는 없는 겁니다.
대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보면 부처님의 원음은 부처님의 원음대로 보존 전해야 되고 부처님과 관련된 찬불가 또한 원음으로 보전되어 전해져야 하기때문입니다. 감히 부처님 제자라면 그 누가 함부로 그 원음을 바꿔치기 할 수야 없다는 맘 변함없기 때문입니다. 세속의 민요 등과 비교할 수야 없지 않을까 합니다만...
불교를 깊이 있게 잘 모르는 신자입니다.저의 생각은, 찬불가 내지 이 청법가의 작사와 작곡자가 누군가 또는 이 작곡을 하신 배경이나 곡절이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부를때 그 노랫말의 의미가 가슴을 적시는 감동을 주고 마음을 정화시켜주는 가사에 더 비중을 줍니다. 아마,청법가의 "옛인연을 잊고서 새 인연을 맺도록" 이러면 인쇄오류라고 생각 할겁니다.( 말이 이해가 안되기 때문에)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인연을 중요시하는 불교에서 옛인연을 잊고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하늘님의 말이 저또한 맞다고 생각합니다 춘원 이광수선생의 개인 감정을 모든불자들이 동화되어 옳다 라는 말은 적합치않습니다 청법가의 옛인연을 잊는다는것은 단절이라 생각합니다 스쳐가는 인연도 중요시여겨야 진정 진실됨이 아닐련지요 또한 바른사회가된다고생각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옛인연을 이어서...' 이렇게 부르는 지금의 청법가는 우리가 지금까지 맺어온 어떤 인연도 다 나의 것이니 ..라고 생각이 되어서 저도 별로 거부감이 없다고 생각이 드는군요. '그리고 덕 높으신 스승님' 이 부분도 저는 그렇습니다 어찌 되엇던 불자들에게 부처님법을 전해주시는 순간은 그 분을 덕높게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옛날 우리 선조들은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고 했습니다.(상좌시) 존경의 예를 표하는것이란 생각입니다. 당연히 불자들은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구요. 부처님 법을 전수받는 한은 그분이 설령 부족한 부분이 있다고 해도 최고의 스승이란 생각으로 배워야 한다고 봅니다.
()()()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